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3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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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5·13 사건은 1969년 5월 13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발생한 말레이인과 중국인 간의 폭동이다. 독립 후 말레이시아 헌법에 따라 말레이 정치 권력의 특별한 지위가 보장되었지만, 도시 지역 경제를 장악한 화교와 가난한 말레이인 간의 빈부 격차, 말레이 우월주의와 비말레이 야당 간의 갈등이 사건의 배경이 되었다. 1969년 총선에서 집권 연합이 부진한 결과를 얻고, 야당의 선거 승리 축하 행진 과정에서 인종차별적 구호가 나오면서 긴장이 고조되었고, 결국 폭동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하고, 경제적,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으며, 말레이시아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사건 이후 국가 원칙(루쿠네가라) 제정, 신경제 정책(NEP) 시행, 정치 시스템 재편 등 다양한 변화가 있었으며, 사건의 책임 소재와 관련하여 논란이 지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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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3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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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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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5월 13일 사건 |
원어 명칭 | 말레이어: Peristiwa 13 Mei 자위: ڤريستيوا 13 مي 중국어: 五一三事件 타밀어: 13 மே சம்பவம் |
발생일 | 1969년 5월 13일 |
발생 장소 | 쿠알라룸푸르, 말레이시아 |
원인 | 1969년 말레이시아 총선 결과, 집권 연맹당이 화교 다수 민주행동당과 게라칸당에 의석을 잃음. |
목표 | 불명 |
방법 | 광범위한 폭동, 약탈, 폭행, 방화, 시위, 재산 피해, 살인 |
결과 | 국왕의 비상사태 선포 의회 정지 국가 운영 위원회 임시 설립 툰쿠 압둘 라만의 총리 사임 국가 이념 시행 신경제 정책 시행 국가의 민족 집단 간 인종 긴장 고조 국민전선의 최종 형성 |
교전 세력 | |
교전 1 | UMNO, 말레이 지지자 및 시민 |
교전 2 | 중국인 및 인도인 시민 |
교전 3 | 말레이시아 왕립 경찰 연방 예비 부대 일반 작전 부대 말레이시아 육군 말레이 왕립 연대 |
지휘관 및 지도자 | |
교전 1 | 툰쿠 압둘 라만 |
교전 3 | 모하메드 살레 이스마엘 툰쿠 오스만 |
피해 규모 | |
사망자 (공식) | 교전 1: 25명 (이견 있음) 교전 2: 143명 (이견 있음) 교전 3: 불명 |
부상자 | 불명 |
체포 | 불명 |
2. 배경
1969년 5.13 사건의 배경에는 복합적인 요인들이 작용했다.
1963년, 인종적 긴장 속에서 말라야(말레이 반도), 싱가포르, 북보르네오 및 사라왁을 통합한 연방으로 말레이시아가 결성되었다. 1969년 폭동 이전에 말레이인과 중국인 사이에는 여러 차례 인종 갈등이 있었다. 페낭에서는 1957년 조지 타운 100주년 기념 행사에서 인종 간의 적대감이 폭력으로 바뀌어 며칠 동안의 싸움과 여러 명의 사망자를 냈고,[4] 1959년과 1964년에도 추가적인 소요가 있었다. 1967년 폭동도 통화 평가 절하에 대한 항의로 시작되었지만 인종 학살로 이어졌다.[5][6] 싱가포르에서는 인종 간의 적대감으로 인해 1964년 인종 폭동이 발생했고, 이는 1965년 8월 9일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로부터 분리되는 데 기여했다.
건국의 아버지인 라만의 노령에 따른 쇠퇴, 말레이인 우대 정책에 대한 반발, 공용어를 둘러싼 갈등 역시 주요한 배경으로 작용했다.
말레이인들은 경제적으로 항상 화교에 비해 열위에 놓여 있는 상황이 변하지 않고, 빈곤에 직면해 있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말레이인 농촌 지역의 개발과 상공업 부문 진출을 돕는 정책을 담은 제2차 5개년 계획(1961년부터 65년)이 시작되었다.
말레이어 및 영어를 사용할 수 없었던 중하류층 화교 주민들은 말레이시아의 공용어가 헌법 153조 조항에서 말레이어만으로 규정되었고, 1957년 교육령에서 중등 교육 이후의 화어 교육의 존속이 불확실했기 때문에, 위기 의식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9년 총선이 치러졌고,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인종적 사건들이 발생했다. 말레이 정치 활동가가 페낭에서 중국계 갱단에 의해 살해되었고, 쿠알라룸푸르에서 중국계 말라야 노동당 활동가가 경찰과의 충돌로 총에 맞아 사망했다.[7] 급진적인 반대 세력은 선거 보이콧을 요구하고 폭력을 위협했지만, 선거 전날에 열린 총에 맞아 사망한 활동가의 장례 행렬에는 1만 명 이상의 인파가 몰렸으며, 몇몇 방해 사건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평화롭게 진행되었다.[8][9][10]
총선 결과 여당은 과반을 유지했지만, 야당, 특히 화교계 정당들이 약진했다. 이에 따라 말레이계와 화교계 간의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다.
2. 1. 인종 간 불균형 심화
말라야는 1957년 8월 31일 식민 통치로부터 독립했다.[2] 그러나 말라야는 도시 지역을 장악하고 국가 경제의 상당 부분을 통제하는 것으로 인식된 화교와, 일반적으로 더 가난하고 더 시골 지역에 거주하는 말레이인 사이의 심각한 부의 격차로 어려움을 겪었다.[2] 말레이 정치 권력의 특별 특권적 지위는 말라야 독립 당시 작성된 헌법의 제153조에 의해 보장되었다.[2]말레이 우월주의(''케투아난 멜라유'')를 제도화하기 위한 급진적인 조치를 원하는 말레이 단체와, 자신들의 '인종적' 이익 보호를 요구하는 중국 단체, 그리고 말레이 특권이 아닌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를 주장하는 비말레이 야당 의원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3]
독립 이후 라만의 정책은 기본적으로 자유방임주의였으며, 정치적으로는 말레이인·화교·인도인 간의 융합 정책이었다. 그 기반은 독립 전야부터 이어진 말레이 국민 통일 기구(UMNO)-말레이시아 화교 협회(MCA)-말레이시아 인도인 의회(MIC)의 3당으로 구성된 국민 전선에 의한 연립 정권이었으며, "정치는 말레이인, 경제는 화교"라는 원칙을 세웠다.
하지만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 등 UMNO 제2세대에게 라만의 민족 유화 정책은 불만이 남는 것이었다. 앞서 언급한 원칙에 따르면 말레이인은 경제적으로 항상 화교에 비해 열위에 놓여 있는 상황이 변하지 않고, 빈곤에 직면해 있다는 인식을 하게 되었다.
2. 2. 정치적 긴장 고조
1969년 선거에서 집권 연합인 연합당은 야당, 특히 주로 중국계 정당인 민주행동당 (DAP)과 게라칸당으로부터 강력한 도전을 받았다.[7] 이 선거는 긴장된 분위기를 조성하는 인종적 사건들의 발생을 앞두고 치러졌다. 페낭에서 말레이 정치 활동가가 중국계 갱단에 의해 살해되었고, 쿠알라룸푸르에서 중국계 말라야 노동당 활동가가 경찰과의 충돌로 총에 맞아 사망했다.[7]말레이 우월주의(''케투아난 멜라유'')를 제도화하기 위한 급진적인 조치를 원하는 말레이 단체와, 자신들의 '인종적' 이익 보호를 요구하는 중국 단체, 그리고 말레이 특권이 아닌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를 주장하는 비말레이 야당 의원들 사이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3]
1969년 5월 10일에 총선이 치러졌으며, 선거 당일에는 아무런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 결과, 연합당은 유권자 투표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으며, 이는 집권 연합에게 큰 타격이었다. 전국적으로, 연합당은 의석수에서 과반수를 확보했지만, 그 수는 상당히 감소했다. 연합당의 중국계 구성원인 말레이시아 중국 협회가 확보한 의석수는 절반으로 줄었다. 주 차원에서는, 연합당은 슬랑고르에서 유일한 무소속 후보와 협력함으로써 과반수를 확보했는데, 이는 야당이 슬랑고르 주 의회를 장악하기 위해 연합당과 동률을 이루었기 때문이다.[11]
11일과 12일 밤, 탄 치 쿤 박사가 경찰의 허가를 받아 민주행동당(DAP)과 게라칸당은 선거 승리를 축하했다. 특히, 게라칸당 지도자 V. 데이비드를 환영하는 대규모 게라칸당 행렬이 있었다.[12] 야당의 시위 행렬은 쿠알라룸푸르 캄풍 바루와 같은 말레이 공동체를 통과했으며, 비말레이계가 "Semua Melayu kasi habisms" (모든 말레이족을 끝장내라) 및 "Kuala Lumpur sekarang Cina punyams" (쿠알라룸푸르는 이제 중국인들의 것이다)와 같은 구호를 외치며 말레이족을 조롱하는 등 매우 도발적인 행위로 간주되었다.[8][13]
야당의 축하는 말레이 정치 권력에 대한 공격으로 여겨졌다. 5월 12일 UMNO 청년단의 구성원들은 슬랑고르의 멘테리 베사르 다토' 하루운 이드리스에게 승리 시위를 열고 싶다고 밝혔다.
말레이 국민 통일 기구 (UMNO)는 이후 하루운 이드리스의 거주지에서 시작하는 행진을 발표했다. 툰쿠 압둘 라만은 나중에 보복 행진에 대해 "야당의 힘 과시와 그들에게 가해진 모욕 이후, 그렇지 않으면 당원들의 사기가 저하될 것이기 때문에 불가피했다"라고 말했다.[13]
2. 3. 선거 결과와 사회적 불안
1969년 선거에서 집권 연합인 연합당은 야당, 특히 주로 중국계 정당인 민주행동당 (DAP)과 게라칸당으로부터 강력한 도전을 받았다.[7] 선거 결과, 연합당은 유권자 투표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으며, 전국적으로 의석수에서 과반수를 확보했지만, 그 수는 상당히 감소했다. 연합당의 중국계 구성원인 말레이시아 중국 협회가 확보한 의석수는 절반으로 줄었다.[11]주 차원에서는, 연합당은 슬랑고르에서 유일한 무소속 후보와 협력함으로써 과반수를 확보했는데, 이는 야당이 슬랑고르 주 의회를 장악하기 위해 연합당과 동률을 이루었기 때문이다.[11] 연합당은 켈란탄 ( 범 말레이시아 이슬람당에게)과 페락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고, 야당 게라칸은 페낭에서 주 정부를 장악했다.[11]
11일과 12일 밤, 탄 치 쿤 박사가 경찰의 허가를 받아 민주행동당(DAP)과 게라칸당은 선거 승리를 축하했다.[12] 특히, 게라칸당 지도자 V. 데이비드를 환영하는 대규모 게라칸당 행렬이 있었다.[12] 야당의 시위 행렬은 쿠알라룸푸르 캄풍 바루와 같은 말레이 공동체를 통과했으며, 비말레이계가 "Semua Melayu kasi habisms" (모든 말레이족을 끝장내라) 및 "Kuala Lumpur sekarang Cina punyams" (쿠알라룸푸르는 이제 중국인들의 것이다)와 같은 구호를 외치며 말레이족을 조롱하는 등 매우 도발적인 행위로 간주되었다.[8][13] 일부 야당 지지자들은 슬랑고르 주 수석 장관의 거주지를 지나가면서 중국인에게 그 거주지를 넘겨주라고 요구했다고 한다.[15]
야당의 축하는 말레이 정치 권력에 대한 공격으로 여겨졌다. 말레이 국민 통일 기구 (UMNO)는 이후 하루운 이드리스의 거주지에서 시작하는 행진을 발표했다. 툰쿠 압둘 라만은 나중에 보복 행진에 대해 "야당의 힘 과시와 그들에게 가해진 모욕 이후, 그렇지 않으면 당원들의 사기가 저하될 것이기 때문에 불가피했다"라고 말했다.[13]
1969년 총선거 결과, UMNO-MCA-MIC를 중심으로 하는 국민전선 정권은 크게 의석을 줄이게 되었다. 1964년 총선거와 1969년 총선거 당시 각 당의 의석수 변화는 다음과 같다. (총 정원은 104석)
정당 | 1964년 총선거 | 1969년 총선거 |
---|---|---|
여당(국민전선) | 89 | 67 |
UMNO | 59 | 51 |
MCA | 27 | 14 |
MIC | 3 | 2 |
야당 | ||
말레이시아 민정 운동 (Gerakan) | (미결성) | 8 |
People's Progressive Party (Malaysia)|인민진보당|label=인민 진보당영어(PPP) | 2 | 4 |
범말레이시아 이슬람당(PAS) | 9 | 12 |
민주행동당(DAP) | 1 | 13 |
1969년 5월 13일, 쿠알라룸푸르에서 말레이인과 화교 간의 충돌로 폭동이 시작되었다. 존 슬리밍은 저서에서 중국인들이 기습을 당해 한 시간 넘게 반격하지 못했다고 기록했다.[19] 그러나 국가 운영 위원회(NOC)의 공식 보고서는 중국 비밀 결사 단체들이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으며, 캄풍 바루에서 폭력이 시작되었을 때 활동을 시작했다고 밝혔다. 바투 로드에서는 중국인과 인도인 상점주들이 즉석 방어 부대를 결성했고, 초킷 로드 지역으로 쳐들어가려던 말레이 폭도들은 무장한 비밀 결사 갱단원들과 마주쳐 도망쳤다.[19]
Gerakan, DAP, PPP와 같은 화교 세력이 크게 세력을 확장한 반면, 화교 세력의 지지를 받던 MCA가 크게 의석수를 줄였다. 화교계 주민들은 야당 승리의 행진을 벌였고, 이에 대항하는 형태로 UMNO를 지지하는 말레이인 청년들이 행진을 벌였다.
3. 폭동의 발생
이후 폭도들은 경찰과 마주쳤고, 경찰은 최루탄을 사용해 진압했다. 오후 7시 35분 쿠알라룸푸르에 24시간 통행금지령이 라디오를 통해 발표되었고, 오후 8시에는 텔레비전으로 반복 방송되었다. 오후 8시 30분에서 9시 사이에는 경찰청장 모하메드 살레 빈 이스마일이 사살 명령을 내렸고, 이어 군 참모총장인 통쿠 오스만 지와 장군이 또 다른 사살 명령을 내렸다.[21] 군대가 투입되어 오후 10시경 폭동 지역으로 진입했다. 통행금지령을 알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이 총에 맞았고, 어떤 사람들은 자기 집 문간이나 정원에 서 있다가 총에 맞기도 했다. 외신 기자들은 왕립 말레이 연대 병사들이 아무런 이유 없이 중국인 상가에 총격을 가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보도했다.[21]
다음날 오전 5시까지 쿠알라룸푸르 종합병원 당국은 병원에서 사망자 약 80명이 발생했다고 보고했다. 병원 직원들은 초기 사상자들은 대부분 칼에 베이거나 찔린 중국인들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총상을 입은 중국인 사상자가 늘었다고 보고했다.[21]
육군은 주요 거리를 순찰했지만, 캄퐁 바루와 푸두와 같은 지역의 젊은이들은 통행 금지령을 무시했다. 살인은 대부분 화요일 밤과 수요일 아침에 발생했지만, 말레이족의 중국 상점과 가옥 방화 및 약탈은 계속되었으며, 심각한 방화 사건은 대부분 목요일 밤과 금요일에 발생했다. 450채 이상의 가옥이 불탔다.[21] 폭동으로 이재민이 된 사람들은 대부분 중국인이었으며, 이들은 도시의 여러 곳에 있는 공식 난민 센터로 보내졌다.
통행 금지령은 잠시 완화되었다가 다시 빠르게 재개되었다. 상황이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오면서 통행 금지령이 점차 완화되었지만, 그달 말까지는 오후 3시부터 오전 6시 30분까지 계속 시행되었다.
폭력 사태는 도시 지역에 집중되었으며, 말라카, 페락, 페낭 및 싱가포르에서 약간의 소요 사태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국가는 평온했다. 1969년 6월 28일, 센툴에서 다시 폭동이 발생하여 15명이 사망했다.
3. 1. 초기 사건
1969년 5월 13일, 말레이 국민 통일 기구(UMNO)는 하루운 이드리스의 거주지에서 시작하는 행진을 발표했다. 툰쿠 압둘 라만은 이에 대해 "야당의 힘 과시와 그들에게 가해진 모욕 이후, 당원들의 사기가 저하될 것이기 때문에 불가피했다"라고 말했다.[13] 당시 주로 중국인이 거주하던 쿠알라룸푸르로 시골 지역의 말레이족들이 집결했으며, 수천 명의 말레이족 중 일부는 무장한 채 행진에 합류했다.[15]
5월 13일 아침, 말레이인들은 슬랑고르 멘테리 베사르 다토 하룬 이드리스의 잘란 라자 무다 자택 근처 캄풍 바루에 모였다. 국가 운영 위원회(NOC)의 공식 보고서에 따르면, 오후 6시경 곰박 출신 말레이인 그룹과 그들을 조롱하는 중국인 구경꾼들 사이에서 세타팍에서 주먹 싸움이 벌어졌고, 이는 병과 돌을 던지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이 소식이 잘란 라자 무다에 모인 군중에게 전해졌고, 오후 6시 30분 직전에 많은 말레이인들이 멘테리 베사르의 집에서 집결 지점을 떠나 인접한 중국인 거주 지역으로 향했다.[8] 이들은 ''파랑''과 크리스로 무장하고, 중국인 거주 지역에서 차량과 상점을 불태우고, 살인과 약탈을 자행했다.[8] ''타임''에 따르면, 이 공격으로 최소 8명의 중국인이 사망했다.[16]
3. 2. 폭력 확산과 군대 투입
5월 13일 저녁, 말레이인들은 슬랑고르 주 총리인 다토 하룬 이드리스의 자택 근처 캄풍 바루에 모였다. 이들은 하룬의 선거구인 모립과 반팅 등 슬랑고르의 여러 지역 및 페락 일부 지역에서 왔다.[8] 오후 6시경, 곰박 출신의 말레이인 그룹과 중국인 구경꾼들 사이에서 세타팍에서 싸움이 벌어졌고, 이는 병과 돌을 던지는 것으로 확대되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오후 6시 30분 직전에 많은 말레이인들이 멘테리 베사르의 집에서 출발해 인접한 중국인 거주 지역으로 향했다.[8] 이들은 ''파랑''과 크리스로 무장하고 중국인 거주 지역에서 차량과 상점을 불태우고, 살인과 약탈을 자행했다.[8] ''타임''에 따르면, 초기 공격으로 최소 8명의 중국인이 사망했다.[16] 폭력은 45분 만에 도시 전체로 확산되어,[17] 당왕이, 잘란 투앙쿠 압둘 라만 (바투 로드), 캄풍 다툭 케라맛, 캄풍 판단, 체라스 및 캄풍 케린치로 번졌다.[18]
저녁에 폭도들은 경찰과 마주쳤고, 경찰은 최루탄을 사용해 진압했다. 쿠알라룸푸르에는 오후 7시 35분에 라디오를 통해 24시간 통행금지령이 발표되었고, 오후 8시에는 텔레비전으로 반복 방송되었다. 이후 오후 8시 30분에서 9시 사이에 경찰청장 모하메드 살레 빈 이스마일이 사살 명령을 내렸다. 군 참모총장인 통쿠 오스만 지와 장군도 사살 명령을 내렸다. 군대가 투입되어 오후 10시경 폭동 지역으로 진입했다.[21]
3. 3. 사상자 발생
폭동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고 부상을 입었으며, 가옥과 상점들이 파괴되었다. 공식적인 사망자 수는 196명으로 발표되었지만,[22] 실제 사망자 수는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쿠알라룸푸르 병원은 폭동 초기에는 칼에 찔리거나 베인 중국인 환자들이 많았지만, 군대 투입 후에는 총상을 입은 환자들이 증가했다고 보고했다.
경찰이 이의를 제기한 수치에 따르면, 폭동으로 196명이 사망했다.[22] 공식 집계된 사망자는 중국인 143명, 말레이인 25명, 인도인 13명, 기타(미상) 15명이었다. 그러나 비공식적인 수치는 더 많은 중국인 사망자를 시사했다.[23] 경찰은 부검이나 조사 없이 발견된 시신을 매장하거나 임의로 처리하여, 많은 시신이 문서화되지 않아 사망자 수를 추정하기 어려웠다. 일부 시신은 클랑강에 버려졌고, 일부는 주석 광산의 웅덩이에 처리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서방 외교 소식통은 사망자 수를 600명에 육박하는 것으로 추정했으며,[17] 존 슬리밍(John Slimming)은 공식적으로 실종된 수백 명을 포함하여 첫 주에 사망자 수가 약 800명으로 추산했고, 다른 관찰자들과 통신원들은 네 자릿수의 숫자를 제시했다.
공식 수치에 따르면 부상자는 439명,[10] 방화 사건은 753건, 차량 211대가 파괴되거나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3. 4. 비상사태 선포
폭동 직후 정부는 비상 권력을 행사하고 의회를 정지시켰으며, 의회는 1971년에 다시 소집되었다.[24] 5월 14일과 16일에는 전국에 비상사태와 이에 수반되는 통행 금지가 선포되었다.
5월 15일, 말레이시아 국왕(양 디-퍼투안 아궁) 이스마일 나시루딘 오브 테렝가누 술탄의 비상사태 선포에 따라 압둘 라자크 후세인이 이끄는 국가운영위원회(NOC)가 설립되었다. 헌법의 일부도 효력이 정지되었다.[24] 의회가 정지되면서 NOC는 향후 18개월 동안 최고 의사 결정 기구 역할을 했다. 주 및 지방 운영 위원회가 주 및 지방 정부를 인수했다. NOC는 무장하지 않은 자경단, 국토 방위군, 경찰대대 창설을 포함하여 국가의 법과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보안 조치를 시행했다.
신문 발행은 5월 15일에 중단되었지만 5월 18일에 재개되었고, 5월 21일에 검열이 적용되었다. 외국 간행물은 금지되었고, 외국 뉴스 기사를 소지한 시민은 구금되었으며, 외국 기자들은 군의 인종 차별적 편견 혐의로 비판을 받았다. 국가의 질서 회복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통행 금지는 국가 대부분 지역에서 계속되었지만 점차 축소되었다. 2개월 이내에 피해 지역의 평화가 회복되었다. 1971년 2월에는 의회 통치가 재개되었다. 그러나 비상사태 선포와 제정된 법(1969년 비상 조례)은 결코 철회되지 않았다.[24]
3. 5. 국가 운영 위원회(NOC)의 활동
압둘 라자크 후세인이 이끄는 국가 운영 위원회(NOC)는 말레이시아 국왕(양 디-퍼투안 아궁) 이스마일 나시루딘 오브 테렝가누 술탄의 비상사태 선포에 따라 설립되었다. 헌법 일부도 효력이 정지되었다.[24] 의회가 정지되면서 NOC는 18개월 동안 최고 의사 결정 기구 역할을 했다. 주 및 지방 운영 위원회가 주 및 지방 정부를 인수했다. NOC는 무장하지 않은 자경단, 국토 방위군, 경찰대대 창설을 포함하여 국가의 법과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보안 조치를 시행했다.
신문 발행은 5월 15일에 중단되었지만 5월 18일에 재개되었고, 5월 21일에 검열이 적용되었다. 외국 간행물은 금지되었고, 외국 뉴스 기사를 소지한 시민은 구금되었으며, 외국 기자들은 군의 인종 차별적 편견 혐의로 비판을 받았다. 국가 질서 회복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통행 금지는 국가 대부분 지역에서 계속되었지만 점차 축소되었다. 2개월 이내에 피해 지역의 평화가 회복되었다. 1971년 2월에는 의회 통치가 재개되었다. 그러나 비상사태 선포와 제정된 법(1969년 비상 조례)은 결코 철회되지 않았다.[24]
4. 공식 평가와 책임 소재 논란
국가운영위원회(NOC)는 5·13 사건의 주요 원인을 "인종 정치"로 지목했지만, 말레이인에게 직접적인 책임을 묻지는 않았다.[25] 툰쿠 압둘 라만은 폭력 사태의 책임을 야당과 공산주의자들에게 돌렸으며, 이 사건이 중국 공산주의 청년들에 의해 촉발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쿠알라룸푸르에 모인 말레이인들은 단지 "참을 수 없는 도발"에 대응한 것이라고 보았다.[25]
4. 1. 국가 운영 위원회(NOC) 보고서
국가운영위원회(NOC)는 1969년 10월 9일에 보고서를 발표하고 폭동의 주요 원인으로 "인종 정치"를 지목했지만, 말레이인에게 책임을 묻는 것을 꺼렸다.[25]보고서에 따르면, 국가의 경제 생활에서 이미 소외감을 느끼던 말레이인들은 이제 공공 서비스에서의 위치에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비말레이계 정치인들은 이 나라 민간 부문의 상당 부분에서 비말레이인들이 말레이인들에게 거의 문을 닫는 태도를 보인 것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었다.[25]
또한, 특정 비말레이계 인종차별주의 선거 연설자들은 말레이 경찰관과 장교에 대한 편파적인 법 집행을 주장하며 끊임없이 비말레이계의 감정을 자극했다. 그들은 비말레이계 지역 사회의 일부에서 법과 권위에 대한 존경심이 무너지는 데 직접적으로 기여했다.[25]
보고서는 또한 폭동의 원인을 말라야 공산당과 비밀 결사 모두에 부분적으로 기인했다.[25]
보고서에서는 "5월 13일의 폭력 사태는 상호 작용하는 세력의 결과였다... 여기에는 세대 차이와 국가 내 서로 다른 인종 간의 헌법 구조에 대한 해석 차이가 포함된다...; 최근 총선에서 특정 인종차별주의 정당 구성원과 지지자들의 선동, 무절제한 발언 및 도발적인 행동; 말라야 공산당(MCP)과 비밀 결사가 인종적 감정과 의심을 선동하는 데 수행한 역할; 그리고 중-말레이 불신을 배경으로 하고, 최근 총선 직후, 인종적 모욕과 자신의 나라에서 미래 생존에 대한 위협의 결과로 불안하고 절망적인 말레이인의 분위기"라고 언급되었다.[25]
그러나 보고서는 "문제는 공산주의 반란이 아니라 말레이인과 중국인 간의 공동체 충돌로 드러났다"고 밝혔다.[25] 보고서는 또한 위기 처리에서 보안군의 공정성 부족에 대한 소문을 부인했다.[25]
4. 2. 툰쿠 압둘 라만의 주장
툰쿠 압둘 라만은 1969년 총선거에서 야당이 권력을 탐하고 폭력 사태를 선동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 사건이 중국 공산주의 청년들에 의해 촉발되었다고 생각했으며, 쿠알라룸푸르에 모인 말레이인들은 단지 "참을 수 없는 도발"에 대응한 것이라고 여겼다.[25] 그는 대다수의 말레이인, 중국인, 인도인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25]1969년 총선거 결과, UMNO-MCA-MIC를 중심으로 하는 국민전선 정권은 크게 의석을 줄였다. 반면, 말레이시아 민정 운동(Gerakan), 민주행동당(DAP), 인민 진보당(PPP)과 같은 화교계 정당들은 세력을 확장했다.
정당 | 1964년 총선 의석 수 | 1969년 총선 의석 수 |
---|---|---|
여당 (국민전선) | 89 | 67 |
UMNO | 59 | 51 |
MCA | 27 | 14 |
MIC | 3 | 2 |
야당 | ||
말레이시아 민정 운동(Gerakan) | (1964년 총선 당시 미결성) | 8 |
인민 진보당(PPP) | 2 | 4 |
범말레이시아 이슬람당(PAS) | 9 | 12 |
민주행동당(DAP) | 1 | 13 |
화교계 주민들은 야당 승리에 고무되어 행진을 벌였고, 이에 대항하여 UMNO를 지지하는 말레이인 청년들도 행진을 벌였다. 이 두 집단의 충돌은 쿠알라룸푸르에서 유혈 참사로 이어졌다.
이 사건의 결과로 툰쿠 압둘 라만의 지도력은 크게 약화되었고, 결국 1970년 9월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이후 압둘 라자크 부총리가 제2대 총리로 취임했다. 이 정변으로 인해 말레이시아 의회는 1971년 2월까지 21개월 동안 기능을 정지당했다.
5. 사건의 여파와 영향
5·13 사건은 말레이시아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으며,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는 5월 10일 선거에서 말레이 국민 통일 기구(UMNO) 후보로 출마하여 낙선한 후, 폭동의 책임을 툰쿠 압둘 라만 총리가 "단순하다"며 말레이인들이 경제적 지분을 가질 수 있는 번영하는 말레이시아를 계획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툰쿠는 반대로 마하티르와 같은 "극단주의자"들을 인종 충돌의 원인으로 지목했고, 이로 인해 마하티르는 UMNO에서 축출되었다. 이는 마하티르가 그의 대표작인 ''말레이인의 딜레마''(The Malay Dilemma)를 쓰는 계기가 되었다.
쿠아 키아 숭은 2007년 저서 ''5·13 사건: 1969년 말레이시아 폭동에 관한 기밀 해제 문서''(May 13: Declassified Documents on the Malaysian Riots of 1969)에서 기밀 해제된 영국 대사관 공문을 근거로, 이 폭동은 UMNO 정치 지도자들이 군대 및 경찰과 연합하여 툰쿠 압둘 라만을 상대로 벌인 쿠데타라고 주장했다.[26]
5. 1. 국가 원칙(루쿠네가라) 제정
말레이시아의 사실상의 충성 서약인 ''루쿠네가라''(Rukun Negara)는 이 폭동에 대한 반작용이었다. 이 서약은 1970년 8월 31일에 말레이시아인들 간의 단결을 촉진하기 위한 방법으로 도입되었다.5. 2. 신경제 정책(NEP) 시행
신경제 정책(NEP)은 말레이인들의 경제적 지위 향상을 목표로 시행되었다. 이 정책은 소수 집단 우대 정책의 일환으로, 교육, 고용, 사업 등 다양한 분야에서 말레이인들에게 우선권을 부여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이는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가 그의 저서 ''말레이인의 딜레마''에서 제시한 해결책의 일환이기도 했다.[26]5. 3. 정치적 변화
폭동 이후 툰쿠 압둘 라만은 국가 운영에서 물러나고, 부총리였던 압둘 라자크 후세인이 국가 운영 위원회의 이사로서 실질적인 권한을 넘겨받았다.[27] 1970년 9월 22일, 의회가 다시 열리자 압둘 라만은 총리직을 사임하고 압둘 라자크가 총리 자리에 올랐다.더 넓은 정치적 연합을 만들기 위해 동맹당을 대신하는 국민 전선이 결성되었다.[27] 이 국민 전선에는 게라칸, PPP, PAS 등 이전의 야당들이 참여했다.
1969년 폭동 이후, 말레이 국민 통일 기구(UMNO)는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정치 시스템을 재편하기 시작했다.[28] UMNO는 "이 나라의 정치는, 그리고 앞으로도, 토착 [즉, 말레이] 기반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안정과 번영의 비결이었으며, 누구도 단순히 없앨 수 없는 정치적 삶의 사실이다."라는 자체적인 ''케투아난 멜라유''(Ketuanan Melayu) 원칙을 발전시켰다.[28] 이 원칙은 이후 UMNO가 말레이인들의 지지를 결집하고[29] 정부 지침으로 삼는 데 반복적으로 사용되었다.[30]
5. 4. 쿠알라룸푸르의 연방 직할구 편입
1974년, 5·13 사건 5년 후, 쿠알라룸푸르는 슬랑고르 주에서 분리되어 연방 직할구로 편입되었다.[26]6. 논란과 재평가
쿠아 키아 숭은 2007년 저서 ''5·13 사건: 1969년 말레이시아 폭동에 관한 기밀 해제 문서''(May 13: Declassified Documents on the Malaysian Riots of 1969)에서 기밀 해제된 영국 대사관 공문을 근거로, 이 폭동은 UMNO 정치 지도자들이 군대 및 경찰과 연합하여 툰쿠 압둘 라만을 상대로 벌인 쿠데타라고 주장했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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