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7년 타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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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877년 타협은 18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발생한 선거인단 투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이루어진 합의이다. 선거 결과가 불분명해지자, 의회는 선거위원회를 구성하여 분쟁을 조정했고,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러더퍼드 B. 헤이즈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 과정에서 남부 민주당은 헤이즈의 당선을 인정하는 대신, 연방군 철수, 남부 민주당원 임명, 남부 산업화 지원 등을 포함하는 조건을 공화당으로부터 얻어냈다. 이 타협은 미국의 재건 시대를 종식시키고, 남부에서 민주당의 지배를 확립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흑인들의 권리 신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역사가 C. 반 우드워드는 이 타협이 1877년의 거래를 통해 이루어졌다고 주장했지만, 다른 역사학자들은 이 타협의 조건이 완전히 이행되지 않았고, 오히려 남부 흑인들을 희생시킨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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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타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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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876년 미국 대통령 선거는 매우 논란이 많았다. 민주당의 새뮤얼 조지 틸던 후보는 184표, 공화당의 러더퍼드 B. 헤이즈 후보는 165표의 선거인단을 확보했다. 당선에는 185표가 필요했는데, 플로리다, 루이지애나, 오리건, 사우스캐롤라이나 4개 주에서 총 20표의 선거인단 투표 결과에 대한 분쟁이 발생했다.[5]
이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의회는 선거위원회 법을 통과시켜 위원회를 설치했으나, 위원회는 8대 7로 헤이즈에게 유리한 결정을 내렸다. 하원의 민주당 의원들은 시간끌기 전술로 반발했지만, 하원 의장이 이를 거부했다.[5]
일부 민주당원들은 틸던이 사기를 당했다고 주장하며 무장 투쟁을 거론하기도 했지만, 그랜트 대통령이 군사 경비를 강화하면서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6] 결국 1877년 3월 2일, 헤이즈가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3월 5일에 평화적으로 취임했다.
2. 1. 선거위원회
1876년 11월 18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새뮤얼 조지 틸던은 184표의 이의 없는 선거인단 투표를, 러더퍼드 B. 헤이즈는 165표를 얻었고, 과반수를 얻는 데는 185표가 필요했다. 플로리다, 루이지애나, 오리건, 사우스캐롤라이나의 4개 주는 총 20표의 선거인단 투표를 놓고 분쟁이 있는 선거인단 명부를 제출했다. 틸던에게 유리하게 분쟁이 해결되면 그가 대통령직을 확보하게 될 것이고, 헤이즈는 그에게 유리하게 모든 20표가 인정되어야 했다. 명확한 헌법적 지침이 없는 상황에서 이러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의회는 선거위원회 법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은 분쟁 선거를 검토하기 위해 8명의 공화당원과 7명의 민주당원으로 구성된 15명의 위원회를 설립했다.[5]위원회는 당파적 투표로 8대 7로 헤이즈에게 유리하게 각 분쟁 투표를 인정했다. 법에 따라 위원회의 결정은 상원과 하원 모두가 거부하지 않는 한 최종적인 것이었다. 공화당이 장악한 상원은 그렇게 하지 않았지만, 하원의 민주당 의원들은 시간끌기 전술을 사용하여 버몬트주와 위스콘신주의 선거인에 대한 허위 이의를 제기하고 그러한 이의에 대한 논쟁을 필리버스터하여 3월 5일 예정된 취임식을 넘어 논란이 확산될 위협을 받았다. 그러나 하원 의장 새뮤얼 J. 랜덜은 시간끌기 동의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고, 결국 필리버스터는 포기했다.
3. 타협 조건
민주당원들은 틸던이 사기를 당했다고 격하게 항의했다. 워싱턴으로 행진하기로 한 무장 군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으나, 그랜트 대통령은 경비를 강화했고, 아무도 워싱턴으로 행군하지 않았다.[18]
타협은 기본적으로 남부 민주당이 헤이스를 대통령으로 인정하는 것이었지만, 공화당은 특정 요구 사항을 충족시키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타협안에 나온 핵심이라고 언급되는 요소는 다음과 같다.
조건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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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방군 철수 | 이전 연합국에서 모든 연방군을 철수한다. (군대는 루이지애나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플로리다주에만 남아있었지만, 타협안에서 과정을 확정했다.) |
남부 민주당원 임명 | 헤이스 행정부에 적어도 한 명의 남부 민주당원을 임명한다. (David M. Key|데이비드 M. 키영어가 우편부 장관이 되었다.) |
대륙 횡단 철도 건설 | 남부에 Texas and Pacific Railway|텍사스와 태평양 철도영어를 이용하여 또 다른 대륙 횡단 철도를 건설한다. (이것은 최종 타협을 주도하여 프로세스를 시작한 Thomas A. Scott|토마스 A. 스콧영어에 의해 제안된 "스콧 계획"의 일부가 되었다.) |
남부 산업화 지원 | 남북 전쟁 동안 끔찍한 유실 후 남부가 산업화하고 자력갱생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법을 제정한다. |
헤이스 대통령 수용 | 평화적으로 헤이스 대통령을 받아들인다. |
1951년, C. 반 우드워드는 그의 저서 『재결합과 반동: 1877년 타협과 재건 시대의 종말』에서 1820년, 1824년, 1850년의 타협과 1861년의 타협 실패 사례를 참고하여 "1877년 타협"의 완전한 내용을 재구성하려고 시도했다. 새로운 남부의 부상하는 사업 및 산업계는 특히 철도 사업과 관련하여 공화당 사업가들과 공통점을 찾았다. 그들은 워싱턴의 웜리 호텔에서 비밀리에 만나 남부가 원하는 교량, 운하, 철도 등 내부 개선을 위한 지원을 포함한 타협을 이끌어냈다.
우드워드의 타협 이론에 따르면, 남부 민주당은 선거에 대한 필리버스터를 종식시킴으로써 헤이즈를 대통령으로 인정했다.[7] 이는 공화당이 특정 요구 사항을 충족한다는 조건 하에 이루어졌다. 우드워드는 헤이즈 행정부 기간 동안 연방 정부가 이룬 다섯 가지 타협점을 제시했다.
우드워드가 제시한 타협점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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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철수 | 전 남부 연합주에서 남아 있던 모든 미군을 철수시킨다.[8] 당시 미군은 루이지애나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플로리다주에만 남아 있었지만, 이 타협으로 그 지역에서 미군이 완전히 철수했다. |
남부 민주당원 임명 | 헤이즈 내각에 최소 한 명의 남부 민주당원을 임명한다. 테네시주 출신의 David M. Key|데이비드 M. 키영어가 미국 우체국장으로 임명되었다. |
대륙 횡단 철도 건설 | 남부에 Texas and Pacific Railway|텍사스 앤 퍼시픽 철도영어를 이용한 또 다른 횡단 대륙 철도를 건설한다. 이는 펜실베이니아 철도의 Thomas A. Scott|토마스 A. 스콧영어이 제안한 "스콧 계획"의 일부였으며, 그는 최종 타협으로 이어지는 협상을 시작했다. |
남부 산업화 지원 | 남북 전쟁과 재건 시대 이후 남부를 산업화하고 경제를 회복하기 위한 법안을 제정한다. |
흑인 문제 | 북부의 간섭 없이 흑인을 다룰 권리를 준다. |
비공식적인 합의든, 헤이즈의 이미 발표된 계획과 일치하는 단순한 안심이든, 남부 민주당과의 대화는 많은 사람들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이는 선거 분쟁의 해결을 1877년 미국 대통령 취임식 이후로 연장할 위협이 있었던 의회의 필리버스터를 막았다.
4. 타협의 성립 과정
1876년 11월 18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새뮤얼 조지 틸던은 184표, 러더퍼드 B. 헤이즈는 165표의 선거인단 표를 얻었지만, 과반수를 얻기 위해서는 185표가 필요했다.[5] 플로리다, 루이지애나, 오리건, 사우스캐롤라이나의 4개 주에서 총 20표의 선거인단 표를 놓고 분쟁이 발생했다. 틸던이 대통령직을 확보하려면 이 분쟁에서 유리한 결과를 얻어야 했고, 헤이즈는 20표 모두를 인정받아야 했다.
이러한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의회는 선거위원회 법을 통과시켜 8명의 공화당원과 7명의 민주당원으로 구성된 15명의 위원회를 설립했다.[5] 위원회는 당파적 투표를 통해 8대 7로 헤이즈에게 유리하게 각 분쟁 투표를 인정했다.
법에 따라 위원회의 결정은 상원과 하원 모두가 거부하지 않는 한 최종적인 것이었다. 공화당이 장악한 상원은 거부하지 않았지만, 하원의 민주당 의원들은 시간끌기 전술을 사용하여 취임식을 넘어서까지 논란이 확산될 위협을 가했다. 그러나 하원 의장 새뮤얼 J. 랜덜은 시간끌기 동의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고, 결국 필리버스터는 포기되었다.
일부 민주당원들은 틸던이 속임수를 당했다고 불평했다. 워싱턴으로 진군할 무장 부대를 편성하자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랜트 대통령은 군사 경비를 강화했고, 아무도 워싱턴으로 진군하지 않았다.[6] 3월 2일 오전 4시 10분, 상원 의장 대행 토머스 W. 페리는 헤이즈가 110대 120의 선거인단 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고 발표했다. 헤이즈는 3월 5일에 평화적으로 취임했다.
C. 반 우드워드는 그의 저서 『재결합과 반동: 1877년 타협과 재건 시대의 종말』에서 1877년 타협의 내용을 재구성하려 했다. 그는 부상하는 남부의 사업 및 산업계가 공화당 사업가들과 공통점을 찾았고, 워싱턴의 웜리 호텔(Wormley's Hotel)에서 비밀리에 만나 남부가 원하는 내부 개선 지원을 포함한 타협을 이끌어냈다고 주장했다.
우드워드의 이론에 따르면, 남부 민주당은 선거에 대한 필리버스터를 종식시켜 헤이즈를 대통령으로 인정했고,[7] 이는 공화당이 특정 요구 사항을 충족한다는 조건 하에 이루어졌다. 우드워드는 헤이즈 행정부 기간 동안 연방 정부가 이룬 다섯 가지 타협점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타협점 | 내용 |
---|---|
전 남부 연합주에서 남아 있던 모든 미군 철수[8] | 당시 미군은 루이지애나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플로리다주에만 남아 있었지만, 이 타협으로 그 지역에서 미군이 완전히 철수되었다. |
헤이즈 내각에 최소 한 명의 남부 민주당원 임명 | 테네시주 출신의 데이비드 M. 키가 미국 우체국장으로 임명되었다. |
남부에 텍사스 앤 퍼시픽 철도를 이용한 또 다른 횡단 대륙 철도 건설 | 이는 펜실베이니아 철도의 토마스 A. 스콧이 제안한 "스콧 계획"의 일부였으며, 그는 최종 타협으로 이어지는 협상을 시작했다. |
남북 전쟁과 재건 시대 이후 남부를 산업화하고 경제를 회복하기 위한 법안 제정 | |
북부의 간섭 없이 흑인을 다룰 권리 |
비공식적인 합의이든, 헤이즈의 이미 발표된 계획과 일치하는 단순한 안심이든, 남부 민주당과의 대화는 많은 사람들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이는 선거 분쟁의 해결을 1877년 미국 대통령 취임식 이후로 연장할 위협이 있었던 의회의 필리버스터를 막았다.[7]
5. 타협에 대한 비판적 시각
C. 반 우드워드가 1951년에 제시한 이론은 1877년 타협을 가장 철저하고 널리 받아들여지는 이론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기록이나 공개 자료가 부족하여 1877년 타협의 존재와 성격에 대해 역사가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9] 애브럼 휴잇의 서류나 선거위원회 서기 밀턴 H. 노스럽의 역사서에는 헤이즈의 대통령직을 확보하기 위한 거래가 언급되지 않았지만, 우드워드는 두 사람 모두 그러한 대화에 대해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앨런 페스킨의 ''1877년 타협이 있었는가?''(1973)에서처럼, 헤이즈의 당선과 남부 민주당원들의 필리버스터(의사진행 방해)를 막기 위한 확약 모두가 타협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9] 페스킨은 우드워드의 해석이 발표 이후 거의 25년 동안 거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우드워드의 타협 조건 중 세 가지가 충족되지 않았고, 충족된 조건들도 헤이즈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9]
페스킨은 또한 우드워드가 제안한 조건으로부터 거의 이득을 얻지 못한 북부 민주당원들이 남부 민주당원들보다 필리버스터를 막는 데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하원 의장 새뮤얼 J. 랜달은 펜실베이니아 출신이었으며, 어떤 남부 철도보다 루이지애나의 급진적인 주 정부가 폐기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9]
마이클 레스 베네딕트는 비공식 합의는 인정하지만, 1820년, 1824년, 1850년, 1861년의 이전 입법적 타협과는 달리 합의 자체에는 법적 효력이 없었다고 지적한다. 공식적인 법적 용어로, 1876년 선거는 협상이 아닌 선거위원회의 권고를 수락하기로 한 의회의 공식 투표로 결정되었다.[1]
다른 역사가는 공화당이 민주당의 지지를 얻기 위해 남부 흑인들을 버리고 인종차별주의적 민주당 지배에 맡겼다고 주장한다.[16] 어찌 되었든 재건 시대가 끝나고 남부에서는 민주당의 압도적인 우위 체제가 확립되었다. 1877년 이후 남부에서는 백인 우월주의에 따라 연방 정부 관리 선거에서 민주당원에게 투표하게 되었고, 솔리드 사우스라 불리게 되었다.
그레고리 다운스(Gregory Downs)는 자신의 저서 『미국 정치의 멕시코화: 미국이 남북 전쟁에서 안정화로 나아가는 길』(2012년)에서 쉬운 화해와 정치적 안정의 시대라는 생각을 부정한다. 대신 많은 미국인들이 정치의 멕시코화를 두려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6. 타협의 결과 및 영향
187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발생한 분쟁은 1877년 타협으로 해결되었지만, 그 결과와 영향은 미국 정치와 사회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민주당원들은 틸던이 사기를 당했다고 격렬하게 항의했고, 워싱턴으로 행진하겠다는 무장 군인들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지만, 그랜트 대통령의 경비 강화로 실행되지는 않았다.[18]
타협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이 알려져 있다.
- 이전 연합국에서 모든 연방군의 철수 (루이지애나, 사우스 캐롤라이나, 플로리다 주에만 남아있던 군대 철수 과정을 확정).
- 헤이스 행정부에 적어도 한 명의 남부 민주당원 임명 (테네시 출신 데이비드 M. 키가 우편부 장관이 됨).
- 남부에 대륙 횡단 철도 건설 (토머스 A. 스콧이 제안한 "스콧 계획"의 일부).
- 남부 산업화를 돕기 위한 법 제정.
- 헤이스 대통령을 평화적으로 수용.
헤이스는 대통령에 취임했고, 군대 철수와 남부 민주당원 임명은 이행되었다. 헤이스는 이미 남부 주에 자치를 되돌려 주는 것을 지지한다고 밝혔기 때문에 군대 철수는 선거 이전부터 예상된 일이었다. 또한, 근소한 차이로 당선된 대통령이 다른 정당 지지 인물을 각료로 임명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철도 건설과 남부 산업화 지원에 대한 합의는 실제로 이행되지 않았다.
역사가 C. 반 우드워드는 철도 관계자들이 워싱턴의 웜리 호텔에서 은밀히 회합하여 남부 철도 지원을 결정했다고 주장했지만, 실제로 철도 자금 조달이나 연방 정부의 지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던 퍼시픽 철도를 대표하는 대립 집단이 스콧의 텍사스 앤드 퍼시픽 철도 계획을 무산시키고, 결국 뉴올리언스까지 자체 노선을 연결했다.
비공식적인 거래였든, 헤이스의 기존 계획 재확인이든, 남부 민주당원과의 대화는 선거 결과 논쟁 장기화를 막고 1877년 대통령 취임일에 결론을 내리는 데 기여했다.
6. 1. 재건 시대의 종식과 "단단한 남부"의 등장
재건 시대는 어떤 식으로든 끝이 났다. 남부에서 민주당의 지배력은 공화당 정부를 대체한 "구원자" 정부의 등장으로 확고해졌다. 1877년 이후, 백인 우월주의 지지로 인해 백인들은 대체로 민주당에 투표했고, 이 지역은 "단단한 남부"로 알려지게 되었다.[11] 19세기 말까지 흑인 공화당원들은 여전히 많은 후보를 지역 선출직에 당선시켰지만, 민주당은 대부분의 주 의회 의석과 주 전체 의석을 장악했다. 다만, 1877년부터 1900년 사이 짧은 기간 동안 공화당과 인민당 또는 다른 제3당의 지지를 받는 몇몇 연합 정부와 후보들이 특히 1898년 윌밍턴 폭동 이전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주 차원의 직책에 선출되기도 했다. 대다수의 백인 유권자들은 정치적 변화가 일어나 공화당으로 이동하기 전까지 20세기 중반까지 전국적인 민주당 후보를 지지했다.전직 상부 남부 출신 민주당 상원의원이었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1948년 미국 최초의 대통령 제안 시민권법을 제정했는데, 여기에는 반 린치법, 유권자 권리, 분리 철폐가 포함되었다. 전기 작가 테일러 브랜치는 "1877년 타협 이후 어떤 정치적 행위도 인종 관계에 이토록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1877년 타협의 폐지였다."라고 주장했다.[12]
이후 민주당 대통령 린든 B. 존슨이 도입하고 대부분의 민주당원과 공화당원들이 지지했지만, 남부 민주당원과 공화당원들의 강한 반대를 받았던 1964년 시민권법을 계기로 공화당으로 지지 정당이 바뀌는 이동이 이루어졌다.
몇몇 역사가들은 남부 민주당 의원들이 의사진행 방해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은 타협이 아니라 이미 결정된 사실이었다고 주장한다.[15] 앨런 페스킨(Alan Peskin)은 우드워드(Woodward)의 해석이 거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모든 조건이 이행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타협이라고 부를 수 없다고 말한다. 다른 역사가는 공화당이 민주당의 지지를 얻기 위해 남부 흑인들을 버리고 인종차별주의적 민주당 지배에 맡겼다고 주장한다.[16] 어찌 되었든 재건 시대가 끝나고 남부에서는 민주당의 압도적인 우위 체제가 확립되었다. 공화당 정권을 대신하여 구원자(리디머, Redeemer) 정권이 등장했다. 1877년 이후 남부에서는 백인 우월주의에 따라 연방 정부 관리 선거에서 민주당원에게 투표하게 되었고, 솔리드 사우스라 불리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1966년까지 약 90년간 지속되었다.
그레고리 다운스(Gregory Downs)는 그의 저서 『미국 정치의 멕시코화: 미국이 남북 전쟁에서 안정화로 나아가는 길』(2012년)에서 쉬운 화해와 정치적 안정의 시대라는 생각을 부정한다. 대신 많은 미국인들이 정치의 멕시코화를 두려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남부 주에서 선거 결과를 진정시키기 위해 힘이 사용된 것처럼, 멕시코화에 의해 대통령 선거 결과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도 힘이 사용되었다. 다운스는 멕시코화가 얼마나 엄격하게 거부되었고 안정이 어떻게 얻어졌는지 탐구한다.
법률 용어로 "거래"가 있었든 없었든, 1876년 대통령 선거는 그러한 행동으로 결정되지 않았고, 의회가 선거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설정한 선거위원회의 추천을 받아들여 의회의 공식 투표로 결착을 보았다. 위원회를 설정할 때 기대했던 것은 그 결정을 의회가 받아들인다는 것이었다. 위원회가 내린 헤이즈(Hayes) 유리한 결론에 특정 민주당 의원이 동의하지 않았을 때 이러한 준비가 위험에 처하게 된 유일한 시점이었다. 이 민주당 의원은 공화당이나 민주당 의회 지도부에 반하여 의사진행 방해를 통해 합의된 내용조차 실행되지 않도록 위협했다. 타협으로 여겨지는 핵심 사항에 대한 논의만이 중요한 민주당 의원들을 설득할 수 있었고, 의사진행 방해에 묵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소수파가 투표를 방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인 의사진행 방해라는 위협 자체는 위원회의 추천을 받아들일 만큼 충분한 표가 확보되었음을 보여준다.
6. 2. 인종 관계에 미친 영향
재건 시대는 막을 내렸다. 남부에서는 민주당의 지배력이 확고해졌고, 공화당 정부는 "구원자" 정부로 대체되었다. 1877년 이후, 백인 우월주의를 지지하는 백인들은 대체로 민주당에 투표했고, 이 지역은 "단단한 남부"로 알려지게 되었다.[11] 19세기 말까지 흑인 공화당원들은 여전히 많은 후보를 지역 선출직에 당선시켰지만, 민주당은 대부분의 주 의회 의석과 주 전체 의석을 장악했다. 다만, 1877년부터 1900년 사이 짧은 기간 동안 공화당과 인민당 또는 다른 제3당의 지지를 받는 몇몇 연합 정부와 후보들이 특히 1898년 윌밍턴 폭동 이전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주 차원의 직책에 선출되기도 했다. 대다수의 백인 유권자들은 정치적 변화가 일어나 공화당으로 이동하기 전까지 20세기 중반까지 전국적인 민주당 후보를 지지했다.전직 상부 남부 출신 민주당 상원의원이었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1948년 미국 최초의 대통령 제안 시민권법을 제정했는데, 여기에는 반 린치법, 유권자 권리, 분리 철폐가 포함되었다. 전기 작가 테일러 브랜치는 "1877년 타협 이후 어떤 정치적 행위도 인종 관계에 이토록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1877년 타협의 폐지였다."라고 주장했다.[12]
이후 민주당 대통령 린든 B. 존슨이 도입하고 대부분의 민주당원과 공화당원들이 지지했지만, 남부 민주당원과 공화당원들의 강한 반대를 받았던 1964년 시민권법 이후에 공화당으로의 정치적 변화가 이루어졌다.
6. 3. 정치적 재편
재건 시대는 끝났다. 남부에서 민주당의 지배력은 공화당 정부를 대체한 "구원자" 정부의 등장으로 확고해졌다. 1877년 이후, 백인 우월주의에 대한 지지로 인해 백인들은 대체로 민주당에 투표했고, 이 지역은 "단단한 남부"로 알려지게 되었다.[11] 19세기 말까지 흑인 공화당원들은 여전히 많은 후보를 지역 선출직에 당선시켰지만, 민주당은 대부분의 주 의회 의석과 주 전체 의석을 장악했다. 다만, 1877년부터 1900년 사이 짧은 기간 동안 공화당과 인민당 또는 다른 제3당의 지지를 받는 몇몇 연합 정부와 후보들이 특히 1898년 윌밍턴 폭동 이전 노스캐롤라이나주에서 주 차원의 직책에 선출되기도 했다. 대다수의 백인 유권자들은 정치적 변화가 공화당으로 이동하기 전까지 20세기 중반까지 전국적인 민주당 후보를 지지했다.전직 상부 남부 출신 민주당 상원의원이었던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1948년 미국 최초의 대통령 제안 시민권법을 제정했는데, 여기에는 반 린치법, 유권자 권리, 분리 철폐가 포함되었다. 전기 작가 테일러 브랜치는 "1877년 타협 이후 어떤 정치적 행위도 인종 관계에 이토록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1877년 타협의 폐지였다."라고 주장했다.[12]
공화당으로의 후속 이동은 민주당 대통령 린든 B. 존슨이 도입하고 대부분의 민주당원과 공화당원들이 지지했지만, 남부 민주당원과 공화당원들의 강한 반대를 받았던 1964년 시민권법 이후에 이루어졌다.
7. 타협에 대한 다양한 해석
1877년 타협의 존재와 성격에 대해서는 기록이나 공개 자료가 부족하여 역사가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C. 반 우드워드는 이를 협상과 합의의 성격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1877년 위기 당시 애브럼 휴잇의 서류나 선거위원회 서기 밀턴 H. 노스럽이 1901년에 쓴 역사서에는 밀실 협상에 대한 논의나 러더퍼드 B. 헤이즈의 대통령직을 확보하기 위한 어떤 거래도 언급되지 않았다. 우드워드는 이들이 그러한 대화에 대해 알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1913년 헨리 워터슨의 "내부 역사"에는 그로버 클리블랜드 행정부 시절 백악관 만찬에서 익명의 내부 관계자 네 명이 1877년 위기의 비밀을 폭로하려 경쟁했다는 내용이 나오지만, 워터슨은 "진실은... 결코 밝혀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결론짓는다. 확실한 당시 기록은 부족하지만, 위기 이후 "1877년의 거래" 이야기가 널리 퍼지면서 새뮤얼 조지 틸던이 합법적인 대통령이라고 확신했던 남부 민주당원들이 헤이즈의 권위를 인정하게 된 과정을 그럴듯하게 설명하게 되었다.
앨런 페스킨은 ''1877년 타협이 있었는가?''(1973)에서 헤이즈의 당선과 남부 민주당원들의 필리버스터를 막기 위한 확약 모두 타협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페스킨은 우드워드의 해석이 거의 25년간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졌음을 인정하지만, 우드워드가 제시한 다섯 가지 조건 중 세 가지가 충족되지 않았고, 충족된 조건도 헤이즈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헤이즈는 선거 전에 이미 연방군 철수를 포함한 "자치권" 회복을 지지한다고 발표했으며, 근소한 차이로 당선된 대통령이 다른 당이 선호하는 내각 구성원을 선택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페스킨은 북부 민주당원들이 필리버스터를 막는 데 더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하원 의장 새뮤얼 J. 랜덜은 펜실베이니아 출신으로, 남부 철도보다 루이지애나의 급진적인 주 정부 폐기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페스킨은 틸든이 선거에 성공적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을 것이며, 랜달의 필리버스터 포기는 제한된 교섭력에 대한 실용적인 인식이지, ''상호 교환''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마이클 레스 베네딕트는 비공식 합의는 인정하지만, 1820년, 1824년, 1850년, 1861년의 이전 입법적 타협과 달리 합의 자체에는 법적 효력이 없었다고 지적한다. 1876년 선거는 협상이 아니라 선거위원회의 권고를 수락하기로 한 의회의 공식 투표로 결정되었다. 민주당 지도부의 의사에 반하는 필리버스터 위협은 위원회의 권고를 수락할 만큼 충분한 표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남부 민주당 의원들의 의사진행 방해 중단 약속은 타협이 아니라 이미 결정된 사실이었다고 주장한다. 앨런 페스킨은 우드워드의 해석이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모든 조건이 이행되지 않았기에 타협이라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다른 역사가는 공화당이 민주당 지지를 얻기 위해 남부 흑인들을 버리고 인종차별주의적 민주당 지배에 맡겼다고 주장한다. 어쨌든 재건 시대가 끝나고 남부에서는 민주당의 압도적인 우위 체제가 확립되었다. 공화당 정권 대신 구원자(Redeemer) 정권이 등장했고, 1877년 이후 남부에서는 백인 우월주의에 따라 연방 정부 관리 선거에서 민주당원에게 투표하는 솔리드 사우스 경향이 1966년까지 약 90년간 지속되었다.
1876년 대통령 선거는 의회의 공식 투표로 결착되었고, 선거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한 선거위원회의 추천을 받아들였다. 위원회 설정 시 기대는 그 결정을 의회가 받아들인다는 것이었다. 헤이즈에게 유리한 결론에 특정 민주당 의원이 동의하지 않았을 때 이러한 준비가 위험에 처했지만, 이들은 공화당이나 민주당 의회 지도부에 반하여 의사진행 방해를 통해 합의를 무산시키려 했다. 타협으로 여겨지는 핵심 사항에 대한 논의만이 중요한 민주당 의원들을 설득할 수 있었고, 의사진행 방해에 묵인하는 것은 아니었다. 소수파의 의사진행 방해라는 위협은 위원회의 추천을 받아들일 만큼 충분한 표가 확보되었음을 보여준다.
7. 1. 우드워드의 타협 이론
C. 반 우드워드는 그의 저서 《재결합과 반동: 1877년 타협과 재건 시대의 종말》(Reunion and Reaction: The Compromise of 1877 and the End of Reconstruction)에서 1820년, 1824년, 1850년의 타협과 1861년의 타협 실패 사례를 참고하여 "1877년 타협"의 내용을 재구성하려고 시도했다. 그는 새롭게 부상하는 남부의 사업 및 산업계가 특히 철도 사업과 관련하여 공화당 사업가들과 공통점을 찾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워싱턴의 웜리 호텔(Wormley's Hotel)에서 비밀리에 만나 남부가 원하는 교량, 운하, 철도 등 내부 개선을 위한 지원을 포함한 타협을 이끌어냈다.[7]우드워드의 타협 이론에 따르면, 남부 민주당은 선거에 대한 필리버스터를 종식시킴으로써 러더퍼드 B. 헤이즈를 대통령으로 인정했다.[7] 이는 공화당이 특정 요구 사항을 충족한다는 조건 하에 이루어졌는데, 우드워드는 헤이즈 행정부 기간 동안 연방 정부가 이룬 다섯 가지 타협점을 제시했다.[7]
- 전남부 연합주에서 남아 있던 모든 미군을 철수시키는 것.[8] 당시 미군은 루이지애나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플로리다주에만 남아 있었지만, 이 타협으로 그 지역에서 미군이 완전히 철수했다.
- 헤이즈 내각에 최소 한 명의 남부 민주당원을 임명하는 것. 테네시주 출신의 데이비드 M. 키(David M. Key)가 미국 우체국장으로 임명되었다.
- 남부에 텍사스 앤 퍼시픽 철도(Texas and Pacific Railway)를 이용한 또 다른 횡단 대륙 철도를 건설하는 것. 이는 펜실베이니아 철도의 토마스 A. 스콧(Thomas A. Scott)이 제안한 "스콧 계획"의 일부였으며, 그는 최종 타협으로 이어지는 협상을 시작했다.
- 남북 전쟁과 재건 시대 이후 남부를 산업화하고 경제를 회복하기 위한 법안 제정.
- 북부의 간섭 없이 흑인을 다룰 권리.
비공식적인 합의이든, 헤이즈의 이미 발표된 계획과 일치하는 단순한 안심이든, 남부 민주당과의 대화는 많은 사람들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이는 선거 분쟁의 해결을 1877년 미국 대통령 취임식 이후로 연장할 위협이 있었던 의회의 필리버스터를 막았다.
헤이즈는 문제없이 대통령에 취임했다. 상기 조건 제1항과 제2항은 이행되었다. 제1항이 가장 중요한 사항이었고, 헤이즈는 이미 남부 주에 자치를 되찾아 주는 것을 지지한다고 표명했었다. 그것은 선거 전에 군대를 철수시키는 것이었다. 또한 특히 근소한 차이로 당선된 대통령이 각료 중 한 명을 다른 정당이 지지하는 인물로 하는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었고 예상치 못한 일도 아니었다. 조건 제3항과 제4항에 대해서는, 실제로 그러한 확고한 합의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행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비공식적인 거래에 의해서이든, 또는 헤이즈가 이미 공표했던 계획에 따라 단순히 재확인한 것이든, 남부 민주당원과의 대화에서 많은 사람들이 우려했던 점을 만족시켜, 선거 결과의 논쟁이 장기화되어 1877년 대통령 취임일에 결론이 나지 않을 정도로 의회의 의사방해를 막을 수 있었다.
역사가 C. 반 우드워드(C. Vann Woodward)는 경제적 해석을 논하며, 철도 관계자들이 워싱턴의 워름리 호텔에서 은밀히 회합을 열고, 남부 철도에 대한 지원이라는 타협안을 결정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철도 자금을 조달하거나 연방 정부가 다른 지원을 한다는 등의 본격적인 움직임은 없었다. 서던 퍼시픽 철도를 대표하는 대립 집단이 스콧의 텍사스 앤드 퍼시픽 철도(Texas and Pacific Railway) 계획을 무산시키는 데 성공하여, 최종적으로 자신의 노선을 뉴올리언스까지 연결시켰다.
7. 2. 멕시코화(Mexicanization)
그레그 다운스(Greg Downs)는 저서 《미국 정치의 멕시코화: 남북전쟁부터 안정화까지 미국의 초국가적 경로》(The Mexicanization of American Politics: The United States' Transnational Path from Civil War to Stabilization, 2012)에서 1876년 미국 대통령 선거 분쟁의 맥락에서 남북전쟁 이후 미국의 불안정과 정치적 폭력에 대한 광범위한 반대를 강조한다.[10] 그는 상반된 세력 간의 협상된 타협보다는, 당시 많은 미국인들이 정치의 "멕시코화"를 두려워했던 시대의 "국가 취약성"과 "국가 안정화"라는 초국가적 맥락에서 이 분쟁을 제시한다.[10] 여기서 멕시코화란 대통령 선거를 해결하는 데 힘이 사용되어 외세 개입과 멕시코 공화국의 외세 지배와 관련된 폭력적인 보복의 혼란스러운 악순환이 초래될 것이라는 우려를 의미한다.[10]다운스는 "1876년 선거가 역사 서술에서 너무 자주 사기의 장소가 되어, 국가 이야기에서 선거 민주주의의 중심성을 분노하게 만들고 강화하는 대신, 폭력이 정치를 광범위하게 정의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에 대한 심층적인 검토를 촉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10] 국제적인 맥락에서 상대적으로 취약한 시기에 정통성 상실(delegitimization) 또는 이중 대통령직의 전망은 미국을 "멕시코화"할 것이라는 우려를 불러일으켰다. 다운스는 찰스 프랜시스 애덤스 1세(Charles Francis Adams Sr.)와 알렉산더 스티븐스(Alexander Stephens)와 같은 저명한 틸든 지지자들의 유사한 로비 압력과 결합된 이러한 두려움을 틸든의 대의가 결국 포기된 이유에 대한 설명으로 제시한다.[10]
그는 또한 그의 저서에서 쉬운 화해와 정치적 안정의 시대라는 생각을 부정하며, 대신 많은 미국인들이 정치의 멕시코화를 두려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남부 주에서 선거 결과를 진정시키기 위해 힘이 사용된 것처럼, 멕시코화에 의해 대통령 선거 결과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도 힘이 사용되었다. 다운스는 멕시코화가 얼마나 엄격하게 거부되었고 안정이 어떻게 얻어졌는지 탐구한다.
7. 3. 국제적 맥락
그레그 다운스(Greg Downs)는 2012년 저서 《미국 정치의 멕시코화: 남북전쟁부터 안정화까지 미국의 초국가적 경로》(The Mexicanization of American Politics: The United States' Transnational Path from Civil War to Stabilization)에서 1876년 미국 대선 분쟁의 맥락을 설명한다. 그는 당시 많은 미국인들이 정치의 "멕시코화"를 두려워했던 시대의 "국가 취약성"과 "국가 안정화"라는 초국가적 맥락에서 이 분쟁을 제시한다.[10]여기서 "멕시코화"란 대통령 선거 해결에 무력이 사용되어 멕시코 프랑스 침공과 제2 멕시코 제국과 관련된 폭력적인 보복의 악순환이 초래될 수 있다는 우려를 의미한다.[10] 즉, 외세 개입과 멕시코 공화국의 외세 지배와 같은 혼란스러운 상황이 미국에서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운스는 찰스 프랜시스 애덤스 1세와 알렉산더 스티븐스와 같은 저명한 틸던 지지자들의 로비 압력과 이러한 두려움이 결합되어 틸던의 대의가 결국 포기된 이유라고 설명한다.[10] 그는 1876년 선거가 사기의 장소로만 여겨져서는 안 되며, 폭력이 정치를 정의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을 심층적으로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10] 국제적으로 취약한 시기에 정통성 상실 또는 이중 대통령직의 전망은 미국을 "멕시코화"할 것이라는 우려를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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