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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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분은 조위와 서진 시대의 무장으로, 공손연의 난, 제갈탄의 난 진압, 유맹 토벌, 오나라 정벌 등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다. 238년 공손연 토벌에 종군하여 사마의를 보좌했고, 257년 제갈탄의 난을 진압하는 데 기여했다. 271년 유맹을 토벌하고, 279년 오나라 정벌에 참여하여 하구를 점령하는 공을 세웠다. 딸 호방이 서진 무제의 귀빈이 되었으나, 외아들의 죽음과 외척의 횡포를 걱정하며 슬퍼했다. 288년에 사망하여 장후의 시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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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8년 사망 - 등수
등수는 삼국시대 오나라 장수로, 서진에 항복 후 안남장군에 임명되어 남방을 다스리며 이민족을 귀순시키는 공을 세웠고, 사후 충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 288년 사망 - 조지 (서진)
조지는 조위의 황족이자 서진의 관료로, 조식의 아들이며 목향공과 제북왕을 지냈고, 서진 건국 후에는 건성현공과 낙평군 태수를 역임했으며, 산기상시와 국자박사까지 지냈으나 말년에는 정신병을 앓다 사망한 인물이다. - 안정 호씨 - 영태후
영태후 호선진은 북위 선무제의 후궁으로 효명제를 낳아 섭정을 시작, 불교 장려 등 문화적 업적을 남겼으나 권력 남용과 부패로 북위 쇠퇴를 가속화했고 효명제 독살 후 원조를 옹립했다가 이주영에 의해 폐위되어 황하에 익사했다. - 안정 호씨 - 호열
호열은 삼국 시대 위나라와 서진 시대의 장수로, 제갈탄의 난, 촉한 정벌, 종회의 난 등에서 활약했으며, 독발수기능의 난을 진압하다 전사했다. - 진나라 (위진)의 장군 - 나헌
나헌은 삼국 시대 촉나라와 진나라의 장군으로, 촉한 멸망 후에도 영안을 지키며 오나라의 침략을 막아낸 인물이다. - 진나라 (위진)의 장군 - 유연 (전조)
4세기 초 중국 북방 흉노족 출신 유연은 팔왕의 난 시기 한나라 부흥을 명분으로 한 왕조를 건국하고 한왕에 즉위하여 광문제로 추존되었으며, 그의 나라 한은 조카 유요에 의해 한조 또는 전조로 불리게 되었다.
| 호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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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238년, 요동의 군벌 공손연이 반란을 일으키자 아버지를 따라 종군해 교위가 되어 난을 진압하였다.[6] 하급 관리 신분으로 사마의를 시종하며 후한 대우를 받았고, 원정이 끝나자 교위에 임명되었다.[6]
255년, 강유가 적도로 침공하면서 왕경이 위험하자 진태, 등애, 왕비 등과 함께 구원하러 갔다.
257년, 제갈탄이 반란을 일으키자 사마소의 정벌군에 참여했고, 이듬해 제갈탄을 격파해 붙잡아 죽였다. 감로 3년(258년) 2월, 대장군사마사(사마)의 속관의 관직에 있었고, 수춘에서 반란을 일으킨 제갈탄의 포위에 참여했다. 진퇴양난에 빠진 제갈탄이 출격하자 이를 맞이하여 베어 죽였다.[2]
271년, 북방에서 반란을 일으킨 유맹을 토벌하였다.
태시 9년(273년), 딸 호방이 사마염(무제)의 귀빈(최고 계급의 후궁)이 되었다.[3] 호분은 이를 기뻐하지 않았고, 또한 외아들이 일찍 죽었기에 "사내는 아홉 땅 아래로 들어가고, 딸은 아홉 하늘 위로 올라갔다"고 한탄했다.
함녕 2년(276년) 2월, 병주의 만족이 요새를 침범했지만, 감병주제군사 관직에 있던 호분이 이를 막았다. 함녕 3년(277년) 9월에는 도독강북제군사가 되었다.[1]
279년, 오나라 정벌에도 참전해 평남장군의 직위로 하구로 나아가 강안을 점령하는 등의 공을 세웠다.[1] 상서복사, 진군대장군, 개부의동삼사, 양하후로 임명되어 오나라를 공격했다. 함녕 5년(279년) 11월, 진나라는 대군을 일으켜 오나라 정벌을 시작했다. 평남장군의 관직에 있던 호분은 하구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태강 원년(280년) 2월에는 강안을 공략했고, 같은 해 오나라 항복에 기여했다.[1]
288년, 병사하여 장후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거기장군으로 추증되었다.[6] 태강 9년(288년)에 사망했다. 차기장군으로 추증되었고, '''장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2. 1. 조위 시대
238년, 요동의 군벌 공손연이 반란을 일으키자 아버지를 따라 종군해 교위가 되어 난을 진압하였다.[6] 하급 관리 신분으로 사마의를 시종하며 후한 대우를 받았고, 원정이 끝나자 교위에 임명되었다.[6]255년, 강유가 적도로 침공하면서 왕경이 위험하자 진태, 등애, 왕비 등과 함께 구원하러 갔다.
257년, 제갈탄이 반란을 일으키자 사마소의 정벌군에 참여했고, 이듬해 제갈탄을 격파해 붙잡아 죽였다. 감로 3년(258년) 2월, 대장군사마사(사마)의 속관의 관직에 있었고, 수춘에서 반란을 일으킨 제갈탄의 포위에 참여했다. 진퇴양난에 빠진 제갈탄이 출격하자 이를 맞이하여 베어 죽였다.[2]
271년, 북방에서 반란을 일으킨 유맹을 토벌하였다.
273년, 딸 호방(胡芳)이 사마염의 귀인이 된다.[3] 호분은 이를 기뻐하지 않았고, 또한 외아들이 일찍 죽었기에 "사내는 아홉 땅 아래로 들어가고, 딸은 아홉 하늘 위로 올라갔다"고 한탄했다.
276년, 딸 호방이 황후가 되어 권력을 남용하는 양준을 비판하면서 황제의 외척이 되어 멸망하지 않은 가문이 없다며 한탄했다는 일화도 있다. 함녕 2년(276년) 2월, 병주의 만족이 요새를 침범했지만, 감병주제군사 관직에 있던 호분이 이를 막았다. 함녕 3년(277년) 9월에는 도독강북제군사가 되었다[1]
2. 1. 1. 공손연 토벌
238년, 요동의 군벌 공손연이 반란을 일으키자 아버지를 따라 종군해 교위가 되어 난을 진압하였다.[6] 경초 2년(238년), 공손연의 토벌에 종군했다. 하급 관리 신분으로 사마의를 시종하며 후한 대우를 받았고, 원정이 끝나자 교위에 임명되었다.[6]255년, 강유가 적도로 침공하면서 왕경이 위험하자 진태, 등애, 왕비 등과 함께 구원하러 갔다.
257년, 제갈탄이 반란을 일으키자 사마소의 정벌군에 참여했고, 이듬해 제갈탄을 격파해 붙잡아 죽였다. 감로 3년(258년) 2월, 대장군사마사(사마)의 속관의 관직에 있었고, 수춘에서 반란을 일으킨 제갈탄의 포위에 참여했다. 진퇴양난에 빠진 제갈탄이 출격하자 이를 맞이하여 베어 죽였다.[2]
2. 1. 2. 제갈탄의 난 진압
257년, 제갈탄(諸葛誕)이 반란을 일으키자 사마소(司馬昭)의 정벌군에 참여했고, 이듬해 제갈탄을 격파해 붙잡아 죽였다.[2]2. 2. 서진 시대
238년, 요동의 군벌 공손연이 반란을 일으키자 아버지를 따라 종군해 교위가 되어 난을 진압하였다.255년, 강유(姜維)가 적도로 침공하면서 왕경이 위험하자 진태(陳泰), 등애(鄧艾), 왕비(王備?) 등과 함께 구원하러 갔다.
257년, 제갈탄(諸葛誕)이 반란을 일으키자 사마소(司馬昭)의 정벌군에 참여했고, 이듬해 제갈탄을 격파해 붙잡아 죽였다.
감로 3년(258년) 2월, 대장군사마(사마사의 속관)의 관직에 있었고, 수춘에서 반란을 일으킨 제갈탄의 포위에 참여했다. 진퇴양난에 빠진 제갈탄이 출격하자 이를 맞이하여 베어 죽였다[2]。
=== 유맹 토벌 ===
271년, 북방에서 반란을 일으킨 유맹을 토벌하였다.[6] 호분은 감군·가절에 임명되어 토벌군의 후방 지원을 위해 경북에 주둔했다.[3]
=== 딸의 귀인이 됨 ===
태시 9년(273년), 딸 호방이 사마염(무제)의 귀빈(최고 계급의 후궁)이 되었다[3]。 호분은 이를 기뻐하지 않았고, 또한 외아들이 일찍 죽었기에 "사내는 아홉 땅 아래로 들어가고, 딸은 아홉 하늘 위로 올라갔다"고 한탄했다.
276년, 딸 호방이 황후가 되어 권력을 남용하는 양준(楊駿)을 비판하면서 황제의 외척이 되어 멸망하지 않은 가문이 없다며 한탄했다는 일화도 있다.
=== 병주 방어 ===
함녕 2년(276년) 2월, 병주의 만족이 요새를 침범했지만, 감병주제군사 관직에 있던 호분이 이를 막았다.[1]
=== 도독강북제군사 ===
함녕 3년(277년) 9월에는 도독강북제군사가 되었다.[1]。
=== 오나라 정벌 ===
279년, 오나라 정벌에도 참전해 평남장군의 직위로 하구로 나아가 강안을 점령하는 등의 공을 세웠다.[1] 상서복사, 진군대장군, 개부의동삼사, 양하후로 임명되어 오나라를 공격했다. 함녕 5년(279년) 11월, 진나라는 대군을 일으켜 오나라 정벌을 시작했다. 평남장군의 관직에 있던 호분은 하구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태강 원년(280년) 2월에는 강안을 공략했고, 같은 해 오나라 항복에 기여했다.[1]
=== 죽음 ===
288년, 병사하여 장후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거기장군으로 추증되었다.[6] 태강 9년(288년)에 사망했다. 차기장군으로 추증되었고, '''장후'''라는 시호를 받았다.
2. 2. 1. 유맹 토벌
271년, 북방에서 반란을 일으킨 유맹을 토벌하였다.[6] 호분은 감군·가절에 임명되어 토벌군의 후방 지원을 위해 경북에 주둔했다.[3]2. 2. 2. 딸의 귀인이 됨
태시 9년(273년), 딸 호방이 사마염(무제)의 귀빈(최고 계급의 후궁)이 되었다[3]。 호분은 이를 기뻐하지 않았고, 또한 외아들이 일찍 죽었기에 "사내는 아홉 땅 아래로 들어가고, 딸은 아홉 하늘 위로 올라갔다"고 한탄했다.2. 2. 3. 병주 방어
함녕 2년(276년) 2월, 병주의 만족이 요새를 침범했지만, 감병주제군사 관직에 있던 호분이 이를 막았다.[1]2. 2. 4. 도독강북제군사
함녕 3년(277년) 9월에는 도독강북제군사가 되었다[1]。2. 2. 5. 오나라 정벌
279년, 오나라 정벌에도 참전해 평남장군의 직위로 하구로 나아가 강안을 점령하는 등의 공을 세웠다.[1] 상서복사, 진군대장군, 개부의동삼사, 양하후로 임명되어 오나라를 공격했다. 함녕 5년(279년) 11월, 진나라는 대군을 일으켜 오나라 정벌을 시작했다. 평남장군의 관직에 있던 호분은 하구로 진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태강 원년(280년) 2월에는 강안을 공략했고, 같은 해 오나라 항복에 기여했다.[1]2. 2. 6. 죽음
태강 9년(288년)에 사망했다. 차기장군으로 추증되었고, '''장후'''라는 시호를 받았다.3. 평가
4. 삼국지연의에서의 호분
제갈탄의 목을 베었으며, 오나라 정벌 때 평남장군에 임명되어 참전했다. 두예에게 봄물이 불어나 겨울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공격하자고 건의했지만 두예가 이를 반박하면서 파죽지세의 시초가 되는 말을 하였다.
참조
[1]
서적
晋書 世祖武帝紀
[2]
서적
三国志 (歴史書) 諸葛誕伝
[3]
서적
晋書 武悼楊皇后伝付 胡貴嬪伝
[4]
서적
晋書 胡奮伝
[5]
서적
진서 권3 무제기
[6]
서적
진서 권57 호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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