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보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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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마르틴 보어만은 나치 독일의 고위 관료로, 아돌프 히틀러의 최측근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홀로코스트와 전쟁 범죄에 깊이 관여했다. 루돌프 헤스의 비서로 시작하여, 헤스의 영국 망명 이후 당 관방장(Parteikanzlei)을 맡아 히틀러에 대한 정보 접근을 통제하며 권력을 강화했다. 1945년 히틀러의 유언에 따라 나치당의 당 장관이 되었으나, 베를린 전투 중 탈출을 시도하다 사망했다. 1972년 유골이 발견되어 사망이 공식 확인되었지만, 생존설이 끊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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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틴 보어만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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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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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마르틴 루트비히 보어만 |
별칭 | 갈색의 에미넌스 |
출생 | 1900년 6월 17일 |
출생지 | 베겔레벤, 독일 제국 |
사망 | 1945년 5월 2일 (44세) |
사망 장소 | 베를린, 독일 |
사망 원인 | 청산가리를 이용한 자살 |
국적 | 독일국 |
배우자 | 게르다 부흐 (1929년 9월 2일 결혼) |
자녀 | 마르틴 아돌프 보어만을 포함한 10명 |
친척 | 발터 부흐(장인), 알베르트 보어만(형) |
정치 경력 | |
소속 정당 |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
국회의원 | 1933년 - 1945년 (5구 프랑크푸르트 안 데어 오데르 지역) |
기타 직책 | 국민돌격대 정치 및 조직 지도자 (1944년 9월 25일 – 1945년 5월 2일) 총통 비서 겸 개인 부관 (1943년 4월 12일 – 1945년 4월 30일) 나치 독일 무임소 장관 (1941년 5월 29일 – 1945년 4월 30일) |
주요 직책 | |
당 장관 (나치당 당수) | 임기: 1945년 4월 30일 – 1945년 5월 2일 전임: 아돌프 히틀러(총통으로서) 후임: 폐지 |
총통 개인 비서 | 임기: 1943년 4월 12일 – 1945년 4월 30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 전임: 자신 (총통 개인 비서로서) 후임: 폐지 |
당 관방장 | 임기: 1941년 5월 12일 – 1945년 5월 2일 전임: 루돌프 헤스(총통 대리로서) 후임: 폐지 |
총통 대리 비서실장 | 임기: 1933년 7월 1일 – 1941년 5월 12일 총통 대리: 루돌프 헤스 |
기타 직위 | "3인 위원회" 위원 (1943년 1월 – 8월) 국가 장관 (무임소) (1941년–1945년) 대독일 국회 의원 (1933년–1945년) 나치당 국가지휘자 (1933년–1945년) 독일 산업 아돌프 히틀러 기금 관리자 (1933년–1945년) |
군사 경력 | |
소속 | 독일 제국 육군 친위대 |
복무 기간 | 1918년–1919년 (육군) 1927년–1945년 (친위대) |
최종 계급 | 육군 포병 이등병 친위대 대장 |
소속 부대 | 제55 야전 포병 연대 |
종군 번호 | 278,267 (SS) |
범죄 관련 정보 | |
유죄 판결 | 평화에 대한 죄 모의 침략 범죄 전쟁 범죄 인도에 반한 죄 |
재판 | 뉘른베르크 재판 |
형벌 | 결석 재판으로 사형 선고 |
재판 당시 상태 | 기소 전 사망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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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루돌프 헤스가 영국으로 가 체포되어 억류되자, 1941년 보어만은 그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부관이 된 뒤에는 다른 고위층 인사들과 막후 권력 투쟁을 벌여 자신의 입지를 강화했고, 히틀러로부터 절대적인 신임을 받아 '퓌러 비서'라는 사실상 정치적 서열 2위의 자리에 올랐다.[56] 이후 홀로코스트나 슬라브족에 대한 전쟁 범죄와 은폐 등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전쟁 말기 헤르만 괴링이나 하인리히 힘러를 반역자로 간주해 실각시키는데 기여했고, 히틀러는 마지막 유언에서 보어만을 나치당 총리로 임명했다.
히틀러 자살 후 소련과 단독 강화를 추진하다 실패한 뒤, 덴마크 접경 독일 북부로 탈출을 시도하다 행방불명되었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는 궐석 피고로 기소되어 사형을 언도받았다. 아르투어 악스만은 베를린의 한 다리 밑에서 보어만의 시체를 보았다고 증언했으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아 남아메리카나 스페인으로 도피해 은거하고 있다는 추측이 나오기도 했다.
1972년 베를린의 한 철도역 부근 도로공사장에서 유골들이 발굴되었고, 보어만과 루트비히 슈툼페거의 유골로 확인되었다. 서독 정부는 보어만의 사망을 공식 발표했고, 법원에서도 사망을 인정했다. 1998년 유골의 DNA 감정을 거쳤고, 보어만의 유골이 맞다고 입증되었다. 유골은 네오나치들의 우상화를 막기 위해 화장되어 발트해에 뿌려졌다. 하지만 현재도 이 유골의 진위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다. 베를린 전투 당시 수십만의 시체들이 아무렇게나 널려 매장되었기에 보어만의 시체를 찾기란 불가능하며, 유골 치아에서 발견된 아말감은 전후 치과치료에서 행해진 흔적이기에 인골이 다른 사람의 것이라는 주장이다. 아돌프 아이히만은 뉘른베르크 재판 당시 보어만이 남미에 살아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43]
2. 1. 초기 생애와 교육
보어만은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현재의 작센안할트 주) 할버슈타트 근교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테오도어 보어만(Theodor Bormann)은 우체국 직원이었다.[4] 어머니는 그의 아내이자 우편 대리인의 딸인 안토니에(Antonie)였다. 아버지 테오도어는 짧은 기간 동안 프로이센 흉갑기병 연대 군악대에서 트럼펫 연주자로 활동한 적이 있었다.[4] 아버지의 군대 내 계급은 특무상사였다.[5][6]테오도어와 안토니에 부부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보어만이 장남이었다. 동생으로는 알베르트 보어만이 있다. 보어만의 "마르틴"이라는 이름은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에서 따온 것이다.[7] 아버지 테오도어는 1903년, 보어만이 3세 때 사망했다. 반년 후, 어머니 안토니에는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은행 지점장 알베르트 폴호른(Albert Vollhorn)과 재혼했다.[8][9][10]
1909년 보어만 가족은 계부와 함께 바이마르로 이주했다.[11] 바이마르의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바이마르의 실과 김나지움에 입학했다.[12] 14세 때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보어만은 1918년 육군 제55포병연대에 입대했지만, 전선에는 투입되지 않았다. 그는 뉘른베르크에서 장교의 당번병으로 근무했다. 군에서의 최종 계급은 포병 이등병이었다.[13][14]
전후, 계부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메클렌부르크의 대농장에서 농업 보조원으로 일하게 되었다.[15] 곧 농장주 헤르만 폰 트로이엔펠스(Hermann von Treuenfels)에게 비서·회계 담당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메클렌부르크, , 의 농장 관리를 맡게 되었다. 트로이엔펠스는 독일 의용군의 활동에 공감하여 의용군 병사들을 자신의 농장에 받아들였다.[16] 보어만은 그들의 관리에도 힘썼다.[17][18] 또한 보어만 자신도 1922년에 중위가 이끄는 "로스바흐 의용군"에 입대했다. 동 의용군의 메클렌부르크 지구의 부장 겸 회계 책임을 맡았다.[19] 1922년 12월에는 독일 민족 자유당 (DVFP)에 입당했다.[20]
1923년 5월 31일 밤, 로스바흐 의용군의 멤버인 초등학교 교사 가 린치 살해되었다. 카도는 의용군으로부터 "볼셰비키 스파이"라는 혐의를 받아, 루르 지방의 프랑스 점령군에 대한 저항 영웅이었던 를 점령군에게 밀고했다고 의심받았으며, 또한 의용군에게 빌린 거액을 갚지 않아 회계 책임자인 보어만과 금전적인 문제를 겪고 있었다. 1923년 7월에 보어만은 카도 살해 범인 중 한 명으로 체포되었다. 1924년 3월 12일에 라이프치히에서 다른 체포자 루돌프 페르디난트 회스 (후의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 수용소 소장) 등과 함께 재판에 회부되어 금고 1년의 형을 선고받았다.[21][22][23]
1925년 3월에 형기를 마치고 석방되었다.[24] 헤르만 폰 트로이엔펠트 소유의 파르힘 농장으로 돌아가 농장 관리 업무에 복귀했지만, 1925년 5월에는 이 직책을 떠나게 되었다.[25] 폰 트로이엔펠트의 부인에게 손을 대서 주인의 불쾌감을 샀기 때문이라고도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26]
2. 2. 나치당 경력
1927년, 보어만은 나치당에 입당하여(당원 번호 60,508) 지역 언론 담당자로 일했으나, 부족한 연설 능력으로 인해 조직력을 활용한 사업 관리자로 활동했다.[28][29] 보어만은 연설가로서 무능하여 조리 있게 말하지 못하고 말을 더듬는 경우가 많아 청중들의 조소를 받았고, 결국 당은 보어만의 연설을 금지했다.[31][32]1928년 10월, 보어만은 뮌헨으로 이주하여 SA 보험 사무실에서 일했다. 보험 회사들이 나치당원의 폭력적 충돌로 인한 부상이나 사망에 대한 보장을 제공하지 않자, 1930년 보어만은 당이 직접 관리하는 복지 및 구호 기금인 ''Hilfskasse der NSDAP''(나치당 보조 기금)을 설립했다.[35] 각 당원은 보험료를 납부해야 했고, 당 업무 중 입은 부상에 대해 보어만의 재량에 따라 보상을 받았다. 그는 재정 전문가로서 명성을 얻었고, 많은 당원들은 기금으로부터 혜택을 받은 후 그에게 개인적으로 빚을 졌다고 느꼈다.[36][37]
1933년 1월 권력 장악(나치당의 권력 장악) 이후, 보어만은 1933년 7월 1일에 루돌프 헤스의 개인 비서 겸 참모장이 되었다.[40] 1933년 10월, 히틀러는 보어만을 나치당 전국지도자(Reichsleiter)로 임명했고, 11월에는 국회의원이 되었다.[50][51] 1934년 6월, 보어만은 히틀러의 측근으로 인정받아 그의 개인 재정을 관리하고, 베르크호프 개조를 감독했다.[48][49]

2. 3. 권력 강화와 전쟁 범죄
1941년 5월 10일, 루돌프 헤스가 영국과의 평화 협상을 위해 단독 비행을 떠난 후, 헤스의 이전 임무는 보어만에게 배정되었고, ''Parteikanzlei''(당 관방)의 수장이란 직함을 부여받았다.[56] 이 직위에서 그는 모든 나치당 임명에 대한 책임을 졌으며 히틀러에게만 답변했다.[63] 5월 29일 퓌러 칙령(''Führererlass'')에 따라 보어만은 전쟁 내각으로 활동한 6인 제국 국방부 장관 회의에서 헤스의 뒤를 이었다. 그는 동시에 ''Reichsminister''에 해당하는 각료급 직위를 무임소 장관으로 받았다.[58] 측근들은 그를 "갈색 권력자"라고 불렀다.[77]보어만은 히틀러의 개인 비서로서 정보의 흐름과 히틀러에 대한 접근을 통제하기 시작했다.[59][60] 1943년 4월 12일에는 "총통 비서(Sekretär des Führers)"라는 직함을 갖게 되었다.[59][60]
보어만은 유대인, 정복된 동부 민족, 전쟁 포로를 다루는 문제에 있어서 항상 극도로 가혹하고 과격한 조치를 옹호했다.[66] 그는 1935년 뉘른베르크법을 동부의 병합된 영토로 확장하는 1941년 5월 31일의 포고령에 서명했다.[67] 그 후, 그는 대독일에서 영구적인 최종 해결은 이민으로는 더 이상 해결할 수 없으며, "동부의 특별 수용소"에서 가차 없는 힘의 사용, 즉 나치 절멸 수용소에서의 절멸을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고 규정하는 1942년 10월 9일의 포고령에 서명했다.[67] 1943년 7월 1일 보어만이 서명한 또 다른 포고령은 아돌프 아이히만에게 유대인에 대한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했다.[67]
보어만은 기독교 교회의 지속적인 박해를 주도한 주요 인물 중 한 명이었다. 1937년 2월, 그는 성직자 당원 가입을 금지했다. 다음 해에는 당직을 맡고 있는 모든 성직자를 해임하고, 성직자가 되려는 당원은 당원 자격을 포기해야 한다고 결정했다. 1941년에는 "국가 사회주의와 기독교는 화해할 수 없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2. 4. 종전과 죽음
1945년 초, 보어만은 히틀러가 한 발언을 편집한 보어만 회담록을 작성했다. 역사가들은 보어만이 히틀러의 원래 발언에 어느 정도까지 편집을 가했는지, 그리고 그 내용이 உண்மைய인지에 대해 논쟁을 벌인다.[43]1945년 1월 16일, 히틀러는 베를린의 총통 벙커로 본부를 옮겼고, 보어만, 그의 비서 엘제 크뤼거 등과 함께 4월 말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총통 벙커는 시내 중심부 정부 지구에 있는 총리 관저 정원 아래에 있었다. 베를린 전투는 1945년 4월 16일에 시작된 소련군의 마지막 주요 공세였다. 4월 19일경, 붉은 군대는 도시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4월 20일, 히틀러는 56번째 생일을 맞아 지상으로 마지막 외출을 했다. 총리 관저의 폐허가 된 정원에서 그는 히틀러 유겐트 소년병들에게 철십자 훈장을 수여했다. 그날 오후, 베를린은 처음으로 소련군의 포격을 받았다. 4월 23일, 알베르트 보어만은 벙커를 떠나 오버잘츠베르크로 갔다. 그와 다른 몇몇은 히틀러의 명령으로 베를린을 떠났다.
1945년 4월 29일 이른 아침, 빌헬름 부르크도르프, 괴벨스, 한스 크레브스 그리고 보어만은 아돌프 히틀러의 유언에 입회하고 서명했다. 히틀러는 유언장에서 보어만을 "나의 가장 충실한 당 동지"라고 칭하며 유언 집행자로 지명했다. 같은 날 밤, 히틀러는 에바 브라운과 결혼식을 올렸다.
소련군이 베를린 중심부로 계속 진격하면서, 히틀러와 브라운은 4월 30일 오후에 아돌프 히틀러의 죽음을 맞이했다. 브라운은 청산염을 복용했고, 히틀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그들의 시신은 총리 관저 정원으로 옮겨져 불태워졌다. 히틀러의 유언에 따라 보어만은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당 장관으로 임명되어 당 최고 지위를 공식적으로 확인받았다. 카를 되니츠 대제독은 새로운 독일 대통령으로, 괴벨스는 정부 수반이자 독일 총리로 임명되었다. 히틀러는 총통 자리에 후계자를 지명하지 않았다. 괴벨스와 그의 아내 마그다 괴벨스는 다음 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헬무트 바이드링 포병 대장이 5월 2일 소련 제8근위군 사령관 바실리 추이코프 장군에게 도시를 무조건 항복시키면서 베를린 전투는 끝났다.
1945년 5월 1일 오후 11시경, 보어만은 친위대 의사 루트비히 슈툼페거, 히틀러 유겐트 지도자 아르투어 악스만, 히틀러의 조종사 한스 바우어와 함께 소련군의 포위망을 뚫으려는 여러 그룹 중 하나에 속해 총통 벙커를 떠났다.[70][71] 보어만은 히틀러의 유언장을 가지고 있었다.[70] 일행은 총통 벙커에서 베를린 지하철 터널을 통해 베를린 프리드리히슈트라세역까지 걸어가 지상으로 나왔다.[72] 그들 중 일부는 타이거 II 뒤에 숨어 슈프레 강을 바이덴담 다리에서 건너려 했다. 전차는 대전차포에 맞아 보어만과 슈툼페거는 땅에 쓰러졌다.[70][71] 보어만, 슈툼페거, 그리고 다른 몇몇은 세 번째 시도 끝에 강을 건넜다.[70][71] 보어만, 슈툼페거, 악스만은 철로를 따라 레르터역으로 걸어갔고, 악스만은 일행과 헤어져 반대 방향으로 갔다.[73] 악스만은 소련군 초병과 마주치자 되돌아왔다. 그는 철도 조차장 근처 다리에서 보어만과 슈툼페거의 시신을 발견했다.[73][74] 그는 자세히 확인할 시간이 없어 그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없었다.[71] 소련군은 보어만의 시신을 찾았다고 인정한 적이 없었기에, 그의 운명은 수년간 불확실했다.[72]
전쟁 후 혼란스러운 시기에 보어만의 행방에 대한 엇갈린 보고가 나왔다. 아르헨티나, 스페인 등에서 목격되었다는 보고가 있었다.[75] 보어만이 연락을 시도할 경우를 대비해 그의 아내는 감시를 받았다.[76] 보어만의 운전기사였던 야코프 글라스는 1946년 7월에 뮌헨에서 보어만을 보았다고 주장했다.[77] 보어만이 살아있을 경우를 대비해, 1945년 10월과 11월에 뉘른베르크 재판 관련 공고가 신문과 라디오에 여러 차례 게재되었다.[78]
재판은 1945년 11월 20일에 시작되었다. 보어만의 사망을 확인할 증거가 부족했기에, 국제군사재판소는 헌장 제12조에 따라 그를 ''궐석''으로 재판했다.[79] 그는 침략 전쟁 공모, 전범 행위, 반인륜적 범죄 혐의를 받았다.[80] 그의 기소는 토마스 F. 램버트 주니어 중위에게, 변호는 프리드리히 베르골트에게 배정되었다.[79][81] 검찰은 보어만이 계획에 참여했으며, 정권이 추진한 사실상 모든 반유대주의 법안에 공동 서명했다고 주장했다.[66] 베르골트는 그가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법원이 유죄 판결을 내릴 수 없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보어만의 활동이 은밀했기 때문에 베르골트는 그의 의사 결정 참여 정도에 대한 검찰 주장을 반박할 수 없었다.[77] 보어만은 전범 및 반인륜적 범죄에 대해 유죄 판결을 받았고, 침략 전쟁 공모 혐의에 대해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46년 10월 1일, 그는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며, 나중에 살아있는 것으로 밝혀지면 새로운 사실을 고려해 형량을 감형하거나 뒤집을 수 있다는 조항이 있었다.[80]
수십 년 동안, CIA와 서독 정부를 포함한 여러 조직이 보어만을 찾으려 했지만 실패했다.[82] 1964년, 서독 정부는 보어만 체포에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자에게 10만 독일 마르크 (2023년 기준 약 248000EUR 또는 약 270000USD)의 현상금을 걸었다.[83] 호주, 덴마크, 이탈리아, 남아메리카 등 전 세계에서 그의 목격담이 보고되었다.[84][85] 육군 정보 장교 라인하르트 겔렌은 자서전에서 보어만이 소련 스파이였으며 모스크바로 탈출했다고 주장했다.[86] 나치 사냥꾼 시몬 비젠탈은 보어만이 남아메리카에 살고 있다고 믿었다.[87] 서독 정부는 1971년에 보어만을 찾는 수색을 종료했다고 발표했다.[88]
1963년, 퇴역 우편 노동자 알베르트 크룸노우는 경찰에게 1945년 5월 8일경, 소련군이 자신과 동료들에게 레르터역(현재 베를린 중앙역) 근처 철도 다리에서 발견된 두 구의 시신을 묻으라고 명령했다고 말했다. 한 구는 ''베르마흐트'' 군복을, 다른 한 구는 속옷만 입고 있었다.[89] 크룸노우의 동료 바겐프폴은 두 번째 시신에서 루드비히 슈툼페거로 확인되는 SS 의사의 급여 장부를 발견했다.[90] 바겐프폴은 급여 장부를 우편 국장 베른트에게 넘겼고, 베른트는 소련군에게 넘겼다. 소련군은 그것을 파기했다. 바겐프폴은 1945년 8월 14일 슈툼페거의 아내에게 편지를 써서 남편의 시신이 "베를린 NW 40, 인발리덴슈트라세 63의 알펜도르프 부지 내에 여러 다른 사망 군인들의 시신과 함께 매장되었다"고 알렸다.
1965년 7월 20~21일에 악스만과 크룸노우가 지정한 장소에서 발굴을 했지만 시신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1972년 12월 7일, 건설 노동자들이 서베를린 레르터역 근처에서 크룸노우가 묻었다고 주장한 지점에서 약 12m 떨어진 곳에서 인골을 발견했다. 부검 결과, 두 해골 턱에서 유리 조각이 발견되어 청산가리 캡슐을 깨물어 자살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1945년 후고 블라슈케가 기억을 토대로 재구성한 치과 기록은 한 해골을 보어만으로 식별했으며, 쇄골 손상은 보어만의 아들들이 1939년 승마 사고로 입었다고 보고한 부상과 일치했다. 법의학 검사관들은 해골 크기와 두개골 모양이 보어만과 같다고 판단했다. 마찬가지로, 두 번째 해골은 슈툼페거의 것으로 여겨졌는데, 마지막으로 알려진 신체 비율과 유사했기 때문이다. 두개골 이미지를 해당 남성의 얼굴 사진에 겹쳐 만든 합성 사진은 완벽하게 일치했다. 1973년 초, 두개골에 대한 얼굴 복원이 이루어져 시신의 신원을 확인했다. 그 직후, 서독 정부는 보어만의 사망을 선언했다. 보어만의 가족은 추가적인 법의학 검사가 필요할 경우를 대비해 시신을 화장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가족은 매장을 거부하고 유해 소유를 거부했다. 뼈는 카를스루에 검찰청 금고에 보관되었으며, 당시 연방 대법원과 함께 사용되었다.
1998년, 독일 당국이 두개골 조각에 대한 유전자 검사를 명령했을 때 유해가 보어만의 것임이 확인되었다. 이 검사는 뮌헨 루드비히 막시밀리안 대학교 법의학 교수 볼프강 아이젠멩거가 이끌었다. 친척 중 한 명의 DNA를 사용한 검사 결과 두개골이 보어만의 것임이 밝혀졌다.
보어만의 유해는 가족에게 인도된 후 화장되었으며, 1999년 8월 16일 발트해에 뿌려졌다.
3. 개인 생활
보어만은 1929년 9월 2일, 발터 부흐의 딸이자 19세였던 de(1909년 10월 23일 ~ 1946년 3월 23일)과 결혼했다.[76] 발터 부흐는 당 내 분쟁 해결 기구인 조사 및 조정 위원회(USCHLA) 의장이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부흐의 집을 자주 방문했고, 보어만은 여기서 히틀러를 만났다. 루돌프 헤스와 히틀러는 보어만의 결혼식 증인이었다.[65] 보어만은 배우 만자 베렌스를 포함한 여러 정부(情婦)를 두었다.[65]
마르틴과 게르다 보어만 사이에는 10명의 자녀가 있었다.
이름 | 출생일 | 사망일 | 비고 |
---|---|---|---|
마르틴 아돌프 보어만 | 1930년 4월 14일 | 2013년 3월 11일 | "아돌프 마르틴 보어만"으로 태어났으며, 대부였던 히틀러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크뢴치"(황태자의 줄임말)라고 불렸다. |
일제 보어만 | 1931년 7월 9일 | 1958년 | 쌍둥이 자매 에렌가르트는 출생 직후 사망. 일제는 대모 일제 헤스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고, 1941년 루돌프 헤스가 영국으로 비행한 후 "아이케"로 이름 변경. |
이르가르트 보어만 | 1933년 7월 25일 | ||
루돌프 게르하르트 보어만 | 1934년 8월 31일 | 대부 루돌프 헤스의 이름을 따서 지어짐. 헤스가 스코틀랜드로 비행한 후 "헬무트"로 이름 변경. | |
하인리히 휴고 보어만 | 1936년 6월 13일 | 대부 하인리히 힘러의 이름을 따서 지어짐. | |
에바 우테 보어만 | 1938년 5월 4일 | ||
게르다 보어만 | 1940년 8월 4일 | ||
프리츠 하르트무트 보어만 | 1942년 4월 3일 | ||
폴커 보어만 | 1943년 9월 18일 | 1946년 |
게르다 보어만과 아이들은 1945년 4월 25일 베르히테스가덴 폭격 이후 오버잘츠베르크를 탈출하여 이탈리아로 갔다. 게르다는 1946년 3월 23일 이탈리아 메라노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보어만의 남은 아홉 자녀는 전쟁에서 살아남았고 위탁 가정에서 보살핌을 받았다. 장남 마르틴은 로마 가톨릭 사제로 서품되어 아프리카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다. 그는 나중에 사제직을 떠나 결혼했다.
보어만은 아내 외에도 애인을 두었을 뿐만 아니라, 그 사실을 아내에게 숨기려 하지 않았다. 아내는 보어만이 "자신의 바람기는 국가 사회주의의 더 큰 이익으로 이어진다"는 설명을 믿고 있었으며, 자신과 애인을 번갈아 출산하도록 하여, 언제든지 동원할 수 있는 아내를 갖도록 보어만에게 권했다.[65]
4. 평가 및 유산
보어만은 아돌프 히틀러의 최측근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며 나치의 전쟁 범죄에 깊숙이 관여한 인물로 평가된다. 특히 홀로코스트와 슬라브족에 대한 탄압을 주도하고 은폐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79][80] 히틀러는 보어만을 "황소 같은 남자"라고 칭하며 그의 잔혹함과 충성심을 높이 평가했고, "보어만에게 트집을 잡는 자는 나에게 트집을 잡는 것과 같다"며 무한한 신뢰를 보였다.[81]
그러나 보어만은 개인적인 야망과 권력욕이 강했으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냉혹한 인물이기도 했다. 헤르만 괴링은 그를 "히틀러의 극히 사적인 일들을 훤히 알고 있는" 인물로 묘사하며, 그가 히틀러의 신임을 이용해 권력을 남용했다고 비판했다.[82][83] 한스 프랑크는 보어만을 "히틀러에게 아첨하는 비굴한 하인"이라고 평가했다.[84]
전쟁 이후 보어만의 행방은 오랫동안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는 궐석 피고로 기소되어 사형을 선고받았지만,[79] 그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아 남아메리카 도피설 등 다양한 생존설이 제기되었다. 1972년 베를린에서 그의 유골이 발견되고 1998년 DNA 검사를 통해 신원이 확인되면서 공식적으로 사망이 인정되었지만, 여전히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혹은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1972년 The Daily Mirror영어는 보어만이 가톨릭 교황청이 발급한 여권을 받아 남미로 도피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그는 아르헨티나에 도착하여 페론 내각의 환대를 받았으며, 2억달러라는 거액의 몸값을 지불하고 영주권을 얻었다고 한다. 1980년대 아르헨티나에서 민선 정부가 수립된 후, 더러운 전쟁 관련자 처벌과 함께 나치 전범 문제가 대두되었다.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은 나치 관련 기밀문서를 공개하며 전범 진상 조사에 협조했고, 그 결과 아르헨티나가 나치 전범들의 피난처였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2]
4. 1. 대한민국에서의 논란
1980년대 대한민국에서 마르틴 보어만의 나치 전범 행적이 드러나면서, 그를 비호했던 아르헨티나 정부에 대한 비판 여론이 일었다. 특히 군사 정권 시절, 아르헨티나가 나치 전범들의 도피처였다는 사실은 민주화 운동 세력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2] 보어만의 생존설은 대한민국의 언론에서도 다루어졌으며, 이는 독재 정권에 대한 비판과 연결되기도 했다.5. 관련 작품
- 아돌프에게 고한다 - 역사적 사실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히틀러에게 충실하게 헌신했지만, 본작에서는 패전 직전, 히틀러가 유언으로 데니츠나 괴벨스보다 낮은 직책만 부여한 점과 현실을 외면하는 태도를 계속하는 것에 염증을 느껴, 히틀러를 자살로 위장하여 살해하라는 지시를 부하인 램프에게 내린다.
- BLOOD+
- 고르고 13 - 빅 코믹에서 1982년 4월 발표된 제185화 '붕괴 제4제국 늑대의 둥지'에 등장한다. 남미로 도망쳐, 네오 나치의 지도자가 된다.
- 솔저 블루스 - 최종화에 등장한다. 남미로 도망쳐, 네오 나치의 지도자가 된다.
- 히틀러 - 최후의 12일 - 토마스 티메가 연기했다.
- 브라질에서 온 소년
- 미션 임파서블
- 높은 성의 사나이 - 필립 K. 딕의 역사 대체 SF. 독일과 일본이 연합국에 승리한 설정이다.
- 더 그레이트 록큰롤 스윈들
- 나의 제자, 히틀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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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rman Inflation Rate Calculator to calculate Price Change
https://www.lawyer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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