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토 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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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간토 관령은 무로마치 막부 시대에 간토 지방을 통치하기 위해 임명된 직책이다. 1349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차남 아시카가 모토우지를 가마쿠라 구보로 임명하고, 이를 보좌하는 간토 집사를 두면서 시작되었다. 간토 집사는 초기에는 시바 씨, 하타케야마 씨 등이 맡았지만, 점차 우에스기 씨가 세습하게 되었고, 간토간레이로 불리며 가마쿠라 구보를 견제하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15세기 이후 가마쿠라 구보와의 갈등이 심화되었고, 센고쿠 시대에는 호조 씨, 사토미 씨 등이 간토 관령을 자칭하기도 했다. 1578년 우에스기 겐신의 사망으로 간토 관령은 명목상으로 종언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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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에스기 겐신 - 가와나카지마 전투
가와나카지마 전투는 1553년부터 1564년까지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이 시나노 국 가와나카지마에서 시나노 지방의 지배권을 두고 벌인 다섯 차례의 전투로, 복잡한 정치적, 군사적 배경 속에서 전개되었으며 현대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 우에스기 겐신 - 하늘과 땅과 (1969년 드라마)
《하늘과 땅과》는 1969년 NHK에서 방영된 대하드라마로, 센고쿠 시대를 배경으로 우에스기 겐신의 삶을 다루며, 컬러 촬영과 기술적 시도를 통해 완성도를 높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 우에스기씨 - 나가노 나리마사
나가노 나리마사는 센고쿠 시대 가미쓰케노쿠니 출신의 무장으로, 우에스기 겐신과 협력하여 호조 씨에 맞서 싸웠고, 다케다 신겐의 침공에도 용맹하게 저항했으며, 뛰어난 용병술과 강직한 성품으로 평가받는다. - 우에스기씨 - 우에스기 기요코
우에스기 기요코는 아시카가 타카우지의 어머니이며, 아시카가 가문을 지지하고 우에스기 가문의 융성에 힘썼으며, 와카에도 능했던 인물이다. - 나가오 우에스기가 - 우에스기 겐신
우에스기 겐신은 전국시대 에치고의 무장으로, 나가오 가게토라에서 우에스기 가문을 계승하여 에치고 통일, 간토 진출, 다케다 신겐과의 가와나카지마 전투, 간토 관령으로서의 호조 가문과의 대립, 오다 노부나가와의 충돌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나 급사 후 우에스기 가문은 쇠퇴하였다. - 나가오 우에스기가 - 가와나카지마 전투
가와나카지마 전투는 1553년부터 1564년까지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이 시나노 국 가와나카지마에서 시나노 지방의 지배권을 두고 벌인 다섯 차례의 전투로, 복잡한 정치적, 군사적 배경 속에서 전개되었으며 현대 사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간토 관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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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이름 | 간토 관령 (関東管領) |
로마자 표기 | Kantō Kanrei |
다른 이름 | 간토 집사 (関東執事) |
상세 정보 | |
역할 | 가마쿠라·무로마치 시대의 간토 지배를 담당한 무로마치 막부의 중요 직책 |
설치 시기 | 아시카가 모토우지가 가마쿠라 공방으로 임명되었을 때 |
주요 가문 | 우에스기 가문 |
특징 | 관령은 대대로 우에스기 씨 (후지와라 북가)가 맡음. 센고쿠 시대 이후에는 이름뿐인 존재가 됨. |
겸임 | 간토 집사 (関東執事) |
역사적 배경 | |
배경 | 무로마치 막부는 아시카가 쇼군가 일문을 가마쿠라 공방으로 임명하여 간토를 다스리게 함. 간토 관령은 가마쿠라 공방을 보좌하는 역할 수행. |
초기 임명 | 아시카가 모토우지 (가마쿠라 공방)를 보좌하기 위해 설치. |
권력 투쟁 | 가마쿠라 공방과 간토 관령 사이의 권력 다툼이 자주 발생. |
몰락 | 센고쿠 시대에 접어들면서 간토 관령의 영향력이 약화됨. |
조직 및 권한 | |
지위 | 무로마치 막부의 중요 직책 중 하나. |
임무 | 간토 지역의 통치 및 가마쿠라 공방 보좌. |
주요 가문 | 주로 우에스기 가문이 대대로 임명됨. |
권한 | 간토 지역의 군사적, 행정적 권한 행사. |
주요 인물 | |
우에스기 노리자네 | 간토 관령으로서 활약한 대표적인 인물. |
우에스기 후사아키 | 센고쿠 시대의 간토 관령. |
같이 보기 | |
관련 직책 | 가마쿠라 공방 무로마치 막부 |
관련 지역 | 간토 지방 |
2. 연혁
쇼헤이 4년/조와 5년(1349년), 무로마치 막부 초대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적남 요시아키라를 가마쿠라에서 교토로 불러들이고, 차남 가메와카마루(훗날의 아시카가 모토우지)를 간토 통치를 위해 가마쿠라 구보로 임명해 파견하였다. 이때 어린 모토우지를 보좌하기 위한 집사를 두었는데, 교토에서도 쇼군을 보좌하는 집사(간레이)가 있었기에 이와 구별하여 「간토 집사」로 불렀다.
당초에는 2인 지도체제로 우에스기 노리아키 ・ 시바 이에나가 , 다음으로 고노 모로후유 ・ 하타케야마 구니키요 등이 임명되었다. 간토 집사는 초기에는 시바 씨 ・ 하타케야마 씨가 취임하였으나 차츰 우에스기 씨가 거의 독점하게 되었고, 최종적으로는 우에스기 씨가 세습하게 된다.
간노의 소란으로 우에스기 노리아키가 실각하여 에치고로 은퇴하였다. 이후, 쇼헤이 17년/조지 원년(1362년) 모토우지의 청으로 복직하고, 쇼헤이 22년/조지 6년(1367년) 모토우지가 급서하자 나이 어린 아시카가 우지미쓰가 가마쿠라 구보를 이어받아 노리아키가 그 후견이 되었고, 이후 간토간레이(関東管領)라 불리게 되었다.[9]
노리아키는 당초 기타간토(北関東)를 관리하였으나, 모토우지 급서 후인 쇼헤이 23년/오안 원년(1368년) 무사시 헤이잇키의 난을 진압하면서 미나미칸토(南関東)의 가마쿠라 구보의 직할령까지도 관할하에 두게 된다. 오에이 6년(1399년)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도발로 인해 오우치 요시히로가 거병하였을 때(오에이의 난) 간토간레이 우에스기 노리사다가 요시히로에 호응하여 거병하려던 3대 가마쿠라 구보 아시카가 미쓰카네를 말렸다. 이후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와 이누가케 우에스기 가가 간토간레이 직책을 점거하게 되고, 오에이 23년(1416년) 우에스기 젠슈의 난으로 이누가케 우에스기 가가 멸망하면서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가 간토간레이를 세습하기에 이른다.
간토간레이는 주로 지배지역의 슈고 및 지토(地頭) 관리를 맡았으며, 무사시 슈고(武蔵守護)도 겸임하며 간토 일원의 무사들을 장악하고 차츰 가마쿠라 구보 이상의 힘을 지니게 되어 가마쿠라 구보와 대립하기에 이르렀다.
에이쿄 10년(1438년) 아시카가 모치우지가 아시카가 요시노리와 대립하였고, 간토간레이 우에스기 노리자네는 모치우지를 말렸으나 암살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아 간토간레이 직을 사임하고 우에노로 달아났다. 모치우지가 노리자네 추토를 위해 거병하자 노리자네는 무사시 후추(武蔵府中)에 진을 치고 막부와 연합하여 모치우지를 자결시키고 가마쿠라후를 멸망시켰다(에이쿄의 난). 노리자네는 일단 관직에서 물러나 출가하였으나 에이쿄 12년(1440년) 유키 전투 발발 후 복직하였다.
분안 6년/호토쿠 원년(1449년) 아시카가 나리우지가 제5대 가마쿠라 구보가 되어 가마쿠라후를 재흥시켰으나, 교토쿠 3년(1454년) 나리우지가 간토간레이 우에스기 노리타다를 암살했다. 교토쿠 4년(1455년) 나리우지는 이마가와 노리타다에 의해 가마쿠라에서 쫓겨났지만, 고가를 거점으로 고가 구보(古河公方)라 자처하였다(교토쿠의 난).
이 사이,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가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에 맞설 세력을 쌓고, 조쿄(長享) 원년(1487년) 우에스기 아키사다가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토벌을 개시한다(조쿄의 난). 전란은 18년 동안 이어져 아키사다의 승리로 끝났지만, 간토 지역은 황폐화되었고, 이세 소즈이를 간토로 불러들여 고호조 씨(後北条氏) 대두의 계기를 만들고 만다.
16세기에 들어 고호조 씨는 간토 중심부로 세력을 넓혀 나갔고,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는 두 번에 걸친 가독 계승 싸움으로 그 세력이 후퇴해갔다. 덴분 15년(1546년) 가와고에 성 전투에서 호조 우지야스에게 패배하여 고가 구보와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는 큰 타격을 입었으며,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는 멸망한다.
그 뒤 우에스기 노리마사는 히라이 성을 잃고 에치고로 향했고, 에이로쿠 4년(1561년) 나가오 가게토라에게 간토간레이 직을 양도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간토간레이 자리는 이미 기능하지 않았고, 덴쇼 6년(1578년) 겐신이 사망함으로써 명목상으로도 종언을 고한다.
2. 1. 간토 집사 (초기)
쇼헤이 4년/조와 5년(1349년), 무로마치 막부 초대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적남 요시아키라를 가마쿠라에서 교토로 불러들이고, 차남 가메와카마루(훗날의 아시카가 모토우지)를 간토 통치를 위해 가마쿠라 구보로 임명해 파견하였다. 이때 어린 모토우지를 보좌하기 위한 집사를 두었는데, 교토에서도 쇼군을 보좌하는 집사(훗날의 간레이)가 있었기에 이와 구별하여 「간토 집사」로 불렀다.당초에는 2인 지도체제로 우에스기 노리아키 ・ 시바 이에나가 , 다음으로 고노 모로후유 ・ 하타케야마 구니키요 등이 임명되었다. 간토 집사는 초기에는 시바 씨 ・ 하타케야마 씨가 취임하였으나 차츰 우에스기 씨가 거의 독점하게 되었고, 최종적으로는 우에스기 씨가 아예 세습하게 된다. 우에스기 씨는 고즈케 국 ・ 이즈 국의 슈고(守護)도 맡았다.
간노의 소란으로 우에스기 노리아키가 실각하여 에치고로 은퇴하였다. 이후, 쇼헤이 17년/조지 원년(1362년) 모토우지의 청으로 복직하고, 쇼헤이 22년/조지 6년(1367년) 모토우지가 급서하자 나이 어린 아시카가 우지미쓰가 가마쿠라 구보를 이어받아 노리아키가 그 후견이 되었고, 이후 간토간레이(関東管領)라 불리게 되었다.[9]
2. 2. 간토 간레이 성립
간노의 소란 직전인 쇼헤이(正平) 4년/조와(貞和) 5년(1349년), 무로마치 막부의 초대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아들 요시아키라가 가마쿠라에서 교토로 불려가고, 대신 차남 가메와카마루(훗날의 아시카가 모토우지)가 간토 통치를 위해 가마쿠라 구보로 임명되어 파견되었다. 이를 계기로 어린 모토우지를 보좌하기 위한 집사가 그 보좌로 임명되었는데, 교토에서도 쇼군을 보좌하는 집사(훗날의 간레이)가 있었기에 이와 구별하여 '간토 집사'로 불렀다. 처음에는 2인 지도체제로 우에스기 노리아키, 시바 이에나가가 임명되었고, 이어서 고노 모로후유, 하타케야마 구니키요 등이 임명되었다. 간토 집사는 초기에는 시바 씨, 하타케야마 씨가 취임하였으나 점차 우에스기 씨가 거의 독점하게 되었고, 최종적으로는 우에스기 씨가 아예 세습하게 되었다. 우에스기 씨는 고즈케 국, 이즈 국의 슈고(守護)도 맡았다.다다요시 지지파였던 우에스기 노리아키가 간노의 소란으로 실각하여 에치고로 은퇴하고도 쇼헤이 17년/조지(貞治) 원년(1362년) 모토우지의 청원으로 복직하고, 쇼헤이 22년/조지 6년(1367년) 모토우지가 급서하자 나이 어린 아시카가 우지미쓰가 가마쿠라 구보를 이어받아 노리아키가 그 후견이 되었고, 이후 간토간레이(関東管領)라 불리게 되었다.[9]
노리아키는 당초 기타간토(北関東)를 관리하였으나, 모토우지 급서 후인 쇼헤이 23년/오안 원년(1368년) 무사시 헤이잇키의 난을 진압하면서 미나미칸토(南関東)의 가마쿠라 구보의 직할령까지도 관할하에 두게 된다. 오에이 6년(1399년) 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미쓰의 도발로 인해 오우치 요시히로가 거병하였을 때(오에이의 난) 간토간레이 우에스기 노리사다가 요시히로에 호응하여 거병하려던 3대 가마쿠라 구보 아시카가 미쓰카네를 말렸다. 이후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집안(山内上杉家)과 이누가케 우에스기 집안(犬懸上杉家)이 간토간레이 직책을 점거하게 되고, 오에이 23년(1416년) 이누가케 우에스기 집안으로 옛 간토간레이 우에스기 젠슈(우에스기 젠슈의 난)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하고 이누가케 우에스기 집안이 멸망하면서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집안이 간토간레이를 세습하기에 이른다.
2. 3.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의 세습
1362년 아시카가 모토우지의 요청으로 우에스기 노리아키가 복직하고, 1367년 모토우지가 급사하자 어린 아시카가 우지미쓰가 가마쿠라 구보를 이어받아 노리아키가 그 후견이 되면서 간토간레이(関東管領)라 불리게 되었다.[9]노리아키는 당초 기타간토(北関東)를 관리하였으나, 1368년 무사시 헤이잇키의 난을 진압하면서 미나미간토(南関東)의 가마쿠라 구보 직할령까지도 관할하게 되었다. 1399년 오에이의 난에서는 간토간레이 우에스기 노리사다가 오우치 요시히로에 호응하려던 아시카가 미쓰카네를 말렸다. 이후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와 이누가케 우에스기 가가 간토간레이 직을 점거하게 되었고, 1416년 우에스기 젠슈의 난으로 이누가케 우에스기 가가 멸망하면서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가 간토간레이를 세습하게 되었다.
2. 4. 가마쿠라 구보와의 대립과 간토 간레이의 쇠퇴
간노의 소란 직전인 쇼헤이(正平) 4년/조와(貞和) 5년(1349년), 무로마치 막부 초대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아들 요시아키라가 교토로 불려가고, 아시카가 모토우지가 가마쿠라 구보로 임명되어 파견되면서 어린 모토우지를 보좌하기 위한 간토 집사가 설치되었다. 간토 집사는 초기에는 시바 씨(斯波氏) ・ 하타케야마 씨(畠山氏)가 취임하였으나 차츰 우에스기 씨(上杉氏)가 거의 독점하게 되었고, 최종적으로 우에스기 씨가 세습하게 되었다.우에스기 노리아키는 간노의 소란으로 실각하여 에치고로 은퇴하였다가, 쇼헤이 17년/조지(貞治) 원년(1362년) 모토우지의 청으로 복직하였다. 쇼헤이 22년/조지 6년(1367년) 모토우지가 급서하자 아시카가 우지미쓰가 가마쿠라 구보를 이어받고 노리아키가 후견이 되면서 간토간레이(関東管領)라 불리게 되었다.[9]
노리아키는 당초 기타간토(北関東)를 관리하였으나, 모토우지 급서 후인 쇼헤이 23년/오안 원년(1368년) 무사시 헤이잇키의 난을 진압하면서 미나미칸토(南関東)의 가마쿠라 구보 직할령까지도 관할하게 되었다. 오에이 6년(1399년) 오우치 요시히로가 오에이의 난을 일으켰을 때, 간토간레이 우에스기 노리사다는 요시히로에 호응하려던 아시카가 미쓰카네를 말렸다. 이후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와 이누카케 우에스기 가가 간토간레이 직을 점거하게 되었으나, 오에이 23년(1416년) 우에스기 젠슈의 난으로 이누가케 우에스기 집안이 멸망하면서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집안이 간토간레이를 세습하게 되었다.
간토간레이는 주로 지배지역의 슈고 및 지토(地頭) 관리를 맡았으며, 무사시 슈고(武蔵守護)도 겸임하며 간토 일원의 무사들을 장악하고 차츰 가마쿠라 구보 이상의 힘을 지니게 되어 가마쿠라 구보와 대립하기에 이르렀다.
에이쿄 10년(1438년) 아시카가 모치우지가 아시카가 요시노리와 대립하였고, 간토간레이 우에스기 노리자네는 모치우지를 말렸으나 암살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아 간토간레이 직을 사임하고 우에노로 달아났다. 모치우지가 노리자네 추토를 위해 거병하자 노리자네는 무사시 후추(武蔵府中)에 진을 치고 막부와 연합하여 모치우지를 자결시키고 가마쿠라후를 멸망시켰다(에이쿄의 난). 노리자네는 일단 관직에서 물러나 출가하였으나 에이쿄 12년(1440년) 유키 전투 발발 후 복직하였다.
분안 6년/호토쿠 원년(1449년) 나리우지가 제5대 가마쿠라 구보가 되어 가마쿠라후를 재흥시켰으나, 교토쿠 3년(1454년) 나리우지가 간토간레이 우에스기 노리타다를 암살했다. 교토쿠 4년(1455년) 나리우지는 이마가와 노리타다에 의해 가마쿠라에서 쫓겨났지만, 고가를 거점으로 고가 구보(古河公方)라 자처하였다(교토쿠의 난).
이 사이,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가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집안에 맞설 세력을 쌓고, 조쿄(長享) 원년(1487년) 우에스기 아키사다가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토벌을 개시한다(조쿄의 난). 전란은 18년 동안 이어져 아키사다의 승리로 끝났지만, 간토 지역은 황폐화되었고, 이세 소즈이를 간토로 불러들여 고호조 씨(後北条氏) 대두의 계기를 만들고 만다.
16세기에 들어 고호조 씨는 간토 중심부로 세력을 넓혀 나갔고,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집안은 두 번에 걸친 가독 계승 싸움으로 그 세력이 후퇴해갔다. 덴분(天文) 15년(1546년) 가와고에 성 전투에서 호조 우지야스에게 패배하여 고가 구보와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집안은 큰 타격을 입었으며,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집안은 멸망한다.
그 뒤 우에스기 노리마사는 히라이 성을 잃고 에치고로 향했고, 에이로쿠 4년(1561년) 나가오 가게토라에게 간토간레이 직을 양도하였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간토간레이 자리는 이미 기능하지 않았고, 덴쇼 6년(1578년) 겐신이 사망함으로써 명목상으로도 종언을 고한다.
2. 5. 호리고에 구보와 간토 집사
간노의 소란 직전인 쇼헤이(正平) 4년/조와(貞和) 5년(1349년), 무로마치 막부의 초대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아들 요시아키라가 가마쿠라에서 교토로 불려가고, 차남 가메와카마루(훗날의 아시카가 모토우지)가 간토 통치를 위해 가마쿠라 구보로 임명되어 파견되었다. 이를 계기로 어린 모토우지를 보좌하기 위한 집사가 설치되었는데, 교토에도 쇼군을 보좌하는 집사(훗날의 간레이)가 있었기에 이와 구별하여 「간토 집사」로 불렀다. 당초에는 2인 지도 체제로 우에스기 노리아키 ・ 시바 이에나가 , 다음으로 고노 모로후유 ・ 하타케야마 구니키요 등이 임명되었다. 간토 집사는 초기에는 시바 씨 ・ 하타케야마 씨가 취임하였으나 차츰 우에스기 씨가 거의 독점하게 되었고, 최종적으로는 우에스기 씨가 아예 세습하게 된다. 우에스기 씨는 고즈케 국 ・ 이즈 국의 슈고(守護)도 맡았다.다다요시 지지파였던 우에스기 노리아키가 간노의 소란으로 실각하여 에치고로 은퇴했지만, 쇼헤이 17년/조지(貞治) 원년(1362년) 모토우지의 청원으로 복직하고, 쇼헤이 22년/조지 6년(1367년) 모토우지가 급서하자 나이 어린 아시카가 우지미쓰가 가마쿠라 구보를 이어받아 노리아키가 그 후견이 되었고, 이후 간토간레이(関東管領)라 불리게 되었다.[9]
간토 집사 목록은 다음과 같다.
이름 | 재임 기간 |
---|---|
시바 이에나가 | 1336년 - 1337년 |
우에스기 노리아키 | 1338년 |
고노 모로후유 | 1339년 - 1344년 |
우에스기 노리아키 | 1340년 - 1351년 (재임) |
고 시게모치 | 1344년 - 1349년 |
고노 모로후유 | 1350년 - 1351년 (재임) |
하타케야마 구니키요 | 1353년 - 1361년 |
고노 모리유 | 1362년 - 1363년 |
우에스기 노리아키 | 1362년 (세 번째 재임) |
우에스기 사콘 쇼겐 | 1363년 |
우에스기 노리아키 | 1366년 - 1368년 (네 번째) |
우에스기 노리아사 | 1457년 - 1461년 |
시부카와 요시미 | 1457년 - 1466년 이전 |
우에스기 마사노리 | 1461년 - 1487년경 |
2. 6. 간토 간레이 직의 소멸
간노의 소란 직전인 쇼헤이(正平) 4년/조와(貞和) 5년(1349년)부터 덴쇼(天正) 6년(1578년)까지 존속했던 간토간레이 직은 여러 사건과 가문의 변화를 겪으며 소멸했다.아시카가 모토우지 사후, 우에스기 노리아키는 무사시 헤이잇키(武蔵平一揆)의 난을 진압하면서 가마쿠라 구보의 직할령까지 관할하게 되었다. 오에이(応永) 6년(1399년) 오에이의 난에서는 간토간레이 우에스기 노리사다(上杉憲定)가 아시카가 미쓰카네(足利満兼)를 간언했다. 이후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山内上杉家)와 이누가케 우에스기 가(犬懸上杉家)가 간토간레이 직을 점거했고, 오에이(応永) 23년(1416년) 우에스기 젠슈의 난 이후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가 세습하게 되었다.
간토간레이는 지배 지역 슈고와 지토(地頭)를 관리하고, 무사시 슈고를 겸임하며 가마쿠라 구보와 대립했다. 에이쿄(永享) 10년(1438년) 에이쿄의 난으로 가마쿠라부가 멸망했지만, 분안(文安) 6년/호토쿠(宝徳) 원년(1449년) 아시카가 시게우지(成氏)가 제5대 가마쿠라 구보가 되면서 갈등이 재발했다. 교토쿠(享徳) 3년(1454년) 우에스기 노리타다(上杉憲忠) 암살 후, 교토쿠의 난이 발발했고, 고가 구보(古河公方)와 간토간레이의 화해는 28년 후에 성립되었다.
조쿄(長享) 원년(1487년) 조쿄의 난은 18년간 이어졌고, 고호조 씨(後北条氏) 대두의 계기가 되었다. 16세기 고호조 씨는 간토 중심부로 세력을 확장했고, 덴분(天文) 15년(1546년) 가와고에 성 전투(河越城の戦い)에서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憲政) 연합군이 패배했다. 노리마사는 에이로쿠(永禄) 4년(1561년) 우에스기 겐신(上杉輝虎)에게 간토간레이 직을 양도했으나, 덴쇼(天正) 6년(1578년) 겐신 사망으로 명목상으로도 종언을 고했다.
3. 간토 간레이의 직무
간토 간레이는 가마쿠라 구보를 보좌하고 간토 지역의 정무를 총괄하는 직책이었다. 주요 직무는 다음과 같다.
- 가마쿠라 구보의 명령서(미교쇼)에 대한 봉서(奉書) 및 시행장(施行状) 발급
- 무로마치 막부의 명령을 가마쿠라부 및 관할 지역에 전달
- 가마쿠라부의 소무사타(所務沙汰) 처리 및 봉행인(奉行人) 선정
이 외에도, 에이와(永和) 연간 이후에는 무사시 국의 슈고직도 겸임했다. 그러나 가마쿠라 구보와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간토 간레이의 직무는 점차 마비되었다.[10]
무로마치 쇼군과 가마쿠라 구보 양측이 임명권을 가졌던 시기에는 간토 간레이의 입장이 매우 복잡했다. 우에스기 노리하루처럼 양측 사이에서 갈등하다 자결하는 경우도 있었다.[12] 우에스기 젠슈의 난 이후, 야마우치 우에스기 가가 간토 간레이 직을 세습하면서 문제는 더 복잡해졌다. 에치고 국 지역의 영지 관리에 대해 무로마치 막부와 가마쿠라 구보가 서로 다른 주장을 펼치며 갈등이 발생했고, 이는 에이쿄의 난의 한 원인이 되기도 했다.
15세기 후반, 우에스기 노리타다가 덴노의 윤지로 간토 간레이에 임명된 이후, '간토 간레이'는 실질적인 관직과 같은 사회적 지위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우에스기 아키사다, 노리후사, 노리마사 등은 정식 임관이나 관직명을 사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11]
4. 간토 간레이의 분파
일본 학계에서는 간토 지방에서의 센고쿠 시대사 연구가 진전되면서, 교토쿠의 난 이후 가마쿠라부의 분열 상황 속에서 간토 간레이 또는 그와 같은 의미의 직책명을 자칭하는 움직임이 있었음이 알려졌다.
에치고 나가오 씨와 사가미 호조 씨 사이의 엣쇼 동맹 교섭이 본격화되는 1569년(에이로쿠 12년) 무렵, 호조 우지야스가 작성했다는 『호조 우지야스 조서』에는 호조 우지쓰나가 고쿠후다이 전투에서 고유미 구보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격파한 공으로 고가 구보 아시카가 하루우지에게서 간레이 관직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본래 가마쿠라 구보 및 고가 구보에게는 간토 간레이 임명권이 없었다. 다만, 우지쓰나의 후처가 무로마치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 부인의 언니였기에, 쇼군과 무관하게 임명이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13]
4. 1. 고호조 씨의 간토 간레이 자칭
에이로쿠 12년(1569년) 무렵 호조 우지야스가 작성했다고 알려진 『호조 우지야스 조서』(이하 조서)에는 호조 우지쓰나가 고가 구보 아시카가 하루우지의 명을 받아 고유미 구보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쳐서 "훈공에 의하여 간레이(官領) 관직을 받았다"고 쓰여 있다. 이는 고쿠후다이 전투에서의 전공으로 고호조 씨가 고가 구보로부터 간토칸레이로 임명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13]조서는 이후 고호조 씨가 아시카가 요시우지를 고가 구보로 옹립한 것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우에스기 노리마사 및 그의 후계자인 우에스기 겐신의 간토칸레이로서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입장을 보인다.
우에스기 입장에서 보면 아시카가 요시우지의 고가 구보 취임은 고호조 씨가 간토칸레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기에 용인할 수 없었고, 대신 간토칸레이인 우에스기 씨가 옹립한 고가 구보가 필요했으며 그것이 아시카가 후지우지였다. 고호조 씨 간토칸레이론은 이후 엣소 동맹이 성립하고, 고가 구보 아시카가 요시우지와 간토칸레이 우에스기 겐신이 상호 승인하면서 소멸한 것으로 여겨진다.[13]
아와 국의 사토미 씨도 간토칸레이를 자칭한 흔적이 있다. 사토미 씨가 후원하던 쓰루가야 하치만구 및 나고지에 봉납된 동찰(棟札)에는 고가 구보가 "진주후쇼군 미나모토노 아손", 사토미 도슈를 "후슈(副帥) 미나모토 ○○(도슈 이름)"로 기록하고 있다. 1529년에 사토미 요시토요가 나고지에 봉납된 동찰이 주목할 만하다. 교쿠인 에이요와의 기록에서 간토칸레이 우에스기 씨를 "간토후겐슈"(関東副元帥)라고 쓰고 있는데, 사토미 씨가 칭한 "(간토)후슈"는 간토칸레이의 다른 이름인 "간토후겐슈"와 동일한 것이었고, 사토미 씨도 간토후슈(関東副帥)=간토칸레이를 자칭했을 가능성이 높다.[14]
4. 2. 사토미 씨의 간토 간레이 자칭
교토쿠의 난에서 우에스기 씨와 대립하고, 이후 센고쿠 시대에는 고호조 씨와 대립했던 아와 국(安房国)의 사토미 씨도 간토 간레이를 자칭한 흔적이 확인된다. 사토미 씨가 후원하던 쓰루타니 하치만구 및 그 벳토지(別当寺)였던 나고지(那古寺)에 봉납된 동찰(棟札)에는, 고가 구보를 "진주후쇼군 미나모토노 아손"(鎮守府将軍源朝臣), 사토미 도슈를 "후슈(副帥) 미나모토(源) ○○(도슈 이름)"로 기록하고 있다.[14]현재 알려진 동찰은 일곱 통이지만, 특히 주목되는 것은 1529년 "후슈" 미나모토노 요시토요(사토미 요시토요)가 나고지에 봉납한 동찰이다. 요시토요와 선승 교쿠인 에이요의 친분은 『교쿠인 화상 어록』(도쿄 대학 사료편찬소 소장)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 책에는 간토 간레이 우에스기 씨를 "간토후겐슈"(関東副元師, 師는 帥의 오기)라고 칭하고 있다. 따라서 사토미 씨의 "(간토)후슈"는 간토 간레이의 별칭인 "간토후겐슈"와 동일하며, 사토미 씨 역시 간토후슈(関東副帥)=간토 간레이를 자칭했을 가능성이 높다.[14]
5. 다키가와 가즈마스의 간토 간레이 설
1582년 3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오다 씨(織田氏) ・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의 도쿠가와 씨(徳川氏) 연합군이 가이 다케다 씨(甲斐武田氏)를 침공하여 멸망시켰다. 노부나가는 다케다의 옛 영지를 분할해 가신들에게 다스리게 했는데, 가신 다키가와 가즈마스(滝川一益)는 우에노 국(上野国) 일대와 인접한 시나노의 고아가타 군(小県郡) ・ 사쿠 군(佐久郡)을 받아 「간토 오토리쓰기 역」(関東御取次役)을 맡았다.[2] 『호조고다이키』(北条五代記)나 『간파치슈고덴로쿠』(関八州古戦録) 같은 후대의 군키모노(軍記物)에는 이 가즈마스의 지위를 「간토간레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간토간레이」는 무로마치 막부 체제하의 조직이므로 가즈마스가 간토간레이였다는 것을 기록한 동시대 사료가 없어 이를 의문시하는 설도 있다.[3]
6. 가마쿠라 구보와의 혼동
초대 가마쿠라 공방인 아시카가 모토우지와 그 자손을 간토 간레이라 불렀고, 우에스기 씨를 간토 간레이라 칭한 것은 에이쿄의 난 이후의 일이라는 설이 있으나, 이는 오류로 여겨진다.[15][16] (가마쿠라 공방#명칭에 대해 항목 참조).
참조
[1]
서적
室町幕府管領施行システムの研究
思文閣出版
[2]
문서
[3]
저널
山内上杉氏における官途と関東管領職の問題
[4]
서적
鎌倉府体制と東国
吉川弘文館
[5]
인용
北条氏康とその時代
戒光祥出版
2021-07
[6]
인용
日本中世の政治と社会
吉川弘文館
[7]
서적
鎌倉市史
吉川弘文館
1959
[8]
저널
関東管領
吉川弘文館
1983-02
[9]
서적
室町幕府管領施行システムの研究
思文閣出版
[10]
문서
[11]
저널
山内上杉氏における官途と関東管領職の問題
[12]
서적
鎌倉府体制と東国
吉川弘文館
[13]
인용
北条氏康とその時代
戒光祥出版
2021-0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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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本中世の政治と社会
吉川弘文館
[15]
서적
鎌倉市史
吉川弘文館
1959
[16]
저널
関東管領
吉川弘文館
198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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