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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케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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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엔리케 4세는 1425년 카스티야의 후안 2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스투리아스 공으로 카스티야 왕위 계승자가 되었으며, 1454년 부왕의 사망으로 왕위에 올랐다. 엔리케 4세는 블랑카 2세와 결혼했으나 혼인 무효가 되었고, 이후 후아나 데 포르투갈과 재혼하여 딸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를 얻었으나, 후아나의 사생아 의혹으로 인해 후계자 문제를 겪었다. 그의 통치 기간은 귀족들의 권력 다툼과 무능한 정치로 혼란스러웠으며, 1474년 사망 후 이복 여동생 이사벨 1세와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 간의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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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케 4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5세기 게오르크 폰 에힝겐의 일기 삽화
15세기 게오르크 폰 에힝겐의 일기 삽화
칭호카스티야 국왕 겸 레온 국왕
통치 기간1454년 7월 22일 – 1474년 12월 11일
선대 국왕후안 2세
후대 국왕이사벨 1세
배우자블랑카 데 나바라 (1440년 결혼, 1453년 이혼)
주앙 드 포르투갈 (1455년 결혼, 1468년 이혼)
자녀후아나, 포르투갈 여왕
왕가트라스타마라
아버지후안 2세
어머니마리아 데 아라곤
출생일1425년 1월 5일
출생지바야돌리드, 스페인
사망일1474년 12월 11일 (49세)
사망지마드리드, 스페인
매장지산타 마리아 데 과달루페 왕립 수도원
서명
이름
스페인어엔리케 4세
생애
별칭무능왕

2. 어린 시절

엔리케는 1425년 바야돌리드에서 카스티야의 후안 2세와 아라곤의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1]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페르난도 1세의 딸이었다. 엔리케는 누나 엘레오노르를 제치고 아스투리아스 공이 되어 카스티야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1]

그가 태어날 당시 카스티야 왕국은 알바로 데 루나가 국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루나는 어린 엔리케를 자신의 통제하에 두기 위해 세고비아에 별도의 궁정을 마련해주고, 그의 교육과 주변 인물 선정에 깊이 관여했다.[24] 이때 엔리케의 동료로 선발된 인물 중에는 훗날 그의 최측근이 되는 후안 파체코도 있었다. 엔리케의 어린 시절은 알바로 데 루나, 아라곤의 인판테스, 그리고 다른 귀족들 간의 끊임없는 권력 다툼 속에서 보냈다. 1444년 10월 10일, 그는 하엔의 최초이자 유일한 공작이 되었다.[2]

2. 1. 부왕(父王)과 루나

엔리케가 태어날 무렵 카스티야는 재상 루나가 국왕의 총신으로서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그의 전횡으로 인해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혼란스러운 시대였다. 부왕 후안 2세는 정치에 무관심하고 무능하여 사실상 루나의 꼭두각시나 다름없었다. 루나는 젊은 시절부터 후안 2세를 대신해 실권을 행사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다.[40]

엔리케는 1425년 바야돌리드에서 부왕 카스티야의 후안 2세와 모후 아라곤의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나 아스투리아스 공으로서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1] 당시 카스티야는 알바로 데 루나의 강력한 영향력 아래 있었고, 그는 어린 엔리케의 주변 인물과 교육에도 관여하려 했다. 이 시기 엔리케의 측근으로 후안 파체코가 등장했으며, 카스티야 정국은 루나, 아라곤의 인판테스, 그리고 다른 귀족들 간의 끊임없는 권력 다툼으로 불안정했다.

1445년, 엔리케는 올메도 전투에서 부왕을 도와 아라곤의 인판테스 세력을 격파하는 데 기여했다.[2] 이 전투의 승리는 결과적으로 루나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엔리케와 파체코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2. 1. 1. 후안 2세의 초년

부왕 후안 2세는 선왕 엔리케 3세(1379~1406)가 병약하여 27세의 젊은 나이에 일찍 사망하자 생후 약 22개월만에 즉위하였다. 섭정이 끝나고 1419년 3월, 성인이 된 후안 2세의 친정이 시작되었으나, 후안 2세의 사촌 형제들 간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이로 인해 카스티야 귀족들도 분열되어 파벌이 형성되었다.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1세의 아들들인 엔리케(1400~1445)와 그의 형 후안(1398~1479) 왕자는 부모로부터 상속받은 영지와 넓은 인맥을 카스티야 내에 가지고 있었다.[25] 그들은 부친 페르난도 1세가 1412년 아라곤 국왕으로 선출된 후에도 카스티야 왕실에 남아 있었다. 인판테[26] 후안과 엔리케로 대표되는 '아라곤파' 귀족들은 왕의 관직 임용권을 행사하는 등 국정 혼란을 야기했다.[27]

엔리케는 1425년 바야돌리드의 Casa de las Aldabas|카사 데 라스 알다바스es(현재 소실됨)에서 태어났다. 그는 카스티야의 후안 2세와 아라곤의 마리아의 아들이었으며, 그의 어머니 마리아는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1세의 딸이었다. 엔리케는 누나인 엘레오노르를 제치고 아스투리아스 공이 되어 카스티야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1]

엔리케가 태어났을 당시, 카스티야는 알바로 데 루나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며, 그는 엔리케의 측근을 선택하고 그의 교육을 지시하려 했다. 엔리케의 또래 측근 중에는 훗날 그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 된 후안 파체코가 있었다. 귀족들, 알바로 데 루나, 그리고 아라곤의 인판테스 사이의 권력 투쟁, 화해, 음모는 끊이지 않았다.

1444년 10월 10일, 엔리케는 하엔의 최초이자 유일한 공작이 되었다.[2] 1445년, 그는 올메도 전투에서 승리하여 아라곤의 인판테스 세력을 격파했다. 올메도 전투에서의 승리 이후, 알바로 데 루나의 권력은 약화되었고, 엔리케 공과 후안 파체코의 영향력은 커졌다.

2. 1. 2. 권력 투쟁

엔리케는 1425년 바야돌리드 테레사 길 거리의 카사 데 라스 알다바스(현재는 소실됨)에서 태어났다. 그는 카스티야의 후안 2세와 아라곤의 마리아의 아들이었으며, 그의 어머니는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1세의 딸이었다. 그는 누나인 엘레오노르를 제치고 아스투리아스 공이 되어 카스티야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1]

엔리케가 태어났을 당시 카스티야는 트루히요 공작 알바로 데 루나의 강력한 영향 아래 있었다. 알바로 데 루나는 엔리케의 측근을 직접 선택하고 그의 교육 방향까지 결정하려 했다. 이 시기 엔리케의 측근 중에는 이후 그의 가장 가까운 조력자가 되는 후안 파체코가 있었다. 당시 카스티야 정국은 알바로 데 루나, 아라곤의 인판테스(왕자들), 그리고 다른 귀족들 사이의 끊임없는 권력 투쟁, 일시적인 화해, 그리고 배후의 음모로 매우 불안정했다.

1444년 10월 10일, 엔리케는 하엔의 최초이자 유일한 공작이 되었다.[2] 1445년에는 올메도 전투에서 아라곤의 인판테스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의 승리는 중요한 정치적 전환점이 되었다. 오랜 기간 권력의 중심에 있던 알바로 데 루나의 힘은 약해지기 시작했고, 반대로 엔리케 공과 그의 측근 후안 파체코의 정치적 영향력은 크게 강화되었다.

2. 1. 3. 실각과 복귀

귀족 연합의 압박으로 1427년 9월 루나는 실각했고[34], 그의 정적인 인판테 엔리케는 정치 일선에 복귀하며 이전의 권력을 되찾았다. 그러나 귀족 연합 내 분열이 발생하고 귀족들의 요청이 이어지면서, 루나는 실각한 지 5개월 만인 1428년 2월에 다시 정계로 돌아왔다. 이로 인해 인판테 엔리케와의 권력 투쟁이 재개되었다. 엔리케와 귀족 연합이 카스티야레온에 대한 후안 2세 국왕의 지배력을 강화하려는 루나의 정책을 지속적으로 방해하자, 1428년 6월 후안 2세는 인판테 엔리케에게 궁정을 떠나라고 명령했다.

1429년, 인판테 엔리케의 형이자 아라곤의 왕인 알폰소 5세(재위 1416년 ~ 1458년)는 엔리케와 공모하여 카스티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35] 아라곤과 나바라 연합군이 자드라케까지 침공했으나, 후안 2세의 왕비이자 알폰소 5세의 누이인 마리아의 중재 노력 덕분에 실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듬해인 1430년, 양국 간에 마자노 조약이 체결되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지만, 이 일로 인해 인판테 엔리케는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36]

2. 1. 4. 올메도 전투

1445년 5월 19일, 올메도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는 카스티야의 후안 2세와 그의 총신 알바로 데 루나가 이끄는 국왕군과, 아라곤의 인판테스(왕자들) 및 이들과 연합한 카스티야 반 국왕파 귀족들 사이의 싸움이었다.[37] 당시 아스투리아스 공이었던 엔리케 4세는 아버지 후안 2세를 따라 국왕군 측에서 참전하여 싸웠다.[2]

전투는 알바로 데 루나가 이끈 국왕군의 대승으로 끝났다. 이 전투에서 국왕군에 맞섰던 아라곤의 인판테 엔리케(페르난도 1세의 아들)가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37] 이로써 루나는 강력한 정치적 경쟁자 중 한 명을 제거하게 되었다.[37][38][39] 올메도 전투에서의 승리 이후, 단기적으로는 알바로 데 루나의 권력이 더욱 공고해지는 듯 보였으나, 장기적으로는 엔리케 4세와 그의 측근 후안 파체코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지는 계기가 되었다.[2]

2. 2. 정치 동맹과 정변

재상 루나의 최후 (1453년)


왕세자 시절 엔리케는 재상 알바로 데 루나의 지나친 권력 남용이 부당함을 알고 있었지만, 이미 권력을 장악한 루나 앞에서 뚜렷한 해결책 없이 무력한 상태였다.[40] 그러나 1447년, 부왕 후안 2세가 이사벨과 재혼하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40] 계비 이사벨은 엔리케보다 세 살 어렸지만, 포르투갈 주앙 1세의 손녀답게 재상 루나를 상대로 권력 투쟁을 벌였다. 계비 이사벨과 왕세자 엔리케(1425~1474)는 재상 루나를 제거하여 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공동의 목표를 가졌기에 정치적 동맹을 맺었다.[40]

계비 이사벨이 카스티야에 입궐하자, 루나(1390~1453)는 이사벨을 자신의 통제하에 두려 했고 왕과 왕비의 결혼 생활까지 간섭했다. 이사벨은 자신이 공주 출신이 아님에도 왕비가 될 수 있었던 것이 루나 덕분임을 알았지만, 그의 지나친 간섭에 매우 불쾌감을 품었다.[41]

그러던 중 왕실 회계사가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는 루나가 사주한 일이었다.[41] 엔리케와 계비 이사벨은 이 사건을 명분으로 부왕 후안 2세를 설득하여 루나를 체포하는 1453년 정변[42]을 일으켰다.[43] 루나는 후안 2세의 전 왕비 아라곤의 마리아(1403~1445)를 독살했다는 의심도 받고 있었다.[41] 1453년 6월 2일, 간신 루나는 참수되었고[44] 정변은 성공했다. 그러나 부왕 후안 2세(1405~1454)는 어린 시절부터 깊이 의지하고[41] 총애하던 신하의 죽음을 슬퍼하다 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1454년 7월 20일에 사망했다.

3. 즉위와 통치

1454년 7월 20일 아버지 후안 2세가 사망하자, 다음 날 엔리케 4세는 카스티야의 왕으로 즉위했다.

즉위 후 엔리케 4세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포르투갈과의 동맹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1455년 후아나와 재혼했다. 그녀는 에두아르두 1세의 딸이었으며, 엔리케 4세는 1456년 그녀의 오빠인 아폰수 5세를 엘바스에서 만나기도 했다. 또한 아라곤의 후안 2세의 간섭을 막고, 프랑스 및 아라곤과의 평화를 구축하며, 여러 귀족 세력에 대한 사면을 단행하는 등 국내외 안정을 꾀했다.[1][3]

엔리케 4세는 그라나다 토후국에 대한 공세를 재개하기 위해 쿠에야르에서 코르테스(의회)를 소집했다.[1] 1455년부터 1458년까지 이어진 군사 작전은 전면전보다는 소규모 약탈과 소모전 양상으로 진행되었는데, 이는 귀족들과 백성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 시기 국정 운영은 빌레나 후작 후안 파체코와 그의 동생 페드로 히론 아쿠냐 파체코가 주도했다. 엔리케 4세는 이들의 막강한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벨트란 데 라 쿠에바, 미겔 루카스 데 이란조, 고메스 데 카세레스 등 다른 인물들을 고문으로 임명하기도 했다.[4]

1458년 알폰소 5세가 사망하고 그의 동생인 나바라의 후안 2세가 아라곤 왕위를 계승하면서 카스티야 정국은 다시 불안정해졌다. 후안 2세는 후안 파체코에게 반감을 가진 귀족들의 반란을 지원하며 카스티야 정치에 노골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 파체코가 엔리케 4세의 지원을 받아 이전 총신이었던 알바로 데 루나의 재산을 차지하려 하자, 루나의 미망인이 멘도사 가문과 손을 잡으면서 귀족 세력 간의 분열은 더욱 심화되었다. 이러한 갈등은 1460년 3월, 다수의 귀족들이 참여하는 반(反) 파체코 귀족 연맹의 결성으로 이어졌다.[5][6][7] 이들은 왕실 재정 지출을 통제하고 엔리케 4세의 이복동생이자 아스투리아스 공인 알폰소 왕자를 지지하며 왕권에 도전했다.[8]

아라곤의 후안 2세의 정치 공작에 맞서기 위해, 엔리케 4세는 나바라 왕국을 침공하여 후안 2세와 갈등 관계에 있던 카를로스 왕자를 지원했다. 카를로스는 나바라의 정당한 상속자였으나, 아버지 후안 2세가 왕위 양도를 거부하자 1450년부터 반란을 일으킨 상태였다.[1] 나바라 침공은 군사적으로는 성공했지만, 엔리케 4세는 국내 귀족 연맹의 압력에 밀려 1461년 8월 그들과 평화 협정을 맺었다. 이 협정은 멘도사 가문의 세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지만, 동시에 아라곤의 후안 2세가 카스티야 문제에 계속 개입할 여지를 남겨주었다.[9]

한편, 후안 2세는 카탈루냐 공국과도 심각한 갈등을 겪고 있었다. 1461년 그의 아들 카를로스 왕자가 사망하자, 카탈루냐는 아라곤 왕권에 반발하여 1462년 8월 11일 엔리케 4세를 바르셀로나 백작으로 추대했다.[10] 이는 카탈루냐를 둘러싼 엔리케 4세와 후안 2세 간의 대리전 양상으로 번졌으나, 엔리케 4세는 카탈루냐에서 실질적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오히려 이 개입으로 인해 프랑스와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프랑스가 "바욘 조약"을 통해 후안 2세를 지원하면서 카스티야 경제는 어려움을 겪었다.[1] 결국 엔리케 4세는 "바욘의 판결"에 동의하여 카탈루냐에 대한 권리 주장을 포기하게 되었다.[11]

세고비아의 알카사르에 있는 엔리케 4세의 스테인드 글라스


엔리케 4세는 재위 기간 동안 마드리드 왕립 알카사르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이곳은 이후 마드리드 왕궁으로 대체되었다.

3. 1. 비정한 배신

어린 이사벨 1세와 그 가족. 엔리케 4세의 계모 이사벨은 의붓아들의 배신과 추방으로 인한 충격으로 정신 이상 증세를 보였다.


엔리케 4세는 1454년 왕위에 오르자마자, 계모인 이사벨과 어린 이복동생 이사벨 1세, 알폰소를 궁정에서 내쫓았다.[45] 그는 이들을 자신의 왕위를 위협할 수 있는 잠재적 경쟁자로 여겼다.[46] 특히 계모 이사벨이 1453년 정변 당시 보여준 정치적 수완과 백성들 사이에서의 인기는 엔리케 4세에게 큰 불안감을 주었다. 그는 계모가 언젠가 자신의 왕위를 빼앗아 남동생 알폰소에게 넘겨줄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47] 결국 엔리케 4세는 이들을 아레발로(Arévalo)라는 작은 도시로 추방하고 지속적으로 감시했으며, 생활비로는 아주 적은 연금만을 지급하여 궁핍한 생활을 하도록 방치했다.[46]

갑작스러운 추방과 배신은 젊은 미망인이었던 계비 이사벨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결국 정신장애를 앓게 되었다.[48] 남편 후안 2세의 사망으로 26세에 홀로 된 것도 모자라, 한때 정치적 동맹 관계였던 의붓아들에게 배신당하고 궁궐에서 쫓겨난 충격은 그녀를 깊은 절망에 빠뜨렸다. 둘째 아들 알폰소를 낳은 후 겪었던 우울증은 더욱 심해졌고,[44] 병세는 점차 악화되어 나중에는 완전히 실성하여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

계모 이사벨이 정신병으로 인해 더 이상 정치적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엔리케 4세는 그제야 이복동생들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살라망카 대학교의 유명 교수를 아레발로로 보내 이사벨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했다.[49] 이는 왕가의 공주가 정략결혼을 통해 국제 외교 무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이었다.[50] 1462년, 이사벨이 11살이 되자 엔리케 4세는 이사벨과 알폰소를 세고비아 궁궐로 불러들여 곁에 두고 직접 감시했다.[45]

3. 2. 4년간의 내전

엔리케 4세의 통치는 아버지 후안 2세처럼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총신 후안 파체코의 실정이 이어지며 카스티야의 상황은 악화되었다. 1462년 왕비에게서 딸 후아나가 태어났지만, 친부가 엔리케 4세가 아니라 왕비와 가까웠던 벨트란 데 라 쿠에바 남작이라는 소문이 돌았다.[43] 엔리케 4세는 이전 결혼에서 13년간 자녀가 없었고, 저주로 인한 발기부전을 이유로 혼인이 무효화된 적이 있어[51][52] 성불구자라는 의심을 받았다.[53][54][55] 이러한 배경 속에서 귀족들은 후아나의 왕위 계승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1464년, 후안 파체코를 중심으로 한 귀족 세력은 엔리케 4세의 이복동생인 알폰소를 왕으로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켰다.[43] 이는 수십 년간 이어진 무능한 통치에 대한 불만과 왕실의 추문을 끝내려는 시도였다. 귀족들은 아빌라의 희극이라 불리는 사건을 통해 엔리케 4세의 허수아비를 폐위시키고 알폰소를 경쟁 왕으로 선포하며 내전을 본격화했다. 내전 중 1467년에는 제2차 올메도 전투가 벌어졌으나 승패를 가리지 못했다.

내전은 4년간 이어졌고, 엔리케 4세가 후아나와 알폰소의 결혼을 통한 타협안을 고려하던 중, 1468년 알폰소 왕자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알폰소 지지 세력(반 국왕파)은 알폰소의 누나이자 엔리케 4세의 이복동생인 이사벨에게 반란군의 중심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다.[57] 하지만 이사벨은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엔리케 4세에게 내전 종식을 위한 평화 협상을 제안했다.

그 결과 1468년 9월 19일, 토로스 데 귀산도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 협정을 통해 후아나 대신 이사벨이 차기 왕위 계승자로 공식 인정받았다. 또한 이사벨은 자신이 원하지 않는 결혼을 거부할 권리와 엔리케 4세가 동의하지 않는 결혼은 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확보했다.[58][57] 이로써 4년간의 내전은 일단락되었고, 이사벨은 카스티야의 유력한 차기 군주로 부상하게 되었다.

3. 3. 후계 문제

엔리케 4세는 15세 때 아라곤 왕후안 2세와 나바라 여왕블랑카 1세의 딸이자 외사촌인 블랑카 2세와 결혼했으나, 13년 동안 부부 관계를 갖지 않았다. 결국 혼인 무효 소송을 제기했고, 공식 검사에서 블랑카가 여전히 처녀임이 확인되었다. 교황은 이 결혼이 어떤 "마법"에 의해 방해받았다고 판단하여 혼인 무효를 승인했다. 이 첫 결혼의 실패는 엔리케 4세의 후계 문제에 시작부터 영향을 미쳤다.

1455년, 엔리케 4세는 포르투갈 왕두아르테 1세의 딸이자 자신의 사촌인 후아나와 재혼했다. 이 결혼을 통해 딸 후아나가 태어났지만, 왕비 후아나에게는 베르트란 데 라 쿠에바( Beltrán de la Cuevaes )라는 애인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공주 후아나는 '후아나 라 벨트라네하'라는 경멸적인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는 공주의 친자 논란과 함께 왕위 계승 자격에 대한 심각한 의문을 제기했고, 엔리케 4세의 유약함, 왕비의 부정한 행실과 맞물려 귀족들의 불만을 키우며 훗날 벌어질 내전의 불씨가 되었다.

엔리케 4세는 자신의 후계자로 딸 후아나를 지명하고자 했으나, 많은 귀족들은 후아나의 정통성을 의심하며 이복동생 이사벨과 알폰소를 지지했다. 엔리케 4세는 이사벨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그녀를 외국 군주, 예를 들어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나 프랑스 루이 11세의 동생인 베리 공작 샤를과 결혼시키려 했다.[59] 그러나 이사벨은 토로스 데 귀산도 협정에서 보장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며 이를 거부했다.[60]

결정적으로 1469년 10월 19일, 이사벨은 엔리케 4세의 동의 없이 아라곤의 페르난도 왕세자와 바야돌리드에서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렸다.[61][62][63] 이 결혼은 토로스 데 귀산도 협정에서 '엔리케 4세가 동의하지 않는 결혼은 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명백히 위반한 것이었다. 결혼 소식에 격노한 엔리케 4세는 이사벨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한다고 선언했다.[64]

1474년 엔리케 4세가 마드리드에서 사망하자, 카스티야의 왕위 계승 문제는 극단적인 갈등으로 치달았다. 엔리케 4세의 뜻에 따라 딸 후아나가 왕위 계승자로 선포되었으나, 이사벨 역시 자신이 적법한 계승자임을 주장하며 즉위를 선언했다. 이에 따라 이사벨을 지지하는 세력(아라곤 연합군 포함)과 후아나를 지지하는 세력(포르투갈 연합군 포함) 사이에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결국 전쟁은 이사벨 측의 승리로 끝났고, 이사벨 1세가 카스티야의 여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4. 사망

엔리케 4세는 1474년 마드리드에서 사망했다.[65] 그는 후계자 문제를 명확히 매듭짓지 못했고, 이로 인해 사후 왕위 계승을 둘러싼 분쟁이 벌어졌다.[66] 카스티야 귀족들은 엔리케 4세의 이복 여동생인 이사벨과 딸로 알려진 후아나를 각각 지지하며 둘로 나뉘었다.

호세 마리아 로드리게스 데 로사다의 예술적 구상, c. 1892–1894


엔리케 4세 사후, 카스티야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후아나는 포르투갈아폰수 5세의 지원을 받았다. 아폰수 5세는 후아나와 정혼한 뒤 1475년 카스티야를 침공했다. 반면, 최종적인 승자가 된 이사벨 1세는 아라곤의 지원을 받았다.[18] 그녀의 남편은 아라곤의 왕자 페르난도였다. 프랑스루이 11세는 처음에는 후아나를 지지했지만, 1476년 토로 전투에서 이사벨과 페르난도가 이끄는 군대가 포르투갈군을 상대로 승리하자[18] 프랑스는 후아나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1478년 이사벨과 평화 조약을 맺었다.

토로 전투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전쟁은 4년간 더 이어졌다. 마침내 1479년, 포르투갈과 카스티야는 알카소바스 조약을 체결했고, 이 조약을 통해 이사벨 1세는 카스티야의 왕위를 확고히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분쟁의 배경에는 엔리케 4세 생전의 결정이 있었다. 1468년, 엔리케 4세에 대항하던 반란 세력의 구심점이었던 그의 이복동생 알폰소가 갑자기 사망하자(사인은 역병으로 추정되나 독살설도 제기됨), 알폰소는 유언으로 왕위를 누나 이사벨에게 넘겼다. 반란군은 이사벨을 새로운 지도자로 추대했고, 토로스 데 기산도 조약 협상을 통해 엔리케 4세는 후아나 대신 이사벨을 공식 후계자로 인정하게 되었다. 엔리케 4세는 이 결정을 되돌리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사망할 때까지 이사벨과 표면적인 평화를 유지했다.

5. 왕위 계보와 혼맥

엔리케 4세


엔리케 4세는 1425년 바야돌리드에서 카스티야의 후안 2세와 아라곤의 마리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머니 마리아는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1세의 딸이었다. 그는 누나 엘레오노르를 제치고 아스투리아스 공이 되어 카스티야 왕위 계승자가 되었다.[1]

15세 때인 1440년, 엔리케는 아라곤 왕 후안 2세와 나바라 여왕 블랑카 1세의 딸이자 자신의 사촌인 블랑카 2세와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 생활 13년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성관계가 전혀 없었다. 엔리케가 혼인 무효 소송을 제기했을 때, 공식 조사 결과 블랑카가 여전히 처녀임이 확인되었다. 로마 교황은 이 결혼이 "마법"에 의해 방해받았다는 이유로 혼인 무효를 승인했다. 이후 블랑카는 친정으로 보내져 감금되었다.

1455년, 엔리케 4세는 포르투갈 왕 두아르테 1세와 왕비 레오노르의 딸이자, 자신과 전처 블랑카 2세 모두에게 사촌인 후아나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이 결혼을 통해 딸 후아나가 태어났으나, 왕비 후아나에게는 베르트란 데 라 쿠에바( Beltrán de la Cueva|베르트란 데 라 쿠에바es )라는 애인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딸 후아나는 '벨트라네하'(La Beltraneja, 벨트란의 딸이라는 경멸적 의미)라는 별명으로 불리게 되었다. 공주 후아나의 출생에 대한 의혹과 왕위 계승 자격 논란은 엔리케 4세의 유약함, 왕비의 불륜 문제, 귀족 세력의 부상과 맞물려 왕국 내 불안정을 심화시켰고, 결국 엔리케 4세 사후 왕위 계승 분쟁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엔리케 4세의 조상'''
1대2대3대4대
1. 엔리케 4세2. 카스티야의 후안 2세4. 카스티야의 엔리케 3세8. 카스티야의 후안 1세
9. 아라곤의 엘레오노르
5. 랭커스터의 캐서린10. 곤트의 존
11. 카스티야의 콘스탄스
3. 아라곤의 마리아6. 아라곤의 페르난도 1세12. 카스티야의 후안 1세
13. 아라곤의 엘레오노르
7. 알부케르케의 엘레오노르14. 산초 알폰소
15. 포르투갈의 베아트리스


6. 결혼

1440년, 아스투리아스 공 시절 15세의 나이로 나바라의 블랑슈 2세와 결혼했다.[12] 이 결혼은 1436년 카스티야나바라 간의 평화 협상의 일환으로 합의된 것이었다.[12][1] 후안 데 세르반테스 추기경이 결혼식을 주례했다. 그러나 엔리케는 결혼 후 13년 동안 블랑슈와 성관계를 갖지 않았고, 자식도 얻지 못했다.[22] 1453년 5월, 엔리케는 혼인 무효를 신청했다. 공식 조사 결과 블랑슈는 여전히 처녀임이 확인되었고,[13][14] 세고비아의 주교 루이스 바스케스 데 아쿠냐는 엔리케가 저주로 인해 블랑슈와의 관계에서만 성 불능 상태라고 판결하며 결혼 무효를 선언했다.[13][14] 당시 세고비아의 매춘부들은 엔리케와 성관계를 가졌다고 증언하여 그가 일반적으로 성 불능은 아님을 시사했다.[1] 교황 니콜라오 5세는 같은 해 12월 교황 칙서로 혼인 무효를 승인하고, 엔리케가 포르투갈 국왕의 여동생과 재혼할 수 있도록 특별 면제를 제공했다.[1][15] 블랑슈는 나바라로 돌려보내졌다.

1455년, 엔리케 4세는 포르투갈의 아폰수 5세의 여동생인 후아나와 재혼했다.[1][3] 이 결혼은 포르투갈과의 동맹 강화를 위한 것이었다. 결혼 협상은 엔리케의 성 불능 소문 때문에 길어졌으며, 후아나는 지참금 없이 결혼했다.[1] 결혼 6년 후인 1462년, 딸 후아나가 태어났다.[22] 그러나 귀족들은 후아나가 엔리케 4세의 친딸이 아니라 왕의 총신이었던 벨트란 데 라 쿠에바( Beltrán de la Cuevaes )의 딸이라는 의혹을 제기하며 'La Beltranejaes'라는 별명을 붙였다. 이 때문에 후아나의 왕위 계승권은 귀족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했다.[22] 후아나 공주의 친부에 대한 논란은 왕비 후아나가 이후 다른 애인(주교 폰세카의 조카)과의 사이에서 두 명의 아이를 더 낳았을 때 더욱 강화되었다. 많은 동시대 역사가들과 연대기 작가들은 엔리케 4세가 성적으로 무능력하거나 동성애자였다고 기록했지만,[19] 이러한 기록들은 대부분 후아나의 왕위 계승 경쟁자였던 이복동생 이사벨 1세의 통치 하에 작성되거나 수정되었기 때문에 그 객관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또한, 앞서 매춘부들이 엔리케와 성관계를 가졌다고 증언한 사실도 고려해야 한다.[19] 귀족들의 반발이 커지자 엔리케 4세는 1468년 왕비 후아나를 추방하고 결혼 무효를 선언했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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