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에누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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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에누키 씨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센고쿠 시대에 걸쳐 히에누키 군을 중심으로 활동한 씨족이다. 그 기원은 여러 설이 존재하며, 다테 씨의 분가, 무사시 국의 고케닌 나카조 씨의 후예 등 다양한 주장이 있다. 남북조 시대에는 남조 편에 섰으나, 이후 쇠퇴를 겪었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오슈 탄다이 오사키 씨의 산하에 들어가 세력을 유지했지만, 전국 시대에 이르러 난부 씨와의 다툼 속에서 쇠퇴했다. 마지막 당주 히에누키 히로타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슈 시오키로 인해 멸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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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에누키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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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가문명 | 히에누키씨 |
가나 | ひえぬきし |
가몬 | Nanatsu-wari Maru ni Ni-hiki inverted.svg |
가몬 설명 | 두 개 끌어당김 |
본성 | 자칭 후지와라 북가미치카네류 야다씨류 나카죠씨 |
가조 | 히에누키 타메시게 |
인물 | 히에누키 히로타다 |
씨족 정보 | |
가문 | 히에누키씨 |
가문 문양 | Nanatsu-wari Maru ni Ni-hiki inverted.svg |
가문 문양 이름 | 두 줄 인용 |
본성 | 칭 후지와라 북가미치카네류 야다씨류 나카죠씨 |
시조 | 히에누키 타메시게 |
종별 | 알 수 없음 |
출신지 | 알 수 없음 |
근거지 | 알 수 없음 |
주요 인물 | 히에누키 히로타다 |
지류 | 알 수 없음 |
2. 출자
센다이 번의 사무라이였던 히에누키 씨는 오슈 후지와라 씨 멸망 후 겐큐 8년(1197년)에 센다이 번주 다테 씨의 시조인 다테 토모무네의 넷째 아들(셋째 아들이라고도 함)이자 스루가 다테 씨의 시조인 다테 타메이에의 아들 다테 타메시게가 히에누키 군으로 내려와 코세가와 성에 들어가 그 지명을 성으로 하여 히에누키 타메시게라고 칭한 것이 시작이라고 전해진다 (『다테 세신 가보』).[1]
센고쿠 시대의 히에누키씨는 주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지 못하고 전국 다이묘로 성장하지 못한 채, 히에누키군을 지배하는 구니진 영주 수준에 머물렀다. 히에누키씨의 역대 인물은 여러 문헌에서 뒤섞여 있어 자료가 부족하고, 이 무렵 히에누키 본가는 이미 적류가 끊어져 히에누키 타네시게(稙重) 이후 양자가 들어왔다.
난부 번 측 기록인 "모리오카 번사 세가와 씨 족보"나 "난부 사요" 등에는 여러 설이 있으며, 후지와라 북가 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후대의 자료가 많아 히에누키 씨의 시조 및 히에누키 군 하향 시기에 대한 정설은 없다.[1] 『토노 난부 문서』에 따르면, 겐무 원년(1334년)에 "토가 데와노카미"와 "나카조 데와노카미 토키나가"가 보이며, 히에누키 씨가 후지와라류 나카조 가의 분가로 여겨진다.[1]
다만, 최근에는 무사시 국사이타마 군 오노보를 본관으로 한 고케닌인 나카조 씨가 시조라고 여겨지고 있다.[1] 지쇼 4년(1180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거병하자 나카조 나리히로는 요리토모에게 협력하여 이시바시 산 전투에서 활약했다.[1] 나리히로의 적남인 이에나가는 핫타 토모이에의 양자가 되어 나카조 이에나가라고 칭하며 나카조 씨의 시조가 되었다.[1] 이에나가는 가마쿠라 막부의 효조슈에 등용되어 오와리 국 수호나 미카와 국 타카하시 장 지토에 임명되는 등 막부에서 중용되었다.[1]
3. 연혁
16세기, 히에누키씨는 남하하는 산노헤 난부씨와 충돌하며, 시와 지방의 고스이지 시바씨를 와가씨와 함께 지원했다. 덴쇼 14년(1586년) 시바씨의 사위 다카다 야스자네(난부 일족, 구노헤 마사자네의 동생)가 난부 노부나오에게 항복하자 시바 켄신이 난부령을 공격했으나, 역습으로 이와테군 미마에, 츠시다, 나카노, 이오카(현재 모리오카 시내)를 상실했다. 히에누키씨 중재로 시바씨와 난부씨가 화해했지만, 덴쇼 16년(1588년) 난부 노부나오가 다시 시바씨를 공격, 시바 켄신은 고스이지성을 버리고 도주하며 고스이지 시바씨는 멸망했다.
북오쿠에서 히에누키씨 등 영주, 다이묘가 영토 분쟁을 벌이는 동안, 중앙의 하시바 히데요시는 오다 노부나가 사후 항쟁을 제압하고 천하 통일을 추진, 오우 다이묘들도 이에 휘말렸다.
3. 1. 가마쿠라 시대 ~ 남북조 시대
겐무 원년(1334년) 4월 30일 미나모토 사다쓰나(源貞綱) 장에는 가와무라 또지로 뇨도(河村又次郎入道)와 함께 도가 데와노스케(戶賀出羽前司)가 보이며, 고코쿠 2년(1341년) 윤4월 20일 기요아키(清顕) 장에는 히에누키 데와곤노카미 토리(稗貫出羽權守討取)의 일이 보여, 가마쿠라 시대 말기에는 역사에 나타나고 있다.[2]
남북조 시대에는 남조 측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기타바타케 아키이에가 죽은 후에는 오슈 탄다이인 시바씨에 가담했기 때문에, 고코쿠 원년(1340년)에 남조 측인 난부 마사나가에게 공격을 받았다. 고코쿠 2년(1341년)에는 괴멸적인 타격을 입어 쇠퇴했다.
남북조 시대가 끝나도 난부씨와의 항쟁은 그치지 않고, 에이쿄 7년(1435년) 와가의 난에서 와가씨 지족인 스스마씨(須々孫氏) 측에 가담하여 와가 소령가인 이토요성을 함락시켰다. 그러자 소령가 측에 붙은 난부 모리유키가 아들인 요시마사에게 3만 명에 가까운 대군을 참전시켜 히에누키군에서 대합전이 벌어졌다. 이듬해 에이쿄 8년(1436년) 2월, 난부군은 히에누키령인 데라바야시성, 다이성을 함락시키고, 이어서 당시 히에누키씨 본성인 주하치ヶ성(さかりがじょう, 세가와성이라는 설도 있음)을 포위, 마침내 5월 히에누키 세력은 난부씨의 배하가 되는 것으로 화의를 맺었다.
3. 2. 무로마치 시대
겐무 원년(1334년) 4월 30일 미나모토 사다쓰나(源貞綱)장에는 가와무라 또지로 뇨도(河村又次郎入道)와 함께 도가 데와노스케(戶賀出羽前司)가 보이며, 고코쿠 2년(1341년) 윤4월 20일 기요아키(清顕)장에는 히에누키 데와곤노카미 토리(稗貫出羽權守討取)의 일이 보인다. 이처럼 가마쿠라 시대 말기부터 히에누키씨는 역사에 나타나기 시작했다.[2]
남북조 시대에 히에누키씨는 남조 측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기타바타케 아키이에가 죽은 후 오슈 탄다이인 시바씨에 가담하면서, 고코쿠 원년(1340년) 남조 측 난부 마사나가의 공격을 받았다. 고코쿠 2년(1341년)에는 괴멸적인 타격을 입고 쇠퇴했다.
남북조 시대가 끝난 후에도 난부씨와의 항쟁은 계속되었다. 에이쿄 7년(1435년) 와가의 난에서는 와가씨 지족인 스스마씨(須々孫氏) 측에 가담, 와가 소령가인 이토요성을 함락시켰다. 이에 소령가 측에 붙은 난부 모리유키는 아들 요시마사에게 3만 명에 가까운 대군을 주어 히에누키군에서 대합전을 벌였다. 이듬해인 에이쿄 8년(1436년) 2월, 난부군은 히에누키령 데라바야시성, 다이성을 함락시키고, 히에누키씨 본성인 주하치ヶ성(세가와성이라는 설도 있음)을 포위했다. 결국 5월 히에누키 세력은 난부씨의 배하가 되는 조건으로 화의를 맺었다.
무로마치 시대에 히에누키씨는 오슈 탄다이오사키가의 산하에 들어갔다. 다테, 카사이, 난부, 그 다음 지위인 루스, 시라카와, 아시나, 이와키에 이어지는 위치로 대우받았다. 덴분 24년(1555년)에는 당시 당주 히에누키 테루토키(테루토키, 테루이에, 테루타다라고도 함)가 상경(上洛)하여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알현, 황금 10량을 헌상하고 헨키("테루" 자)를 받았다.
3. 3. 센고쿠 시대
겐무 원년(1334년) 4월 30일 미나모토 사다쓰나(源貞綱)장에는 가와무라 또지로 뇨도(河村又次郎入道)와 함께 도가 데와노스케(戶賀出羽前司)가 보이며, 고코쿠 2년(1341년) 윤4월 20일 기요아키(清顕)장에는 히에누키 데와곤노카미 토리(稗貫出羽權守討取)의 일이 보인다. 이처럼 가마쿠라 시대 말기부터 히에누키씨는 역사에 나타나고 있다.[2]
남북조 시대에 히에누키씨는 남조 측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기타바타케 아키이에가 죽은 후에는 오슈 탄다이인 시바씨에 가담했다. 고코쿠 원년(1340년), 남조 측인 난부 마사나가에게 공격을 받았고, 고코쿠 2년(1341년)에는 괴멸적인 타격을 입어 쇠퇴했다.
남북조 시대가 끝난 후에도 난부씨와의 항쟁은 그치지 않았다. 에이쿄 7년(1435년) 와가의 난에서는 와가씨 지족인 스스마씨(須々孫氏) 측에 가담하여 와가 소령가인 이토요성을 함락시켰다. 이에 소령가 측에 붙은 난부 모리유키는 아들 요시마사에게 3만 명에 가까운 대군을 참전시켜 히에누키군에서 대합전을 벌였다. 이듬해 에이쿄 8년(1436년) 2월, 난부군은 히에누키령인 데라바야시성, 다이성을 함락시키고, 이어서 당시 히에누키씨 본성인 주하치ヶ성(さかりがじょう, 세가와성이라는 설도 있음)을 포위했다. 마침내 5월 히에누키 세력은 난부씨의 배하가 되는 것으로 화의를 맺었다.
무로마치 시대에 히에누키씨는 오슈 탄다이오사키가의 산하에 들어갔다. 다테, 카사이, 난부, 그 다음 지위인 루스, 시라카와, 아시나, 이와키에 이은 위치로 대우받았다. 덴분 24년(1555년), 당시 당주인 히에누키 테루토키(테루토키, 테루이에, 테루타다라고도 함)는 조락(上洛)하여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와 알현, 요시테루에게 황금 10량을 헌상하고, 헨키("테루"의 글자)를 수여받았다.
전국 시대에 관해서 히에누키씨의 동향은 확실하지 않다. 주가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지 못한 채 전국 다이묘로 성장할 수 없었고, 히에누키군을 지배하는 정도의 구니진 영주적인 존재였던 것 같다. 군주 히에누키씨로서의 역대 인물은 여러 문헌에서 뒤섞여 있다. 자료가 적어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이 무렵의 히에누키 본가는 이미 적류가 끊어져, 본가의 히에누키 타네시게(稙重) 이후에는 양자가 들어왔다.
16세기가 되자, 히에누키씨는 남하 정책을 펼치는 산노헤 난부씨에 대항하여 충돌을 반복했다. 시와 지방을 영유하는 고스이지 시바씨를 와가씨와 결속하여 지원했다. 덴쇼 14년(1586년) 여름, 시바씨의 사위인 다카다 야스자네(난부 일족, 구노헤 마사자네의 동생)가 산노헤 난부씨 당주인 난부 노부나오에게 항복했다. 이에 따라 시바 켄신이 난부령으로 쳐들어갔지만 난부 세력에게 역습을 받아, 시바 측은 이와테군 미마에, 츠시다, 나카노, 이오카의 땅(모두 현재의 모리오카 시내)을 잃었다. 히에누키씨의 입회하에 일단 시바씨와 난부씨의 화해가 이루어졌지만, 덴쇼 16년(1588년) 난부 노부나오는 다시 시바씨 공략의 군사를 일으켰다. 시바 켄신은 거성인 고스이지성을 버리고 도망쳐 고스이지 시바씨는 멸망했다.
이처럼 북오쿠에서 히에누키씨 등 영주, 다이묘가 영토를 둘러싸고 싸움을 반복하고 있을 때, 중앙에서는 하시바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 사후의 일련의 항쟁을 제압하고 천하 통일을 향해 크게 전진하고 있었다. 이 시대의 변천에, 이윽고 오우의 여러 다이묘도 부득이하게 휘말리게 되었다.
전국 시대의 히에누키 씨는 양자 당주가 잇따라 등장하면서, 이것이 타가의 개입을 초래하여 쇠퇴의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 히에누키 하루이에는 가사이 무네키요의 아들로 전해지며, 테루토키는 오슈 시바 씨 출신으로 전해진다.)
덴분 24년(1555년), 테루토키는 가신 5명과 함께 상경하여 무로마치 막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에게 금 10냥을 헌상했다. 이때 요시테루의 편휘를 받아 "히에누키 테루토키"라고 자칭했다. 무로마치 막부의 명문가인 시바 씨 출신의 당주가 직접 도읍으로 가서 쇼군을 면회하고 헌상하고, 한 글자를 받는 행동은 히에누키 씨 및 양자인 자신 자신의 권위 부여의 일환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3] 상경할 때 동행한 가신에는 주니초메 성주인 주니초메 시모노노카미(주니초메 씨)가 있다. 권위 부여의 성과 없이, 몇 년 후의 에이로쿠 연간에는 오사코 성주 오사코 씨가 주가인 히에누키 씨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주니초메 히로미츠 등이 추토했지만, 히로미츠는 전사하고, 히로미츠의 아들인 주니초메 사도노카미 형제가 오사코 씨와 싸웠다.
히에누키 씨의 영주로서는 마지막 당주인 히에누키 히로타다(이에노리·시게쓰나)는 역시 양자 당주로 와가 요시타다의 아들이거나 친형이다. (와가 씨는 나카조 이에나가의 동생인 카리타 요시키의 아들 와가 요시유키로부터 시작한다.) 히로타다는 시바 씨와 난부 씨의 화목을 성립시키는 등[4], 일정한 존재감을 보였지만, 덴쇼 18년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슈 시오키로 인해, 오다와라 정벌 때 참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소령을 몰수당하여, 영주로서의 히에누키 씨는 멸망했다.
3. 4. 히에누키 씨의 종말
전국 시대의 히에누키 씨는 양자를 당주로 잇따라 맞이하면서 다른 가문의 개입을 불러와 쇠퇴의 원인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히에누키 하루이에는 가사이 무네키요의 아들이라고 전해지며, 테루토키는 오슈 시바 씨 출신이라고 전해진다.[3]
덴분 24년(1555년), 테루토키는 가신 5명과 함께 상경하여 무로마치 막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에게 금 10냥을 헌상했다. 이때 요시테루의 이름 한 글자를 받아 '히에누키 테루토키'라 칭했다. 이는 히에누키 씨와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행동으로 추측된다.[3] 상경에 동행한 가신 중에는 주니초메 성주인 주니초메 시모노노카미(주니초메 씨)가 있었다. 그러나 권위 부여의 성과 없이, 몇 년 후 에이로쿠 연간에는 오사코 성주 오사코 씨가 히에누키 씨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주니초메 히로미츠 등이 진압에 나섰으나 히로미츠는 전사했고, 그의 아들인 주니초메 사도노카미 형제가 오사코 씨와 싸웠다.
히에누키 씨의 마지막 당주인 히에누키 히로타다(이에노리·시게쓰나)는 와가 요시타다의 아들이거나 친형으로, 역시 양자였다. (와가 씨는 나카조 이에나가의 동생인 카리타 요시키의 아들 와가 요시유키로부터 시작한다.) 히로타다는 시바 씨와 난부 씨의 화목을 성립시키는 등[4] 일정한 존재감을 보였으나, 덴쇼 18년(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슈 시오키 때 오다와라 정벌에 참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영지를 몰수당하여 멸망했다.
덴쇼 19년(1591년), 히로타다는 친가인 와가 요시타다와 함께 도요토미 씨 체제에 반란을 일으켰다. 와가 요시타다의 거성인 후타고 성을 탈환하고, 히로타다의 옛 거성인 토야가사키 성을 포위하여 함락 직전까지 몰고 갔으나,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은 오슈 진정군에게 공격받아 와가 요시타다는 전사하고 히로타다는 도망쳐 얼마 후 사망했다고 전해진다(와가·히에누키 잇키). 토야가사키 성 일대는 난부 씨의 소유가 되었고, 난부 노부나오가 파견한 키타 히데아이에 의해 하나마키 성으로 개명되었다.
히로타다 사후, 그의 딸 오미츠는 출가하여 겟칸니라 칭했으나, 히에누키 가문을 재흥하고자 산노헤 성을 방문했다. 난부 노부나오의 눈에 띄어 환속하여 히에누키 고젠이라 불리는 측실이 되었지만, 히에누키 가문 재흥은 이루지 못했다.
에도 시대에 히에누키 씨의 후예는 센다이 번의 무사로 섬겼다고 전해지지만, 히에누키 씨는 사적, 계보, 후예 등에 관해 애매한 점이 많아, 확실한 자료의 발견 및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4. 계도
(시게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