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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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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정희는 조선 후기의 문신, 서예가, 화가, 금석학자로, 본관은 경주 김씨이며, 호는 추사(秋史) 또는 완당(阮堂)이다. 1809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관직에 진출하여 규장각 대교, 암행어사 등을 거쳐 성균관 대사성, 병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1840년 제주도로 유배되었으나 학문과 서예를 연마했으며, 이후 북청으로 유배되기도 했다. 그는 북학파의 영향을 받아 실사구시를 중시했으며, 금석학 연구를 통해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의 진위를 밝히는 등 업적을 남겼다. 서예에서는 추사체를 완성했으며, 그림에서는 문인화풍을 추구했다. 저서로 『완당전집』, 『완당문고』 등이 있으며, 《세한도》가 대표작으로 꼽힌다. 김정희는 19세기 후반 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3천 명의 제자를 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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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추사 김정희 선생의 초상화
추사 김정희 선생의 초상화
한글김정희
한자金正喜
로마자 표기Gim Jeonghui
추사(秋史)
완당(阮堂), 보담재(寶覃齋) 등
출생 및 사망
출생1786년
출생지조선 충청도 예산현 입암면 용궁리
사망1856년(향년 70세)
사망지조선 경기도 과천현 동면 주암동리 과지초당
신상 정보
국적조선
직업성리학자, 실학자, 고증학자, 서예가, 화가, 금석학자
종교유교(성리학) → 불교 → 유교(실학)
가족 관계
배우자초배 한산 이씨
계배 예안 이씨
측실 한씨
자녀김상무(양적자)
김상우(서자)
부모김노영(양부)
남양 홍씨 부인(양모)
김노경(생부)
기계 유씨 부인(생모)
친인척김이주(친조부)
김노성(친숙부)
관력
직책조선의 승문원 검교
국왕조선 순조
임기1822년 3월 1일 ~ 1823년 1월 8일
정당노론 벽파 잔존 후예 성향 북학파 세력

2. 생애

1809년(순조 9) 생원시에 합격하고, 1819년 식년시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설서, 예문관검열을 지냈다. 그 뒤 삼사의 언관을 거쳐 효명세자의 사부로 보도하였으며, 1823년 규장각대교가 되었다가 충청우도암행어사로 나갔다. 1836년(헌종 2) 성균관대사성과 병조참판,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가 순조의 배려로 풀려났으나, 헌종 즉위 초 김정희 자신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 1840년(헌종 6)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848년 석방되었다. 1851년(철종 2) 헌종의 묘를 옮기는 문제에 대한 영의정 권돈인의 예론(禮論)으로 예송 논쟁이 벌어지자 이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1853년 풀려났다.

제주도에서의 김정희의 집 (2023)


"추사"라는 자와 "완당"이라는 호를 많이 사용했으나 그밖에 100여 개 넘는 별호를 사용했다. 당색으로는 노론이었지만 벽파나 탕평당에 들지 않고 북학파가 되었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친족이었고, 양어머니 남양 홍씨를 통해 남연군과 이종사촌 간이 된다. 실학자 박제가의 문인으로 연암 박지원의 학통을 계승하였으며, 흥선대원군, 박규수, 효명세자는 그의 문인들이었다.

1819년 문과에 급제하여 규장각 대교, 충청도 암행어사, 승정원 부승지를 거쳐, 1836년 성균관 대사성, 병조 참판을 역임했다.

1840년 윤상도의 옥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으나, 훈고학에서 성리학에 이르는 한송(漢宋)을 겸비한 “실사구시설”을 고수하며, 경학, 금석학, 서예를 갈고 닦았다. 제주도 유배 중에 삼국시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서법을 연구하여 추사체를 완성했다. 추사체는 한국과 중국의 비문에 나타난 필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4] 1844년에는 세한도를 그려 중국에서 귀한 책을 구해다 준 이상적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6]

1852년 북청 유배에서 풀려났으며, 지인과 제자로부터 고대의 석기를 모아오게 하여 한국의 고대 문화를 연구하였다. 12년간의 유배 생활을 마친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서화와 선학(禪學)에만 몰두했다. 안동 김씨 세도 가문이 집권하던 시기라 서용(敍用) 명령은 내려졌으나 현직으로 복귀하지는 못했다.[2]

과지초당(瓜地草堂)이라는 거처를 마련하고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으며, 봉은사에 들어갔다가 그해 10월 과천으로 돌아와 생을 마쳤으며, 죽기 전날까지 집필을 하였다고 한다.[2]

2. 1. 가계와 초기 생애

1786년 충청도 예산현(현 충청남도 예산군)에서 병조판서를 지낸 김노경과 유준주의 딸 기계 유씨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아들이 없던 큰아버지 김노영의 양자가 되어 한성부로 상경하였다. 그의 가문은 멀기는 했으나 왕실의 이중 외척으로 그가 문과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세력가였다.[9]

당색으로는 노론으로 그의 집안은 서인 중진인 김홍욱의 후손이었다. 노론의 당원이 된 뒤에는 고조부 김흥경이 영조 때의 재상이었고, 증조부 김한신영조의 서녀 화순옹주의 부마가 되어 월성위가 되었다. 또한 증조부 김한신과 10촌 형제간인 김한구의 딸은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였다.

그의 집안은 노론 외척 계열이었지만 고조부 김흥경과 증조부 김한신은 당파에 초연했고, 추사 역시 벽파나 탕평당에 들지 않고 북학파에 가담하였다. 7세 때 그는 입춘대길이라 쓴 글을 문앞에 붙여 놓으니 지나가던 채제공이 보고는 김정희에게 장차 명필이 되겠다고 칭찬했다고 한다.[8] 어려서부터 서얼 출신으로 시, 서, 화에 모두 능했던 박제가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박제가를 통해 북학파 박지원의 학문을 계승하였다.

영조의 딸 화순옹주가 출가한 월성위 집안에서 태어난 김정희의 집안에는 대대로 명필이 많았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 기계 유씨가 임신한 지 24개월 만에 출산했다는 전설이 있다.[3]

1809년(순조 9) 생원이 되고, 1819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에 급제하고 세자시강원설서, 예문관검열을 지냈다.

2. 2. 청년기와 학문적 성장

1805년 대왕대비가 승하하고, 그 다음달에는 부인 한산 이씨가 죽었다. 이 무렵 스승 박제가가 유배에서 풀려났다가 집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양어머니도 얼마 뒤 죽었다. 양어머니의 삼년상을 치른 뒤 한 살 아래인 규수와 재혼한다. 이듬해인 1809년(순조 9) 생원시에 장원급제하여 생원이 되고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하였다.[1]

16세 때 북학파의 대가이자 3차례 이상 청나라를 오가며 학문의 폭을 넓히고 있었던 박제가의 제자가 되면서 그로부터 북학파 사상을 배우고 박지원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청나라고증학에도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1] 1809년(순조 9) 24세 때 동지사(冬至使) 겸 사은사(謝恩使)의 일행이 서울을 떠날 때 그도 부사(副使)인 부친 김노경을 따라 자제군관의 직책으로 연행(燕行) 길에 올랐다.[1]

당시 연경의 학자 옹방강과 완원을 만나 이후 학문 활동에 큰 도움을 받게 되었다.[1] 옹방강은 일찍이 〈사고전서〉의 편찬에 관여했으며, 경학(經學)에 정통하고 문장·금석·서화·시에 능한 학계의 원로였다.[1]

당시 청의 학풍은 한나라대의 학문을 숭상하고 송나라, 명나라성리학을 관념적이라며 배척하는 것이었는데, 옹방강은 한나라와 송나라 학문의 절충을 주장하고 있었다.[1] 청나라 중기의 경학의 대가였던 완원은 실사구시설을 비롯한 고증학의 학문적 체계수립에 영향을 주었다.[1] 박지원의 북학사상과 청나라 고증학 사상의 영향을 받은 그는 성리학만이 진리라는 생각은 버리게 되었다.[1]

1810년, 그의 생부가 청나라로 가는 연례 사절단의 부사신으로 임명되자 그는 아버지를 따라가 약 6개월 동안 중국에 머물렀다.[7] 그는 그곳에서 옹방강(1733-1818)과 완원(1764-1849)과 같은 저명한 학자들을 만나 그의 능력을 인정받았다.[7] 그는 특히 그곳에서 사료 연구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7] 완원은 그에게 서예에 관한 책인 "소재필기(蘇齋筆記)"를 선물했고, 김정희는 한국으로 돌아온 후에도 그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7] 귀국 후 한동안 그는 어떤 벼슬에도 나가지 않고 북학을 연구하고 엄격한 주자학을 비판하는 글을 썼다.[7]

그는 또한 고대 비석의 명문을 찾아 연구하였다. 1815년, 초의가 처음으로 서울을 방문하여 김정희를 만났다. 이것이 두 사람의 깊고 오랜 관계의 시작이었다. 아마도 이때부터 김정희가 차를 마시기 시작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7]

1819년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에 급제하고 세자시강원설서, 예문관검열을 지냈다.[1]

2. 3. 관직 생활과 금석학 연구

1809년(순조 9) 생원시에 합격하고, 1819년 식년시 병과(丙科)에 급제하여 세자시강원설서, 예문관검열을 지냈다. 그 뒤 삼사의 언관을 거쳐 효명세자의 사부로써 보도하였으며, 1823년 규장각대교가 되었다가 충청우도암행어사로 나갔다. 그 뒤 의정부의 검상(檢詳), 1836년(헌종 2) 성균관대사성과 병조참판, 이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1830년 생부 김노경이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가 순조의 배려로 풀려났으나, 헌종 즉위 초 김정희 자신도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1840년(헌종 6) 제주도로 유배되었다가 1848년 석방되었다. 1851년(철종 2) 헌종의 묘를 옮기는 문제에 대한 영의정 권돈인의 예론(禮論)으로 예송 논쟁이 벌어지자 이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1853년 풀려났다.

1819년(순조 19) 식년시 병과(丙科)로 합격하여 권지세자시강원, 예조 참의를 거쳐 세자시강원설서로 효명세자를 보필하였고, 예문관검열을 거쳐 삼사의 언관을 두루 역임한 뒤 승문원검교, 1823년 규장각대교, 암행어사 등에까지 올랐다.

그 무렵 친구 조인영의 조카사위이자 19세의 효명세자를 가르치는 세자시강원 보덕을 거쳐 필선이 된다. 하지만 효명세자가 죽고 나자 권력을 잡은 안동 김씨 집안의 김우명이 그를 탄핵하여 파면되었으며, 1830년 아버지 김노경은 윤상도의 옥사에 관련된 혐의로 고금도로 귀양을 가게 된다. 김우명은 비인현감으로 있다가 암행어사로 내려온 김정희에게 파직된 바 있었는데, 이 때문에 김정희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김노경은 순조가 죽던 1834년(순조 34) 순조의 특별 배려로 유배에서 풀려난다.

충청우도암행어사로 나갔다가 의정부의 검상(檢詳)으로 되돌아온 뒤 1835년(헌종 1) 친분이 있던 풍양 조씨가 정권을 잡자 성균관대사성, 이조 참판, 이조판서 등에 이르렀다. 1836년(헌종 2) 성균관대사성과 병조참판을 거쳐 다시 성균관대사성을 역임하고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에 이르렀다.

그는 이전까지 사서육경의 보조 학문으로 존재하였던 금석학(金石學), 사학, 문자학, 음운학, 천산학(天算學), 지리학, 천문학 등의 학문에 대한 포괄적인 연구를 시작하였다. 실생활에 유용한 학문을 연구해야 한다는 박지원박제가의 가르침은 그가 실용적인 학문을 찾아서 연구하게 하는 이념이 되었다.

당시 신라고려 시대의 묘비와 지석 등이 각지에서 발견, 출토되기 시작하면서 문자 해독이 이루어졌고, 금석학은 문자학과 서도사(書道史)의 연구와 더불어 독자적인 학문 분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조선에서 금석문 연구를 "금석학"의 반열에 올려놓은 선구자이다. 김정희는 청나라에서 고증학을 배울 때 금석학도 함께 배웠다. 그는 금석자료를 호고적(好古的) 취미로 대하던 당시까지의 풍조를 비판하고, 중국의 경우를 들어 금석학이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 발전하였음을 주장하였다. 또 경학과 역사학에서 필수 불가결한 보조적인 학문 분야라고 하여 그 효용을 역설하였다.[11] 청나라에서 귀국한 뒤 친구인 김경연, 조인영 등과 함께 비문을 보러 팔도를 답사하기도 했다. 김정희가 남긴 금석학의 가장 큰 업적은 1816년 당시까지 “무학 대사의 비” 또는 “고려 태조의 비”라고 알려져 있던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비문에 적힌 “…眞興太王及衆臣巡狩…”라는 구절을 통해 진흥왕의 순수비라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순수비를 밝혀낸 과정과 그 사실적인 증명은 그가 저술한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에 기록되어 있으며, 《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 등과 같은 저서도 남겼다. 그의 학문 태도를 밝힌 글로서 유명한 〈실사구시설〉은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방법으로 진리를 탐구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는 북학파 학문과 청나라고증학까지 두루 섭렵하였으므로 경학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자제군관으로 연행을 다녀와 과거에 급제한 후에는 관료 생활 틈틈이 금석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또한 문무왕비와 김인문 묘비 등에서 발견한 신라 성한왕이라는 글자에 주목, 경주 김씨의 역대 족보와 비교, 대조하여 성한왕이 김알지 또는 김알지의 아들인 세한과 동일인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또한 소호금천씨와 파경진백, 투후에 대한 단어도 확인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이는 하늘에서 내려온 금궤에서 태어났다는 문중의 시조 설화와 배치되는 것이라 여러 사람의 비판을 받는 원인이 됐다. 그리고 금석문 자료를 찾고 보호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었다. 금석문에 대한 해독, 문자 판독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정리를 바탕으로 후학을 지도하여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시켰다. 그의 금석학을 계승한 학자들로서는 신위, 조인영, 권돈인, 신헌, 조면호(趙冕鎬) 등이 있다.

1810년(순조 10) 아버지 김노경청나라에 동지사 겸 사은사로 사신행을 떠날 때 아버지의 시중을 드는 자제군관으로 따라갔다. 6개월 동안 청나라에 머물면서 청나라 제일의 학자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 등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고증학을 배우게 된다. 완원은 자기가 지은 《소재필기(蘇齋筆記)》를 처음으로 김정희에게 기증까지 하였으며, 김정희가 조선에 돌아온 뒤에도 그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조선에 돌아온 뒤 한동안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때 〈실사구시설〉 등을 발표하여 북학(北學)의 학문적 수준을 높이는 한편 성리학적 관념론을 비판했다.

2. 4. 유배 생활과 추사체 완성

1840년(헌종 6년) 윤상도의 옥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4] 1842년 음력 11월 부인이 세상을 떠났으며, 1848년 음력 12월 6일에 유배에서 풀려났다. 제주도 유배 중에 삼국시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서법을 연구하여 추사체를 완성했다. 추사체는 한국과 중국의 비문에 나타난 필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졌다.[4]

유배 생활 중에도 글과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1844년에는 세한도를 그려 중국에서 귀한 책을 구해다 준 이상적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6]

1851년(철종 2) 헌종의 묘를 옮기는 문제와 관련, 영의정 권돈인의 예론(禮論)으로 예송 논쟁이 벌어지자 이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1853년 풀려났다.[5]

2. 5. 말년과 사후

1848년 석방되었다. 1851년(철종 2) 헌종의 묘를 옮기는 문제에 대한 영의정 권돈인의 예론(禮論)으로 예송 논쟁이 벌어지자 이에 연루되어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되었다가 1853년 풀려났다.[2] 1852년 예순여덟 살 겨울에 북청 유배에서 풀려났으며, 그동안 지인과 제자로부터 고대의 석기를 모아오게 하여 한국의 고대 문화를 연구하였다고 한다. 12년간의 유배 생활을 마친 그는 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과천에 은거하면서 서화와 선학(禪學)에만 몰두했다. 이때는 안동 김씨 세도 가문이 집권하던 시기라 서용(敍用) 명령은 내려졌으나 현직으로 복귀하지는 못했다.[2]

북청에서 돌아온 김정희는 경기도 과천에 과지초당(瓜地草堂)이라는 거처를 마련하고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으며, 일흔한 살 되던 해에 승복을 입고 봉은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해 10월 과천으로 돌아와 생을 마쳤으며, 죽기 전날까지 집필을 하였다고 한다.[2] 작품 중에는 후일 국보 제180호로 지정된 세한도(歲寒圖)와 모질도(耄耋圖), 부작란도(不作蘭圖) 등이 특히 유명하다. 문집으로 완당집, 완당척독 阮堂尺牘, 담연재시고 覃硏齋詩藁 등이 있고 1934년에 간행된 완당선생전집이 있다.[2]

서예가로 명성을 날렸고 사후 흥선대원군이 집권한 후 그의 사상과 학문이 재조명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북학파 사상에 대한 벽파 및 위정 척사파 계열의 반감으로 1910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그의 사상과 학문에 대한 검토, 연구가 시작되었다. 1934년에 가서 그의 문집과 저서, 시문 등을 모은 완당선생전집이 간행되었다.[2]

사후 제자 남병길(Nam Byeong-gil) 등이 그의 서간집 『완당척독』(阮堂尺牘)과 시집 『담연재시고』(覃糧齋詩藁)를 편찬하여 1867년에 출판했고, 1868년에는 그의 다른 저술들을 모은 『완당집』(阮堂集)이 출판되었다. 그의 문집 전집인 『완당선생전집』(阮堂先生全集)은 그의 증손자 김익환(金翊煥)에 의해 1934년에 간행되었다.[4]

3. 사상과 학문

김정희는 조선 후기의 노론 북학파 실학자이자 화가, 서예가였다. 한국 금석학의 개조(開祖)로 여겨지며, 한국과 중국의 옛 비문을 보고 만든 추사체가 있다. 난초 그림에도 뛰어났다. 청나라고증학(考證學)에 관심을 가져 옹방강, 완원 등과 교류하며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옹방강은 경학, 문장, 금석, 서화, 시에 능한 당대 학계의 원로였고, 완원은 고증학 체계 수립에 기여한 인물이었다.[10] 연암 박지원의 북학사상과 청나라 고증학의 영향으로 성리학만이 진리라는 생각에서 벗어났다.

19세기 후반, 김정희는 한국 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3,000명의 제자를 가르쳤다고 전해지며, 19세기 말 개화파 등장으로 이어진 근대화 흐름을 이끈 인물로 평가받는다. 주요 관심사는 사료와 비석 연구였으며,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순수비)를 해독하고 확인한 것으로 유명하다. 서예, 수묵화, 산문, 시가문학에도 뛰어났다.[7]

어린 시절부터 불교 사찰을 자주 찾았고, 서예 작품 중에는 불경과 불교 관련 경전 필사본이 남아 있다. 초의선사(의순)와 백파대사(긍선)와 교류했으며, 특히 초의선사는 서울의 여러 고관대작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그의 친구이자 제자가 되었다. 백파대사와는 선(禪)에 대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7]

1809년 조선 과거의 생원시에 합격했고, 24세 때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청나라 베이징에 가서 옹방강, 완원에게 고증학을 배웠다. 1819년 문과에 급제, 규장각 대교, 충청도 암행어사, 승정원 부승지, 1836년 성균관 대사성, 병조 참판을 역임했다.

1840년 의혹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었으나, 훈고학에서 성리학에 이르는 한송(漢宋)을 겸비한 “실사구시설”을 고수하며 경학, 금석학, 서예 연구에 매진했다. 저서로는 고증학 관련 저술인 『완당전집』, 서도집 『완당문고』, 시집 『진연재시초고』 등이 있다.

3. 1. 실사구시와 북학 사상

16세 때 북학파의 대가이자 3차례 이상 청을 오가며 학문의 폭을 넓히고 있었던 박제가의 제자가 되면서 그로부터 북학파 사상을 배우고 연암 박지원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이에 따라 그는 청나라고증학에도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 1809년(순조 9) 24세 때 동지사(冬至使) 겸 사은사(謝恩使)의 일행으로 서울을 떠날 때 그도 부사(副使)인 부친 김노경을 따라 자제군관의 직책으로 연경(燕京) 길에 올랐다.[10]

당시 연경의 학자 옹방강과 완원을 만나 이후 학문 활동에 큰 도움을 받게 되었다. 옹방강은 일찍이 〈사고전서〉의 편찬에 관여했으며, 경학(經學)에 정통하고 문장·금석·서화·시에 능한 학계의 원로였다. 당시 청의 학풍은 한나라 대의 학문을 숭상하고 송나라, 명나라성리학을 관념적이라며 배척하는 것이었는데, 옹방강은 한나라송나라 학문의 절충을 주장하고 있었다. 청나라 중기의 경학의 대가였던 완원은 실사구시설(實事求是說)을 비롯한 고증학의 학문적 체계 수립에 영향을 주었다. 연암 박지원의 북학사상과 청나라 고증학 사상의 영향을 받은 그는 성리학만이 진리라는 생각은 버리게 되었다.[10]

1810년(순조 10) 아버지 김노경이 청나라에 동지사 겸 사은사로 사신행을 떠날 때 아버지의 시중을 드는 자제군관으로 따라갔다. 6개월 동안 청나라에 머물면서 청나라 제일의 학자 옹방강, 완원 등에게 재능을 인정받아 고증학을 배우게 된다. 완원은 자기가 지은 《소재필기》를 처음으로 김정희에게 기증까지 하였으며, 김정희가 조선에 돌아온 뒤에도 그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조선에 돌아온 뒤 한동안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그때 〈실사구시설〉 등을 발표하여 북학의 학문적 수준을 높이는 한편 성리학적 관념론을 비판했다.[10]

김정희는 그밖에도 《주역》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전각(篆刻)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를 좋아하여 한국의 다성(茶聖)이라 불리는 초의 스님, 백파 스님과 친분을 맺었다.[10]

3. 2. 금석학과 고증학

1809년(순조 9) 24세 때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자제군관으로 청나라 연경에 가서 옹방강(翁方綱), 완원(阮元) 등 당대 학자들과 교류하며 고증학을 배웠다.[11] 옹방강은 경학(經學)에 정통하고 금석, 서화, 시에 능한 학계 원로였고, 완원은 고증학의 학문적 체계 수립에 영향을 준 인물이었다. 연암 박지원의 북학사상과 청나라 고증학 사상의 영향을 받은 그는 성리학만이 진리라는 생각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1810년 아버지 김노경이 청나라에 동지사 겸 사은사로 사신행을 떠날 때 시중을 드는 자제군관으로 따라가 6개월 동안 머물면서 고증학을 배우게 된다. 귀국 후에는 〈실사구시설〉 등을 발표하여 북학(北學)의 학문적 수준을 높이는 한편 성리학적 관념론을 비판했다.

김정희는 이전까지 사서육경의 보조 학문으로 존재하였던 금석학(金石學), 사학, 문자학, 음운학, 천산학(天算學), 지리학, 천문학 등에 대한 포괄적인 연구를 시작하였다. 박지원박제가의 가르침은 그가 실용적인 학문을 찾아서 연구하게 하는 이념이 되었다.

신라고려시대의 묘비와 지석 등이 각지에서 발견, 출토되기 시작하면서 문자 해독이 이루어졌고, 금석학은 문자학과 서도사(書道史)의 연구와 더불어 독자적인 학문 분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그는 조선에서 금석문 연구를 "금석학"의 반열에 올려놓은 선구자였다. 그는 금석자료를 호고적(好古的) 취미로 대하던 당시까지의 풍조를 비판하고, 중국의 경우를 들어 금석학이 하나의 독립된 학문으로 발전하였음을 주장하였다. 또 경학과 역사학에서 필수 불가결한 보조적인 학문 분야라고 하여 그 효용을 역설하였다.[11]

청나라에서 귀국한 뒤 친구인 김경연, 조인영 등과 함께 비문을 보러 팔도를 답사하기도 했다. 김정희가 남긴 금석학의 가장 큰 업적은 1816년 당시까지 “무학 대사의 비” 또는 “고려 태조의 비”라고 알려져 있던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를, 비문에 적힌 “…眞興太王及衆臣巡狩…”라는 구절을 통해 진흥왕의 순수비라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순수비를 밝혀낸 과정과 그 사실적인 증명은 그가 저술한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에 기록되어 있으며, 《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 등과 같은 저서도 남겼다.

그의 학문 태도를 밝힌 글로서 유명한 〈실사구시설〉은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방법으로 진리를 탐구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는 북학파 학문과 청나라고증학까지 두루 섭렵하였으므로 경학을 비롯한 모든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자제군관으로 연행을 다녀와 과거에 급제한 후에는 관료생활 틈틈이 금석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또한 문무왕비와 김인문 묘비 등에서 발견한 신라 성한왕이라는 글자에 주목, 경주 김씨의 역대 족보와 비교, 대조하여 성한왕이 김알지 또는 김알지의 아들인 세한과 동일인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또한 소호금천씨와 파경진백, 투후에 대한 단어도 확인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이는 하늘에서 내려온 금궤에서 태어났다는 문중의 시조 설화와 배치되는 것이라 여러 사람의 비판을 받는 원인이 됐다.

금석문에 대한 해독, 문자판독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정리를 바탕으로 후학을 지도하여 조선 금석학파를 성립시켰다. 그의 금석학을 계승한 학자들로서는 신위, 조인영, 권돈인, 신헌, 조면호(趙冕鎬) 등이 있다.

3. 3. 서예와 추사체

김정희는 조선 후기의 서예가로, 추사체라는 독창적인 서체를 창안하여 한국 서예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추사체청나라고증학금석학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서체로, 비문 연구를 통해 얻은 필법을 바탕으로 한다.[4]

어려서부터 북학파 실학자 박제가의 제자가 되어 북학 사상을 배웠고, 청나라 연행길에 올라 옹방강, 완원 등 당대 최고의 학자들과 교류하며 학문적 깊이를 더했다. 특히 옹방강은 경학, 문장, 금석, 서화, 시에 능한 학계의 원로였고, 완원은 고증학의 학문적 체계 수립에 영향을 준 인물이었다. 김정희는 이들의 영향을 받아 성리학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 실사구시의 학문 태도를 갖게 되었다.

그는 유배 생활 중에도 서예 연구에 몰두하여 추사체를 완성했다. 제주도 유배 시절, 그는 대흥사의 조의 스님과 교류하며 차와 서예를 통해 정신적 위안을 얻었다.[5] 또한, 벗 이상적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세한도를 그려주었는데, 이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로 꼽힌다.[6]

3. 4. 회화와 문인화

그는 소식에게서 비롯된 시, 서, 화 일치의 문인 취미를 계승하였다. 그는 이를 제2의 직업으로 볼 만큼 전문적으로 하였다. 그림에서도 서권기(書卷氣)와 문자향(文字香)을 주장하여 기법보다는 심의(心意)를 중시하는 문인화풍(文人畫風)을 매우 존중하였다. 또한 그는 필묵의 아름다움을 주장하여 꾸밈없는 고담하고 간결한 필선(筆線)으로 심의(心意)를 노출하는 문기(文氣) 있는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는 난초를 잘 쳤다. 난 치는 법을 예서를 쓰는 법에 비유하며 "문자향이나 서권기가 있는 연후에야 할 수 있으며 화법(畵法)을 따라 배워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그의 화풍은 조희룡, 허유, 흥선대원군 이하응, 전기, 권돈인 등의 문인들을 통해 계승되었다.

4. 평가와 영향

김정희는 추사체를 창안한 서예가로 명성이 높았으며, 흥선대원군 집권 이후 그의 사상과 학문이 재조명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북학파 사상에 대한 벽파 및 위정 척사파 계열의 반감으로 1910년 대한제국 멸망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그의 사상과 학문에 대한 검토와 연구가 시작되었다. 1934년에는 그의 문집, 저서, 시문 등을 모은 완당선생전집이 간행되었다.

학문에서는 고증학에 뜻을 두어 중국 학자들과 교류하며 고증학을 수입하였고, 금석학 연구로 북한산의 진흥왕 순수비를 고증하는 등 큰 공로를 세웠다. 서예, 도서, 시문, 묵화에서 독창적이고 뛰어난 업적을 남겼으며, 특히 난초, 대나무, 산수화를 잘 그렸다.

김정희는 신위, 박규수, 유홍기, 오경석, 민태호, 민규호, 강위 등 중인 계층과 양반 사대부 계층을 아우르는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거대한 학파를 이끌었다. 그의 문하생은 3천 명에 달했다고 하며, 이들은 19세기 후반 개화 사상가로 이름을 남겼다. 흥선대원군의 정책 또한 북학에 기초한 실학 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에게 금석학을 배운 대표적인 인물은 오경석이며, 난초를 배운 이는 이하응이다.

다방면에 걸친 업적만큼 비판도 존재한다. 그는 유교적 권위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18세기에 싹튼 풍속화와 진경산수화를 낮게 평가했다. 평소 불교의 교와 선에 깊은 안목과 수증을 바탕으로 지냈으며 말년에 불법에 귀의하고 과천에서 은거하였다.

추사 연구의 디딤돌을 마련한 사람은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역임했던 역사학자 후지츠카 지카시(藤塚鄰, 1879~1948)이다. 그는 최초의 전문적인 추사 연구가라 할 수 있으며, 추사의 인격과 학문에 매료되어 한국, 중국, 일본을 넘나들며 추사와 관련된 자료들을 광범위하게 수집하여 문집 등 기초자료의 부실을 보완하는 데 일생을 바쳤다.[12]

김정희는 19세기 후반 한국 학자들 사이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3,000명의 제자를 가르쳤다고 알려져 있으며, 19세기 말 개화파의 등장으로 이어진 근대화 추세를 이끈 인물로 여겨진다.

5. 저서


  • 金薺중국어
  • 阮堂集중국어[4]


김노경의 아들로, 1809년에 조선의 과거 제도인 생원시에 합격했다. 일찍부터 그의 서예와 경학의 재능을 박제가가 인정했다. 24세 때 동지겸 사은사 부사가 된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베이징(北京)에 가서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 두 대석학의 총애를 받고 청나라 고증학의 핵심을 배우며, 서송(徐松) 등과 교류했다. 181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규장각(奎章閣) 대교를 맡고, 충청도(忠清道) 암행어사가 되어, 승정원(承政院) 부승지(副承旨)를 거쳐, 1836년 성균관(成均館) 대사성을 역임하고, 병조(兵曹) 참판으로 승진했다.[4]

1840년에는 의혹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濟州島)에 유배되었으나, 훈고학에서 성리학(宋明理学)에 이르는 한송(漢宋)을 겸비한 “실사구시설”을 고수하며, 경학, 금석학, 서예를 갈고 닦았다.[4]

저서로는 고증학 관련 저술인 『완당전집(阮堂全集)』, 서도집 『완당문고(阮唐文庫)』, 시집 『진연재시초고(秦燕寨詩草稿)』 등이 있다.[4]

6. 그림

김정희필 세한도 외에도 《묵란도》, 《초한도》 등이 있다.

세한도


불이선란도


추사체


추사체


소원학 공자


사서루


수식득계 난맹첩

7. 가족 관계

관계이름
증조부김한신
증조모화순옹주
할아버지김이주
양아버지김노영
양어머니남양 홍씨 (홍대현의 딸)
친아버지김노경
친어머니기계 유씨 (유준주의 딸)
친동생김명희
친동생김상희
중부김노성
중모한산 이씨 (이학영의 딸)
부인한산 이씨 (이희민의 딸)
부인예안 이씨 (이병현의 딸)
측실한씨
양자김상무
서자김상우


8. 기타

본관은 경주이며, 자는 추사(秋史)·원춘(元春), 는 완당(阮堂)·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농장인(農丈人)·보담재(寶覃齋)·담연재(覃硏齋)·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이다. 오제봉(吳濟峯)이 조사, 수집한 《추사선생아호집(秋史先生雅號集)》에 따르면 503개나 된다.[2] 노론 북학파 실학자이자 화가, 서예가였다. 한국 금석학의 개조(開祖)로 여겨지며, 한국과 중국의 옛 비문을 보고 만든 추사체가 있다. 그는 또한 난초를 잘 그렸다. 귀양을 가고 풀려나기를 반복하여 일생 동안 귀양살이가 도합 13년이나 되었다. 2014년까지 확인된 호만 540여 종에 이른다.[2]

참조

[1] 서적 Korea: A Historical and Cultural Dictionary Curzon 1999
[2] 웹사이트 호 (號) https://encykorea.ak[...]
[3] 웹사이트 일세의 통유 - 추사 김정희 https://web.archive.[...] 2012-04-26
[4] 웹사이트 김정희 金正喜 https://web.archive.[...] Nate /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2009-10-03
[5] 서적 Korean Tea Classics Seoul Selection 2010
[6] 웹사이트 「세한도 歲寒圖」의 비밀? http://moam.egloos.c[...] 2022-01-19
[7] 서적 Korean Tea Classics Seoul Selection 2010
[8] 서적 조선인물실록 1
[9] 백과사전 글로벌세계대백과
[10] 간행물 그림과 찬으로 화폭 위에 남긴 朝ㆍ日 인사들의 교유 가천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2009
[11] 간행물 秋史 金石學의 再照明
[12] 간행물 秋史 金石學의 再照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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