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2년 미국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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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12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의 재선과 민주공화당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영국과 프랑스 모두 미국의 중립을 침해하고, 영국은 강제 징집, 북서부 요새 유지, 아메리카 원주민 지원 등의 도발을 감행했다. 민주공화당은 매디슨을, 연방당은 드윗 클린턴을 후보로 내세웠고, 선거는 1812년 전쟁의 발발과 함께 치러졌다. 매디슨은 128명의 선거인단을 확보하여 재선에 성공했고, 엘브리지 게리가 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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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2년 영국 총선은 나폴레옹 전쟁 중 토리당이 압승을 거두었으며, 1812년 10월 5일부터 11월 10일까지 진행되었다.
1812년 미국 대통령 선거 | |
---|---|
선거 개요 | |
선거 이름 | 1812년 미국 대통령 선거 |
국가 | 미국 |
국기 연도 | 1795 |
선거 유형 | 대통령 선거 |
진행 여부 | 아니오 |
이전 선거 | 1808년 미국 대통령 선거 |
이전 선거 연도 | 1808년 |
다음 선거 | 1816년 미국 대통령 선거 |
다음 선거 연도 | 1816년 |
선거일 | 1812년 10월 30일 – 12월 2일 |
투표 대상 | 선거인단 217명 |
당선에 필요한 선거인단 수 | 109 |
투표율 | 40.4% |
투표율 변화 | 3.6%p 증가 |
후보 정보 | |
후보 1 | 제임스 매디슨 |
소속 정당 1 | 민주공화당 |
러닝메이트 1 | 엘브릿지 게리 |
출신 주 1 | 버지니아주 |
획득 선거인단 수 1 | 128 |
승리 주 1 | 11 |
득표수 1 | 140,431 |
득표율 1 | 50.4% |
후보 2 | 드윗 클린턴 |
소속 정당 2 | 민주공화당 |
러닝메이트 2 | 자레드 잉거솔 |
출신 주 2 | 뉴욕주 |
획득 선거인단 수 2 | 89 |
승리 주 2 | 7 |
득표수 2 | 132,781 |
득표율 2 | 47.6% |
지도 정보 | |
![]() | |
직책 계승 | |
대통령 | before_election: 제임스 매디슨 before_party: 민주공화당 after_election: 제임스 매디슨 after_party: 민주공화당 |
2. 배경
유럽에서 나폴레옹 전쟁이 벌어지면서 제임스 매디슨의 첫 임기 동안 국제 정세는 계속 악화되었다. 대영 제국과 프랑스 제국은 모두 해상에서 미국의 중립 권리를 무시하고 미국 선박을 나포했다. 영국은 강제 징집이라는 명목 하에 영국 탈영병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찾으면서 미국 선원들을 강제 징집했고, 아메리카 원주민을 지원하여 추가적인 도발을 했다.[1]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남부와 서부의 팽창주의자들은 영국령 캐나다와 스페인령 플로리다를 탐냈고, 영국의 도발을 이 두 지역을 점령하기 위한 구실로 삼으려 했다. 결국 1812년 6월 12일, 미국은 영국에 선전 포고를 했다.[1]
2. 1. 국제 정세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는 제임스 매디슨의 첫 임기 동안 꾸준히 악화되었다. 대영 제국과 프랑스 제국 모두 해상에서 미국의 중립권을 무시하고 미국 선박을 나포했다. 영국은 강제 징집으로 알려진 관행에서 영국 탈영병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찾으면서 미국 선원을 강제 징집하고, 미국의 노스웨스트 준주 내에서 요새를 계속 유지했으며, 북서부와 남서부에서 미국과 전쟁을 하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지원함으로써 도발을 가했다.[1]한편, 미국 남부 및 서부의 확장론자들은 영국령 캐나다와 스페인령 플로리다를 탐냈으며, 영국의 도발을 두 지역을 획득하는 명분으로 삼으려 했다. 압력은 확실히 높아졌고, 1812년 6월 12일, 미국은 영국에 선전 포고를 했다. 이 날은 매디슨이 민주공화당에서 후보자로 지명되었고 연방당은 후보자를 정하지 않은 날이었다.[1]
2. 2. 미국의 팽창주의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는 제임스 매디슨의 첫 임기 동안 계속 악화되었다. 영국과 프랑스 모두 해상에서 미국의 중립권을 무시하고 미국 선박을 나포했다. 영국은 미국 선원을 강제 징집하고 미국의 노스웨스트 준주 내에서 요새를 계속 유지했으며, 북서부와 남서부에서 미국과 전쟁을 하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지원함으로써 도발을 가했다.[1]한편, 미국 남부 및 서부의 확장론자들은 영국령 캐나다와 스페인령 플로리다를 탐냈으며, 영국의 도발을 두 지역을 획득하는 명분으로 삼으려 했다. 압력은 확실히 높아졌고, 1812년 6월 12일, 미국은 영국에 선전 포고를 했다. 이 날은 매디슨이 민주공화당에서 후보자로 지명되었고 연방당은 후보자를 정하지 않은 날이었다.[2]
2. 3. 미영전쟁 발발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는 제임스 매디슨의 첫 임기 동안 꾸준히 악화되었다. 영국과 프랑스는 모두 해상에서 미국의 중립권을 무시하고 미국 선박을 나포했다. 영국은 미국 선원을 강제 징집하고 미국의 노스웨스트 준주 내에서 요새를 계속 유지했으며, 북서부와 남서부에서 미국과 전쟁을 하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지원함으로써 도발을 가했다.[1]한편, 미국 남부 및 서부의 확장론자들은 영국령 캐나다와 스페인령 플로리다를 탐냈으며, 영국의 도발을 두 지역을 획득하는 명분으로 삼으려 했다. 압력은 확실히 높아졌고, 1812년 6월 12일, 미국은 영국에 선전 포고를 했다. 이 날은 매디슨이 민주공화당에서 후보자로 지명되었고 연방당은 후보자를 정하지 않은 날이었다.[2]
3. 후보 선출
5월 18일, 민주공화당은 연방 의원들의 당원 회의를 통해 버지니아주 출신 현직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부통령 후보로는 지역 균형을 위해 뉴잉글랜드 출신을 고려했고, 처음에는 뉴햄프셔 주지사 존 랭던을 선택했으나 랭던은 고령을 이유로 사퇴했다. 이후 열린 두 번째 당원 회의에서 매사추세츠주 주지사 엘브리지 게리를 지명했다. 당시 부통령직은 조지 클린턴이 한 달 전에 사망하면서 공석이었다.[5]
5월 29일, 뉴욕주 의회 민주공화당 반체제파는 전 상원의원이자 현 뉴욕 시장이며, 부통령의 조카인 드위트 클린턴을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클린턴은 지역에 따라 선거 전략을 달리했는데, 북동부에서는 반전(反戰) 후보임을 강조했고, 남부와 서부에서는 전쟁을 더 적극적으로 수행하겠다는 입장을 내세웠다.[4]
연방당은 9월 뉴욕시에서 당원 집회를 열고 격론 끝에, 1800년 대선 이후 계속 패배해 온 민주공화당을 꺾을 최선의 기회로 클린턴 지지를 결정했다. 부통령 후보로는 전 미국 검사인 자레드 잉거솔을 선출했다.[6]
3. 1. 민주공화당
5월 18일, 민주공화당 당원대회에서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이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조지 클린턴 부통령의 사망으로 공석이 된 부통령 후보에는 뉴잉글랜드 출신 존 랭던이 선출되었으나, 랭던은 나이를 이유로 사퇴했다. 이에 엘브리지 게리가 민주공화당의 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5]5월 29일 뉴욕 코커스에서는 반전 민주공화당원들이 드위트 클린턴을 거의 만장일치로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4]
1812년 5월에 열린 지명 코커스에는 미국 의회 민주공화당 의원 138명 중 83명이 참석했다. 이 중 82명이 매디슨을 대통령 후보로 지지했으며, 존 랭던은 엘브리지 게리를 64표 대 16표로 이기고 부통령 후보로 지명되었다.[5]
부통령 투표 | |
---|---|
엘브리지 게리 | 74 |
기타 | 3 |
제임스 매디슨 | 엘브리지 게리 | ||||||||||||||||||||||||||||
---|---|---|---|---|---|---|---|---|---|---|---|---|---|---|---|---|---|---|---|---|---|---|---|---|---|---|---|---|---|
'대통령 후보' | '부통령 후보' | ||||||||||||||||||||||||||||
![]() | ![]() | ||||||||||||||||||||||||||||
제4대 미합중국 대통령 (1809–1817) | 제9대 매사추세츠 주지사 (1810–1812) | ||||||||||||||||||||||||||||
3. 2. 연방당
5월 29일, 연방당은 당원대회를 통해 뉴욕 시장 드윗 클린턴을 대통령 후보로 선출하였다.[6]대통령 후보 | 부통령 후보 |
---|---|
드윗 클린턴 | 자레드 잉거솔 |
-- | ![]() |
5대 뉴욕 부지사 (1811–1813) 47, 49, 51대 뉴욕 시장 (1803–1807, 1808–1810, 1811–1815) | 5, 11대 펜실베이니아 법무장관 (1791–1800, 1811–1816) |
클린턴이 제임스 매디슨 대통령의 대안으로 선거에 참여하기 전, 대법원장 존 마셜은 연방당 대통령 후보로 유력했다. 그러나 클린턴의 참여로 뉴욕의 선거인단을 확보하기 어려워졌고, 선거가 미국 하원으로 넘어가면 민주공화당이 장악한 하원에서 매디슨이 당선될 것이 확실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방당은 클린턴 지지를 고려했지만, 9월 당원 회의에서 대통령 후보를 내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펜실베이니아 연방당은 자레드 잉거솔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고, 클린턴은 펜실베이니아 선거인단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이를 지지했다.[6]
일부 연방주의자들은 클린턴 지지에 회의적이었고, 루퍼스 킹을 후보로 지명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버지니아에서는 클린턴 대신 킹과 윌리엄 리처드슨 데이비를 지명했고, 약 27%의 득표율을 얻었다. 뉴욕에서는 연방주의자들이 주의회를 장악하여 킹에게 표를 몰아주려 했으나, 민주공화당과 연방주의자들의 연합으로 클린턴에게 표를 몰아주는 데 성공했다.[6]
4. 선거 운동
1812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전쟁의 영향으로, 드윗 클린턴은 지역별 유세를 통해 북동부에서는 반전, 남부와 서부에서는 친전 입장을 취하며 선거 운동을 전개했다.[7] 선거는 뉴욕과 펜실베이니아가 결정적인 지역이었는데, 클린턴은 뉴욕을 확보했지만 펜실베이니아를 얻지 못해 패배했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선거는 연방주의자들이 애덤스 이후 최고의 성적을 거둔 선거였으며, 연방당은 의회에서 의석을 늘리고 대통령 선거에서도 근접한 결과를 얻었다. 많은 주, 특히 펜실베이니아에서 클린턴 지지 민주공화당원들은 연방주의자들과의 협력을 거부했고, 클린턴은 공식적으로 지명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그를 연방주의자 후보로 간주했다.[6]
클린턴은 지역별 선거 운동을 지속하며 전쟁 피해가 큰 북동부에서는 반전, 남부와 서부에서는 전쟁 지원을 호소했다. 연방당은 미국 하원에서 의석을 늘렸고, 클린턴은 애덤스 이후 연방당 후보 중 가장 선전하여 뉴욕주와 뉴저지주를 탈환하며 일반 선거에서 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제임스 매디슨이 선거인단 확보에서 상당한 차이로 승리하여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5. 선거 결과
득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