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FIFA 월드컵 예선 대륙간 플레이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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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74년 FIFA 월드컵 예선 대륙간 플레이오프는 소련과 칠레 간의 월드컵 본선 진출을 결정짓는 경기였다. 소련은 유럽 지역 예선에서 프랑스와 아일랜드를 꺾고, 칠레는 남미 지역 예선에서 페루를 이기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1차전은 모스크바에서 0-0 무승부로 끝났지만, 2차전은 칠레의 쿠데타와 관련된 정치적 문제로 소련이 경기를 거부하여 칠레의 2-0 몰수승으로 처리되었다. 칠레는 이 승리로 본선에 진출했으나, 본선 조별리그에서 서독, 동독, 호주에 밀려 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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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FIFA 월드컵 예선 대륙간 플레이오프 - [국제 축구 대회 정보]에 관한 문서 | |
---|---|
대회 정보 | |
대회 명칭 | 1974년 FIFA 월드컵 예선 (UEFA–CONMEBOL 플레이오프) |
참가 연맹 | UEFA CONMEBOL |
날짜 | 1973년 9월 26일 ~ 1973년 11월 21일 |
이전 대회 | 1962년 |
다음 대회 | 1978년 |
사용된 경기장 수 | 2 |
사용된 도시 수 | 2 |
경기 결과 | |
참가국 | 소련 칠레 |
최종 결과 | 칠레 승리 (기권승) 및 1974년 FIFA 월드컵 진출 |
첫 번째 경기 | |
경기 정보 | 첫 번째 경기 |
날짜 | 1973년 9월 26일 |
경기장 | 중앙 레닌 경기장 |
도시 | 모스크바 |
결과 | 소련 0 - 칠레 0 |
관중 수 | 48,891명 |
주심 | 아르만두 마르케스 (브라질) |
두 번째 경기 | |
경기 정보 | 두 번째 경기 |
날짜 | 1973년 11월 21일 |
경기장 | 에스타디오 나시오날 |
도시 | 산티아고 |
결과 | 소련 0 - 칠레 2 (기권승) |
관중 수 | 15,000명 |
주심 | 에리히 리네마이어 (오스트리아) |
통계 | |
총 경기 수 | 2 |
총 관중 수 | 63,891명 |
경기당 평균 관중 수 | 31,945.5명 |
2. 참가국
1974년 FIFA 월드컵 본선 진출을 위해 대륙간 플레이오프에 참가한 국가는 다음과 같다.
소련은 1973년 칠레 쿠데타를 강하게 비난했다.[1]
2. 1. 소련
소련은 유럽 지역 예선 9조 1위로, 프랑스와 아일랜드 공화국을 꺾고 대륙간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1] 예선은 1972년 10월 13일 파리에서 프랑스에게 1-0으로 패배하면서 시작되었으나, 5일 후 더블린에서 아일랜드 공화국을 2-1로 이겼다. 1973년 5월에는 홈에서 아일랜드를 1-0, 프랑스를 2-0으로 연파했는데, 프랑스전 두 골은 모두 경기 종료 10분 전에 나왔다.[1]소련이 플레이오프에 진출한 것은 조 1위 팀들 중 성적이 가장 나빠서가 아니라, 유럽(UEFA) 9조에 배정되었기 때문이다.[1] 당시 소련은 동구권 공산주의 국가의 종주국으로, 칠레 쿠데타를 강력하게 비난하고 있었다.
2. 2. 칠레
남미 3조 1위를 차지하여 대륙간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CONMEBOL 예선에서 칠레는 페루, 베네수엘라와 함께 3조에 편성되었지만, 베네수엘라는 기권했다.[1] 1973년 4월 29일, 칠레는 리마에서 페루에게 2-0으로 패했다.[1] 1973년 5월 13일 홈 경기에서 칠레는 2-0으로 승리하여 두 팀은 승점과 골득실에서 동률을 이루었다.[1]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의 중립 지역에서 플레이오프가 열렸고, 칠레는 2-1로 승리하여 소련과 대결하게 되었다.[1]3. 경기 결과
1973년 9월 26일, 모스크바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1차전은 0-0 무승부로 끝났다. 1973년 11월 21일, 산티아고 에스타디오 나시오날 데 칠레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2차전은 소련이 1973년 칠레 쿠데타와 관련된 정치 및 안전 문제를 이유로 경기를 거부, 칠레의 2-0 몰수승으로 처리되었다.[1] 그 결과, 칠레가 합계 2-0으로 1974년 FIFA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다.
3. 1. 1차전 (1973년 9월 26일, 모스크바)
1973년 9월 26일, 모스크바의 루즈니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소련과 칠레의 1차전 경기는 0-0 무승부로 끝났다.[5][6] 이 경기는 쿠데타 직후의 긴장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치러졌다. 칠레 선수들은 군사정권의 감시와 통제 속에서 경기에 임해야 했다.[1]경기 전, 엘리아스 피게로아와 카를로스 카스젤리는 여권 문제로 잠시 구금되기도 했다.[3] 소련은 칠레의 정치 상황을 이유로 경기 취소를 요구하기도 했으나, FIFA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1]
경기 당일, 소련 당국은 언론과 카메라의 경기장 입장을 금지했다.[1] 이러한 조치는 경기에 대한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켰다. 소련 정부와 언론은 홈에서 열리는 경기에서 쉬운 승리를 예상했지만, 결과는 무승부였다.[7]
소련 | 칠레 | ||
---|---|---|---|
예우헨 루다코우 | 골키퍼 | 후안 올리바레스 | |
레바즈 조조아슈빌리 | 수비수 | 후안 마추카 | |
미하일 포멘코 | 수비수 | 엘리아스 피게로아 | |
예브게니 로프체프 | 수비수 | 알베르토 킨타노 | |
블라디미르 카프리치니 (주장) | 수비수 | 안토니오 아리아스 | |
빅토르 쿠즈네초프 | 미드필더 | 프란시스코 발데스 (주장) | |
블라디미르 문탼 | 미드필더 | 기예르모 파에스 | |
올레그 돌마토프 | 미드필더 | 후안 로드리게스 | |
블라디미르 오니셴코 | 공격수 | 카를로스 카스젤리 | |
아르카디 안드레아시안 | 공격수 | 세르히오 아우마다 | |
올레그 블로힌 | 공격수 | 레오나르도 벨리스 | |
아나톨리 코제먀킨 | 교체 선수 | 훌리오 크리스토스 | |
블라디미르 구차예프 | 교체 선수 | ||
예프게니 고랸스키 | 감독 | 루이스 알라모스 |
3. 2. 2차전 (1973년 11월 21일, 산티아고)
1973년 11월 21일, 산티아고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2차전은 소련이 칠레 군부 독재의 인권 탄압에 항의하며 경기를 거부하면서 칠레의 2-0 몰수승으로 처리되었다.[3] 소련은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에 대한 쿠데타 이후 국립 경기장이 7,000명 이상의 정치범을 수용하고, 많은 반체제 인사들이 고문당하는 불법 구금 센터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정치적, 안전 문제를 제기했다.[3][1] 소련은 FIFA에 보낸 서한에서 "도덕적인 고려 사항으로 인해, 소련은 칠레 애국자들의 피로 물든 산티아고의 경기장에서 현재 경기를 할 수 없다"고 밝혔다.[1][8]FIFA는 소련의 경기 거부로 칠레의 2-0 몰수승을 선언했지만, 칠레 군사 정권은 여론 개선 및 '정상성' 과시를 위해 15,000명의 관중을 모아놓고 경기를 강행했다.[3] 칠레 팀은 킥오프 후 텅 빈 소련 골대에 골을 넣었고, 주장 프란시스코 "차마코" 발데스가 득점했다.[3][1] 이는 사실상 '쇼'에 가까운 경기였다.[1]
4. 1973년 칠레 쿠데타와 경기
1973년 9월 11일,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이끄는 군부는 살바도르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부를 무너뜨리고 정권을 장악했다. (1973년 칠레 쿠데타) 쿠데타 이후 칠레에서는 군부에 의한 대대적인 인권 탄압이 자행되었다.[1] 특히, 2차전 경기장으로 예정되었던 산티아고 국립 경기장은 정치범 수용소로 사용되어 수많은 사람이 고문과 학살을 당했다.[1] 이러한 상황에서 소련은 칠레 군부 정권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2차전 경기를 거부했다.[1] FIFA는 해당 경기를 소련의 0-2 몰수패로 처리했다.[1]
5. 논란과 비판
살바도르 아옌데는 1970년 칠레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하여 집권했으나, 1973년 9월 아우구스토 피노체트가 일으킨 쿠데타로 축출되었다. 쿠데타 이후, 피노체트 정권은 반대파를 탄압하기 위해 수천 명의 사람들을 산티아고 국립 경기장에 가두고 고문하거나 살해했다. 이러한 인권 탄압은 1973년 11월 7일까지 계속되었다.[1] 공교롭게도 소련과 칠레의 축구 경기가 11월 21일 같은 장소에서 열릴 예정이었다.[1]
6. 경기 이후
칠레는 개최국 서독, 그리고 처음으로 진출한 동독과 호주와 같은 조에 편성되었다. 첫 경기에서 칠레는 전반전에 파울 브라이트너가 골을 넣어 서독에 1-0으로 패했다. 두 번째 경기에서 세르히오 아후마다가 동독을 상대로 동점골을 기록했지만, 호주와의 0-0 무승부로 칠레는 월드컵에서 탈락했다. 두 독일 팀이 다음 라운드로 진출했다.
소련은 1978년 FIFA 월드컵과 1976년 및 1980년 유럽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지 못하면서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참조
[1]
웹사이트
Chile vs. URSS, 1973. La cara negra del fútbol
http://www.miguelgar[...]
2015-05-17
[2]
웹사이트
URSS vs Chile, Moscú 1973: La historia del 0–0 que acercó a la Roja a Alemania '74 a solo días del golpe militar
http://www.eldesconc[...]
El Desconcierto
2016-09-27
[3]
웹사이트
El partido fantasma entre Chile y la URSS
http://www.marca.com[...]
Marca
2013-11-21
[4]
웹사이트
Chile – URSS (1973) : el partido fantasma
https://curiosidades[...]
2012-05-07
[5]
웹사이트
Chile vs URSS 1973: El partido de los valientes
https://www.guioteca[...]
Empresa El Mercurio
2011-05-26
[6]
웹사이트
A 40 años de la increíble aventura de Chile en la Unión Soviética
http://www.latercera[...]
Grupo Copesa
2013-09-21
[7]
웹사이트
The Soccer Match That Should Have Never Been Played
https://medium.com/o[...]
Medium
2014-04-16
[8]
웹사이트
Retro Football: Chile Qualify For '74 World Cup By Beating USSR With A Single Shot In Sinister Circumstances
http://www.whoateall[...]
Who ate all the pies
2013-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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