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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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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삼성은 남송 말기에서 원나라 초기에 활동한 학자이자 《자치통감음주》의 저자이다. 그는 1256년에 진사가 되었고, 가사도의 문객으로 활동하며 《자치통감》 연구를 시작했다. 남송 멸망 후에도 《자치통감》 주석 작업에 매달려 30년에 걸쳐 《자치통감음주》를 완성했으며, 이 주석은 《자치통감》에 대한 가장 뛰어난 주석으로 평가받았다. 호삼성은 만년에 지안노인(知安老人)이라는 호를 사용했으며, 1302년에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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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삼성
기본 정보
호삼성 초상
호삼성 초상
경보(景伯)
시호문정(文靖)
출생1230년
사망1302년
국적원(元)
민족한족(漢族)
출생지영천(지금의 하남성 영천)
직업역사가
주요 저서《자치통감음주(資治通鑑音注)》

2. 생애

호삼성의 집안인 중호 호씨(中胡胡氏)의 시조 호침(胡琛)은 말기 진사로 천거되었고 후당 장종 때에 기거사인(起居舍人)을 지냈으며 물러난 뒤에 회계(會稽)에서 살았다.[1] 호삼성은 자신의 저서 《자치통감음주》에서 자신의 본관을 '천태호삼성(天台胡三省)'이라고 썼고, 천태란 태주부(台州府)에 속해 있었던 현 가운데 하나로 오늘날의 중국 저장 성 타이저우 시 톈타이 현을 말한다. 황종희는 저서 《송원학안》에서 이 설을 따랐다.

호삼성은 형제가 다섯 명이었는데 그 중 셋째였다. 호삼성의 이름 삼성(三省)은 《논어》 학이편4에 실려있는 증자의 "나는 하루에 세 번 나 자신을 반성하였다"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호삼성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였고 한 번 열람한 것은 번번이 외었으며 일곱 살에 글을 지을 줄 알았다고 한다.

보우(寶祐) 4년 문천상, 육수부, 사방득 등과 함께 진사로 등제하였고 길주(吉州) 태화위(泰和尉)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의 나이가 연로하심을 이유로 부임지로 가지 않았다. 후에 다시 경원부(慶元府) 자계위(慈溪尉)로 임명되었는데[2] 임기 중에 경원의 지부(知府) 여문옹(厲文翁)에게 죄를 얻어 파직되었다가 다시 문학과 행동이 마땅하다며 양주 강도승(江都丞)으로 천거되었다.

호삼성은 《자치통감》에 대한 연구에 뜻을 두고 있어[3]가사도가 집정하던 시기에는 조봉랑(朝奉郎)이 되었는데 가사도의 문객(門客) 가운데서도 이름이 알려져 있어, 때때로 가사도에게 불려가 자신이 교감한 《자치통감》을 제자에게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후 호삼성은 30년에 걸쳐 《자치통감》에 주석을 다는 작업에 매달렸는데[4] 경염(景炎) 원년 신창(新昌)에 피난해 있던 와중에 《자치통감음주》의 원고 97권 및 논(論) 10편을 잃어버렸고, 또 다시 다른 책을 얻어다 작업을 계속하였다.[5] 이때 호삼성의 나이가 이미 46세였고, 문을 걸어잠그고 객도 받지 않은 채 밤낮으로 책에 빠져서 살았다.

상흥(祥興) 2년 남송은 원 왕조에 의해 멸망하였다. 호삼성과 함께 진사에 급제한 문천상은 원의 대도로 끌려가서 처형되고 육수부는 애산 전투의 패배 직후 소제를 안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호삼성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원각(袁桷)의 《제호매석간선생》(祭胡梅石間先生)에 따르면 호삼성은 자신의 나라였던 남송의 멸망 와중에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자치통감음주》를 두고 "애써 흩어졌던 것을 주워모아 잘못된 것을 보충함에 이르렀으니 이 또한 사마씨(司馬氏)의 충신들에 못지 않은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했다.

《자치통감음주》가 완성된 것은 지원(至元) 23년에 이르러서였다. 호삼성의 주석은 호주(胡注)라고도 불리며 《자치통감》에 대한 주석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았다. 호주는 또한 《통감》의 크고 작은 잘못들을 수정하였는데, 같은 책 진기(晉紀)4에서 석숭의 관직을 산기상시(散騎常侍)라고 적어둔 것에 대해 호삼성은 "전대의 책(진서)에서는 '시중석숭'(侍中石崇)이라고 썼는데 여기(자치통감)서는 '산기상시'라고 썼으니 분명 하나는 틀린 것이다"라고 썼다. 책이 완성된 뒤에 호삼성은 고향 중호촌으로 돌아갔다.

호삼성은 만년에 자신의 호를 지안노인(知安老人)이라고 썼다. 1302년 정월 아침 일찍 일어나 평소와 같이 담소하던 호삼성은 문득 “내 이제 여기까지 해야 되겠다”고 말했고, 이후 혼수상태에 빠져 사흘 뒤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73세였다.

원 왕조가 편찬한 《송사》나, 왕조에서 편찬한 《원사》 모두 호삼성에 대한 열전을 수록하지 않았다. 민국 초기 커샤오민(柯劭忞)이 《신원사》를 쓰면서 호삼성에 대한 53자의 짧은 글을 《신원사》 유림전(儒林傳)의 마단림(馬端臨)열전의 말미에 붙였다.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천위안(陳垣)이 쓴 《통감호주표미》(通鑑胡注表微)은 청 광서 연간에 편찬된 《영해현지》(寧海縣志)에 실린 호유문(胡幼文)이 쓴 호삼성의 묘지명을 찾아내어 처음으로 호삼성의 생애 및 그의 학문 연구에 대한 많은 성과를 쌓아올렸다.

2. 1. 초기 생애와 가문

2. 2. 관직 생활

2. 3. 『자치통감음주』 저술

호삼성은 《자치통감》에 대한 연구에 뜻을 두고[3] 가사도(賈似道)가 집정하던 시기에는 조봉랑(朝奉郎)이 되었는데 가사도의 문객(門客) 가운데서도 이름이 알려져 있어, 때때로 가사도에게 불려가 자신이 교감한 《자치통감》을 제자에게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후 호삼성은 본격적으로 30년에 걸쳐 《자치통감》에 주석을 다는 작업에 매달렸는데[4] 경염(景炎) 원년(1276년) 신창(新昌)에 피난해 있던 와중에 《자치통감음주》의 원고 97권 및 논(論) 10편을 잃어버렸고, 또 다시 다른 책을 얻어다 작업을 계속하였다.[5] 이때 호삼성의 나이가 이미 46세였고, 문을 걸어잠그고 객도 받지 않은 채 밤낮으로 책에 빠져서 살았다.

남송 상흥(祥興) 2년(1279년) 남송은 몽골족의 원 왕조에 의해 완전히 멸망하였다. 호삼성과 함께 진사에 급제한 동기로써 남송의 재상이 되었던 문천상은 원의 대도(大都)로 끌려가서 처형되고 육수부애산 전투의 패배 직후 남송의 마지막 황제 소제를 안고 바다에 뛰어들었다. 호삼성과 같은 시대를 살았던 원각(袁桷)의 《제호매석간선생》(祭胡梅石間先生)에 따르면 호삼성은 자신의 나라였던 남송의 멸망 와중에도 손에서 놓지 않았던 《자치통감음주》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애써 흩어졌던 것을 주워모아 잘못된 것을 보충함에 이르렀으니 이 또한 사마씨(司馬氏)의 충신들에 못지 않은 일이 아니겠는가."(至于孜孜衛翼,拾遺補誤,亦幾乎司馬氏之忠臣而無負)

《자치통감음주》가 완성된 것은 원 지원(至元) 23년(1286년)에 이르러서였다. 호삼성의 주석은 호주(胡注)라고도 불리며 《자치통감》에 대한 주석 가운데서도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았다. 호주는 또한 《통감》의 크고 작은 잘못들을 수정하였는데, 같은 책 진기(晉紀)4에서 석숭(石崇)의 관직을 산기상시(散騎常侍)라고 적어둔 것에 대해 호삼성은 "전대의 책(진서)에서는 '시중석숭'(侍中石崇)이라고 썼는데 여기(자치통감)서는 '산기상시'라고 썼으니 분명 하나는 틀린 것이다"(前書侍中石崇,此作散騎常侍, 必有一錯)라고 썼다.

2. 4. 만년과 죽음

3. 평가 및 영향

4. 저서

호삼성은 『자치통감음주』에서 자신의 본관을 "천태 호삼성"이라고 적었다. 황종희도 『송원학안』에서 이 설을 따랐다.

보우 4년 (1256년), 문천상, 육수부, 사방득 등과 함께 진사가 되었다. 길주 태화 현위에 임명되었으나, 모친의 노령을 이유로 부임하지 않았다. 이후 경원부 자계 현위에 임명되었으나, 재임 중에 경원지부 려문옹에게 죄를 지어 파면되었다. 그러나 문학과 행동이 올바르다고 하여 양주 강도 현승으로 추천되었고, 가사도 정권 하에서 조봉랑 등을 지냈다. 이때부터 『자치통감』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여, 가사도의 문객으로 이름이 알려져 초빙되었고, 자신이 교정한 『자치통감』을 가르치기도 했다.

남송이 몽골에 멸망하자 은거하여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경염 원년 (1276년), 신창으로 피난하던 중 『자치통감』에 주석과 논평을 첨부한 초고를 잃었지만, 다른 서적을 얻어 작업을 계속했다. 10년 동안 밤낮없이 연구에 매달린 결과, 마침내 『자치통감음주』, 『통감석문변오(석문변오)』라는 주석서를 저술했다. 그가 덧붙인 주석의 정밀함으로 인해, 그 주석만으로 역사서에 필적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5. 같이 보기

참조

[1] 문서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 저장성 샤오싱.
[2] 서적 《四庫全書宋寶祐四年登科錄》
[3] 논문 제호매석간선생
[4] 서적 사우연원록
[5] 문서 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 광둥성 타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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