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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이면주 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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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효자 이면주 정려는 조선시대 효자 이면주(1818~1871)의 효행을 기리고자 세워진 정문이다. 이면주는 아버지의 병환을 위해 꿩고기를 구하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리는 등 지극한 효성을 보여 1905년 고종으로부터 명정을 받았다. 지역 유림과 남정철의 상소로 명정을 받게 되었으며, 1906년 정문이 건립되었다. 정문은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용암리에 위치하며, 내부에는 현판, 효행정려기, 정려비 등이 있다. 정려의 건립 경위와 관련된 입안문이 보존되어 있으며, 이면주의 효행은 후손들에게도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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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이면주 정려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효자 이면주 정려
원어 이름孝子 李勉疇 旌閭
유형향토문화유산
지정 번호49
지정일2014년 9월 30일
시대조선시대 1906년
주소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용암리 154-1

2. 이면주의 효행

이면주는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심이 지극했다고 전해진다.[2] 특히 아버지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약을 구하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았으며, 상분(嘗糞)이나 단지주혈(斷指血)을 하는 등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였다.[2] 이러한 그의 효행은 지역 유림(儒林)들에게 알려져 조정에까지 보고되었고, 마침내 고종은 그의 효성을 기려 정려(旌閭)를 내리게 하였다.[2]

2. 1. 출생과 가계

이면주(李勉疇, 1818년 ~ 1871년)는 조선 후기의 인물로, 본관은 전주(全州)이다.[2] 그는 정종의 열 번째 아들인 덕천군의 13세손으로,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 용암리 양촌에서 태어났다.[2] 고종 때 교관을 지냈다.[2]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하여 부모를 섬기는 데 정성을 다했다고 전해진다.[2] 아버지가 중병으로 자리에 눕자 약을 구하기 위해 애쓰고 단지주혈을 하는 등 극진히 간호하였다.[2] 특히 병든 아버지를 위해 꿩을 구하려 애쓰던 중, 꿈에 나타난 노인의 말대로 집 근처에서 기적적으로 꿩 두 마리를 얻어 약으로 쓰자 아버지의 병이 나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2] 그러나 이후 아버지가 다시 병석에 눕자 단지주혈까지 하였으나 결국 세상을 떠났다.[2]

이러한 그의 효행이 유림들에 의해 알려져 조선 조정에 보고되었고, 1906년(고종 광무 9년) 효자로 명정(命旌)되었다.[2] 그의 손자 이상뢰(李象賚) 역시 효자로 알려져 2대에 걸쳐 효자를 배출한 가문으로 평가받는다.[2] 이면주의 묘소는 충청남도 공주시 의당면 용암리 양촌 뒷산 기슭에 있다.[2]

2. 2. 지극한 효성

이면주는 전주 이씨로, 조선 정종의 열 번째 아들인 덕천군 이후생의 후손이다. 그는 공주시 의당면 용암리 양촌(현재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용암리)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부모에 대한 효심이 깊었다고 전해진다.[2]

아버지가 병으로 자리에 눕게 되자, 이면주는 지극정성으로 간호하며 약을 구하기 위해 먼 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대소변을 직접 맛보며 병의 차도를 살폈다고 한다(상분, 嘗糞). 어느 날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아버지의 병에는 꿩이 약이라고 알려주었는데, 꿈에서 깨어보니 실제로 꿩 두 마리가 집으로 날아 들어와 기둥에 부딪혀 떨어졌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 꿩으로 약을 지어 드리자 아버지의 병이 잠시 호전되었다. 그러나 이후 아버지가 다시 위독해지자, 이면주는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아버지께 드리는 효행(단지혈, 斷指血)까지 보였으나, 아버지는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2]

이면주의 이러한 지극한 효행은 지역 유림들에게 알려졌고, 유림들은 그의 행적을 글로 써 관아에 알렸다. 이 글은 당시 예식원(禮式院)의 장례원경(掌禮院卿)이었던 남정철에게 전해졌고, 남정철은 이를 고종에게 아뢰었다. 고종은 이면주의 효행을 기려 1905년(고종 42년, 광무 9년)에 명정(銘旌)을 내렸고, 이듬해인 1906년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2]

당시 정려를 내리게 된 경위와 정문 건립 과정 등은 입안문(立案文)에 상세히 기록되어 보존되고 있다. 입안문에 따르면, 정문을 세울 때 필요한 재목과 목수를 관청에서 지원했으며, 그의 자손들에게는 환곡(還上) 납부와 각종 잡역(雜役)을 면제해주는 혜택이 주어졌다. 또한, 이면주의 손자인 이상뢰 역시 효자로 알려져, 2대에 걸쳐 효자를 배출한 가문으로 칭송받았다.[2]

2. 3. 효행의 전파

이면주의 지극한 효행은 지역 유림(儒林)들에 의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유림들은 그의 효행에 감탄하여 에 알렸고, 이는 조정에까지 전해졌다.[2] 충청도 유생 김태현(金台鉉) 등이 올린 이면주의 효행 행적은 당시 예식원(禮式院) 장례원경(掌禮院卿)이었던 남정철(南廷哲)에게 보고되었다. 남정철은 이를 고종(高宗)에게 아뢰어 정려를 내려줄 것을 주청(奏請)하였다.[2]

고종은 남정철의 보고를 받고 이면주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905년(광무 9년)에 명정(銘旌)을 내렸다.[2] 이듬해인 1906년에는 나라에서 하사한 명정을 현판으로 건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정려 건립 과정과 관련된 내용은 입안문(立案文)에 상세히 기록되어 보존되고 있다. 입안문에 따르면, 정문을 세울 때 필요한 재목과 목수는 관청에서 지원했으며, 이면주의 자손들에게는 환곡(還上)을 비롯한 각종 잡역(雜役)을 면제해주는 조치가 취해졌다.[2]

이면주의 손자인 이상뢰(李象賚) 역시 효행으로 이름이 높아, 이들 가문은 2대에 걸쳐 효자를 배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

3. 정려 하사와 건립

이면주의 지극한 효행은 지역 유림(儒林)들에게 알려졌고, 이들의 상소와 당시 예식원(禮式院) 장례원경(掌禮院卿) 남정철(南廷哲)의 주청을 통해 고종(高宗)에게 전해졌다.[2] 이에 고종은 1905년(고종 42) 이면주의 효행을 기리는 명정(銘旌)을 내렸으며, 이듬해인 1906년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용암리에 정려(旌閭) 정문(旌門)이 세워졌다.[2] 정려가 내려지게 된 경위와 정문 건립 과정 등은 관련 입안문(立案文)을 통해 자세히 알 수 있다.[2]

3. 1. 정려 하사

이면주의 지극한 효행은 지역 유림(儒林)들에게 알려졌고, 충청도 내 유생 김태현(金台鉉) 등이 그의 행적을 글로 정리하여 관아에 알렸다.[2] 당시 예식원(禮式院)의 장례원경(掌禮院卿)이었던 남정철(南廷哲, 1840~1916)은 이 내용을 고종(高宗, 1852~1919)에게 아뢰어 정려를 내려줄 것을 청했다.[2] 이에 고종은 1905년(고종 42, 광무 9년) 이면주의 효행을 기리는 명정(銘旌)을 내렸다.[2]

명정을 받은 이듬해인 1906년,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용암리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2] 정문 내부에는 '효자 증구품종사랑중학교교관 이면주지문'(孝子 贈九品從仕郎中學校敎官 李勉疇之門)이라는 현판과 1906년 유인철(柳寅哲)이 작성한 효행정려기(孝行旌閭記)가 걸려 있다. 또한 같은 해에 손자 이상뢰(李象賚)가 세운 정려비(旌閭碑)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2] 이 정려비는 높이 144cm, 폭 43cm, 두께 20cm이다.[2]

정려가 내려질 당시의 상황과 절차를 기록한 입안문(立案文)도 보존되어 전해진다.[2] 이 문서에는 남정철고종에게 정려를 주청한 내용, 임금이 이를 허락하며 정문을 내리도록 한 비답, 정문을 세울 때 필요한 재목과 목수를 관청에서 지원하고 이면주의 자손들에게 부과되던 환곡인 환상(還上) 및 모든 잡역을 면제해 주도록 한 조치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2]

3. 2. 정려 건립

이면주의 효행이 지역 유림(儒林)들에게 알려지면서, 이들은 글을 올려 그의 행적을 널리 알렸다.[2] 당시 예식원(禮式院)의 장례원경(掌禮院卿)이었던 남정철(南廷哲, 1840~1916)은 유림들의 글을 고종(高宗, 1852~1919)에게 전달하며 정려(旌閭)를 내려줄 것을 청하였다.[2] 이에 고종은 1905년(고종 42, 광무 9년) 이면주에게 효행을 기리는 명정(銘旌)을 내렸고, 이듬해인 1906년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2]

정려 건립 과정과 관련된 입안문(立案文)이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정려가 내려지게 된 상세한 경위와 정문 건립 당시의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2] 입안문에 따르면, 충청도 유생 김태현(金台鉉) 등이 이면주의 효행을 기록하여 올렸고, 남정철이 이를 고종에게 보고하여 정려를 주청하자 고종이 이를 허락하였다.[2] 또한 정문을 지을 때 필요한 재목과 목수는 관청에서 지원했으며, 이면주의 자손들에게는 환곡(還上) 납부와 각종 잡역을 면제해주는 조치가 취해졌음이 기록되어 있다.[2]

3. 3. 입안문(立案文)

효자로 명정(命旌)받을 당시의 입안문(立案文)도 보존되어 있다. 이 입안문에는 충청도 내 유생 김태현(金台鉉) 등이 올린 이면주의 효행 행적을 예식원 장례경(掌禮卿) 남정철(南廷哲)이 고종에게 올려 정려를 내릴 것을 주청(奏請)하자, 임금이 정문을 내리도록 비답(批答)한 내용이 담겨 있다. 또한, 정문을 세울 때 필요한 재목과 목수를 관청에서 제공하고 그 자손들의 환상(還上) 및 모든 잡역을 면제해 주도록 조치한 내용 등도 기록되어 있다.[2]

4. 정려의 위치 및 현황

정문은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용암리에 위치한다. 정문은 맞배집 형태이며, 현재 이면주의 5세손인 이은팔이 관리하고 있다. 정문은 이은팔의 집에서 북동쪽으로 약 100m 거리에 있다.

정려 내부에는 '효자 증 구품 종사랑 중학교 교관 이면주지문(孝子 贈 九品 從仕郎 中學校 敎官 李勉疇之門)'이라고 쓰인 현판이 걸려 있다. 또한, 1906년에 유인철(柳寅哲)이 기록한 '효행 정려기(孝行 旌閭記)'와 같은 해에 이면주의 손자 이상뢰(李象賚)가 세운 '정려비(旌閭碑)'가 있다. 정려비의 크기는 높이 144cm, 폭 43cm, 두께 20cm이다.

이면주의 소는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용암리 양촌 뒷산 기슭에 있다. 효자로 명정받을 당시의 과정을 기록한 입안문(立案文)도 보존되어 있는데, 이 문서에는 충청도 지역 유생 김태현(金台鉉) 등이 이면주의 효행을 기록하여 올리자, 예식원의 장례경(掌禮卿) 남정철(南廷哲)이 이를 고종에게 보고하여 정려를 내려줄 것을 청원하였고, 임금이 이를 허락하며 정문을 내리도록 명한 내용이 담겨 있다. 또한, 정문을 세울 때 필요한 재목과 목수를 관청에서 지원하고, 그의 자손들에게는 환상(還上)을 비롯한 여러 잡역을 면제해주도록 조치한 내용도 기록되어 있다.[2]

5. 후손과 가계 계승

이면주는 본관이 전주 이씨이며, 조선 정종의 열 번째 아들인 덕천군의 13세손이다.[2] 고종 때 교관을 지냈으며, 1906년 효자로 명정(命旌)되었다.[2]

이면주의 손자인 이상뢰(李象賚) 역시 효자로 알려져, 이 가문은 2대에 걸쳐 효자를 배출하였다.[2] 현재 정려는 5세손인 이은팔이 관리하고 있다.[2]

5. 1. 5세손 이은팔

효자 이면주의 정려는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용암리에 위치하며, 현재 그의 5세손인 이은팔이 관리를 맡고 있다. 정문은 이은팔의 집에서 북동쪽으로 약 100m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다.[2]

5. 2. 손자 이상뢰

이면주의 손자인 이상뢰(李象賚) 역시 효자로 알려져, 이 가문은 2대에 걸쳐 효자를 배출하였다. 이상뢰는 1906년 할아버지 이면주를 기리는 정려비(旌閭碑)를 건립하였다. 이 정려비의 크기는 높이 144cm, 폭 43cm, 두께 20cm이다.[2]

참조

[1] 간행물 세종특별자치시 향토유적 지정 고시 세종특별자치시장 2014-09-30
[2] 서적 공주문화유적(公州文化遺蹟)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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