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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예빈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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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홍콩 예빈부는 1851년 찰스 세인트 조지 클리벌리에 의해 설계되어 4년간 건축되었으며, 4대 홍콩 총독 존 보링이 처음 거주했고 마지막 홍콩 총독 크리스 패튼이 마지막으로 거주했다. 1855년부터 1930년까지 홍콩 입법회가 사용했고, 1891년부터는 무도회장으로도 사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의 홍콩 점령 기간 동안 일본식과 네오르네상스 양식이 절충된 형태로 개축되었으며, 1945년 일본 항복 문서가 이곳에서 조인되었다. 홍콩 반환 이후 의식 리셉션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2대 홍콩 행정장관 도날드 창은 2006년 대규모 개축 후 이곳에서 지냈다. 홍콩 예빈부는 외부 아트 데코 양식, 정원, 내부 무도회장, 식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매년 봄을 포함하여 대중에게 개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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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예빈부
기본 정보
홍콩 정부 청사
홍콩 정부 청사
원어 이름香港禮賓府 (광둥어: Hoeng¹ gong² lai⁵ bin¹ fu²)
이전 이름독헌부 (Duk1 hin3 fu2)
홍콩 총독부 (Hoeng1 Gong2 zung2 duk1 fu2)
항독부 (Gong2 duk1 fu2)
위치홍콩 섬 중환
좌표22°16′43.19″N 114°09′26.70″E
면적24,000 제곱미터 (약 5.9 에이커)
스타일식민지 르네상스 및 혼합 제관 양식
건축가찰스 세인트 조지 클레벌리
의뢰인홍콩 정부
소유주홍콩 정부
현재 거주자리자차오, 홍콩 특별행정구 행정장관
역사
착공 날짜1851년
완공 날짜1855년
개조 날짜1944년
개조 건축가후지무라 세이이치
개조 회사시미즈 건설
기타
별칭홍콩 예빈부

2. 역사

홍콩 예빈부는 찰스 세인트 조지 클레버리가 설계하여 1851년에 착공, 1855년에 완공되었다. 존 보링 제4대 홍콩 총독이 처음 입주했고, 크리스 패튼 마지막 홍콩 총독이 마지막으로 거주했다.

1855년부터 1930년까지 홍콩 입법회 건물로, 1891년부터는 무도회장으로도 사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일본 점령기에는 후지무라 세이이치에 의해 일본식과 네오르네상스 양식이 혼합된 형태로 개조되었으나, 1945년 일본 항복 후 일본식 요소는 제거되었다.

1947년부터 1992년까지 사자 돌조각상(1947년~1957년), 콩팥 모양 웅덩이(1971년~1982년), 분수(1982년~1986년), 퍼걸러(1987년~1992년) 등이 추가되거나 변경되었다. 1995년에는 고대 유물 및 기념물 조례에 따라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홍콩 반환 이후에는 의식 리셉션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초대 행정장관 퉁치화는 그렌빌 하우스에 머물렀다. 2대 행정장관 도날드 창은 2006년 대규모 개축 후 거주했다. 2005년부터 2022년까지는 야외 물고기 연못 추가(2005년~2012년), 조경 변경(2017년), 개축(2022년) 등이 이루어졌다.

2. 1. 건설과 초기 역사 (1851년 ~ 1941년)

홍콩 예빈부와 공원 (1860–1880년 촬영)


1868년의 홍콩 예빈부


홍콩 예빈부는 찰스 세인트 조지 클레버리가 설계했으며, 1851년에 착공하여 4년 뒤인 1855년에 완공되었다.[5] 제4대 총독 존 보링이 처음으로 입주했다. 1855년부터 1930년대까지 홍콩 입법회가 이 건물을 사용했으며, 1891년부터는 무도회장으로도 활용되었다.

일본 점령 시기(1941년~1945년)에는 일본 군정 총독이 사용하였다. 1944년에는 후지무라 세이이치에 의해 일본식과 네오르네상스 양식이 절충된 형태로 개조되었는데, 주로 탑과 지붕 부분에 일본식 요소가 추가되었다.

1945년 9월 16일, 일본 측 항복 문서가 홍콩 예빈부에서 조인되었다.[1] 1946년에는 일본식 부속 건물이 철거되었지만, 탑은 현재까지 남아있다.

2. 2. 일본 점령기 (1941년 ~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일본의 홍콩 점령(1941년~1945년) 기간 동안, 홍콩 예빈부는 1944년 후지무라 세이이치(藤村正一)에 의해 네오르네상스 양식과 일본식이 섞인 형태로 개축되었는데, 주로 탑과 지붕 부분에 몇몇 요소들이 추가되었다.[1]

1945년 9월 16일, 일본 측 항복 문서가 홍콩 예빈부에서 조인되었다.[1]

1946년 일본식 건물 요소는 제거되었지만 탑 부분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1]

2. 3. 영국 통치 재개와 변화 (1945년 ~ 1997년)

1945년 9월 16일, 일본 측 항복 문서가 홍콩 예빈부에서 조인되었다.[1]

일본 양식 부분은 1946년에 없어졌지만 탑 부분은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1947년부터 1957년까지 입구에 사자 돌조각상 2개가 세워졌다.[1]

1971년부터 1982년까지 정원콩팥 모양 웅덩이가 세워졌다.[1]

1982년부터 1986년까지 분수가 있는 장식용 웅덩이가 조성됐다.[1]

1987년부터 1992년까지 저층 테라스에 작은 퍼걸러가 세워졌고, 주요 정원 계단의 인공 연못은 인상적인 화분으로 바뀌었다.[1]

홍콩 반환 이후, 홍콩예빈관은 의식 리셉션 장소가 되었다. 초대 홍콩 행정장관 퉁치화는 홍콩예빈관 대신 그렌빌 하우스에서 지냈다.[1] 1997년부터 2005년까지 베란다에 분재 갤러리가 세워졌다.[1]

2대 홍콩 행정장관 도날드 창은 2006년 1월 대규모 개축 이후 홍콩예빈부에서 지냈다. 더 스탠더드는 퉁치화가 수집한 비단잉어를 수용하기 위해 설계된 새로운 물고기 연못에 30만홍콩 달러가 투입된 것을 합하여 홍콩예빈부 개축 비용이 1450만홍콩 달러로 추산된 것을 비판했다.[1]

2005년부터 2012년까지 뒤뜰에 야외 물고기 연못이 추가됐다.[1]

2. 4. 홍콩 반환 이후 (1997년 ~ 현재)

홍콩 반환 이후 홍콩예빈부는 의식 리셉션 장소가 되었다. 초대 홍콩 행정장관 퉁치화는 홍콩예빈부 대신 그렌빌 하우스에 머물렀다. 1997년부터 2005년까지 베란다에 분재 갤러리가 설치되었다.

2대 홍콩 행정장관 도날드 창은 2006년 1월 대규모 개축 이후 홍콩예빈부에 거주했다. 더 스탠더드는 퉁치화가 수집한 비단잉어를 수용하기 위해 설계된 새로운 물고기 연못에 30만홍콩 달러가 투입된 것을 포함하여 홍콩예빈부 개축 비용이 1450만홍콩 달러로 추산된다고 비판했다.[1]

2005년부터 2012년까지 뒤뜰에 야외 물고기 연못이 추가되었다.

2017년에는 테니스장 중 하나가 조경 구역으로 변경되었다.

2022년 존 리가 이주하기 전 홍콩예빈부 개축에 280만홍콩 달러가 투입되었다.[2]

3. 주요 특징

1842년 남경 조약으로 홍콩 섬이 영국령이 되면서, 1855년에 빅토리아 항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홍콩 총독 관저가 완공되었다. 제4대 총독 존 보링이 처음 입주하였고, 이후 역대 총독들이 관저를 지속적으로 정비하였다. 1891년에는 동쪽에 연회장과 식당 등을 갖춘 별관을 증축했다.[5]

일본 점령 시기 홍콩(1941~1945년) 동안에는 일본인 총독이 파견되었지만, 2년에 걸친 개축 공사로 인해 실제 입주 기간은 짧았다. 개축 결과,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제관 양식 지붕으로 변경되었고, 본관과 별관 사이에 감시탑이 증축되었다. 또한 다실 등의 다다미방이 만들어지고 일본 가구가 다수 비치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영국인 총독이 복귀하면서 일본식 내장은 철거되었지만, 외관은 비용 문제로 방치되었다. 이후 베란다 증축, 난로 및 냉난방 시설 설치 등이 이루어졌다.

1997년 홍콩 반환 이후 홍콩 정부가 소유하게 되었으나, 초대 행정 장관 둥젠화는 자택 출퇴근을 선호하여 입주하지 않았다. 제2대 장관 쩡인취안이 전기 통신 및 보안 설비를 일신하는 등 개수 공사를 실시하고 관저에 입주했다. 한동안 구 총독부라고 불렸지만, 공식 명칭은 중국적인 "예빈부(礼賓府)"로 결정되었다.

이후 테니스 코트 철거, 정원 확장, 잉어 연못 신설 등의 정비가 이루어졌다. 예빈부라는 명칭처럼 국내외 요인 접대, 훈장 수여식 등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관저는 1년에 몇 차례 일반에 공개되며, 관저 주변에서는 종종 시위 등의 정치 활동이 벌어져 경비가 삼엄하다.

3. 1. 외부

홍콩 예빈부 정문은 남쪽으로 빅토리아 피크를 향해 나 있다.[1] 화강암 틀로 된 정면 주차장이 눈에 띄는 부분이다.[2]

홍콩 예빈부 외관은 아트 데코 양식으로 회반죽 되어 있다. 홍콩 예빈부는 한 세기 넘게 덧붙여져 온 다양한 건축 양식들과 더불어 독특한 특성과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3]

3. 2. 정원

홍콩 예빈부 정면에는 잔디가 있고, 뒤뜰에는 화려한 꽃들이 있다. 1919년에 심어진 진달래는 색이 다양하며 에 핀다. 희귀종 나무인 Brownea grandiceps도 있다.

정원에는 콩팥 모양 수영장과 야외 물고기 연못도 있다.[5]

3. 3. 내부

무도회장은 국내외 인사들을 위한 연회에 사용된다.[5] 식당은 국내외 인사들을 위한 소규모 연회에 사용된다.[5] 거실은 손님 접대 및 회의 주재에 사용되며, 천장은 화려한 석고 쇠시리로 장식됐다.[5] 연회장은 국내외 귀빈을 위한 만찬, 훈장 및 시상식, 다양한 지역 사회 참여 활동의 장소로 사용된다.

3. 4. 관리인 주택 (Gate Lodges)

어퍼 앨버트 로드(Upper Albert Road)의 정문에는 철문이 있는 두 채의 건물, 즉 게이트 로지(Gate Lodges)가 있다. 1855년에 지어진 이 건물들은 홍콩 예빈부에서 가장 오래된 구조물이다.[1] 이 건물들은 1850년대에 초대 홍콩 예빈부 건설을 담당했던 측량관 찰스 세인트 조지 클리버리(Charles St. George Cleverly)가 설계했다.[1] 로지에는 한때 홍콩 총독을 보호하며 저택 앞에 서 있던 홍콩 예빈부 근위대가 주둔했다.[1] 홍콩에 주둔한 영국 육군의 다양한 부대가 경비 부대로 사용되었다.[1]

  • 1962~63년 퀸스 로열 서리 연대 제1 대대[1]
  • 에든버러 공작 로열 연대 버크셔 및 윌트셔 제1 대대 C중대[1]


1997년 홍콩 반환 이후, 홍콩 경찰 소속 경찰관들이 이 건물을 경비하고 있다.[1]

4. 개방

홍콩 예빈부는 매년 대중에게 두 번 개방되는데, 그 중 한 번은 에 개방되어 진달래를 볼 수 있도록 한다. 방문객들은 대개 거실, 식당, 무도회장을 지날 수 있다.[5] 개방일은 대개 주말이며, 1주일 전에 언론 보도를 통해 발표된다. 입장료는 없다.

식당

5. 기타

1900년 빅토리아 피크에 총독의 여름 별장으로 마운틴 로지가 지어졌으며, 1934년까지 사용되었다. 1946년까지 건물이 존속했지만, 현재는 게이트 로지와 빅토리아 피크 가든만 남아 있다. 1980년 정부 청사 입구 앞 작은 화단에 과거 마운틴 로지를 표시하는 세 개의 "총독 관저" 표지석 중 하나가 세워졌다.

1934년부터 신계에 있는 판링 로지가 총독의 여름 별장으로 사용되었고, 현재는 홍콩 행정장관의 대체 관저로 주말과 공휴일에 주로 사용되고 있다.

예빈부에는 20개의 하우스키핑 직책이 있으며[2], 수석 셰프는 월 30000HKD를 받는다.[2]

5. 1. 풍수

둥젠화가 행정장관이 된 후 홍콩 예빈부에서 거주하거나 업무를 보지 않은 이유에 대해, 《뉴욕 타임스》는 좋지 않은 풍수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둥젠화는 행정장관 재임 기간 동안 홍콩 시민들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았으며, 사임 당시 그의 지지율은 40%를 훨씬 밑돌았다.[3]

《스탠다드》는 둥젠화가 예빈부를 멀리한 이유가 정치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즉, 홍콩에 대한 오랜 영국의 유산을 줄이려는 미묘한 노력이었다는 것이다. 다른 출처에서는 "그를 겁먹게 한 것은 [총독 관저 전체에 설치된] 도청 장치에 대한 경고였다"고 언급한다.[4]

5. 2. 다른 관저

1900년, 빅토리아 피크에 있는 마운틴 로지는 총독의 여름 별장으로 지어졌으며, 1934년까지 그 역할을 유지했다. 건물은 1946년까지 존속했지만, 현재는 게이트 로지와 빅토리아 피크 가든만 남아 있다. 과거 마운틴 로지를 표시하는 세 개의 "총독 관저" 표지석 중 하나가 1980년 정부 청사 입구 앞 작은 화단에 세워졌다.

1934년부터 신계에 있는 판링 로지가 총독의 여름 별장으로 사용되었다. 이 역할은 지금까지 이어져 현재 홍콩 행정장관의 대체 관저로 사용되고 있다. 로지는 주로 주말과 공휴일에 사용된다.

5. 3. 직원

예빈부에는 20개의 하우스키핑 직책이 있다.[2] 수석 셰프는 월 30000HKD를 받는다.[2]

참조

[1] 웹사이트 Tsang fends off renovation criticism http://www.thestanda[...] 2007-03-19
[2] 웹사이트 Lee finally makes move after $2.8m works https://www.thestand[...] 2022-11-15
[3] 뉴스 3 Things Matter: Location, Location and Feng Shui https://www.nytimes.[...] 2007-03-19
[4] 웹사이트 Spy-bugs find to stall Tsang http://www.thestanda[...] 2007-03-19
[5] 웹사이트 Government House, Hong Kong https://www.gpsmycit[...] 2023-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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