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조 사다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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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조 사다토키는 1272년에 태어나 1311년에 사망한 가마쿠라 막부의 9대 싯켄이다. 13세에 싯켄에 취임하여 초기에는 외할아버지 아다치 야스모리의 지원을 받았으나, 시모츠키 소동과 헤이젠몬의 난을 거치며 도쿠소의 권력을 강화했다. 진제이 단다이 설치, 에이닌의 덕정령 발포 등 정책을 추진했으나, 만년에는 정무를 소홀히 하고 사치에 빠져 권력 집중과 정치 부패를 심화시켰다. 그의 말년의 혼란은 고다이고 천황의 도막 운동의 원인이 되었으며, 묘소는 엔가쿠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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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조 사다토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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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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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족 | 호조 씨(도쿠소) |
시대 | 가마쿠라 시대 후기 |
출생 | 1272년 1월 14일 |
사망 | 1311년 12월 6일 |
묘소 | 가마쿠라 시야마노우치엔가쿠지 부쓰니치안 |
직위 | |
직책 | 싯켄 |
가마쿠라 막부 | 제9대 싯켄 |
재임 기간 | 1284년 - 1301년 |
쇼군 | 고레야스 친왕 히사아키 친왕 |
렌쇼 | 호조 시게토키 호조 노부토키 |
주군 | 고레야스 친왕 → 히사아키 친왕 → 모리쿠니 친왕 |
관위 | |
관위 | 사마노곤노카미, 사가미노카미, 종4위상 |
개인 정보 | |
아명 | 고주마루 |
법명 | 스쿄, 스엔 |
계명 | 최승원사전각현 |
가족 관계 | |
아버지 | 호조 도키무네 |
어머니 | 가쿠산니 (호리우치 도노) |
배우자 | 호조 무네마사의 딸 |
자녀 | 가쿠히사 호조 기쿠주마루 호조 다카토키 호조 무네마사 호조 야스이에 스교 호조 가네주마루 호조 지요주마루 네 명의 딸 |
기타 정보 | |
개명 | 고주마루 (아명) → 사다토키 → 스쿄, 스엔 (법명) |
꽃 도장 | image_file: SADATOKI777.PNG |
2. 생애
호조 사다토키는 가마쿠라 막부의 8대 싯켄 호조 도키무네의 아들이자[1] 9대 싯켄이다. 그의 생애는 아버지 도키무네 사후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시작되어, 시모쓰키 소동, 헤이젠몬의 난 등 주요 사건들을 거치며 도쿠소 독재 권력의 정점과 그 몰락 과정을 보여주는 가마쿠라 시대 후기의 중요한 시기를 대표한다.[2]
2. 1. 탄생과 원복
분에이 8년 12월 12일(1272년 1월 14일), 가마쿠라 막부의 8대 싯켄 호조 도키무네의 적남(嫡男)으로 가마쿠라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후에 카쿠산니로 알려진 호리우치 부인으로, 아다치 씨족 출신이었다.[1] 어렸을 때의 이름은 고주마루(幸寿丸)였으며, 유모는 다이라노 요리쓰나의 아내였다.[2]겐지 3년(1277년) 12월 2일에 원복(元服, 성인식)을 행하고 '''사다토키'''(貞時)라 이름하였다.[26][27] 이 원복식의 모습은 《겐지산넨기》(建治三年記)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어, 당시 도쿠소 가문 적남의 원복 의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27] 원복식은 후타무네 고쇼(二棟御所)의 서시(西侍)에서 거행되었으며[29][30], 당시 쇼군이었던 고레야스 친왕이 입회하였다.[27][30] 에보시오야(烏帽子親, 원복 시 후견인 역할)가 누구였는지는 명확하게 밝혀져 있지 않지만[28], 이전의 도쿠소 가문 당주들이 그랬던 것처럼 쇼군 고레야스 친왕을 에보시오야로 삼아 원복을 치렀을 것으로 추정된다.[27][30]
원복 시 에보시오야의 이름 한 글자(편휘)를 받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사다토키는 쇼군 고레야스 친왕의 이름자인 '고레(惟)'나 '야스(康)'를 받지 않았다. '사다토키(貞時)'라는 이름의 '사다(貞)' 자는 동시대 인물에게서는 찾아보기 어려워, 호조 가문의 선조로 여겨지는 헤이안 시대의 무장 다이라노 사다모리(平貞盛)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이 설은 호소카와 시게오(細川重男)가 처음 제시하였고, 이후 쓰노다 도모히코(角田朋彦)가 근거를 보강하여 지지하였다. 쓰노다는 아버지 도키무네 시대에 도쿠소 가문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해 조상 호조 요시토키를 다케우치노 스쿠네에 비유하는 전설이 만들어진 점[4][5], 사다토키의 유모의 남편인 다이라노 요리쓰나가 가문의 격을 높이기 위해 아들 스케무네(資宗)의 이름을 다이라노 스케모리(平資盛)에게서 따왔을 가능성[6] 등을 근거로 들었다. 또한, 사다토키의 이름자 '사다(貞)'가 다른 고케닌들에게 수여된 것은 당시 도쿠소 가문의 권력이 확립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 중 하나로 해석하기도 한다.[7][38]
2. 2. 가독 상속과 시모쓰키 소동
고안(弘安) 7년(1284년) 4월 아버지 호조 도키무네가 병사하자, 같은 해 7월 호조 사다토키는 13세(만 12세)의 어린 나이로 싯켄에 취임하였다. 아버지의 죽음부터 사다토키의 싯켄 취임까지 약 4개월간 공백기가 있었는데, 그 이유는 명확하지 않다.사다토키는 형제가 없었고 숙부인 호조 무네마사, 호조 무네요리 등 그를 지지해 줄 만한 유력 친족들이 이미 사망한 상태였기 때문에 정치적 기반이 매우 취약했다. 이로 인해 그의 초기 치세는 불안정했다. 1284년 6월에는 로쿠하라 탐대 남방의 호조 도키쿠니가 악행을 이유로 가마쿠라로 소환되어 히타치국으로 유배된 후 살해되었고, 8월에는 호조 도키미쓰의 음모 사건이 발각되어 사도국으로 유배되는 등 혼란스러운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다.[39][8]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막부의 실권은 사다토키의 외조부(혈연상으로는 외숙부에 해당)인 유력 고케닌 아다치 야스모리가 장악하게 되었다. 야스모리는 고안 덕정(弘安徳政)이라 불리는 정치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그의 정책은 도쿠소케(得宗家, 호조 가문의 적통 가문)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기존 고케닌들의 기득권까지 침해하는 것으로 여겨져 막부 내에서 점차 고립되었다. (다만, 야스모리의 정책이 실제로는 자신이 후견하는 도쿠소케의 세력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는 다른 시각도 존재한다.[39][8]) 결국 야스모리는 도쿠소케의 집사(나이칸레이, 内管領)이자 사다토키 유모의 남편이었던 다이라노 요리쓰나를 중심으로 한 반대 세력과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었다.
고안 8년(1285년) 11월 17일, 사다토키는 다이라노 요리쓰나의 참언(讒言, 거짓으로 꾸며 남을 해치려고 윗사람에게 고해 바치는 말)을 받아들여 아다치 야스모리 토벌 명령을 내렸다. 요리쓰나는 야스모리가 호조 씨를 몰아내고 정권을 찬탈하려 한다고 모함했는데, 이는 정치적 경쟁 관계에 있던 야스모리를 제거하기 위해 혐의를 날조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 사건이 바로 시모쓰키 소동(霜月騒動)이다. 야스모리 측은 갑작스러운 공격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고, 아다치 저택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는 약 5시간 만에 야스모리 측의 패배로 끝났다. 결국 야스모리는 자신의 가족 및 500명이 넘는 지지자들과 함께 자결하였고, 아다치 씨는 거의 멸족당했다. 야스모리는 사다토키의 아버지 도키무네의 처남이기도 했다. 시모쓰키 소동을 통해 정적인 야스모리 세력을 완전히 제거한 다이라노 요리쓰나는 막부의 실권을 장악하고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게 되었다.
2. 3. 헤이젠몬의 난과 독재권력 강화
조오(正応) 2년(1289년), 사다토키는 고레야스 친왕을 쇼군에서 물러나게 하고 지묘인통의 고후카쿠사 상황의 아들인 히사아키 친왕을 새로운 쇼군으로 옹립했다. 고레야스 친왕이 물러난 배경에는 다이라노 요리쓰나가 시모쓰키 소동으로 아다치 야스모리를 제거한 후, 야스모리와 가까웠던 다이카쿠지통의 가메야마 상황을 경계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9]요리쓰나는 사다토키를 내세워 고케닌 보호 정책을 펼치며 권력 기반을 다졌으나, 그의 지위는 막부의 공식 직책(효조슈, 히키쓰케슈 등)이 아닌 도쿠소 가문의 가신(미우치비토, 나이칸레이)이었기에 한계가 있었다.[40] 그의 강압적인 통치 방식은 우쓰노미야 가게쓰나 등 유력 고케닌들의 반발을 샀고, 결국 성장한 사다토키 자신에게도 외면받게 되었다.[41] 조오 6년(1293년) 4월 22일, 가마쿠라 대지진(에이닌 대지진)의 혼란을 틈타 사다토키는 막부 정치를 좌지우지하던 다이라노 요리쓰나와 그의 아들 다이라 스케쓰라(平資綱) 등 일족 90여 명을 숙청했다. 이를 '''헤이젠몬의 난'''('''平禅門の乱''')이라고 부른다.
실권을 장악한 사다토키는 아버지 도키무네 시대로의 회귀를 목표로 삼아 도쿠소 가문 중심의 독재 정치를 강력하게 추진했다.[42] 그는 종제인 호조 모로토키(훗날 제10대 싯켄)와 무네카타 등을 등용하고, 시모쓰키 소동으로 몰락했던 가나자와 호조 가(金沢北条家)의 호조 아키토키 등을 복권시켰다. 같은 해 10월, 사다토키는 기존의 히키쓰케슈(引付衆)를 폐지하고, 아키토키, 모로토키, 무네노부(훗날 제11대 싯켄), 나가이 무네히데, 우쓰노미야 가게쓰나, 도키무라, 긴토키 등 7명을 새롭게 설치한 집주(執奏)에 임명했다.[43] 이는 아다치 야스모리 파 인물들을 등용하여 소송 제도를 개혁하고 도쿠소 가문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에이닌 3년(1295년)에는 집주가 폐지되고 다시 히키쓰케슈가 부활했다.
또한 몽골 침공 이후에도 사쓰마 근해에 외국 선박이 출몰하는 등 긴장이 계속되자, 에이닌 4년(1296년) 진제이 단다이(鎮西探題)를 새로 설치하고, 사이고쿠(西国) 지역의 슈고 자리에 호조 일족 사람들을 대거 임명하여 서일본 지역에 대한 지배력과 국방력을 강화했다. 그리고 몽골 침공으로 인한 군비 부담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중소 고케닌들을 구제하기 위해, 에이닌 5년(1297년) 에이닌의 덕정령(永仁の徳政令, 간토고토쿠소関東御徳政)을 발포했다. 하지만 이는 고케닌들이 빚을 갚지 않아도 되게 만들었으나, 동시에 새로운 빚을 내기 어렵게 만드는 역효과를 낳아 오히려 고케닌들의 경제적 어려움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2. 4. 싯켄 퇴임과 가겐의 난
쇼안 3년(1301년), 가마쿠라에 혜성(오늘날 핼리 혜성으로 추정되고 있다)이 나타나자, 이를 천하가 어지러워질 흉조로 여긴 사다토키는 출가하여 싯켄 직위를 종제이자 사위인 호조 모로토키에게 물려주었다. 하지만 출가한 뒤에도 막부 내에서 은연중에 정치력을 유지했다. 사다토키의 적자 기쿠주마루가 병약하여 제대로 걷지 못했고 다음 해인 1302년 5세의 나이로 요절했기에, 사다토키가 모로토키를 후계자로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추측도 있다.
가겐 3년(1305년) 4월 22일, 사다토키는 가마쿠라의 거택(숙소)이 화재로 소실되어 모로토키의 관저로 옮겨갔다. 그 다음 날인 23일, 나이칸레이 호조 무네카타에 의해 사다토키의 명령이라 하여 렌쇼 호조 도키무라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44] 사다토키는 5월 2일, 도키무라 살해는 실수였다며 도쿠소 피관(被官)인 고다이인 다카요리 등 12명을 주살하였고, 4일에는 무네카타의 음모로 하여 무네카타와 그 당여(일파)를 주살하였다. 이를 가겐의 난이라 한다.[45]
가겐의 난의 진상은 명확하지 않지만, 여러 설명이 있다. 싯켄 모로토키와 나이칸레이 무네카타의 대립, 나아가 도쿠소 사다토키로부터 역대에 걸쳐 소외되었던 호조 무네노부와의 대립이 배경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46] 다른 한편으로는, 도키무라 살해는 가문의 위계 질서나 선례를 무시한 사다토키의 정치에 저항하는 호조 씨 서가(庶家)를 사다토키가 제압하려 했기 때문이며, 도키무라 암살에 대한 가문 내의 반발이 예상 이상으로 강했기 때문에 사다토키는 책임을 회피하고자 처음에는 도키무라를 살해한 도쿠소 피관들을 처형했고, 그럼에도 반발이 수그러들지 않자 모든 책임을 무네카타의 음모로 돌려 무네카타와 그 일당을 처형했다는 설도 제기된다. 같은 해 7월에는 사다토키의 차남 긴주마루도 요절했다.
2. 5. 만년
막부 안팎의 문제를 품고 가정적으로도 자식 둘을 일찍 떠나보내는 등 사다토키의 정치는 차츰 빛을 잃고 정열을 잃어갔다. 사다토키는 점차 정무에 관심을 잃고 술에 빠지는 날이 많아졌고, 미우치비토 다이라노 마사쓰라로부터 그의 행실을 바로잡을 것을 호소하는 취지의 간언장을 받기도 하였다. 이 간언장은 『다이라노 마사쓰라 간초』라는 제목으로 남아 있다.[49]도쿠지 3년(1308년) 8월 4일에는 쇼군 히사아키 친왕을 폐하고 그 아들인 모리쿠니 친왕을 새로운 쇼군으로 옹립하였다.[47] 또한 어린 아들인 호조 다카토키의 입장을 굳건히 하기 위한 포석으로 나가사키 엔키와 아다치 도키아키를 등용하여 그 두 사람을 다카토키의 보좌역으로 내세웠다. 엔쿄 2년(1309년) 1월에는 다카토키의 원복식을 거행하였다.[48]
오초 원년(1311년) 9월 22일, 다카토키가 성장할 때까지 중계역으로 싯켄을 맡았던 호조 모로토키가 사망하였다.[50] 이후 가겐의 난에서 사다토키와 대립했던 호조 무네노부가 싯켄으로 취임하는 등,[51] 만년의 사다토키 정권 아래서는 세대교체로[52] 도쿠소 권력의 약화가 진행되었다. 사다토키가 다이라노 요리쓰나를 멸망시키고 쌓아올렸던 도쿠소 전제 체제는 점차 붕괴해 갔다. 최고 권력자인 사다토키 자신부터가 정무를 방기하면서, 나가사키 엔키 등 미우치비토 ・ 외척 아다치 도키아키, 호조 씨 서가(庶家) 등의 요리아이슈가 주도하는 요리아이 체제로 막부 운영의 중심이 옮겨갔고, 도쿠소는 쇼군처럼 막부 내에서 상징적인 존재로 전락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53]
사다토키는 모로토키가 사망한 지 한 달 뒤인 10월 26일(1311년 12월 6일)에 사망하였다.[54] 향년 41세[55](만 39세)였다. 죽음에 임하여 사다토키는 나가사키 엔키와 아다치 도키아키 두 사람을 불러들여 다카토키를 보좌하고 막부를 번성하게 할 것을 명하였다고 전해진다.
호조 다카토키는 겨우 아홉 살의 나이에 도쿠소의 가독(家督)을 이었으나, 이미 사다토키 만년에 도쿠소의 지위는 실권이 없는 형식적인 존재에 불과했다.[56] 사다토키의 묘소는 가마쿠라시 야마노우치(山ノ内)의 서록산(瑞鹿山) 엔가쿠지의 탑두(塔頭) 불일암(仏日庵)에 있으며, 사다토키의 목상도 이곳에 봉납되어 있다.
3. 평가 및 일화
호조 사다토키는 헤이젠몬의 난을 통해 권력 기반을 다졌다는 평가와 함께, 도쿠소 가문(得宗家) 중심의 전제 정치를 강화하려다 측근인 나가사키 엔키 등 고나이닌(御内人)의 발호와 정치 부패를 초래하고 악당의 준동과 같은 사회 불안을 야기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은 훗날 고다이고 천황의 막부 타도 운동의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일본의 고전 『태평기』에는 그가 할아버지인 5대 싯켄 호조 도키요리처럼 신분을 숨기고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세상을 살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3. 1. 긍정적 평가
호조 사다토키는 1293년 헤이젠몬의 난(平禅門の乱)을 일으켜 당시 권력자였던 다이라노 요리쓰나와 그의 추종자 90명을 제거하였다. 이 사건은 1293년 가마쿠라 지진 이후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단행되었으며, 이를 통해 사다토키는 막부 내 반대 세력을 숙청하고 자신의 정치적 권력 기반을 다지는 계기를 마련했다.3. 2. 부정적 평가
호조 사다토키는 자신의 가문인 토쿠소 가문(得宗家)을 중심으로 권력을 강화하여 막부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나가사키 엔키와 같은 고나이닌(御内人, 미우치비토)이라 불리는 토쿠소 가문의 측근 세력이 개혁을 도왔다. 하지만 이러한 권력 집중은 오히려 토쿠소 가문과 그 주변 인물들에게 권력이 과도하게 쏠리는 결과를 낳았고, 이는 고나이닌을 포함한 막부 수뇌부의 정치 부패로 이어졌다. 정치적 혼란은 악당이라 불리는 무장 세력의 활동을 부추기는 등 사회 불안을 심화시켰으며, 이는 훗날 고다이고 천황이 막부 타도 운동을 일으키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만년에 사다토키는 정사를 소홀히 하고 사치와 향락에 빠졌다. 연일 술자리를 열었으며, 이러한 문란한 행실은 같은 호조 가문의 호조 사다아키조차 비판할 정도였다. 사다아키는 편지에서 "매일 술에 취해 있으니, 요즘은 아무 일도 결정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속임수가 판을 친다."라고 개탄했다. 또한 사다아키가 나가사키 엔키에게 전달을 부탁한 안건이 해를 넘기도록 보고조차 되지 않은 일도 있었다고 한다. 사다토키의 이러한 행동은 다음 대 집권자인 호조 다카토키의 방탕한 행실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3. 3. 일화

일본의 고전 『태평기』(太平記)에는 사다토키가 할아버지인 5대 싯켄 호조 도키요리처럼 신분을 숨기고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세상을 살폈다는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사다토키는 도쿠소 가문(得宗家) 중심의 전제 정치를 강화하여 막부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그의 측근인 나가사키 엔키를 비롯한 고나이닌(御内人)들이 개혁을 도왔다. 그러나 이러한 권력 집중은 도쿠소 가문과 그 주변 세력, 특히 고나이닌 등 막부 수뇌부에게 권력이 쏠리는 결과를 낳았고, 이는 정치 부패로 이어졌다. 정치적 혼란 속에서 악당(悪党)이라 불리는 무사 집단 등이 활동하며 사회 불안이 커졌으며, 이는 훗날 고다이고 천황이 막부를 타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만년의 사다토키는 생활이 문란해져 매일같이 술자리를 열었다고 전해진다. 같은 호조 가문의 호조 사다아키조차 그의 이러한 행실을 개탄하며 보낸 편지에는 "날마다 술에 취해 계시니, 당시 어떤 일이 있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하시는 듯합니다. 참으로 통탄스럽습니다."(連日御酒、当時何事もさたありぬとも覚えず候、欺き入り候、欺き入り候)라고 적혀 있었다.[57] 또한 사다아키는 엔키에게 1310년 초에 부탁했던 상주(주상) 건이 해를 넘기도록 처리되지 않자 당혹스러워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다토키의 문란한 행실은 후대에 그의 아들인 호조 다카토키의 잘못된 행동을 설명하는 데 인용되기도 했다.[58]
4. 가계
사다토키는 가마쿠라 막부의 8대 집권 호조 도키무네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아다치 요시카게의 딸이자 아다치 씨족 출신인 호리우치도노이다.[1] 그의 유모는 다이라노 요리쓰나의 아내였다.[2]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호조 도키무네 | 제8대 싯켄 |
어머니 | 호리우치도노 | 아다치 요시카게의 딸, 아다치 씨족 출신[1] |
부인 | 미상 | 호조 무네마사의 딸 |
부인 | 가쿠카이 엔조 | 아다치 야스무네의 딸 |
자녀 | 이름 | 비고 |
장남 | 호조 다카토키 | 어머니는 가쿠카이 엔조 |
차남 | 호조 야스이에 | 어머니는 가쿠카이 엔조 |
아들 | 가쿠큐 | 생모 불명 |
아들 | 호조 기쿠주마루 | 생모 불명 |
아들 | 소교 | 생모 불명 |
아들 | 호조 긴주마루 | 생모 불명 |
아들 | 호조 치요주마루 | 생모 불명 |
딸 | 미상 | 호조 모로토키의 부인 |
딸 | 난덴 | 호조 히데토키의 부인 |
딸 | 미상 | 호조 도키모토의 부인 |
딸 | 미상 | [13] |
딸 | 미상 | [13] |
5. 기타
호조 사다토키 시대에는 그의 이름 중 '사다(貞)' 자를 고케닌(御家人, 쇼군의 가신)에게 내려주는 편휘(偏諱) 관행이 성립되었다는 연구가 있다. 사다토키로부터 '사다' 자를 받아 이름에 사용한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가문 | 인물명 | 비고 |
---|---|---|
호조 가문 (北条氏) | 호조 사다키 | 도쿠소 가문(得宗家) 일족, 소세이류 호조씨(宗静流北条氏), 호조 모로토키의 아들 |
사쿠라다 사다쿠니 | 사쿠라다 토키요시의 아들 | |
나고시 사다이에 | 일부 계보에서 나고시 토키이에와 나고시 타카이에 사이에 위치 | |
나고시 사다무네 | ||
호조 사다야스 | 사위, 훗날 제12대 싯켄 호조 히데토키 | |
가나자와 사다아키 | 훗날 제15대 싯켄 | |
다이부츠 코레사다 (사다무네) | 호조 무네노부의 아들, 훗날 제11대 싯켄 | |
다이부츠 사다후사 | 호조 무네노부의 동생 | |
다이부츠 사다노부 | 호조 무네노부의 동생 | |
다이부츠 사다나오 | 호조 무네노부의 조카 (동생 무네야스의 아들) | |
아시카가 가문 (足利氏) | 아시카가 사다우지 | [14][15] 아시카가 다카우지, 아시카가 나오요시의 아버지 |
아시카가 사다카즈 | 오이타 사다카즈, 사다우지의 아버지, 이에토키의 사촌 | |
카코 사다모토 | 카코 모토우지의 아들 | |
아시카가 사다씨 | 시바 가문(斯波氏) 소속 | |
아다치 가문 (安達氏) | 아다치 사다야스 | [16] 5대 당주 아다치 무네카게의 아들 |
이시카와 가문 (石川氏) | 이시카와 사다미츠 | |
우사미 가문 (宇佐美氏) | 우사미 사다스케 | [17] |
우츠노미야 가문 (宇都宮氏) | 우츠노미야 사다츠나 | [18] |
시오야 가문 (塩谷氏) | 시오야 사다키요 | |
오오타 가문 (太田氏) | 오오타 사다츠라 | 오오타 토키츠라의 아들 |
오오토모 가문 (大友氏) | 오오토모 사다치카 | |
오오토모 사다무네 | 사다치카의 동생, 후계자 | |
오오토모 사다요리 | 사다무네의 아들 | |
오오토모 사다노리 | 사다요리의 동생 | |
오가사와라 가문 (小笠原氏) | 오가사와라 사다나가 | 사다무네의 형제 |
오가사와라 사다무네 | [19] | |
오다 가문 (小田氏) | 오다 사다무네 | [14] |
오야마 가문 (小山氏) | 오야마 사다토모 | [14][20][21] |
카사이 가문 (葛西氏) | 카사이 사다키요 | (키요사다) [22] |
카노 가문 (狩野氏) | 카노 사다치카 | [17] |
카와고에 가문 (河越氏) | 카와고에 사다시게 | |
쿠도 가문 (工藤氏) | 쿠도 사다스케 | [17] 쿠도 씨 |
쿠도 사다미츠 | [17] 쿠도 씨 | |
쿠도 사다유키 | 구로이시 쿠도 씨 | |
사사키 가문 (佐々木氏) | 사사키 사다무네 | 사사키 도요의 양아버지 |
사사키 사다우지 | 사사키 도요의 형 | |
사타케 가문 (佐竹氏) | 사타케 사다요시 | [14] |
시부카와 가문 (渋川氏) | 시부카와 사다요리 | |
시마즈 가문 (島津氏) | 시마즈 사다히사 | |
쇼니 가문 (少弐氏) | 쇼니 사다츠네 | |
치바 가문 (千葉氏) | 치바 사다타네 | [14][23] |
치바 타네사다 | [23] | |
나가이 가문 (長井氏) | 나가이 사다히데 | |
나가이 사다시게 | ||
나가이 사다요리 | ||
니카이도 가문 (二階堂氏) | 니카이도 유키사다 | |
니카이도 사다히라 | 유키사다의 아들 | |
니카이도 사다무네 | 법명: 돈아(遁阿) | |
니카이도 사다후지 | ||
니카이도 사다츠나 | ||
츠모리 가문 (津守氏) | 츠모리 사다요시 | 츠모리 씨 |
베키 가문 (戸次氏) | 베키 사다나오 | [24] 베키 씨 |
모리 가문 (毛利氏) | 모리 사다치카 | |
모모이 가문 (桃井氏) | 모모이 사다요리 | 모모이 나오츠네, 모모이 나오노부, 모모이 나오히로의 아버지 |
야마카와 가문 (山川氏) | 야마카와 사다시게 | [14][25] 야마카와 씨 |
유우키 가문 (結城氏) | 유우키 사다히로 | [14][20] |
참조
[1]
서적
Zen Sanctuary of Purple Robes
State University of New York Press
[2]
서적
Warrior Rule in Japan
Cambridge University Press
[3]
서적
中世 日本の政治と文化
思文閣出版
[4]
간행물
北条得宗家成立試論
[5]
간행물
得宗専制政治の論理
[6]
간행물
飯沼大夫判官と両統迭立
[7]
간행물
偏諱の話
[8]
서적
国史大辞典
吉川弘文館
[9]
서적
六波羅探題 京を治めた北条一門
吉川弘文館
[10]
서적
神風と悪党の世紀
講談社現代新書
[11]
서적
護良親王:武家よりも君の恨めしく渡らせ給ふ
ミネルヴァ書房
[12]
문서
細川重男『鎌倉政権得宗専制論』
[13]
문서
親玄僧正日記
[14]
서적
結城市史 第四巻 古代中世通史編
結城市
[15]
서적
下野足利氏
戎光祥出版
[16]
서적
二本松市史 第1巻 原始・古代・中世・近世 通史編1
二本松市
[17]
서적
中世武家系図の史料論
高志書院
[18]
서적
下野宇都宮氏
戎光祥出版
[19]
간행물
御家人・得宗被官としての小笠原氏 -鎌倉後期長忠系小笠原氏を題材に-
信濃史学会
[20]
서적
中世武家系図の史料論
高志書院
[21]
서적
下野小山氏
戎光祥出版
[22]
서적
葛西氏の研究
名著出版社
[23]
서적
中世肥前千葉氏の足跡 : 小京都小城の源流
https://hdl.handle.n[...]
佐賀県小城市教育委員会
[24]
문서
群書類従
[25]
서적
下総結城氏
戎光祥出版
[26]
문서
足利将軍の元服 -足利義満より同義教に至る-
思文閣出版
[27]
문서
鎌倉期武士社会における烏帽子親子関係
思文閣出版
[28]
문서
足利将軍の元服 -足利義満より同義教に至る-
思文閣出版
[29]
문서
鎌倉期武士社会における烏帽子親子関係
思文閣出版
[30]
문서
鎌倉期武士社会における烏帽子親子関係
思文閣出版
[31]
문서
デジタル大辞泉
[32]
문서
デジタル大辞泉
[33]
문서
아즈마카가미
思文閣出版
[34]
문서
北条得宗家成立試論
[35]
문서
飯沼大夫判官と両統迭立
[36]
논문
가마쿠라기 무사 사회에 있어서의 에보시 친자 관계
시분각출판
[37]
논문
무가 사회에 있어서의 가관과 한 글자 부여의 정치성에 대해서
[38]
간행물
편휘의 이야기
[39]
서적
국사대사전
요시카와 홍문관
[40]
서적
금택정현
[41]
서적
금택정현
[42]
서적
금택정현
[43]
서적
금택정현
[44]
서적
금택정현
[45]
서적
금택정현
[46]
서적
금택정현
[47]
서적
금택정현
[48]
서적
금택정현
[49]
서적
금택정현
[50]
서적
금택정현
[51]
서적
금택정현
[52]
서적
금택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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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가마쿠라 막부의 멸망
요시카와 홍문관
[54]
서적
금택정현
[55]
서적
금택정현
[56]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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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카와 홍문관
[57]
서적
금택정현
[58]
서적
금택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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