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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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유는 촉한의 장수로, 위나라에서 촉나라로 투항하여 제갈량의 후계자가 된 인물이다. 천수군 출신으로, 제갈량의 재능을 인정받아 중용되었으며, 제갈량 사후 북벌을 주도했다. 비의 사후 위장군으로 승진하여 국정을 담당했으나, 황호와의 갈등으로 인해 북벌의 어려움을 겪었다. 촉한 멸망 후 종회에게 투항했지만, 촉한 부흥을 꾀하다가 종회와 함께 살해당했다. 그는 문무를 겸비하고 충성심이 높았으나, 지나친 북벌로 국력을 소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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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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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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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강유 |
로마자 표기 | Jiang Wei |
본관 | 천수군기현 |
출생 | 202년 |
사망 | 264년 3월 3일 |
시호 | 개명왕 (서위 추증) |
작위 | 평양후 |
자 | 백약 |
주요 활동 시기 | 삼국 시대 |
소속 | 조위 → 촉한 |
관직 | 대장군 |
봉호 | 평양향후 |
경력 | |
조위 | 기현 공조 창송현령 천수군 중랑장 |
촉한 | 정서장군 보한장군 위장군 후장군 대장군 록상서사 양주자사 (명목상) |
가족 관계 | |
아버지 | 강경 |
2. 생애
강유는 감숙성 간구현에 해당하는 천수군 기현 출신이다.[2]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6]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며, 어릴 때부터 정현의 학문에 관심을 보였다고 전해진다.[3]
2. 1. 위나라에서 촉나라로
강유는 감숙성 간구현에 해당하는 천수군 기현 출신이다.[2] 아버지는 강경(姜冏)으로, 군에서 공조(功曹)로 일했으나 강유가 어렸을 때 강족의 반란을 진압하다 태수를 지키고 전사하였다.[6] 이로 인해 강유는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6] 그는 정현의 학문을 좋아했으며,[3] 입신양명에 뜻을 두어 자신을 따르는 무리를 양성하기도 했다.[115] 《부자》에는 강유가 명성을 추구하며 야망이 큰 인물이었고, 비밀리에 사병을 양성했다고 기록되어 있다.[4]강유는 고향 천수군에서 경력을 시작하여 상계연(上計掾)으로 근무했고, 주의 종사(―從事)도 지냈다.[5] 아버지의 순직이 인정되어 위나라 조정으로부터 중랑(中郞)으로 임명받고 천수군의 군무에 참여하게 되었다.[6]
228년(건흥 6년), 촉나라의 승상 제갈량이 제1차 북벌을 시작하여 기산으로 진출했다. 당시 옹주 자사 곽회는 천수군을 순찰 중이었고, 천수태수 마준은 강유를 비롯한 공조 양서, 주부(主簿) 윤상, 주기(主記) 양건(梁虔) 등과 함께 곽회를 수행하고 있었다. 제갈량의 침공 소식과 함께 난안, 천수, 안정의 3개 군이 촉에 호응했다는 소식을 들은 마준은 강유 등 부하들이 자신을 배반할 것을 의심하여 밤중에 상규현(上邽縣, 현재의 간쑤성 톈수이시)으로 도주했다.[8]
강유는 마준이 자신들을 버리고 떠났다는 것을 알고 뒤쫓아 갔으나, 상규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성문이 닫혀 들어갈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고향인 기현(冀縣)으로 돌아갔지만, 기현에서도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강유는 동료들과 함께 갈 곳을 잃고 제갈량에게 투항했다.[9]
한편, 배송지가 주석으로 인용한 ''위략''에는 다른 기록이 전한다. 이에 따르면, 마준은 곽회와 함께 상규현으로 가기로 결정했고, 기현에 있는 가족을 걱정한 강유가 돌아가려 하자 마준은 "돌아가면 나의 적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강유는 이를 무시하고 기현으로 돌아갔고, 현 백성들의 권유로 마지못해 제갈량을 만났다. 이후 가정 전투에서 촉군이 패배하자 기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강유는 제갈량을 따라 촉으로 가게 되었다. 위에 남겨진 강유의 가족은 포로가 되었으나 처형되지는 않고 감옥에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12]
한중군으로 퇴각한 후, 제갈량은 강유의 재능을 매우 높이 평가했다. 그는 장완과 장익 등에게 강유를 "충성스럽고 근면하며 사려가 깊다", "양주 최고의 인물"이라고 칭찬했으며,[85] "군사에 정통하고 용기와 의리가 있으며 병사들의 마음을 깊이 이해한다"고 평가하며 더 큰 군사적 권한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86] 제갈량은 강유를 창조연(倉曹掾) 겸 봉의장군(奉義将軍)으로 삼고, 당양정후(當陽亭侯)에 봉했다.[13] 이 일로 강유는 위에 남겨진 어머니와 생이별하게 되었다.[81] 손성의 『잡기』에 따르면, 후에 강유의 어머니가 위나라로 돌아오라는 편지를 보냈으나, 강유는 촉에서 큰 뜻을 이루겠다는 답장을 보냈다고 한다.[82][83]
2. 2. 제갈량과 장완의 시대
한중군으로 돌아온 후, 제갈량은 강유를 식량 보급을 담당하는 보좌관(倉曹掾)으로 임명했다. 이후 의로운 장군(奉義將軍)으로 임명하고 당양정후(當陽亭侯)에 봉했다.[13] 제갈량의 북벌에 종군하면서 이후 정서장군(征西將軍)으로 승진하고 중감군(中監軍)에 임명되었다.[14][105]제갈량은 강유의 재능과 충성심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일찍이 장익과 강완에게 강유에 대해 “강백약(강유의 자)은 충성스럽고 근면하며 맡은 바 직무를 훌륭하게 수행한다. 그는 사고가 매우 치밀하고 꼼꼼하다. 그의 강점과 인격을 평가해 볼 때, 영남, 계상 등은 그만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는 진정 양주에서 나온 훌륭한 인재이다.”라고 칭찬했다.[85] 또한 “그에게 5,000~6,000명의 군대를 지휘하게 해야 한다. 강백약은 군사에 정통하다. 그는 용기와 의로움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전쟁에 대한 깊은 이해를 보여준다. 이 사람은 한나라에 충성하며 재능이 뛰어나다. 나는 그에게 군사적인 더 큰 권한을 위임해야 한다. 그를 황제를 만나도록 궁궐로 보낼 것이다.”라고 말하며 깊은 신뢰를 보였다.[86]
건흥 12년(234년) 가을, 제갈량이 오장원 전투에서 사망한 후, 강유는 촉나라 수도 성도로 돌아와 우감군(右監軍)직을 맡고 보한장군(輔漢將軍)의 직위를 받았다. 그는 성도의 군대를 지휘하게 되었고, 평양후(平襄侯)로 진봉되었다.[15]
연희 원년(238년), 제갈량의 뒤를 이은 대장군 강완을 따라 한중군으로 가서 조위와 촉나라의 국경 근처에 주둔했다.[16] 강완이 연희 2년(239년) 4월 또는 5월에 대사마(大司馬)로 임명된 후, 강유를 그의 휘하 사마(司馬)로 삼았다. 장완은 강유에게 별도의 병력을 맡겨 위나라 영토를 침략하게 했다.[16] 연희 3년(240년), 강유는 강족의 미당의 반란에 호응하여 농서에 침공했으나, 위의 곽회에게 진압당하여 철수해야 했다. 연희 6년(243년), 장완이 북벌을 단념하고 주력군을 한중에서 철수시키자, 강유를 진서대장군·양주자사로 임명하여 북방에 대한 대비를 맡겼다. 당시 국경은 진남대장군 마충, 진북대장군 왕평, 전장군 등지 등이 함께 나누어 맡고 있었다.
연희 10년(247년)에는 위장군·녹상서사로 승진하며 군사 중추를 담당하게 되었다. 같은 해, 문산(汶山)에서의 이민족 반란을 제압하고 농서군으로 진출하여 위의 곽회·하후패 등과 싸워 승리했다.[106] 이 승리로 양주의 호왕(胡王) 백호문(白虎文) 등이 민중을 이끌고 항복해 오자, 이들을 번현(繁縣)에 거주하게 했다. 이후 문산의 평강(平康) 이민족이 일으킨 반란도 토벌하여 평정했으며, 공으로 부절(符節)을 하사받았다. 연희 12년(249년), 강유는 다시 서평에 출병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철수했지만, 위의 태수 곽순을 사로잡았다.[107] 강유는 곽순을 회유하려 했으나 곽순은 굴복하지 않았다.[108]
강유는 서방의 풍속에 통달하고 자신의 재능과 무용을 믿으며, 대규모 북벌군을 일으켜 제갈량의 유지를 잇고자 열망했다. 그러나 장완의 후임인 대장군 비의는 강유의 적극적인 북벌 추진에 동의하지 않았고, 강유에게 1만 명 이상의 병력을 주지 않으며 그의 군사 활동을 제한했다. 습착치의 『한진춘추』에 따르면, 비의는 강유에게 "우리들의 힘은 승상(제갈량)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 그 승상조차 중원을 평정할 수 없었는데, 하물며 우리겠는가. 지금은 내정에 힘쓰고, 외정은 인재의 육성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하며 강유의 북벌 의지를 꺾으려 했다고 전해진다.
2. 3. 비의의 시대
246년, 장완이 사망하자 제갈량이 생전에 정해둔 후계자인 비의가 촉한의 실권을 쥐게 되었다.[19] 같은 해 11월, 강유는 농서로 진격하여 곽회와 하후패를 이기고 돌아왔다.[120] 247년, 강유는 위장군(衞將軍)으로 승진했으며, 대장군 비의와 함께 녹상서사(錄尚書事)에 임명되어 함께 국정을 맡았다.[20] 그러나 실제로는 대장군인 비의가 위장군인 강유의 상관이었다.같은 해, 강유는 문산군(汶山郡) 평강현(平康縣)에서 일어난 이민족의 반란을 진압하였다.[21] 한편 농서군, 남안군, 금성군, 서평군 일대의 강족인 아하소과(蛾何燒戈)[121], 벌동(伐同), 아차새(蛾遮塞) 등이 위나라에 반기를 들고 촉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22] 양주의 호인(胡人) 치무대(治無戴)도 이에 가담했다. 강유는 군대를 이끌고 강족을 지원하기 위해 출진하여 위시(爲翅)에 주둔하던 하후패를 공격했으나, 곽회가 풍중(渢中)을 거쳐 기습적으로 나타나자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23][24] 곽회는 다음 해까지 반란 강족을 토벌했다. 강유는 퇴각한 치무대를 강천(彊川)에서 맞이했고, 음평태수 요화는 성중산(成重山)에 요새를 구축하며 패배한 강족을 수습했다.
248년, 강유는 다시 북진하여 강천(彊川)으로 이동해 치무대와 합류하려 했고, 요화에게는 성중산(成重山)의 요새를 지키게 했다.[26] 그러나 곽회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 자신은 요화를 공격하여 강유의 발을 묶고 하후패에게는 답중(沓中) 방면에서 강유를 저지하게 했다. 결국 강유는 요화를 구원하기 위해 회군할 수밖에 없었고, 치무대와 합류하지 못한 채 촉으로 돌아왔다.[27]
249년 가을, 유선 황제로부터 부절(符節)을 받아 임시로 전권을 위임받은[28] 강유는 옹주로 출진하여 국산(麴山)에 성 두 개를 쌓고 구안과 이흠(李歆)에게 수비를 맡겼다. 위의 옹주자사 진태는 서질, 등애 등과 함께 성을 포위하고 보급로를 차단했다. 구안 등은 눈을 녹여 식수로 사용하며 버텼다. 강유가 우두산(牛頭山)에서 구원군을 이끌고 오자, 진태는 이를 막아서는 한편 곽회에게 조수(洮水)를 건너 강유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요청했다. 포위될 것을 우려한 강유는 철수했고, 고립된 구안 등은 위에 항복했다.[29] 강유는 퇴각하는 길에 방향을 바꾸어 동쪽으로 60리 떨어진 조성(洮城)을 기습하려 했으나, 등애가 이를 예측하고 미리 방비하고 있었기에 실패하고 철수했다.[30][124]
250년, 강유는 다시 서평군으로 출진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왔다.[31]
강유는 서쪽 강족과 호족의 풍속에 익숙하고 자신의 군사적 능력을 믿었기에, 이들의 도움을 받아 농서 지역을 평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대규모 북벌을 원했다.[32] 그러나 대장군 비의는 이러한 강유의 생각을 제지하며 매번 1만 명 이하의 병력만 운용하도록 제한했다.[33] 습착치의 《한진춘추》(漢晉春秋)에 따르면, 비의는 강유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우리는 승상만 못하오. 승상조차 중원을 평정하지 못했는데, 하물며 우리겠소!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잘 다스리며 사직을 보존하는 것이 옳소. 대업은 능력 있는 후임자를 기다려야지, 요행을 바라면 안 되오.[125][34]
2. 4. 본격적인 북벌

253년 정월, 비의가 피살당하자 강유는 그의 뒤를 이어 군권을 장악하고 본격적인 북벌을 추진할 기반을 마련했다. 그해 여름, 강유는 수만 명을 동원하여 석영(石營)과 동정(董亭)을 지나 남안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위나라의 진태가 낙문(洛門)으로 와서 대치하였고, 강유는 식량 부족으로 결국 철군해야 했다.
254년, 강유에게 독중외군사(督中外軍事) 직위가 더해져 군사적 권한이 강화되었다. 농서군 적도현장(狄道―) 이간(李簡)이 성을 들어 투항하자, 이를 기회로 삼아 농서군 일대를 공략하였다. 양무현(襄武縣)에서는 위나라 장수 서질을 격파하고, 하관(河關),[126] 적도, 임조(臨洮) 세 현의 주민들을 촉한으로 이주시켰다.
255년, 강유는 이전에 귀순해 온 거기장군 하후패 등과 함께 다시 적도로 진격했다. 이때 장익은 국가가 작고 백성들이 힘든 상황에서 무력을 남용해서는 안 된다며 반대했지만, 강유는 장익을 대동하여 출정했다.[127] 강유는 기산, 석영, 금성(金城) 세 방향으로 진군한다는 거짓 정보를 흘린 뒤, 실제로는 수만 명을 이끌고 부한현(枹罕縣)[128]을 거쳐 적도로 빠르게 나아갔다. 당시 정서장군이었던 진태는 강유의 계책에 속지 않고 옹주자사 왕경에게 적도로 나아가 자신을 기다리라고 지시했다. 그러나 강유는 왕경에게 시간을 주지 않고 조수(洮水) 서쪽에서 그를 크게 무찔렀다(적도의 전투). 이 전투에서 왕경의 군대는 수만 명이 죽거나 흩어졌고, 겨우 만여 명만이 적도성으로 물러났다. 이 소식에 등애마저 당황하여 옹주를 포기하는 것이 좋겠다고 건의했으나, 진태는 이를 거부했다. 한편, 장익은 이미 큰 공을 세웠으니 더 이상의 작전은 사족(蛇足)이라며 만류했지만, 강유는 듣지 않고 적도를 포위했다.[129]
진태는 신속하게 부풍군 진창현(陳倉縣)과 천수군 상규현을 지나 몰래 고성령(高城嶺)을 넘어 밤중에 적도의 동남쪽 산에 도착했다. 진태의 군대가 갑자기 나타나자 강유는 일부 병력을 이끌고 산을 타고 공격했으나, 이미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진태에게 패하고 물러났다. 설상가상으로 양주의 위군까지 금성을 지나 적도로 오고 있었고, 진태와 왕경이 비밀리에 날짜를 정해 강유의 퇴로를 차단하려 한다는 계획이 알려지자, 강유는 즉시 군대를 물려 위나라 영토 내의 종제(鍾提)로 후퇴했다. 구원받은 왕경은 "식량이 열흘분도 남지 않았었다. 만약 구원병이 제때 오지 않았다면 성이 함락되고 옹주를 잃었을 것"이라며 진태에게 감사를 표했다.
256년, 적도 전투의 공으로 강유는 대장군에 임명되었다. 그는 다시 기산으로 출정했지만, 안서장군(安西将軍) 등애가 미리 방비를 하고 있었다. 이에 강유는 방향을 동정으로 틀어 남안으로 빠르게 진군했으나, 등애 역시 무성산(武城山)에서 맞섰다. 교전했지만 돌파하기 어렵자, 강유는 진서대장군 호제(胡濟)와 동쪽의 상규에서 합류하기로 약속하고 밤중에 위수를 건너 빠르게 이동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이유로 호제는 약속된 시간에 도착하지 못했고, 결국 강유는 상규 앞 단곡(段谷)에서 등애의 군대와 싸워 크게 패배했다(단곡 전투). 이 전투에서 장수 십수 명이 사망하고 수많은 병사가 죽거나 흩어지는 큰 피해를 입었다.[123] 이 패배로 인해 강유에 대한 여론은 악화되었고, 농서 지역의 협력 세력들도 동요했다. 강유는 스스로 책임을 지고 후장군으로 관직을 낮추었으나, 대장군의 업무는 계속 수행했다.
257년, 위나라의 정동대장군(征東大将軍) 제갈탄이 회남에서 반란(제갈탄의 난)을 일으켜 관중의 병력이 동쪽으로 이동한 틈을 타, 강유는 다시 수만 명을 이끌고 진천(秦川) 지방을 목표로 낙곡(駱谷)을 나서 침령(沈嶺)에 도달했다. 그 앞의 위나라 성채인 장성(長城)에는 비축된 곡물은 많았으나 수비병이 적어 위군 내에서는 두려움이 컸다. 그러나 진태의 후임 정서장군 사마망과 진서장군으로 옮긴[130] 등애가 농서에서 지원을 와 강유의 진군을 막아섰다. 강유는 망수(芒水)에 군영을 설치하고 여러 차례 싸움을 걸었지만, 사마망과 등애는 견고하게 수비하며 응전하지 않았다. 이해, 계속되는 출병으로 촉한의 백성들이 지치자 초주는 진지의 협조 하에 북벌을 중단하고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내용의 <구국론>을 저술했다.[131]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초주의 주장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132]
258년(경요 원년), 제갈탄의 반란이 진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강유는 성도로 군대를 돌렸다. 같은 해, 내치를 총괄하던 진지가 사망하고 환관 황호가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강유는 다시 대장군 직위를 회복했지만, 이후 262년까지 약 4년간 북벌을 중단하고 별다른 군사적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2. 5. 방어 작전 계획의 변경
촉나라의 한중 방어 계획은 선주 유비 때부터 겹겹이 방어선을 구축하여 적이 한중 분지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것이 기본 방침이었다. 왕평이 낙곡 전투에서 조상의 대군을 상대로 승리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방어 전략에 기반한 것이었다.그러나 강유는 이러한 기존의 방어 계획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다음과 같이 건의했다.
"기존의 방식은 《주역》에서 말하는 '중문격탁'(重門擊柝, 문을 겹겹이 닫고 야경꾼이 딱따기를 쳐서 방비함)의 원리에는 맞지만, 수비에만 치중할 뿐 큰 전과를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적이 침입하려는 낌새가 보이면 한중 일대의 주요 군사력과 물자를 한성(漢城, 한중군 면양현 소재)과 낙성(樂城, 성고현 소재) 두 성에 집중시키고, 주요 거점의 방비는 유지하되, 적을 평야 지대로 유인하는 것이[133] 더 효과적입니다. 동시에 쓰촨 분지로 향하는 관문들의 수비는 강화해야 합니다. 적이 깊숙이 들어오면 유격 부대를 운용하여 빈틈을 노립니다. 이렇게 하면 적군은 쓰촨 분지로 진입하지 못하고 보급선이 길어져 곤란을 겪게 될 것입니다. 적이 지쳐 퇴각할 때 모든 성에서 일제히 출격하여 공격하면 섬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강유의 건의에 따라 한중 방어 전략이 변경되었다. 이에 따라 한중 방어를 총괄하던 독(督) 호제는 자동군 한수현(漢壽縣, 옛 가맹 지역)으로 물러나 주둔했고, 감군(監軍) 왕함(王含)은 낙성을, 호군(護軍) 장빈(장완의 아들)은 한성을 각각 수비하게 되었다. 이 외에도 서안(西安), 건위(建威), 무위(武衛), 석문(石門), 무성(武城), 건창(建昌), 임원(臨遠) 등 여러 곳에도 방어 거점을 마련했다.
2. 6. 황호와의 대립
262년, 강유는 환관 황호의 전횡과 방자함을 문제 삼아 유선에게 그를 처형해야 한다고 아뢰었다.[53] 그러나 유선은 "황호는 보잘것없는 신하일 뿐이오. 지난날 동윤이 그를 미워했던 것도 내 안타까웠소. 그에게 신경 쓸 가치가 없소."라며 강유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34][53] 강유는 유선과 황호의 관계가 생각보다 깊다는 것을 깨닫고 위험을 느꼈다. 황호가 유선의 명을 받고 사과하러 오자, 강유는 신변의 위협을 피해 답중에서 맥 농사를 짓는다는 명분으로 성도를 떠났다.[134][53]같은 해 10월(음력), 강유는 군사를 이끌고 위나라의 조양(洮陽)을 공격했으나,[135] 후화(侯和)에서 위나라 장수 등애에게 패배하고 답중으로 물러났다. 단곡 전투 이후 계속된 군사적 실패로 강유의 입지는 좁아졌고, 교체 여론이 일었다. 이때 황제 유선의 총애를 받으며 점차 권력을 장악한 환관 황호는 평소 친분이 있던 우대장군 염우를 강유 대신 대장군으로 세우려 했다.[51] 신변의 위협을 느낀 강유는 성도로 돌아가지 않고 답중에 계속 머물렀다.[134][52]
263년, 위나라의 진서장군 종회가 관중의 군사를 훈련하며 촉을 공격할 준비를 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강유는 즉시 유선에게 표를 올려 좌거기장군 장익과 우거기장군 요화를 각각 양안관구(陽安關口)와 음평교두(陰平橋頭)에 미리 배치하여 방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황호가 무당을 불러 점을 쳤는데 위나라 군대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결과가 나왔고, 유선은 이를 믿고 강유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2. 7. 촉한의 멸망과 최후
263년 가을, 위나라의 종회가 낙곡으로, 등애가 답중으로 대규모 침공을 시작하자 촉한 조정은 뒤늦게 요화를 답중으로, 장익과 보국대장군 동궐을 양안관구로 파병했다. 옹주 자사 제갈서까지 건위로 남진하자, 요화는 강유의 주요 후퇴로인 음평(陰平)에서 대비했다. 그러나 등애는 답중의 강유를 격파했고, 강유는 음평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58]한편, 양안관은 수비하던 장서가 성문을 열고 항복하면서 부첨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함락되었다. 이때 장익과 동궐은 한수현(漢壽縣)에 겨우 도착한 상태였다. 종회는 한성(漢城)과 낙성(樂城)은 포위만 해둔 채 곧바로 촉의 중심부로 진격했다. 강유와 요화는 음평을 포기하고 물러나, 검각에서 장익, 동궐과 합류하여 종회의 대군에 맞서 항전했다. 강유는 종회의 회유 편지에 답하지 않고[61] 검각 수비에만 전념했다. 종회는 견고한 검각을 돌파하지 못하고 보급선이 길어지자 철수를 고려하기 시작했다.[62]
그러나 겨울, 등애가 측면의 험준한 산악 지대 700여 리를 돌파하는 과감한 기동을 감행했다. 등애군은 강유(江油)를 지키던 마막의 항복을 받고, 광한군 면죽현(緜竹縣)에서 제갈량의 아들인 위장군 제갈첨을 격파하고 전사시켰다.[123] 면죽이 함락되자 성도는 직접적인 위협에 놓였고, 유선은 결국 등애에게 항복하여 촉한은 멸망했다.[63]
검각에 있던 강유는 면죽 함락 소식과 함께 유선의 거취에 대한 혼란스러운 소문(성도 사수, 오나라 망명, 건녕군 피난 등)을 접했다. 상황 파악을 위해 기현(郪縣)으로 남하하던 중[64], 유선이 보낸 항복 조서를 받게 되었다. 강유와 장수, 병사들은 무기를 내던지고 종회가 있는 부현(涪縣)으로 가 항복했다. 많은 병사들이 분노와 슬픔에 칼로 돌을 내리쳤다고 전해진다.[65] 종회가 강유에게 "어찌 이리 늦었는가?"라고 묻자, 강유는 슬픔을 누르고 침통한 표정으로 "오늘 이렇게 뵙게 된 것만으로도 너무 이릅니다(今日見此, 猶爲速也)"라고 답했고, 종회는 그의 답변에 감명받아 비범하게 여겼다.[66]
종회는 강유를 매우 후대하여 그의 부절과 표식을 돌려주고, 외출 시에는 같은 수레를 타고 앉을 때도 같은 자리를 내주었다. 종회는 두예 등에게 강유를 칭찬하며 "중원의 명사인 공휴(제갈탄)나 태초(하후현)조차도 백약(강유의 자)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말했다.[67] 강유는 종회가 위나라에 반역할 마음을 품고 있음을 간파하고, 이를 이용해 촉한을 부흥시킬 기회로 삼으려 했다.[68] 강유는 종회에게 접근하여, 한신과 문종의 예를 들며 공이 높으면 위험해질 수 있으니 범려처럼 은퇴하거나 장량처럼 신선을 따르는 길을 가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했다.[123][69] 종회는 강유의 제안이 현실과 동떨어졌다며 거절했지만[70], 강유는 종회가 다른 뜻(반역)을 품고 있음을 확신하고 그와 더욱 가까워졌다.[71][72]
이후 종회는 등애를 모함하여 반역 혐의로 체포해 중앙으로 압송하게 했다.[73]
264년 정월, 등애가 제거되자 종회는 성도를 완전히 장악하고 익주목을 자칭하며 사마소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73] 종회는 자신에게 비협조적인 위나라 장수들을 숙청할 계획을 세우고, 수십 개의 큰 구덩이를 파고 수천 개의 몽둥이를 준비했다.[137] 한편, 강유는 종회가 위나라 장수들을 죽이면 자신이 그 혼란을 틈타 종회를 제거하고 위나라 병사들까지 모두 처리한 뒤, 유선을 다시 황제로 복위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는 유선에게 "폐하께서는 며칠만 치욕을 견디시면, 신이 위태로운 사직을 다시 평안케 하고 어두워진 해와 달을 다시 밝게 만들겠습니다."라는 밀서를 보냈다.[123][80]
종회는 강유에게 5만 명의 병력을 주어 선봉으로 삼으려 했다.[74] 그러나 종회에게 억류되어 있던 위나라 장수 호열의 아들 호연 등이 아버지로부터 종회의 계획을 전해 듣고, 남아있던 위나라 장병들과 함께 분노하여 봉기했다. 마침 무기를 나눠주고 있던 종회와 강유는 갑작스러운 습격을 받았다.[138] 종회가 당황하여 강유에게 어찌하면 좋겠냐고 묻자, 강유는 "오직 적을 격퇴할 뿐입니다(擊之!)."라고 외치며 직접 칼을 들고 싸워 위나라 병사 대여섯 명을 죽였으나, 결국 중과부적으로 전사했다. 종회 역시 반란군에게 살해당했다.[138] 이때 강유의 나이는 63세였으며, 그의 시신은 참혹하게 훼손되었고 처자식들도 모두 살해당했다.[139]
《세어》에 따르면, 위나라 병사들이 강유의 시신을 갈라 쓸개를 꺼냈는데 그 크기가 한 말(斗) 정도나 되었다고 한다.[78] 또한 《화양국지》에는 강유가 처음부터 촉한 부흥을 위해 종회에게 거짓으로 협력했으며, 종회를 이용하여 위나라 장수들을 제거한 뒤 종회마저 죽이고 유선을 복위시키려 했다는 계획이 기록되어 있다.[79]
서위 시대에 우문태에 의해 개명왕(開明王)으로 추증되었다.[111] 과거 쓰촨성 검각현 검문관진에 강유의 묘와 묘비 등이 있었으나, 1936년 도로 공사로 철거되었고, 마지막 남았던 묘정(墓亭)마저 문화 대혁명 시기인 1960년대에 파괴되어 현재는 흔적이 없다.[112] 간쑤성 톈수이시 감곡현에는 강유의 묘와 그를 모시는 사당 '강공사(姜公祠)'가 있으며, 쓰촨성 광위안시 검각현 검문관 부근에도 '한 대장군 강유지묘(漢大將軍姜維之墓)'가 존재한다.
3. 평가
제갈량은 강유의 능력과 충성심을 높이 평가했다. 그는 장완과 장익에게 강유가 충성스럽고 근면하며, 사고가 치밀하고 꼼꼼하여 이소나 마계상보다 낫다고 평하며 양주의 뛰어난 인재라고 칭찬했다.[85] 또한 군사에 정통하고 용기와 의로움, 전쟁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추었으며 한나라에 충성스럽고 재능이 뛰어나므로 더 큰 군사적 권한을 위임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황제를 만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86]
제갈량 외에도 등지, 장완, 종회, 등애 등 많은 동시대 인물들이 강유의 재능을 인정했다. 종회는 강유를 위의 명사들과 비교하며 제갈탄이나 하후현도 그에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했고,[113] 여러 차례 강유에게 패배를 맛본 등애 역시 강유를 당대의 영웅이라 칭하며 자신과 만났기에 궁지에 몰렸을 뿐이라고 평가했다.[113] 서진의 역사가 곽반은 저서 《위진세어》에서 당시 촉의 관료들은 모두 천하의 뛰어난 인재들이었지만, 강유의 오른쪽에 설 자는 없었다고 평했다.[113]
《삼국지》의 저자 진수는 강유가 문무를 겸비하고 공명을 세우려는 뜻이 있었으나, 인명을 경시하고 병력을 함부로 소모했다고 평가했다.[90] 또한 사리분별이 명확하고 과단성이 있었으나, 성급하고 생각이 조밀하지 못해 죽음에 이르렀다고 덧붙였다.[90] 나악 등은 노자의 《도덕경》을 인용하며, "큰 국가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물고기를 굽는 것과 같다. 하물며 작은 나라에 대해서야 여러 차례 소란스럽게 할 수 있겠는가?"라며 작은 나라인 촉을 여러 차례 소란스럽게 한 강유의 북벌을 비판했다.[90]
극정은 강유가 상장군이라는 높은 지위에 있었음에도 청렴하고 검소했으며 집이 초라했다고 전하며, "그와 같이 부단히 배우고 소박하며 청렴한 인물은 한 시대의 모범이다"라고 칭찬했다.[140] 서진의 학자 습정 역시 강유가 검소한 거처에 살았고 봉급 외에 다른 수입은 없었으며, 아내는 한 명뿐이었고 첩은 없었으며, 어떤 형태의 오락도 없었다고 묘사했다. 그의 옷과 교통 수단은 사용하기에 충분했고, 식사에도 제한을 두었으며, 국가에서 지급하는 수당의 한도 내에서 지출을 유지했다고 한다. 습정은 강유의 학구열, 겸손함, 겸손함은 그를 동시대인들에게 모범으로 만든다고 평가했다.[87]
동진의 역사가 손성은 습정의 평가에 강하게 반박했다. 그는 강유가 원래 위 출신이었지만 촉으로 귀순하여 사리사욕을 위해 군주를 배신했으므로 불충하고, 무의미한 삶을 살기 위해 가족을 버렸으므로 불효하며, 모국에 반기를 들었으므로 불의하고, 전투에서 졌지만 살아남는 것을 선택했으므로 지조가 없다고 비판했다. 또한 권력을 잡았을 때 덕망 있는 지도자로 자리를 잡지 못했고, 대신 자신의 영광을 높이기 위해 백성들을 장기간의 전쟁으로 몰아넣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자신의 국가를 방어할 책임이 있었지만 결국 적을 도발하여 국가를 잃었으므로 현명하지도 용감하지도 않다고 주장했다. 손성은 강유를 위나라의 배신자이자 촉나라의 무능한 수장이라고 혹평하며, 습정이 그를 본받을 만한 인물이라고 말한 것은 터무니없다고 비판했다.[88] 손성은 또한 강유가 촉 멸망 후 유선에게 비밀 편지를 보내 종회 밑에서 일하는 척하며 그를 암살하고 촉나라를 부활시킬 기회를 기다릴 것이라고 말했다는 일화에 대해서도, 옛사람들의 말을 인용하며 "시달릴 바가 아닌데 시달리면 이름이 반드시 욕되고 의거할 바가 아닌데 의거하면 몸이 반드시 위태로워질 것이며, 욕되고 또한 위태로워지면 죽을 날이 장차 닥칠 것이다"라는 말이 바로 강유를 일컫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등애가 적은 병력으로 쳐들어왔을 때 막지도 못하고, 나라가 멸망한 뒤에도 이치를 넘은 성공을 바란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강력하게 비난했다.[89]
간보는 강유가 촉나라 재상으로서 나라가 망하고 군주가 모욕을 당했을 때 죽지 않고, 종회의 난 때 죽은 것을 애석하게 여겼다. 그는 "죽는 것이 어려운 게 아니라 죽음에 올바로 처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라며, 강유가 마땅히 죽어야 할 때를 얻지 못했다고 평가했다.[140][91]
유송 시대의 역사가 배송지는 손성의 비난이 합당하지 않다고 반박했다. 그는 검각에서 종회의 대군을 막아낸 것은 강유의 공이며, 등애의 우회 기동과 성도의 항복은 강유가 막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주장했다. 배송지는 "당시의 사세로 어찌 양쪽을 다 구제할 수 있었겠는가? 그런데도 강유가 면죽 아래에서 절의를 떨치지 못하거나 촉주를 옹위하지 못했다고 책망하는 것은 이치에 맞는 않는 말이다"라고 지적했다. 또한 종회의 난 당시 강유의 계획이 성공했다면 위나라 장수들을 제거하고 촉을 부흥시키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무릇 이치를 넘어 공이 이루어진 연후에 이를 가리켜 기(奇)라 하는 법이니 그 일에 차질이 있었다고 하여 그리 해서는 안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고 강조하며 계획 실패만으로 강유를 어리석다고 비난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했다.[143][92] 배송지는 손성이 강유의 불효만을 지적할 수 있을 뿐, 다른 비판들은 지나치며 습정의 논점과도 맞지 않다고 덧붙였다.[93]
남송의 역사가 호삼성은 강유가 여러 차례 전쟁을 일으켜 촉을 망하게 했다고 비판하면서도,[144][145] 종회의 난을 꾸밀 때는 "강유가 실로 지혜로워 족히 종회를 손바닥과 허벅지 위에서 갖고 놀 정도였으나, 시세에 핍박당하고 운명에 제지되었으니 어찌하겠는가!"라고 평가했다.[146] 그는 강유가 촉후주에게 보낸 편지를 언급하며 "강유의 마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한을 위하였으니 천년의 세월 동안 단처럼 밝게 빛나는구나. 진수, 손성, 간보가 그를 폄하한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라며 앞선 평자들이 강유를 비판한 것을 전부 잘못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147]
조선 후기 실학자 홍대용은 강유가 제갈량의 재능 없이 그의 사업을 이어가려 했으며, 자신의 힘을 헤아리지 못하고 황호와 같은 간신을 제어하지 못한 채 무리한 북벌을 감행한 것은 지혜롭지 못했다고 평가했다.[148] 그러나 양안과 음평 방어 계획은 옳았으며, 만약 이 계획이 실행되었다면 촉이 그리 빨리 멸망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종회의 난 당시 계획은 미흡했지만, 한나라에 대한 충성심은 변치 않았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또한 아름답다 하겠다"고 덧붙였다.[148]
중국의 현대 역사학자 여사면은 촉한 멸망의 책임을 강유에게 돌리는 것은 실로 억울하며, 오히려 북벌의 적기를 놓친 장완과 비의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위나라가 혼란했던 시기(조방 즉위부터 고귀향공 피살까지 21년간)가 북벌의 절대적인 기회였으나, 이 시기의 태반은 장완과 비의가 정권을 잡고 있었고 강유가 병권을 장악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었다고 분석했다.[149]
청나라의 학자 왕명성은 진수의 비판적인 평가가 서진 치하에서 저술 활동을 해야 했던 정치적 상황 때문일 수 있다고 추측하며, 강유의 충성심을 강조했다. 그는 강유가 촉나라에게 장세걸과 육수부가 남송에게 중요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했다고 평가했다.
청나라 작가 허착은 강유 시대의 촉은 제갈량 시대와 달리 내정이 불안정했으며(유선은 무능하고 정부와 사법 제도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함), 비의와 같은 유능한 부관 없이 북벌을 추진했기에 제갈량만큼 성공할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일본의 작가 요시카와 에이지는 저서 《삼국지》 후기에서 강유를 "촉사의 꽃"이라 표현하면서도, 제갈량에 미치지 못함을 알면서도 과도한 임무와 공명심으로 촉의 쇠퇴를 앞당겼다고 평가했다.
대만의 역사학자 보양은 자신의 현대 중국어판 《자치통감》에서 강유가 중국 역사에서 매우 논란이 많은 인물임을 지적하며 다양한 상반된 평가들을 소개했다. 그는 강유가 촉의 자원을 고갈시키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지만, 동시에 촉의 부흥을 위한 헛된 시도에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려 했던 충성스러운 장군이었다는 양면적인 평가를 내렸다.
4.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14세기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강유는 후반부의 주요 등장인물로, 촉한을 이끌고 위나라와 싸우며 후한 왕조 부흥이라는 제갈량의 유산을 이어받는 제자이자 후계자로 그려진다.[96]
소설 제92화와 제93화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제갈량의 1차 북벌 당시 천수군 태수 마준(馬遵) 휘하의 위나라 장수로 나온다. 제갈량이 마준을 속여 성을 비우게 하려는 계책을 간파하고 역으로 제갈량군을 함정에 빠뜨리라고 조언한다. 이후 성을 공격해 온 조운과 일기토를 벌여 호각으로 싸우고, 조운은 제갈량에게 강유의 뛰어남을 보고한다. 강유가 또 다른 공격을 막아내자 제갈량은 그의 재능을 더욱 높이 사 촉나라로 귀순시키기로 마음먹는다. 제갈량은 강유의 효심을 이용하고 그의 어머니를 동원하는 등 계략을 써서[96] 마준이 강유를 의심하게 만들고, 결국 강유를 궁지에 몰아넣어 촉나라에 항복하도록 설득한다.[96]
이후 강유는 제갈량을 따라 북벌에 참여하며 깊은 신임을 얻는다. 234년 제갈량이 죽음을 앞두고 강유의 조언에 따라 수명 연장을 위한 기도를 올리지만 위연의 방해로 실패하고, 임종 직전 강유에게 뒷일을 부탁하며 자신의 병법이 담긴 책을 물려주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렇듯 《삼국지연의》에서 강유는 제갈량이 가장 믿고 의지한 후계자로 그려진다.
제갈량 사후, 강유는 북벌을 계속 추진한다. 소설 제107화부터 제115화까지는 강유의 북벌을 다루는데, 역사 기록과 달리 "중원 9차 원정"이라는 이름으로 극화되어 묘사된다.[97] 때로는 패배하는 장면도 있지만, 이로 인해 촉의 국력이 쇠퇴했다는 점은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이는 이야기의 초점을 강유의 잘못보다는 유선의 어리석음이나 당시 중신들의 문제로 돌리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있다.
소설 제119화에서 강유는 종회를 설득하여 위나라에 반란을 일으키려 하지만, 종회의 부하들이 반발하면서 실패로 돌아간다. 궁지에 몰린 강유는 "天不助我,我復何為哉!|티엔 부 주 워, 워 푸 허 웨이 자이!zho(하늘의 뜻으로 내 계획이 성공하지 못하는구나!)"라고 외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98] 이때 강유의 나이는 59세로 설정되어 있으며, 그의 쓸개 크기가 계란만 했다는 묘사가 나오는데 이는 실제 사서 기록보다 축소된 것이다.
소설 속에는 강유를 기리는 다음과 같은 시 구절이 등장한다:
> 천수는 영웅을 자랑하고, 양주(涼州)는 드문 인재를 낳았네.
계통은 상부(尚父)로부터 나왔고, 술법은 무후(武侯)에게서 받들었네.
대담하여 두려움 없고, 웅심(雄心)은 맹세코 돌이키지 않네.
성도에서 죽은 날, 한(漢)나라 장수에게 남은 슬픔이 있네.[99]
다른 매체에서의 묘사
5. 기타
강유는 감숙성 간구현에 해당하는 천수군 기현 출신이다.[2]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6] 어머니 슬하에서 자랐으며, 정현의 학문에 관심을 보였다고 한다.[3]
《부자》에는 강유가 명성을 얻고자 했으며 야망이 큰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또한 남몰래 사병을 키웠다는 기록도 있다.[4]
5. 1. 유적 및 전설
검각에서 종회의 대군을 막던 강유는 유선의 항복 소식을 듣고 분통을 터뜨리며 칼로 돌을 내리쳤다고 전해진다. 이때 잘린 돌이 검각 협곡 안에 남아 있으며, 이를 '감도석'이라 부른다. 또한 항복 명령에 따라 위나라에 투항할 뜻을 보이기 위해 양면 군기를 거꾸로 꽂았던 돌은 주가채 바위 절벽에 남아 '쌍기암'이라 불린다. 후일을 도모하며 병사들의 병기를 모아 숨겨두었다는 소검산의 동굴은 '강유 도창고'로 알려져 있다. 검문관을 떠날 때 빨아서 바위에 널어둔 마고자가 돌아오지 못한 주인을 기다리다 돌로 변했다는 전설이 깃든 '양의암'도 전해진다.1999년, 강유의 고향인 간쑤성 톈수이시 간구현 동쪽 근처에 지역 주민들의 기금으로 강유 기념관(姜維紀念館)이 건립되었다. 이 기념관은 360m2 면적에 4m 높이의 강유 조각상이 있는 주요 홀과 장군 양청우의 서예로 "강유의 고향"이라고 새겨진 석비를 갖추고 있다.[100]
쓰촨성 루산현에는 강유의 작위인 평샹후(平襄侯)에서 이름을 딴 24m 높이의 기념 건물인 핑샹루(平襄樓)가 있다. 이 탑은 송나라 때 처음 지어졌고, 명나라 때인 1445년에 개조되었으며, 2006년 중국 국가 문화 유산 관리국에 의해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다.[101]
쓰촨성 젠거현의 젠먼관(劍門關)에는 강유 우물(姜維井), 강유 동굴(姜維洞), 강유 성(姜維城), 강유 사당(姜維廟), 강공교(姜公橋), 강유 무기고(姜維軍械庫), 강유 묘(姜維墓) 등 강유와 관련된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루유, 좌목(左牧), 이조원, 장쉐허와 같은 시인들은 이곳에서 강유를 기리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102]
현대 중국의 053H2G형 호위함과 053H3형 호위함은 각각 NATO 코드명으로 Jiangwei I|강유 I급eng과 Jiangwei II|강유 II급eng이라는 명칭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우연인지, 아니면 강유를 기념하기 위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5. 2. 대중문화
강유는 14세기 역사 소설 《삼국지연의》 후반부의 주요 등장인물 중 한 명이다. 이 소설은 중국 후한 말기와 삼국 시대의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낭만적으로 그리고 있는데, 강유는 제갈량의 제자이자 후계자로 묘사된다. 그는 스승의 유지를 이어받아 멸망한 후한 왕조를 부흥시키기 위해 촉을 이끌고 위와 전쟁을 벌인다.
소설에서 강유는 제92화와 제93화에 처음 등장한다. 당시 그는 제갈량의 1차 북벌 시기에 천수군에서 복무하는 위의 장수였다. 제갈량은 천수 태수 마준을 속여 남안군의 위나라 장군 하후무를 구출하게 하려 했으나, 강유는 이 계략을 간파하고 마준에게 천수에 머물며 적을 함정에 빠뜨리라고 조언한다. 촉의 장수 조운이 천수를 공격하러 왔다가 강유의 함정에 빠져 잠시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지원군 덕분에 구출된다. 조운은 제갈량에게 강유 같은 인재가 천수에 있다는 사실에 감탄했다고 보고한다. 강유가 또 다른 촉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자, 제갈량은 더욱 감탄하며 그를 촉으로 데려오고자 한다. 제갈량은 마준을 속여 강유가 이미 촉에 투항했다고 믿게 만들어 강유가 위로 돌아갈 길을 막고, 그에게 함정을 설치한다. 궁지에 몰린 강유는 자결하려 하지만, 제갈량이 이를 막고 항복을 설득하여 결국 촉에 합류하게 된다.[96]
이후 강유는 제갈량의 북벌에 참여하며 제갈량을 따른다. 소설 제107화부터 제115화까지는 강유의 북벌을 극적으로 묘사하는데, 역사 기록상의 11차례 원정 대신 강유의 "중원 9차 정벌"이라는 이름으로 그려진다.[97] 제119화에서 강유는 종회를 부추겨 위나라에 반란을 일으키려 하지만, 종회의 부하 장수들이 반기를 들면서 실패로 돌아간다. 적에게 포위된 강유는 "하늘의 뜻으로 내 계획이 성공하지 못하는구나!"라고 한탄하며 칼로 목을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98]
소설에는 강유를 기리는 다음과 같은 시 구절이 있다:
: 천수는 영웅을 자랑하고, 양주(涼州)는 드문 인재를 낳았네.
: 계통은 상부(尚父)로부터 나왔고, 술법은 무후(武侯)에게서 받들었네.
: 대담하여 두려움 없고, 웅심(雄心)은 맹세코 돌이키지 않네.
: 성도에서 죽은 날, 한(漢)나라 장수에게 남은 슬픔이 있네.[99]
강유는 코에이 테크모에서 제작한 비디오 게임 시리즈인 ''진 삼국무쌍''과 ''무쌍 오로치''에서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이 게임들에서 그는 스승 제갈량에게 헌신적인 젊은 무사로 묘사된다. 또한 코에이 테크모의 전략 시뮬레이션 게임 시리즈인 ''삼국지''에도 꾸준히 등장한다.
5. 3. 강유를 주제로 한 작품
참조
[1]
Sanguozhi
景元五年正月十八日日中
[2]
Sanguozhi
姜維字伯約,天水兾人也。
[3]
Sanguozhi
少孤,與母居。好鄭氏學。
[4]
Fu Zi
維為人好立功名,陰養死士,不脩布衣之業。
[5]
Sanguozhi
仕郡上計掾,州辟為從事。
[6]
Sanguozhi
以父冏昔為郡功曹,值羌、戎叛亂,身衞郡將,沒於戰場,賜維官中郎,參本郡軍事。
[7]
Sanguozhi
維昔所俱至蜀,梁緒官至大鴻臚,尹賞執金吾,梁虔大長秋,皆先蜀亡歿。
[8]
Sanguozhi
建興六年,丞相諸葛亮軍向祁山,時天水太守適出案行,維及功曹梁緒、主簿尹賞、主記梁虔等從行。太守聞蜀軍垂至,而諸縣響應,疑維等皆有異心,於是夜亡保上邽。
[9]
Sanguozhi
維等覺太守去,追遲,至城門,城門已閉,不納。維等相率還兾,兾亦不入維。維等乃俱詣諸葛亮。
[10]
Weilue
天水太守馬遵將維及諸官屬隨雍州刺史郭淮偶自西至洛門案行,會聞亮已到祁山,淮顧遵曰:「是欲不善!」遂驅東還上邽。遵念所治兾縣界在西偏,又恐吏民樂亂,遂亦隨淮去。
[11]
Weilue
時維謂遵曰:「明府當還兾。」遵謂維等曰:「卿諸人[回]復信,皆賊也。」各自行。維亦無如遵何,而家在兾,遂與郡吏上官子脩等還兾。
[12]
Weilue
兾中吏民見維等大喜,便推令見亮。二人不獲已,乃共詣亮。亮見,大恱。未及遣迎兾中人,會亮前鋒為張郃、費繇等所破,遂將維等却縮。維不得還,遂入蜀。諸軍攻兾,皆得維母妻子,亦以維本無去意,故不沒其家,但繫保官以延之。
[13]
Sanguozhi
亮辟維為倉曹掾,加奉義將軍,封當陽亭侯,時年二十七。
[14]
Sanguozhi
後遷中監軍征西將軍。
[15]
Sanguozhi
建興十二年,亮卒,維還成都,為右監軍輔漢將軍,統諸軍,進封平襄侯。
[16]
Sanguozhi
延熈元年,隨大將軍蔣琬住漢中。琬旣遷大司馬,以維為司馬,數率偏軍西入。
[17]
Sanguozhi
正始元年,蜀將羌維出隴西。淮遂進軍,追至彊中,維退,遂討羌迷當等,案撫柔氐三千餘落,拔徙以實關中。
[18]
Sanguozhi
延熈六年,遷鎮西大將軍,領涼州刺史。
[19]
Sanguozhi
延熙九年冬十一月,大司馬蔣琬卒。
[20]
Sanguozhi
延熈十年,遷衞將軍,與大將軍費禕共錄尚書事。
[21]
Sanguozhi
是歲,汶山平康夷反,維率衆討定之。
[22]
Sanguozhi
八年,隴西、南安、金城、西平諸羌餓何、燒戈、伐同、蛾遮塞等相結叛亂,攻圍城邑,南招蜀兵,涼州名胡治無戴復叛應之。
[23]
Sanguozhi
討蜀護軍夏侯霸督諸軍屯為翅。淮軍始到狄道,議者僉謂宜先討定枹罕,內平惡羌,外折賊謀。淮策維必來攻霸,遂入渢中,轉南迎霸。維果攻為翅,會淮軍適至,維遁退。進討叛羌,斬餓何、燒戈,降服者萬餘落。
[24]
Sanguozhi
又出隴西、南安、金城界,與魏大將軍郭淮、夏侯霸等戰於洮西。胡王治無戴等舉部落降,維將還安處之。
[25]
Sanguozhi
正始九年, 郭淮進軍趨西海,欲掩取其累重,會治無戴折還,與戰於龍夷之北,破走之。
[26]
Sanguozhi
姜維出石營,從彊川,乃西迎治無戴,留陰平太守廖化於成重山築城,斂破羌保質。
[27]
Sanguozhi
淮曰:「今往取化,出賊不意,維必狼顧。比維自致,足以定化,且使維疲於奔命。兵不遠西,而胡交自離,此一舉而兩全之策也。」乃別遣夏侯霸等追維於沓中,淮自率諸軍就攻化等。維果馳還救化,皆如淮計。
[28]
Sanguozhi
延熈十二年,假維節
[29]
Sanguozhi
淮從泰計,使泰率討蜀護軍徐質、南安太守鄧艾等進兵圍之,斷其運道及城外流水。安等挑戰,不許,將士困窘,分糧聚雪以稽日月。維果來救,出自牛頭山,與泰相對。 勑諸軍各堅壘勿與戰,遣使白淮,欲自南渡白水,循水而東,使淮趣牛頭,截其還路,可并取維,不惟安等而已。淮善其策,進率諸軍軍洮水。維懼,遁走,安等孤縣,遂皆降。
[30]
Sanguozhi
於是留艾屯白水北。三日,維遣廖化自白水南向艾結營。艾謂諸將曰:「維今卒還,吾軍人少,法當來渡而不作橋。此維使化持吾,令不得還。維必自東襲取洮城。」洮城在水北,去艾屯六十里。艾即夜潛軍徑到,維果來渡,而艾先至據城,得以不敗。
[31]
Sanguozhi
延熙十三年,姜維復出西平,不克而還。
[32]
Sanguozhi
維自以練西方風俗,兼負其才武,欲誘諸羌、胡以為羽翼,謂自隴以西可斷而有也。
[33]
Sanguozhi
每欲興軍大舉,費禕常裁制不從,與其兵不過萬人。
[34]
Han Jin Chunqiu
費禕謂維曰:「吾等不如丞相亦已遠矣;丞相猶不能定中夏,況吾等乎!且不如保國治民,敬守社稷,如其功業,以俟能者,無以為希兾徼倖而決成敗於一舉。若不如志,悔之無及。」
[35]
Sanguozhi
延熙十六年歲首大會,魏降人郭循在坐。禕歡飲沈醉,為循手刃所害,謚曰敬侯。
[36]
서적
Wei Shi Chunqi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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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vol.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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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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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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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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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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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vol.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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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vol.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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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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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vol.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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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vol.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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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vol.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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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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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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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vol.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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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vol.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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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vol.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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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Huayang Guo Zh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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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vol.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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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vol.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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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vol.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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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vol.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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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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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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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vol.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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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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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nguozhi vol.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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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vol.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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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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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 Jin Chunqi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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