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이젠몬의 난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헤이젠몬의 난은 1293년 가마쿠라 막부 시대에 일어난 사건으로, 호조 사다토키가 가마쿠라 대지진의 혼란을 틈타 다이라노 요리쓰나를 공격하여 자결하게 하고 그의 일족을 몰살시킨 정변이다. 이 사건은 도쿠소 전제 정치를 강화하고 사다토키 측근을 중용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연호가 조오에서 에이닌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다이라노 요리쓰나의 적남이었던 다이라노 무네쓰나가 아버지와 불화하여 사다토키에게 참소한 것이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293년 일본 - 가마쿠라 대지진
1293년 가마쿠라 시대에 발생한 가마쿠라 대지진은 가마쿠라에 큰 피해를 입히고 헤이젠몬의 난 발생의 계기가 되었으며, 쓰나미 흔적 발견과 함께 사가미 트로프 거대 지진 및 고즈-마쓰다 단층대 연동 지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 가마쿠라 시대의 전투 - 조큐의 난
조큐의 난은 1221년 고토바 상황이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하려다 실패하여 조정이 막부에 종속된 사건이다. - 가마쿠라 시대의 전투 - 겐닌의 난
겐닌의 난은 1201년 가마쿠라 막부를 전복하려는 조 씨 가문의 반란으로, 조 나가모치의 교토 습격이 실패하고 저항군이 진압되었으며, 한가쿠 고젠의 용맹함이 알려진 사건이다. - 가마쿠라 시대의 사건 - 조큐의 난
조큐의 난은 1221년 고토바 상황이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하려다 실패하여 조정이 막부에 종속된 사건이다. - 가마쿠라 시대의 사건 - 겐닌의 난
겐닌의 난은 1201년 가마쿠라 막부를 전복하려는 조 씨 가문의 반란으로, 조 나가모치의 교토 습격이 실패하고 저항군이 진압되었으며, 한가쿠 고젠의 용맹함이 알려진 사건이다.
헤이젠몬의 난 | |
---|---|
개요 | |
명칭 | 평젠몬의 난 |
로마자 표기 | Heizenmon no ran |
발생 위치 | 일본 교토 |
발생 시기 | 오에이 23년 (1416년) |
날짜 | 10월 5일 ~ 10월 28일 |
원인 | 아시카가 모치우지의 가마쿠라 공방의 무로마치 막부에 대한 반란 계획 발각 및 무장 봉기 |
결과 | 아시카가 모치우지의 항복, 이마가와 노리자네의 처벌 |
교전 세력 | 아시카가 모치우지 군 이마가와 노리자네 군 |
지휘관 | 우에스기 젠슈 이마가와 노리자네 |
주요 인물 | 아시카가 모치우지 아시카가 요시모치 |
상세 정보 | |
배경 | 무로마치 시대 전기, 가마쿠라 공방 아시카가 모치우지와 간토 간레이 우에스기 우지사다 간의 대립 심화 |
발발 원인 | 우에스기 우지사다의 모함으로 아시카가 모치우지가 우에스기 젠슈를 숙청하려 하자, 우에스기 젠슈가 거병 |
주요 전투 | 가마쿠라 공방전 무사시 국에서의 전투 |
영향 | 가마쿠라 공방의 권위 실추, 간토 지방의 혼란 가중, 에이쿄의 난 발발의 간접적 원인 |
관련 인물 | 우에스기 우지사다 하타케야마 미쓰이에 오다 모치토키 |
기타 | 이 난으로 인해 우에스기 젠슈는 몰락하고, 아시카가 모치우지는 막부에 의해 처벌받음. |
2. 배경
도키무네 사후, 그의 아들 사다토키가 9대 싯켄이 되면서 도쿠소 가문의 집사였던 다이라노 요리쓰나의 권력이 강화되었다. 1285년 시모쓰키 소동으로 정적 아다치 야스모리를 제거한 요리쓰나는 도쿠소 전제 정치의 기반을 다졌다.[2] 그러나 요리쓰나의 권력 강화는 사다토키에게 위협으로 작용했고, 결국 헤이젠몬의 난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2. 1. 시모쓰키 소동
고안 8년(1285년), 도쿠소 가문의 집사인 다이라노 요리쓰나는 정치 노선에서 대립하던 유력 고케닌 아다치 야스모리와 그 일족, 그리고 야스모리 파의 고케닌을 숙청하였다.[2] 이 사건을 시모쓰키 소동이라 한다. 이 사건으로 요리쓰나의 권력이 강화되었고, 도쿠소 전제 정치의 기반이 마련되었다.2. 2. 도쿠소 전제 정치 강화
호조 도키무네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사다토키가 9대 집권이 된 이듬해인 1285년, 다이라노 요리쓰나는 시모츠키 소동으로 아다치 야스모리와 그 일족 등을 제거했다. 이후 요리쓰나는 추가 법령을 자주 발표하는 등 절차를 중시하는 정치를 펼쳤으나, 1287년 고레야스 친왕이 쇼군이 된 이후에는 정치 태도를 바꾸어 도쿠소 전제 정치에 매진했다.[2] 요리쓰나는 공포 정치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였다.3. 전개
도키무네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사다토키가 9대 싯켄이 된 이듬해인 1285년, 다이라노 요리쓰나는 아다치 야스모리 등을 시모쓰키 소동으로 토벌하였다. 이후 요리쓰나는 공포정치를 펼치며 도쿠소 전제 체제를 구축하였으나, 1293년 가마쿠라 대지진의 혼란을 틈타 사다토키는 요리쓰나의 저택을 습격했다. 요리쓰나는 자결하고, 그의 아들 이이누마 모로무네를 비롯한 일족 93명이 사망했다. 이 과정에서 사다토키의 딸 두 명도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다.[2]
이 정변과 그 전에 일어났던 가마쿠라 대지진을 계기로 연호는 에이닌으로 바뀌었다. 이후 요리쓰나 일족 등 미우치비토의 세력은 잠시 후퇴하였고 사다토키의 전제정치가 시작되었다. 호조 아키토키나 아다치 씨 등 과거 시모쓰키 소동으로 몰락했던 세력들도 차츰 막부의 중추로 복귀하는 한편으로 야노 도모카게 등 사다토키와 가까웠던 법조 관료들이 중용되었다. 또한 요리쓰나 일족으로써 요리쓰나의 동생(또는 종형제)으로 알려진 나가사키 미쓰쓰나도 불려가 사다토키에게 중용되었다.
3. 1. 다이라노 요리쓰나의 죽음
1293년 4월 12일 가마쿠라 대지진의 혼란을 틈타, 10일 뒤인 22일 사다토키는 가마쿠라·교시가야에 있는 요리쓰나의 저택을 습격하라는 명을 내렸다. 오전 3시경, 명령을 받은 무사 시치로 등이 저택에 들이닥쳐 불을 지르고 전투를 벌였다. 요리쓰나는 자결했고, 차남 이이누마 모로무네도 자결하였다. 남겨진 일족 93명도 모두 사망했고, 혼란 속에서 사다토키의 딸 2명도 사망했다.[2] 시모츠키 소동의 영향이 심대했던 것에 비해, 헤이젠몬의 난은 허무하게 끝났다.3. 2. 다이라노 무네쓰나의 참소
다이라노 요리쓰나의 적자 다이라노 무네쓰나가 아버지의 반역 음모를 사다토키에게 밀고했다는 설이 있다. 『호랴쿠칸키』에 따르면, 무네쓰나는 충심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아버지의 악행을 슬퍼하며 사다토키에게 몰래 호소했다고 한다.[3] 무네쓰나는 난 이후 사도 국으로 유배되었지만, 소환된 후 나이칸료가 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다시 가즈사 국으로 유배되었다.4. 결과
헤이젠몬의 난 이후 다이라노 요리쓰나 일족 등 미우치비토(御内人) 세력은 일시적으로 후퇴하였고, 호조 사다토키의 전제 정치가 시작되었다. 시모쓰키 소동으로 몰락했던 가나자와 아키토키나 아다치 씨 등이 막부의 중추로 복귀하는 한편, 야노 도모카게(矢野倫景) 등 사다토키와 가까운 법조 관료들이 중용되었다. 요리쓰나의 동생(또는 종형제)으로 알려진 나가사키 미쓰쓰나도 사다토키에게 계속 중용되었다.[7]
무로마치 시대의 선승 기도 슈신은 가마쿠라에서 호조 씨의 영지였던 아타미 온천을 방문했을 때, 현지 승려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자신의 일기에 기록했다. "옛날, 헤이 사에몬 요리쓰나(平左衛門頼綱)가 셀 수도 없을 정도의 학살을 행하였다. 이곳에 그의 저택이 있어, 그가 살해되던 날 건물이 땅속으로 꺼져 들어갔다. 사람들은 모두 산 채로 지옥에 떨어진 것이라 하였다. 그러한 이유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헤이 사에몬 지옥(平左衛門地獄)이라 부르고 있다." 이 이야기는 다이라노 요리쓰나 사후 80년 뒤까지 그의 공포정치의 기억이 또렷하게 남아 있었음을 보여준다.
4. 1. 도쿠소 전제 정치 강화
사다토키는 자신의 유모부이기도 한 다이라노 요리쓰나의 지원을 받아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도쿠소 전제 체제를 구축했지만, 요리쓰나의 권세에 불안을 느꼈다. 1293년 헤이젠몬의 난으로 요리쓰나 세력이 몰락하면서 사다토키의 전제 정치가 시작되었다. 가나자와 아키토키나 아다치 씨 등 시모쓰키 소동으로 몰락했던 세력들이 점차 막부 중추에 복귀했으며, 야노 린케이 등 사다토키와 가까운 법조 관료도 중용되었다.[2] 요리쓰나의 일족 중 요리쓰나의 동생(조카나 사촌이라는 설도 있음) 나가사키 미쓰쓰나는 계속 사다토키에게 중용되었다. 무네쓰나는 난 후에 사도 국으로 유배되었지만, 소환된 후 나이칸료가 되었다. 그러나 나중에 다시 가즈사 국으로 배류되었다.4. 2. 사다토키 측근 중용
사다토키는 야노 린케이 등 자신의 측근 법조 관료들을 중용하였다. 시모츠키 소동으로 몰락했던 가나자와 아키토키나 아다치 씨 등도 점차 막부 중추에 복귀하였다. 한편, 요리쓰나의 일족 중 요리쓰나의 동생(혹은 조카나 사촌)으로 여겨지는 나가사키 미쓰쓰나는 계속 사다토키에게 중용되었다. 요리쓰나의 적자였던 무네쓰나는 난 후에 사도 국으로 유배되었다가 소환되어 나이칸료가 되었으나, 후에 다시 가즈사 국으로 유배되었다.[3]5. 평가 및 영향
헤이젠몬의 난은 가마쿠라 막부 내 권력 투쟁의 결과이자, 도쿠소 전제 정치 강화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무로마치 시대의 선승 기도 슈신은 자신의 일기에 다이라노 요리쓰나의 학살을 언급하며 그의 공포 정치를 비판했는데, 이는 요리쓰나 사후 80년 뒤까지 그의 공포정치가 사람들에게 또렷하게 기억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 사건은 연호가 조오에서 에이닌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5. 1. 역사적 평가
헤이젠몬의 난은 가마쿠라 막부 권력 투쟁의 대표적인 사례로 평가된다. 시모츠키 소동에 비해 헤이젠몬의 난은 허무하게 끝났으며[2], 이 정변을 계기로 쇼오 연호는 에이닌으로 개원되었다.오기마치산조 사네미는 자신의 일기 『사네미 경기』에 요리쓰나가 집정하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했으며, 이는 그의 자만 때문이라고 기록했다.[4]
이후 요리쓰나 일족 등 고나이닌의 세력은 일시 후퇴하고, 사다토키의 전제 정치가 시작되었다. 시모츠키 소동으로 몰락했던 가나자와 아키토키나 아다치 씨 등도 점차 막부 중추에 복귀했다.
참조
[1]
문서
現在の高校日本史の教科書・資料集には平頼綱の乱と表記されている。
[2]
서적
国史大辞典
吉川弘文館
[3]
문서
親玄僧正日記
1293-04-22
[4]
문서
実躬卿記
1293-04-26
[5]
서적
日記を中世に読む
吉川弘文館
[6]
문서
오늘날의 일본 고등학교 일본사 교과서 ・ 자료집에는 '''다이라노 요리쓰나의 난'''('''平頼綱の乱''')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7]
문서
이듬해 22일이 헤이젠몬의 난 1주기였다.
[8]
서적
日本中世の権力と寺院
吉川弘文館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