해동검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해동검도는 1970년대 초 김정호와 나한일이 김창식, 박대양에게 심검도와 기천을 배운 것을 시작으로, 무예도보통지를 참고하여 검술 체계를 세워 1984년 '해동검도'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 무술이다. 대한해동검도협회와 한국해동검도협회로 분리되어 운영되며, 진검 베기 기술을 강조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일본 검술의 영향을 받았다는 비판과 정통성 논란이 있으며, 최태민과의 연관성으로 인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검술 - 거합도
거합도는 칼을 뽑아 다시 넣는 기술을 중심으로 "항상 준비하고 즉시 맞춘다"는 의미를 담은 일본 무도로, 정신 수양과 즉각적인 반응 능력 향상을 목표로 하며, 형 위주의 비대련 방식으로 수련된다. - 검술 - 에스크리마
에스크리마는 필리핀 전통 무술로, 스페인어 'esgrima'에서 파생되었으며 칼리라고도 불리며, 원주민 전투 기술과 스페인 펜싱의 영향을 받아 발전하여 다양한 무기와 맨손 격투술을 사용하고, 스포츠 및 자기 방어, 학교 체육 교육에도 활용된다. - 한국의 무술 - 태권도
태권도는 한국의 발차기 중심 무술이자 스포츠로, 1950년대 여러 무술 도장 통합 과정에서 명칭이 확립되었으며, 국제 태권도 연맹(ITF)과 세계 태권도 연맹(WT)으로 발전하여 WT 태권도는 올림픽 종목, ITF 태권도는 공산권 국가에 보급되며 세계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 한국의 무술 - 궁도
궁도는 활과 화살을 사용하여 과녁을 맞히는 한국의 전통 무예이자 스포츠이며, 신석기 시대부터 사용되어 고려와 조선 시대 무과 시험에 포함되었고, 현재는 대한궁도협회를 중심으로 전국 활터에서 계승되고 있다. - 기원별 무술 - 씨름
씨름은 두 사람이 샅바를 잡고 힘과 기술을 겨루어 상대를 넘어뜨리는 한국의 전통 스포츠이자 민속놀이로, 고구려 고분 벽화에도 나타나 있으며 남북한 공동으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 등재되었고 무제한급 우승자는 '천하장사'로 불린다. - 기원별 무술 - 종합격투기
종합격투기는 타격과 그래플링 기술을 모두 활용하는 격투 스포츠로, 고대 판크라티온 등에서 기원하여 발리 투두, 프로레슬링 등을 거쳐 발전했으며, UFC 출범 후 대중적 인기를 얻어 현재는 통합 규칙을 따르는 UFC, 벨라토르 MMA, 원 챔피언십 등이 주요 단체로 활동하고 있다.
해동검도 | |
---|---|
기본 정보 | |
![]() | |
창시자 | 김정호 |
연원 | 한국 |
스포츠 | 검도 |
협회 | |
주요 협회 | 세계해동검도연맹 |
특징 | |
중점 기술 | 검술, 베기, 차기 |
유사 무술 | 검도 대한검도 일본 검술 중국 검술 군도 환도 |
역사 | |
창시 연도 | 1982년 |
2. 역사
서라벌고등학교 동창생인 김정호(현 세계해동검도연맹 총재)와 나한일(배우, 현 한국해동검도협회 총재)는 1970년대 초 김창식에게 심검도를, 1970년대 말에는 박대양에게 기천을 함께 배웠다. 이후 무예도보통지를 접하고 검술 체계를 세운 두 사람은 1982년 서초동에 영화사 후원으로 도장을 열어 검술을 가르쳤다. 1984년 도장 수련생이던 최태민 목사의 제안으로 '해동검도'라는 명칭을 정식으로 사용하게 되었고, 같은 해 최초의 해동검도 교본인 '해동검법개론'이 발간되었다.
대한검도회는 방송 등에서 나한일이 검도 7단이라고 소개하는 것에 대해 사이비 검도 교습소 운영 및 검도 7단 사칭으로 고소하였다. 그러나 나한일은 해동검도의 유단자로서 대한검도회의 단증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하여 무혐의 처분을 받았고, 이는 오히려 해동검도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2. 1. 대한해동검도협회와 한국해동검도협회의 분리
서라벌고등학교 동창생인 김정호(현 세계해동검도연맹 총재)와 나한일(배우, 현 한국해동검도협회 총재)은 1989년 대한해동검도협회(대표: 김형진, 전무이사: 김정호, 연구소장: 나한일)를 결성하였다. 이 무렵 나한일이 주연으로 출연한 KBS 드라마 《무풍지대》가 큰 인기를 끌면서 해동검도도 대중에게 관심을 받기 시작하였다.이후 협회 운영에 대한 이견으로 1991년 나한일은 '해동심검도협회'를 새로 조직했다가 1992년 다시 '한국해동검도협회'를 결성하여 총재로 취임한다. 1996년 대한해동검도협회는 국제조직인 세계해동검도연맹(총재: 김정호)를 출범시켰다. 현재는 두 단체 이외에도 중소규모의 다양한 단체들이 해동검도의 이름으로 도장을 운영하고 있다.
2. 2. 일본 검술의 영향
해동검도는 무예도보통지를 기반으로 체계를 세웠다고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일본 검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진검 베기 기술은 일본의 영향을 크게 받았는데, 대한도법협회 이영식과의 교류를 통해 그의 제자들이 해동검도에 합류하면서 베기 기술이 발전했다.이영식은 나카무라 다이사부로의 책을 통해 독학으로 검술을 연구하고, 직접 만나 가르침을 받은 인물이다. 그의 베기 기법은 호산류와 나카무라 다이사부로가 창시한 나카무라류 발도도를 원류로 한다. 이영식에게서 베기를 배운 노대래, 김은정 등이 해동검도에 영향을 주면서, 해동검도의 짚단 베기는 일본식 시참(試斬일본어,ためしぎり)의 형태를 띄게 되었다.
문제는 나카무라 다이사부로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 토야마 육군병학교의 군도(軍刀) 사용법을 기반으로 한 거합도(후대에 토야마류(戸山流)로 불림)를 가르치던 인물이라는 점이다. 나카무라 다이사부로는 중일전쟁 당시 난징 대학살에 가담하여 중국 민간인을 대상으로 시참하며 자신의 토야마류 실전 베기 기법을 닦아 나카무라류 팔방베기 발도도(中村流八方切り抜刀道)를 창시했다.
결과적으로, 한국 전통 검도를 표방하며 민족정신을 내세우는 해동검도가 실제로는 일본 제국 시대 검술의 정수라 할 수 있는 토야마류와 나카무라류의 진검 베기 기술을 흡수한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다.
현재 해동검도는 거합을 포함하거나, 프랑스 지팡이술인 깐느를 배워오거나, 스포츠 찬바라를 도입하는 등 다양한 무술을 참고하여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이는 긍정적인 변화로 볼 수 있지만, 초기 해동검도 콘텐츠 자체가 부실했다는 것을 반증하기도 한다.
3. 비판과 논란
해동검도는 여러 비판과 논란에 직면해 있다. 초기에는 명칭과 기원에 대한 논란이 있었고, 대한검도회와의 갈등도 있었다.
해동검도계 내의 법정공방을 통해 밝혀진 역사에 따르면, 1984년 최초의 해동검도 교본인 '해동검법개론'이 발간되었고, 1989년 대한해동검도협회가 결성되었다. 나한일이 검도 7단이라고 방송에서 소개되자, 대한검도회는 그를 사이비 검도 교습소 운영 및 검도 7단 사칭으로 고소했다. 그러나 나한일은 해동검도의 유단자로서 대한검도회의 단증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하여 무혐의를 받았다. 이는 오히려 해동검도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현재 해동검도는 진검으로 대나무나 짚단을 베는 것을 죽도를 사용하는 검도와의 차별점으로 내세운다. 초창기 해동검도의 베기 기술은 형편없었으나, 대한도법협회 이영식과의 교류를 통해 발전했다. 이영식은 호산류와 나카무라류 발도도를 원류로 하는 베기 기법을 연구했으며, 그에게서 배운 사람들이 해동검도에 영향을 주었다. 이로 인해 해동검도의 짚단 베기는 일본식 시참(試斬), 타메시기리(試し切り)의 형태를 따라하게 되었다.
문제는 나카무라 다이사부로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 토야마 육군병학교의 군도 사용법을 기반으로 한 거합도(후대에 토야마류(戸山流)로 불림)를 가르치던 인물이라는 점이다. 토야마류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난징 대학살에 사용된 일본군 검술이며, 나카무라 다이사부로는 중국 민간인을 대상으로 자신의 토야마류 실전 베기 기법을 닦아 나카무라류 팔방베기 발도도(中村流八方切り抜刀道)를 창시했다. 한반도 전통 검도를 자칭하며 민족정신을 명분으로 내세우는 해동검도가 실제로는 대일본제국 시대 검술의 정수인 토야마류, 나카무라류의 진검 베기 기술을 흡수한 셈이다.
현재 해동검도는 거합을 포함하거나, 프랑스 지팡이술인 깐느, 스포츠 찬바라를 도입하기도 하며, 나카무라류나 발도도 용성검 등과 교류하기도 한다. 이는 부족한 콘텐츠와 검리를 보완하기 위한 노력으로 볼 수 있지만, 초기 해동검도 콘텐츠의 부실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3. 1. 정통성 논란
서라벌고등학교 동창생인 김정호(현 세계해동검도연맹 총재)와 나한일(배우, 현 한국해동검도협회 총재)은 1970년대 초 김창식에게 심검도를, 1970년대 말에는 박대양에게 기천을 함께 배웠다. 이후 무예도보통지를 접하고 검술 체계를 세운 두 사람은 1982년 서초동에 도장을 열어 검술을 가르쳤다. 1984년 도장 수련생이던 최태민 목사의 제안으로 '해동검도'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1989년 대한해동검도협회가 결성되고, 나한일이 출연한 KBS 드라마 《무풍지대》가 인기를 끌면서 해동검도도 대중에게 알려졌다. 대한검도회는 나한일을 사이비 검도 교습소 운영 및 검도 7단 사칭으로 고소했으나, 나한일은 해동검도의 유단자로서 대한검도회의 단증과는 무관하다고 주장하여 무혐의를 받았다. 이는 오히려 해동검도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협회 운영에 대한 이견으로 나한일은 한국해동검도협회를 결성하여 총재로 취임했다. 1996년 대한해동검도협회는 세계해동검도연맹(총재: 김정호)을 출범시켰다. 현재는 두 단체 외에도 다양한 단체들이 해동검도라는 이름으로 도장을 운영하고 있다.
해동검도는 진검 대나무, 짚단 베기를 많이 하는 것으로 죽도 위주 검도와 차별성을 내세운다. 해동검도의 베기 기술은 대한도법협회 이영식과의 교류를 통해 발전했다. 이영식은 호산류와 나카무라류 발도도를 원류로 하는 베기 기법을 연구했으며, 그에게서 배운 사람들이 해동검도에 영향을 주었다. 이로 인해 해동검도의 짚단 베기는 일본식 시참, 타메시리의 형태를 따라하게 되었다.
문제는 나카무라 다이사부로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 육군 토야마 육군병학교의 군도 사용법을 기반으로 한 거합도(후대에 토야마류(戸山流)로 불림)를 가르치던 인물이라는 점이다. 나카무라 다이사부로는 중일전쟁 중 난징 대학살에 가담하여 중국 민간인을 대상으로 실전 베기 기법을 닦아 나카무라류 팔방베기 발도도(中村流八方切り抜刀道)를 창시했다. 한반도 전통 검도를 자칭하며 민족정신을 명분으로 내세우는 해동검도가 실제로는 대일본제국 시대 검술의 정수인 토야마류, 나카무라류의 진검 베기 기술을 흡수한 셈이다.
현재 해동검도는 거합을 포함하거나, 프랑스 지팡이술인 깐느, 스포츠 찬바라를 도입하기도 하며, 나카무라류나 발도도 용성검 등과 교류하기도 한다. 이는 부족한 콘텐츠와 검리를 보완하기 위한 노력으로 볼 수 있지만, 초기 해동검도 콘텐츠의 부실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3. 2. 최태민과의 연관성
1984년 도장 수련생이던 최태민 목사의 제안으로 '해동검도'라는 명칭을 정식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