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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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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애산 전투는 1279년 원나라가 남송을 공격하여 남송이 멸망한 해전이다. 1276년 원나라의 침략으로 남송의 수도가 함락되고 어린 황제들이 옹립되면서 저항이 이어졌다. 남송은 광둥 지역의 애산에 요새를 구축하고 해상에서 저항했지만, 원나라 장홍범의 공격으로 패배했다. 이 전투에서 남송의 마지막 황제 조빙이 사망하면서 남송은 멸망하고, 원나라가 중국을 통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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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양성 공방전은 1267년부터 1273년까지 몽골 제국과 남송 사이에서 벌어진 전투로, 몽골이 회회포를 사용하여 남송의 요새인 양양성을 함락시키면서 남송 멸망과 원나라의 중국 통일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애산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신후이의 전투 기념 공원
신후이, 장먼 시, 광둥 성에 있는 전투 기념 공원
전투명애산 전투
별칭애산 해전
야산 해전
일부송-원 전쟁의 일부
시기1279년 3월 19일
장소광둥 성 장먼 시 신후이 구 애산
좌표N
결과원나라의 승리
영향남송 멸망
중국 본토 전체에 대한 원나라의 통치
교전 세력
교전국 1남송
교전국 2원나라
지휘관 및 지도자
남송 지휘관장세걸
육수부
진보(포로)
장달
적국수(포로)
유준 (포로)
소유의
방흥
원나라 지휘관장홍범
이항
양웅비
왕천록
카라다이
아주
아리해아 부대
마견 부대
병력 규모
남송 병력200,000명 (대부분 비전투원인 궁정 관리 및 하인)
1,000척 이상의 선박 (대부분 수송선, 호위함 포함)
실제 전투 병력은 10,000명 수준으로 추정
원나라 병력중국인 병사 20,000명
전함 50척 이상
피해 규모
남송 피해최소 100,000명이 전투 또는 익사로 사망, 나머지는 도주
원나라 피해알 수 없음

2. 배경

쿠빌라이 칸이 이끄는 원나라는 1273년 남송의 방어 거점인 양양을 함락시켰다. 1276년에는 남송의 수도 임안을 함락하고 공종을 사로잡아 사실상 남송이 멸망했다. 그러나 육수부, 문천상, 장세걸 등 일부 남송의 신하들은 남송 황족을 옹립하여 저항을 계속했다. 원나라는 이들을 진압하는 한편, 천주의 실력자 포수경을 포섭하여 화남 지방을 지배하에 두었다.

1277년 남송 조정은 취안저우로 도망쳤으나, 포수경이 원나라에 투항하면서 상황이 어려워졌다. 장세걸은 포수경에게 배를 빌리려 했으나 거절당했고, 이에 포수경의 재산을 몰수하고 배를 탈취하여 남송 조정을 이끌고 도망쳤다. 이후 남송은 단종소제를 차례로 옹립하며 저항을 이어갔다. 단종은 란타우섬에서 병사하고, 소제가 즉위하여 애산에 요새행궁을 구축하고 철저항전의 의지를 보였다.[1]

원나라 측 기록에 따르면, 남송 함대는 1,000척의 대형 선박을 묶고 진흙을 발라 화공에 대비했으며, 긴 목재를 묶어 방어망을 만들었다.[1] 1278년에는 문천상이 사로잡히면서 남송 육군이 제거되었다.[2]

2. 1. 남송의 쇠퇴와 저항

1276년 쿠빌라이 칸의 원나라는 남송수도 임안(현재의 항저우)을 함락시켰고, 공종은 항복하였다. 이로써 남송은 사실상 멸망하였다. 그러나 육수부, 문천상, 장세걸 등 일부 남송의 충신들은 임안 함락과 동시에 공종의 서형 조하(남송 단종)를 황제로 추대하고 원나라에 대한 저항 운동을 계속하였다.

1277년 푸저우(福州)가 원나라에 함락되자 망명한 남송 조정은 취안저우로 도망쳤다. 남송의 대장군(大將軍) 장세걸은 배를 빌리려 했지만, 해상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취안저우의 실력자 포수경은 이를 거부하고 원나라에 투항하였다. 분노한 장세걸은 포수경의 재산을 몰수하고 훔친 배를 타고 남송 조정과 함께 도망쳤다.[2]

2. 2. 포수경의 투항과 원나라의 해상 전력 강화

1276년 쿠빌라이 칸의 원나라가 남송수도 임안을 함락하고 공종이 항복하면서 남송은 사실상 멸망하였다. 그러나 육수부, 문천상, 장세걸 등 남송 유신들은 저항을 계속하였고, 원나라는 이들을 진압하는 한편 천주의 실력자 포수경을 포섭하였다.

1277년 푸저우가 원나라에 함락되자 망명한 남송 조정은 취안저우로 도망쳤다. 남송의 대장군 장세걸은 배를 빌리려 했으나, 무슬림 상인 포수경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에 장세걸은 포수경의 재산을 몰수하고 훔친 배로 남송 조정을 이끌고 도망쳤다. 분노한 포수경은 취안저우에서 황족과 관리들을 학살하고 원나라에 항복하였다. 포수경의 투항으로 원나라는 선박과 숙련된 선원을 확보하여 해상 전투 능력을 강화하였다.[1]

3. 전투의 전개

1276년 남송의 수도 임안이 함락되고 공종이 항복한 후, 육수부, 문천상, 장세걸 등 남송의 유신들은 조하(趙昰)를 황제로 추대하고 원나라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원나라 군대는 이들을 격파하고, 천주의 실력자 포수경을 포섭하여 화남 지방을 지배하에 두었다.

강남에서 광동으로 밀려난 남송군은 조병(趙昺)을 황제로 옹립하고, 해상을 떠돌며 저항을 계속했다. 이들은 애산(崖山)에 요새행궁(行宮)을 구축하고 철저 항전의 의지를 보였다. 원나라군은 포수경으로부터 선박 및 숙련된 선원을 제공받아 해상 전투 능력을 강화했다.

원나라 측 기록에 따르면, 남송 함대는 1,000척의 대형 선박을 묶어 화공 대책으로 선체 외장에 진흙을 칠하고 긴 목재를 묶어 방어망을 만들었다. 그러나 1279년 2월, 장기간의 소모전에 지친 남송군은 패주하였다. 3월 19일 저녁, 육수부는 패배를 깨닫고 소제를 안고 물에 뛰어들어 자결하였다.

3. 1. 애산으로의 집결

1276년 남송수도 임안이 함락되고 공종이 항복하면서, 남송은 사실상 멸망하였다. 그러나 육수부, 문천상, 장세걸 등 남송의 유신들은 저항을 계속했다. 이들은 공종의 서형 조하(趙昰)를 황제(남송 단종)로 추대하고 원나라에 맞섰다. 원나라 군대는 이들을 격파하는 한편, 천주의 실력자 포수경을 포섭하여 화남 지방을 지배하에 두었다.[1]

강남에서 광동으로 밀려난 남송군은 병사한 단종의 후임으로 동생인 조병(趙昺)을 황제(남송 소제)로 옹립하고, 해상을 떠돌며 저항을 계속하였다. 이들은 현재의 홍콩 주변에 있던 애산(崖山)에 요새행궁(行宮)을 구축하고 철저 항전의 의지를 보였다.[1]

장세걸은 약 1,000척의 배를 쇠사슬로 연결하여 만 안에 긴 줄을 형성하고, 조병의 배를 함대 중앙에 배치하여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남송군은 화공에 대비하여 선체 외장에 진흙을 바르고, 긴 목재를 묶어 방어망을 만들었다.[1]

3. 2. 원나라의 공격과 남송의 패배

1279년, 원나라장홍범은 애산에서 남송 수군을 공격했다. 이전에 광저우를 함락시켰던 리헝이 장홍범을 지원했다. 송군 내부에서는 수군이 먼저 만의 입구를 확보하여 서쪽으로 후퇴할 수 있는 길을 확보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으나, 장사체는 병사들의 도망을 막기 위해 이 제안을 거절했다. 그는 같은 이유로 육지에 있는 모든 궁궐, 집, 요새를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장사체는 약 1,000척의 배를 쇠사슬로 연결하여 만 안에 긴 줄을 형성하고 조빙의 배를 함대 중앙에 배치했다. 이는 개별적인 송나라 배가 전투에서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원나라 군대는 화선을 송나라 함대 진형으로 향하게 했지만, 송나라 배는 이러한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모든 송나라 배는 내화성 진흙으로 칠해져 있었다. 원나라 수군은 만을 봉쇄했고, 원나라 군대는 육지에서 송나라의 식수와 목재 공급을 차단했다. 많은 비전투원이 있었던 송나라 측은 곧 보급품이 부족해졌다. 송나라 병사들은 마른 음식을 먹고 바닷물을 마셔야 했고, 메스꺼움과 구토를 일으켰다. 장홍범은 장사체의 조카를 납치하여 세 번이나 항복을 요구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1279년 3월 18일 오후, 장홍범은 대규모 공격을 준비했다. 대포의 사용은 거부되었는데, 홍범은 대포가 진형의 사슬을 너무 효과적으로 파괴하여 송나라 배가 쉽게 후퇴할 수 있게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장홍범은 그의 해군을 네 부분으로 나누었다. 각각 송나라의 동쪽, 북쪽, 남쪽을 담당했고, 홍범은 나머지 부분을 송나라 군대에서 약 리 정도 떨어진 곳으로 이끌었다.

먼저 북쪽 측면이 송나라 군대와 교전했지만 격퇴되었다. 그러자 원나라는 축제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송나라 군대는 원나라 군대가 연회를 열고 있다고 생각하여 경계를 늦추었다. 정오에 장홍범은 큰 천 조각 아래 추가 병사들을 숨긴 채 정면에서 공격했다. 장홍범의 배가 송나라 함대에 접근하자 원나라는 전투의 뿔나팔을 불어 천 아래 숨겨진 병사들을 드러냈다.

송나라 군대는 소규모 충돌에 대비했지, 대규모 공격에는 대비하지 않았다. 송나라 배에는 화살이 쏟아졌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송나라 함대는 즉시 7척의 배와 많은 병사들을 잃었다. 병들고 약해진 송나라 병사들은 원나라 군대와의 근접전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은 전투 지휘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쇠사슬로 연결된 송나라 배는 중앙을 지원할 수도, 후퇴할 수도 없었다. 송나라 군대가 죽임을 당한 후, 송나라 조정에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이 시작되었다. 전투에서 패배했음을 알아차린 장사체는 그의 최정예 병사들을 뽑아 약 12척의 배를 진형에서 잘라내 황제를 구하기 위한 돌파를 시도했다.

원나라 군대는 중앙과 조빙에게 빠르게 진격하여 길을 막는 모든 사람들을 죽였다. 육수부는 탈출의 희망이 없음을 보고 어린 황제를 데리고 바다로 뛰어들었고, 두 사람 모두 익사했다. 많은 관리들과 궁녀들도 그 뒤를 따랐다.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애산 전투 이후, 장세걸(張世傑)은 양태후를 모시고 송나라를 재건하려 했으나, 회종의 죽음을 듣고 양태후도 자결하였다.[1] 장세걸은 양태후를 해변에 매장한 후 참파로 향하던 중 폭풍우를 만나 사망했다(1279년).[1]

송사에는 전투 7일 후 수천 구의 시체가 바다에 떠올랐다고 기록되어 있다.[1] 소년 황제의 시신은 심천 근처에서 발견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실제 묘소는 발견되지 않았다.[1]

문천상(Wen Tianxiang), 육수부(Lu Xiufu), 장세결(Zhang Shijie)을 기리는 사찰이 주변 지역에 세워졌고, 1980년대에는 사구 근처에 조병을 기리는 기념관이 세워졌다.[1] 차오저우인(Teochew people)은 소년 황제를 기리기 위해 애국 수프(patriotic soup)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1] 오늘날 전투 현장 동쪽에는 송원 야문 해전 문화 관광지가 있다.[1]

4. 1. 남송의 멸망과 원나라의 중국 통일

1279년 애산 전투에서 육수부가 어린 남송 소제를 업고 바다에 투신하고, 10만여 명의 군인과 관료들이 뒤따라 자결하면서 남송은 완전히 멸망했다. 육지에서 저항하던 문천상1278년 원나라에 포로로 잡혀 1283년 처형될 때까지 저항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이로써 쿠빌라이 칸이 이끄는 원나라는 중국 전역을 통일하고, 이후 97년간 중국을 지배하였다.[1][2][3]

4. 2. 문천상의 저항과 최후

1278년 육지에서 저항 운동을 하던 문천상(文天祥)은 원에 체포되어 대도(大都)(현재의 베이징)로 압송되었다.[1] 원나라는 뛰어난 문인(文人)이었던 그를 등용하기 위해 여러 번 설득하였으나, 그는 완강히 거부하며 옥중에서 『정기의 노래』를 읊었다.[1] 1283년 문천상은 처형되었다.[1]

4. 3. 생존자들과 그 이후

애산 전투에서 살아남은 남송의 유민 진공(陳公, 이름은 전해지지 않으며, 명나라 건국 이후 양왕(揚王)에 추봉)의 외손자이자 주오사의 아들 주원장이 훗날 원나라를 몰아내고 명나라를 건국하였다.

원군에 협력한 포수경(蒲寿庚)은 이 전투 후 요직에 발탁되어 취안저우를 국제 무역항으로 발전시켰고, 홍안의 역에서는 대규모 선단의 조선에도 기여하였다. 그러나 원나라 말기에 원 몽골은 포수경의 가족과 무슬림들을 배척하고 포소긍의 후손들을 이스파 반란에서 학살하였다. 이슬람 사원과 외국 건축 양식의 건물들은 거의 모두 파괴되었고, 원나라 황실 군인들은 포소긍의 대부분의 후손들을 죽이고 시체를 끔찍하게 훼손했다.[1]

5. 역사적 평가 및 의의

애산 전투는 단순한 왕조 교체를 넘어 몽골 제국의 팽창과 동아시아 국제 질서 재편이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해상 실크로드의 요충지였던 천주(泉州)의 무슬림 상인 포수경(蒲壽庚)의 원나라 투항은 전투의 향방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당시 동아시아 해상 무역 네트워크의 변화와도 관련이 있다. 애산 전투 이후, 고려는 원나라의 직접적인 간섭을 받게 되었으며, 일본은 원나라의 침략(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을 겪게 되는 등 동아시아 국제 질서는 크게 변화하였다. 애산 전투에서 보여준 남송 충신들의 저항은 후대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문천상의 충절은 민족주의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5. 1. 문화적 영향

장세결은 전투에서 살아남아 양황태후에게 다음 송나라 황제를 세우고 원나라에 저항을 계속하길 바랐으나, 회종(Emperor Huaizong)의 죽음을 들은 양황태후 또한 바다에서 자결하였다. 장세결은 해변에 그녀를 매장했고, 그와 남은 병사들은 그 후 곧 몰아친 열대 폭풍으로 인해 바다에서 익사한 것으로 추정된다.[2][3]

송사에는 전투 7일 후 수천 구의 시체가 바다 표면에 떠올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소년 황제의 시신은 오늘날 사구공업구(Shekou)가 있는 심천(Shenzhen) 근처에서 발견되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실제 묘소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송나라 말기에 목숨을 잃은 문천상, 여희복(Lu Xiufu), 장세결을 기리는 많은 사찰이 그 주변 지역에 세워졌다. 1980년대에는 사구 근처에 조병을 기리는 또 다른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차오저우인들은 채소 수프 요리인 애국 수프를 준비하는 것으로 소년 황제를 기리기도 한다. 오늘날 송원 야문 해전 문화 관광지라는 박물관 단지가 전투 현장 동쪽에 위치해 있다.

타나카 요시키의 소설 『해소』에서 이 전투를 다루고 있다.

우즈키하라 하루아키의 소설 『안덕천황표해기』 제2부에서 안덕천황과 조빙의 대화를 마르코 폴로의 시점으로 다루고 있다.

참조

[1] 논문 The Islamic Heritage in China: A General Survey http://www.muslimher[...] 2006-03-00
[2] 웹사이트 一个美丽的传说 奇石变迁话沧桑 http://www.cangdian.[...] 2011-07-08
[3] 웹사이트 宋末皇帝與兩塊大石 https://web.archive.[...] 2010-10-03
[4] 문서 張弘範主戰海上,李恒主戰内河
[5] 문서 外围軍队
[6] 서적 宋史*瀛国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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