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헬레네 아델하이트 빅토리아 마리 폰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헬레네 아델하이트 빅토리아 마리 폰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는 1888년 독일 툼비에서 태어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페르디난트의 딸이다. 1909년 덴마크의 하랄 왕자와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었으며, 자선 활동을 펼치고 고아원을 설립하는 등 사회에 기여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나치에 동조하는 행보로 인해 덴마크에서 비난을 받았으며, 전쟁 후 추방되었다가 남편 사후 덴마크로 돌아와 1962년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덴마크 글뤽스부르크가 - 마르그레테 2세
    마르그레테 2세는 1972년 덴마크 여왕으로 즉위하여 2024년 1월 14일까지 재위했으며, 덴마크의 헌법적 역할과 공식 활동을 수행하고, 고고학, 예술,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가졌으며, 2024년 1월 14일 퇴위하고 장남 프레데리크 10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 덴마크 글뤽스부르크가 - 요르요스 1세
    요르요스 1세는 1863년부터 1913년까지 그리스를 통치한 덴마크 왕자 출신의 국왕으로, 입헌군주제를 확립하고 영토 확장을 추진하다가 1913년 암살당했다.
  • 덴마크의 왕녀 - 몽페자 여백작 아테나
    몽페자 백작부인 아테나는 덴마크 왕족으로 태어나 왕족 작위는 박탈되었지만 왕위 계승 순위를 유지하며, "몽페자 아테나 백작부인 각하"로 불린다.
  • 덴마크의 왕녀 - 덴마크의 루이세 샤를로테
    덴마크의 루이세 샤를로테는 프레데리크 왕자와 조피 프리데리케 사이에서 태어나 헤센카셀 방백 빌헬름과 결혼하여 1남 5녀를 두었고, 예술과 시에 관심을 보이며 왕위 계승 문제에 관여하다가 사위에게 유리하게 왕위 계승권을 포기한 후 크리스티안스보르 궁전에서 사망했다.
  • 1963년 사망 - 존 F. 케네디
    존 F. 케네디는 미국 역사상 최연소 대통령이자 최초의 가톨릭 대통령으로, 하버드 대학교 졸업 후 해군 복무, 상원 의원 활동을 거쳐 대통령이 되었으며 쿠바 미사일 위기 등을 극복하고 "새로운 개척지" 정책을 추진했으나 1963년 암살당했다.
  • 1963년 사망 - 올더스 헉슬리
    올더스 헉슬리는 영국의 작가이자 사회 풍자 작가로, 《멋진 신세계》와 같은 작품을 통해 과학기술, 전체주의, 신비주의 등 다양한 주제를 탐구하며 현대 사회의 문제와 개인의 자유를 강조했다.
헬레네 아델하이트 빅토리아 마리 폰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
기본 정보
헬레네
헬레네
작위덴마크 왕자비
전체 이름헬레네 아델라이데 빅토리아 마리
출생일1888년 6월 1일
출생지프로이센 왕국 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 그륀홀츠
사망일1962년 6월 30일
사망지덴마크 헬레루프
배우자하랄 (1909년 결혼, 1949년 사별)
자녀페오도라, 샤움부르크-리페 공자 크리스티안의 부인
카롤리네마틸데, 덴마크 왕세자비
알렉산드리네루이세, 카스텔-카스텔 백작 루이트폴트의 부인
고름 왕자
올루프, 로센보르 백작
가문글뤽스부르크 가문
아버지프리드리히 페르디난트,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
어머니카롤리네 마틸데 폰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아우구스텐부르크 공녀

2. 초기 생애

2010년 촬영된 헬레네 공주의 출생지인 그뤼넬홀츠 성.


헬레네 공주는 1888년 6월 1일 프로이센 슐레스비히홀슈타인 툼비에 있는 그뤼넬홀츠 성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페르디난트와 그의 부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아우구스텐부르크의 카롤리네 마틸데 공주 사이에서 셋째 딸로 태어났다.

헬레네의 아버지는 글뤽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으로,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의 프리드리히 공작의 장남이자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9세의 조카였다. 헬레네 공주가 태어나기 3년 전인 1885년, 할아버지의 사망으로 아버지 프리드리히 페르디난트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이자 공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헬레네의 어머니 카롤리네 마틸데는 아우구스텐부르크 가문 출신으로, 명목상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이었던 프리드리히 8세의 딸이었다. 어머니의 언니, 즉 헬레네의 이모는 독일 제국의 마지막 황후인 아우구스테 빅토리아로, 그녀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부인이었다. 따라서 헬레네는 빌헬름 2세 황제의 처조카가 된다. 또한 어머니는 라이닝겐의 테오도라 공주의 손녀로,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이복 언니인 페오도라의 후손이기도 하다.

헬레네의 맏언니는 빅토리아 아델하이트로, 작센코부르크고타 공작 카를 에두아르트와 결혼했다.

3. 결혼과 자녀

1909년 헬레나 공주와 하랄 왕자


헬레나 공주는 1908년에 약혼하여, 1909년 4월 28일 독일 슐레스비히홀슈타인주 글뤽스부르크에서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8세와 그의 아내 스웨덴 및 노르웨이의 루이세 공주의 넷째 아이이자 셋째 아들인 덴마크의 하랄 왕자와 결혼했다.

결혼 후 하랄 왕자와 헬레나 공주는 하랄 왕자가 1907년에 구입한 코펜하겐 북쪽의 예르스보르흐스 별장에서 거주했다. 부부는 1910년에서 1923년 사이에 다섯 명의 자녀를 낳았다.

당시 왕족 여성에게 허용된 유일한 활동은 자선 활동이었으며, 헬레나 공주는 1913년 겐토프테에 고아원을 설립하기 위한 캠페인을 시작했다. 고아원 ''Spædbørnshjemmet Danmark''는 1923년에 설립되었다. 이후 그녀는 고아원과 관련 기금의 후원자 역할을 했으며, 이 역할은 딸인 캐롤라인-마틸데 공주가 이어받았다. 이 기관의 기금은 1977년 사회 및 문화 기금인 ''Danmarksfonden''을 설립하는 데 사용되었다.

헬레나와 하랄은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이름출생사망비고
페오도라 공주1910년 7월 3일1975년 3월 17일사촌인 샤움부르크-리페의 크리스티안 공자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캐롤라인-마틸데 공주1912년 4월 27일1995년 12월 12일사촌인 덴마크의 크누드 왕세자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알렉산드린-루이즈 공주1914년 12월 12일1962년 4월 26일카스텔-카스텔 백작 루이트폴트와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다.
고름 공자1919년 2월 24일1991년 12월 26일미혼으로 자녀가 없다.
올루프 공자1923년 3월 10일1990년 12월 19일앤 헤렌 도릿 푸가드-뮐러 및 리스 울프-위르겐센과 왕가의 동의 없이 결혼하여 작위를 잃고 로젠보르 백작이 되었다. 자녀를 두었다.


4. 제2차 세계 대전과 전후

헬레네 공주는 제2차 세계 대전나치 독일이 덴마크를 점령하자 독일 점령군에 동조하는 태도를 보여 덴마크 국민들의 큰 반감을 샀다.[1][2] 그녀는 덴마크 왕족 중 유일하게 독일에 협력한 인물로 지목되었으며, 이러한 친독일 행보는 가족과의 관계 악화로 이어지기도 했다.[2] 전쟁 중 그녀의 구체적인 나치 협력 행적과 그로 인한 논란은 하위 문단에서 자세히 다루어진다.

전쟁이 끝난 후, 헬레네 공주는 왕족이라는 신분 덕분에 전범 재판에 회부되지는 않았으나, 크리스티안 10세 국왕의 결정에 따라 1945년 5월 30일 덴마크에서 추방되어 독일 글뤽스부르크 성에 가택 연금되었다.[3] 이후 1947년, 남편 하랄 왕자가 위독해지자 덴마크로 돌아오는 것이 허락되었고, 1949년 남편이 사망할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4] 헬레네 공주는 남편 사후에도 덴마크에 머물렀으며, 1962년 6월 30일 헬레루프에서 사망하여 로스킬레 대성당에 묻혔다.

4. 1. 나치 협력 논란

헬레네 공주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0년 독일의 덴마크 점령 이후, 독일 점령군과 나치당에 대한 동정적인 태도로 인해 덴마크 내에서 매우 인기가 없었다. 덴마크 레지스탕스 운동은 헬레네 공주가 덴마크 왕가 구성원 중 유일하게 덴마크를 배신했다고 지목했다.[1][2] 그녀는 자신의 집에서 독일인들을 접대하고 환영했으며, 독일 대사관에서 주최한 파티에도 참석했다. 또한 덴마크 귀족 에바 레르체를 통해 다른 덴마크 내 나치 협력자들과 교류하기도 했다.[1][2] 그녀의 이러한 행보는 대중의 큰 반감을 사, 분노한 덴마크인들이 그녀가 탄 리무진의 창문을 부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2] 공공연히 독일을 지지하는 발언을 함으로써, 그녀의 행동에 당혹감을 느낀 아들들과도 사이가 멀어졌다고 전해진다.[2] 남편인 하랄 왕자조차 그녀가 연회를 주최할 때는 식당 출입을 피하려 했다.[2] 그녀의 식탁 준비를 담당했던 하인 파울 달(Paul Dal)은 코펜하겐 주재 독일 아프베어(독일 군사 정보기관)의 연락책이었으며, 전쟁 후 스파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1]

1942년 1월 18일, 헬레네 공주는 러시아 전선에서 전사한 SS 장교 크리스티안 프레데리크 폰 샬부르크의 추도식에 참석했다. 이는 당시 국왕 크리스티안 10세가 참석을 거부했던 행사였기에 더욱 논란이 되었다. 같은 해, 그녀는 사위인 크누드 왕자에게 접근하여, 국왕이 덴마크 정부 내에 나치 당원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3]

헬레네 공주는 정식 나치 요원은 아니었지만, 비공식적으로 정보를 제공하고 나치를 위한 연락책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된다.[3] 전쟁이 끝난 후, 왕족이라는 신분 때문에 재판에 회부되지는 않았으나, 모든 처분은 국왕 크리스티안 10세의 결정에 맡겨졌다. 국왕은 1945년 5월 30일 그녀를 덴마크에서 추방하고, 독일 글뤽스부르크 성에 가택 연금시키는 조치를 내렸다.[3]

1947년, 남편 하랄 왕자가 위독해지자 덴마크로 돌아오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녀는 2년 후인 1949년 3월 30일 하랄 왕자가 코펜하겐에서 사망할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4] 헬레네 공주는 남편 사후 13년을 더 살다가 1962년 6월 30일 덴마크 헬레루프에서 사망했으며, 로스킬레 대성당에 묻혔다.

4. 2. 추방과 귀환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0년 독일이 덴마크를 점령한 이후, 헬레네 공주는 독일 점령군과 나치당에 대한 동정심을 보여 덴마크 국민들로부터 큰 미움을 받았다. 덴마크 레지스탕스 운동은 헬레네 공주가 덴마크를 배신한 왕가의 유일한 구성원이라고 지목했다.[1][2] 그녀는 자신의 집에서 독일인들을 접대하고 환영했으며, 대사관에서 독일인들이 주최한 파티에도 참석했다. 또한 덴마크 귀족 에바 레르체(Eva Lerche)를 통해 덴마크 내 나치 협력자들과 교류하기도 했다.[1][2] 그녀의 이러한 친독일 행보는 국민들의 큰 반감을 사, 분노한 시민들이 그녀의 리무진 창문을 부수는 사건까지 발생했다.[2] 공공연히 독일을 지지하는 그녀의 태도 때문에 아들들과도 사이가 멀어졌으며,[2] 남편 하랄 공자조차 그녀가 연회를 열 때는 식당을 피하려 했다고 전해진다.[2] 그녀의 시종 중 한 명인 파울 달(Paul Dall)은 코펜하겐 주재 독일 아프베어의 연락책으로 활동했으며, 전쟁 후 스파이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1]

1942년 1월 18일, 헬레네 공주는 동부 전선에서 사망한 SS 장교 C.E. 폰 샬부르크의 추도식에 참석했다. 당시 국왕 크리스티안 10세는 이 추도식 참석을 거부했기에 그녀의 행동은 더욱 문제가 되었다. 같은 해, 그녀는 사위이자 크리스티안 10세의 둘째 아들인 크누드 왕자에게 국왕을 설득하여 덴마크 정부에 나치 당원을 기용하도록 해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3]

헬레네 공주는 정식 나치 협력자로 분류되지는 않았지만, 비공식적으로 정보를 제공하고 연락책 역할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3] 전쟁 후, 왕족이라는 신분 때문에 재판에 회부되지는 않았고, 그녀에 대한 처분은 전적으로 국왕 크리스티안 10세에게 맡겨졌다. 국왕은 1945년 5월 30일 그녀를 덴마크에서 추방하고, 독일의 글뤽스부르크 성에 가택 연금하도록 명령했다.[3]

1947년, 남편 하랄 공자가 위독해지자 헬레네 공주는 덴마크로 돌아오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녀는 2년 후인 1949년 3월 30일 하랄 공자가 코펜하겐에서 사망할 때까지 그의 곁을 지켰다.[4] 남편 사후 헬레네 공주는 코펜하겐을 떠나 교외에서 13년을 더 살았고, 1962년 6월 30일 헬레루프, 덴마크에서 사망했다. 그녀는 로스킬레 대성당에 남편과 함께 묻혔다.

5. 유산

(작성할 내용 없음)

5. 1. 사회 공헌

당시 덴마크 왕족 여성에게 허용된 유일한 활동은 자선 활동이었다. 헬레나 공주는 1913년 겐토프테에 고아원을 설립하기 위한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 노력의 결과로 고아원인 'Spædbørnshjemmet Danmark'가 1923년에 마침내 설립되었다. 이후 헬레나 공주는 이 고아원과 관련 기금의 보호자 역할을 맡았으며, 이 역할은 훗날 그녀의 딸인 캐롤라인-마틸데 공주가 물려받았다. 이 기관이 모은 기금은 1977년 사회 및 문화 문제 지원을 위한 기금인 'Danmarksfonden'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6. 가계



헬레나 공주는 1888년 6월 1일 프로이센 슐레스비히홀슈타인 툼비에 있는 그뤼넬홀츠 성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 공작 프리드리히 페르디난트와 그의 부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아우구스텐부르크의 카롤리네 마틸데 공주의 셋째 딸이었다.

그녀의 어머니 카롤리네 마틸데는 아우구스타 빅토리아 폰 슐레스비히홀슈타인 황후의 여동생으로,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처형이었다. 또한 라이닝겐의 테오도라 공주의 손녀이자 빅토리아 여왕의 이복 조카이기도 했다.

그녀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페르디난트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의 프리드리히 공작의 장남이었으며,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9세의 조카였다. 헬레나 공주가 태어나기 3년 전인 1885년, 그녀의 아버지는 조부인 프리드리히 공작이 사망하자 슐레스비히홀슈타인-존더부르크-글뤽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이자 공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참조

[1] 서적 Kvinnliga spioner (Female spies)
[2] 서적 Northern Crowns: The Kings of Modern Scandinavia
[3] 서적 Kvinnliga spioner
[4] 서적 Huset Glücksborg Forum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