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옹주 (영조)
1. 개요
화순옹주는 조선 영조의 둘째 딸로, 1720년에 태어나 1758년에 사망했다. 1732년 김한신과 혼인하여 1734년 출합하였으며, 남편 김한신의 죽음을 슬퍼하며 곡기를 끊고 13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옹주의 죽음을 슬퍼했으나, 옹주의 행위가 효에 어긋난다며 열녀 정려를 거절했다. 이후 정조 때 열녀로 봉해졌으며, 현재 남편과 합장되어 있고, 예산 화순옹주 홍문이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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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진종 -
정조
정조는 조선의 제22대 왕으로, 탕평책 계승, 규장각 설치, 장용영 설치, 신해통공 실시, 수원 화성 건설 등 다양한 개혁을 추진했으며, 47세에 사망하여 건릉에 안장되었다. -
조선 진종 -
효순왕후
효순왕후는 영조의 며느리이자 진종으로 추존된 효장세자의 왕비로, 어린 나이에 결혼했으나 남편의 요절로 과부가 되었고, 현빈으로 책봉되어 영조의 총애를 받다 35세에 사망 후 왕후로 추봉, 소황후로 추숭되었다. -
굶어 자살한 사람 -
사와라 친왕
사와라 친왕은 나라 시대의 황족이자 간무 천황의 동생으로, 후지와라노 타네츠구 암살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 중 사망 후 스도 천황으로 추존되었으며, 그의 죽음은 미스터리로 남아 원령 숭배의 대상이 되었다. -
굶어 자살한 사람 -
즉신성불
즉신성불은 일본 수험도에서 비롯된 불교 수행법으로, 승려들이 엄격한 식이요법과 고행을 통해 미라 상태로 몸을 만들어 단 한 번의 생애에서 깨달음을 얻고자 했던 수행 방식이다. -
조선 영조의 자녀 -
화완옹주
화완옹주는 영조의 딸이자 소론 가문 정치달의 부인으로, 영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사도세자와의 불화와 양자 정후겸의 정치 활동으로 정조 즉위 후 옹주 칭호를 삭탈당하고 유배를 갔다가 사면 후 파주에서 생을 마감하며 영조, 사도세자, 정조 시대 정치적 갈등과 관련된 삶을 살았다. -
조선 영조의 자녀 -
화유옹주
영조와 귀인 풍양 조씨의 딸인 화유옹주는 1753년 황인점과 혼인 후 정조의 기림을 받았으며, 그녀와 황인점의 묘는 경기도 부천시에 있다.
2. 생애
1720년(숙종 46년), 숙종의 아들인 연잉군(영조)과 첩인 이씨(정빈 이씨)의 둘째 딸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향이(香怡)이다. 언니 화억옹주가 조졸하였기 때문에 장녀로서 자랐다.
1721년(경종 2년), 아버지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면서 어머니 이씨 또한 소훈(昭訓)에 봉작되었다. 같은 해 11월, 어머니를 여의었다.
1725년(영조 1년), 화순옹주(和順翁主)에 봉해졌으며, 1732년(영조 8년) 영의정을 지낸 김흥경(金興慶)의 아들인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과 혼인하였다. 혼인 후 궁에 머물다가 2년후인 1734년(영조 10년) 출합하였다.
1758년(영조 34년) 1월 4일, 남편 김한신이 세상을 떠나자 그 죽음을 슬퍼하며 곡기를 끊었고, 아버지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심을 바꾸지 않아 곡기를 끊은 지 13일 만인 1월 17일 죽음에 이르렀다.
화순옹주가 죽자 영조는 슬퍼하며 옹주의 상(喪)에 왕림하였는데, 이때 예조판서 이익정이 옹주의 절의를 기리고자 정려(旌閭) 할 것을 청하자, 부인으로서의 정절을 지켰다 하더라도 부모에게는 불효하였으므로 도리에 어긋난다며 청을 거절하였다.
정조 대에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기 위하여 그녀를 열녀로 봉하고, 열녀정문을 세웠다.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남편 김한신과 합장되어 있으며 옹주의 열녀정문인 유형문화재 제45호 화순옹주홍문(和順翁主紅門) 또한 이곳에 있다.
2.1. 초기 생애
1720년(숙종 46년), 숙종의 아들인 연잉군(영조)과 첩인 이씨(정빈 이씨)의 둘째 딸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향이(香怡)이다. 언니 화억옹주가 일찍 사망하였기 때문에 장녀로서 자랐다.
1721년(경종 2년), 아버지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면서 어머니 이씨 또한 소훈(昭訓)에 봉작되었다. 같은 해 11월, 어머니를 여의었다.
1725년(영조 1년), 화순옹주(和順翁主)에 봉해졌으며, 1732년(영조 8년) 영의정을 지낸 김흥경(金興慶)의 아들인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과 혼인하였다. 혼인 후 궁에 머물다가 2년후인 1734년(영조 10년) 출합하였다.
2.2. 옹주 시절
1720년(숙종 46년), 숙종의 아들인 연잉군(영조)과 첩인 이씨(정빈 이씨)의 둘째 딸로 태어났으며 이름은 향이(香怡)이다. 언니 화억옹주가 일찍 사망하였기 때문에 장녀로서 자랐다.
1721년(경종 2년), 아버지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면서 어머니 이씨 또한 소훈(昭訓)에 봉작되었다. 같은 해 11월, 어머니를 여의었다.
1725년(영조 1년), 화순옹주(和順翁主)에 봉해졌으며, 1732년(영조 8년) 영의정을 지낸 김흥경(金興慶)의 아들인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과 혼인하였다. 혼인 후 궁에 머물다가 2년후인 1734년(영조 10년) 출합하였다.
1758년(영조 34년) 1월 4일, 남편 김한신이 세상을 떠나자 슬픔에 곡기를 끊었고, 영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13일 만인 1월 17일 죽음에 이르렀다.
화순옹주가 죽자 영조는 슬퍼하며 옹주의 상(喪)에 왕림하였는데, 이때 예조판서 이익정이 옹주의 절의를 기리고자 정려(旌閭) 할 것을 청하였으나, 영조는 부모에게는 불효하였으므로 도리에 어긋난다며 청을 거절하였다.
정조 대에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기 위하여 그녀를 열녀로 봉하고, 열녀정문을 세웠다.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남편 김한신과 합장되어 있으며 옹주의 열녀정문인 유형문화재 제45호 화순옹주홍문(和順翁主紅門) 또한 이곳에 있다.
2.3. 남편의 죽음과 최후
1758년(영조 34년) 1월 4일, 남편 김한신이 세상을 떠나자 그 죽음을 슬퍼하며 곡기를 끊었다. 영조는 이를 만류하였으나, 화순옹주는 결심을 바꾸지 않고 곡기를 끊은 지 13일 만인 1월 17일에 죽음에 이르렀다.
화순옹주가 죽자 영조는 슬퍼하며 옹주의 상(喪)에 왕림하였는데, 이때 예조판서 이익정이 옹주의 절의를 기리고자 정려(旌閭) 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영조는 부인으로서의 정절을 지켰다 하더라도 부모에게는 불효하였으므로 도리에 어긋난다며 청을 거절하였다.
정조 대에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기 위하여 그녀를 열녀로 봉하고, 열녀정문을 세웠다.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 남편 김한신과 합장되어 있으며 옹주의 열녀정문인 유형문화재 제45호 화순옹주홍문(和順翁主紅門) 또한 이곳에 있다.
3. 논란
3.1. 영조의 평가
3.2. 후대의 평가
4. 가족 관계
* 아버지 : 영조(1694~1776)
* 어머니 : 정빈 이씨(1694~1721)
* 언니 : 화억옹주 향염(和憶翁主 香艶, 1717~1718)
* 오빠 : 진종(1719~1728)
* 부마 : 월성위(月城尉) 김한신(1720~1758)
* 양자 : 김이주(金頤柱, ∼1797) - 김한신의 형인 김한정(金漢禎)의 3남
* 며느리 : 해평 윤씨(?~1796) - 윤득화(尹得和)의 딸
손자 : 김노경(1766~1838)
손자부 : 기계 유씨(? ~1801) - 유준주(兪駿柱)의 딸
* 증손자 : 김정희(1786~1856)
손녀 : 경주 김씨 - 홍봉한의 손자 홍최영과 혼인
5. 관련 문화재
* 예산 화순옹주 홍문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5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