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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무트 바이틀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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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헬무트 바이틀링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의 장군으로, 베를린 전투에서 베를린 방어 사령관을 역임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비행선 사령관으로 복무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동부 전선에서 사단장, 기갑군단장을 거쳐 포병대장으로 진급했다. 1945년 4월 베를린 방어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소련군에 항복했으며, 이후 소련에 체포되어 전쟁 범죄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수감 중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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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무트 바이틀링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43년의 헬무트 바이틀링
1943년의 바이틀링 중장
출생일1891년 11월 2일
출생지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작센주 할버슈타트
사망일1955년 11월 17일
사망지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SFSR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르 중앙 교도소
충성독일 제국 (1911-1918)
바이마르 공화국 (1918-1933)
나치 독일 (1933-1945)
군 종류독일 제국 육군
바이마르 공화국 육군
나치 독일 육군
복무 기간1911년–1945년
최종 계급포병대장
지휘
지휘 부대제40 기갑 군단
제41 기갑 군단
제56 기갑 군단
베를린 방어 지역
참전 전투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폴란드 침공
프랑스 침공
소련 침공
베를린 전투
주요 서훈백엽 검 기사 철십자훈장
정치 경력
직책베를린 방어 지역 사령관
임기 시작1945년 4월 23일
임기 종료1945년 5월 2일
이전 사령관에른스트 캐터
이후직책 폐지

2. 제1차 세계 대전과 전간기

1891년 할버슈타트에서 태어난 바이틀링은 1911년 군에 입대하여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소위로 복무했다. 그는 전쟁 후에도 축소된 바이마르 공화국 군대에 남았다. 포병 장교로서 그는 폴란드 침공프랑스 공방전에 참여했으며, 바르바로사 작전, 즉 소련 침공 초기 단계에도 참여했다.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Provinz Sachsen|작센 주de할버슈타트 (현: 작센-안할트 주) 출신이다.[2] 1911년 육군에 입대하여, 브로츠와프의 포병 연대에 배속된 후, 베를린으로 전속되었고, 1912년 8월 10일 중위로 승진한다.[2]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육군 비행선의 비행선 사령관으로서 "LZ97", "LZ113"을 지휘했으며,[3] 1917년 독일 육군이 비행선 운용을 중단하고 독일 제국 해군만이 비행선을 운용하게 된 후에는, 포병 부대의 지휘를 맡아 포대 지휘관으로서 패전을 맞이했다.[3] 종전 후에는 바이마르 공화국군에 남아, 1922년 6월 1일 제4포병연대장에 임명된다.[3] 1932년 6월 1일 소령, 1935년 9월 1일에는 중령으로 승진했다.[3]

3. 제2차 세계 대전

1942년 1월, 바이틀링은 동부 전선에서 제86보병사단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43년 10월 15일부터 1945년 4월 10일까지 XLI 기갑군단의 사령관을 역임했다.[1]

바이틀링이 지휘하던 XLI 기갑군단은 소련에서 독일 국방군이 저지른 전쟁범죄에 연루되었다. 최대 5만 명의 민간인이 의도적으로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벨로루시 파리치 지역의 "발진티푸스 수용소"에 수용되었는데, 이는 붉은 군대 병사들 사이에서 발진티푸스가 대규모로 발병하게 하려는 의도였다.[2]

이후 XLI 기갑군단은 프리드리히 호스바흐 장군이 지휘하는 제4군의 일부로 재건되어 동프로이센의 국경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3] 1945년 4월 10일, 바이틀링은 LVI 기갑군단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3]

1945년 4월 16일, 바이틀링의 LVI 기갑군단은 젤로 고지 전투에 참여했다. 테오도르 부세 장군의 제9군 소속으로 오데르 강 고지를 방어했으나, 탱크 부족과 페르디난트 쇠르너 원수 휘하로 3개 기갑 사단이 배치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4월 19일, 쇠르너의 중앙 집단군이 붕괴되면서 바이틀링의 군단은 베를린으로 후퇴했다. 4월 22일, 히틀러는 바이틀링이 후퇴했다는 오해로 그를 처형하려 했으나, 총통 벙커에서 해명하여 처형 명령은 취소되었다.

4월 23일, 히틀러는 바이틀링을 베를린 방어 구역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바이틀링은 헬무트 레이만 중장을 대신하여 이 직책을 맡았다. 휘하에는 약 4만 5천 명의 병력이 있었지만, 국민돌격대와 히틀러 유겐트 등 전투 경험이 부족한 병력이 많았다. 중앙 정부 지구 사령관은 빌헬름 몬케 친위대 여단지도자였으며, 핵심 부대는 아돌프 히틀러 경호대 친위대 대대의 800명이었다.

바이틀링은 도시 방어선을 8개 구역으로 편성하고, 제20 기갑척탄병 사단, 제9 강하엽병 사단, 기갑 사단 뮌헤베르크, SS 노르트란트 기갑척탄병 사단 등을 배치했다.

4월 26일, 벤들러블록에 작전 본부를 설치하고, 베르너 뭄메르트 소장을 뮌헨베르크 기갑 사단장으로 복귀시켰다. 같은 날 저녁, 바이틀링은 히틀러에게 베를린 탈출을 제안했지만 거부당했다.

4월 27일, 베를린 포위가 완료되었다. 바이틀링은 히틀러 유겐트 전투 부대 해산을 명령했지만, 혼란 속에서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다. 4월 29일, 발터 벵크 장군의 제12군과 합류하기 위한 돌파를 논의했다.

4월 30일, 바이틀링은 히틀러에게 탈출 허가를 다시 요청했고, 히틀러는 이를 허가했다. 히틀러와 브라운의 자살 후, 요제프 괴벨스, 마르틴 보어만, 한스 크렙스 장군과 함께 총통 벙커에서 그들의 시신 처리와 관련된 소식을 들었다. 5월 1일, 괴벨스의 자살 이후, 바이틀링은 소련군과 협상을 진행하게 되었다.

베를린 항복을 기념하는 기념 명판. "이 건물은 소련 제8 근위군의 사령관인 추이코프 원수의 사령부였습니다. 1945년 5월 2일, 베를린 방어 구역 사령관인 바이들링 장군은 이곳에서 베를린의 모든 독일군에게 즉시 적대 행위를 중단하라는 명령에 서명했습니다. 베를린에게 이것은 전쟁의 종말을 의미했습니다."


1945년 5월 2일, 바이들링은 참모장 테오도어 폰 두프빙에게 추이코프와의 회담을 주선하게 했다. 바이들링은 히틀러와 괴벨스의 자살 소식을 소련군에게 알렸고, 추이코프는 완전한 항복을 요구했다.[3]

추이코프와 바실리 소콜로프스키의 지시에 따라 바이들링은 항복 명령서를 작성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45년 4월 30일, 총통은 자살했고,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람들을 버렸습니다. 총통의 명령에 따라, 당신 독일 군인들은 탄약이 다 떨어지고, 우리의 더 이상의 저항이 무의미하다는 일반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베를린을 위해 계속 싸웠어야 했습니다. 저는 즉시 저항을 중단하라고 명령합니다. 당신이 계속 싸우는 매 시간은 베를린의 민간인과 부상자의 고통을 연장시킵니다. 소련군 총사령관과 함께 저는 즉시 싸움을 중단하라고 명령합니다.|1945년 4월 30일, 총통은 자살했고,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람들을 버렸습니다. 총통의 명령에 따라, 당신 독일 군인들은 탄약이 다 떨어지고, 우리의 더 이상의 저항이 무의미하다는 일반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베를린을 위해 계속 싸웠어야 했습니다. 저는 즉시 저항을 중단하라고 명령합니다. 당신이 계속 싸우는 매 시간은 베를린의 민간인과 부상자의 고통을 연장시킵니다. 소련군 총사령관과 함께 저는 즉시 싸움을 중단하라고 명령합니다.de 바이들링, 포병 대장, 베를린 방어의 전 구역 사령관[3]

바이들링과 추이코프의 회담은 1945년 5월 2일 오전 8시 23분에 끝났다.

3. 1. 동부 전선

1942년 1월, 바이틀링은 동부 전선에서 제86보병사단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43년 10월 15일, XLI 기갑군단의 사령관이 되었으며, 1945년 4월 10일까지 그 자리를 유지했다.[1]

바이틀링이 지휘하던 XLI 기갑군단은 소련에서 독일 국방군이 저지른 전쟁범죄에 연루되었다. 최대 5만 명의 민간인이 의도적으로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벨로루시 파리치 지역의 "발진티푸스 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이는 붉은 군대 병사들 사이에서 발진티푸스가 대규모로 발병하게 하려는 의도였다.[2]

이후 XLI 기갑군단은 프리드리히 호스바흐 장군이 지휘하는 제4군의 일부로 재건되어 동프로이센의 국경을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3] 1945년 4월 10일, 바이틀링은 지휘권을 넘겨주고 LVI 기갑군단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3]

3. 2. 베를린 전투

1945년 4월 16일, 바이틀링은 젤로 고지 전투에 참여했다. 그의 LVI 기갑군단은 테오도르 부세 장군의 제9군 소속으로, 오데르 강 위의 고지를 방어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탱크 부족과 페르디난트 쇠르너 원수 휘하로 3개 기갑 사단이 배치되면서 어려움을 겪었다.

4월 19일, 쇠르너의 중앙 집단군이 붕괴되면서 바이틀링의 군단은 베를린으로 후퇴했다. 4월 22일, 히틀러는 바이틀링이 후퇴했다는 오해로 그를 처형하려 했으나, 바이틀링이 총통 벙커에 나타나 해명하면서 처형 명령은 취소되었다.

4월 23일, 히틀러는 바이틀링을 베를린 방어 구역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바이틀링은 헬무트 레이만 중장을 대신하여 이 직책을 맡게 되었다. 그의 휘하에는 약 4만 5천 명의 병력이 있었지만, 국민돌격대와 히틀러 유겐트 등 전투 경험이 부족한 병력이 많아 전력은 약화된 상태였다. 중앙 정부 지구 사령관은 빌헬름 몬케 친위대 여단지도자였으며, 그의 핵심 부대는 아돌프 히틀러 경호대 친위대 대대의 800명이었다.

바이틀링은 도시 방어선을 8개 구역으로 편성하고, 제20 기갑척탄병 사단, 제9 강하엽병 사단, 기갑 사단 뮌헤베르크, SS 노르트란트 기갑척탄병 사단 등을 배치했다.

4월 26일, 바이틀링은 벤들러블록에 작전 본부를 설치했다. 같은 날, 베르너 뭄메르트 소장을 뮌헨베르크 기갑 사단장으로 복귀시켰다. 그날 저녁, 바이틀링은 히틀러에게 베를린 탈출을 제안했지만, 히틀러는 거부했다.

4월 27일, 베를린 포위가 완료되었다. 바이틀링은 히틀러 유겐트 전투 부대 해산을 명령했지만, 혼란 속에서 제대로 실행되지 않았다.

4월 29일, 바이틀링은 발터 벵크 장군의 제12군과 합류하기 위한 돌파를 논의했다.

4월 30일, 바이틀링은 히틀러에게 탈출 허가를 다시 요청했고, 히틀러는 이를 허가했다. 히틀러와 브라운의 자살 후, 바이틀링은 요제프 괴벨스, 마르틴 보어만, 한스 크렙스 장군과 함께 총통 벙커에서 그들의 시신 처리와 관련된 소식을 들었다.

5월 1일, 괴벨스의 자살 이후, 바이틀링은 소련군과 협상을 진행하게 되었다.

3. 3. 항복



1945년 5월 2일, 바이들링은 참모장 테오도어 폰 두프빙에게 추이코프와의 회담을 주선하게 했다. 바이들링은 히틀러와 괴벨스의 자살 소식을 소련군에게 알렸고, 추이코프는 완전한 항복을 요구했다.[3]

추이코프와 바실리 소콜로프스키의 지시에 따라 바이들링은 항복 명령서를 작성했다. 바이들링이 작성한 문서는 다음과 같다.

1945년 4월 30일, 총통은 자살했고,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람들을 버렸습니다. 총통의 명령에 따라, 당신 독일 군인들은 탄약이 다 떨어지고, 우리의 더 이상의 저항이 무의미하다는 일반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베를린을 위해 계속 싸웠어야 했습니다. 저는 즉시 저항을 중단하라고 명령합니다. 당신이 계속 싸우는 매 시간은 베를린의 민간인과 부상자의 고통을 연장시킵니다. 소련군 총사령관과 함께 저는 즉시 싸움을 중단하라고 명령합니다.|1945년 4월 30일, 총통은 자살했고,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람들을 버렸습니다. 총통의 명령에 따라, 당신 독일 군인들은 탄약이 다 떨어지고, 우리의 더 이상의 저항이 무의미하다는 일반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베를린을 위해 계속 싸웠어야 했습니다. 저는 즉시 저항을 중단하라고 명령합니다. 당신이 계속 싸우는 매 시간은 베를린의 민간인과 부상자의 고통을 연장시킵니다. 소련군 총사령관과 함께 저는 즉시 싸움을 중단하라고 명령합니다.de 바이들링, 포병 대장, 베를린 방어의 전 구역 사령관[3]

바이들링과 추이코프의 회담은 1945년 5월 2일 오전 8시 23분에 끝났다.

5월 1일, 소련군과의 정전 교섭이 실패하고 히틀러의 후계자 괴벨스가 자살하자, 바이틀링은 베를린 탈출을 지시하고 소련군과의 교섭을 담당하게 되었다. 5월 2일 오전 6시 30분, 바이틀링은 뒤핑과 함께 소련 제8 근위군 사령관 바실리 추이코프에게 항복을 신청하고, 오전 8시 23분에 추이코프와 회담했다. 바이틀링은 추이코프와 바실리 소콜로프스키의 명령에 따라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전투를 계속하는 각 부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방송을 하고 문서 사본을 배포하여 오후 3시에 전투가 종료되었다.[3]

1945년 4월 30일, 총통은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람들을 남겨두고 자살했다. 병사 여러분은 탄약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또, 저항이 무의미해질 것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총통의 명령에 따라 베를린 방어를 위해 싸워야 했을 것이다. 나는 전투의 즉시 중지를 명령한다.|1945년 4월 30일, 총통은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람들을 남겨두고 자살했다. 병사 여러분은 탄약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또, 저항이 무의미해질 것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총통의 명령에 따라 베를린 방어를 위해 싸워야 했을 것이다. 나는 전투의 즉시 중지를 명령한다.de 전 베를린 방위군 사령관 바이틀링 포병대장

4. 전후

소련군은 바이틀링을 체포하여 소련으로 이송했다. 그는 처음에는 부티르카 감옥과 레포르토보 감옥에 수감되었다. 1952년 2월 27일, 소련 최고 법원 군사 합의부는 점령된 소련에서 저지른 전쟁 범죄로 그에게 25년의 징역형을 선고했다.[1] 1955년 11월 17일, 블라디미르의 KGB 구금 중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2] 그는 감옥 묘지에 이름 없는 무덤에 묻혔다. 1996년 4월 16일, 러시아 연방 수석 군 검찰청은 바이틀링을 비재활 처리했다.[3] KGB 문서에는 사인은 "동맥경화에 따른 순환기 질환"으로 기록되어 있다.

5. 훈장


  • 1942년 6월 23일 독일 십자 훈장 금장 수여 (당시 소장, 제86 보병 사단 사령관)[1]
  • 철십자 기사 십자 훈장 (검, 오크 잎 포함)
  • * 1943년 1월 15일 기사 십자 훈장 수여 (당시 소장, 제86 보병 사단 사령관)[2]
  • * 1944년 2월 22일 오크 잎 훈장 수여 (당시 포병 대장, 제41 기갑 군단 사령관)[3]
  • * 1945년 1월 21일 검 훈장 수여 (당시 포병 대장, 제41 기갑 군단 사령관)

6.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헬무트 바이틀링은 제2차 세계 대전 말 베를린 공방전을 다룬 여러 서적과 영화에서 등장한다.

6. 1. 서적


  • 요아힘 페스트 저, 《히틀러 최후의 12일》 (이와나미 쇼텐, 2005년) ISBN 4-00-001934-1
  • 다카하시 요시후미 저, 《속 라스트 오브 캄프후르페》 (다이니폰 카이가, 2005년) ISBN 4-499-22748-8
  • 앤터니 비버 저, 《베를린 함락 1945》 (하쿠스이샤, 2004년) ISBN 4-56-002600-9

6. 2. 영화


  • 몰락 ~ 최후의 12일~ (Der Untergangde): 2004년에 공개된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합작 영화이다.
  • 베를린 함락 1945: 2008년에 공개된 독일, 폴란드 합작 영화이다.

참조

[1] 문서 Обвинительное заключение по следственному делу №5125 в отношении генерала артиллерии Г. Вейдлинга. 11 декабря 1951 г. http://doc20vek.ru/n[...] 1951-12-11
[2] 웹사이트 Helmuth Weidling https://www.liberati[...] 2024-03-31
[3] 웹사이트 Заключение Главной военной прокуратуры РФ № 5уд-1758-95 об отказе в реабилитации Г. Вейдлингу. 16 апреля 1996 г. http://docs.historyr[...] 2022-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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