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시미노미야 사다모치 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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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시미노미야 사다모치 친왕은 모모조노 천황과 이치조 토미코의 아들로, 에도 시대에 후시미노미야 가문을 상속받았다. 그는 고모모조노 천황의 형제였으며, 1760년 후시미노미야 쿠니타다 친왕에게 입양되어 가문을 계승했다. 사다모치 친왕은 1763년 황족의 칭호를 받았으나, 1765년 시력을 잃었고, 1772년 사망했다. 그의 사후, 후시미노미야의 계승 문제를 두고 조정과 에도 막부 사이에서 논의가 있었으며, 결국 쿠니타다 친왕의 남동생인 손포 친왕이 가문을 상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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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시미노미야 사다모치 친왕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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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존칭 | 전하 |
휘 | 니노미야 |
출생일 | 1760년 4월 9일 |
출생지 | 교토, 일본 |
사망일 | 1772년 7월 20일 |
사망지 | 교토 |
묘소 | 쇼코쿠지 |
직업 | 황실 구성원 |
아버지 | 모모조노 천황 |
어머니 | 이치죠 토미코 |
양아버지 | 후시미노미야 구니타다 친왕 |
후시미노미야 | |
역대 | 제17대 |
전임 | 후시미노미야 구니타다 친왕 |
후임 | 후시미노미야 구니요리 친왕 |
기타 정보 | |
법명 | 신조묘인 |
2. 후시미노미야의 역사
무로마치 시대부터 시작된 후시미노미야 가문은 고하나조노 천황으로부터 伏見殿일본어라는 칭호를 받은 유서 깊은 가문이다.
2. 1. 세슈 신노케
에도 시대에는 후시미노미야를 포함한 4개의 세슈 신노케(四親王家)가 있었다. 세슈 신노케는 황실의 4개 분가를 통틀어 일컫는 말로, 적통 계승자가 후사를 잇지 못할 경우 황위를 계승할 자격을 받았다. 현대 황실 제도와는 달리 가문의 수는 4개로 고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황위 계승자나 신노케의 당주를 제외한 황족들은 불교 승려가 되거나 귀족의 양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신노케 당주들은 재위 중인 천황이나 상왕의 양자가 되어, 천황과의 혈통적 거리와 관계없이 황태자 칭호를 받았다. 이는 '세슈'라는 용어가 의미하는 바였다. 따라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현 천황과의 혈연관계가 멀어지는 문제가 있었다.2. 2. 사다모치 친왕의 상속 배경
1759년 6월 2일, 후시미노미야의 제16대 당주인 구니타다 친왕이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무로마치 시대부터 직계 상속을 이어온 후시미노미야는, 제102대 고하나조노 천황으로부터 "후시미도노"라고 불리는 것을 허락받은 유서 깊은 가문이었다. 이에 후시미노미야 관계자들은 실제 친족이 유언에 따라 가문을 상속받을 수 있도록 교토의 조정에 청원했다.조정에서는 세 가지 방안이 논의되었다.
- A: 천황의 아들을 양자로 하여 후계자로 삼는다.
- B: 사망한 구니타다 친왕의 남동생을 후계자로 삼는다.
- C: 다른 신노케(親王家)의 일원을 양자로 하여 후계자로 삼는다.
이 중 C 방안은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즉시 거부되었다. 일부 귀족들은 A 방안을 지지했지만, 당시 모모조노 천황에게는 아들인 히데히토 황태자(고모모조노 천황) 한 명뿐이었다. 구니타다 친왕에게는 손포 친왕과 손신 친왕이라는 두 명의 남동생이 있었지만, 둘 다 이미 승려가 되어 있었다. 승려는 신노케를 상속받을 수 없었고, 전직 승려가 상속하는 전례도 없었다. 조정이 에도 막부와 상의한 결과, 막부는 A 방안을 지지했다.
당시 모모조노 천황의 부인이었던 이치조 토미코는 천황의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는데, 이 아이가 바로 사다모치 친왕이었다. 사다모치 친왕은 태어난 후 곧바로 후시미노미야를 상속받게 되었다. 이는 모모조노 천황에게는 방계 혈족과의 관계가 가까워지는 좋은 결과였지만, 직계 상속을 유지할 수 없었던 후시미노미야 관계자들에게는 자존심에 큰 상처가 되었다.
3. 후시미노미야 사다모치 친왕
모모조노 천황과 이치조 토미코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이름은 "니노미야(二宮)"였다. 그의 형은 고모모조노 천황이었다. 태어난 지 약 3개월 만에 후시미노미야 쿠니타다 친왕에게 입양되어 1760년 7월 30일에 후시미노미야를 상속받았다. 1763년 10월 4일, 황족 칭호를 받고 "사다모치"라는 이름을 받았다. 1765년 눈병으로 시력을 잃었으며, 1772년 6월 17일 위독한 상태에 빠져 같은 날 일본의 호니(hon'i)를 받았다. 3일 후인 20일 새벽에 사망했다.
3. 1. 사후
묘소는 교토 쇼코쿠지 경내에 있는 후시미노미야 묘소이며, 사후 이름은 "신조묘인(新浄明院)"이다. 또한 그의 영혼은 역대 천황 및 다른 황족들과 함께 교토 황궁의 고레이덴(皇霊殿)에 모셔져 있다.4. 사다모치 친왕 사후의 상속 문제
1772년 사다모치 친왕이 사망하면서 후시미노미야 계승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조정은 사다모치 친왕의 양자로 황제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겠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당시 고모모조노 천황은 겨우 14세였고 자녀가 없었다. 게다가 1770년에는 가쓰라노미야의 아홉 번째 당주였던 킨히토 친왕이 후계자 없이 사망했다. 당시 조정은 이미 황제의 둘째 아들을 가쓰라노미야의 후계자로 삼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후시미노미야의 계승은 고모모조노 천황의 셋째 아들이 태어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후시미노미야 관리들은 조정의 결정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들은 고(故) 쿠니타다 친왕의 남동생이자 가쥬지 사찰의 주지 승려였던 손포 친왕을 후시미노미야의 후계자로 맞이하고 싶어 했다. 다행히 후시미노미야는 도쿠가와 가문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들은 개인적인 인맥을 최대한 활용하여 쇼군에게 손포 친왕을 후계자로 추천해 줄 것을 촉구했다. 쇼군은 전례를 깨고 황제의 셋째 아들이 언제 태어날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에 손포 친왕을 환속시켜 후시미노미야를 상속해야 한다고 조정에 주장했다. 이에 조정은 황제와 가장 가까운 신노케인 칸인노미야의 일원을 후계자로 제안했지만, 쇼군은 이를 거부했다. 그리하여 1774년 11월 13일, 손포 친왕은 승려 신분을 버리고 후시미노미야의 18대 당주가 되어 이름을 "쿠니요리"로 바꿨다. 이로써 후시미노미야의 직계 계승이 부활하여 1947년 10월 14일 히로아키 친왕이 황실 족적에서 벗어날 때까지 이어졌다.
5. 후시미노미야 가계도
대수 | 이름 | 기타 |
---|---|---|
초대 | 에이진 친왕 | |
2대 | 하루히토 왕 | |
3대 | 사다나리 친왕 | |
4대 | 사다쓰네 친왕 | |
5대 | 구니타카 친왕 | |
6대 | 사다아쓰 친왕 | |
7대 | 구니스케 친왕 | |
8대 | 사다야스 친왕 | |
9대 | 구니후사 친왕 | |
10대 | 사다키요 친왕 | |
11대 | 구니히사 친왕 | |
12대 | 구니미치 친왕 | |
13대 | 사다유키 친왕 | |
14대 | 구니나가 친왕 | |
15대 | 사다타테 친왕 | |
16대 | 구니타다 친왕 | |
17대 | 사다유키 친왕 | |
18대 | 구니요리 친왕 | |
19대 | 사다히로 친왕 | |
20/23대 | 구니이에 친왕 | |
21대 | 사다노리 친왕 | |
22/24대 | 사다치카 친왕 | |
25대 | 히로야스 왕 | 3대 가초노미야 |
26대 | 히로아키 왕 |
6. 평가
柳原教光|야나기와라 노리미쓰일본어는 사다모치 친왕을 지적이고 매우 총명하다고 묘사했다. 하지만 친왕의 특별한 어린 시절 업적에 대한 기록은 없으므로, 이 묘사의 신빙성은 의문스럽다.
7. 여담
고모모조노 천황은 1773년 천연두를 앓은 후 눈병을 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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