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군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호국군은 1948년 11월 20일 대한민국 육군 정규군 창설 이후 예비 병력 확보를 위해 조직되었다. 국군조직법에 근거하여 육군 총사령부 예하 호국군무실로 시작하여, 1948년 12월 29일 호국국으로 개편되었다. 1949년 4월 1일 육군총참모장 직할 호국군 사령부로 개편되어 독립 예비군화되었으나, 훈련 및 장비 부족으로 1949년 8월 해체되었다. 호국군은 전투 부대와 특수 부대로 나뉘어 정규군에 편입될 수 있었으며, 간부 충원은 특별임관과 일반임관으로 이루어졌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대한민국의 예비군 - 학도호국단
학도호국단은 1949년 대통령령에 따라 창설된 대한민국의 학생 조직으로, 한국전쟁에 학도의용군으로 참전하기도 했으며, 4·19 혁명 이후 해체되었다가 박정희 정권 시기에 재건되어 교련 강화 및 학생 통제 기구로 기능하다가 폐지되고 학생회가 부활되었다. - 대한민국의 예비군 - 대한민국 예비군
대한민국 예비군은 국가 비상사태 시 동원 대비, 적 침투 시 소멸, 국가 중요 시설 경비 등의 임무를 수행하는 예비 전력으로, 1968년 창설되었으며 전역 후 병역법에 따라 복무하는 제도로, 복무 형태와 훈련 내용은 출신에 따라 다르나, 여러 논란 속에서도 병력 감축에 따라 예비군 전력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 1949년 폐지 - 수원군
수원군은 현재의 화성시 일대에 있었던 옛 행정 구역으로, 삼국 시대에는 매홀군, 신라 시대에는 수성군으로 불렸으며, 조선 시대에 수원도호부가 설치되어 도시가 발전했으나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거치며 쇠퇴했다가 1949년 화성군으로 개칭되었다. - 1949년 폐지 - 안암동
안암동은 서울 성북구에 위치한 행정동으로, 앉일바위에서 유래된 이름과 조선시대부터의 역사를 가지며, 고려대학교를 중심으로 대학가와 사찰, 성북천 등의 자연환경이 어우러지고 안암역으로 교통이 편리한 지역이다. - 1948년 설립 - 대한민국 내무부
대한민국 내무부는 1948년 설치되어 치안, 소방, 지방 행정, 재해 예방 등 국가 기본 질서 유지와 국민 생활에 필수적인 업무를 담당했으나 1998년 행정자치부 신설로 폐지되었다. - 1948년 설립 - 대한민국 국방부
대한민국 국방부는 국방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는 대한민국 행정부의 부처이며, 대한민국 국군을 지휘·감독하고 관련 기관을 소속 기관으로 두며, 북한의 위협에 대응하고 국제 협력을 진행한다.
호국군 | |
---|---|
기본 정보 | |
명칭 (한국어) | 호국군 |
명칭 (로마자 표기) | Hogukgun |
명칭 (한글) | 호국군 |
명칭 (영문) | Hogukgun |
군사 정보 | |
창설일 | 1948년 11월 20일 |
해체일 | 1949년 8월 31일 |
국가 | [[파일:Flag of South Korea.svg|20px]]대한민국 |
소속 | (대한민국 육군) |
종류 | 예비군 |
상급 부대 | 육군본부 |
지휘관 |
2. 역사
대한민국 육군이 정규군 창설 이후에도 1949년 이전까지 지원병제를 실시했기 때문에, 예비 병력 확보 차원에서 호국군이 조직되었다. 이는 1948년 11월 20일 국군조직법 제12조에 근거하여 육군 총사령부(육군 본부의 전신) 예하 호국군무실(초대 실장 신응균 소장)을 설치하면서 시작되었다.[1] 1948년 12월 29일, 호국군무실은 호국국으로 개편되었다.
호국군은 기본적으로 육군 정규군을 보조하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전투 부대와 특수 부대로 나뉘었고, 필요에 따라 정규군(현역)으로 편입될 수 있었다.[1] 장병들은 예비역 신분으로 본인 거주지에 주둔하는 연대에 소속되어 생업에 종사하며 필요한 훈련을 받았다. 이는 미합중국군의 주방위군과 비슷하다.
호국군 간부 충원은 특별임관과 일반임관으로 나뉘었다. 간부 후보생은 대대장급 60세, 중대장급 50세, 소대장급 40세의 연령 상한을 정해 놓고 모집하였다. 선발된 간부 후보생은 현역 정규군 연대에서 기본 군사 훈련을 마친 후, 호국군사관학교에서 6주간의 교육을 받고 장교로 임관했다.[1] 1949년 2월 24일, 호국군 간부 훈련소가 이태원에 설치되었으며,[1] 4월 1일 육군 호국군 간부 학교, 7월 10일 육군 호국군 사관학교로 개칭되었다.[1] 호국군 사관학교는 호국군 해체에 앞서 1949년 8월 15일 폐교되었으며, 4개 기에 걸쳐 108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고, 이 중 640명이 현역 장교로 편입되었다.[1]
호국군 사령부는 1949년 4월 1일에 창설되었으며, 초대 사령관은 송호성 준장이었다.[1] 사령부 예하에는 군수처, 교육처, 정보처, 인사처가 있었다.[1]
호국군의 실제 편성 및 교육 훈련을 담당하는 현역 보병 연대를 '편성담임연대(編成擔任聯隊, 편성담임연대|한국어)로 지정하고, 현역 장교와 하사관으로 구성된 호국군 고문부가 설치되었다. 정규군 증강을 위해 전투 부대와 특수 부대로 나누어 필요에 따라 정규군에 편입시킬 수 있었다.[1] 장병은 예비역 신분으로 각자 생업에 종사했지만 필요에 따라 훈련에 소집되었다.
1949년 1월 20일, 호국군 병역에 관한 임시조치령(대통령령 제52호)이 공포되면서 조직 확장이 이루어졌다. 당초에는 제1~13연대의 10개 연대로 발족했으나, 1949년 1월에는 4개 여단으로 확대되어 병력은 4만 명이었다. 1949년 4월 1일, 육군본부 호국국은 육군총참모장 직할의 호국군 사령부로 개편되어 독립 예비군화되었다.[1]
그러나 1949년 5월, 송호성 준장이 미 군사고문단을 대동하여 부대를 시찰한 결과, 훈련 및 장비 부족 등 심각한 문제점이 드러났다. 군사 훈련을 실시할 자질을 갖춘 현역 군인이 부족했고, 많은 부대가 훈련용 목총만 지급받았으며, 군복조차 없는 상태였다. 현역 부대의 지원을 받은 일부 부대는 일본제 소총을 소수 지급받았지만, 대부분 녹슨 상태였다. 호국군 사관학교조차 실사격 교육을 실시하지 않았고, 소집된 호국군 간부가 받은 군사 교육이 기초적인 제식 훈련에 불과한 경우도 있었다.
결국 1949년 8월, 호국군은 예산과 장비 부족으로 정상적인 운용이 어렵다고 판단되어 해체가 결정되었다. 인원과 장비는 육군본부 예비국으로 이관되었다.[1] 이후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호국군은 정규군과 완전히 통합되었다. 징병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전까지 호국군을 대신하여 민병 조직으로서 청년방위대가 창설되었다.
3. 조직 편성
1948년 11월 20일 국군조직법(법률 제9호)에 의거하여 육군본부 내에 호국군무실(초대 실장: 신응균)이 창설되었다.[1] 호국군의 실제 편성 및 교육 훈련을 담당하는 현역 보병 연대를 '편성담임연대(編成擔任聯隊, 편성담임연대|한국어)로 지정하고, 현역 장교와 하사관으로 구성된 호국군 고문부가 설치되었다. 1948년 12월 29일, 호국군무실은 호국국으로 개편되었다.
1949년 1월, 당초에는 제1~13연대의 10개 연대로 발족했으나, 4개 여단으로 확대되어 병력은 4만 명이었다. 1949년 1월 7일 육군사관학교 8기 특별 1반(1월 1일 졸업) 졸업자 중 선발된 4명을 여단장으로 하여 1월 11일에 총 4개 여단이 창설되었다. 그 후, 육군본부 호국군을 육군참모차장 직할 호국군 사령부로 개편하여 독립 예비군으로 편성되었다. 1949년 4월 1일, 육군본부 호국국은 육군총참모장 직할의 호국군 사령부로 개편되어 독립 예비군화되었다.[1]
1949년 5월, 송호성 준장이 미 군사고문단을 대동하여 부대를 시찰한 결과, 몇 가지 문제점이 드러났다. 군사 훈련을 실시할 자질을 갖춘 현역 군인이 부족했고, 군사 훈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장비도 부족하여, 많은 부대가 훈련용 목총만 지급받았고, 군복조차 없는 상태였다. 현역 부대의 지원을 받은 일부 부대는 일본제 소총을 소수 지급받았지만, 그것들의 대부분은 녹슨 상태였다. 호국군 사관학교조차, 화기학 수업에서 실사격 교육을 실시하지 않았다. 소집된 호국군 간부가 받은 군사 교육이 기초적인 제식 훈련에 지나지 않는 사례도 있었다.
1949년 8월, 호국군은 예산과 장비가 부족하여 정상적으로 운용되지 않는 상태였기 때문에, 병사구 사령부 설치가 결정되자 해체되었다. 인원과 장비는 육군본부 예비국으로 인계되었다.[1]
호국군 사령부(초대 사령관: 송호성 준장)는 군수처, 교육처, 정보처, 인사처로 구성되었다.
1949년 1월 11일 창설된 여단여단명 위치 여단장 주요 편성 제101여단 서울 오광선 대령 제101연대, 제111연대 제102여단 대전 유승렬 대령, 박시창 중령 (후임)
참모장: 조개옥 중령제102연대, 제103연대, 제113연대 제103여단 부산 안병범 대령 제105연대, 제106연대, 제116연대 제106여단 청주 권준 대령 제107연대, 제108연대, 제110연대
1949년 4월 22일 창설된 여단여단명 위치 여단장 주요 편성 제105여단 광주 김관오 대령, 김정호 중령 (후임) 제120연대, 제115연대
호국군 사관학교 교장은 신응균 중령, 장석륜 중령 (후임)이었다.
4. 간부 충원 방법
장교 및 하사관 지원 자격은 장교 경험자, 군사 지식과 통솔 능력이 있는 자, 호국군 간부가 될 경우 생활에 지장이 없는 자로 한정되었다. 사병 지원 자격은 과거에 군사 교육을 받은 자나 청년 단체에서 훈련을 받은 자였다. 지원자는 호적 초본과 이력서 외에, 지역 유지의 추천서와 경찰서장의 신원 보증서가 필요했다.
5. 구성
1949년 1월 11일, 서울에 제101여단(여단장: 오광선 대령), 대전에 제102여단(여단장: 유승렬 대령, 후임 박시창 중령, 참모장: 조개옥|조개옥한국어 중령), 부산에 제103여단(여단장: 안병범 대령), 청주에 제106여단(여단장: 권준 대령)이 창설되었다.[1]
1949년 4월 22일에는 광주에 제105여단(여단장: 김관오 대령, 후임 김정호 중령)이 창설되었고,[1] 1949년 7월 16일에는 제107여단과 제108여단이 추가로 창설되었다.[1] 각 여단은 예하에 18개 연대를 두었다.[1]
호국군 사관학교의 교장은 신응균 중령, 장석륜 중령(후임)이었다.[1]
각 여단의 상세 구성은 다음과 같다.여단 창설일 위치 여단장 예하 연대 제101여단 1949년 1월 11일 서울 오광선 대령 제101연대, 제111연대 제102여단 1949년 1월 11일 대전 유승렬 대령, 박시창 중령 (후임) 제102연대, 제103연대, 제113연대 제103여단 1949년 1월 11일 부산 안병범 대령 제105연대, 제106연대, 제116연대 제105여단 1949년 4월 22일 광주 김관오 대령, 김정호 중령 (후임) 제120연대, 제115연대 제106여단 1949년 1월 11일 청주 권준 대령 제107연대, 제108연대, 제110연대 제107여단 1949년 7월 16일 (자료 부족) (자료 부족) (자료 부족) 제108여단 1949년 7월 16일 (자료 부족) (자료 부족) (자료 부족)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