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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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소마씨는 가마쿠라 막부를 섬긴 사무라이 소마 모로츠네의 후손으로 시작된 일본의 씨족이다. 무쓰국 나메카타군을 기반으로 성장했으며, 남북조 시대에는 북조에 충성했다. 센고쿠 시대에는 다테씨와 대립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복종했다. 에도 시대에는 나카무라 번의 다이묘로 번영했으며, 보신 전쟁에서는 오우에츠 열번 동맹에 가담했으나, 메이지 유신 이후 자작 작위를 받았다. 34대 당주 소마 미치타네까지 가계가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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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마씨 | |
|---|---|
| 개요 | |
![]() | |
| 성씨 (한국어) | 소마 씨 |
| 로마자 표기 | Sōma-shi |
| 가문 | 다이라 씨(간무 헤이시) 지바 씨 |
| 출신 | 시모우사 국 무쓰 국 |
| 주요 직위 | 다양함 |
| 창시자 | 소마 모로츠네 |
| 마지막 통치자 | 불명 |
| 현재 수장 | 소마 가즈타네 |
| 창건 연도 | 헤이안 시대 |
| 해체 | 1873년 (판적봉환) |
| 분가 | 하시모토 씨, 이즈미 씨, 오카다 씨 |
| 일본 씨족 정보 (참고) | |
| 가명 (일본어) | 相馬氏 |
| 가문 | Kuyo (inverted).svg |
| 본성 | 간무 헤이시지바 씨서류 칭, 간무 헤이시 요시마사 류 |
| 가조 | 소마 모로츠네 |
| 종별 | 무가 화족 (자작) |
| 출신지 | 시모우사 국소마 군소마 미쿠리야 |
| 근거지 | 무쓰 국나메카타 군 오다카 무쓰 국 우다 군나카무라 성 도쿄 시요도바시 구 시모오치아이 홋카이도 히로시마 현 |
| 주요 인물 | 소마 요시타네 소마 도모타네 |
| 지류 | 오카다 씨 (무가) 이즈미 씨 (무가) 하시모토 씨 (무가) 다이히사 씨 (무가) 고와타 씨 (무가) 등 |
2. 역사

소마씨는 간무 천황의 후손인 간무 헤이시 타이라노 마사카도를 시조로 전해지지만, 직접적인 조상은 치바 츠네타네의 차남 모로츠네이다. 모로츠네는 시모우사국 소마군을 다스렸기 때문에 소마를 성씨로 칭했다.
1189년 오슈 정벌에서 공을 세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게서 무쓰국 나메카타군(현재의 후쿠시마현 소마군)을 받았다. 1323년 소마 시게타네가 나메카타군 오다카(미나미소마시 오다카구)로 이주하여 본거지로 삼았고, 오슈 소마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후 일족인 오카다씨나 다이히산씨 등과 함께 이와키 지방(후쿠시마현 동부)에서 세력을 확대했다. 남북조 쟁란에서는 북조에 속했다.
1540년 이후에는 다테씨와 세력을 다투어 항쟁을 거듭했다. 요시타네 대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하가 되어 오다카의 본령을 안도받았다.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출진 요청에 응하지 않아 전쟁 후 개역되었으나, 1602년 도쿠가와 이에미츠 탄생으로 요시타네의 아들 토시타네에게 본령이 안도되었다. 1611년 우다군 나카무라성으로 거점을 옮겨, 이후 에도 시대를 통해 나카무라번 6만 석의 도자마 다이묘 가문으로 이어졌다. 역대 번주의 벼슬은 종5위하로, 나가토노카미, 사누키노카미, 이나바노카미 등을 맡았다.
마지막 나카무라번 번주 토모타네는 막부 말기의 보신 전쟁에서 센다이번의 압력으로 오우에츠 열번 동맹에 참가했지만, 즉시 관군에게 항복했기 때문에 처벌 없이 본령을 안도받았다.
1869년 판적봉환으로 나카무라번 지사가 되었고, 1871년 폐번치현까지 번지사를 지냈다. 가마쿠라 시대부터 폐번치현까지 영지의 장소가 바뀌지 않은 다이묘 가문으로서는 드문 경우였다.
1884년 화족령 시행으로 화족이 오작제가 되자, 토모타네가 자작에 올랐다.
2대 자작 타케타네는 궁내성에서 근무했으며, 신주쿠교엔 근무와 식부관, 아사카노미야 어용달 등을 역임했으며, 도쿄부의 고액 납세자이기도 했다.
3대 자작 야스타네 시기인 쇼와 전기에 소마 자작가의 저택은 도쿄시 요도바시구 시모오치아이에 있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 당주 소마 미치타네는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 사고의 이재민 2~30 가구 정도를 히로시마현 동부 진세키코겐쵸로의 집단 이주를 진세키코겐정 정장 나가마치노 유코와 함께 계획했다.[5]
2. 1. 봉건 시대
소마 모로츠네는 치바 쓰네타네의 차남으로, 아버지와 함께 가마쿠라 막부의 초대 쇼군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섬겼다. 그는 현재 지바현 북서부에 위치한 이세 신궁이 관리하던 쇼엔인 소마 미쿠리야에서 이름을 따왔다. 이곳은 신궁과 일본 황실에 말을 공급했다. 1189년 히라이즈미 후지와라 정벌에 요리토모를 따라가 무쓰 남부의 세 지역, 즉 나메카타, 시네하, 우다를 하사받았다.[1]분지 5년 (1189년) 오슈 정벌에서 전공을 세워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로부터 무쓰국 나메카타군 (현 후쿠시마현 소마군)을 받았다. 겐코 3년 (1323년) 소마 시게타네가 나메카타군 오다카 (미나미소마시 오다카구)로 이주해 본거지로 삼았고, 오슈 소마씨의 시조가 되었다. 이후 일족인 오카다씨나 다이히산씨 등과 함께 이와키 지방 (후쿠시마현 동부)에서 세력을 확대했다. 남북조 쟁란에서는 북조에 속했다.[1]

2. 2. 센고쿠 시대
소마 요시타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신하가 되어 오다카의 본령을 안도받았다.[2] 오다와라 전투에서 요시타네와 다테 마사무네는 모두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복종했다.[2]소마 씨는 작은 지역 세력이었지만, 영토가 남쪽의 사타케 씨와 북쪽의 다테 씨 사이에 끼어 있었다. 다테 마사무네 휘하의 다테 씨는 특히 공격적이고 팽창적이었으며, 16대 세습 영주인 소마 요시타네가 센고쿠 시대의 분쟁에 관여하지 않으려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다테 씨는 30번이나 그의 영지를 침략했다.
2. 3. 에도 시대
게이초 16년(1611년), 소마 요시타네의 아들 소마 도시타네는 우다군 나카무라성으로 거점을 옮겼다. 이후 에도 시대를 통해 나카무라번 6만 석의 도자마 다이묘 가문으로 이어졌다.[4] 역대 번주의 벼슬은 종5위하로, 나가토노카미, 사누키노카미, 이나바노카미 등을 맡았다.소마 도시타네는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양녀와 결혼하여 자신의 지위를 더욱 공고히 했으며, 교토를 모방하여 격자형으로 설계된 성곽 도시를 건설했다. 또한 지역 특산품인 오보리소마 도자기의 개발을 후원했다.
소마 씨는 에도 시대 동안 영지를 유지했으며, 번의 공식적인 ''고쿠다카''는 60,000 ''곡''이었지만, 실제 ''고쿠다카''는 거의 100,000 ''곡''에 달했다. 메이지 유신까지 번은 대체로 평탄하게 유지되었다.
2. 4. 보신 전쟁
1868년부터 1869년까지 보신 전쟁에서 소마 씨는 처음에는 중립을 유지하려 했다. 소마 도시타네 아래의 영지는 비교적 작았고 군사력도 미미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868년 2월 도바-후시미 전투에서 도쿠가와 세력이 패배한 후, 이와키타이라 번과 센다이 번같은 더 강력한 이웃들의 압력으로 오우에쓰 열번 동맹에 가입하게 되었다. 삿초 동맹군은 하마도리 지역을 통과하여 몇 달 후 형식적인 저항만을 받으며 나카무라 성을 점령했다.[3] 소마 미치타네는 메이지 정부에 공식적으로 항복했다. 그러나 번은 처벌받지 않았고, 도시타네는 1871년 폐번치현까지 신정부에 의해 번지사로 복귀되었다.2. 5. 메이지 시대 이후
메이지 유신 이후인 1869년 6월 17일 행정관들에 의해 공가와 다이묘가가 통합되어 화족 제도가 탄생하자, 소마 가문도 다이묘가로서 화족에 올랐다. 마지막 번주 소마 토모타네는 1869년 6월 24일, 판적봉환에 의해 나카무라번 지사로 임명되었고, 1871년 7월 14일, 폐번치현까지 번지사를 지냈다. 가마쿠라 시대부터 폐번치현까지 영지의 장소가 바뀌지 않은 다이묘가로서는 드문 경우였다.1884년 7월 7일, 화족령의 시행으로 화족이 오작제가 되자, 같은 달 8일에 구 소번지사로써 토모타네가 자작에 올랐다.
2대 자작 타케타네는 궁내성에서 근무했으며, 신주쿠교엔 근무와 식부관, 아사카노미야 어용달 등을 역임했으며, 도쿄부의 고액 납세자이기도 했다.
3대 자작 야스타네의 시기인 쇼와 전기에 소마 자작가의 저택은 도쿄시 요도바시구 시모오치아이에 있었다.
헤이세이 23년 (2011년)의 동일본 대지진 때, 당주 소마 미치타네 (그의 아버지 대부터 홋카이도로 이주. 조상의 구령인 후쿠시마현 소마시에서 표고버섯 농원을 경영해, 홋카이도와 후쿠시마를 왕래하고 있었음)는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 사고의 이재민 2~30 가구 정도를 히로시마현 동부 진세키코겐쵸로의 집단 이주를 진세키코겐쵸 정장 나가마치노 유코와 함께 계획했다.[5]

메이지 시대 초기에 소마 사건은 주요 정치 스캔들이 되었다. 1879년 4월 14일, 나카무라 소마 번의 전직 다이묘였던 소마 도시타네는 가족들이 그의 정신 불안정을 고발하는 탄원서를 제출한 후 정부에 의해 가택 연금되었다. 1885년 12월 10일, 그의 전 가신 중 한 명인 니시고리 타케키요는 도시타네의 동생인 소마 아리타네가 이끄는 친척들이 도시타네의 투옥을 위해 전 영지의 돈을 횡령할 목적으로 허위 혐의를 제기했다고 고소했다. 소마 씨족은 유명한 변호사 호시 토루를 고용하여 수년간 이어진 그들의 사건을 변호했는데, 이는 일본의 법률에서 정신 이상에 대한 법적 정의와 의사가 정신적으로 무능력한 사람을 선언하는 데 필요한 자격이 아직 정의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892년 도시타네가 사망하자 니시고리는 피고인들이 그를 독살했다고 고발했다. 그러나 부검에서 증거가 발견되지 않자 니시고리는 명예 훼손으로 맞소송을 당했고 4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소마 아리타네 후작(1863–1919)은 씨족의 30대 세습 수장이었으며, 1910년 곤에 가문 서쪽에 도쿄에 15,000 쓰보의 토지를 획득했다. 그의 아들인 소마 타케타네 후작(1889–1936)은 궁내청에서 근무했으며 아사카 야스히코 친왕을 수행하여 프랑스로 갔고, 그곳에서 골프에 매료되었다. 그의 아들인 소마 야스타네 후작(1913–1994)은 오자키 유키오의 딸과 결혼했다. 그는 또한 궁내청에서 근무했으며 일본 경주마 소유자 협회의 8대 회장을 역임했다. 그는 전통적인 소마 노마오이 축제를 부활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또한 소마시의 시장을 역임했다. 현재 씨족 수장이자 34대 세습 수장은 소마 야스타네의 손자인 소마 유키타네이다.
3. 역대 당주
무쓰 소마 씨의 역대 당주 목록은 다음과 같다.
| 대수 | 이름 | 비고 |
|---|---|---|
| 1 | 소마 모로츠네 | 치바 쓰네타네의 아들 |
| 2 | 소마 요시타네 | 소마 모로츠네의 아들 |
| 3 | 소마 다네쓰나 | 소마 요시타네의 아들 |
| 4 | 소마 다네무라 | 소마 다네쓰나의 아들 |
| 5 | 소마 모로타네 | 소마 다네무라의 아들 |
| 6 | 소마 시게타네 | 소마 모로타네의 아들, 무쓰로 내려감 |
| 7 | 소마 치카타네 | 소마 시게타네의 아들 |
| 8 | 소마 다네요리 | 소마 치카타네의 아들 |
| 9 | 소마 노리타네 | 소마 다네요리의 아들 |
| 10 | 소마 다네히로 | 소마 노리타네의 아들 |
| 11 | 소마 시게타네 | 소마 다네히로의 아들 |
| 12 | 소마 다카타네 | 소마 시게타네의 아들 |
| 13 | 소마 모리타네 | 소마 다카타네의 아들 |
| 14 | 소마 아키타네 | 13대 소마 모리타네의 아들 |
| 15 | 소마 모리타네 | 소마 아키타네의 아들 |
| 16 | 소마 요시타네 | 15대 소마 모리타네의 아들 |
| 17 | 소마 도시타네 | 소마 요시타네의 아들, 나카무라 번 초대 번주 |
| 18 | 소마 요시타네 | 소마 도시타네의 아들 |
| 19 | 소마 다다타네 | 쓰치야 도시나오의 아들 |
| 20 | 소마 사다타네 | 소마 다다타네의 아들 |
| 21 | 소마 마사타네 | 소마 다다타네의 아들 |
| 22 | 소마 노부타네 | 사타케 요시토코의 아들 |
| 23 | 소마 다카타네 | 소마 마사타네의 아들 |
| 24 | 소마 쿄타네 | 소마 노부타네의 손자 |
| 25 | 소마 요시타네 | 소마 쿄타네의 아들 |
| 26 | 소마 미키타네 | 소마 요시타네의 아들 |
| 27 | 소마 마스다네 | 소마 요시타네의 아들 |
| 28 | 소마 미쓰타네 | 소마 마스다네의 아들 |
| 29 | 소마 세이타네 | 소마 미쓰타네의 아들, 나카무라 번 마지막 번주 |
| 30 | 소마 노부타네 | 소마 미쓰타네의 아들 |
| 31 | 소마 모리타네 | 소마 노부타네의 아들 |
| 32 | 소마 에이타네 | 소마 모리타네의 아들 |
| 33 | 소마 가즈타네 | 소마 에이타네의 아들, 경주마 슈퍼 크리크의 생산자 |
| 34 | 소마 유키타네[5] | 소마 미치타네[5]의 아들[6], 친자 3명 |
3. 1. 무쓰 소마 씨
소마 모로츠네는 치바 쓰네타네의 차남으로, 아버지와 함께 가마쿠라 막부의 초대 쇼군인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섬긴 사무라이였다. 그는 현재 지바현 북서부에 위치한 이세 신궁이 관리하던 소엔인 소마 미쿠리야에서 이름을 따왔다. 이곳은 신궁과 일본 황실에 말을 공급했다. 그는 1189년 히라이즈미 후지와라 정벌에 요리토모를 따라갔으며, 무쓰 남부의 세 지역, 즉 나메카타, 시네하, 우다를 하사받았다.[1]
남북조 시대에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하고 혼란이 이어진 후, 소마 씨는 무쓰에서 북조에 충성을 유지한 몇 안 되는 씨족 중 하나였다.[1]
무쓰 소마 씨는 다음과 같다.
| 대수 | 이름 | 비고 |
|---|---|---|
| 1 | 소마 모로츠네 | 치바 쓰네타네의 아들 |
| 2 | 소마 요시타네 | 소마 모로츠네의 아들 |
| 3 | 소마 다네쓰나 | 소마 요시타네의 아들 |
| 4 | 소마 다네무라 | 소마 다네쓰나의 아들 |
| 5 | 소마 모로타네 | 소마 다네무라의 아들 |
| 6 | 소마 시게타네 | 소마 모로타네의 아들, 무쓰로 내려감 |
| 7 | 소마 치카타네 | 소마 시게타네의 아들 |
| 8 | 소마 다네요리 | 소마 치카타네의 아들 |
| 9 | 소마 노리타네 | 소마 다네요리의 아들 |
| 10 | 소마 다네히로 | 소마 노리타네의 아들 |
| 11 | 소마 시게타네 | 소마 다네히로의 아들 |
| 12 | 소마 다카타네 | 소마 시게타네의 아들 |
| 13 | 소마 모리타네 | 소마 다카타네의 아들 |
| 14 | 소마 아키타네 | 13대 소마 모리타네의 아들 |
| 15 | 소마 모리타네 | 소마 아키타네의 아들 |
| 16 | 소마 요시타네 | 15대 소마 모리타네의 아들 |
| 17 | 소마 도시타네 | 소마 요시타네의 아들, 나카무라 번 초대 번주 |
| 18 | 소마 요시타네 | 소마 도시타네의 아들 |
| 19 | 소마 다다타네 | 쓰치야 도시나오의 아들 |
| 20 | 소마 사다타네 | 소마 다다타네의 아들 |
| 21 | 소마 마사타네 | 소마 다다타네의 아들 |
| 22 | 소마 노부타네 | 사타케 요시토코의 아들 |
| 23 | 소마 다카타네 | 소마 마사타네의 아들 |
| 24 | 소마 쿄타네 | 소마 노부타네의 손자 |
| 25 | 소마 요시타네 | 소마 쿄타네의 아들 |
| 26 | 소마 미키타네 | 소마 요시타네의 아들 |
| 27 | 소마 마스다네 | 소마 요시타네의 아들 |
| 28 | 소마 미쓰타네 | 소마 마스다네의 아들 |
| 29 | 소마 세이타네 | 소마 미쓰타네의 아들, 나카무라 번 마지막 번주 |
| 30 | 소마 노부타네 | 소마 미쓰타네의 아들 |
| 31 | 소마 모리타네 | 소마 노부타네의 아들 |
| 32 | 소마 에이타네 | 소마 모리타네의 아들 |
| 33 | 소마 가즈타네 | 소마 에이타네의 아들, 경주마 슈퍼 크리크의 생산자 |
| 34 | 소마 유키타네[5] | 소마 미치타네[5]의 아들[6], 친자 3명 |
4. 가계도
타네쓰구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