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아나 라 벨트라네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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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는 1462년 카스티야 왕국의 엔리케 4세와 그의 두 번째 왕비인 포르투갈의 후아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카스티야 왕위 계승자로 선포되었으나, 출생 직후부터 엔리케 4세의 총신인 벨트란 데 라 쿠에바의 딸이라는 소문이 돌면서 왕위 계승에 대한 논란이 시작되었다. 엔리케 4세 사후, 후아나와 이복 고모인 이사벨 1세 사이에서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했고, 후아나는 결국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와 결혼하여 카스티야 왕위를 주장하며 내전을 겪었다. 알카소바스 조약으로 분쟁이 종식된 후, 후아나는 수도원에서 생을 마감했으며, 그녀의 삶은 카스티야 왕국의 정치적 혼란을 보여주는 비극적인 이야기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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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아나 라 벨트라네하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후아나 데 카스티야 |
다른 이름 |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 |
칭호 | 아스투리아스 여공, 카스티야 여왕 (왕위 주장자) |
출생일 | 1462년 2월 21일 |
출생지 | 마드리드 왕궁 |
사망일 | 1530년 4월 12일 |
사망지 | 리스본 |
매장지 | 리스본 성 클라라 수도원 |
가문 | 트라스타마라 가 |
아버지 | 논쟁 중: 엔리케 4세 또는 알부르케르케 공작 1세 벨트란 데 라 쿠에바 |
어머니 | 주아나 드 포르투갈 |
결혼과 왕비 | |
배우자 | 아폰수 5세 |
결혼 | 1475년 5월 30일, 플라센시아 |
왕비 기간 | 1475년 5월 30일 – 1481년 8월 28일 |
종교 | 로마 가톨릭교회 |
2. 생애
후아나는 '라 벨트라네하'라는 별명으로 불렸는데, 이는 '벨트란의 아이'라는 뜻이다. 그녀의 생부가 엔리케 4세가 아니라 카스티야 귀족 벨트란 데 쿠에바 남작이라는 소문 때문이었다.[9] 엔리케 4세는 이혼한 전처와 자녀가 없었고, 두 번째 아내 후아나도 임신이 잘 되지 않아 사람들이 그를 불임으로 여겼기 때문에, 후아나가 태어나자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졌다.[8]
엔리케 4세는 후아나 왕비와 이혼했지만, 딸 후아나를 후계자로 지명하여 카스티야 왕국을 물려주려 했다. 그러나 많은 귀족들은 후아나가 왕의 친딸인지 불분명하다며 반발했고, 엔리케 4세의 이복동생 알폰소 왕자를 국왕으로 추대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내전은 1467년 알폰소 왕자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후 기산도 황소 조약을 맺으며 끝났다.
2. 1. 초기 생애와 출생의혹
후아나는 1462년 2월 28일 마드리드 왕궁에서 태어났다.[1] 그녀의 탄생은 카스티야 전역에서 축제, 연회, 투우를 통해 축하받았다. 1462년 5월 9일, 후아나는 공식적으로 카스티야 왕위 계승자로 선포되었고 아스투리아스 공 칭호를 받았다.그러나 후아나가 태어나자마자, 그녀의 생부가 엔리케 4세가 아니라 국왕의 총신인 벨트란 데 라 쿠에바라는 소문이 퍼졌다. 엔리케 4세는 첫 번째 부인과 자녀가 없었고, 두 번째 왕비 후아나도 좀처럼 임신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엔리케 4세를 불임이라고 여겼다. 이런 상황에서 후아나가 태어나자 소문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8] 결국 엔리케 4세는 후아나 왕비와 이혼했다.
이러한 소문으로 인해, 후아나는 '라 벨트라네하'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9] '라 벨트라네하'는 벨트란의 아이라는 뜻이다.
1946년, 그레고리오 마라농과 마누엘 고메스-모레노 마르티네스가 엔리케 4세의 유골을 조사한 결과, 그는 "정상적인 남성 생식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러나 후아나의 유해가 보관되었던 수도원이 1755년 리스본 대지진으로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와 후아나의 생물학적 부자 관계를 증명할 방법은 현재로서는 없다.
2. 2. 카스티야 왕위 계승 분쟁
1464년, 국왕 엔리케 4세가 총애하던 벨트란 데 라 쿠에바를 산티아고 기사단장에 임명하자, 후안 파체코를 중심으로 한 귀족 세력이 반발했다. 이들은 엔리케 4세를 폐위하고 후아나 공주가 벨트란 데 라 쿠에바의 사생아라는 소문을 퍼뜨려 후아나의 왕위 계승권을 무력화하려 했다.[12] 엔리케 4세는 귀족들의 압력에 굴복하여 이복동생 알폰소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알폰소가 후아나와 결혼하여 공동으로 왕위를 계승하도록 조건을 걸었다.그러나 1465년, 엔리케 4세가 알폰소를 후계자에서 물러나게 하고 귀족들에 대항하면서 내전이 발발했다. 귀족들은 아빌라에서 엔리케 4세의 허수아비를 폐위시키고 알폰소를 왕으로 추대하는 '아빌라의 익살극'을 벌였다. 1467년 올메도 제2차 전투는 무승부로 끝났다.
1468년, 알폰소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카스티야 왕위 계승권은 그의 여동생 이사벨에게 넘어갔다.[2] 이사벨은 엔리케 4세와 기산도 황소 조약을 맺어 왕위 계승자로 인정받았지만, 엔리케 4세는 후아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2][3][4]
1469년, 이사벨이 아라곤의 페르난도와 결혼하자, 엔리케 4세는 이를 조약 위반으로 간주하고 후아나를 다시 후계자로 선포했다.
1474년 엔리케 4세가 사망하자 후아나와 이사벨 사이에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 후아나는 외삼촌 아폰수 5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아폰수 5세는 후아나와 결혼하고 1475년 카스티야를 침공하여 카스티야 왕위계승전이 벌어졌다.[12] 1476년 토로 전투에서 아폰수 5세가 패배했으나, 양측은 대치하며 전쟁이 3년간 지속되었다. 결국 1479년 알카소바스 조약이 체결되어 후아나는 이사벨의 아들과 결혼하거나 수도원에 들어가는 선택을 해야 했다. 교황 식스토 4세는 아폰수 5세와 후아나의 결혼을 근친혼으로 무효화했고, 후아나는 코임브라의 수도원에 들어갔다.
2. 3.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
1474년 엔리케 4세가 사망하자 후아나와 이사벨 1세 사이에 왕위 계승 분쟁이 발생하였다. 후아나는 외삼촌인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아폰수 5세는 후아나와 결혼한 후 1475년 5월 카스티야를 침공했다. 이로써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이 시작되었다.[12]후아나는 포르투갈 국왕 외에도 일부 카스티야 고위 귀족들의 지지를 받았다. 톨레도 대주교 알폰소 카리요, 에스칼로나 공작 디에고 로페스 파체코, 에스투니가 가문, 카디스 후작 로드리고 폰세 데 레온, 칼라트라바 기사단의 대수장 로드리고 텔레스 지론 등이 후아나를 지지했다.
반면 이사벨라는 남편인 페르난도 2세와 멘도사 가문, 만리케 데 라라 가문, 메디나시도니아 공작 엔리케 데 구즈만, 알부르케르케 공작 벨트란 데 라 쿠에바 등 대부분의 카스티야 귀족과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1476년 3월, 토로 전투에서 아폰수 5세가 이끄는 포르투갈군은 페르난도 2세가 이끄는 카스티야 군에게 패배했다. 아폰수 5세는 패배 후 전장에서 도망쳤지만, 그의 아들 주앙 왕자가 카스티야 우익을 격파하고 잃어버린 포르투갈 왕실 깃발을 회복하여 전투를 유지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전투는 결정적이지 않았다.[5] 그럼에도 페르난도 2세는 포르투갈군의 대패 소식을 카스티야의 모든 도시와 여러 왕국에 알렸고, 이로 인해 후아나와 아폰수 5세의 명성은 실추되었다. 이 소식에 후아나 세력은 와해되었고 포르투갈군은 본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6]
이후 아폰수 5세는 루이 11세와 동맹을 맺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1479년, 알카소바스 조약을 통해 아폰수 5세는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왕위를 인정해야 했다.[10] 이 조약에 따라 후아나는 이사벨의 아들 후안과 결혼하거나 수도원에 들어가는 선택을 해야 했다. 또한, 교황 식스토 4세는 아폰수 5세와 후아나의 결혼을 근친혼으로 무효화했다.[11]
2. 4. 수도원 생활과 죽음
후아나는 알카소바스 조약에 따라 코임브라의 산타 클라라 수도원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1] 1480년 8월, 후아나가 서원을 하기 몇 주 전, 아폰수 5세는 그녀에게 편지를 써서 그들의 결혼이 무효화되었음을 암시적으로 인정했다.[1] 왕족 여성의 서원이 반드시 결혼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페르디난드 2세와 이사벨 1세는 후아나가 서원을 지키도록 교황청에 로비를 했다.[1]1482년, 주앙 2세는 후아나를 나바라의 프랑수아 푸보 왕과 결혼시키는 것을 고려했으나, 1483년 1월 프랑수아가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1] 같은 해 3월, 주앙 2세는 이사벨 1세의 사절들에게 후아나가 결혼하거나 포르투갈을 떠나거나 수도 생활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도록 요청했다.[1] 가톨릭 군주들은 후아나의 재혼 가능성을 더욱 줄이기 위해 1483년 6월 3일 식스토 4세에게 수녀원을 떠나는 것을 막는 교황령을 발부해 줄 것을 요청했다.[1]
1498년, 후아나는 새로운 가정을 갖게 되었고, 그녀가 가정을 유지하는 데 사용한 연간 수입은 마누엘 1세 통치 시대 포르투갈 귀족들 중 가장 높은 수준이었다.[1]
1504년 이사벨 1세가 사망한 후, 페르디난드 2세는 사위인 필리페가 카스티야를 계승하는 것보다 자신이 후아나와 결혼하여 카스티야를 장악하는 것이 좋다는 조언을 받았다. 하지만 마누엘 1세는 필리페 1세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후아나를 왕궁으로 옮겨 감시하에 두었다.[1]
1522년, 후아나는 카스티야 여왕 칭호를 포기하고 나이와 상속인을 낳을 수 없다는 이유로 왕위를 주앙 3세에게 넘겼다.[1]
후아나는 사망할 때까지 편지에 "''La Reina''"("여왕")라고 서명했다. 그녀는 포르투갈에서 "''Excelente Senhora''"("훌륭한 숙녀")로 알려졌으며, 리스본에서 생을 마감했다.[1]
3. 유산과 평가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는 카스티야 왕위 계승 분쟁의 중심에 있었던 비운의 인물로 평가된다. 그녀의 정통성에 대한 논란은 카스티야 왕국의 정치적 혼란을 야기했고, 이는 이베리아 반도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1]
후아나의 이야기는 여러 문학 작품과 드라마의 소재가 되었다.[1] 산티아고 세비야의 희곡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는 후안 파체코와 벨트란 데 라 쿠에바가 후아나 공주에게 미친 해로운 영향을 묘사한다.[1] 스페인 텔레비전 드라마 ''이사벨''에서는 이사벨의 조카딸인 후아나의 삶과 갈등이 상세히 묘사되었으며, 카르멘 산체스가 후아나 역을 맡았다.[1] 로렌스 슈누버의 ''여왕의 십자가, 스페인 이사벨 여왕의 전기적 로맨스''와 장 플레이디의 스페인 3부작 중 2권 "군주를 위한 스페인"에서도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를 다루고 있다.[1]
4. 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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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폰소 11세 | ||
엔리케 2세 | 페드로 1세 | |
후안 1세 | 콘스탄사 | |
엔리케 3세 | 카탈리나 | 페르난도 1세 (아라곤 왕) |
후안 2세 | 후안 2세 (아라곤 왕) | |
엔리케 4세 | 이사벨 1세 | 페르난도 5세 (합스부르크 가문) |
후아나 | 후아나 | 필리페 1세 |
합스부르크 왕가 |
4. 1. 트라스타마라 가문
후아나는 카스티야 왕국의 트라스타마라 가문의 일원으로, 엔리케 2세의 손녀이자 후안 1세의 증손녀였다.알폰소 11세 | ||
엔리케 2세 | 페드로 1세 | |
후안 1세 | 콘스탄사 | |
엔리케 3세 | 카탈리나 | 페르난도 1세 (아라곤 왕) |
후안 2세 | 후안 2세 (아라곤 왕) | |
엔리케 4세 | 이사벨 1세 | 페르난도 5세 (합스부르크 가문) |
후아나 | 후아나 | 필리페 1세 |
합스부르크 왕가 |
참조
[1]
harvard
[2]
뉴스
To seize power in Spain, Queen Isabella had to play it smart: Bold, strategic, and steady, Isabella of Castile navigated an unlikely rise to the throne and ushered in a golden age for Spain
https://www.national[...]
National Geographic History Magazine
2019-04-20
[3]
harvard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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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서적
The Cambridge Medieval History, Volume 8
https://books.google[...]
Macmillan
1959
[6]
서적
España estratégica: Guerra y diplomacia en la historia de España
https://books.google[...]
Sílex ediciones
2007
[7]
서적
La guerra civil castellana y el enfrentamiento con Portugal. (1475–1479)
http://www.cervantes[...]
Biblioteca Virtual Miguel de Cervantes
2006
[8]
서적
[9]
서적
[10]
서적
[11]
서적
[12]
서적
여왕의 시대
미래의 창
2011-05-25
[13]
서적
Foundations of the Portuguese empire 1415–1580, volume I
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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