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모쓰키 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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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모쓰키 소동은 1285년 가마쿠라 막부에서 일어난 정변으로, 호조 도쿠소케의 외척인 아다치 야스모리와 도쿠소의 집사 다이라노 요리쓰나 간의 권력 다툼이 원인이 되었다. 14세의 싯켄 호조 사다토키가 막부를 통치하는 가운데, 야스모리는 고케닌 세력 확대를 통해 도쿠소 권력 견제를 시도했고, 요리쓰나는 이를 견제하며 대립했다. 요리쓰나는 겐에에게 야스모리 토벌을 의뢰했고, 이로 인해 아다치 일족 500여 명이 자결하는 등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다. 소동 이후, 요리쓰나는 야스모리의 개혁을 무효화하고 도쿠소 중심의 지배 체제를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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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모쓰키 소동 | |
---|---|
개요 | |
사건명 | 시모쓰키 소동 |
다른 이름 | 고안 갓센 (弘安合戦), 아다치 야스모리의 난 (安達泰盛の乱) |
발생일 | 고안 8년 11월 17일 (1285년 12월 24일) |
장소 | 일본 가마쿠라 |
원인 | 아다치 야스모리와 다이라노 요리쓰나 간의 정치적 갈등 |
결과 | 아다치 씨의 몰락과 다이라노 요리쓰나의 권력 강화 |
교전 세력 | |
아다치 씨 | 아다치 야스모리 |
상대 세력 | 다이라노 요리쓰나와 호조 사다토키 |
주요 인물 | |
아다치 씨 | 아다치 야스모리 |
막부 | 호조 사다토키, 다이라노 요리쓰나 |
배경 | |
정치적 상황 | 가마쿠라 막부 내부의 권력 다툼 심화 |
아다치 씨의 위상 | 막부 내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아다치 씨 |
다이라노 요리쓰나의 부상 | 호조 씨의 신임을 얻어 권력을 확대하던 다이라노 요리쓰나 |
전개 | |
발단 | 다이라노 요리쓰나가 아다치 야스모리를 모함 |
아다치 씨의 몰락 | 아다치 야스모리를 중심으로 한 일족이 공격받아 몰락 |
주요 전투 | 아키타 성 전투 등 |
영향 | |
정치적 영향 | 막부 내 권력 구조의 변화, 호조 씨의 권력 강화 |
아다치 씨의 몰락 | 아다치 씨의 정치적 영향력 상실 |
사회적 영향 | 가마쿠라 사회의 불안정 심화 |
2. 배경
분에이 11년 10월과 고안 4년 7월, 두 차례에 걸친 원나라의 침략이라는 전례 없는 국난을 겪은 가마쿠라 막부는 여러 문제에 직면했다. 원래 가마쿠라 막부와 직접적인 주종 관계가 아닌 본소일원지 주민이라 불리는 공가(公家)·사찰이 지배하는 장원·고쿠가령의 비고케닌 무사까지 동원해야 했다. 또한 방어전이었기 때문에 동원된 고케닌, 비고케닌에게 줄 충분한 토지가 없었고, 가마쿠라 막부의 처리 능력을 넘어 세력이 확장되었다. 당시에는 분할 상속이 기본이었기 때문에, 세대가 내려갈수록 영지가 세분화되어 생활고를 겪는 무사가 늘어났다. 이러한 안팎의 난제 속에서 세 번째 원나라 침략에 대비해야 했기 때문에 막부 운영에 큰 문제가 발생했다.
고안 7년 4월, 싯켄 호조 도키무네가 34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자, 그의 아들 호조 사다토키가 뒤를 이었다. 사다토키의 외할아버지이자 유력 고케닌인 아다치 야스모리는 고안 덕정이라 불리는 막부 개혁에 착수했다. 같은 해 7월, 야스모리는 "신고시키모쿠"라는 38개 조항으로 구성된 추가법(491~528조)을 발포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항목 | 내용 |
---|---|
이치노미야·고쿠분지 흥행 | 각 국의 이치노미야와 고쿠분지를 재건 |
간토 고료 흥행 | 간토 지역의 막부 직할령 정비 |
악당 금압 | 사회 질서를 어지럽히는 악당 세력 억제 |
검약 권장 | 무사들의 사치 풍조를 금지하고 검소한 생활 장려 |
가와테(河手)·쓰료(津料)·고슈(沽酒)·오시가이(押買) 금지 | 교통·유통 통제 강화, 상업 활동 제한 |
친제이(鎮西) 신령 흥행·회복 | 규슈 지역 신사(神社) 소유 영지 복구 및 매매 금지 |
친제이 묘슈(名主)직 안도 | 규슈 지역 묘슈들의 지위 보장 |
히키쓰케(引付) 흥행 | 소송 담당 기관인 히키쓰케 기능 강화 |
덴분(殿分) 조진 | 유력 무사들의 권력 제한 |
소령 무상 회복령 | 불법적으로 빼앗긴 영지를 원래 소유자에게 무상 반환 |
이 개혁의 주요 목적은 본소일원지 주민(비고케닌)을 정식 고케닌으로 편입시켜 막부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쿠가 관할 하에 있던 고쿠분지·이치노미야를 슈고(守護)의 보호 하에 두고, 교통·유통에 대한 막부의 관여를 강화하기 위해 가와테·쓰료·고슈·오시가이를 금지하고, 유출된 친제이(규슈) 신사의 영지를 무상으로 회복하는 동시에 매매를 금지하는 등, 다양한 방면의 개혁을 추진했다.
소령 반환과 덕정은 권리자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본소일원지 주민의 고케닌화는 영주와 기존 고케닌들의 반발을 샀다. 또한 고케닌층을 확대하고 쇼군 권위를 강화하여 도쿠소 권력과 오치닌의 막정 개입을 억제하는 정책[1]은 호조 일문뿐 아니라 기존 고케닌과 오치닌의 반발을 초래했다. 개혁은 초기부터 어려움에 직면했고, 규슈를 중심으로 각지에서 소송이 빈발했지만 막부의 처리 능력을 초과하여 기능 부전에 빠졌다.
이 개혁은 호조 도키무네 사후에 발포되었기 때문에 도키무네가 구상한 것으로 보이지만, 호조 일문에 대한 제한도 포함하고 있어 도키무네 사후 호조 일문, 고케닌, 오치닌의 반발이 거셌다. 아다치 야스모리가 주도하여 개혁을 진행하는 것은 더욱 어려웠다. 결국 고안 7년(1284년)에 이미 방침 수정이 불가피해졌고, 다음 해인 고안 8년(1285년)에는 추가법 발포도 중단되어 개혁은 사실상 실패로 끝났다. 같은 해 11월 17일(1285년 12월 14일) 시모쓰키 소동으로 아다치 야스모리가 몰락하면서 개혁도 종말을 맞이했다.
2. 1. 아다치 야스모리와 다이라노 요리쓰나의 대립
아다치 야스모리는 막부 창설 이래 유력 고케닌 가문인 아다치 씨(安達氏)의 일족이자 도쿠소케(得宗家)의 외척이었다. 그는 싯켄 호조 도키무네를 지지하며 엣소토닌(越訴頭人)이나 고온부교(御恩奉行) 등의 요직을 역임한 막부의 중심인물이었다.[4] 다이라노 요리쓰나는 도키무네의 아들인 사다토키의 유모부이자, 호조 씨 도쿠소케의 집사(執事)인 나이간레이(内管領)로서 도쿠소 권력을 구현하는 입장에 있었다.막부 내에서는 도자마 고케닌(外様御家人)을 지지 기반으로 하는 야스모리와, 요리쓰나를 필두로 하는 도쿠소 피관 세력이 대립하고 있었다. 고안 7년 양측의 조정 역할을 맡았던 싯켄 도키무네가 사망하고 14세의 사다토키가 9대 싯켄이 되면서, 막부 정치 운영을 놓고 양측의 대립은 더욱 격화되었다.[4]
사다토키의 외할아버지로서 막부 정치를 주도하게 된 야스모리는 고안 덕정(弘安徳政)이라 불리는 막부 정치 개혁에 착수, 새로운 법령인 신어식목(新御式目)을 발표했다. 야스모리의 개혁은 고케닌층을 확대하고 쇼군 권력을 강화하여 도쿠소 권력과 미우치비토(御内人)들의 막부 정치 개입을 억제하려는 것이었다.[4] 이는 도쿠소 피관이었던 요리쓰나에게도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였다.
3. 경과
고안 8년(1285년) 11월 4일과 14일, 요리쓰나는 닛코산(日光山) 벳토(別当) 겐에(源恵)에게 야스모리 토벌 기도를 의뢰했다. 1차 사료인 《시모쓰키 소동 각문서》(霜月騒動覚聞書)에 따르면, 11월 17일 오전 마쓰타니(松谷) 별장에 있던 야스모리는 주위가 소란스러워진 것을 눈치채고 낮 12시경 도노쓰지(塔ノ辻)에 있던 출사용 저택으로 가서 막부의 싯켄인 사다토키의 저택으로 가려 했으나 미우치비토들에게 가로막혀 사망자 30명, 부상자 10명이 발생하였다.
이를 계기로 양측 간에 충돌이 벌어져 쇼군 고쇼(将軍御所)까지 불길이 번졌고, 오후 4시경 아다치 측이 패배하여 야스모리와 그의 아들 무네카게, 동생 나가카게를 포함한 아다치 일족이 자결하거나 체포되어 죽임을 당했다.
도키카게는 사가미국(相模国) 이야마(飯山)(오늘날의 아쓰기시厚木市)로 달아났으나 살해되었고, 아다치 일족 500여 명이 자결했다. 소동은 전국으로 확산되어 각지에서 야스모리 지지자들이 추격을 당해 자결하였다. 아다치 씨의 기반이었던 고즈케국(上野国) ・ 무사시국(武蔵国)의 고케닌들의 피해가 컸으며, 무사시국(武蔵国)에서는 무토 소쿄사에몬(武藤少卿左衛門), 도토미국(遠江国)에서는 무네아키, 히타치국(常陸国)에서는 시게카게, 시나노국(信濃国)에서는 도모노 히코지로 모리토키(伴野彦二郎盛時) 등이 자결하였다. 규슈(九州)에서도 야스모리의 아들 모리무네가 이와토 전투(岩門合戦)에서 패하고 죽었다. 이처럼 많은 인물들이 한꺼번에 죽거나 자결한 것은 용의주도한 계획 아래 일제히 습격이 이루어졌기 때문으로 보인다.
요리쓰나 측에는 사사키 씨(佐々木氏), 이마가와 씨(今川氏), 지바 씨(千葉氏) 등 도쿠소(得宗) 피관화된 고케닌들이 가담했고, 동족 내에서도 요리쓰나 파와 야스모리 파로 갈리는 등 막부를 양분한 쟁란이었다.
3. 1. 피해 상황
아다치 야스모리 일족 외에도 아시카가씨(足利氏), 오가사와라 씨(小笠原氏), 쇼니씨(少弐氏) 등 많은 유력 고케닌(御家人)들이 피해를 입었다.[5] 요리쓰나 측에는 사사키 씨(佐々木氏), 이마가와 씨(今川氏), 지바 씨(千葉氏) 등 도쿠소(得宗) 피관화된 고케닌들이 가담했다. 가나자와 아키토키(金沢顕時, 야스모리의 사위)는 가즈사국(下総国)에 칩거했고, 우쓰노미야 가게쓰나(宇都宮景綱), 나가이 무네히데(長井宗秀) 등은 실각했다.[2]야스모리 측 | 요리쓰나 측 |
---|---|
아다치씨(安達氏) 일족, 아시카가씨(足利氏), 오가사와라 씨(小笠原氏), 이토 씨(伊東氏), 쇼니씨(少弐氏), 후지와라노 스케노리(藤原相範), 기라 미쓰우지(吉良満氏)[5], 우에다 마타타로(殖田又太郎), 고바야카와 사부로자에몬(小早川三郎左衛門), 미시나 구란도(三科蔵人), 아마노 가게무라(天野景村), 이가 가게이에(伊賀景家), 닛카이도 유키카케(二階堂行景), 오이 미마사카노사부로자에몬(大井美作三郎左衛門), 쓰나지마 지로 뉴도(綱島二郎入道), 이케가미 도우치사에몬노이(池上藤内左衛門の尉), 나메가타 쇼지로(行方少二郎), 난부 마고지로(南部孫二郎), 아리사카 사부로(有坂三郎), 가마타 야토지 사에몬노이(鎌田弥藤二左衛門尉), 아키야마(秋山) 등 | 사사키 씨(佐々木氏), 이마가와 씨(今川氏), 지바 씨(千葉氏) 등 |
실각 | 칩거 |
우쓰노미야 가게쓰나(宇都宮景綱), 나가이 무네히데(長井宗秀)[2] 등 | 가나자와 아키토키(金沢顕時) |
4. 시모쓰키 소동 이후의 가마쿠라 막부
다이라노 요리쓰나는 아다치 야스모리의 고안 개혁을 부정하고, 막부 인사를 도쿠소를 정점으로 다이부쓰 류, 나고시 류 호조 씨를 중심으로 하는 호조 일족의 지배 체제로 바꾸었다. 아시카가 씨 등 기존의 고케닌들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도쿠소 전제]])[6] 교토에서는 야스모리와 협력하여 고안 덕정을 행한 것으로 보이는 가메야마 상황의 인세이가 정지되었다.
권세를 누리던 요리쓰나도 8년 뒤 헤이젠몬의 난으로 멸망하였으나, 야스모리의 동생의 자손(아다치 씨) 및 요리쓰나의 동생 자손(나가사키 씨)은 다시 등용되어 두 집안 사이에 혼인 관계가 맺어지기까지 하였다.[6] 호조 도쿠소케가 멸망한 도쇼지 전투에서 아다치 씨와 나가사키 씨 모두 호조 도쿠소와 운명을 함께 하였다.
5. 쇼군 문제
保暦間記일본어에 따르면, 다이라노 요리쓰나는 아다치 야스모리의 아들 무네카게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후손이라 칭하며 겐지(源氏)로 성을 바꾸면서까지 모반을 일으켜 쇼군이 되려 한다고 사다토키에게 참언하였다.[4] 야스모리는 겐지 쇼군에게 전해지는 보검 히게키리 타치를 교토에 있던 신사에서 찾아내어 홋케도(法華堂)에 바쳤다. 히게키리 타치는 시모쓰키 소동으로 행방불명되었다가 12월 5일에 발견되어 사다토키에 의해 「적자의 금대」(赤字의錦袋, 헤이시를 칭했던 호조 씨는 붉은색 깃발을 사용하였다)에 감겨 다시금 홋케도에 봉납되었다.
이처럼 쇼군 문제는 도쿠소가 막부의 정점에 서면서도, 그 출신이 낮아 스스로 쇼군이 될 수 없었던 호조 씨가 마지막까지 넘지 못한 벽이었다.
참조
[1]
서적
국사대사전
길천홍문관
1989
[2]
문서
평선문의 난 후에 복귀
[3]
문서
아다치 야스모리의 동생의 증손인 아다치 다카카게의 처는 다이라노 요리쓰나의 동생의 손녀(나가사키 엔키의 딸)에 해당
[4]
서적
국사대사전
길천홍문관
1989
[5]
문서
아시카가 씨의 친족으로 미카와국 니시조의 영주였으며 에치젠 슈고였다
[6]
문서
아다치 야스모리의 동생의 증손인 다카카게(高景)의 처는 다이라노 요리쓰나의 동생의 손녀(나가사키 엔키長崎円喜의 딸)에 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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