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7년 포레스탈함 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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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7년 포레스탈함 화재는 1967년 7월 29일, USS 포레스탈 (CV-59) 항공모함에서 발생한 대형 화재 및 폭발 사고이다. 주니 로켓의 오발로 시작된 화재는 불량한 탄약과 안전 규정 미준수로 인해 134명이 사망하고 161명이 부상, 21대의 항공기가 파괴되는 대참사로 이어졌다. 사고 이후 안전 절차 및 훈련 개선, 새로운 소방 시스템 도입 등 해군 안전 규정 전반에 걸쳐 변화를 가져왔으며, 파리어 소방학교 설립 및 관련 다큐멘터리 제작 등 사고의 교훈을 알리는 활동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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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포레스탈함 화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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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명칭 | 1967년 USS 포레스탈 화재 |
발생일 | 1967년 7월 29일 |
발생 시간 | 02:52 UTC (호텔 시간 오전 10:52) |
발생 장소 | 통킹만, 19 |
희생자 | 사망 134명 |
부상자 | 부상 161명 |
결과 | 존 K. 벨링 대령의 책임 면제; 승무원 기소 없음. 함선은 5개월간 드라이 도크에 있었음. |
피해 규모 | |
수리 비용 | 미화 7200만 달러 |
항공기 손실 | F-4B 팬텀 II 7대 A-4E 스카이호크 11대 RA-5C 비질란테 3대 40대 추가 손상 |
미디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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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2. 배경
1967년 USS 포레스탈은 베트남 전쟁 참전을 위해 통킹만 양키 기지에 배치되어 있었다. 6월 초 버지니아주 노퍽을 출발한 포레스탈은 브라질을 거쳐 아프리카의 뿔을 돌아 필리핀 큐비 포인트 해군 항공 기지를 방문한 뒤였다.[5] 제17 공격 항공단 소속 항공기들은 4일 동안 북베트남 목표물에 대해 약 150회의 임무를 수행했다.[5]
당시 미 해군은 범용 폭탄 수요가 생산량을 초과하여 폭탄 재고가 부족했다.[17] 특히 약 453.59kg Mark 83 폭탄이 부족하여, CATOBAR 방식의 A-4 스카이호크는 약 453.59kg 폭탄 2발 대신 약 907.18kg 폭탄 1발을 탑재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7]
이러한 상황에서 포레스탈은 7월 28일, 탄약 수송선 ''Diamond Head''로부터 한국 전쟁 시대의 낡은 AN-M65A1 약 453.59kg 폭탄 16발을 포함한 새로운 탄약을 공급받았다.[10] 이 폭탄들은 오키나와섬 또는 괌의 야외 칸셋 오두막에 부적절하게 보관되어 상태가 좋지 않았다.[10]
VFA-106 소속 해군 항공사 R. R. "Rocky" Pratt 중위에 따르면,[13] 포레스탈의 탄약 처리 담당자들은 폭탄을 만지는 것조차 두려워했으며, 일부 장교들은 캐터펄트 발사 충격을 견딜 수 있을지, 혹은 즉시 투하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을 제기했다.[9] 벨링 함장은 탄약 장교들로부터 폭탄이 함선에 임박한 위험이라는 보고를 받았지만,[26][17] 대체 폭탄을 구할 수 없어 AN-M65A1 폭탄을 갑판에 격리 보관하기로 결정했다.[9]
2. 1. 통킹만 도착
''포레스탈''은 1967년 6월 초 버지니아주 노퍽에 있는 모항을 출발했다. 다가오는 서태평양 순항을 위한 필요한 점검을 마친 후, 무력 시위를 위해 브라질로 항해했다. 그 후 아프리카의 뿔을 돌아 동쪽으로 이동하여 필리핀 제도에 있는 큐비 포인트 해군 항공 기지를 방문한 뒤, 7월 25일 통킹만의 양키 기지로 항해했다.[5]양키 기지에 도착한 후, 제17 공격 항공단의 항공기들은 4일 동안 북베트남의 목표물에 대해 약 150회의 임무를 수행했다.[5]
2. 2. 베트남 폭격 작전

1967년 양키 기지에서 시작된 해군의 지속적인 폭격 작전은 미 해군 역사상 가장 강렬하고 지속적인 공습 작전이었다. 범용 폭탄(즉, "철 폭탄")에 대한 수요가 생산량을 훨씬 초과했다. 폭탄 재고는 1966년 내내 감소했으며, 1967년에는 매우 부족했다.[17] 특히 해군이 크기 대비 위력으로 선호했던 약 453.59kg Mark 83 폭탄 재고가 부족했다.[6] CATOBAR 방식의 A-4 스카이호크는 해군의 표준 경공격/대지 공격기로, 약 907.18kg 폭탄 1발 또는 약 453.59kg 폭탄 2발을 탑재할 수 있었다. 후자는 단일 출격에서 두 개의 별도 목표물을 공격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대부분의 상황에서 더 효과적이었다.[7]
미국 공군의 베트남 내 주요 지상 공격기는 훨씬 더 무거운, 육상 기지 기반의 F-105 썬더치프였다. 이 기종은 약 1360.78kg M118 폭탄 2발과 약 340.19kg M117 폭탄 4발을 동시에 탑재할 수 있었다. 공군은 이러한 폭탄을 대량 보유하고 있었고, 해군처럼 제한된 약 453.59kg 폭탄 재고에 크게 의존하지 않았다.
2. 3. 주니 로켓 문제
1967년 7월 29일 오전 10시 20분, USS 포레스탈 항공모함의 함미쪽 비행갑판에 배치되어 있던 VF-11 비행대대의 110번 F-4B 팬텀 II 전투기의 4연장 LAU-10 로켓 포드에 장전되어 있던 주니 로켓 한 발이 전자부품 오작동으로 발사되었다. 안전장치가 풀리지 않아 주니 로켓이 폭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F-4B 팬텀 II 전투기의 맞은편에서 이륙 대기 중이던 VA-46 비행대대의 405번 A-4E 스카이호크 전투기의 외부연료탱크에 명중했다. 수초 만에 반대쪽 외부연료탱크까지 폭발했다.화재사고로 약 453.59kg AN-M65 폭탄 2발이 비행갑판에 떨어졌으며, 첫 화재 1분 36초가 지나고 결국 폭탄 한 발이 폭발했다.
F-4B 팬텀 II 7대, A-4E 스카이호크 11대, RA-5C 비질란테 정찰기 3대 등 모두 21대의 함재기가 파손됐다. 폭탄 외에도 지상 공격기는 약 12.70cm Mk-32 "주니" 로켓을 탑재했다. 이 로켓은 전기적 문제와 오발 사고로 악명이 높았지만 널리 사용되었다.[8] 항공기는 일반적으로 각각 4개의 로켓을 포함하는 6개 이상의 로켓 팩을 장착하고 출격했다.[8]
2. 4. 특수 소방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군의 선박 공격으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모든 해군은 선상 화재 진압 훈련을 받았다. 그러나 이러한 교훈은 점차 잊혀졌고, 1967년까지 미 해군은 미드웨이에서와 같이 전문적이고 고도로 훈련된 손상 통제 및 소방 팀에 의존했다.[26]''포레스탈''의 갑판 화재 진압을 전문으로 하는 손상 통제 팀은 상사 항공 갑판병 제럴드 페리어(Gerald Farrier)가 이끄는 제8손상 통제 팀이었다. 그들은 훈련 중 해군 군사 실험 영화를 보았는데, 약 453.59kg 폭탄을 제트 연료 화재에 10분 동안 직접 노출시켜도 폭발적인 쿡오프 없이 진압하고 냉각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9] 그러나 이러한 실험은 이전 모델에 비해 비교적 안정적인 Composition H6 폭약과 더 두껍고 내열성이 있는 케이스를 특징으로 하는 새로운 Mark 83 약 453.59kg 폭탄을 사용하여 수행되었다. 상대적으로 둔감하여 열, 충격, 전기에 강한 Composition H6는 CURRENTYEAR영어 현재에도 여러 종류의 해군 군사 장비에 사용되고 있다. 또한 화재 시 점화점에 도달하면 폭발 대신 연소하도록 설계되어, 케이스를 녹여 폭발이 전혀 일어나지 않거나, 기껏해야 정상 위력의 일부에 해당하는 아음속 저위력 폭발이 일어난다.[9]
2. 5. 불안정한 군수품 수령
사고 전날인 7월 28일, ''Forrestal''은 탄약 수송선으로부터 탄약을 보급받았다. 이 중에는 16개의 AN-M65A1 "fat boy" 폭탄(짧고 둥근 모양 때문에 붙여진 별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폭탄들은 ''Diamond Head''가 수빅 만 해군 기지에서 가져온 것으로, 다음 날 폭격에 사용될 예정이었다.[10] ''Forrestal''이 받은 AN-M65A1 폭탄 중 일부는 10년 이상 되었고, 일부는 오키나와 섬 또는 괌의 열과 습기에 노출된 채, 수빅 만 해군 기지 외곽의 사용하지 않는 탄약 폐기장의 야외 칸셋 오두막에 부적절하게 보관되어 있었다.[10]
AN-M65A1 폭탄은 두꺼운 케이스에 Composition H6로 채워진 Mark 83 폭탄과는 달리, 얇은 케이스였으며, Composition B (comp b)로 채워져 있었다. Composition B는 충격 및 열 감도가 더 큰 오래된 폭발물이었다.[11] Composition B는 오래되거나 부적절하게 보관될 경우 더 민감해지는 경향이 있었다.
''Forrestal''의 탄약 처리 담당자들은 이전에 AN-M65A1을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Diamond Head''로부터 전달된 폭탄이 끔찍한 상태라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폭탄은 수십 년 동안 쌓인 녹과 때로 덮여 있었고, 곰팡이가 피고 썩은 원래의 포장 상자 안에 있었다. 일부는 195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생산 날짜가 찍혀 있었다.[9][12][11] 몇몇 폭탄에서는 액체 파라핀 불활성제가 이음새에서 새는 것을 볼 수 있었는데, 이는 폭탄의 폭발물 충전재가 과도한 노화와 열, 습기에 노출되어 변질되었음을 나타내는 명백한 징후였다.[9][12][11]
VFA-106에 소속된 해군 항공사 R. R. "Rocky" Pratt 중위에 따르면,[13] ''Forrestal''의 탄약 처리 담당자들은 폭탄을 만지는 것조차 두려워했다. 한 장교는 캐터펄트 발사의 충격을 견딜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했고, 다른 사람들은 즉시 폭탄을 투하할 것을 제안했다.[9] ''Forrestal''의 탄약 장교들은 함장인 벨링 함장에게 이 상황을 보고하고, 폭탄이 함선에 임박한 위험이므로 즉시 바다에 투하해야 한다고 알렸다.[26][17]
벨링 함장은 다음 날 임무를 위해 1,000파운드 폭탄이 필요했기에, ''Diamond Head''에 새로운 Mark 83과 교환하여 AN-M65A1을 돌려줄 것을 요구했다.[9] 그러나 ''Diamond Head''는 줄 것이 없다고 답했다. AN-M65A1 폭탄은 Mark 83이 충분하지 않아서 특별히 다시 사용된 것이었다. ''Diamond Head''의 한 승무원에 따르면, 수빅 만에 도착했을 때 AN-M65A1 폭탄을 이전하기 위해 준비한 기지 인원은 ''Diamond Head''가 양키 스테이션으로 돌아가는 길에 바다에 버리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폭탄이 실제로 항공모함 함대에 투입될 예정이라는 통보를 받자, 수빅 만 해군 탄약 분견대의 지휘관은 서류상 실수가 있었다고 믿고 처음에는 이전을 거부했다. 그는 CINCPAC로부터 전신을 통해 폭탄의 끔찍한 상태에 대한 책임을 명시적으로 면제하는 서면 명령을 받을 때까지 이전 서류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17]
2. 6. 갑판에 불안정한 폭탄 보관
다음 날 북베트남 상공에서 공격 임무를 수행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대체 폭탄도 구할 수 없었던 벨링 함장은 AN-M65A1 폭탄을 현재 상태 그대로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결론 내렸다.[26][14][15] 벨링 함장은 탄약 취급반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여, 다음 날 임무를 위해 폭탄을 장착하기 전까지 16개의 폭탄을 모두 갑판의 "폭탄 보관소" 구역(우현 레일과 항공모함의 아일랜드 사이 공간)에 격리 보관하기로 합의했다. 표준 절차는 다른 항공단의 탄약과 함께 함내 탄약고에 보관하는 것이었다. 만약 표준 절차대로 보관했다면, 우발적인 폭발로 인해 함선이 파괴되었을 수도 있다.[9]3. 화재 및 폭발
1967년 7월 29일 오전 10시 20분경, USS 포레스탈 항공모함 함미쪽 비행갑판에서 큰 화재가 발생했다. VF-11 비행대대 소속 F-4B 팬텀 II 전투기에 장착된 주니 로켓 한 발이 전자부품 오작동으로 발사되었는데, 이 로켓이 맞은편에서 이륙 대기 중이던 VA-46 비행대대 소속 A-4E 스카이호크 전투기의 외부연료탱크에 명중하면서 화재가 시작되었다.[1] 안전장치가 풀리지 않아 주니 로켓은 폭발하지 않았지만, 연료탱크가 파손되며 수 초 만에 반대쪽 외부연료탱크까지 폭발했다.
당시 비행 갑판은 12대의 A-4E 스카이호크, 7대의 F-4B 팬텀 II, 2대의 RA-5C 비질란테 항공기 등 총 27대의 항공기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었고, 이들 항공기는 폭탄, 로켓, 탄약 및 연료로 완전히 무장한 상태였다.[16] 특히, VF-11 소속 F-4B 팬텀 II (No. 110, 국방부 번호 153061)는 LAU-10 윙 언더 로켓 포드를 장착하고 있었는데, 각 포드에는 4개의 비유도 약 12.70cm Mk-32 "주니" 로켓이 들어 있었다.[1]
화재로 인해 인화성이 높은 JP-5 연료가 갑판에 퍼졌고, 타는 로켓 추진제 파편에 의해 점화되어 대규모 화재로 번졌다. 존 매케인 당시 소령은 불꽃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A-4의 코를 타고 내려가 급유 프로브에서 뛰어내려 탈출했다.[24]
화재 발생 1분 36초 후, 갑판에 떨어져 있던 1000파운드 AN-M65 폭탄 한 발이 폭발했다.[9] 이 폭탄은 오래되어 불안정한 Composition B(폭발물)를 포함하고 있어 폭발력이 더욱 강했다.[26] 이 폭발로 두 개의 호스 팀을 포함하여 35명이 즉사하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었고, 장갑 비행 갑판에 구덩이가 생겼다. 파괴된 항공기 파편과 폭탄 파편이 갑판과 승무원들에게 흩뿌려졌고, 불타는 연료는 갑판의 구멍을 통해 아래쪽 거주 구획으로 쏟아져 들어갔다.[26]
이후에도 폭탄과 로켓 탄두 등이 연쇄적으로 폭발하면서 피해가 커졌다. 특히, 한국 전쟁 시대 AN-M65 1,000파운드 폭탄은 최대 50% 더 강력하게 폭발한 것으로 추정된다.[30] 아홉 번째 폭발은 AN-M65 폭탄과 M117 H6 폭탄 사이의 공명 폭발로 추정된다.[26]
최초 폭발로 함선의 숙련된 손상 통제 및 소방 팀 대부분이 사망하거나 심각한 부상을 입었기 때문에, 나머지 승무원들이 화재 진압에 나섰다.[26] 이들은 항공기, 미사일, 로켓, 폭탄, 타는 파편을 옆으로 밀어냈고, 수많은 폭탄을 수동으로 폐기했다.[25]
조지 K. 매켄지와 루퍼투스는 ''포레스탈''에 접근하여 소방 호스를 겨냥해 화재 진압을 도왔다.[32] ''포레스탈''에 탑승한 해군 준장이자 기동부대 사령관인 하비 P. 래넘은 ''루퍼투스'' 함장 에드윈 버크 사령관의 행동을 "훌륭한 항해술의 행위"라고 칭했다.[32]
오전 11시 47분, 비행 갑판 화재가 진압되었고, 약 30분 후 완전히 진압되었다. 그러나 갑판 아래에서는 더 많은 시간 동안 화재가 계속되었다. 폭발물 처리반은 연기를 내뿜는 폭탄을 해체하고, 실탄 폭탄을 제거하는 등 위험한 작업을 수행했다.[25]
함선의 의료진은 위험한 상황에서 동료들을 지원했고, 사상자 수가 빠르게 함선의 의료팀을 압도하자 헨리 W. 터커의 호위를 받으며 병원선 리포즈와 합류하여 부상자와 사망자를 이송했다.[1] 7월 30일 새벽 4시, 화재는 완전히 진압되었다.[1]
3. 1. 주니 로켓 발사
1967년 7월 29일 오전 10시 51분경(현지 시각), 외부 전원에서 내부 전원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F-4 팬텀기 110호에 전기적 과전압이 발생했다. 이 과전압으로 인해 외부 격납고 2번(좌현 내측)에 장착된 4개의 5인치 Mk-32 주니 로켓 중 하나가 발사되었다.[17] 이 로켓에는 로켓 안전핀이 없었던 것으로 밝혀져 발사가 가능했다.[12] 발사된 로켓은 비행 갑판을 가로질러 약 약 30.48m 비행했고, 승무원의 팔을 절단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발사를 대기 중이던 VA-46 소속의 스카이호크에 장착된 400gal 외부 연료 탱크를 파손시켰다.[1][18]3. 2. 피격 항공기
VA-46 비행대대의 405번 A-4E 스카이호크 전투기가 주니 로켓에 피격되어 화재가 발생했다. 해군 공식 조사에 따르면 피격된 항공기는 프레드 D. 화이트 중령이 조종하는 405번 항공기였다.[2] 그러나 존 매케인 중령은 1999년 저서 ''내 아버지의 신념''에서 미사일이 자신의 항공기를 명중했다고 주장했다.[19]주니 로켓은 F-4B 팬텀 II 전투기에서 전자부품 오작동으로 발사되었으나, 안전장치가 풀리지 않아 폭발하지 않았다. 하지만 맞은편에서 이륙 대기 중이던 A-4E 스카이호크의 외부연료탱크에 명중하여 수 초 만에 반대쪽 외부연료탱크까지 폭발했다.[18] 인화성이 높은 JP-5 연료가 갑판에 퍼졌고, 타는 로켓 추진제의 파편에 의해 점화되어 대화재가 발생했다. 화이트와 매케인 중령은 화재가 시작되자 즉시 항공기에서 탈출을 시도했다. 매케인 중령은 불꽃을 가장 먼저 알아차리고 A-4의 코를 타고 내려가 급유 프로브에서 뛰어내려 탈출했다.[24]
3. 3. 폭탄 폭발
VA-46 비행대대의 405번 A-4E 스카이호크 전투기의 외부연료탱크에 명중한 주니 로켓으로 인해 화재가 발생했다. 1분 36초 후, 1,000 파운드 AN-M65 폭탄 한 발이 폭발했다.[9] 이 폭탄은 오래되어 불안정한 Composition B(폭발물)를 포함하고 있어 폭발력을 더욱 강화시켰다.[26]패리어는 갑판에 떨어진 폭탄을 냉각시키려 노력했지만, 덮개가 열리면서 폭발물이 맹렬하게 타기 시작했다.[18] 그는 소방관들에게 철수하라고 외쳤으나, 폭탄은 결국 폭발하고 말았다.[9] 이 폭발로 35명의 인원이 폭발 근처에 있었으며, 두 개의 호스 팀이 전멸했다. 패리어와 그의 부하 중 3명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즉사했고, 27명이 부상을 입었다.[18]
브라우닝 중령은 "폭탄이 터지기 직전에 12명의 사람들이 불 속으로 뛰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라고 회상했다.[24][27]
훗날 상원 의원이 되는 존 매케인 당시 소령은 불타고 있는 다른 조종사를 도우려다 첫 번째 폭탄이 폭발하면서 10m 뒤로 밀려나 파편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27] 화이트 중령은 불타는 항공기에서 탈출했지만, 안타깝게도 첫 번째 폭탄 폭발로 인해 사망했다.[27]
모든 조종사가 제때 항공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켄 맥밀런 중위는 탈출에 성공했고, 소위 돈 데이머스와 데이비드 달러하이드는 항공기에서 탈출하다 부상을 입었다. 제리 스타크 중령과 데니스 바튼 중령은 실종되었다.[27]
이 사고로 F-4B 팬텀 II 7대, A-4E 스카이호크 11대, RA-5C 비질란테 정찰기 3대 등 모두 21대의 함재기가 파손되었다.
3. 4. 화재 확산
1967년 7월 29일 오전 10시 20분, USS 포레스탈 항공모함의 함미쪽 비행갑판에 있던 F-4B 팬텀 II 전투기의 주니 로켓이 오작동으로 발사되었다. 이 로켓은 VA-46 비행대대의 A-4E 스카이호크 전투기 외부연료탱크에 명중했고, 수초 만에 반대쪽 외부연료탱크까지 폭발했다.이 화재로 1000파운드 AN-M65 폭탄 2발이 비행갑판에 떨어졌고, 첫 화재 발생 1분 36초 후 폭탄 한 발이 폭발했다. 이 폭발로 F-4B 팬텀 II 7대, A-4E 스카이호크 11대, RA-5C 비질란테 정찰기 3대 등 총 21대의 함재기가 파손되었다.[26] 첫 번째 폭탄 폭발로 장갑 비행 갑판에 구덩이가 생겼고, 파괴된 항공기 파편과 폭탄 파편이 갑판과 승무원들에게 흩뿌려졌다. 불타는 연료는 갑판의 구멍을 통해 아래쪽 거주 구획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후미 갑판에 있던 연료와 폭탄이 실린 항공기들이 모두 손상되었고, 7대의 F-4가 불길에 휩싸였다.[26]
첫 폭발 후 10초 만에 1,000파운드 폭탄 2발이 추가로 폭발했고, 44초 후 네 번째 폭탄이 폭발했다. 화재 동안 총 10개의 폭탄이 폭발했으며,[28] 시신과 잔해가 배의 선수까지 날아갔다. 5분도 채 안 되어 7~8개의 1,000파운드 폭탄,[26][29] 1개의 750파운드 폭탄, 1개의 약 226.80kg 파운드 폭탄, 그리고 여러 개의 미사일 및 로켓 탄두가 폭발했다.[29] 특히, 한국 전쟁 시대 AN-M65 1,000파운드 폭탄은 오래되어 최대 50% 더 강력하게 폭발한 것으로 추정된다.[30] 아홉 번째 폭발은 AN-M65 폭탄과 M117 H6 폭탄 사이의 공명 폭발로 추정된다.[26]
폭발로 비행 갑판에 7개의 구멍이 생겼고, 약 40000gal의 불타는 항공유가 갑판 구멍을 통해 후미 격납고와 거주 구획으로 쏟아졌다. 이로 인해 야간 근무 중이던 50명이 사망했고,[18] ''Forrestal'' 후미 내부 구획에서 41명이 추가로 사망했다.[26]
배 전체의 인원들이 화재 진압과 피해 통제를 위해 나섰다. 이들은 항공기, 미사일, 로켓, 폭탄, 타는 파편을 옆으로 밀어냈고, 수많은 250파운드 및 500파운드 폭탄을 수동으로 폐기했다. 소방 및 손상 통제 훈련을 받지 않은 승무원들이 소진된 손상 통제 팀을 대신했다. 그러나 경험 부족으로 인해 바닷물을 사용하여 거품으로 화재를 진압하려는 노력을 방해하기도 했다.[27][1]
3. 5. 화재 진압
구축함 조지 K. 매켄지는 바다에서 사람들을 건져 올리고 불타는 배에 소방 호스를 겨냥했다. 또 다른 구축함 루퍼투스는 90분 동안 ''포레스탈''에 약 6.10m까지 접근하여 우현의 불타는 비행 갑판과 격납고 갑판, 그리고 좌현 후방 5인치 포좌에 자체 소방 호스를 겨냥했다.[32] ''포레스탈''에 탑승한 해군 준장이자 기동부대 사령관인 하비 P. 래넘은 ''루퍼투스''의 함장인 에드윈 버크 사령관[31]의 행동을 "훌륭한 항해술의 행위"라고 칭했다.[32] 오전 11시 47분, ''포레스탈''은 비행 갑판 화재가 진압되었다고 보고했다. 약 30분 후, 비행 갑판의 화재를 완전히 진압했다. 소방대는 갑판 아래에서 더 많은 시간 동안 화재를 진압했다.[32]오후 동안 폭발하지 않은 폭탄들이 계속 발견되었다. 항공모함의 폭발물 처리 장교인 로버트 케이츠 소위(LT(JG))는 "비행 갑판 중앙에 500파운드 폭탄과 750파운드 폭탄이 연기를 내뿜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폭발하거나 그런 것은 아니었고, 그냥 거기 앉아서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래서 가서 해체하고 버렸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수병은 03 레벨로 떨어진 실탄 폭탄을 해체하기 위해 비행 갑판의 구멍을 통해 줄을 타고 내려가는 자원했다. 그 구획은 여전히 불이 붙어 있었고 연기로 가득했지만, 나중에 케이츠는 그 구획으로 직접 내려가 폭탄에 줄을 연결하여 갑판으로 끌어올려 버릴 수 있도록 했다.[25]
그날 하루 종일, 함선의 의료진은 위험한 상황에서 동료들을 지원했다. 사상자 수가 빠르게 함선의 의료팀을 압도했고, ''포레스탈''은 헨리 W. 터커의 호위를 받으며 20시 54분에 병원선 리포즈와 합류하여 승무원들이 22시 53분에 사망자와 부상자를 이송하기 시작할 수 있도록 했다.[1] 소방관 밀트 크러츨리는 "가장 힘든 일은 나중에 불탄 지역으로 돌아가 죽거나 부상당한 동료들을 찾는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숯으로 변하고 검게 그을린 시신들이 시체 경직 상태로 굳어 있는 것을 "쓰러진 동료들에게 어느 정도의 존엄성을 유지하면서" 제거하는 것이 극도로 어려웠다고 말했다.[33]
17시 05분, ''포레스탈'' 승무원(항공모함과 다른 배에 탑승한)에 대한 사열이 시작되었다. 함선 승무원을 파악하는 데 여러 시간이 걸렸다. 부상자와 사망자는 다른 배로 이송되었고, 일부 승무원은 신원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타거나 배 밖으로 날려져 실종되었다. 18시 44분, 함선의 목수 작업장과 후방 격실에서 여전히 화재가 발생하고 있었다. 20시 33분, 02 및 03 레벨의 화재는 진압되었지만 해당 지역은 여전히 출입하기에는 너무 뜨거웠다. 연기와 열 때문에 소방 활동이 크게 방해받았다. 승무원들은 아래 격실의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비행 갑판에 추가 구멍을 냈다. 7월 30일 12시 20분, 화재가 시작된 지 14시간 후, 모든 화재가 진압되었다. ''포레스탈'' 승무원들은 계속해서 열점을 진압하고, 연기를 제거하고, 02 및 03 레벨의 뜨거운 강철을 식혔다. 화재는 04시 00분에 완전히 진압된 것으로 선언되었다.[25][1]
4. 화재 진압 이후
화재로 134명이 사망하고 161명이 부상당했다.[34][2] F-4B 팬텀 II 7대, A-4E 스카이호크 11대, RA-5C 비질란테 3대 등 총 21대의 항공기가 파괴되었고,[1] 40대가 추가로 손상되었다.[35]
선내 군목들은 격납고 1에서 사망자를 위한 추도식을 거행했고, 2,000명 이상의 포레스탈 승무원이 참석했다.
4. 1. 임시 수리
1967년 7월 31일, Forrestal영어은 미국으로 돌아가기 위한 임시 수리를 위해 필리핀 큐비 포인트 해군 항공 기지에 도착했다. 환영 행사 도중 화재 경보가 울렸는데, 이는 화재로 소실된 구획 내 매트리스에 불이 붙은 것을 승무원들에게 알린 것이었다.[19]
4. 2. 조사 시작
1967년 8월 15일, 포레스탈함을 수리하기 위해 미국으로 복귀해야 했기 때문에, 리어 제독 포사이스 매시가 이끄는 항공모함 안전 검토 패널 특별팀이 필리핀에서 소집되었다. 패널은 함내 인원들을 신속하게 면담했다.[39]4. 3. 군수품 문제 발견
수사관들은 LAU-10 로켓 발사기 및 주니 미사일 회로의 유도 전압 문제점을 확인했다. 또한 타격용으로 탑재된 낡은 1,000파운드 "뚱보 폭탄"에서도 문제점을 확인했는데, 이 폭탄은 1953년 한국 전쟁 때부터 사용된 것으로 밝혀졌다.[1]4. 4. 안전 절차 무시
조사 위원회는 "무기 및 항공기 장비 및 절차에 대한 부실하고 오래된 교리 및 기술 문서가 모든 지휘 계통에서 나타났으며, 이는 우발적인 로켓 발사의 원인이 되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사용된 교리와 절차는 ''포레스탈''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다른 항공모함도 주니 로켓에 문제가 있었다.[17]조사 결과에 따르면 안전 규정은 주니 로켓의 발사를 막았어야 했다. 삼중 이젝터 랙(TER) 전기 안전 핀은 항공기 발사 전에 로켓에 전기 신호가 전달되는 것을 막도록 설계되었지만, 강풍이 불면 부착된 꼬리표가 날아가 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도 알려져 있었다. 핀 외에도 미사일의 전기 배선을 로켓 포드에 연결하는 "피그테일"이 있었다. 미국 해군 규정에 따르면 피그테일은 항공기가 캐터펄트에 부착되어 발사 준비가 되었을 때만 연결해야 했지만, 무기 장교들은 이로 인해 발사 속도가 늦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18]
해군 조사 결과, 화재 4주 전 ''포레스탈''의 무기 조정 위원회는 무기 기획 위원회 위원들과 함께 캐터펄트에서 피그테일을 연결하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회의를 열었다. 승무원이 연결을 완료하는 데 어려움을 겪으면서 발사가 지연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들은 표준 절차에서 벗어나 "무기 담당자가 택시 운행 전에 '팩'에서 피그테일을 연결하도록 허용하고, 캐터펄트에서 안전핀만 제거하도록 한다"는 데 동의했다. 1967년 7월 8일에 작성된 이 각서는 함정 작전 장교에게 배포되었지만, 그러한 결정을 승인해야 하는 함정 지휘관인 벨링 함장에게는 전달되지 않았다.[18]
4. 5. 원인 규명
공식 조사 결과에 따르면 탄약반은 무기 조정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즉시 행동했다. 조사 결과, 피그테일(미사일과 발사 장치를 연결하는 전선)이 일찍 연결되었고, 결함이 있는 주니 미사일의 TER 핀이 날아갔을 가능성이 높으며, 조종사가 시스템을 외부 전원에서 내부 전원으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전력 서지(급격한 전압 변화)가 발생했을 때 미사일이 발사되었다는 것이 밝혀졌다.[12][8] 조사 보고서는 비행 갑판의 극단적인 우현에서 발견된 VF-11의 F-4B No. 110의 외부 격납대 2번 위치의 좌현 TER-7에 장착된 주니 로켓이 후방 갑판의 좌현에 있는 프레드 D. 화이트 중령이 조종하는 A-4 No. 405를 명중시켰다고 결론 내렸다. 이 사고 발사는 CA42282 파일론 전기적 분리 장치, TER-7 안전 스위치, LAU-10/A 단락 장치의 세 가지 구성 요소의 동시 오작동으로 인해 발생했다.[8] 조사단은 CA42282 파일론 전기적 분리 장치에 설계 결함이 있고, TER-7 안전 핀 설계가 부실하여 AERO-7 스패로우 발사기에 사용되는 탄약 핀과 혼동하기 쉬우며, 실수로 이를 사용할 경우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결론내렸다.[8]4. 6. 드라이독 수리
1967년 9월 19일부터 1968년 4월 8일까지, '''포레스탈'''은 노퍽 해군 조선소에서 수리를 받았다. 수리는 고정된 우현 갑판 측면 엘리베이터를 제거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는데, 이 엘리베이터는 조선소의 해머헤드 크레인의 지원을 받아 배에서 잘라내야 했다.[1] 항공모함은 1967년 9월 21일부터 1968년 2월 10일까지 8번 드라이 도크를 사용했으며, 이 드라이 도크를 사용하고 있던 와 유조선, 기뢰 제거함을 옮겨야 했다.[1] 화재 후 개조 기간 동안 비행 갑판 약 53.34m와 03, 02, 01 갑판의 약 200개 구획이 교체되었다.[1] 함선의 후방 5"/54 구경 Mark 42 함포 4문이 제거되었다.[1] 전방 4문의 함포는 1962년 이전에 제거되었다.[1] 수리 비용은 약 7200만달러였으며 완료하는 데 거의 5개월이 걸렸다.[36][16][37]4. 7. 벨링 함장 전출
벨링 대령은 제독으로 선발되어 워싱턴 D.C.로 전출, 무어러 제독에게 보고하는 해군 작전 개발 프로그램 국장으로 임명되었다. 1967년 9월 18일, 로버트 B. 볼드윈 대령이 ''포레스탈''의 지휘를 맡았다.[38] 1968년 4월 8일부터 15일까지 ''포레스탈''은 엘리자베스 강을 따라 버지니아 곶 앞바다로 나가 화재 이후 207일 만에 처음으로 수리 후 시험 항해를 했다. 이 시험에서 CVW-17 사령관 로버트 E. 퍼거슨이 착륙하면서 화재 이후 첫 착륙 시험도 기록했다.[1]4. 8. 벨링 함장의 책임 면제
해군 조사 위원회는 10월 18일에 결과를 발표했다. 위원회는 벨링 함장이 주니 미사일에 문제가 있었던 것을 알고 있었고, 탄약반이 탄약을 취급하는 과정에서 절차를 따르는지 확인하기 위해 더 노력했어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8] 위원회는 그가 재앙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판결했지만,[8]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모 업무로 전출되었고, 다시는 현역 지휘관으로 복귀하지 못했다.벨링은 미국 대서양 함대 사령관 에프레임 P. 홈스 제독의 참모로 임시 임무를 받았다. 홈스 제독은 벨링 함장을 면책하는 부분을 포함하여 ''포레스탈''함 화재에 대한 해군 보고서의 많은 부분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벨링 함장에게 견책장을 발부하기 위해 자신의 참모로 배정하여, 벨링 함장에게 책임을 물음으로써 그의 경력을 사실상 끝내려 했다. 홈스 제독은 최종 보고서에 견책장을 첨부했지만, 토머스 হিন쇼 무어러 제독이 보고서를 승인했을 때 홈스 제독에게 견책장을 철회하고 제거하라고 명령했다.[9][26]
4. 9. 권고 사항 및 추가 조치
조사 위원회는 항공모함의 안전 절차에 대한 몇 가지 변경 사항을 권고했다. 여기에는 비행 갑판용 원격 제어 소방 시스템 개발, 더욱 안정적인 탄약 개발, 생존 장비 개선 및 화재 생존 훈련 강화가 포함되었다.[39] 미국 해군은 사용 또는 환적을 위해 함선에 탑재된 무기 시스템에 대한 안전 점검을 실시했다. 이 평가는 이 사건과 오리스카니에서의 사건으로 인해 설립된 무기 시스템 폭발 안전 검토 위원회에서 여전히 수행하고 있다.[17][9][40]5. 잘못된 NASA 보고서
1995년에 발간된 NASA 간행물 1374는 ''포레스탈'' 화재를 전자기 간섭(EMI)의 결과로 잘못 묘사했다.[41] 이 보고서는 "항공모함 ''U.S.S. 포레스탈''에 착륙하는 해군 제트기가 갑작스럽게 탄약을 방출하여 갑판에 완전히 무장하고 연료를 채운 전투기를 타격했다... 이 사고는 착륙하는 항공기가 항공모함 기반 레이더에 의해 조사되어 발생한 EMI가 무기 시스템에 원치 않는 신호를 보냄으로써 발생했다"고 기술하고 있다.[41]
이러한 잘못된 설명은 전자기 간섭을 피하는 것의 중요성에 대한 경고성 이야기로 인용되었다.[42][43] 보고서 자체는 화재에 대한 정확한 참고 자료를 제공하지 못한다. 텍스트에는 참고 문헌 섹션의 항목 12를 가리키는 위첨자가 포함되어 있지만, 해당 항목은 "폰 아헨, W.: ''아파치 헬리콥터: EMI 사례 연구.'' 규정 준수 엔지니어링, 1991년 가을."이다.[41]
6. 유산
1967년 포레스탈함 화재로 희생된 18명의 승무원은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었고, 베트남 전쟁 기념비에도 이름이 등재되었다.[45][44]
1990년, 비영리 단체 USS 포레스탈 협회가 결성되어 희생자들을 기리고 있다.[45] 2017년 7월 29일에는 사고 50주년 추모 행사가 열려 군 관계자, 생존자, 유족들이 참석해 희생된 각 선원을 대표하는 성조기를 전달받았다.[45][44]
이 사고는 미 해군 손상 통제 교육에 큰 영향을 주었다. "''배우거나 불타라''" 등 관련 훈련 영상은 필수 시청 자료가 되었고,[1][47][12][25] "워시 다운" 시스템 도입 등 화재 예방 개선으로 이어졌다.[17][48]
1967년 8월 11일 라이프 지는 "바다의 불지옥"이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표지에 실었고,[50] 히스토리 채널의 쇼크웨이브,[51]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의 세컨즈 프롬 디재스터 등 여러 미디어에서도 다루어졌다.
6. 1. 파리어 소방 학교 설립
버지니아주 노퍽 해군 기지에 있는 파리어 소방학교는 초기 폭발로 사망한 제8 피해 통제팀 지휘관 제럴드 W. 파리어 상사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46][12] 이 학교에서는 ''포레스탈''호에서 목숨을 잃은 해군 장병들을 기리는 연례 추모 행사를 개최한다.[46]
6. 2. 얻은 교훈
화재는 《포레스탈》호가 RA-5C 비질란테와 같은 더 무거운 항공기뿐만 아니라 무겁거나 손상된 탄약을 투하하는 데 필요한 중장비, 장갑 지게차가 부족하다는 것을 드러냈다.[1]미국 해군은 손상 통제와 탄약 안전 교육 시 《포레스탈》호 화재와 그로부터 얻은 교훈을 활용한다. "''배우거나 불타라''"라는 제목의 비행 갑판 작전 영상은 소방 훈련생들이 반드시 시청해야 하는 자료가 되었다.[1] 모든 신병은 화재 및 손상 통제 노력(성공적, 실패적 모두 포함)의 영상을 바탕으로 제작된 "''불의 시련: 항공모함, 생존을 위한 싸움''"이라는 제목의 훈련 비디오를 시청해야 한다.[47][12][25]
영상은 손상 통제 팀이 타는 연료를 진압하기 위해 갑판에 소화용 폼을 살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올바른 절차였지만, 갑판 반대편의 승무원들이 바닷물을 뿌려 폼을 씻어내면서 그들의 노력이 무효화되었다. 바닷물은 갑판의 구멍을 통해 타는 연료를 아래 갑판으로 씻어내면서 상황을 악화시켰다. 이에 대응하여 폼이나 물로 비행 갑판을 채우는 "워시 다운" 시스템이 모든 항공모함에 도입되었으며, 1968-1969년 개조 기간 동안 《프랭클린 D. 루스벨트》호에 처음 설치되었다.[17][48]

이 사건으로 인해 많은 다른 화재 예방 개선 사항이 생겨났다.[17]
첫 번째 폭발로 인해 배에 있던 훈련된 소방관 거의 모두가 사망했기 때문에, 공식적인 소방 훈련을 받지 않은 나머지 승무원들은 임시방편으로 대처해야 했다.[49] 현재 모든 해군 신병은 구획 식별, 고정 및 휴대용 소화기, 전투복, 자가 호흡 장치 및 비상 탈출 호흡 장치에 대한 일주일간의 훈련을 받는다. 신병들은 휴대용 소화기와 충전된 호스를 사용하여 화재를 진압하고, 열이 가해지고 연기로 가득 찬 구획에서 탈출하는 능력을 시연함으로써 지식과 기술을 시험받는다.[12]
6. 3. 미디어
이 재난은 주요 뉴스 기사였으며, 1967년 8월 11일자 라이프 잡지 표지에 "바다의 불지옥"이라는 제목으로 실렸다.[50]이 사건은 히스토리 채널의 쇼크웨이브 첫 번째 에피소드[51]와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의 세컨즈 프롬 디재스터 시즌 2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다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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