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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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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야와는 고대 킬리키아 지역에 존재했던 왕국으로, 현재의 아다나에 해당한다. 히타이트 문서에서 미케네 그리스인을 지칭하는 이름과 유사한 이름으로 언급되었으며, 아다나와, 다누나임 등의 명칭으로도 불렸다. 히야와는 킬리키아 평원을 중심으로 세이한강과 지한강 유역에 위치했으며, 수도는 아다나였다. 청동기 시대부터 철기 시대에 걸쳐 존재했으며, 주변국들과의 관계 속에서 신아시리아 제국과 대립하기도 했다. 히야와는 루위어, 페니키아어, 그리스어 등 다양한 언어와 문자를 사용했으며, 몹소스와 같은 그리스 신화적 인물과의 연관성을 보여주며, 이는 히야와에 그리스계 인구의 존재를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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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야와
기본 정보
히야와와 수도 아다나와를 포함한 신히타이트 국가들
히야와와 수도 아다나와를 포함한 신히타이트 국가들
일반 명칭ḫiyawa
시대철기 시대
정치 체제군주제
수도아다나와
공용어상형 루위어
고대 그리스어
페니키아어
종교루위아 종교
역사
시작기원전 12세기경
사건 시작청동기 시대 붕괴
이전 국가히타이트 제국
계승 국가킬리키아 왕국
종료기원전 8세기
통치자
직책
통치자 1카티야스
통치자 1 재임 기간기원전 858년경 - 831년경
통치자 2키르리
통치자 2 재임 기간기원전 831년경
통치자 3아와리쿠스/와리쿠스
통치자 3 재임 기간기원전 738년경 - 709년
현재 국가
현재 국가튀르키예
언어별 명칭
네오아시리아 아카드어(Que)
네오바빌로니아 아카드어(Ḫuwê)
상형 루위어"" (Ḫiyawa)
"" (Adanawa)
기타

2. 명칭

히야와는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왕국의 고유한 루위아어 이름은 Ḫiyawa|히야와hlu인데, 이는 히타이트의 청동기 시대 텍스트에서 미케네 그리스인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된 이름과 매우 유사하다.

Ḫiyawahlu라는 이름은 여러 셈족 언어에서 다양한 형태로 기록되었다. 신 아시리아 자료에서는 , , 등으로, 아람어 자료에는 형태로 나타난다. 신 바빌로니아 자료에서는 로 기록되었다.[2][3]

히야와 왕국이 자국 상형 루위아 비문에서 사용한 또 다른 이름은 였다. 히야와에서 발견된 페니키아 비문은 Ḫiyawa|히야와hlu와 의 동의어로 (|translit=}})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페니키아 비문에서 히야와 사람들은 ()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아마도 아다나와 사람들을 묘사하는 것일 것이다. 이 이름은 후기 청동기 시대 텍스트에 언급된 Danuna의 땅, 바다 민족의 구성 집단 중 하나인 데넨과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

2. 1. 히야와 (Ḫiyawa)

Ḫiyawa|히야와hlu (𔗒𔓱𔗬𔔂hlu)는 히타이트의 청동기 시대 텍스트에서 미케네 그리스인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 ()와 매우 유사하다.[1] 이는 아카이오이(, 이전에는 로 불림)와도 관련이 있다. Ḫiyawa 왕국에 이 이름을 사용한 것은 초기 철기 시대에 서부 아나톨리아에서 이 지역으로 그리스 인구의 이주가 있었기 때문일 수 있다.[2]

라는 이름은 여러 형태로 셈족 언어에 기록되었다.[3]

언어표기
신 아시리아어(}}), (}} 및 }}), (}})[4]
아람어(𐡒𐡅𐡄oar)[5]
신 바빌로니아어(}})[6][7]



Ḫiyawa의 이름은 후기 바빌로니아의 (}})와 이집트의 ('''}}}})에도 해당하는데, 이들은 호메로스 텍스트에서 (Δαναοιgrc) 형태로 기록된 미케네 그리스인에 대한 지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8]

Çineköy 비문에서 왕 Awarikkus는 자신의 이름이 페니키아어로 (}}})로 표기된 Muksas(}})의 혈통에서 나왔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그리스 전설에서 킬리키아로 이주하여 철기 시대에 아나톨리아 남부 해안에 여러 그리스 정착지를 건설한 예언자 Mopsos와 관련된 그리스 이름 ()에 해당한다.[9] 헬레니즘 시대에 Ḫiyawa의 두 도시, Mopsouestia와 Mopsoukrēnē는 Mopsos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0]

Mopsos의 전설은 에게해에서 킬리키아로의 역사적인 인구 이동을 기록했는데,[11] 이는 Ḫiyawa의 통치 왕조가 그리스 식민지 개척자에 의해 설립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왕국의 이름과 관련이 있고, Ḫiyawa 내에 그리스인이 거주했음을 의미한다.[12] 기원전 5세기에 할리카르나소스의 그리스 작가 헤로도토스는 킬리키아의 인구가 (Υπαχαιοιgrc), 즉 '혼합 아카이아인'이라고 주장했다.[13]

따라서 철기 시대 후기까지 라는 이름이 지속된 것은 이 시대에 Ḫiyawa에 상당한 그리스인이 계속 존재했음을 반영했을 수 있다.[14] 이 인구는 결국 그리스어와 루위어를 모두 사용하기 시작했고, 인근 팜필리아와 유사하게 상당한 크리올화가 이루어졌지만,[15] 기원전 8세기까지 그리스어를 반만 하는 사람이나 심지어 전혀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다.[16]

Hiyawa에 그리스인이 존재했을 가능성과 Hiyawa 자체가 키즈와트나의 이전 영토에 위치했다는 사실 때문에, 쿠마르비 신화, 루위어 에서 (Πηγασοςgrc)라는 이름의 차용, 아시리아를 지칭하는 루위어 이름에서 그리스어로 라는 이름의 전파와 같은 특정 루위어 및 후르리안 요소가 이 지역을 통해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2. 2. 아다나와 (Adanawa)

히야와 왕국은 자국 상형 루위아 비문에서 Adanawa|아다나와hlu라는 이름을 사용했다.[1] 이는 현재의 아다나 지역을 가리킨다.[2]

히야와에서 발견된 페니키아 비문은 Ḫiyawa|히야와hlu와 Adanawa|아다나와hlu를 동의어로 𐤏𐤌𐤒 𐤏𐤃𐤍|ʿmq ʿdn|아다나 평원phn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3]

하지만 학자 로스티슬라프 오레쉬코는 기호 𔗢의 값이 -hiya-|히야hlu였으며, 따라서 𔐓𔗢𔗬𔔂|Aḫḫiyawa|아히야와hlu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했다.[4]

2. 3. 셈족 언어 명칭

Ḫiyawahlu라는 이름은 여러 형태로 셈족 언어에 기록되었다.[1]

  • 신 아시리아 자료:
  • * (}}[1]),
  • * (}}[1], }}[1]),
  • * (}}[1])
  • 아람어 자료: (𐡒𐡅𐡄oar)[1]
  • 신 바빌로니아 자료: (}}[2][3])

2. 4. 다누나임 (Danunayim)

페니키아 비문에서 히야와 사람들은 𐤃𐤍𐤍𐤉𐤌|다누나임phn이라고 불리는데[4], 이는 아다나와 사람들을 묘사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명칭은 후기 청동기 시대 문헌에 언급된 다누나의 땅과 관련이 있을 수 있으며, 바다 민족의 구성 집단 중 하나인 데넨과도 관련이 있을 수 있다.

히야와 왕 아와리쿠스의 신하였던 아자티와다스의 루위아-페니키아어 이중 언어 비문과 히야와 왕 아와리쿠스의 루위아-페니키아어 이중 언어 비문에서, 왕국(자신의 왕국)을 루위아어로는 Adanawa|아다나와hlu, 페니키아어로는 (땅)의 𐤃𐤍𐤍𐤉𐤌|다누나임phn으로 나타났다(불렀다).

아자티와다스의 비문은 아와리쿠스 왕을 상형 루위아어 용어 king of Adanawa|아다나와의 왕hlu의 대응어인 𐤌𐤋𐤊 𐤃𐤍𐤍𐤉𐤌|다누니아인의 왕phn으로 언급했다.

히야와의 명칭 𐤃𐤍𐤍𐤉𐤌|다누나임phn은 후기 바빌로니아 와 이집트 에도 해당하는데, 이들은 호메로스 문헌에서 Δαναοι|다나오이grc 형태로 기록된 미케네 그리스인을 지칭했던 것으로 보인다.

3. 지리

히야와는 킬리키아 평원에 위치했으며, 현재의 아다나 주에 해당한다. 히야와는 원래 킬리키아 평원의 북동쪽에 있는 산악 지역도 포함했지만, 신아시리아 제국과의 갈등으로 이 지역을 잃고 평원으로 축소되었다.[1]

3. 1. 위치

히야와는 고대 그리스 시대에 킬리키아로 알려진 영토의 동쪽, 특히 킬리키아 평원(Κιλικια Πεδιας|Kilikia Pediasgrc)이라 불리는 평야 지역에 위치했으며, 이곳은 현재의 아다나에 해당한다. 히야와의 경계는 남쪽으로는 지중해, 서쪽과 북쪽으로는 토로스 산맥, 동쪽으로는 아마누스 산맥이었다.[1] 남서쪽으로는 에르뎀리 평원을 따라 리몬루 강까지 뻗어 있었을 수 있으며, 심지어 서쪽으로는 아스펜도스와 제벨리레이스 다으까지 해안을 따라 뻗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1]

3. 2. 주요 도시

도시비고
아다나수도
키수아트니키즈와트나[2]
타르수스
루산다라와잔티야[3]
아바르나니
타나쿤
라메나슈
티무르
파하르[4]
하루아
우스나니스
일루브루엘립라hit[5]
잉기라[6]
아자티와다야 (카라테페)아다나에서 북동쪽으로 100km 떨어진 세이한 강 계곡 위에 위치.[7] 아와리쿠스 왕의 신하 아자티와다스가 건설.


3. 3. 주변 국가

서쪽은 힐라쿠 왕국, 북쪽은 타발, 북동쪽은 구르굼, 동쪽은 사말, 남동쪽은 파틴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4. 역사

히타이트 제국 붕괴 이후, 루위아어를 사용하는 시리아-히타이트 국가인 히야와(Ḫiyawa) 또는 아다나와(Adanawa)가 아다니아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1] 히야와는 초기에 외부 간섭 없이 독자적으로 발전했으며,[3] 기원전 10세기 말과 9세기 초에는 팔라스틴의 수필룰리우마스와 분쟁을 겪고, 카르카미스, 구르굼 왕국과 적대 관계에 놓였다.[4]

기원전 9세기에 아시리아가 신 아시리아 제국으로 부활하면서 히야와는 이에 맞서기 위해 여러 동맹에 참여했다. 아슈르나시르팔 2세와 살마네세르 3세의 원정에 대응하여 시리아-히타이트 국가들은 군사 동맹을 결성했다.[5][7]

살마네세르 3세가 기원전 858년 서부 원정에서 사말, 카르카미스, 파틴, 비트아디니의 동맹을 격파한 후, 파틴의 왕 수필룰리우마스는 다시 동맹을 소집했다. 이 동맹에는 야스부크의 아랍 부족과 베트-구시의 아람 왕국에서 온 야한이 증원군을 보냈다.[6]

히야와와 그 서쪽 이웃 힐라쿠는 아마누스 산맥 서쪽에 위치했지만, 살마네세르 3세는 산맥 기슭에 조각상을 세워 위협을 가했다. 히야와와 힐라쿠는 파틴이 함락될 경우 신 아시리아의 공격을 받을 것을 두려워했다.[7] 이 시기 히야와의 왕 카티야스는 이웃 힐라쿠의 피히림과 함께 동맹에 군대를 제공했지만, 신 아시리아 군대에 패배했다.[8]

카티야스와 피히림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무사히 이끌고 탈출했고, 살마네세르 3세는 조공만 요구했다.[9] 살마네세르 3세가 남부 아나톨리아를 침략하지 않자, 카티야스는 동쪽의 사말 왕국을 합병하려 했다. 이로 인해 사말의 왕 킬라무와는 신 아시리아의 보호를 받는 대가로 살마네세르 3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조공을 바쳤다.[10]

4. 1. 청동기 시대

아다나와(Adanawa)라는 이름에 대한 가장 초기의 기록은 히타이트 제국 시대로, 아다니야(Adaniya)라는 형태로 언급되었다.[1] 아다니야는 암무나 히타이트 왕에게 반란을 일으킨 국가 중 하나였다.[2]

이후 히야와(Ḫiyawa)가 될 지역의 대부분은 청동기 시대 후기에 키즈와트나의 일부였는데,[3] 키즈와트나는 기원전 15세기에 히타이트 제국에 속했던 영토에서 형성된 독립 국가였다.[2]

키즈와트나는 기원전 14세기에 투드할리야 1세 왕이 병합하면서 다시 히타이트 제국에 흡수되었다.[2]

4. 2. 청동기 시대 붕괴

해양 민족의 이동으로 서부 아나톨리아에서 그리스 인구가 킬리키아로 이주했다. 이들은 람세스 3세 통치 기간에 해양 민족의 이집트 공격에 참여한 데넨과 동일했을 가능성이 높다.[1] 이 이주는 에게해 지역에서 서아시아로의 더 큰 이주 과정의 일부였으며, 기원전 12세기와 11세기에 킬리키아 평원에 대량의 후기 헬라딕 IIIc형 도자기가 유입된 것과 고고학적으로 일치한다.[2]

이러한 이주의 결과로 그리스계 왕조가 히야와의 통치 세력으로 자리 잡았으며,[3] 히야와 왕들은 몹소스(그리스어: Μοψος|몹소스grc)의 혈통을 주장했다.[4] 몹소스는 트로이 전쟁 시대의 그리스 예언자로 킬리키아로 이주하여 철기 시대에 아나톨리아 남부 해안에 여러 그리스 정착지를 건설했다고 그리스 전설에 묘사되어 있다.[5] 따라서 히야와 통치 왕조는 몹소스의 가문이라고 불렸다.[6]

학자 스티븐 던포드에 따르면, 에게해에서 루카 땅을 거쳐 킬리키아로의 이러한 그리스 요소의 이주는 그리스 신화에서 몹소스의 조부모인 티레시아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테베에서 킬리키아로 이동하는 이야기의 형태로 기록되었다.[7] 던포드는 히야와 왕국의 창시자들이 히타이트 기록에 루카 땅에 있는 것으로 기록된 히야와인들과 동일하다고 보았다. 타르훈타사 왕국이 붕괴된 후, 이 히야와인들의 집단은 팜필리아에서 확장하여 킬리키아 평원의 권력 공백을 채우는 것을 쉽게 여겼을 것이다.[8]

4. 3. 철기 시대

히타이트 제국 붕괴 이후, 루위아어를 사용하는 시리아-히타이트 국가인 히야와(Ḫiyawa) 또는 아다나와(Adanawa)가 아다니아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1] 키수아트니는 키즈와트나의 이름을 이어받았다.[1]

히야와는 초기에 외부 간섭 없이 독자적으로 발전했으며,[3] 기원전 10세기 말과 9세기 초, 팔라스틴의 수필룰리우마스와 분쟁, 카르카미스, 구르굼 왕국과 적대 관계에 놓였다.[4]

기원전 9세기에 아시리아가 신 아시리아 제국으로 부활하면서 히야와는 이에 맞서기 위해 여러 동맹에 참여했다. 아슈르나시르팔 2세와 살마네세르 3세의 원정에 대응하여 시리아-히타이트 국가들은 군사 동맹을 결성했다.[5][7]

4. 3. 1. 히야와/아다나와 왕국

히타이트 제국 붕괴 이후, 아다니아루위아어를 사용하는 시리아-히타이트 국가인 히야와(Ḫiyawa) 또는 아다나와(Adanawa)의 중심지가 되었다.[1] 철기 시대 히야와 왕국의 도시들 중 키수아트니는 청동기 시대 키즈와트나의 이름을 보존했다.[1]

히야와는 초기에 외부 간섭 없이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3]

기원전 10세기 말과 9세기 초, 히야와는 팔라스틴의 통치자 수필룰리우마스와 분쟁을 겪었을 수 있으며, 이후 카르카미스와 구르굼 왕국과 적대 관계에 놓였다.[4] 이러한 분쟁 중 하나는 기원전 10세기에 넓은 영토를 다스리며 팽창 정책을 시작한 팔라스틴의 수필룰리우마스 1세에 대항하여 일어났다.[6]

기원전 9세기에 아시리아가 신 아시리아 제국 형태로 부활하여, 기원전 870년대부터 860년대까지 아슈르나시르팔 2세의 원정에 대응하여 다양한 시리아-히타이트 국가들이 군사 동맹을 맺었다. 아슈르나시르팔 2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살마네세르 3세의 원정은 시리아 왕국에서 신 아시리아 제국에 반대하는 활동을 더욱 심화시켰다.[7]

살마네세르 3세가 기원전 858년 첫 번째 원정에서 사말 영토에서 카르카미스, 사말, 파틴, 비트-아디니의 동맹을 격파한 후, 파틴의 왕 수필룰리우마스는 살마네세르 3세가 자신의 왕국을 위협하자 다시 동맹을 소집했다. 이 동맹군에는 야스부크의 아랍 부족과 베트-구시의 아람 왕국에서 온 야한이 증원군을 보냈다.[8]

신 아시리아 제국은 히야와와 그 서쪽 이웃인 힐라쿠에 더 큰 위협이었다. 힐라쿠는 아마누스 산맥 서쪽에 있었지만, 살마네세르 3세는 이 산맥 기슭에 자신의 거대한 조각상을 세워 자신의 군대로부터 안전하지 않다는 경고를 했다. 따라서 히야와와 힐라쿠는 파틴이 함락될 경우 살마네세르 3세가 자신들을 공격할 것을 두려워했다.[9] 이 시기에 히야와는 왕 카티야스가 통치했으며, 그는 이웃 힐라쿠의 피히림과 함께 이 동맹에 군대를 제공했지만, 신 아시리아 군대에 패배했다.[10]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야와의 카티야스와 힐라쿠의 피히림은 이 패배에서 군대를 무사히 이끌고 탈출하는 데 성공했으며, 살마네세르 3세는 그들에게 조공을 요구했을 뿐이다.[11]

살마네세르 3세가 반(反) 신 아시리아 동맹을 격파한 후 남부 아나톨리아를 침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이용하여, 카티야스는 동쪽으로 인접한 사말 왕국을 합병하여 히야와를 확장하려 했다. 이로 인해 사말의 왕 킬라무와는 카티야스의 야망으로부터 신 아시리아의 보호를 받는 대가로 살마네세르 3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조공을 바쳤다.[12]

4. 3. 2. 신아시리아 제국과의 관계

기원전 9세기, 신 아시리아 제국이 부활하면서 히야와는 신 아시리아 제국에 맞서기 위해 여러 동맹에 참여했다. 아슈르나시르팔 2세와 살마네세르 3세의 원정에 대응하여 시리아-히타이트 국가들은 군사 동맹을 결성했다.[5]

살마네세르 3세가 기원전 858년 서부 원정에서 사말, 카르카미스, 파틴, 비트아디니의 동맹을 격파한 후, 파틴의 왕 수필룰리우마스는 다시 동맹을 소집했다. 이 동맹에는 야스부크의 아랍 부족과 베트-구시의 아람 왕국에서 온 야한이 증원군을 보냈다.[6]

히야와와 그 서쪽 이웃 힐라쿠는 아마누스 산맥 서쪽에 위치했지만, 살마네세르 3세는 산맥 기슭에 조각상을 세워 위협을 가했다. 히야와와 힐라쿠는 파틴이 함락될 경우 신 아시리아의 공격을 받을 것을 두려워했다.[7] 이 시기 히야와의 왕 카티야스는 이웃 힐라쿠의 피히림과 함께 동맹에 군대를 제공했지만, 신 아시리아 군대에 패배했다.[8]

카티야스와 피히림은 패배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무사히 이끌고 탈출했고, 살마네세르 3세는 조공만 요구했다.[9]

살마네세르 3세가 남부 아나톨리아를 침략하지 않자, 카티야스는 동쪽의 사말 왕국을 합병하려 했다. 이로 인해 사말의 왕 킬라무와는 신 아시리아의 보호를 받는 대가로 살마네세르 3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조공을 바쳤다.[10]

5. 사회와 문화

히야와의 인구는 청동기 시대에는 후르족과 루위족으로 구성되었고, 철기 시대에는 루위족이 주를 이루었으며, 그리스인도 일부 있었다.[4] 페니키아 비문에서 히야와 사람들은 Danunayim|다누나임phn()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아다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명칭은 후기 청동기 시대 문헌에 언급된 Danuna(|다누나}}) 및 바다 민족 중 하나인 데넨('''}}|translit=dꜣjnjwnꜣ|italics=no|데넨}})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히야와 왕 아와리쿠스의 신하였던 아자티와다스의 루위아-페니키아어 이중 언어 비문과 Çineköy 비문에서 왕국의 페니키아어 대응어는 다누니아인으로 나타났다.

아다니야 사람들, 또는 초기 철기 시대에 킬리키아에 정착한 그리스인들은 파라오 람세스 3세 통치 기간에 해양 민족의 이집트 공격에 참여한 데넨과 동일했을 가능성이 높다. 해양 민족은 여러 사회의 붕괴로 인해 이주한 다양한 집단의 집합체였으며, 이들의 이동 경로는 아다나 평원을 통과했고, 그곳에서 일부가 통합되었다. 킬리키아로의 이주는 에게해 지역에서 서아시아로의 더 큰 이주 과정의 일부였던 것으로 보이며, 기원전 12세기의 키프로스의 그리스 인구를 낳았다. 히야와로의 이동은 기원전 12세기와 11세기에 킬리키아 평원에 대량의 후기 헬라딕 IIIc형 도자기가 유입된 것과 고고학적으로 일치한다.

이러한 이주의 결과로 그리스 기원의 왕조가 히야와의 통치 세력으로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히야와 왕들은 몹소스(|몹소스}})의 혈통을 주장했는데, 그의 이름은 페니키아어로는 몹소스(|몹소스}}), 그리스어 이름으로는 몹소스()에 해당하며, 트로이 전쟁 시대의 그리스 예언자로 킬리키아로 이주하여 철기 시대에 아나톨리아 남부 해안에 여러 그리스 정착지를 건설했다고 그리스 전설에 묘사되어 있다. 히야와 통치 왕조는 몹소스의 가문(|translit=Muksassan parni|몹소스의 가문}}; |translit=|몹소스의 가문}})라고 불렸다.

히야와 왕국의 창시자들은 히타이트 기록에 루카 땅에 있는 것으로 기록된 히야와인들과 동일했다. 타르훈타사 왕국이 붕괴된 후, 이 히야와인들의 집단은 팜필리아에서 확장하여 킬리키아 평원의 권력 공백을 채우는 것을 쉽게 여겼을 것이다.

철기 시대 히야와의 인구는 이 지역의 후기 청동기 시대 루위족 주민의 후손이었다. 루위족 개인 이름은 로마 시대까지 히야와에서 계속 확인되었다. 히야와의 이름은 또한 후기 바빌로니아 다누나(|다누나}})와 이집트 다누나('''}}|다누나}})에도 해당하는데, 이들은 호메로스 텍스트에서 다나오이(Δαναοι|다나오이grc)의 형태로 기록된 미케네 그리스인에 대한 지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몹소스의 전설은 에게해에서 킬리키아로의 역사적인 인구 이동을 기록했는데, 이는 히야와의 통치 왕조가 그리스 식민지 개척자에 의해 설립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왕국의 이름과 관련이 있고, 히야와 내에 그리스인이 거주했음을 의미한다. 기원전 5세기에 할리카르나소스의 그리스 작가 헤로도토스는 킬리키아의 인구가 히파카이오이(Υπαχαιοι|히파카이오이grc), 즉 '혼합 아카이아인'이라고 주장했다.

철기 시대 후기까지 히야와라는 이름이 지속된 것은 이 시대에 히야와에 상당한 그리스인이 계속 존재했음을 반영했을 수 있다. 이 인구는 결국 그리스어루위아어를 모두 사용하기 시작했고, 인근 팜필리아와 유사하게 상당한 크리올화가 이루어졌지만, 기원전 8세기까지 그리스어를 반만 하는 사람이나 심지어 전혀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다.

히야와의 시리아-히타이트 통치자들은 기원전 8세기 후반까지도 국제적인 소통 수단으로 페니키아어와 문자를 점점 더 많이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형적인 아나톨리아 전통에 따라 상형 루위아어 비문이 새겨진 공공 기념물을 계속 건설했다.[10][15]

5. 1. 인구

히야와의 인구는 청동기 시대에는 후르족과 루위족으로 구성되었다. 철기 시대에는 루위족이 주를 이루었으며, 그리스인도 일부 있었다.[4]

페니키아 비문에서 히야와 사람들은 Danunayim|다누나임phn()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아다나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이 명칭은 후기 청동기 시대 문헌에 언급된 Danuna(}}) 및 바다 민족 중 하나인 데넨('''}}|translit=dꜣjnjwnꜣ|italics=no}})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히야와 왕 아와리쿠스의 신하였던 아자티와다스의 루위아-페니키아어 이중 언어 비문에서, 왕국의 페니키아어 대응어는 다누니아인으로 나타났다. 히야와 왕 아와리쿠스의 루위아-페니키아어 이중 언어 비문에서도 그는 자신의 왕국을 루위아어로는 히야와, 페니키아어로는 다누나임으로 불렀다.

아다니야 사람들, 또는 초기 철기 시대에 킬리키아에 정착한 그리스인들은 파라오 람세스 3세 통치 기간에 해양 민족의 이집트 공격에 참여한 데넨과 동일했을 가능성이 높다. 해양 민족은 여러 사회의 붕괴로 인해 이주한 다양한 집단의 집합체였으며, 이들의 이동 경로는 아다나 평원을 통과했고, 그곳에서 일부가 통합되었다. 킬리키아로의 이주는 에게해 지역에서 서아시아로의 더 큰 이주 과정의 일부였던 것으로 보이며, 기원전 12세기의 키프로스의 그리스 인구를 낳았다. 히야와로의 이동은 기원전 12세기와 11세기에 킬리키아 평원에 대량의 후기 헬라딕 IIIc형 도자기가 유입된 것과 고고학적으로 일치한다.

이러한 이주의 결과로 그리스 기원의 왕조가 히야와의 통치 세력으로 자리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이후 히야와 왕들은 몹소스(}})의 혈통을 주장했는데, 그의 이름은 페니키아어로는 몹소스(}}) , 그리스어 이름으로는 몹소스()에 해당하며, 트로이 전쟁 시대의 그리스 예언자로 킬리키아로 이주하여 철기 시대에 아나톨리아 남부 해안에 여러 그리스 정착지를 건설했다고 그리스 전설에 묘사되어 있다.

따라서 히야와 통치 왕조는 몹소스의 가문(|translit=Muksassan parni}}; |translit=}})라고 불렸다.

히야와 왕국의 창시자들은 히타이트 기록에 루카 땅에 있는 것으로 기록된 히야와인들과 동일했다. 타르훈타사 왕국이 붕괴된 후, 이 히야와인들의 집단은 팜필리아에서 확장하여 킬리키아 평원의 권력 공백을 채우는 것을 쉽게 여겼을 것이다.

철기 시대 히야와의 인구는 이 지역의 후기 청동기 시대 루위족 주민의 후손이었다. 루위족 개인 이름은 로마 시대까지 히야와에서 계속 확인되었다.

히야와의 이름은 또한 후기 바빌로니아 다누나(}})와 이집트 다누나('''}}}})에도 해당하는데, 이들은 호메로스 텍스트에서 다나오이(Δαναοιgrc)의 형태로 기록된 미케네 그리스인에 대한 지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몹소스의 전설은 에게해에서 킬리키아로의 역사적인 인구 이동을 기록했는데, 이는 히야와의 통치 왕조가 그리스 식민지 개척자에 의해 설립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왕국의 이름과 관련이 있고, 히야와 내에 그리스인이 거주했음을 의미한다. 나중에 기원전 5세기에 할리카르나소스의 그리스 작가 헤로도토스는 킬리키아의 인구가 히파카이오이(Υπαχαιοιgrc), 즉 '혼합 아카이아인'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철기 시대 후기까지 히야와라는 이름이 지속된 것은 이 시대에 히야와에 상당한 그리스인이 계속 존재했음을 반영했을 수 있다. 이 인구는 결국 그리스어와 루위어를 모두 사용하기 시작했고, 인근 팜필리아와 유사하게 상당한 크리올화가 이루어졌지만, 기원전 8세기까지 그리스어를 반만 하는 사람이나 심지어 전혀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다.

5. 2. 언어

왕국의 이름인 Ḫiyawahlu는 청동기 시대 히타이트 텍스트에서 아카이아인 즉 미케네 그리스인을 지칭하는 데 사용된 와 매우 유사하다. 이러한 이름의 사용은 초기 철기 시대에 서부 아나톨리아에서 이 지역으로 그리스인 집단이 이주한 결과일 수 있다.[1][2][3][4]

Ḫiyawa의 이름 은 후기 바빌로니아 와 이집트 에도 해당하는데, 이들은 호메로스 텍스트에서 형태로 기록된 미케네 그리스인에 대한 지칭이었던 것으로 보인다.[3][5][6]

Çineköy 비문에서 왕 Awarikkus는 그의 이름이 페니키아어로 로 표기된 Muksas의 혈통에서 나왔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그리스 전설에서 킬리키아로 이주하여 철기 시대에 아나톨리아 남부 해안에 여러 그리스 정착지를 건설한 예언자와 관련된 그리스 이름 에 해당한다.[7][1][8][2][4][9] 헬레니즘 시대에 Ḫiyawa의 두 도시, Mopsouestia와 Mopsoukrēnē는 Mopsos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10][11]

Mopsos의 전설은 에게해에서 킬리키아로의 역사적인 인구 이동을 기록했는데,[6] 이는 Ḫiyawa의 통치 왕조가 그리스 식민지 개척자에 의해 설립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왕국의 이름과 관련이 있고, Ḫiyawa 내에 그리스인이 거주했음을 의미한다.[2] 기원전 5세기에 그리스 작가 헤로도토스는 킬리키아의 인구가 , 즉 Hupakhaioi|혼합 아카이아인grc이라고 주장했다.[1][3][11][4][12]

따라서 철기 시대 후기까지 라는 이름이 지속된 것은 이 시대에 Ḫiyawa에 상당한 그리스인이 계속 존재했음을 반영했을 수 있다.[2] 이 인구는 결국 그리스어루위아어를 모두 사용하기 시작했고, 인근 팜필리아와 유사하게 상당한 크리올화가 이루어졌지만,[12] 기원전 8세기까지 그리스어를 반만 하는 사람이나 심지어 전혀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을 수도 있다.[13]

Hiyawa에 그리스인이 존재했을 가능성과 Hiyawa 자체가 키즈와트나의 이전 영토에 위치했다는 사실 때문에, 쿠마르비 신화, 루위어 에서 라는 이름의 차용, 아시리아를 지칭하는 루위어 이름에서 그리스어로 라는 이름의 전파와 같은 특정 루위어 및 후르리안 요소가 이 지역을 통해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있다.[14]

히야와의 시리아-히타이트 통치자들은 기원전 8세기 후반까지도, 국제적인 소통 수단으로 페니키아어와 문자를 점점 더 많이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형적인 아나톨리아 전통에 따라 상형 루위아어 비문이 새겨진 공공 기념물을 계속 건설했다.[10][15]

5. 3. 문자

히야와의 시리아-히타이트 통치자들은 기원전 8세기 후반까지도 국제적인 소통 수단으로 페니키아어와 문자를 점점 더 많이 사용했지만, 전형적인 아나톨리아 전통에 따라 상형 루위아어 비문이 새겨진 공공 기념물을 계속 건설했다.[1]

6. 통치자


  • 카티야스 (기원전 858년 ~ 기원전 831년)[5][6][7]
  • 키리 (기원전 831년경)[8][9][10]
  • 이름 없는 왕 (기원전 796년경)
  • 아와리쿠스 또는 와리카스 (기원전 738년 ~ 기원전 709년)[11]

6. 1. 쿤디와 시쑤의 통치자

(루위어: *산다-와리스|산다-와리스hlu)[12]

참조

[1] 웹사이트 Que [1] (GN) http://oracc.org/ria[...] Ludwig Maximilian University of Munich
[2] 웹사이트 Hume [1] (GN) http://oracc.org/rib[...] Ludwig Maximilian University of Munich
[3] 웹사이트 Hume [1] (GN) http://oracc.org/arm[...] Ludwig Maximilian University of Munich
[4] 웹사이트 Danuna [1] (GN) https://oracc.museum[...] Ludwig Maximilian University of Munich
[5] 웹사이트 Kati [RULER OF QUE] (RN) http://oracc.org//ri[...] Ludwig Maximilian University of Munich
[6] 웹사이트 Kati [RULER OF QUE] (RN) http://oracc.org/tsa[...] Ludwig Maximilian University of Munich
[7] 웹사이트 Kate [RULER OF QUE] (RN) http://oracc.org/arm[...] Ludwig Maximilian University of Munich
[8] 웹사이트 Kirri [RULER OF TARSUS] (RN) http://oracc.org/arm[...] Ludwig Maximilian University of Munich
[9] 웹사이트 Kirri [RULER OF TARSUS] (RN) http://oracc.org/ria[...] Ludwig Maximilian University of Munich
[10] 웹사이트 Kirri [RULER OF TARSUS] (RN) http://oracc.org/tsa[...] Ludwig Maximilian University of Munich
[11] 웹사이트 Uriaikki http://oracc.org/rin[...] Ludwig Maximilian University of Munich
[12] 웹사이트 Sanda-uarri [RULER OF KUNDU AND SISSU] (RN) https://oracc.museum[...] Ludwig Maximilian University of Munich
[13] 간행물 The land of Hiyawa (Que) revisited 2016
[14] 간행물 Ahhiyawa – Hiyawa – Que: Gibt es Evidenz für die Anwesenheit von Griechen in Kilikien am Übergang von der Bronze- zur Eisenzeit? 2012
[15] 간행물 The land of Hiyawa (Que) revisited 2016
[16] 웹사이트 Cyclamen coum subsp. coum Pink Silverleaf http://www.paghat.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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