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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곤의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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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라곤의 마리아는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의 딸로, 1500년 포르투갈의 마누엘 1세와 결혼하여 포르투갈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10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그 중에는 포르투갈의 주앙 3세, 신성 로마 제국 황후 이사벨라 등이 있다. 마리아는 정치적으로는 큰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종교적인 활동과 자녀 교육에 힘썼으며, 1517년 사망하여 제로니무스 수도원에 묻혔다. 그녀의 결혼은 1580년 포르투갈 왕위 계승 위기로 이어져 손자인 펠리페 2세가 포르투갈 왕위를 계승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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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곤의 마리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마리아 왕비의 스테인드 글라스 초상
스테인드 글라스 묘사, 1510–1513년경
칭호포르투갈 왕비
재위 기간1500년 10월 30일 – 1517년 3월 7일
배우자마누엘 1세
자녀자세한 내용은 여기...
가문
왕가트라스타마라 가문
아버지페르난도 2세
어머니이사벨 1세
출생 및 사망
출생일1482년 6월 29일
출생지카스티야 왕국, 코르도바
사망일1517년 3월 7일
사망지포르투갈 왕국, 리스본
매장지제로니무스 수도원, 리스본, 포르투갈 왕국
결혼
결혼일1500년 10월 30일
결혼 장소알카세르 두 살
자녀
자녀 목록주앙 3세, 포르투갈 왕
이사벨, 신성 로마 황후
베아트리스, 사보이아 공작 부인
루이스 드 베자
페르난두, 과르다 공작
아폰수 추기경
엔히크, 포르투갈 왕
두아르테, 기마랑이스 공작

2. 생애

아라곤 왕 페르난도 2세와 카스티야 여왕 이사벨 1세의 셋째 딸(넷째)로 태어났다. 마리아는 마누엘 1세의 두 번째 왕비였다. 마누엘 1세의 첫 번째 왕비는 마리아의 맏언니 이사벨이었으나 1498년에 사망하였다. 마리아는 마누엘 1세와의 사이에서 10명의 자녀를 낳았지만, 1517년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

1518년, 마누엘 1세는 이사벨 및 마리아의 조카 레오노르(마리아의 둘째 언니 후아나 여왕의 딸)와 세 번째 결혼을 했다.

2. 1. 초기 생애

마리아는 1482년 6월 29일, 코르도바에서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와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가톨릭 군주)의 셋째 딸이자, 다섯 명의 생존 자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마리아에게는 사산된 쌍둥이가 있었는데, 마리아의 쌍둥이 성별에 대해서는 자료마다 차이가 있다.[1] 그녀는 자매들과 마찬가지로 가사뿐만 아니라 산술, 라틴어, 여러 언어, 역사, 철학, 고전에 대한 철저한 교육을 받았다.

2. 2. 포르투갈 왕비

스페인 공주로서, 마리아의 결혼은 유럽 정치에서 중요했다. 마리아의 맏언니 아스투리아스 공주 이사벨라가 마누엘 1세의 첫 번째 아내였지만, 1498년 이사벨라가 사망하면서 마누엘 1세는 재혼해야 했다. 마리아는 포르투갈 왕의 다음 신부가 되어 이베리아 왕가와의 왕조적 연대를 재확인했다.[1]

마누엘과 마리아는 1500년 10월 30일 알카세르 두 살에서 결혼했고,[2] 마리아는 지참금으로 비세우와 토레스 베드라스를 받았다. 마리아는 10명의 자녀를 두었고, 그 중 8명이 성인이 되었는데, 포르투갈의 주앙 3세, 신성 로마 제국 황후 이사벨, 사보이 공작 부인 베아트리스 등이 그들이다.[1]

마리아 여왕은 창백하고 마른 외모에, 쑥스러운 턱을 가지고 있었으며, 매우 진지한 성격을 지녔다고 묘사되었다. 포르투갈 궁정이 유럽에서 가장 부유했던 시기에 여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으로서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진지하고 독실했던 마리아는 바느질, 신앙생활, 그리고 부모님의 가르침에 따라 자녀 교육을 감독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마누엘 1세는 마리아의 독실한 성품을 높이 평가하여 존경심을 표하고 임신 기간 동안 값비싼 옷과 보석을 하사했다.[1]

마리아 여왕은 정치적으로 활발하게 활동하지는 않았지만, 연대기 작가들은 마리아가 때때로 남편을 설득하여 자비를 베풀도록 한 점을 칭찬했다. 그러나 마리아는 종교 문제에는 다소 관여했다. 마리아는 맘루크 왕국을 정복하고, 메카메디나를 파괴하며, 예루살렘과 같은 기독교 성지를 탈환하려는 계획을 포함한 마누엘 1세의 종교-제국 프로젝트를 지지했다. 마리아는 리스본에 있는 제로니무스 수도원을 공동 설립했다.[3]

포르투갈에서의 삶 동안 마리아는 거의 끊임없이 임신 상태였다. 일반적으로 마리아는 출산과 다음 임신 사이에 몇 달밖에 쉬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은 마리아의 건강을 지속적으로 악화시켰고, 1516년 출산 후에는 기진맥진하여 일시적으로 정신 착란을 겪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마리아는 1517년 3월 7일 리스본에서 사망했으며, 벨렘에 있는 제로니무스 수도원에 묻혔다.[1]

3. 가계

마리아의 가계도
아라곤의 마리아아버지: 페르난도 2세할아버지: 후안 2세[1]증조할아버지: 페르난도 1세[3]
증조할머니: 알부르케르케의 레오노르[3]
할머니: 후아나 엔리케스[1]증조할아버지: 파드리케 엔리케스 데 멘도사[4]
증조할머니: 마리아나 페르난데스 데 코르도바[4]
어머니: 이사벨 1세할아버지: 후안 2세[2]증조할아버지: 엔리케 3세[5]
증조할머니: 랭커스터의 캐서린[5]
할머니: 포르투갈의 이사벨[2]증조할아버지: 포르투갈의 콘스타블 후안[6]
증조할머니: 바르셀로스의 이사벨[7]


  • 부 : 페란도 2세
  • 모 : 이사벨 1세
  • 언니 : 이사벨, 후아나
  • * 형부 : 카스티야의 펠리페 1세
  • ** 조카 : 레오노르 데 아우스트리아, 카를 5세, 이사벨 데 아우스트리아, 페르디난트 1세, 마리아 폰 외스터라이히, 카탈리나 데 아우스트리아
  • 동생 : 아라곤의 캐서린
  • * 제부 : 헨리 8세
  • ** 조카 : 메리 1세

  • 남편(이자 형부) : 마누엘 1세
  • * 주앙 3세 포르투갈 국왕
  • * 이사벨 신성 로마 제국의 황후
  • ** 펠리페 2세 스페인과 포르투갈 국왕.
  • ** 마리아: 막시밀리안 2세의 사촌이자 아내.
  • ** 페르디난드
  • ** 후아나: 포르투갈 왕자 주앙 마누엘의 사촌 겸 아내이자 포르투갈의 세바스티앙 1세의 어머니.
  • ** 후안
  • * 베아트리스: 사보이 공작 부인
  • * 루이스: 베자 공작
  • ** 안토니우: 크라투 수도원장
  • * 페르난두: 구아르다 공작
  • * 아폰수: 추기경
  • * 마리아
  • * 엔리케: 추기경
  • * 두아르테
  • * 안토니오

4. 유산

1580년, 이 결혼을 통해 맺어진 왕조 간의 연결은 1580년 포르투갈 왕위 계승 위기로 이어졌고, 그녀의 손자 스페인 펠리페 2세를 포르투갈의 펠리페 1세로 만들었다.[1]

참조

[1] 간행물 Ferdinand V. of Castile and Leon and II. of Aragon
[2] 간행물 Isabella I, Queen of Spain
[3] 간행물 John II of Aragon
[4] 논문 Los Enríquez, Almirantes de Castilla https://dialnet.unir[...]
[5] 간행물 Henry III, King of Castille
[6] 간행물 Philippa of Lancaster
[7] 서적 Medieval Iberia https://books.google[...] Taylor & Francis 2018-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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