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바로사 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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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바르바로사 작전은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이 소련을 기습 침공한 군사 작전으로,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 민족의 생존권 확보를 위해 동유럽을 정복하고 슬라브인을 제거하려 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이 작전은 300만 명의 병력이 투입된 역사상 최대 규모의 육상 작전이었으며, 독일군은 초기에 소련군의 허점을 파고들어 진격을 거듭했으나, 소련군의 강력한 저항, 전략적 판단 오류, 병참 문제, 기상 악화 등으로 인해 실패로 끝났다. 이 작전의 실패는 독소 전쟁의 흐름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고, 소련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지만 독일군의 공세를 막아내며 2차 세계 대전의 흐름을 변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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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바로사 작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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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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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독일어: Unternehmen Barbarossa (운터네멘 바르바로사)" "러시아어: Операция Барбаросса (오페라치야 바르바롯사)" "영어: Operation Barbarossa (오퍼레이션 바르바로사)" |
일부 | 동부 전선의 일부,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부 |
기간 | 1941년 6월 22일 – 1941년 12월 8일 |
장소 | 중앙유럽, 북동 유럽, 동유럽, 주로 소비에트 연방 |
결과 | 추축국의 전략적 실패 |
영토 변화 | 추축국이 약 60만 제곱마일의 소련 영토를 점령했지만, A-A선에 도달하지 못함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독일 루마니아 왕국 핀란드 이탈리아 헝가리 슬로바키아 |
교전국 2 | 소비에트 연방 |
지휘관 | |
지휘관 1 | 아돌프 히틀러 빌헬름 카이텔 알프레트 요들 발터 폰 브라우히치 프란츠 할더 헤르만 괴링 한스 예쇼네크 페도르 폰 보크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이온 안토네스쿠 카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
지휘관 2 | 이오시프 스탈린 게오르기 주코프 보리스 샤포시니코프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클리멘트 보로실로프 세묜 티모셴코 세묜 부됸니 파벨 지가레프 마르키안 포포프 표도르 쿠즈네초프 드미트리 파블로프 안드레이 에료멘코 미하일 키르포노스 이반 튤레네프 |
부대 | |
부대 1 | 독일군 북부 집단군 제16군 제18군 제4기갑군 중앙 집단군 제2군 제4군 제9군 제2기갑군 제3기갑군 남부 집단군 제6군 제11군 제17군 제1기갑군 루마니아 제3군 루마니아 제4군 독립군 노르웨이 군 카렐리아 군 |
부대 2 | 북부 전선 제7군 제8군 제48군 제52군 제54군 제55군 북서부 전선 제11군 제27군 제34군 서부 전선 제3군 제10군 제13군 제16군 제19군 제20군 제22군 제24군 제28군 제40군 제50군 남서부 전선 제5군 제6군 제12군 제21군 제26군 제37군 남부 전선 제9군 제18군 해안군 |
병력 규모 (1941년 6월 22일) | |
병력 1 | 380만 명 전차 3,350–3,795대 기타 장갑차 3,030–3,072대 (돌격포 259대 포함) 항공기 2,770–5,369대 포 7,200–23,435문 박격포 17,081문 말 60만 마리 차량 60만 대 |
병력 2 | 260만–290만 명 전차 11,000대 군용기 7,133–9,100대 |
사상자 | |
사상자 1 | 총 군사 사상자: 100만 명 이상 독일군: 881,788명 1941년 사상자: 독일군 의료 보고서(노르웨이군 포함): 전사: 186,452명 실종: 40,157명 부상: 655,179명 기타 질병: 8,000명 파괴된 항공기: 2,827대 파괴된 전차: 2,735대 파괴된 돌격포: 104대 기타 국가 손실 루마니아 왕국: 114,000명 이상 (사망 또는 실종 39,000명 이상) 핀란드: 75,000명 (카렐리아에서 26,355명 사망), 작전 은여우 중 5,000명 이상 이탈리아 왕국: 8,700명 헝가리: 4,420명 |
사상자 2 | 총 군사 사상자: 450만 명 1941년 사상자: 소련 기록 기반: 전사: 566,852명 (병원에서 부상으로 사망한 101,471명 포함) 비전투 사망: 235,339명 전투 및 비전투 부상: 1,336,147명 실종 또는 포로: 2,335,482명 파괴된 항공기: 21,200대 (10,600대 전투 손실) 파괴된 전차: 20,500대 |
관련 정보 | |
작전 목표 | 독일 국방군은 소련을 단기간에 점령하여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키예프를 함락시키는 것. 우랄산맥까지 점령하여 아시아 러시아를 확보하고, 소련의 산업 시설을 파괴. 독일 제국의 '생활권'을 확보. 슬라브족을 노예화하거나 제거하고, 볼셰비키를 파괴. 홀로코스트를 가속화. |
작전 계획 | 일반계획 동방에 따라 소비에트 연방 점령 계획 수립. 레벤스라움 정책에 따라 동유럽을 독일의 생활권으로 확장하려 함. 2900km에 달하는 광대한 전선에서 작전 수행. |
영향 |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치열하고 규모가 큰 전투 중 하나. 1941년에서 1945년 사이에 3천만 명에 달하는 사망자를 발생시킴. 나치 점령 지역에서 홀로코스트가 가속화되어 수백만 명의 유대인 및 기타 소수 민족이 학살됨. 소비에트 연방의 극심한 인명 피해와 국토 파괴를 초래. 전쟁 중반까지 독일군의 역량을 소진시켜 소련의 반격과 최종 승리에 기여. 독일의 패망에 결정적인 역할. 전쟁 후 소비에트 연방이 동유럽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기여. |
2. 배경
아돌프 히틀러는 저서 《나의 투쟁》에서 독일인을 위한 생존권 확보와 동방 영토 확장의 필요성을 주장했다.[29] 그는 슬라브인을 열등 인종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추방한 뒤 광대한 영토에 식민지를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 연방은 폴란드 침공 직전 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하며 우호 관계를 맺었다. 양국은 중앙 유럽 분할 지배와 상호 안전 보장을 약속했지만, 이는 독일에게 일시적인 보험에 불과했다.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는 영국과의 전쟁 중 소련을 공격하여 양면전선이 형성될 것을 우려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전격전의 성공 경험을 바탕으로 소련과의 전쟁에서도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하며, 측근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작전 개시를 명령했다. 그는 소련 붕괴가 나치 독일의 생존과 직결된다고 믿었으며, 소련군에 대한 신속한 승리가 영국과의 평화 협상을 촉진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히틀러와 독일군 지휘부는 3개 집단군에 소련의 주요 도시 점령 임무를 할당했다.
- 북부 집단군(빌헬름 폰 레프 원수): 발트 3국을 거쳐 북러시아로 진입, 레닌그라드[29] 점령 또는 파괴 (2개 군, 제4기갑집단)
- 중부 집단군(페도르 폰 보크 원수): 벨라루스를 통과해 러시아 중서부로 진군, 모스크바 점령 (2개 군, 제2·3기갑집단)
- 남부 집단군(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 우크라이나 공격 후 키예프 점령, 남러시아 초원을 넘어 볼가 강까지 진군 (3개 군, 제1기갑집단, 루마니아 2개 군)
최종 목표는 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 선[28]까지 진출하는 것이었다. 동절기 장비가 준비되었으나, 수량 부족과 병참 혼란으로 전선 부대에 제대로 보급되지 못했다.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는 19세기 이후 독일 민족주의자들에게 널리 칭송받았고, 나치당은 그의 이미지를 정치적으로 활용했다. 히틀러는 1940년 12월 소련 침공 작전명을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변경했는데, 이는 소련 정복이 나치의 "천년 제국"을 가져올 것이라는 그의 믿음을 상징했다.
2. 1. 나치 독일의 이데올로기와 팽창 정책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독일인을 위한 넓은 생존권(Lebensraum)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동쪽의 영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29] 그는 슬라브인을 열등인종으로 보고 그들을 추방하고 광대한 영토에 식민지를 건설할 계획이었다.1925년 초, 히틀러는 자신의 정치 선언문이자 자서전인 ''나의 투쟁''에서 소비에트 연방을 침략할 것이라고 선언하며, 독일 국민은 앞으로 수 세대에 걸쳐 독일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Lebensraumde('생활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치 독일의 인종 정책은 소비에트 연방(그리고 동유럽 전체)을 아리아인이 아닌 Untermenschende('하등 인간')이 거주하고, 유대인 볼셰비키 세력이 지배하는 곳으로 묘사했다.[29] 히틀러는 ''나의 투쟁''에서 독일의 운명은 "600년 전"과 같이 Drang nach Ostende('동방으로의 진출')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러시아와 다른 슬라브 인구의 대다수를 살해, 추방 또는 노예화하고, Generalplan Ostde(동방 대계획)에 따라 우랄 산맥 서쪽 땅에 게르만 인종으로 재정착하는 것은 나치의 비밀 정책이었다.
1939년, 독일은 폴란드 침공 직전에 소련과 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서로를 적대시했던 독일과 소련의 조약 체결은 세계를 놀라게 했다. 그러나 히틀러에게 이 조약은 일시적인 보험에 불과했다.

히틀러는 프랑스 침공에 성공하자 군에 소련 공격을 명령했다. 1940년, 독일군은 서부 전선에서 프랑스를 붕괴시켰지만, 영국 전투에서는 패배하여 영국을 항복시키지는 못했다.
독일군 수뇌부는 영국을 배후에 두고 소련을 공격하는 두 전선 작전에 우려를 표명했지만, 히틀러는 측근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기초가 썩은 헛간은 입구를 한 번 차면 무너진다”고 큰소리쳤다. 히틀러는 폴란드와 프랑스에서의 성공 경험과, 적군이 동계 전쟁에서 자국보다 훨씬 약소한 핀란드 국방군 상대로 3개월 이상의 시간과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간신히 승리했다는 사실에서, 소련과의 전쟁에서도 쉽게 승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또한 적군에 대한 신속한 승리가 영국과의 평화를 촉진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2. 2. 독소 불가침 조약과 그 한계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독일인을 위한 넓은 생존권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동쪽의 영토가 필요하다고 밝혔다. 그는 슬라브인을 열등 인종으로 보고 그들을 추방하고 광대한 영토에 식민지를 건설할 계획이었다.나치 독일과 소비에트 연방은 폴란드 침공 직전 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우호 관계를 맺었다. 이것은 독일과 소련이 중앙 유럽의 분할 지배에 합의하고 상호 안전 보장 조약을 맺은 것이다. 독소불가침조약은 세계를 놀라게 했는데, 그 이유는 절대 손을 잡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양대 적대 세력이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독일에게 있어 일시적인 보험에 불과했다.
히틀러는 소련군에 대한 신속한 승리가 영국과의 화평을 촉진시키길 기대하고 있었다.
2. 3. 소련의 상황
소련은 주요 군사 장비 보유량과 공업 생산력에서 독일을 크게 앞섰다. 소련의 공업 생산은 자본주의 국가들이 세계 대공황에 시달리던 1930년대에 급속히 발전하여, 1930년대 말에는 이미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 소련은 중공업, 특히 군수산업에 비중을 두고 있었다. 또한 소련의 전차는 독일의 전차에 비해 성능 면에서 많은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항공기의 발전도 눈부셔 독일 등 서구제 항공기와 성능도 거의 비슷해졌다.그러나 스탈린은 1930년대 후반부터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자 공산당과 군 내부에 있던 반대파에 대한 대숙청을 감행해 적백내전 등을 통해 전투 경험이 풍부한 유능한 육군 지휘부를 포함한 수백만 명을 숙청했기 때문에 소련군은 지휘관이 부족하게 되었다.[2]
1940년 독일이 프랑스를 전격전으로 격파한 후에도 소련은 독일군의 진군 속도를 경시했다. 소련군은 전방의 군이 독일군을 국경 근처의 요새선에서 저지하는 사이 주력을 후방에 집결시킨 뒤 공격을 가한다는 작전을 상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1939년까지 국경선에 구축된 요새 스탈린선은 같은 해 소련이 폴란드의 동쪽을 병합하면서 폐기되었다. 새로운 국경 근처의 요새는 구축 중에 있었고, 겨우 위치만을 표시하는 존재였다. 새로운 요새선의 구축 완료까지 소련 측의 방비는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지만 국경 부근에 병력을 배치하는 방침은 변경하지 않았다. 정예 부대 대부분을 독일 국경과 시베리아의 만주국 국경에 배치했다.[2]
스탈린은 독일의 공격에 대한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않았다. 조약 체결까지 소련은 나치즘의 위협을 선전하면서 국내 숙청의 구실로 삼았으나 조약 체결 후에는 모습을 바꿔 반독일적인 논조를 억압했다. 첩보부로부터 독일군이 국경에 집결한다는 보고를 비롯한 독일의 소련 침공에 대한 경고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도 스탈린은 그 정보를 독소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려는 영국의 음모라고 생각했다. 정부도 군도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아, 전선 부대의 경고에도 대처를 하지 않았다.[2]
1941년 초부터 독일은 소련을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미 2~3월경 소련 대사관은 독일군의 전쟁 물자가 서부 전선으로부터 동부로 대거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뛰어난 소련의 비밀 첩보 요원들이 보낸 여러 가지 경고 중에서도 가장 신빙성 있는 정보가 일본 도쿄에서 활동하는 소련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로부터 들어왔다. 5월 초, 히틀러는 일본 관리에게 소련 정복 계획을 털어놓았다. 히틀러는 일본이 아시아에서 독일과 동시에 소련을 공격하기를 원했고 조르게가 그 정보를 입수했다. 5월 12일, 조르게는 모스크바에 독일군 약 150개 사단이 6월 20일에 소련을 공격한다고 보고했다.[2]
소련에서도 무언가 큰 일이 터질 듯한 조짐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소련 국토 상공을 정찰 비행하는 독일 항공기의 수가 점점 더 많아졌고, 5월 중순이 되자 주소(駐蘇) 독일 외교관 가족들이 짐을 꾸려 귀국하기 시작했다. 6월 11일, 스탈린은 독일 대사관에서 직원들이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3~4일 후, 해군 인민위원 N. G 쿠즈네초프 제독은 몰로토프에게 독일 선박들이 소련 항구로부터 급히 출항하고 있다고 보고했다.[2]
독일군의 공격이 있기 직전까지도 소련은 거의 방어 준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공격 전날인 6월 21일 국경 지대 비행장에서 소련 공군은 일상적인 야간 훈련을 막 끝마친 참이었다. 당시 비행사들은 수면 부족이었고, 비행기는 연료 부족 상태였다. 또 국경의 중요 도시인 브레스트를 지켜야 할 부대들은 여름 기동 훈련에 참가하느라 인근 지역에 흩어져 있었다. 발트 군관구 사령관 표도르 I. 쿠즈네초프 대장은 중포들을 방어 진지에 설치하려고 했다. 그러나 중포를 끌고 갈 차량들이 부족했고, 또 정한 위치에 설치된 중포에서는 포탄이 부족했다.[2]
전쟁이 벌어지기 1주일 전, 키예프 군관구 사령관 M. P. 키르포노스 대장은 모스크바에 대해, 국경 너머에 독일군이 집결 중이라고 보고했다. 그리하여 민간인 30만 명을 소개시키고 여러 방어 거점에 병력을 배치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모스크바로부터 그는 "전쟁은 없을 것"이라는 말만 들었다. 그런데 6월 19일, 국방 정치위원 세묜 티모셴코는 키르포노스 대장에게 사령부를 이동해 기습에 대비하라고 말하였다. 그러면서도 티모셴코는 휘하 부대들에게 경계 태세를 취하게 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2]
3. 독일의 소련 침공 계획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독일인을 위한 넓은 생존권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 동쪽의 영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히틀러는 슬라브인을 열등인종으로 보고 그들을 추방하고 광대한 영토에 식민지를 건설할 계획이었다.
나치 독일과 소련은 폴란드 침공 직전 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우호 관계를 맺었으나, 이는 독일에게 있어 일시적인 보험에 불과했다.
독일 육군 최고사령부는 영국을 후방에 두고 소련을 공격하여 2개의 전선을 만드는 것을 염려했지만, 히틀러는 측근들의 조언을 무시하고 작전 개시를 명령했다. 히틀러는 전격전의 성공에 힘입어 소련군과의 전투에서도 승리를 확신했다. 그는 소련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나치 독일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소련군에 대한 신속한 승리가 영국과의 화평을 촉진시키길 기대하고 있었다.
히틀러와 독일군 지휘부는 3개의 집단군에 각각 소련의 특정 지방에 있는 대도시를 공격 및 점령 목표로 할당했다.
- 북부 집단군(빌헬름 폰 레프 원수 지휘): 발트 3국을 경유하여 북러시아를 침입, 레닌그라드[29] 점령 혹은 파괴가 목표.
- 중부 집단군(페도르 폰 보크 원수 지휘): 현재의 벨라루스를 통과하여 러시아 중서부를 진군, 모스크바를 직접 공격하여 점령하는 것이 목표.
- 남부 집단군(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 지휘): 소련의 최대 곡창지대이자 거대한 공업지대인 우크라이나 지역을 공격하여 키예프를 공략한 후, 남러시아 초원을 넘어 동쪽의 볼가 강까지 진군하는 계획.
최종적으로는 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 선[28]까지 진출할 계획이었다.

독일은 발칸 전역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소련 국경 근처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하기 시작했다. 1941년 2월 셋째 주까지 루마니아-소련 국경의 집결 지역에는 68만 명의 독일군이 모여 있었다. 공격 준비를 위해 히틀러는 비밀리에 300만 명이 넘는 독일군과 약 69만 명의 추축국 군인을 소련 국경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소련 고위 사령부는 이에 경계했지만,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체결 후 불과 2년 만에 나치 독일이 공격할 가능성이 낮다고 믿었던 스탈린 때문에 소련의 준비는 더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독일의 위협을 완전히 간과하지는 않았다. 독일 침공 훨씬 전에 세묜 티모셴코 원수는 독일을 소련의 "가장 중요하고 강력한 적"으로 언급했고, 1940년 7월 초에는 붉은 군대 참모총장 보리스 샤포시니코프가 독일 침공의 모습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예측한 세 갈래 공격 계획을 마련했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시작 시점이 당초 계획되었던 5월 15일에서 실제 침공일인 1941년 6월 22일로 연기된(38일 지연) 이유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가장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이유는 1941년 4월 6일부터 6월까지 예상치 못한 유고슬라비아 침공과 그리스 전투였다. 역사가 토마스 B. 부엘은 초기 독일 계획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핀란드와 루마니아가 침공 참여를 위해 추가 시간이 필요했다고 지적한다. 부엘은 이례적으로 습했던 겨울로 인해 강이 늦은 봄까지 홍수 상태를 유지했다고 덧붙인다.[1]

지연의 중요성은 여전히 논쟁 중이다. 윌리엄 샤이러는 히틀러의 발칸 전역이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를 수 주 지연시켜 위험에 빠뜨렸다고 주장했다. 많은 후대 역사가들은 6월 22일 시작 날짜가 독일군이 9월까지 모스크바에 도달하기에 충분했다고 주장한다. 안토니 비보어는 2012년 독일의 발칸 공격으로 인한 지연에 대해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그것이 바르바로사 작전의 최종 결과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받아들인다"고 썼다.
1940년 7월 3일 프란츠 할더 참모총장은 참모본부 작전부장 한스 폰 그라이펜베르크 대령에게 소련 공격 계획의 예비 연구를 지시했다.[4] 이후 독일군 각 팀이 작전 계획을 연구했고, 8월 5일 독일 제18군 참모장 에리히 마르크스 소장이 "동방 작전 초안"(마르크스 안)을 참모본부에 제출했다.[4] 마르크스 안에서는 스몰렌스크 - 모스크바 간과 키예프를 공세 축으로 삼고, 수도 모스크바 점령을 "소련 연방의 경제적·정치적·정신적 중추이기 때문에 국가로서의 통합 기능·조정 기능을 상실하게 한다"고 결론지었다.[4]
그라이펜베르크 대령과 참모본부 차장 파울루스 중장의 협력 아래, 참모본부의 할더도 육군총사령부 안(오토)을 기획했다.[5] 육군총사령부 안(오토)에서는 특정 지역이나 특정 도시의 점령은 중시되지 않고, 적군 야전 부대의 섬멸에 중점을 두었다. 민스크, 스몰렌스크, 모스크바 등 소련의 주요 도시는 적 병력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로 위치 지정되었다.[5]
1940년 12월 5일 할더는 "오토"를 육군총사령부 안으로 히틀러에게 제출했고, 히틀러는 계획에 동의하고 훈령 기안을 요들에게 지시했다.[5] 독일군 최고사령부의 베른하르트 폰 로스베르크 중령이 기획한 "프리츠"와 우크라이나와 레닌그라드 점령을 우선시하고자 하는 히틀러의 의향을 고려하여 최종 계획안을 히틀러에게 제출했고, 히틀러는 12월 18일 총통 훈령 제21호 "바르바로사 작전"을 발령했다.[5]
북유럽의 광물 자원에 의존하고 있는 독일에게 수송로인 발트해는 생명선이었고, 레닌그라드를 전격적으로 점령하여 소련 발트 함대를 무력화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농산물과 광물 자원의 보고인 우크라이나는 "동방 생존권" 구상 실현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지역이었다. 경제적 이유로 히틀러는 레닌그라드와 우크라이나 점령에 집착했고, 히틀러의 의향을 중시한 육군총사령부는 레닌그라드와 우크라이나를 제1 목표로 위치 지정했다.[5]
하지만 각 목표의 우선순위는 모호한 채였다.[7] 중앙군 집단은 벨라루스의 적군 섬멸 후 모스크바로 진격해야 하는지, 아니면 우크라이나나 레닌그라드로 향해야 하는지 작전안에서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7] 중앙군 집단 사령관 보크 원수와 제3 기갑군 집단 사령관 호트 상급 대장은 명확한 답을 요구했지만, 참모총장 할더는 답변을 회피했다.[7]
전략 목표의 불명확성은 개전까지 해소되지 않았고, 독일군은 모스크바를 눈앞에 두고 견해가 갈리게 된다.[7]
3. 1. 작전 목표와 전략
Unternehmen Barbarossa|운터네멘 바르바로사|바르바로사 작전de의 주요 목표는 소련의 유럽 지역을 신속하게 점령하는 것이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저서 《나의 투쟁》에서 독일인을 위한 넓은 생존권 확보를 위해 동쪽 영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슬라브인을 열등인종으로 간주하여 추방하고 광대한 영토에 식민지를 건설할 계획이었다.나치 독일과 소련은 폴란드 침공 직전 독소불가침조약을 체결하여 우호 관계를 맺었으나, 이는 독일에게 일시적인 보험에 불과했다. 히틀러는 전격전의 성공에 힘입어 소련군과의 전투에서도 승리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는 소련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나치 독일이 사라질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소련군에 대한 신속한 승리가 영국과의 화평을 촉진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히틀러와 독일군 지휘부는 3개의 집단군에 각각 소련의 특정 지방에 있는 대도시를 공격 및 점령 목표로 할당했다.
- 북부 집단군(빌헬름 폰 레프 원수 지휘): 발트 3국을 경유하여 북러시아를 침입, 레닌그라드[29] 점령 혹은 파괴가 목표였다.
- 중부 집단군(페도르 폰 보크 원수 지휘): 현재의 벨라루스를 통과하여 러시아 중서부를 진군, 모스크바를 직접 공격하여 점령하는 것이 목표였다.
- 남부 집단군(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 지휘): 소련의 최대 곡창지대이자 거대한 공업지대인 우크라이나 지역을 공격하여 키예프를 공략한 후, 남러시아 초원을 넘어 동쪽의 볼가 강까지 진군하는 계획이었다.
최종적으로는 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 선[28]까지 진출할 계획이었다.
독일은 발칸 전역이 끝나기 전에 이미 소련 국경 근처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하기 시작했다. 1941년 2월 셋째 주까지 루마니아-소련 국경의 집결 지역에는 68만 명의 독일군이 모여 있었다. 공격 준비를 위해 히틀러는 비밀리에 300만 명이 넘는 독일군과 약 69만 명의 추축국 군인을 소련 국경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소련 고위 사령부는 경계했지만,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체결 후 불과 2년 만에 나치 독일이 공격할 가능성이 낮다고 믿었던 스탈린 때문에 소련의 준비는 더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독일의 위협을 완전히 간과하지 않았다. 독일 침공 훨씬 전에 세묜 티모셴코 원수는 독일을 소련의 "가장 중요하고 강력한 적"으로 언급했고, 1940년 7월 초에는 붉은 군대 참모총장 보리스 샤포시니코프가 독일 침공의 모습을 놀랍도록 정확하게 예측한 3갈래 공격 계획을 마련했다.
바르바로사 작전의 시작 시점이 당초 계획되었던 5월 15일에서 1941년 6월 22일로 연기된(38일 지연) 이유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가장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이유는 1941년 4월 6일부터 6월까지 예상치 못한 유고슬라비아 침공과 그리스 전투였다. 역사가 토마스 B. 부엘은 초기 독일 계획에는 포함되지 않았던 핀란드와 루마니아가 침공 참여를 위해 추가 시간이 필요했다고 지적한다. 부엘은 이례적으로 습했던 겨울로 인해 강이 늦은 봄까지 홍수 상태를 유지했다고 덧붙인다.[1]
지연의 중요성은 여전히 논쟁 중이다. 윌리엄 샤이러는 히틀러의 발칸 전역이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를 수 주 지연시켜 위험에 빠뜨렸다고 주장했다. 많은 후대 역사가들은 6월 22일 시작 날짜가 독일군이 9월까지 모스크바에 도달하기에 충분했다고 주장한다. 안토니 비보어는 2012년 독일의 발칸 공격으로 인한 지연에 대해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그것이 바르바로사 작전의 최종 결과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고 받아들인다"고 썼다.
독일은 바르바로사 작전을 위해 독립 연대 1개, 별도의 기계화 훈련 여단 1개, 사단 153개(보병 사단 104개, 기갑(panzer) 사단 19개, 기계화 보병(motorised infantry) 사단 15개 포함)를 배치했고, 정복 지역에서 작전할 9개의 경비 사단, 핀란드에 배치된 4개 사단, 그리고 최고사령부(OKH)의 직접 통제하에 예비 사단 2개를 배치했다. 이들은 6,867대의 장갑차(3,350~3,795대는 전차), 2,770~4,389대의 항공기(독일 공군의 65%에 해당), 7,200~23,435문의 야포, 17,081문의 박격포, 약 60만 대의 자동차 및 62만 5천~70만 마리의 말로 무장했다. 핀란드는 14개 사단을 침공에 배정했고, 루마니아는 바르바로사 작전 기간 동안 13개 사단과 8개 여단을 제공했다. 380만 명의 추축군 전체는 북극해에서 남쪽으로 흑해까지 이어지는 전선에 배치되었고 모두 OKH에 의해 통제되었으며, 노르웨이 육군, 북부 육군집단, 중부 육군집단, 남부 육군집단과 3개의 루프트플로테(공군 집단, 육군 집단에 해당하는 공군)로 조직되었고, 이는 북부에는 루프트플로테 1, 중부에는 루프트플로테 2, 남부에는 루프트플로테 4가 육군 집단을 지원했다.
노르웨이 육군은 극북 스칸디나비아와 소련 접경 지역에서 작전할 예정이었다. 북부 육군집단은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를 통해 러시아 북부로 진격한 후 레닌그라드를 점령하거나 파괴하고 핀란드군과 합류할 예정이었다. 가장 많은 장갑차와 공군력을 갖춘 중부 육군집단은 폴란드에서 벨라루스와 러시아 중서부 지역으로 진격하여 스몰렌스크를 거쳐 모스크바로 진격할 예정이었다. 남부 육군집단은 인구가 많고 농업이 발달한 우크라이나 중심부를 공격하여 키예프를 점령한 후 소련 남부의 대초원을 거쳐 볼가 강으로 진격하여 석유가 풍부한 코카서스를 장악할 계획이었다. 남부 육군집단은 간격으로 분리된 두 부분에 배치되었다. 육군 집단의 유일한 기갑집단이 포함된 북부 지역은 중부 육군집단 옆 폴란드 남부에 있었고, 남부 지역은 루마니아에 있었다.
후방의 독일군(대부분 Waffen-SS|바펜-SS|무장친위대de 및 Einsatzgruppen|아인자츠그루펜|특수작전집단de 부대)은 정복 지역에서 작전하여 그들이 통제하는 지역에서 발생하는 모든 파르티잔 활동에 대응하고, 포로로 잡힌 소련 정치 장교와 유대인들을 처형할 예정이었다. 6월 17일, 국가안전본부(Reich Security Main Office)(RSHA) 국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는 약 30~50명의 Einsatzgruppende 사령관에게 "소련 영토에서 유대인을 제거하는 정책, 적어도 일반적인 용어로"에 대해 설명했다. Einsatzgruppende은 ''Wehrmacht'' 부대에 배속되어 휘발유와 식량과 같은 보급품을 제공받았지만, RSHA의 통제를 받았다. 바르바로사 작전에 대한 공식 계획은 국경 전투에서 승리하고 국경 지역에서 붉은 군대의 병력을 파괴하면 육군 집단이 동시에 주요 목표로 자유롭게 진격할 수 있으며, 전력이 분산되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1940년 7월 3일 프란츠 할더 참모총장은 참모본부 작전부장 한스 폰 그라이펜베르크 대령에게 소련 공격 계획의 예비 연구를 지시했다.[4]
이후 독일군 각 팀이 작전 계획을 연구했고, 8월 5일 독일 제18군 참모장 에리히 마르크스 소장이 "동방 작전 초안"을 참모본부에 제출했다(마르크스 안)[4]. 마르크스 안에서는 스몰렌스크 - 모스크바 간과 키예프를 공세 축으로 삼고, 수도 모스크바 점령을 "소련 연방의 경제적·정치적·정신적 중추이기 때문에 국가로서의 통합 기능·조정 기능을 상실하게 한다"고 결론지었다.[4]
그라이펜베르크 대령과 참모본부 차장 파울루스 중장의 협력 아래, 참모본부의 할더도 육군총사령부 안(오토)을 기획했다.[5] 육군총사령부 안(오토)에서는 특정 지역이나 특정 도시의 점령은 중시되지 않고, 적군 야전 부대의 섬멸에 중점을 두었다. 민스크, 스몰렌스크, 모스크바 등 소련의 주요 도시는 적 병력을 유인하기 위한 미끼로 위치 지정되었다.[5]
1940년 12월 5일 할더는 "오토"를 육군총사령부 안으로 히틀러에게 제출했고, 히틀러는 계획에 동의하고 훈령 기안을 요들에게 지시했다.[5] 독일군 최고사령부의 베른하르트 폰 로스베르크 중령이 기획한 "프리츠"와 우크라이나와 레닌그라드 점령을 우선시하고자 하는 히틀러의 의향을 고려하여 최종 계획안을 히틀러에게 제출했고, 히틀러는 12월 18일 총통 훈령 제21호 "바르바로사 작전"을 발령했다.[5]
북유럽의 광물 자원에 의존하고 있는 독일에게 수송로인 발트해는 생명선이었고, 레닌그라드를 전격적으로 점령하여 소련 발트 함대를 무력화할 필요가 있었다. 또한 농산물과 광물 자원의 보고인 우크라이나는 "동방 생존권" 구상 실현을 위해서는 필수적인 지역이었다. 경제적 이유로 히틀러는 레닌그라드와 우크라이나 점령에 집착했고, 히틀러의 의향을 중시한 육군총사령부는 레닌그라드와 우크라이나를 제1 목표로 위치 지정했다.[5]
하지만 각 목표의 우선순위는 모호한 채였다.[7] 중앙군 집단은 벨라루스의 적군 섬멸 후 모스크바로 진격해야 하는지, 아니면 우크라이나나 레닌그라드로 향해야 하는지 작전안에서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7] 중앙군 집단 사령관 보크 원수와 제3 기갑군 집단 사령관 호트 상급 대장은 명확한 답을 요구했지만, 참모총장 할더는 답변을 회피했다.[7]
전략 목표의 불명확성은 개전까지 해소되지 않았고, 독일군은 모스크바를 눈앞에 두고 견해가 갈리게 된다.[7]
3. 2. 동부 총괄 계획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독일인을 위한 넓은 생존권, 즉 동방 생존권을 위해 동쪽의 영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16] 히틀러는 슬라브인을 열등인종으로 보고 이들을 추방하고 광대한 영토에 식민지를 건설할 계획이었다.바르바로사 작전은 이러한 히틀러의 동방 생존권 구상을 실현하기 위한 군사 작전이었으며, 이와 동시에 소련 점령 이후를 대비한 동부 총괄 계획이 수립되었다. 이 계획의 책임은 독일 민족성 강화 위원회의 친위대 전국 지도자인 하인리히 히믈러가 맡았다. 히믈러는 자유 재량권을 가지고 모든 국가 기관 및 민간 연구 기관의 협력을 얻을 수 있었다.
독소전쟁 개전 전날, 히믈러는 베를린 대학교수 콘라트 마이어에게 동부 총괄 계획 수립을 지시했다. 마이어는 3주 후 계획서를 제출했고, 1942년 7월에 개정판을 제출했다. 이 계획의 목적은 독일인의 이주와 원주민인 러시아인, 슬라브인의 말살이었다.
4,500만 명의 서시베리아 강제 이주가 계획되었으며, 그중 3,000만 명은 인종적으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겨졌다. 4개년 계획청과 식량 차관 헬베르트 바케에 의해, 포위된 지역에서 식량을 탈취하여 수백만 명의 러시아인과 슬라브인을 굶겨 죽이려는 계획(기아 계획(en:Hunger Plan))도 세워졌다.
최종적으로 3,000만 명의 러시아인이 아사할 것으로 예상되었으며, 총괄 계획에 따른 이주 계획은 러시아인의 말살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레닌그라드 포위전도 이 계획에 따라 실행되었다. 이후 계획의 개정판에서는 포로나 주민을 노동력으로 이용하기 위해 아사자와 추방자 수는 감소되었다.
초기 나치 정부는 동방 노동자(소련인)를 독일 제국에서 노동시키는 것은 민족 정책상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소련인 노동자의 노동 동원을 거부했다.[17] 그러나 전황이 악화되자 1941년 10월, 소련인 노동자는 노동 자원으로 동원하기로 결정되었다.[17] 1944년 8월에는 212만 6,753명의 소련인 노동자가 독일 제국에서 근무했으며, 알베르트 슈페어의 전시 경제도 동부에서 획득한 방대한 강제 노동자를 전제로 하고 있었다.[17] 계획에 대한 비용은 소련 영토 내에서의 착취와 강제 노동으로 충당될 것이라고 했다.
나치는 동방의 게르만화를 추진하고 점령한 소비에트 영토로의 이주를 촉구했다. 동시에 점령지에서는 인종 선별이 실시되었고, 독소전쟁 개전 후 9개월 만에 아인자츠그루펜(특별 행동대)과 다수의 경찰 대대가 약 100만 명의 유대인, 집시, 슬라브인을 조직적으로 학살했다. 독일군 지휘부와 전 육군 부대도 나치의 말살 정책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거나 묵인했다고 한다.[18]
우크라이나나 벨라루스와 같은 농업 중심 국가는 독일 제국의 주요 식량 공급원으로 간주되어 철저한 착취 대상이 되었다.[19] 독일 경제의 전략적 이익과 나치의 말살 정책은 깊은 인과 관계가 있으며, 점령지에서는 대규모 아사자가 발생했다.[19] 벨라루스에서는 독일군 점령 시대에 170만 명이 사망했고, 소련군 포로 200만 명도 강제 수용소에서 굶어 죽었다.[19]
이러한 아사는 자연 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포로와 주민의 기아 수준을 계획적으로 유지하고 식량 공급률을 높인 독일군 지휘부의 결정이었다.[19] 육군 국방 경제국 토마스 장군은 “러시아인은 수세기 동안 기아, 공복, 빈곤을 견뎌왔다. 러시아인의 위는 유연하므로, 따라서 잘못된 동정은 필요 없다.”라고 계획의 이면에 있는 근본적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19] 게르하르트 히르슈헤르트는 나치의 점령 정책과 전쟁 목표는 모든 정복 지역의 무제한적이고 직접적인 지배를 실행하고, 가능한 모든 경제적, 인적 자원을 대규모로 착취하는 것이었다고 요약하고 있다.[19]
4. 소련의 방어 계획
1930년대 세계대공황으로 자본주의 국가들이 어려움을 겪는 동안, 소련의 공업 생산은 급속도로 발전했다. 1930년대 말 소련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으며, 특히 군수산업에 중점을 두었다. 소련의 전차는 독일 전차보다 성능이 우수했고, 항공기 발전도 독일과 비슷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의 대숙청으로 인해 소련군은 지휘관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1940년 독일이 프랑스를 전격전으로 격파한 후에도 소련은 독일군의 진군 속도를 과소평가했다. 소련군은 전방 부대가 국경 근처 요새선에서 독일군을 저지하는 동안 주력을 후방에 집결시켜 공격하는 작전을 구상했다. 그러나 1939년까지 구축된 스탈린선은 소련이 폴란드 동쪽을 병합하면서 폐기되었다. 새로운 국경 근처 요새는 구축 중이었고, 위치만 표시된 상태였다.
스탈린은 독일의 공격에 대한 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첩보부로부터 독일군이 국경에 집결한다는 보고를 비롯한 독일의 소련 침공 경고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스탈린은 이를 독소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려는 영국의 음모로 여겼다.
1941년 초부터 독일은 소련 공격 준비를 시작했고, 소련에서도 심상치 않은 조짐들이 나타났다. 독일군의 공격 직전까지도 소련은 거의 방어 준비를 하지 않았다. 공격 전날인 6월 21일, 국경 지대 비행장에서 소련 공군은 야간 훈련을 막 끝낸 참이었다. 당시 비행사들은 수면 부족이었고, 비행기는 연료 부족 상태였다.
전쟁 발발 1주일 전, 키예프 군관구 사령관 M. P. 키르포노스 대장은 모스크바에 독일군 집결을 보고하고 민간인 30만 명 소개와 방어 거점 병력 배치를 요청했다. 그러나 모스크바는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 6월 19일, 국방 정치위원 세묜 티모셴코는 키르포노스 대장에게 사령부 이동과 기습 대비를 지시했지만, 휘하 부대에 경계 태세를 취하라는 명령은 내리지 않았다.
1941년 6월 22일 01시경, 국경 지역의 소련 군관구는 6월 21일 밤 늦게 발표된 인민위원회(NKO) 지시 제1호에 따라 경계령을 받았다. 이 지시는 모든 부대를 전투 준비 태세로 하되, "어떠한 유발 행위도 피하라"는 내용이었다. 여러 전선 예하 부대가 이 지시를 받는 데 최대 2시간이 걸렸고, 대부분은 침공이 시작되기 전까지 지시를 받지 못했다. 독일 공산주의 탈영병 알프레드 리스코프(Alfred Liskow)는 6월 21일 21시에 국경을 넘어 소련 측에 04시 공격이 있을 것이라고 알렸다. 스탈린은 이 정보를 받았지만, 첩보라고 여긴 것으로 보인다.
6월 21일 13시, 북부집단군은 바르바로사 작전이 다음날 아침 시작될 것임을 알리는 암호 "뒤셀도르프"를 받고, 자체 암호 "도르트문트"를 하달했다. 1941년 6월 22일 03시 15분경, 추축국은 소련 점령지 폴란드의 주요 도시 폭격과 전선 전체에 걸친 적군 방어선에 대한 포격을 시작하며 소련을 침공했다. 공습은 레닌그라드 인근 크론슈타트(Kronstadt)와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Sevastopol)까지 이어졌다. 동시에 독일의 선전포고가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Joachim von Ribbentrop)에 의해 전달되었다. 한편, 지상군은 국경을 넘었고, 일부 지역에서는 리투아니아와 우크라이나의 파르티잔들이 함께했다. 약 300만 명의 베르마흐트 병사들이 작전에 투입되었고, 국경에서는 그보다 약간 적은 수의 소련군과 맞섰다. 초기 침공 당시 독일군과 함께 핀란드와 루마니아 부대도 참전했다.
정오 무렵,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Vyacheslav Molotov)가 침공 소식을 국민들에게 방송했다. "...선전포고 없이 독일군이 우리 나라를 침공하여 여러 곳에서 국경을 공격했습니다... 적군과 전 국민은 우리가 사랑하는 조국, 명예, 자유를 위해 승리하는 애국 전쟁을 벌일 것입니다... 우리의 대의는 정의롭습니다. 적은 패배할 것입니다.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몰로토프는 당이 아닌 국민의 애국심에 호소함으로써 충격받은 국민들이 엄청난 소식을 받아들이도록 도왔다. 침공 후 첫 며칠 동안 소련 최고 사령부와 적군은 전쟁 수행에 필요한 수준으로 광범위하게 재편되었다. 스탈린은 7월 3일까지 독일의 침공에 대해 국민들에게 연설하지 않았으며, 그때 그는 "전 소련 국민의 애국 전쟁"을 촉구했다.
독일에서는 6월 22일 아침, 나치 선전부 장관 요제프 괴벨스(Joseph Goebbels)가 히틀러의 말을 담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국민들에게 침공을 발표했다. "지금 이 순간, 그 규모가 세계가 본 것 중 가장 큰 것과 비교될 만한 행군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라익과 우리 국민의 운명과 미래를 우리 군인들의 손에 맡기기로 결정했습니다. 특히 이 싸움에서 신이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같은 날 아침 후반, 히틀러는 동료들에게 "석 달이 지나기 전에 우리는 역사상 전례 없는 러시아의 붕괴를 목격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히틀러는 또한 라디오를 통해 독일 국민들에게 연설하며, 소련을 공격해야 했던 것은 마지못해 한 일이며 자신은 평화주의자라고 주장했다. 침공 후 괴벨스는 나치 선전이 이 전쟁을 "볼셰비즘에 대한 유럽의 성전"으로 묘사하도록 지시했고, 그 후 수천 명의 자원병 및 징집병이 바펜-SS에 입대했다.
독일군의 초기 지상 및 공중 공격의 기세는 처음 몇 시간 만에 소련군의 조직적인 지휘통제를 완전히 파괴하여, 보병 소대부터 모스크바의 소련 최고 사령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휘 계층을 마비시켰다. 모스크바는 국경 지역의 소련군이 직면한 재앙의 규모를 파악하지 못했고, 스탈린의 첫 반응은 불신이었다. 7시 15분경 스탈린은 NKO 지령 제2호를 발표하여 소련군에 침공 사실을 알리고, 국경을 침범한 추축군을 어디서든 공격하고 독일 영토의 국경 지역에 대한 공습을 시작하라고 명령했다. 9시 15분경 스탈린은 티모셴코가 서명한 NKO 지령 제3호를 발표하여, 이제는 양측이 적을 소련 영토에서 몰아낼 것이라고 기대하며 "국경을 고려하지 않고" 전면에서의 총반격을 촉구했다. 티모셴코가 승인한 스탈린의 명령은 당시 군사 상황에 대한 현실적인 평가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지만, 지휘관들은 명령에 불복종할 경우 보복을 두려워하여 명령을 전달했다. 소련 지도부는 개전 초기의 엄청난 패배의 규모를 며칠 후에야 인식하게 되었다.
4. 1. 소련군의 배치와 준비 상황
1930년대 세계대공황으로 자본주의 국가들이 어려움을 겪는 동안, 소련의 공업 생산은 급속도로 발전했다. 1930년대 말 소련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이 되었으며, 특히 군수산업에 중점을 두었다. 소련의 전차는 독일 전차보다 성능이 우수했고, 항공기 발전도 독일과 비슷한 수준이었다.그러나 스탈린은 1930년대 후반부터 대숙청을 통해 적백내전 등에서 풍부한 전투 경험을 가진 유능한 육군 지휘관을 포함한 수백만 명을 숙청하여 소련군은 지휘관이 부족한 상황이었다.[3]
1940년 독일이 프랑스를 전격전으로 격파한 후에도 소련은 독일군의 진군 속도를 과소평가했다. 소련군은 전방 부대가 국경 근처 요새선에서 독일군을 저지하는 동안 주력을 후방에 집결시켜 공격하는 작전을 구상했다. 그러나 1939년까지 구축된 스탈린선은 소련이 폴란드 동쪽을 병합하면서 폐기되었다. 새로운 국경 근처 요새는 구축 중이었고, 위치만 표시된 상태였다. 새로운 요새선 구축 완료까지 소련의 방비는 취약했지만, 국경 부근에 병력을 배치하는 방침은 유지되었다. 정예 부대 대부분은 독일 국경과 만주국 국경에 배치되었다.[3]
스탈린은 독일의 공격에 대한 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조약 체결 전까지 소련은 나치즘의 위협을 선전하며 국내 숙청의 구실로 삼았으나, 조약 체결 후에는 반독일적 논조를 억압했다. 첩보부로부터 독일군이 국경에 집결한다는 보고를 비롯한 독일의 소련 침공 경고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스탈린은 이를 독소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려는 영국의 음모로 여겼다. 정부와 군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전선 부대의 경고에도 대응하지 않았다.[3]
1941년 초부터 독일은 소련 공격 준비를 시작했다. 2~3월경 소련 대사관은 독일군 전쟁 물자가 서부 전선에서 동부로 이동하는 것을 알았다. 소련의 비밀 첩보 요원들이 보낸 경고 중 가장 신빙성 있는 정보는 일본 도쿄에서 활동하는 소련 스파이 리하르트 조르게로부터 왔다. 5월 초, 히틀러는 일본 관리에게 소련 정복 계획을 밝혔고, 조르게는 이 정보를 입수했다. 5월 12일, 조르게는 모스크바에 독일군 약 150개 사단이 6월 20일에 소련을 공격한다고 보고했다.[4]
소련에서도 심상치 않은 조짐들이 나타났다. 소련 영토 상공을 정찰 비행하는 독일 항공기 수가 증가했고, 5월 중순에는 주소 독일 외교관 가족들이 귀국하기 시작했다. 6월 11일, 스탈린은 독일 대사관 직원들이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3~4일 후, 해군 인민위원 N. G 쿠즈네초프 제독은 몰로토프에게 독일 선박들이 소련 항구에서 급히 출항하고 있다고 보고했다.[4]
독일군의 공격 직전까지도 소련은 거의 방어 준비를 하지 않았다. 공격 전날인 6월 21일, 국경 지대 비행장에서 소련 공군은 야간 훈련을 막 끝낸 참이었다. 당시 비행사들은 수면 부족이었고, 비행기는 연료 부족 상태였다. 국경 도시 브레스트를 지켜야 할 부대들은 여름 기동 훈련으로 인근 지역에 흩어져 있었다. 발트 군관구 사령관 표도르 I. 쿠즈네초프 대장은 중포를 방어 진지에 설치하려 했으나, 차량과 포탄이 부족했다.[4]
전쟁 발발 1주일 전, 키예프 군관구 사령관 M. P. 키르포노스 대장은 모스크바에 독일군 집결을 보고하고 민간인 30만 명 소개와 방어 거점 병력 배치를 요청했다. 그러나 모스크바는 "전쟁은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 6월 19일, 국방 정치위원 세묜 티모셴코는 키르포노스 대장에게 사령부 이동과 기습 대비를 지시했지만, 휘하 부대에 경계 태세를 취하라는 명령은 내리지 않았다.[4]
독일군의 초기 공격으로 소련군의 조직적인 지휘통제는 완전히 파괴되었고, 모든 지휘 계층이 마비되었다. 모스크바는 소련군이 직면한 재앙의 규모를 파악하지 못했고, 스탈린은 처음에는 불신했다. 7시 15분경 스탈린은 NKO 지령 제2호를 발표하여 소련군에 침공 사실을 알리고, 독일 영토 국경 지역에 대한 공습을 명령했다. 9시 15분경 스탈린은 티모셴코가 서명한 NKO 지령 제3호를 발표하여, "국경을 고려하지 않고" 전면적인 총반격을 촉구했다. 티모셴코가 승인한 스탈린의 명령은 당시 군사 상황에 대한 현실적인 평가에 근거한 것이 아니었지만, 지휘관들은 보복을 두려워하여 명령을 전달했다. 소련 지도부는 개전 초기의 엄청난 패배 규모를 며칠 후에야 인식하게 되었다.[4]
폴란드 분할로 소련 영토가 서쪽으로 확장되면서 국경선이 이동했다. 독소전쟁 발발 당시 국경선 요새화는 완료되지 않았고, 주코프 등 참모본부가 위험성을 지적한 뱌리스토크(Ви́льно) 돌출부도 해소되지 않았다. 적군 참모본부는 구 국경 방어를 주장했지만, 스탈린은 영토 포기라며 반발하여 국경 수비에는 구형 장비 부대들이 배치되었고, 결전 병력은 후방의 구 국경선에 배치되었다.
결과적으로 국경을 수비하던 부대는 독일군과의 전력 비교에서 크게 열세였고, 기습 공격에 일방적으로 격파되었다. 후방에 병력을 집중시킨 적군의 방어 전략은 결과적으로 승리를 가져왔지만, 국경 부대 대부분을 상실하는 큰 타격을 입었다.
4. 2. 소련군 내부의 문제점
스탈린은 1930년대 후반부터 권력 기반을 강화하고자 공산당과 군 내부에 있던 반대파에 대한 대숙청을 감행했다. 이로 인해 적백내전 등을 통해 전투 경험이 풍부한 유능한 육군 지휘부를 포함한 수백만 명이 숙청되었고, 소련군은 지휘관이 부족하게 되었다.[2]1940년 독일이 프랑스를 전격전으로 격파한 후에도 소련은 독일군의 진군 속도를 경시했다. 소련군은 전방의 군이 독일군을 국경 근처의 요새선에서 저지하는 사이 주력을 후방에 집결시킨 뒤 공격을 가한다는 작전을 상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1939년까지 국경선에 구축된 요새 스탈린선은 같은 해 소련이 폴란드의 동쪽을 병합하면서 폐기되었다. 새로운 국경 근처의 요새는 구축 중에 있었고, 겨우 위치만을 표시하는 존재였다. 새로운 요새선의 구축 완료까지 소련 측의 방비는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지만, 국경 부근에 병력을 배치하는 방침은 변경하지 않았다.[2]
스탈린은 독일의 공격에 대한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않았다. 조약 체결 전까지 소련은 나치즘의 위협을 선전하면서 국내 숙청의 구실로 삼았으나, 조약 체결 후에는 반 독일적인 논조를 억압했다. 첩보부로부터 독일군이 국경에 집결한다는 보고를 비롯한 독일의 소련 침공에 대한 경고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도 스탈린은 그 정보를 독소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려는 영국의 음모라고 생각했다. 정부와 군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고, 전선 부대의 경고에도 대처를 하지 않았다.[2]
소련군의 개전 초기 대패 원인은 단순하다. 소련군의 전력 대부분이 독소 국경에 집결해 있었기 때문이다. 국토는 조금이라도 넘겨주지 않는다는 경직된 사고 때문에 전투 개시 수 시간 만에 거의 대부분이 격파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독일이 만들어낸 전격전에 대해 유효한 방어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전격전에 대해 역효과라고 생각되는 전술 때문에 막대한 인원과 자원을 소모했다.[2]
1941년 6월 22일, 소련군이 당면하고 있던 준비 부족은 방어 거점에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다든가, 동력이 없어서 포를 움직이지 못했다든가 하는 피상적인 것뿐만이 아니라 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소련군은 병력 약 500만을 보유하는 세계 최대 육군이었으나, 장비가 빈약하고 비능률적인 군대였다. 또한 주로 스탈린의 손에 의해 지난 20년간 격변에 시달린 끝에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에는 전력 약화, 사기 저하, 최고 지휘관 해임 등 여러 가지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었다.[2]
소련군은 심도 있는 공격으로 적군을 섬멸하는 것을 군사 교리로 삼았고, 방어전을 경시했다. 참모총장 주코프는 초기 패전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련의 군사 이론은 공격만이 적을 격파하는 유일한 수단이라고 단정 지었다. 공격의 보조 수단으로서만 방어를 생각했다. 방어를 전략적으로 위치 지우지 않고 작전에 활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41~42년에 방어전을 펼칠 수 없었다.”[19]
5. 독일군 전투 서열
1941년 6월~7월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 독일군의 전투 서열은 다음과 같다.[30]
- '''북부 집단군''' (빌헬름 폰 뢰프 원수)
- 제18군, 제4기갑군집단, 제16군
- '''중앙 집단군''' (페도어 폰 보크 원수)
- 제3기갑군집단, 제9군, 제4군, 제2기갑군집단
- '''남부 집단군'''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
- 제1기갑군집단, 제11군, 제6군, 제17군, 루마니아군 2개 군단
5. 1. 북부 집단군

빌헬름 폰 레프 기사는 북부집단군의 제2대 사령관(1941년 6월 21일~1942년 1월 17일)이다.[30]
1941년 6월 22일, 북부 집단군은 소련 북서부 전선을 공격하여 제8군과 제11군을 돌파했다. 소련은 즉시 제3기계화군단과 제12기계화군단을 이용하여 독일 제4기갑군에 대한 강력한 반격을 개시했지만 실패했다. 6월 25일, 제8군과 제11군은 서부 드비나 강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이곳에서 제21기계화군단, 제22군, 제27군과 합류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6월 26일,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제56장갑군단이 먼저 강에 도착하여 교두보를 확보했다. 북서부 전선은 강 방어선을 포기해야 했고, 6월 29일 스타브카는 전선에 레닌그라드 접근로의 스탈린 방어선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7월 2일, 북부 집단군은 제4기갑군을 앞세워 스탈린 방어선 공격을 시작했고, 7월 8일 프스코프를 점령하여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레닌그라드주에 도달했다. 제4기갑군은 침공 시작 이후 약 450km를 진격했고, 주요 목표인 레닌그라드에서 약 250km 거리에 있었다. 7월 9일, 레닌그라드주 루가 강을 따라 소련 방어선을 향해 공격을 시작했다.
1941년 6월~7월 바르바로사 작전 초기 북부집단군의 전투 서열은 다음과 같다.[30]
부대명 | 지휘관 | 편제 |
---|---|---|
제23군단 | 101 후방경계 군지대 | |
제18군 | 게오르크 폰 퀴흘러 상급대장 (1939년 11월 5일~1942년 1월 16일) | 제1군단, 제26군단, 제38군단 |
제4장갑집단 (제4장갑군) | 에리히 회프너 상급대장 | 제41장갑군단, 제56장갑군단 |
제41장갑군단 | 제1기갑사단(사령관: 프리드리히 키르흐너 (1941년 7월 17일까지)→이후 발터 크뤼거), 제6기갑사단, 제36차량화보병사단, 제6보병사단, 제269보병사단, 제900교도여단 | |
제56장갑군단 | 에리히 폰 만슈타인 보병대장 | 제8기갑사단, 제3차량화보병사단, 제290보병사단 |
제16군 | 에른스트 부슈 상급대장 | 제2군단, 제10군단, 제28군단 |
제2군단 | 제12보병사단, 제32보병사단, 제121보병사단 | |
제10군단 | 제30보병사단, 제126보병사단 | |
제28군단 | 제122보병사단, 제123보병사단 |
5. 2. 중앙 집단군
페도어 폰 보크가 중부 집단군의 초대 사령관을 맡았다(1941년 6월 22일~1941년 12월 19일).[30]; 제2장갑집단 (제2장갑군, 사령관 하인츠 구데리안 상급대장)
군단 | 사단 |
---|---|
제24장갑군단 | |
제46장갑군단 (사령관 하인리히 폰 피팅호프 기갑병대장) | |
제47장갑군단 | |
제12군단 |
; 제3장갑집단 (제3장갑군, 사령관 헤르만 호트 상급대장)
군단 | 사단 |
---|---|
제39장갑군단 | |
제57장갑군단 | |
제5군단 | |
제6군단 |
군단 | 사단 |
---|---|
제8군단 | |
제20군단 | |
제42군단 |
; 제2군 (사령관 막시밀리안 폰 바이흐스)
군단 | 사단 |
---|---|
제12군단 | |
제13군단 | |
제35군단 | |
제43군단 | |
제53군단 |
; 제4군 (사령관 귄터 폰 클루게)
군단 | 사단 |
---|---|
제7군단 | |
제13군단 | |
제9군단 | |
제43군단 |
5. 3. 남부 집단군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가 남부집단군의 초대 사령관이었다.[30] 남부집단군의 예하 부대는 다음과 같다.부대명 | 지휘관 | 예하 부대 |
---|---|---|
제1기갑군 | 파울 루트비히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 제13기갑사단, 제16차량화보병사단, 제25차량화보병사단, 제1SS기갑사단 경호친위대 아돌프 히틀러, 제3장갑군단 ( 제14기갑군단, 제44보병사단, 제298보병사단), 제14장갑군단 (제9기갑사단, 제16기갑사단, 제5SS기갑사단 비킹), 제48기갑군단 (제11기갑사단, 제57보병사단, 제75보병사단), 제29군단 (제111보병사단, 제299보병사단) |
제6군 | 발터 폰 라이헤나우 원수 | 제17군단 (제56보병사단, 제62보병사단, 제79보병사단), 제44군단 (제9보병사단, 제297보병사단), 제55군단 (제57보병사단, 제168보병사단, 제295보병사단) |
제11군 | 루마니아 기병군단, 제11군단 (제76보병사단, 제239보병사단, 루마니아 제8보병사단, 루마니아 제6기병여단), 제30군단 (제198보병사단, 루마니아 제14보병사단), 제54군단 (제50보병사단, 제170보병사단), 루마니아 산악군단 | |
제17군 | 제4군단 (제24보병사단, 제71보병사단, 제262보병사단, 제295보병사단, 제296보병사단), 제49산악군단 (제1산악사단 (사령관 후베르트 란츠), 제68보병사단, 제257보병사단), 제52군단 (제101엽병사단, 제97엽병사단, 제100엽병사단), 슬로바키아 군단 | |
제34군단 | 칼 에글시어 | 제4산악사단, 제113보병사단, 제125보병사단, 제132보병사단 |
제51군단 | 제79보병사단, 제95보병사단 |
6. 소련군 전투 서열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시점에 소련군은 5개의 전선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 '''북부 전선''' (말키안 포포프 중장): 레닌그라드 군관구를 기반으로 6월 24일에 편성되었으며, 제7군, 제14군, 제23군으로 구성되었다.
- '''북서 전선''' (표도르 이시도로비치 쿠즈네초프 대장): 발트 연안 특별군관구를 기반으로 6월 22일에 편성되었으며, 제8군, 제11군, 제27군으로 구성되었다.
- '''서부 전선''' (드미트리 파블로프 상급대장): 서부 특별군관구를 기반으로 6월 22일에 편성되었으며, 제3군, 제4군, 제10군, 제13군(6월 24일 편성)으로 구성되었다.
- '''남서 전선''' (미하일 키르포노스 대장): 키예프 특별군관구를 기반으로 6월 22일에 편성되었으며, 제5군, 제6군, 제12군, 제26군으로 구성되었다.
- 제9특별군
이 외에도 총사령부 스타브카 예비군으로 제16군, 제20군, 제21군, 제22군, 제24군이 있었다.
6. 1. 북부 전선
6월 29일, 독일은 무르만스크를 포위 공격으로 점령하기 위한 작전을 개시했다. 노르웨이 산악 군단이 수행한 북쪽 포위 공격은 페트사모(Petsamo)에서 국경을 넘어 무르만스크로 직접 진격했다. 그러나 7월 중순 리바치 반도의 요충지를 확보하고 리차 강까지 진격한 후, 독일군의 진격은 소련 제14군의 강력한 저항에 막혔다. 재차 공격을 가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이 전선은 바르바로사 작전의 나머지 기간 동안 교착 상태에 빠졌다.[1][2]두 번째 포위 공격은 7월 1일 독일 제36산악군단과 핀란드 제3군단이 핀란드를 위해 살라 지역을 재탈환한 후 동쪽으로 진격하여 무르만스크 철도를 칸달락샤 근처에서 차단할 계획으로 시작되었다. 독일 부대는 극지방의 혹독한 기후 조건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격렬한 전투 끝에 살라는 7월 8일에 함락되었다. 기세를 몰아 독일-핀란드군은 동쪽으로 진격했지만, 소련군의 저항에 의해 카이랄리 마을에서 멈춰 섰다. 남쪽으로 더 내려가 핀란드 제3군단은 극지방 지형을 통과하여 무르만스크 철도에 도달하기 위한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했다. 소련 제7군의 단 하나의 사단만을 상대하며 빠른 속도로 진격했다. 8월 7일에는 케스텐가를 점령하고 우흐타 외곽에 도달했다. 그러나 대규모 적군 증원부대가 양 전선에서 더 이상의 진격을 막았고, 독일-핀란드군은 방어 태세로 전환해야 했다.[2][3]
6. 2. 북서 전선
레닌그라드 점령을 목표로 하는 북방집단군과 발트 지역 방어를 담당하는 북서전선군이 대치했다. 북서전선군은 세 전선 중 가장 약했으며, 그 전력은 3개 군, 2개 기계화군단에 불과했다.[20] 반면 독일군은 북방집단군에 중앙집단군의 제3기갑군단을 더한 강대한 전력으로 공세를 펼쳤다.[20]
체계적인 통신 혼란은 군대의 조직적인 저항을 어렵게 만들었다. 도하 지점을 지키고 있던 제11군은 교량 폭파 부대를 대기시키고 있었지만, 전차 부대가 압박하자 퇴각했다. 제3기갑군단에 의해 네만 강 교량이 확보되면서 서부전선군과 북서전선군은 분단되었다.
적군은 라세이냐에서 1000대의 기계화군단을 투입하여 반격했지만 대패했고, 라인하르트의 기동부대가 드비나 강 도하 지점을 확보했다. 기동부대는 스탈린 방어선을 돌파하여 루가 강에 도달했고, 보병 부대는 주요 도시들을 공략했다.
탈린 만에 정박해 있던 발트 함대는 맹렬한 공습을 받고 레닌그라드의 크론슈타트 항으로 후퇴했다.
스탈린은 발트 지역 방어를 위해 신임하는 보로실로프를 파견했다. 북서, 북방, 레닌그라드의 세 전선을 통괄하는 북서전역군 사령부가 설치되었고, 보로실로프가 지휘를 맡았다.
북서전선군의 첫 방어 작전은 실패로 끝났다.[20] 3주간의 군사 작전에서 450km까지 후퇴했고, 발트 해역의 대부분을 잃었으며, 9만 명 이상의 병사, 1,000대 이상의 전차, 4,000문 이상의 총과 박격포, 그리고 1,000대 이상의 항공기를 잃었다.[20] 발트 함대 또한 리가와 탈린 등의 정박지를 잃고 공습으로 큰 피해를 입어 발트 해의 제해권을 상실하게 된다.
6. 3. 서부 전선
벨라루스에 침입한 중앙집단군은 독일 동부 전선에서 가장 큰 기동력과 타격력을 보유하고 있었다.[20] 이 중앙집단군을 저지한 것은 벨라루스 방어를 담당하는 서부전선군이었다. 전력은 거의 대등했지만, 기계화 전력은 소련군이 독일군보다 약 3배 우세했다.전쟁 발발과 동시에 제공권 장악을 위한 격렬한 공중전이 벌어졌지만, 서부전선군은 기습 공격으로 전체 전력의 40%에 달하는 739대의 항공기를 잃고 열세에 놓였다.[20] 독일군은 부크 강(Бук)의 적군 경비병을 제압하고 폭발 장치를 해제하여 교량을 확보했다. 대기하고 있던 각 부대가 교량을 건너 소련 영토로 쇄도했다. 소련 지상군은 연락이 두절되어 제대로 연계하지 못한 채 각개로 반격했기 때문에 조직적인 저항을 하지 못하고 독일군 기동 부대의 침투를 허용했다.
중앙집단군은 그로드노(Гродно), 브레스트(Брест) 지역의 소련군 3개 군을 포위하기 위해 우회 기동을 시작했지만, 스타프카(Ставка)와 서부전선군 사령부 모두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다. 그로드노의 소련 제3군은 격렬한 공습을 받고 있었고, 사령관 쿠즈네초프(Кузнецов)는 지하 벙커로 피신해 있었다. 쿠즈네초프는 제56 저격 사단이 궤멸했다는 사실을 떨리는 목소리로 파블로프(Павлов)에게 보고했다.
각 군과의 연락이 두절된 가운데, 파블로프는 부관 볼딘(Болдин) 중장을 비아위스토크(Белосток)의 제10군 사령부에 파견했다. 볼딘은 수송기를 타고 비아위스토크에 도착한 후 현지에서 징발한 트럭으로 사령부로 향했다. 가는 도중 많은 피난민을 만났고, 주변은 굉음과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고 볼딘 자신이 회상하고 있다.
밤이 되어서야 볼딘은 사령부에 도착했다. 사령부는 이미 비아위스토크에서 후퇴하여 동쪽 자작나무 숲에 임시 사령부를 설치해 놓았다. 제10군 사령관 고르베프(Горбев)는 모든 사단이 회복 불가능한 손실을 입었고, 제10군은 사실상 궤멸 상태라고 볼딘에게 보고했다. 제3군은 독단으로 그로드노에서 철수했고, 비아위스토크에 남아 있던 제10군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무선 통신이 복구된 후, 파블로프는 부하 부대에 총반격을 명령했지만, 실행 불가능한 명령이었다. 볼딘은 비아위스토크에서 고립된 제10군 수천 명의 생존 병력에게 독단으로 철수를 명령하여 숲 지역으로 피신시켰다.
브레스트 요새에서는 고립된 요새 수비대가 독일군에 큰 피해를 입히며 격렬하게 저항했고, 그로드노 지역에서는 고립된 제3군의 생존 병력이 독일군의 진격을 필사적으로 저지했다. 브레스트 요새를 포함한 브레스트 지역을 방어하는 제4군도 선전했지만, 전체 군을 지휘해야 할 서부전선군 사령부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잘못된 명령을 반복했다.
사령관 파블로프(Павлов) 상장은 제3군과 제10군에 철수를 명령했지만, 그들은 이미 반 포위 상태였기 때문에 실행 불가능한 명령이었다. 민스크는 서쪽에서 포위되었고 제3군과 제10군은 우세한 독일군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제4군은 숲 지역으로 후퇴했고, 서부전선군은 이미 조직적인 저항력을 상실해가고 있었다.
6월 28일 수도 민스크가 함락되고 서부전선군에 대한 포위망이 좁혀졌다. 서부전선군은 사실상 궤멸되었고, 사령관 파블로프 상장은 책임을 물어 해임되었다. 6월 29일 후임으로 예레멘코(Еременко) 중장이 부임했고, 7월 2일에는 국방인민위원 티모셴코 원수가 서부 방어의 총지휘를 맡았다.
서부전선군은 3개 전선 중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18일간의 전투에서 41만 명의 병사, 4799대의 전차, 9472문의 박격포와 야포, 1777대의 항공기, 그리고 벨라루스 전역을 잃었다.[20]
7월 2일부터 그 다음 6일 동안, 벨라루스 여름의 전형적인 폭우가 중앙 집단군의 전차부대의 진격을 늦추었고, 소련군의 방어는 강화되었다. 이 지연은 소련군에게 중앙 집단군에 대한 대규모 반격을 조직할 시간을 주었다. 이 집단군의 최종 목표는 모스크바로 가는 길을 통제하는 스몰렌스크였다. 독일군과 맞선 것은 6개 군이 방어하는 구 소련 방어선이었다. 7월 6일, 소련군은 제20군의 제5기계화군단과 제7기계화군단을 이용하여 대규모 반격을 시작했고, 이는 5일간의 격렬한 전투에서 2,000대 중 832대의 탱크를 잃은 적군과 독일군 제39, 47 전차군단과 충돌했다. 독일군은 우연히도 루프트바페의 유일한 전차 사냥 전투기 중대의 존재 덕분에 이 반격을 물리쳤다. 제2전차집단은 드네프르 강을 건너 남쪽에서 스몰렌스크로 접근했고, 제3전차집단은 소련군의 반격을 물리친 후 북쪽에서 스몰렌스크로 접근했다. 그들의 포위망에 갇힌 것은 세 개의 소련군이었다. 7월 16일, 제29기계화사단이 스몰렌스크를 점령했지만 중앙 집단군 사이에는 틈이 남아 있었다. 7월 18일, 전차집단은 격차를 10km까지 줄였지만, 8월 5일까지 30만 명 이상의 적군 병사들이 사로잡히고 3,205대의 소련군 탱크가 파괴될 때까지 함정은 완전히 닫히지 않았다. 많은 수의 적군 병사들이 탈출하여 독일군과 모스크바 사이에 서서 저항을 계속했다.

작전 개시 4주 만에 독일군은 소련군의 전력을 크게 과소평가했음을 깨달았다. 독일군은 초기 보급품을 사용했고, 보크 장군은 적군이 강력한 저항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독일군의 어려움은 증원과 보급의 물류 문제 때문이라는 결론을 빠르게 내렸다. 이제 보급을 위해 작전 속도가 늦춰졌고, 그 지연은 새로운 상황에 맞춰 전략을 조정하는 데 사용될 예정이었다. 물류 부족 외에도 열악한 도로 때문에 바퀴 달린 차량과 보병이 더 빠른 기갑 선봉대를 따라잡기 어려웠고, 장화와 동계 군복의 부족이 명백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8월 2일까지 세 개의 집단군 모두 17만 9,500명의 사상자를 냈고, 4만 7,000명의 보충병만 받았다.
이제 히틀러는 많은 수의 소련군이 포위망에서 탈출했기 때문에 포위 전투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그는 이제 소련 국가를 경제적 수단으로 패배시켜 전쟁을 계속할 산업 능력을 박탈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것은 남쪽의 하르키우, 돈바스와 코카서스의 유전과 북쪽의 주요 군수 생산 중심지인 레닌그라드의 신속한 점령을 의미했다.

할더, 보크, 그리고 바르바로사 작전에 참여한 거의 모든 독일 장군들은 모스크바를 향한 총력전을 계속하는 것에 대해 강력하게 주장했다. 소련 수도를 점령하는 심리적 중요성 외에도 장군들은 모스크바가 주요 무기 생산 중심지이자 소련 통신 시스템의 중심지이자 중요한 교통 중심지라고 지적했다. 정보 보고서는 남은 적군의 대부분이 티모셴코 지휘하에 모스크바 근처에 배치되어 수도 방어를 하고 있다고 나타냈다. 구데리안은 보크와 할더에 의해 히틀러에게 파견되어 모스크바 공격을 계속하라는 주장을 펼쳤지만, 히틀러는 구데리안을 통해 (보크와 할더를 우회하여) 명령을 내려 중앙 집단군의 전차를 북쪽과 남쪽으로 보내 모스크바로의 진격을 일시적으로 중단시켰다. 히틀러의 주장에 설득된 구데리안은 휘르러의 계획에 동조하는 사람으로 지휘관들에게 돌아왔고, 그로 인해 그들의 멸시를 받았다.
우만 근처에서 세 개의 소비에트 군대를 포위하는 전투가 벌어졌다. 7월 중순까지 독일군은 프리피야트 늪지대 아래 키이우에서 불과 수 킬로미터 떨어진 곳까지 진격했다. 그러자 제1기갑군은 남쪽으로 이동했고, 제17군은 동쪽으로 공격하여 우만 근처에서 세 개의 소비에트 군대를 포위했다. 독일군이 이 포위망을 제거하자 전차들은 북쪽으로 방향을 돌려 드니프로 강을 건넜다. 한편, 중앙 집단군에서 전개된 제2기갑군은 제2군을 우측 방면에 배치하고 데스나 강을 건넜다. 이 두 기갑군은 이제 네 개의 소비에트 군대와 다른 두 군대의 일부를 포위했다.
8월이 되자 전투로 인해 독일 공군(Luftwaffe)의 항공기 가용성과 수량이 꾸준히 감소함에 따라, 소련 공군(VVS)이 회복되면서 공중 지원에 대한 수요는 오히려 증가했다. 독일 공군은 지역적 공중 우세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10월에 악천후가 시작되자 독일 공군은 여러 차례 거의 모든 항공 작전을 중단해야 했다. 소련 공군은 동일한 기상 악조건에 직면했지만, 전쟁 전 추운 날씨 비행 경험과 온전한 공군 기지와 공항에서 작전을 수행한다는 점 덕분에 명확한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12월까지 소련 공군은 독일 공군과 대등해졌으며, 심지어 전장에서 공중 우세를 확보하기 위해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에는 적군(소련군)의 가장 강력한 부대가 배치되었고, 가장 많은 기계화 군단(8개)이 배치되어 있었다. 또한 남서부 전선 사령관 키르포노스는 일찍이 독일군의 침공을 감지하고, 국경 지대 주민의 피난과 병력 이동을 진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남방집단군과 루마니아군의 침공은 기습 효과를 얻지 못하고 난항을 겪었다.
남방집단군의 임무는 우크라이나 우안의 적군을 격파하고, 드니프로 강 서쪽에서 섬멸하는 것이었다.[20] 스탈린은 참모총장 주코프를 스타브카 대표로 임명하고, 남서부 지역의 지휘 및 통괄을 명령했다. 남서부 전선은 반격이 가능한 충분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항공 기지가 맹렬한 공습을 받아 수세에 몰렸다.
전선 북부에서는 독일의 전차 부대가 리비우를 방어하고 있던 제5군을 돌파하여 20km 진격했다. 남부에서는 스트루밀로프 요새 지대의 제6군이 독일군의 공격을 저지했다. 헝가리와의 국경에는 제12군이, 루마니아 국경에는 제9군이 전개되어 추축군의 침공에 대비하고 있었다.
남서부 전선은 3개 기계화 군단(3700대)을 사용하여 반격에 나서, 브로디에서 양군의 전차 부대가 충돌했다. 연계를 잃은 적군은 제1기갑군 집단에 패했지만, 한편으로는 클라이스트의 발목을 잡는 데 성공했다. 남서부 전선 사령관 키르포노스는 방어선으로의 후퇴를 명령했지만, 스타브카는 허락하지 않고 반격을 명령했다.[20] 독일의 전차 부대는 두브노 지역까지 침투하여 방어선에 쐐기를 박았지만, 6월 30일까지 두브노 지역의 수비 부대는 끈질기게 저항하여 독일 제6군과 클라이스트의 전차 부대를 구속했다.
키르포노스는 리비우 지역에서 포위될 것을 우려하여, 6월 27일에 체계적인 후퇴를 시작했다. 6월 30일 스타브카는 남서부 전선 사령부에 요새 지역을 이용하여 방어선을 재구축하라고 명령했다. 안전하게 요새 지역으로 이동하려면 북쪽의 위협인 클라이스트의 전차 부대를 억제할 필요가 있었다. 망가진 제5군과 제22기계화 군단이 발목잡이 역할을 하며 제1기갑군 집단에 반격을 개시했다. 그들은 이틀 동안 버텨 키르포노스는 주력 부대를 이끌고 후퇴했다. 클라이스트의 전차 부대는 베르디치우를 점령하고, 남서부 전선의 후퇴로를 위협했다. 7월 11일에는 전차 부대가 키예프의 요새 지역에 도착하고, 독일군의 진격은 간신히 멈추었다.
한편 루마니아 국경에서는 루마니아군이 침공을 개시했다. 몰도바에서 제9군이 루마니아 3개 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교두보를 제거했다. 흑해에서는 흑해 함대, 세바스토폴 요새가 공습을 받았고, 카르파티아 지역에서는 헝가리군이 참전했다. 스타브카는 6월 25일에 루마니아 국경 방어를 위해 남부 전선을 설립했다. 한편 남방집단군 사령관 룬트슈테트 원수는 몰도바의 남부 전선을 돌파하여 남서부 전선을 포위하기 위해 몰도바에 제11군과 제17군을 파견했다.
7월 2일 독일·루마니아군이 공격을 개시하여 제9군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스타브카는 남부 전선의 주력 부대에 반격을 명령하여 독일 제11군과 루마니아 제4군을 일시적으로 발목을 잡았다. 이 반격으로 남부 전선은 일시적으로 안정되었고, 제18군은 요새 지역으로의 후퇴에 성공했고 제9군은 드니스테르 서부를 확보했다.
서우크라이나 방어전은 적군(소련군)의 패배로 끝났고, 소련은 북부 부코비나와 서우크라이나를 상실했다.[20] 하지만 서부 전선이나 북서부 전선과는 대조적으로 전투력을 유지한 채 후퇴에 성공했고, 전력 비율에서도 우위를 유지했다.[20] 7월 중순까지 남서부 전선·남부 전선은 병사 24만 1594명, 항공기 1218대, 포 5806문을 손실했다.[20]
6. 4. 남서 전선
남서 전선은 키예프 특별군관구에 기반하여 6월 22일에 편성되었으며, 제5군, 제6군, 제12군, 제26군으로 구성되었다. 우크라이나에는 소련군의 가장 강력한 부대가 배치되었고, 가장 많은 기계화 군단(8개)이 있었다. 남서부 전선 사령관 키르포노스는 독일군의 침공을 미리 감지하고, 국경 지대 주민의 피난과 병력 이동을 진행하여 남방집단군과 루마니아군의 침공은 기습 효과를 얻지 못하고 난항을 겪었다.[20]남방집단군의 임무는 우크라이나 우안의 소련군을 격파하고, 드니프로 강 서쪽에서 섬멸하는 것이었다.[20] 스탈린은 참모총장 주코프를 스타브카 대표로 임명하고, 남서부 지역의 지휘 및 통괄을 명령했다. 남서부 전선은 반격이 가능한 충분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항공 기지가 공습을 받아 수세에 몰렸다.
전선 북부에서는 독일 전차 부대가 리비우를 방어하던 제5군을 돌파하여 20km 진격했다. 남부에서는 스트루밀로프 요새 지대의 제6군이 독일군의 공격을 저지했다. 헝가리와의 국경에는 제12군이, 루마니아 국경에는 제9군이 전개되어 추축군의 침공에 대비하고 있었다.
남서부 전선은 3개 기계화 군단(3700대)을 사용하여 반격에 나섰고, 브로디에서 양군의 전차 부대가 충돌했다. 연계를 잃은 소련군은 제1기갑군 집단에 패했지만, 클라이스트의 발목을 잡는 데는 성공했다. 키르포노스는 방어선으로의 후퇴를 명령했지만, 스타브카는 허락하지 않고 반격을 명령했다.[20] 독일 전차 부대는 두브노 지역까지 침투하여 방어선에 쐐기를 박았지만, 6월 30일까지 두브노 지역 수비 부대는 끈질기게 저항하여 독일 제6군과 클라이스트의 전차 부대를 구속했다.
키르포노스는 리비우 지역에서 포위될 것을 우려하여 6월 27일에 체계적인 후퇴를 시작했다. 6월 30일 스타브카는 남서부 전선 사령부에 요새 지역을 이용하여 방어선을 재구축하라고 명령했다. 안전하게 요새 지역으로 이동하려면 북쪽의 위협인 클라이스트의 전차 부대를 억제할 필요가 있었다. 망가진 제5군과 제22기계화 군단이 발목잡이 역할을 하며 제1기갑군 집단에 반격을 개시했다. 그들은 이틀 동안 버텨 키르포노스는 주력 부대를 이끌고 후퇴했다. 클라이스트의 전차 부대는 베르디치우를 점령하고, 남서부 전선의 후퇴로를 위협했다. 7월 11일에는 전차 부대가 키예프의 요새 지역에 도착하고, 독일군의 진격은 간신히 멈추었다.
한편 루마니아 국경에서는 루마니아군이 침공을 개시했다. 몰도바에서 제9군이 루마니아 3개 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교두보를 제거했다. 흑해에서는 흑해 함대, 세바스토폴 요새가 공습을 받았고, 카르파티아 지역에서는 헝가리군이 참전했다. 스타브카는 6월 25일에 루마니아 국경 방어를 위해 남부 전선을 설립했다. 한편 남방집단군 사령관 룬트슈테트 원수는 몰도바의 남부 전선을 돌파하여 남서부 전선을 포위하기 위해 몰도바에 제11군과 제17군을 파견했다.
7월 2일 독일·루마니아군이 공격을 개시하여 제9군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스타브카는 남부 전선의 주력 부대에 반격을 명령하여 독일 제11군과 루마니아 제4군을 일시적으로 발목을 잡았다. 이 반격으로 남부 전선은 일시적으로 안정되었고, 제18군은 요새 지역으로의 후퇴에 성공했고 제9군은 드니스테르 서부를 확보했다.
서우크라이나 방어전은 소련군의 패배로 끝났고, 소련은 북부 부코비나와 서우크라이나를 상실했다.[20] 하지만 서부 전선이나 북서부 전선과는 대조적으로 전투력을 유지한 채 후퇴에 성공했고, 전력 비율에서도 우위를 유지했다.[20] 7월 중순까지 남서부 전선·남부 전선은 병사 24만 1594명, 항공기 1218대, 포 5806문을 손실했다.[20]
6. 5. 남부 전선
남방집단군의 임무는 우크라이나 우안의 적군을 격파하고, 드니프로 강 서쪽에서 섬멸하는 것이었다.[20] 우크라이나에는 적군(소련군)의 가장 강력한 부대가 배치되었고, 가장 많은 기계화 군단(8개)이 배치되어 있었다. 또한 남서부 전선 사령관 키르포노스는 일찍이 독일군의 침공을 감지하고, 국경 지대 주민의 피난과 병력 이동을 진행하고 있었다. 따라서 남방집단군과 루마니아군의 침공은 기습 효과를 얻지 못하고 난항을 겪었다.스탈린은 참모총장 주코프를 스타브카 대표로 임명하고, 남서부 지역의 지휘 및 통괄을 명령했다. 남서부 전선은 반격이 가능한 충분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항공 기지가 맹렬한 공습을 받아 수세에 몰렸다.
전선 북부에서는 독일의 전차 부대가 리비우를 방어하고 있던 제5군을 돌파하여 20km 진격했다. 남부에서는 스트루밀로프 요새 지대의 제6군이 독일군의 공격을 저지했다. 헝가리와의 국경에는 제12군이, 루마니아 국경에는 제9군이 전개되어 추축군의 침공에 대비하고 있었다.
남서부 전선은 3개 기계화 군단(3700대)을 사용하여 반격에 나서, 브로디에서 양군의 전차 부대가 충돌했다. 연계를 잃은 적군은 제1기갑군 집단에 패했지만, 한편으로는 클라이스트의 발목을 잡는 데 성공했다. 남서부 전선 사령관 키르포노스는 방어선으로의 후퇴를 명령했지만, 스타브카는 허락하지 않고 반격을 명령했다.[20] 독일의 전차 부대는 두브노 지역까지 침투하여 방어선에 쐐기를 박았지만, 6월 30일까지 두브노 지역의 수비 부대는 끈질기게 저항하여 독일 제6군과 클라이스트의 전차 부대를 구속했다.
키르포노스는 리비우 지역에서 포위될 것을 우려하여, 6월 27일에 체계적인 후퇴를 시작했다. 6월 30일 스타브카는 남서부 전선 사령부에 요새 지역을 이용하여 방어선을 재구축하라고 명령했다. 안전하게 요새 지역으로 이동하려면 북쪽의 위협인 클라이스트의 전차 부대를 억제할 필요가 있었다. 망가진 제5군과 제22기계화 군단이 발목잡이 역할을 하며 제1기갑군 집단에 반격을 개시했다. 그들은 이틀 동안 버텨 키르포노스는 주력 부대를 이끌고 후퇴했다. 클라이스트의 전차 부대는 베르디치우를 점령하고, 남서부 전선의 후퇴로를 위협했다. 7월 11일에는 전차 부대가 키예프의 요새 지역에 도착하고, 독일군의 진격은 간신히 멈추었다.
한편 루마니아 국경에서는 루마니아군이 침공을 개시했다. 몰도바에서 제9군이 루마니아 3개 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교두보를 제거했다. 흑해에서는 흑해 함대, 세바스토폴 요새가 공습을 받았고, 카르파티아 지역에서는 헝가리군이 참전했다. 스타브카는 6월 25일에 루마니아 국경 방어를 위해 남부 전선을 설립했다. 한편 남방집단군 사령관 룬트슈테트 원수는 몰도바의 남부 전선을 돌파하여 남서부 전선을 포위하기 위해 몰도바에 제11군과 제17군을 파견했다.
7월 2일 독일·루마니아군이 공격을 개시하여 제9군의 방어선을 돌파했다. 스타브카는 남부 전선의 주력 부대에 반격을 명령하여 독일 제11군과 루마니아 제4군을 일시적으로 발목을 잡았다. 이 반격으로 남부 전선은 일시적으로 안정되었고, 제18군은 요새 지역으로의 후퇴에 성공했고 제9군은 드니스테르 서부를 확보했다.
서우크라이나 방어전은 적군(소련군)의 패배로 끝났고, 소련은 북부 부코비나와 서우크라이나를 상실했다.[20] 하지만 서부 전선이나 북서부 전선과는 대조적으로 전투력을 유지한 채 후퇴에 성공했고, 전력 비율에서도 우위를 유지했다.[20] 7월 중순까지 남서부 전선·남부 전선은 병사 24만 1594명, 항공기 1218대, 포 5806문을 손실했다.[20]
모스크바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키예프 작전을 끝낼 필요가 있었다. 중앙집단군의 절반이 키예프 방어선 후방으로 남쪽으로 이동한 반면, 남부집단군은 드니프로 강의 교두보에서 북쪽으로 이동했다. 9월 16일 키예프의 소련군 포위가 완료되었다. 전투가 벌어졌고, 소련군은 전차, 포병 및 공중 폭격으로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10일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독일군은 66만 5천 명의 소련군 포로를 확보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 수치는 약 22만 명일 가능성이 높다. 소련군의 손실은 제5군, 제21군, 제26군, 제37군의 43개 사단에서 45만 2,720명, 3,867문의 포병 및 박격포였다. 치열한 전투로 일부 독일 부대가(최대 75%의 병력) 극심한 피로와 손실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키예프에서 소련군의 압도적인 패배와 공격 개시 후 첫 3개월 동안의 적군 손실은 독일군이 타이푼 작전(모스크바 공격)이 여전히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 기여했다.
7. 주요 전투 및 전개 과정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의 공격 개시와 함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육상 작전인 바르바로사 작전이 시작되었다. 독일군과 추축군은 300만 명이 넘는 병력을 동원하여 소련을 침공했다.
초기 주요 전투로는 브레스트 요새 전투, 브로디 전투, 비아위스토크-민스크 전투, 발트 작전, 스몰렌스크 전투 등이 있다. 이 전투들에서 독일군은 초반에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소련군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오데사 포위전과 키예프 전투는 남부 전선에서 벌어진 주요 전투이다. 특히 키예프 전투는 역사상 가장 많은 군대가 포위된 전투로 기록되었다.
세바스토폴 포위전은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에서 벌어진 장기간의 포위전으로, 1941년 10월부터 1942년 7월까지 이어졌다.
키예프 전투 이후, 독일군은 돈바스 공업 지역과 크림 반도 점령을 목표로 동쪽과 남쪽으로 진격했다. 아조프 해 전투에서 소련군은 큰 피해를 입었고, 독일군은 하르키우를 점령했다.
모스크바 공방전은 1941년 10월부터 1942년 1월까지 진행되었다. 타이푼 작전으로 명명된 독일군의 공세는 소련군의 강력한 저항과 혹독한 겨울 날씨로 인해 실패했다. 소련군은 겨울 반격을 통해 독일군을 모스크바에서 밀어냈다.
7. 1. 초기 공세 (1941년 6월 ~ 9월)
1941년 6월 22일, 독일군을 주축으로 한 추축군 300만 명 이상이 동원된 역사상 최대 규모의 육상 작전인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되었다. 이날 오전 3시를 전후하여 독일군 대포 6,000문이 일제히 포문을 열어 국경선 근처 소련군 방어 거점과 물자 집적소 등을 포격했고, 동시에 독일 공군기 편대들이 비행장과 민간 목표물을 폭격했다.
'''브레스트 요새 전투'''는 1941년 6월 22일부터 29일까지 브레스트 요새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독일군은 바르바로사 작전 첫날 중앙 집단군이 브레스트와 브레스트 요새를 장악하기로 계획했다.
'''브로디 전투'''(두브나 전투)는 1941년 6월 23일부터 30일까지 우크라이나의 두브나, 로브노, 브로디 삼각지대에서 벌어진 전차전이다. 이 전투는 쿠르스크 전투 전까지 가장 많은 전차가 동원된 전투로 알려졌다.
'''비아위스토크-민스크 전투'''는 독일 중앙 집단군이 1941년 6월 22일부터 7월 3일까지 소련 국경에서 벌인 전투로, 민스크 주변 소련군을 포위하는 데 성공했다.
'''발트 작전'''(리투아니아-라트비아 방어 작전)은 1941년 6월 22일부터 7월 9일까지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로, 알리투스 전투, 라세이냐이 전투 등이 포함된다.
'''스몰렌스크 전투'''는 1941년 7월 10일부터 9월 10일까지 스몰렌스크 주변에서 벌어져 모스크바를 400km 앞둔 독일군의 진격을 2달 동안 지체시킨 전투이다.
1941년 6월 22일 새벽, 독일 공군은 레닌그라드 인근 크론슈타트와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까지 공습했고, 독일의 선전포고와 함께 지상군이 국경을 넘었다. 약 300만 명의 독일군과 핀란드, 루마니아 부대가 참전했다.[20]
정오에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침공 소식을 방송하며 국민의 애국심을 호소했다. 소련 최고 사령부와 군대는 전쟁 수행을 위해 재편되었고, 스탈린은 7월 3일 "전 소련 국민의 애국 전쟁"을 촉구했다.
독일에서는 요제프 괴벨스가 라디오 방송으로 침공을 발표했고, 히틀러는 자신을 평화주의자로 묘사하며 이 전쟁을 "볼셰비즘에 대한 유럽의 성전"으로 선전했다.
7월 3일, 독일군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는 러시아 원정의 승리를 기록했지만, 소련군은 드비나 강-드네프르 강에 전략적 제2차선을 형성하고 7월 중순 전투력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7월 4일, 세묜 티모셴코가 서부 전선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반격을 명령했지만, 제5, 7기계화군단의 전차 공세는 실패했다.
7월 10일, 독일 제3기갑집단은 비테프스크를 공략하고 제2기갑집단은 모길료프에서 소련군을 포위했으나 큰 피해를 입었다. 7월 16일 스몰렌스크가 함락되었고, 독일 제39기갑군단은 스몰렌스크-모스크바 간 도로와 철도를 차단하여 소련 3개 군을 포위했다.
로코소프스키 작전 집단이 독일군을 후퇴시키고 2개 군단이 스몰렌스크 수비군과 합류했으나, 구데리안은 모스크바 진격을, 호트는 포위 섬멸을 우선시하여 중앙군 집단은 큰 타격을 입고 10만 명이 포위망을 탈출했다.
8월 4일까지 중앙군 집단은 포위망을 완성하여 많은 소련군을 격파했지만, 25만 명의 병력을 잃고 전력이 저하되었다. 8월 12일, 히틀러는 총통 훈령 34호로 모스크바 공세를 보류하고 레닌그라드와 우크라이나 점령을 우선 목표로 설정했다.
7월, 보로실로프는 루가 강 방어에 전력을 기울였으나 8월에 독일 제4기갑집단이 돌파했다. 8월 21일, 독일 제41기갑군단은 레닌그라드 외곽에 도달했지만, 후속 보병부대를 기다려야 했다.
히틀러는 우크라이나 탈취와 레닌그라드 봉쇄를 위해 제39기갑군단을 북방집단군에 지원 보냈고, 슈리셀부르크를 함락시켜 육로를 차단했다. 스탈린은 주코프에게 레닌그라드 재건을 명령, 주코프는 발트 함대 화력을 집중시켜 독일군 진격을 저지하고 900일간의 포위를 견뎌냈다.
몰도바에서는 독일-루마니아군이 오데사를 공격했으나 소련군은 60일간 저항했다. 8월, 독일군은 우만에서 소련 2개 군을 포위하고 드니프르 동쪽에 교두보를 확보했다.
스탈린은 키예프 방어를 위해 부요느이에게 남서부 전선군 지휘를 맡겼으나, 주코프의 키예프 포기 건의는 거부되었다. 히틀러는 중앙군 집단의 제2기갑군 집단과 제2군에게 남하를 명령, 남서부 전선군 포위를 시도했다.
샤포시니코프는 독일군 주 목표가 모스크바라고 생각했고, 예레멘코의 브랸스크 전선군 공격은 모스크바 진군 방해를 의도했다. 주코프는 다시 키예프 포기를 주장했지만 거부되었다.
독일 제1기갑군 집단과 제2기갑군 집단이 로흐비차에서 합류하여 소련군 후방이 차단되었고, 부요느이는 해임되었다. 티모셴코가 남서부 전선군 지휘를 맡았고, 키르포노스는 키예프 사수를 명령받았다.
스탈린은 9월 17일에야 철수를 허가했지만, 이미 늦어 키르포노스 등 많은 장교가 전사하고 60만 명이 포로가 되었다. 키예프는 함락되었고 소련은 최대 야전 부대를 상실, 크리미아 방위군은 고립되었다.
7. 2. 남부 전선의 격전 (1941년 8월 ~ 10월)
오데사 포위전은 1941년 8월 8일부터 10월 16일까지 오데사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이다.키예프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군이 소련령 우크라이나 키예프에서 진행했던 대규모 포위전이다. 역사상 가장 많은 군대가 포위된 전투로 알려져 있으며, 1941년 8월 23일부터 9월 26일까지 바르바로사 작전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세바스토폴 포위전은 1941년 10월 30일부터 1942년 7월 4일까지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에서 벌어진 전투이다.
키예프 작전 성공 후, 남부집단군은 동쪽과 남쪽으로 진격하여 돈바스 공업 지역과 크림 반도를 점령하려 했다. 소련 남부전선은 9월 26일, 아조프 해 북쪽 해안에서 독일 제11군 일부를 상대로 공격을 개시했다. 10월 1일,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휘하 제1기갑군이 남쪽으로 진격하여 소련군을 포위했다. 10월 7일까지 소련 제9군과 제18군은 고립되었고, 나흘 후 궤멸당했다. 이 전투에서 소련군은 10만 6,332명이 포로로 잡히고, 212대의 전차와 766문의 포병을 잃었다.[20] 이로 인해 남부전선 병력의 3분의 2가 사망하거나 포로로 잡혔고, 독일군은 10월 24일 하르키우를 점령했다. 클라이스트의 제1기갑군은 같은 달 돈바스 지역을 점령했다.[20]
7. 3. 모스크바 공방전 (1941년 10월 ~ 1942년 1월)
키예프 전투 이후, 소련군은 더 이상 독일군보다 수적으로 우세하지 않았고, 바로 투입 가능한 훈련된 예비군도 없었다. 스탈린은 모스크바 방어를 위해 83개 사단 80만 명을 배치했지만, 완전한 전투력을 갖춘 사단은 25개 사단을 넘지 않았다. 1941년 9월 30일, 모스크바 공격 작전인 타이푼 작전이 시작되었다.[20] 중앙 집단군 앞에는 뱌젬을 중심으로 하는 첫 번째 방어선과 모자이스크를 중심으로 하는 두 번째 방어선등 정교한 방어선들이 여러 개 있었다.[20] 러시아 농민들은 독일군의 진격에 앞서 초토화 전술의 일환으로 수확한 곡물을 태우고 가축을 몰아내고 마을의 건물을 파괴했다.[20]
첫 번째 타격은 소련군을 완전히 기습했다. 남쪽에서 돌아온 제2 기갑집단군이 소련군의 첫 번째 주요 방어선 남쪽 약 지점에 있는 오룔을 점령했기 때문이다.[20] 사흘 후, 기갑부대는 브랸스크로 진격했고, 제2군은 서쪽에서 공격하여 소련군 제3군과 제13군은 포위되었다.[20] 북쪽에서는 제3기갑군과 제4기갑군이 뱌젬을 공격하여 제19군, 제20군, 제24군, 제32군을 포위했다.[20] 모스크바의 첫 번째 방어선은 무너졌다. 결국 50만 명이 넘는 소련군 포로가 생겼고, 침공 시작 이후 포로 수는 300만 명에 달했다. 소련군은 이제 모스크바 방어를 위해 9만 명의 병력과 150대의 전차만 남겨두었다.[20]
독일 정부는 모스크바의 임박한 함락을 공개적으로 예측하고, 외신 기자들에게 소련의 붕괴가 임박했다고 확신시켰다.[20] 10월 13일, 제3기갑집단군은 수도에서 지점까지 진격했고, 모스크바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다.[20] 그러나 타이푼 작전 초부터 날씨가 악화되어 기온이 떨어지는 가운데 계속해서 비가 내렸다. 이로 인해 포장되지 않은 도로망이 진흙탕으로 변하여 독일군의 모스크바 진격을 지연시켰다.[20] 이어 눈이 내린 후 다시 비가 내려, 독일 전차가 통과하기 어려운 끈적끈적한 진흙이 만들어졌다. 소련의 T-34 전차는 더 넓은 궤도 덕분에 이러한 지형을 더 잘 통과할 수 있었다.[20] 동시에 독일군의 보급 상황은 급격히 악화되었다.[20] 10월 31일, 독일 육군 최고 사령부는 군대를 재편성하는 동안 타이푼 작전을 중단하라고 명령했다. 이러한 일시적인 정지는 소련군에게 보급 상황이 훨씬 더 나은 상황에서 방어선을 강화하고 새로 활성화된 예비군을 조직할 시간을 주었다.[20] 한 달 남짓 만에 소련은 시베리아 군대 30개 사단을 포함한 11개의 새로운 군대를 조직했다. 소련 정보 당국이 스탈린에게 일본의 위협이 더 이상 없다고 확신시킨 후, 이들은 소련 극동 지역에서 해방되었고, 1941년 10월과 11월에 시베리아 군대와 함께 1,000대가 넘는 전차와 1,000대 이상의 항공기가 도착하여 도시 방어를 지원했다.[20]
추위로 인해 지면이 단단해지면서,[20] 독일군은 11월 15일에 모스크바 공격을 재개했다.[20] 군대 자체는 다시 진격할 수 있었지만, 보급 상황은 개선되지 않았다. 1941년 6월 22일에 60만 대였던 트럭은 1941년 11월 15일에는 13만 5천 대만 남았다. 탄약과 연료가 식량과 동계 의류보다 우선순위가 높았기 때문에 많은 독일군이 지역 주민들로부터 물자를 약탈했지만, 그들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는 없었다.[20]
독일군과 맞선 것은 소련군 제5군, 제16군, 제30군, 제43군, 제49군, 제50군이었다. 독일군은 제3기갑군과 제4기갑군을 모스크바 운하를 건너 북동쪽에서 모스크바를 포위하고, 제2기갑집단군은 툴라를 공격한 다음 남쪽에서 모스크바를 포위할 계획이었다.[20] 소련군이 측면을 방어하자 제4군이 중앙을 공격했다. 2주간의 전투에서 연료와 탄약이 부족했던 독일군은 모스크바로 천천히 진격했다. 남쪽에서는 제2기갑집단군이 막혔다. 11월 22일, 제49군과 제50군이 증강된 소련 시베리아 부대가 제2기갑집단군을 공격하여 독일군에게 패배를 안겼다. 그러나 제4기갑집단군은 소련군 제16군을 후퇴시켰고, 모스크바를 포위하기 위해 모스크바 운하를 건너는 데 성공했다.[20]
12월 2일, 제258보병사단의 일부가 모스크바에서 24km 지점까지 진격했다. 그들은 너무 가까이 다가가서 독일 장교들은 크렘린의 첨탑이 보인다고 주장했지만,[20] 그때 첫 번째 눈보라가 시작되었다.[20] 정찰대대는 소련 수도에서 약 8km 떨어진 Khimki 마을에 도달했다. 그들은 모스크바-볼가 운하 위의 다리와 기차역을 점령했는데, 이는 독일군의 최동단 진격을 표시하는 것이었다.[20] 진전에도 불구하고, ''베르마흐트''는 그러한 혹독한 겨울 전투에 대비되어 있지 않았다.[20] 소련군은 겨울 조건에서의 전투에 더 적응했지만, 동계 의류 생산 부족에 직면했다. 독일군은 더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깊은 눈은 장비와 이동성을 더욱 방해했다.[20] 기상 조건으로 인해 ''루프트바페''의 대규모 공중 작전이 크게 제한되었다.[20] 모스크바 근처에 새로 창설된 소련 부대는 50만 명이 넘었고, 우수한 방어 시설, 주코프와 같은 숙련되고 경험 많은 지휘관의 존재, 그리고 독일군의 열악한 상황으로 인해 12월 5일까지 독일군의 공세를 저지할 수 있었다.[20] 12월 5일, 소련 방어군은 소련의 겨울 반격의 일환으로 대규모 반격을 시작했다. 이 공세는 1942년 1월 7일에 모스크바에서 독일군을 100km 에서 250km 밀어낸 후 중단되었다.[20] ''베르마흐트''는 모스크바 전투에서 패했고, 이 침공으로 독일군은 83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냈다.[20]
8. 바르바로사 작전의 실패 원인
독일군의 바르바로사 작전 실패는 여러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우선, 소련군의 강력한 저항을 과소평가했다. 독일군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는 개전 2주 만에 승리를 확신했고, 히틀러 역시 소련을 쉽게 무너질 헛간에 비유했지만, 현실은 달랐다.[24] 소련군은 끈질기게 저항했고, 전멸할 때까지 싸우는 경우가 많았다.[22] 독일군은 개전 초기에 많은 병력과 장비를 잃었고, 이는 소련군이 예상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것을 의미했다.[23]
둘째, 소련군의 전술과 기술 발전도 독일군의 발목을 잡았다. 소련군은 KV-1 중전차, T-34 중전차 등 당시 독일 전차보다 우수한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31] 또한, 소련군은 독일군의 전격전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끈질긴 저항과 전술의 정교함으로 독일군을 괴롭혔다.
셋째, 가혹한 자연환경도 독일군의 진격을 늦췄다. 가을비로 인해 땅이 진흙탕이 되었고, 겨울의 혹한은 독일군의 진격을 정지시켰다. 이는 독일군이 모스크바로 진출하는 데 결정적인 방해 요인이 되었다.
넷째, 독일군의 병참 문제도 심각했다. 광대한 소련 영토에서 작전을 수행하면서 보급선이 길어졌고, 소련의 철도 궤간이 독일과 달라 물자 수송에 어려움을 겪었다.[25] 또한, 독일군은 소련군의 주요 거점을 모두 점령하지 못해 보급에 더욱 어려움을 겪었다.[25]
다섯째, 독일군의 전략적 판단 오류도 실패의 원인 중 하나였다. 히틀러는 모스크바 점령 대신 남부 지역의 자원 확보를 우선시하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는 독일군 내부에서도 논란이 되었다.[8] 이는 소련군에게 전력을 재편할 시간을 주었고, 결국 모스크바 공략 실패로 이어졌다.
여섯째, 독일 공군의 제공권 장악 실패도 독일군의 발목을 잡았다. 넓은 동부 전선에서 독일 공군은 소련 공군을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고, 이는 지상군의 작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마지막으로, 발칸반도 작전으로 인해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일이 늦어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 유고슬라비아 쿠데타와 그리스-이탈리아 전쟁 개입으로 인해 작전 개시일이 한 달 이상 연기되었고, 이는 독일군이 겨울을 맞이하는 시기를 앞당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러한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독일군의 바르바로사 작전은 실패로 끝났고, 이는 제2차 세계 대전의 흐름을 바꾸는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9. 결과 및 영향
독일군이 모스크바로 진출하려 했으나, 가을비와 겨울 추위로 인해 진군이 멈췄다. 소련군의 KV-1 중전차와 T-34 중전차는 독일 전차보다 우수하여 독일군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이에 독일군은 신형 전차 개발과 기존 전차 개량에 착수했다.[31]
1941년 8월,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 남부에 도달했으나, 소련군의 저항에 막혔다. 독일군은 제4기갑집단을 모스크바 공격을 위해 중부집단군으로 이동시키고, 레닌그라드는 포위와 봉쇄를 통한 보급 차단을 결정했다. 그러나 1944년 소련군이 레닌그라드를 해방시킬 때까지 점령되지 못했다. 레닌그라드는 영웅 도시 칭호를 받은 최초의 소련 도시가 되었다.
키예프 공략 후,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의 제2기갑군이 중부집단군에 복귀하여 모스크바 공략을 위한 태풍 작전이 시작되었다. 뱌지마, 브랸스크에서 소련군은 50만 명의 병력을 잃었다. 그러나 가을 장마로 도로가 진흙탕이 되어 독일군 전진은 정지되었고, 소련군은 모스크바 방어 체제를 재구축했다. 추위와 함께 땅이 얼자 독일군은 전진을 재개했지만, 추위와 소련군의 저항으로 12월 초에 정지되었다. 소련군의 동계 반격이 시작되었고, 모스크바는 영웅 도시 칭호를 받았다.
단기 결전을 목표로 한 작전은 실패했다. 모스크바 공략을 통해 소련을 굴복시키려던 태풍 작전은 실패했다. 소련군의 동계 반격으로 독일군은 패주했으나, 히틀러의 사수 명령으로 버텼다. 그러나 독일군은 러시아 주요 도시를 점령하지 못하고 소모전을 치러야 했다. 히틀러의 퇴각 불가 명령에 따르지 않은 장군들의 대량 경질은 국방군 내에 불만을 야기했다.
바르바로사 작전 실패의 가장 큰 이유는 러시아의 광대한 영토로 인해 독일군의 보급이 따라가지 못했고, 소련의 전쟁 수행 능력이 예상보다 높았기 때문이다. 소련군은 전선이 내륙까지 진행되었음에도 격렬하게 저항했다. 러시아는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남부 자원 지대 등으로 전략적 목표가 분산되어 독일군은 병력을 3개로 나누었다. 이는 병력 분산을 초래했고, 모든 주요 목표 공략에 실패하고 보급 곤란을 야기했다. 히틀러의 유고슬라비아 간섭과 무솔리니의 그리스 침공 실패, 그리고 겨울이 빨리 찾아온 것도 작전 실패에 영향을 미쳤다.
1942년, 독일군은 다시 크게 승리했고, 코카서스 지방 제압을 목표로 한 청색 작전을 발동했다. 크림반도 제압을 위한 세바스토폴 전투도 벌어졌다. 그러나 소련군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독소 전쟁의 흐름은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1943년 소련의 군수품 생산은 완전히 가동되었고, 독일의 전시 경제보다 생산량이 증가했다. 독일의 마지막 주요 공세는 1943년 7월~8월 쿠르스크 돌출부에 대한 공격인 시타델 작전이었다. 약 100만 명의 독일군이 250만 명이 넘는 소련군과 맞섰다. 소련군은 쿠르스크 전투에서 승리했고, 쿠투조프 작전을 시작하여 독일군을 서쪽으로 몰아냈다.
1944년 바그라티온 작전의 결과로 중부 집단군이 궤멸되었고, 소련군 공세는 독일군을 더욱 후퇴시켰다. 1945년 1월, 동부 전선은 소련군이 장악했고, 그들의 군사력은 베를린을 향했다. 히틀러는 1945년 4월 30일 자살했고, 유럽에서의 전쟁은 1945년 5월 나치 독일의 패배와 항복으로 끝났다.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된 후, 동유럽은 나치 독일군에 의해 약탈당했다. 1943년 한 해에만 9,000,000톤의 곡물, 2,000,000톤의 사료, 3,000,000톤의 감자, 662,000톤의 고기가 독일로 반출되었다. 약 1,200만 마리의 돼지와 1,300만 마리의 양이 징발되었다. 이러한 약탈의 가치는 40억 라이히스마르크로 추산된다.
바르바로사 작전은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군사 작전이었다. 이 침공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큰 전장이었던 동부 전선을 열었고, 4년 동안 2,600만 명이 넘는 소련 국민이 사망했으며, 이 중 약 860만 명은 적군 병사였다. 경제와 환경 피해는 막대하여 약 1,710개의 소련 도시와 70,000개의 마을이 파괴되었다.
바르바로사 작전과 그 이후 독일의 패배는 유럽의 정치 지형을 변화시켜 동부와 서부 블록으로 분열시켰다. 대륙 동부에 남겨진 정치적 공백은 소련이 채웠다. 스탈린은 부활하는 독일의 힘에 대한 두려움과 이전 동맹국들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소련의 범슬라브주의적 계획과 슬라브 국가들의 동맹에 기여했다. 데이비드 글랜츠와 조나단 하우스 역사학자들은 바르바로사 작전이 스탈린뿐만 아니라 그 이후 소련 지도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그들의 전략적 사고방식을 '다음 40년 동안' 변화시켰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 소련은 "소련을 미래의 어떤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도록 설계된 정교한 완충 및 종속 국가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 후 냉전에서 동유럽은 소련의 영향권이 되었고, 서유럽은 미국과 연합했다.
국경선 전투는 독일군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프란츠 할더는 일기에 러시아와의 전쟁이 2주 만에 결착났다고 적었다. 히틀러 또한 승전을 선전하며 러시아인들은 회복할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고 했다.
개전 후 3주 만에 독일군은 발트 해 연안,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의 대부분을 점령하고 500km를 진격했다. 적군의 피해는 막대하여 7월 30일까지 병사 65만 명, 항공기 3468대, 포 1만 2000문, 군수품 집적소 200곳을 상실했다.[20]
독일군의 피해 또한 막대했다. 7월 중순까지 병사 10만 명, 항공기 1000대, 전차 1500대를 잃었다.[20] 침공의 주력인 기갑부대도 차량 손실 및 고장이 잇따라 가동률이 크게 저하되었다. 7월 중순 시점에서 제2기갑군의 가동률은 29%, 제3기갑군의 가동률은 42%였다. 제3기갑군 사령관 헬만 호트는 "러시아인들은 강력한 거인이다. 전력의 소모는 얻은 성과보다 크다"라고 했다.[21]
모스크바 공략을 통한 소비에트 체제 타도라는 희망은 좌절되었다. 중앙군 집단만 18만 7천 명의 병력을 잃었고, 동부 전선 전체의 손실은 87만 명에 달했다.
독일은 이러한 손실을 메울 인력과 생산력이 없었다. 1941년 12월 군수 공장에서 28만 2300명이 소집되었지만, 훈련 부족한 신병의 증가는 병사의 질을 저하시켰다. 또한 군수 산업도 타격을 입어 독일 경제는 침체되었고, 히틀러는 알베르트 슈페어에게 독일 경제 재건을 맡기게 된다.
전선에서는 병참에 대한 과도한 부담으로 인해 수송용 트럭이 부족해졌다. 이와 같은 규모의 공세는 다시는 실시되지 않았고, 독일은 전쟁에서 승리할 유일한 기회와 수단을 잃게 된다.
한편 소련이 입은 손실은 훨씬 막대했다. 300만 명이 넘는 병사를 잃었고, 6월에는 570만 명에 달했던 동원력이 겨울에는 230만 명으로 감소했다. 인구의 45%와 국내 공장의 3분의 2가 독일군 점령 지역에 남겨졌다. 군수 생산 능력의 8할이 우랄로 이동 중이어서 가동되지 않았고, 무기 탄약 부족은 매우 심각했다.
기계화 부대의 손실도 심각하여, 1941년 8월에 적군은 73개 전차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12월까지 44개 사단이 전멸했고, 21개 사단은 정원 미달이었다. 적군이 군단을 재건하는 것은 1942년이 되어서였다.
모스크바 함락을 목표로 한 타이푼 작전의 실패와 적군의 반격으로 독일군은 전선 붕괴 위기에 몰렸으나, 히틀러의 사수 명령과 각 부대의 분전으로 간신히 버텼다. 육군 총사령관 브라우히치 원수는 해임되었고, 후임에는 히틀러 자신이 앉았다. 또한 구데리안 상급 대장 등 많은 장관들이 해임되었다.
적군의 개전 초기 대패 원인은 독일의 공격을 예상하지 못하고 심도방어를 위한 병력 배치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격전에 대한 효과적인 방어법이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이 패배는 소련의 선전 태도 변화를 야기했다. 전쟁 전 적군은 매우 강력하다고 여겨졌지만, 1941년 가을에는 적군이 약하고 개전 준비를 할 충분한 시간이 없었으며, 독일의 공격은 놀라운 것이었다는 인상을 주었다.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의 역사 교육에서는 이를 스탈린에 의한 1930년대의 대숙청으로 많은 숙련된 장교를 잃었다는 점을 덧붙여 가르치고 있다.
하지만 섬멸적인 피해를 입은 구식 무기와 대량 생산 능력으로 최신 무기로 전환할 수 있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긴 해도 인구와 생산 설비, 농지 등의 대부분을 잃은 후에도 소련이 독일을 격파한 사실은 국가로서의 소련이 결코 약하지 않았음을 증명했다.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거의 전멸할 때까지 저항을 멈추지 않는 적군 때문에 전격전의 효력은 점차 사라져 갔다.
바르바로사 작전은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군사 작전이었다. 동부 전선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으며, 전장이 된 소비에트 연방에서는 1700개의 도시와 7만 개의 마을이 완전히 파괴되었다.[27] 바르바로사 작전의 실패로 유럽에서 패권적 지위를 차지했던 독일은 몰락했고, 유럽은 동서로 분단되었다.
독일과 깊은 관계를 맺었던 동유럽 국가들은 소련의 손에 넘어갔고, 소련은 독일을 대신하여 동유럽과 남유럽의 패권 국가로 변모했다. 또한 최대의 희생을 치르면서 나치의 군사 기구를 분쇄한 소련은 전후 국제 질서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미국과 세계를 양분하는 초강대국으로 성장했다.
10. 더불어민주당의 입장
주어진 원문 소스에는 '바르바로사 작전'에 대한 '더불어민주당의 입장'을 나타내는 내용이 없으므로, 해당 섹션을 작성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따라서 이전 답변과 동일하게 출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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