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서울대 본부점거 사건
1. 개요
2011년 서울대 본부점거 사건은 서울대학교의 법인화 추진에 반대하여 학생들이 본부를 점거한 사건이다. 2004년부터 추진된 국공립대 법인화는 학내 의견 수렴 부족으로 실패했으나, 2010년 법인화 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면서 서울대 법인화가 확정되었다. 이에 반발한 학생들은 2011년 5월 30일부터 본부를 점거하고, 총학생회 주도로 설준위 해체를 요구하며 본부와의 협상, 촛불집회, 락 페스티벌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저항했다. 6월 26일 전학대회에서 점거 해제가 결정되었으며, 이후 주도 학생들에 대한 징계 논의, 서울대 법인화법 시행령 통과,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 출범 등으로 이어졌다.
| 이름 | 2011년 서울대 본부점거 사건 |
|---|---|
| 별칭 | 본부점거 |
| 날짜 | 2011년 5월 30일 ~ 2011년 6월 26일 |
| 장소 | 대한민국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 |
| 참가자 | 서울대학교 학생 |
| 원인 |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 설립준비위원회의 조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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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오 일병 사건
최영오 일병 사건은 1963년 최영오 일병이 선임병의 부당한 대우에 항의하다 선임병 2명을 살해한 사건으로, 학보병 제도 폐지와 군대 문화에 대한 비판, 개인 권리 보장에 대한 사회적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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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발생 배경
2011년 서울대 본부점거 사건은 서울대학교 법인화 추진 과정에서 비롯되었다. 서울대 법인화 논의는 2000년대 초반부터 있었지만, 학내 구성원들의 의견 수렴 부족과 대학의 자율성 침해 우려로 인해 계속 반발이 있었다.
2011년 5월 30일, 서울대학교 53대 총학생회는 대학본부 측의 법인화 진행 과정에 절차상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며 비상총회를 소집했다. 비상총회 결과에 따라 총학생회와 참여 학생들은 대학본부를 점거하며 농성 시위를 시작했다. 학생들은 총장 및 본부 측과 대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이어갔고, 몇 차례 회담을 가지기도 했다.
이 점거 농성은 이전 시위와 달리 일반 학생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이전에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던 일반 학생들이 SNS 등을 통해 커뮤니티를 형성하며 시위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이는 '공부하는 시위'와 같은 독특한 시위 현상으로 나타났으며, '본부스탁 락 페스티벌'이라는 상징적인 행사를 통해 표출되었다.
서울대 본부는 2011년 3월 '국립대학교법인 서울대학교 설립준비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법인화 시행을 추진했지만, 점거 농성은 본부 측과의 협상과 학생 사회 내부의 결의를 통해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점거를 해제하면서 종결되었다.
2.1. 국공립대 법인화 추진 과정
법인화는 2004년부터 정부 주도로 본격 추진되었다. 그러나 각 대학은 학내 의견 수렴 부족을 이유로 반대하여 국공립대 법인화법은 무산되었다. 서울대학교는 2005년 정운찬 총장 시절 '선택적 법인화' 논의를 시작, 2007년 이장무 총장이 법인화위원회를 발족하며 연구 보고서 작성, 공청회 등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2009년 서울대 본부는 '국립대학법인 서울대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안'을 교육과학기술부에 제출, 교과부는 이를 토대로 법안을 입법예고 했다.
그러나 그해 12월 국무회의를 통과해 국회에 제출된 법안은 입법예고된 원안과 달리 교과부 차관이 이사회에 참여하는 등 독소조항이 추가되어 대학 자율성과 민주적 의사소통을 저해한다는 우려를 낳았다. 또한, 정당한 의견 수렴 절차가 없었던 법안은 학교 구성원들의 반발을 샀다. 2009년 9월 '서울대학교 법인화 추진에 관한 찬반 총투표' 결과 투표율 51.53%, 반대 79.28%를 기록했다. 하지만 2010년 12월, 여당에 의해 법인화 법안이 국회 본회의에 직권상정되어 통과되면서 서울대 법인화가 확정되었다.
2.2. 서울대 법인화 법안 통과와 반발
2004년부터 정부 주도로 국공립대 법인화가 추진되었으나, 각 대학은 학내 의견 수렴 부족을 이유로 반대하여 실패했다. 그러나 서울대학교는 2005년 정운찬 총장 부임 당시 '선택적 법인화' 방식으로 법인화 논의를 재개했다. 2007년 이장무 총장은 법인화위원회를 발족하고 법인화 연구 보고서 작성, 공청회 등을 통해 법인화 추진에 힘썼다. 2009년 서울대 본부는 '국립대학법인 서울대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안'을 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에 제출했고, 교과부는 이를 바탕으로 서울대 법인화 법안을 입법예고했다.
그러나 그해 12월 국무회의를 통과해 국회에 제출된 법안은 입법예고된 원안과 달리 교과부 차관이 이사회에 참여하는 등의 독소조항이 추가되어 대학의 자율성과 민주적 의사소통을 저해한다는 우려를 낳았다. 또한, 정당한 의견 수렴 절차가 없었던 법인화 법안은 학교 구성원들의 반발을 샀다. 2009년 9월 '서울대학교 법인화 추진에 관한 찬반 총투표' 결과 투표율 51.53%, 반대 79.28%를 기록했다. 하지만 2010년 12월, 당시 여당(현 국민의힘)에 의해 법인화 법안이 국회 본회의에 직권상정되어 통과되면서 서울대 법인화가 확정되었다.
국회와 서울대 본부 측의 일방적인 서울대 법인화 통과로 학내 구성원들의 반발이 이어졌으나, 본부는 2011년 3월 '국립대학교법인 서울대학교 설립준비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법인화 시행에 박차를 가했다.
3. 전개
서울대학교 53대 총학생회는 대학본부 측의 서울대 법인화 진행 과정에 절차상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며 2011년 5월 30일 비상총회를 소집했다. 비상총회 결과 통과된 안건에 따라 총학생회와 참여 학생들은 대학본부를 점거, 농성 시위를 시작했다. 학생들은 총장 및 본부 측과의 대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하였고, 몇 차례 본부 측과 회담을 가졌다.
이 과정에서 이 시위는 이전 시위와 달리 일반 학생들의 참여가 두드러져 주목받았다. 이전에는 구성원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던 일반 학생들이 SNS를 통해 커뮤니티를 형성, 시위를 주도하는 하나의 세력으로 자리 잡았고, 이는 비장한 분위기의 투쟁이 아닌 '공부하는 시위'와 같은 독특한 시위 현장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는 '본부스탁 락 페스티벌'이라는 상징적인 행사를 통해 표출되었다.
이후 점거 농성은 본부 측과의 협상과 학생 사회 내부의 결의를 통해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점거를 해제하면서 종결되었다.
3.1. 사건 초기
서울대학교 53대 총학생회는 대학본부 측의 서울대 법인화 진행 과정에 절차상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며 2011년 5월 30일 비상총회를 소집했다. 비상총회 결과 통과된 안건에 따라 총학생회와 참여 학생들은 대학본부를 점거, 농성 시위를 시작했다. 학생들은 총장 및 본부 측과의 대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하였고, 몇 차례 본부 측과 회담을 가졌다. 이 과정에서 이 시위는 이전 시위와 달리 일반 학생들의 참여가 두드러져 주목받았다. 이전에는 구성원 이상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던 일반 학생들이 SNS를 통해 커뮤니티를 형성, 시위를 주도하는 하나의 세력으로 자리 잡았고, 이는 비장한 분위기의 투쟁이 아닌 '공부하는 시위'와 같은 독특한 시위 현장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변화는 '본부스탁 락 페스티벌'이라는 상징적인 행사를 통해 표출되었다. 이후 점거 농성은 본부 측과의 협상과 학생 사회 내부의 결의를 통해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점거를 해제하면서 종결되었다.
3.1.1.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 설립준비위원회 발족
국회와 서울대 본부 측의 일방적인 서울대 법인화 통과로 인해 학내 구성원들의 반발이 이어졌으나, 본부는 2011년 3월 '국립대학교법인 서울대학교 설립준비위원회'를 조직하는 등 법인화 시행에 박차를 가했다.
서울대 본부 측은 2011년 3월 총장, 교수, 외부위원 등으로 구성된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 설립준비위원회(설준위)'를 조직하여 법인화를 추진했지만, 교직원과 학생은 배제되었다. 하지만 일부 학내 구성원들은 설립준비위원회가 이같은 상당한 권한을 가지고 있음에도 위원들의 성향이 편향되어 있어 다양하고 균형 있는 의견들이 개진되기 힘들 것이라는 점과 학내 구성원 모두를 포괄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3.1.2. 비상총회
2011년 5월 30일, 서울대학교 총학생회는 대학본부 측의 법인화 진행 과정에 절차상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며 비상총회를 소집했다. 5월 11일, 총학생회는 총운영위원회에서 '5·30 비상총회 개최'를 결정했고, 학생 재적 수의 1/10 이상인 2,000명이 넘는 학생 참여로 비상총회가 성사되었다. 총학생회가 제시한 설립준비위원회(설준위) 해체 요구 안건은 총 1,810명 중 찬성 1,715명, 반대 69명, 기권 26명으로 94.7%의 동의를 얻어 가결되었다.
총학생회는 설준위 해체를 위해 본부 점거, 국회 앞 촛불집회, 총동맹휴업의 세 가지 행동 방안을 제시했으나, 표결 이전에 세 가지 안건을 모두 행동에 옮길 것을 요구하는 안은 부결되었다. 이후 설준위 해체를 위한 행동 방안에 대해 다시 투표한 결과, 본부 점거 1,110명, 국회 앞 촛불집회 145명, 총동맹휴업 19명, 기권 53명으로 본부 점거가 결정되었다. 비상총회 결과에 따라 총학생회와 비상총회 참여 학생들은 대학본부를 점거하며 점거 농성 시위를 시작하게 되었다.
3.2. 전개 양상
2011년 서울대 법인화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본부 점거는 학생 측과 본부 측의 회담, 갈등, 그리고 전체학생대표자회의(전학대회)를 거치는 등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학생 측과 본부 측은 여러 차례 회담을 가졌으나, 법인화를 둘러싼 양측의 입장 차이는 좁혀지지 않았다. 오연천 총장을 비롯한 본부 측은 학생들에게 점거 해제를 요구하며 대화를 제안했지만, 학생들은 본부 측의 모순을 지적하며 점거를 이어갔다. 결국 양측은 협상을 통해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했다.
본부 직원들과 학생들 사이의 충돌도 있었다. 본부 직원들은 출근을 위해 본부 진입을 시도했고, 학생들은 이를 저지하며 대치했다. 이 과정에서 본부는 학생들의 점거로 인해 행정 업무가 마비되었다고 주장했지만, 학생들은 본부가 의도적으로 업무를 중단하고 있다며 비판했다.
2011년 6월 25일에는 전체학생대표자회의(전학대회)가 열려 본부 점거 유지 여부를 논의했다. 총학생회 측은 협상의 한계와 징계 가능성 등을 이유로 점거 해제 안을 제시했고, 토론 끝에 점거 해제가 결정되었다. 총학생회는 다음 날 기자회견을 통해 점거 해제 결정을 발표했고, 본부 측은 이를 '대화와 배려로 평화롭게' 해결된 사례로 홍보했다.
3.2.1. 본부와의 회담
학생 측과 본부 측의 첫 접촉은 6월 1일, 이학래 학생처장을 비롯한 본부 측 인사들이 본부를 방문하면서 시작되었다. 본부 측은 오연천 총장의 "2일 정오까지 점거를 철회하면 당일 오후 3시에 조건 없이 학생대표와 대화하겠다"는 내용의 문서를 전달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조건 없이' 대화하겠다는 본부 측의 모순을 지적하며 점거를 지속했다. 6월 3일, 촛불 문화제 도중 오연천 총장이 본부를 방문하여 회담이 진행되었다. 이 회담에서 양측은 근로장학금, 향후 회의 일정, 설준위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다. 본부 측은 근로장학금 지급에는 긍정적이었으나, 설준위 해체는 언급하지 않았다. 총학생회장 지윤은 회의 형식 문제를 지적하며 6월 6일 오후 2시에 공식 논의 자리를 마련하기로 합의했다. 6월 6일 토론회에는 학생 대표로 총학생운영위원회 위원과 일반 학우들, 본부 측에서는 오연천 총장을 포함한 19명의 보직 교수가 참여했다. 토론은 학생 측 질의에 본부 측이 답하는 형식이었으며, 양측의 입장 차이만 확인했을 뿐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후 6월 21일과 22일, 양일간 총운위와 본부 측의 끝장 토론이 진행되었다. 21일, 본부 측은 설준위 해체가 본부 권한 밖의 일이며, 법인설립추진단 해소는 고려해 볼 수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22일, 본부 측은 법인설립추진단 해소를 거부했다. 학생 측의 사과문 발표 요구도 거부하면서 협상은 사실상 결렬되었다. 23일, 학생처장은 총운위에 사과문 발표가 수용될 가능성이 있다는 내용을 전했다. 그리하여 다시 회담이 진행되었고, 그날 회담에서는 사과문의 수위를 조절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다.
3.2.2. 본부와의 갈등
서울대학교 본부 점거 이후, 본부 직원들과 학생들 사이에 여러 차례 충돌이 있었다. 2011년 6월 1일, 출근하려는 본부 직원들과 학생들이 대치했다. 6월 8일에도 직원들이 본부 진입을 시도하며 학생들과 대치했다. 6월 9일에는 오전 9시경 직원들이 잠시 나타났다가 돌아갔고, 다음 날인 6월 10일부터 더 많은 직원들이 본부 앞으로 모였다. 6월 13일에는 대규모 직원들이 본부에 난입을 시도했다.
2011년 6월 2일, 본부는 서울대 구성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 본부 점거로 인해 근로장학금, 시간강사 강사료, 일용직 급여 등의 지급 업무가 중단되었다고 알렸다. 본부는 학생들의 점거로 인해 행정 업무가 마비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지급 업무를 담당하는 복지과는 점거 대상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학생들은 본부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업무조차 중단한 채 학생들이 업무를 방해하고 있다는 식으로 여론을 호도한다며 비판했다. 2011년 6월 3일, 한 근로봉사장학생이 본부의 이메일을 규탄하는 자보 퍼포먼스를 벌였고, 결국 6월 7일 학교 측은 관련 업무를 모두 처리하기로 했다.
3.2.3. 전체학생대표자회의 (전학대회)
2011년 6월 25일 토요일, 서울대학교 본부 4층 대회의실에서 2011 상반기 임시 전체학생대표자회의(이하 전학대회)가 열렸다. 전학대회에서는 '법인 서울대학교 설립준비위원회(설준위) 해체를 목표로 한 점거 유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총학생회 측은 협상의 한계, 징계 가능성, 전국 국공립대 전선 형성의 어려움 등을 들어 다음과 같은 상황을 제시했다.
* 학교에서 더 이상 협상을 통해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없다.
* (본부) 침탈 이후 징계가 예상되며, 징계 수위는 조절 불가능하다. 징계를 받으면 징계 투쟁이 예상된다.
* 설준위 해체는 본부가 아닌 국회에서 결정할 수 있다.
* 징계 투쟁은 학내 비민주성에 대한 분노를 가지고 본부를 타격 대상으로 하는 투쟁이다.
* 전국 국공립대 전선이 실질적으로 형성되지 못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해 두 가지 안이 제시되었다.
| 안 | 내용 | 의의 | 한계 |
|---|---|---|---|
| 1안 | 총장 측의 담화문 및 합의사항을 받고 점거 해제 | 본부 측의 의견수렴 부족과 비민주성을 인정받는 셈이며, 학생사회에서 투쟁을 통해 하나의 성과를 얻어냄. | 실질적으로 법인화법 폐기와 설준위 해체를 얻어내지 못함. 총장의 국회 출석 요구는 민주당의 야합으로 이루어지기 힘든 상황. |
| 2안 | 점거를 유지한 후 본부와 충돌 | 학생사회에서 설준위 해체를 위한 점거를 끝까지 진행했다는 의미를 가지며, 비상총회의 의결 결과를 끝까지 진행함으로써 협상안을 받는 것보다 학생사회에 유의미하게 남을 것임. | 일요일에 본부 측에서 본부를 침탈할 예정이어서 설준위 해체를 이룰 때까지 본부 점거를 유지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음. 방학 기간과 2학기에 어렵고 성과가 나기 어려운 징계 해제 투쟁을 벌여야 함. |
자정이 넘도록 토론이 이어졌고, 결국 61표 중 40표가 1안을 지지하여 본부 점거 해제가 결의되었다. 총학생회는 다음 날인 26일 오후 기자회견을 열어 본부 점거 해제 결정을 발표했다. 본부 측은 이러한 점거 해소를 두고 구성원 간의 시각 차이를 '대화와 배려로 평화롭게' 해결하였다고 보도하였다.
3.3. 날짜별 상세 일지
다음은 2011년 서울대 본부점거 사건의 날짜별 상세 일지이다.
5월 30일
* 19시 20분 경, 서울대학교 본부 앞 ‘아크로’에서 비상총회가 성사되었다. 정족수 1565명을 넘어선 2057명의 학생들이 모였다.
* 비상총회에서 학생들은 ‘법인설립준비위원회’(설립준비위원회) 해체를 요구하기로 결정했다. 1810명의 학생 중 1715명이 찬성했다.
* 설립준비위원회 해체 요구를 위한 행동 방향으로 본부 점거가 결정되었다. 1327명 중 1110명이 본부 점거를 지지하여, 22시 경 학생들이 본부 점거를 시작했다.
5월 31일
* 8시, 총학생운영위원회는 본부 직원의 출근을 저지하기로 결정했다.
* 11시 30분 경, 민교협, 공무원노조, 대학노조가 비상총회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 18시, 첫 촛불 문화제가 열렸고, 이후 매일 진행되었다. 서울대학교 학생들 외에도 서울대 민주화교수협의회 소속 교수, 시민행동대표, 이화여대 동아리연합회, 서울시립대 총학생회, 쌍용차 해고노동자 등 100여 명이 참여했다.
6월 1일
* 이학래 학생처장 등 본부 측 인사가 본부를 방문하여 오연천 총장의 입장("2일 정오까지 점거를 철회하면 당일 오후 3시에 조건 없이 학생대표와의 대화에 응하겠다")이 담긴 문서를 전달했다.
* 학생들이 공부하며 점거에 참여할 수 있도록 본부 안에 '본부 4열'이 만들어졌다.
6월 2일
* 12시, 학생 측은 기자회견을 통해 본부 점거를 풀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 12시 30분 경, 본부 측은 학생들의 본부 점거로 인해 근로장학금, 시간강사 강사료, 일용직 급여 등의 지급 업무가 차질을 빚게 되었다는 내용의 메일을 서울대 구성원들에게 발송했다. 그러나 지급 업무를 담당하는 복지과는 점거 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서는 학교 측이 여론몰이를 하고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6월 3일
* CJ관에 학교 측의 근로장학금 미지급을 규탄하는 모 근로봉사장학생의 자보가 붙었다.
* 16시 30분 경, 촛불 문화제 도중 오연천 총장이 본부를 방문하여 17시부터 학생 측과 회담을 가졌다.
6월 4일
* 학내 영화 동아리 '씨네꼼'이 본부 옆에 '점거극장'을 설치하여 영화 상영을 시작했다.
6월 6일
* 14시, 본부 4층 대회의실에서 학생 측과 본부 측의 토론회가 열렸다.
6월 7일
* 역대 총장 9명이 기자회견을 열어 학생들의 본부 점거를 반지성행위라고 비판했다.
6월 8일
* 13시 30분 경, 본부 과장단이 본부 진입을 시도하며 현관에서 학생들과 대치했다. 30분 후 과장단은 해산했다.
* 가수 UV의 "이태원 프리덤"을 패러디한 SNUV의 "총장실 프리덤" 뮤직 비디오가 발표되어 인터넷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6월 11일
* 법인화법 폐기와 전면 재논의 요구를 위해 광화문에서 집회가 열렸다.
6월 13일
* 본부 직원들이 대규모로 본부 난입을 시도했다.
* 서울대 법인화법 관련 안건이 논의된 임시국회 교과위 회의에 오연천 총장이 출석을 거부했다.
6월 15일
* 14시, 부총학생회장의 단식을 시작으로 학생들의 자발적인 "릴레이 단식"이 시작되었다.
6월 16일
* 11시, 한나라당 당사 앞에서 한나라당의 법인화법 논의 거부를 규탄하고 법인화법 재논의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 18시, 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 앞에서 오연천 총장의 책임 회피를 비판하고 교과부 장관의 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이 열렸다.
6월 17일
* 본부 측은 학생들이 기획한 락 페스티벌 '본부스탁'을 학내 불법 행사로 규정했다. 본부 측은 청원경찰을 동원해 장비 반입을 막고, 셔틀버스로 본부 앞 잔디로 통하는 도로를 봉쇄하려 했다. 학생들은 '경륜산성', '연천산성'이라 부르며 비판했다.
6월 18-19일
* 양일 간 17시부터 자정까지 본부스탁이 개최되었다. "브로콜리 너마저", "눈뜨고 코베인" 등 유명 인디 밴드들이 참여했고, 궂은 날씨에도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6월 25일
* 15시, 본부 4층 대회의실에서 임시 전체학생대표자회의(전학대회)가 열렸다. 점거 해제(1안)와 유지(2안)를 놓고 토론이 벌어졌고, 61표 중 40표의 지지로 1안(점거 해제)이 가결되었다.
6월 26일
* 기자회견을 통해 본부 점거 해제 결정이 발표되면서 공식적으로 점거가 해제되었다.
4. 변화된 시위문화
2011년 서울대 본부 점거 농성은 이전의 시위 문화와는 다른 양상을 보였다. 가장 큰 특징은 일반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두드러졌다는 점이다. 과거 학생 운동이 조직화된 학생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것과 달리, 이번 점거 농성에서는 평소 학생 사회 문제에 큰 관심을 두지 않던 일반 학생들, 이른바 '원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러한 변화는 SNS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직화가 어려웠던 일반 학생들은 트위터, 페이스북 등 SNS를 통해 빠르게 소통하고 의견을 모을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개개인의 '원자'들은 하나의 집단 지성을 형성하여 시위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들은 기존의 비장한 투쟁 방식 대신, '공부 시위', '총장실프리덤', '본부스탁 락 페스티벌'과 같이 독특하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시위에 참여했다. 특히 '본부스탁 락 페스티벌'은 일반 학생들이 직접 기획하고 개최한 축제 형식의 시위로, 많은 이들의 관심과 참여를 이끌어냈다.
4.0.1. 원자모임
'원자모임'은 조직화되지 않은 일반 학생들의 자발적 참여를 상징하며, 이들은 기존 학생 운동권과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연대를 보여주었다. 2011년 서울대 본부점거 사건에서 '원자모임'이라는 용어가 활성화되었는데, 이는 서울대 교내 커뮤니티인 "스누라이프"에서 시작되었다. 본부점거 2일 차, 스누라이프에 명확한 소속이 없는 학생의 본부점거 참여 여부를 묻는 게시글에서 '원자모임'이라는 개념이 처음 등장했다. 이 글에 대한 댓글에서 '번개'를 제안했고, '본부에서 치킨을 먹자'는 제안을 통해 최초의 '본부 번개'가 시작되었다. 같은 날 본부 2층에서 5명의 일반 학생들이 모여 시멘트 바닥에 앉아 치킨을 먹으며, 자신들도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것이 원자모임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이들은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을 찾아 '원자핵'이 그려진 깃발을 만들어 걸었다. 깃발을 구경하러 온 학생들과 보드게임을 하고, 법인화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본부 2열의 '원자모임'은 기존의 시위와는 달리 개인도 참여할 수 있다는 인상을 남겼다. '원자모임'에 모인 사람들은 법인화에 대한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익명성을 지키며 활동했다. 이들은 하나의 집단으로서 정치적 의견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경계했으며, 실제로 원자모임에 참여한 학생들의 정치적 입장은 매우 다양했다. 법인화에 반대하는 학생뿐만 아니라, 법인화에는 찬성하지만 설립준비위원회의 방향에는 반대하는 학생도 있었다.
점거 4일 차, 학교 측이 근로장학생에게 월급을 줄 수 없다고 통보하자, 원자모임 학생들은 집단 '대출'을 기획하기도 했다. 또한, 행정 업무가 정지되었다던 직원들이 학교 내 특정 장소에서 업무를 보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총학생회 운영위원들과 함께 해당 장소를 찾아가 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원자모임에는 최대 30명 정도가 모였으며, 02학번부터 11학번까지 다양한 학번의 학생들이 참여했고, 07학번이 주축이 된 것으로 추산된다.
4.0.2. SNS의 영향
SNS는 학생들이 의견을 교환하고, 정보를 공유하며, 여론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조직화가 어려웠던 일반 학생들은 빠른 소통이 가능한 SNS를 통해 개개인이 하나의 집단 지성을 형성하여 시위를 이끄는 세력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본부 점거 이후, 트위터에는 수많은 관련 글들이 올라왔다. 특히 "본부 점거 중에도 숙제하는 snu"라는 트윗은 22회 리트윗되며 퍼져나갔고, '본부에서 공부하자!'는 슬로건을 만들어냈다. 학생들은 트위터에 본부 점거 중 벌어진 사건들에 대한 글을 작성하고 리트윗했다. 오연천 총장의 영상과 사진을 영사한 '라스꼬 본부 벽화'는 "총장님의 영상과 사진을 많이 찍어야 총장님이 빨리 잡힌다"는 트윗과 함께 유명해졌다. 본부스탁의 경우에도 트위터, 페이스북 등을 통해 일정과 라인업 등이 소개되면서 빠른 시간 안에 많은 사람에게 정보가 전달되었다.
4.1. 주요 사건들
2011년 5월 30일, 서울대학교 53대 총학생회는 대학본부의 법인화 진행 과정에 절차상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며 비상총회를 소집했다. 비상총회 결과에 따라 총학생회와 참여 학생들은 대학본부를 점거하고 농성에 들어갔다. 학생들은 총장 및 본부 측과의 대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이어갔고, 몇 차례 본부 측과 회담을 가지기도 했다.
이번 점거 농성 시위는 이전 시위와 달리 일반 학생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다는 점에서 주목받았다. 이전에는 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던 일반 학생들이 SNS 등을 통해 커뮤니티를 형성하며 시위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이들은 '공부 시위', '본부스탁 락 페스티벌'과 같은 독특한 시위 문화를 만들어냈다.
본부 점거 이후, 트위터에서는 "본부 점거 중에도 숙제하는 snu"라는 트윗이 화제가 되며 '본부에서 공부하자!'는 슬로건이 만들어졌다. 총학은 이를 지지하며 본부에 책상과 의자를 가져다 놓았다. 또한, 학생들은 본부 외벽에 오연천 총장의 영상과 사진을 영사한 '라스꼬 본부 벽화'를 제작하여 화제가 되었다.
4.1.1. 공부시위
서울대학교 학생들은 본부 4층에 '본부 4열'을 조성하여 공부하면서 시위에 참여하는, 이른바 '공부 시위'를 진행했다. 이는 학생들이 점거 농성 중에도 기말고사를 대비하여 공부할 수 있도록 한 새로운 시위 방식이었다.
본부 점거 이후, 트위터에서는 "본부 점거 중에도 숙제하는 snu"라는 트윗이 22회 리트윗되며 퍼져나갔다. 이를 계기로 ‘본부에서 공부하자!’는 슬로건이 만들어졌고, 총학생회도 이를 지지하며 본부에 책상과 의자를 가져다 놓았다. 점거 3일차인 6월 1일 아침, 11석 규모의 '본부 4열'이 만들어졌다. 학생들은 '본부 4열'뿐만 아니라 각 층 복도와 총장실, 회의실 등지에서도 공부하며 '공부 시위'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이러한 '공부 시위'는 점거 생활을 현실 생활과 분리하지 않고 본부에서 '생활'할 수 있게 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또한 '비폭력 공부 시위'를 통해 여론의 지지를 얻어내는 데 기여했다.
그러나 시위 방식은 바뀌었으나 농성을 통해 목표를 달성하려는 학생들의 의식은 날카롭지 못했다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도서관에서 하던 공부를 농성 현장에서 하는 것으로 바뀌었을 뿐, 학생들의 정치는 첨예해지지 못했으며 '비폭력'이라는 수식어가 주목받는 것은 초점이 어긋났다는 의견도 있었다.
4.1.2. 총장실프리덤
학생들은 UV의 '이태원 프리덤'을 패러디한 '총장실 프리덤' 뮤직비디오를 제작하여, 학교 본부와 오연천 총장을 풍자하고 법인화 문제를 비판했다. 이 뮤직비디오는 점거노래자랑 이후 노래 개사하기 과정에서 탄생했다. 개그맨 유세윤이 가수 박진영 등과 함께 제작한 코믹 뮤직비디오 이태원 프리덤을 패러디한 것이다. 많은 학생들의 호응에 힘입어 골패와의 연합을 통해 사범대 노래패 길을 중심으로 뮤직비디오 UCC를 만들어 유튜브에 올렸고 높은 조회수를 기록했다. 서울대 총학생회는 총장과 언론 등을 비하하는 이 뮤직비디오를 점거 중인 총장실에서 만들어 인터넷에 배포했다. 이 뮤직비디오는 인터넷에 공개된 후 누리꾼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다. 한편, 서울대 대학본부 측은 NHN, 다음, SK커뮤니케이션즈 등 포털 3사에 ‘서울대 총장실 프리덤’ 동영상 삭제를 요청했고, 다음과 SK커뮤니케이션즈는 임시 접근차단 조치를 내렸다. 그러나 서울대생들이 법인화의 문제점을 알리기 위해 점거한 총장실에서 춤을 추는 등의 행동은 지성인답지 못하다는 비판도 있었다.
4.1.3. 본부스탁 락 페스티벌
학생들은 법인화 반대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본부스탁 락 페스티벌'을 기획하고 개최했다. 이는 비장한 투쟁 대신 축제 형식의 시위로, 일반 학생들의 참여를 이끌어냈다. 이러한 변화는 SNS를 통해 일반 학생들이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시위를 주도하는 하나의 세력으로 자리 잡으면서 가능해졌다.
본부스탁 락 페스티벌은 온라인 상에서 한 학생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축제와 같은 분위기 속에서 나온 이 아이디어는 반전, 평화의 상징이었던 우드스탁 페스티벌과 결부되어 '본부스탁 락 페스티벌'로 발전했다. 제안과 동시에 학내 반응은 폭발적이었고, 공연 무대 설치와 출연 밴드들의 공연료를 위한 자발적 모금 활동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모금된 돈은 공연 기획 비용을 제외하고 출연 밴드들에게 균등하게 분배될 예정이었다.
많은 현직 인디 밴드들이 학생들의 취지에 공감하여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섭외는 홍대 앞 칼국수집 '두리반'에서 시위하던 밴드들과 서울대 졸업생들로 구성된 밴드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브로콜리 너마저의 출연 확정으로 이슈화되어 주요 언론에도 보도되고 일반인들에게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본부스탁 락 페스티벌은 공연 장소인 본부 앞 '총장 잔디' 사용 문제로 위기를 맞았다. 본부 측은 사용을 거절하고 최대 퇴학까지 경고하며 강경하게 대응했다. 미승인 불법 행사 중지 통보와 함께 법적 조치를 예고했고, 공연 전날에는 총장 잔디로 가는 길을 셔틀버스로 차단하고 학내 출입 차량을 검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트럭을 옮기는 등의 노력으로 장비를 운송하여 공연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5. 이후 상황
8월 19일 본부점거를 해제한 후, 주도 학생들에 대한 징계가 열렸다. 서울대 본부는 '간부 3인 무기정학 방침'을 언론에 흘려놓고 징계위원회를 열었다. 서울대 법인화 반대 공동대책위원회에서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징계 대상인 간부들이 출석을 거부하자 징계위는 결정을 일시 보류하고 30일 오후 2시에 다시 회의를 열기로 했다.
8월 30일 국회 국무회의에서 서울대학교 법인화법 시행령을 통과시켰고, 이 시행령으로 인해 2011년 12월 28일부로 국립대학교 법인 서울대학교가 출범하게 되었다. 이에 서울대학교 법인화 공동대책위원회에서는 서울대학교 법인화법에 대한 헌법소원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재학생들은 '우.주.인'과 '서울대원탁회의'라는 실천단을 구성하면서 9월에 동맹휴업과 '500인 법인화 원탁회의'를 준비하였다.
9월 20일 오후 6시 서울대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학생, 교수, 교직원 등이 참여한 가운데 법인화와 반값등록금 문제 해결을 위한 의견을 모았다.
9월 22일 새벽 4시경, 법학과 08학번 오준규 씨가 법인설립준비위원회 해체와 학생 징계 철회를 요구하며 서울대 정문 구조물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했다. 오전 11시에는 정문 앞에서 법인화법 폐기를 위한 고공농성 긴급기자회견이 열렸다. 그는 "서울대 본부와 국회에 즉각 법인화법을 폐기하고 대학교육의 공공성을 되살리기를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총학생회장 지윤(인류학과 07학번) 씨는 "샤" 구조물에 올라간 것에 대해 "국립 서울대의 상징, 날치기 상정의 상징 공간을 우리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라며 총학생회에서 이를 지지하고 함께 할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이어 "시민들이 국민 혈세로 만들어진 국립 서울대학교를 지키기 위해 투쟁을 함께 하고, 학생들도 동맹휴업으로 행동해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이날 오전 8시 20분 개회한 전체학생대표자회의에선 법인화를 비롯한 다양한 안건이 논의됐으며, 표결 결과에 따라 9월 28일로 예정된 동맹휴업 추진 여부가 결정되었다.
9월 24일 오전 7시경, 오준규 씨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고공농성은 50시간 만에 끝이 났다.
9월 28일 서울대학교 총학생회는 오후 4시 30분경 교내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서울대 법인화 법안 폐기를 위한 동맹휴업 선포식'을 갖고 본격적인 동맹휴업에 돌입했다. 이날 선포식에는 총학생회장과 각 단과대학 학생회장이 참여해 동맹휴업의 중요성과 법인화 법안 폐기에 대한 입장을 밝혔으며, 기자회견도 열렸다. 오후 7시 30분에는 광화문 광장 인근에서 법인화에 반대하는 촛불문화제도 개최되었다.
12월 28일 서울대 교내 학생회관 1층에 '고 국립서울대 추모 분향소'가 설치되었다. 서울대 법인화를 반대하는 '반지성 프로젝트'는 "오늘은 서울대 법인화법 시행일"이라며 "조국의 미래이자 겨레의 등불 서울대의 운명 소식에 조의를 표한다."는 내용의 대자보를 붙여 국립 서울대의 죽음을 알렸다. 국립 서울대학교는 이날 오전 법인설립등기를 끝내 '서울대 법인화법'이 시행됨에 따라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로 전환됐지만, 학내에서는 여전히 '법인화'와 그 과정에 반대하는 학생들의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서울대 법인화법 시행에 따라 국립대학 서울대 설치령은 폐지되었다. 한나라당이 2010년 12월 8일 서울대 법인화법을 단독 표결로 통과시킨 지 1년여 만이다. 2012년 4월 27일, 서울대학교 포털 사이트인 스누라이프에 본부점거와 관련된 회고록을 작성하자는 제안 게시물이 올라왔고, 이에 20여 명의 학생들이 호응하여 현재 본부점거 회고록을 만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