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야 공산당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말라야 공산당(MCP)은 1930년 결성되어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에서 활동한 공산주의 정당이다. 초기에는 불법 조직으로 활동하며 노동 운동에 영향을 미쳤고,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일본에 저항하는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전쟁 후에는 영국 식민 정부와 갈등을 겪으며 비상사태를 초래했고, 말레이시아 국민 해방군(MNLA)을 조직하여 무장 투쟁을 지속했다. 1989년 하티아이 평화협정을 통해 무장 투쟁을 중단하고 해체되었다. MCP는 무장 투쟁 과정에서 민간인 피해와 인종 갈등을 유발하여 비판받았으며, 이념적 경직성과 말레이시아 사회의 특성을 고려하지 못한 점도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말레이시아의 정치사 - 마하티르 빈 모하맛의 두 번째 총리직 (2018-2020)
마하티르 빈 모하맛의 두 번째 총리직은 2018년 총선 승리 후 92세의 나이로 복귀하여 부패 척결, 경제 개혁, 외교 관계 강화 등의 정책을 추진했으나 2020년 정치적 혼란 속에 사임한 기간이다. - 1989년 해산된 정당 - 루마니아 공산당
루마니아 공산당은 볼셰비키 사상에 영향을 받은 극좌파가 창당한 정당으로, 코민테른의 영향 아래 어려움을 겪었으나 소련의 지원으로 권력을 장악, 사회민주당과 합병하여 일당 독재 체제를 수립하고 스탈린주의적 숙청과 독자 노선, 개인 숭배, 억압적 통치를 거쳐 루마니아 혁명으로 몰락했다. - 1989년 해산된 정당 - 헝가리 사회노동당
헝가리 사회노동당은 1956년부터 1989년까지 헝가리를 통치한 공산당으로, 헝가리 봉기 이후 커다르 야노시에 의해 재편되어 일당 독재 체제를 구축하고 굴라시 공산주의 노선을 통해 경제 개혁을 추진했으나, 1989년 민주화 운동의 영향으로 해산 후 헝가리 사회당으로 재창당되었다.
말라야 공산당 - [정당]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말라야 공산당 |
말레이어 이름 | |
중국어 이름 | |
타밀어 이름 | |
슬로건 | ""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
약칭 | MCP, CPM, PKM |
![]() | |
창립자 | 레이광쥐안 우칭 웨이칭차오 린칭중 천사오창 |
설립일 | 1930년 4월 |
해산일 | 1989년 12월 2일 |
전신 | 남양 공산당 |
준군사 조직 | 말라야 인민 항일군 말라야 민족 해방군 |
이념 및 성향 | |
이념 | 공산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마오쩌둥 사상 반제국주의 |
정치 성향 | 극좌 |
기타 | |
당원 수 (1939년) | 40,000명 |
색상 | 빨간색 |
2. 역사
1920년대 후반, 남양 공산당이 주도한 노동쟁의와 파업은 실패했다. 영국령 당국은 공산당 간부들을 체포하여 중국으로 추방했고, 당의 세력은 약화되었다.[54]
코민테른은 1930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응우옌 아이 쿠옥의 지휘 아래 인도차이나 공산당을 설립하도록 지시했다. 남양 공산당은 '''말라야 공산당'''(MCP)으로 개칭되어 말레이아, 태국, 인도네시아의 활동을 총괄하게 되었고, 중국 공산당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말레이인, 인도인, 화교를 당원으로 받아들였다.
1931년 일본군이 만주를 침공하면서 말레이아와 싱가포르의 화교들 사이에서 반일 감정이 고조되었다. 이에 MCP는 "말레이아 소비에트 공화국" 대신 "말레이아 공화국" 수립을 내세우며 자본가 계층을 포섭하려는 전술 변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당내 분열이 심화되었고, 코민테른 극동국이 개입하여 조정을 맡았다. 이 혼란 속에서 베트남인 라이 텍이 당내 위기를 해결하고 1936년 MCP의 총서기가 되었다.
1933년 세계 대공황 발생 이후, MCP는 세력을 확장하여 말레이아 전역에 지부를 설립했다. 1935년에는 셀랑고르주 바투 아랑의 광산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파업을 일으키고, 광산을 점거하여 소비에트 정부를 수립하기도 했다.[54]
1941년 12월 일본군이 말레이반도를 침공하자, 영국 식민지 당국은 체포했던 MCP 간부들을 석방했다. 이들은 말레이시아 인민항일군(MPAJA)을 결성하여 중국계 주민들의 지원을 받으며 항일 게릴라 활동을 전개했다. 영국군 특수부대인 136부대와 협력하여 세력을 확장했다.[53][55]
하지만 MCP 총서기 라이 텍은 일본군 특별경찰대의 스파이였고, 당 간부들의 정보를 일본군에 넘겼다. 이로 인해 일본군 점령 기간 동안 당 중앙집행위원 대부분이 일본군에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 MPAJA는 싱가포르로 진군했고, MCP는 퀸 스트리트에 본부를 설치했다.[55] MCP는 일본군 협력자 처벌에 주력했다. 1947년, 라이 텍의 배신 행위가 발각되어 도주하고, 친 펭이 새로운 총서기가 되었다. 한편, MCP는 중국계 일본군 협력자들을 인민재판에 회부했고, 말레이계에게도 보복을 가하여 인종 폭동이 발생했다. 바투파하트와 무아르에서는 말레이인들이 반격했고, 페락 주에서는 수백 명의 중국계가 말레이인 가옥을 불태우고 56명을 살해하는 사건(부콜 학살)이 발생했다.[56]
MPAJA는 영국군이 복귀할 때까지 말레이시아 전역에 인민위원회를 설립하고 치안 유지에 힘썼다. 그러나 코민테른 해산과 코민포름 결성 이전의 상황에서, 모스크바로부터의 지시 없이 공산 말레이시아 독립을 선언하지는 않았다.
영국은 MCP에 무장 해제를 요구했으나, MCP는 1948년 3월 중앙위원회를 열어 무력 투쟁 노선을 채택했다. 항만 노동자와 운송 노동자, 공장에 파업을 촉구하고, 같은 해 메이데이에 시위를 벌여 싱가포르 정부와 무력 충돌을 일으켰다. 영국 식민지 정부의 노조 지도자 추방령에 따라 MCP는 도시 지부에 무력 투쟁을 지시했고, 지도자들은 지하로 잠입했다. 페낭과 말레이시아 각지에서 유럽인 농장주와 국민당 우파 인사들이 살해되었다.
1948년 6월 17일, 영국 식민지 정부는 말레이시아 전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7월 23일 MCP와 인민항일군 및 관련 조직에 활동 금지령을 발령했다. 경찰은 MCP 본부와 노동 단체를 수색하여 1천 명이 넘는 사람들을 체포했다. 공산 게릴라는 정글에 잠복하여 산촌 화교 주민들의 지원을 받으며 반영 투쟁을 계속했다.
1950년, 해럴드 로든 브리그스 장군은 브리그스 계획을 통해 산악 지대 주민들을 신촌으로 이주시켜 공산 게릴라의 보급로를 차단했다. MCP는 더욱 깊은 정글 속으로 몰렸고, 계획에 협력하는 사람들과 정부 관리, 경찰을 공격하며 저항했다. 1951년 10월, MCP는 쿠알라룸푸르 근교에서 헨리 거니 영국 고등판무관을 암살하는 데 성공했다.
1952년 2월, 제럴드 템플러는 각 마을에 의회를 설립하고, 출생지주의에 따른 주민 등록을 인정하여 화교와 인도인에게 시민권을 부여했다. 1953년 가을에는 '백색 지역' 제도를 도입하여 게릴라의 영향력을 배제했다. 템플러는 2년 재임 기간 동안 게릴라 규모를 1/3로 축소했다.
1950년 리콴유는 "영국을 몰아내고 독립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은 말레이시아 공산당뿐"이라고 연설했다.[57] 1957년부터 인민행동당과 연합하여 반영, 항일 운동을 벌여 싱가포르 독립과 리콴유의 수상 취임에 기여했다.[57] 리콴유는 싱가포르 국기의 초승달은 국내 이슬람교도를, 다섯 개의 별은 국내 공산주의자들을 배려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의 오성홍기를 모델로 했다고 회고했다.[57] 그러나 리콴유는 싱가포르 수상이 된 후 서방에 가담했고, 말레이시아 공산당은 반정부 세력이 되어 불법화되었다.[57]
1960년 영국의 "긴급법령"이 폐지되었다.[57] 반정부 활동은 말레이시아와 태국 국경 지대로 옮겨갔으나, 1989년 12월 2일 말레이시아 공산당은 말레이시아 정부 및 태국 정부와 무장 투쟁 포기 평화 협상을 맺고 활동을 중단했다.[57]
2. 1. 초기 역사 (1920년대 ~ 1930년대)
1920년대 중반, 파항 주에서 공산주의 운동이 처음 나타났다. 라우브, 벤트옹(Bentong), 멘타갑(Mentakab), 만치스(Manchis) 등 중국인 거주 지역에 공산주의 청년동맹이 결성되었는데, 주로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의 중국계 학생들을 중심으로 확산되었다. 이들은 일부 교사들로부터 공산주의 이념을 배우고, 공개 집회와 토론 모임에서 자본주의, 식민지 압제,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를 표명했다.[4]1930년 4월, 남양 공산당이 해산되고 말레이시아 공산당(MCP)이 창당되었다.[5] MCP는 말레이와 싱가포르를 주요 책임 지역으로 삼았지만, 태국과 네덜란드령 동인도에서도 활동했다.
MCP는 영국 식민 통치하에서 불법 조직으로 활동했다. 1930년 4월 29일, 싱가포르 특별지부가 싱가포르 나심 로드 24번지의 빈집을 급습하여 창당 멤버 8명을 체포, 투옥 또는 중국으로 추방하면서 거의 와해될 뻔했다.[6] 1931년 6월, 코민테른 밀사가 경찰에 체포된 후 6월부터 12월까지 약 6차례의 급습이 이어지면서 여러 당원이 체포되고 문서가 압수되어 당은 혼란에 빠졌다. 밀사로부터 얻은 정보에 따르면 당시 당원은 1,500명, 동조자는 10,000명에 달했다.[7]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MCP는 노동 조합 운동에 영향력을 확대하고 여러 차례 파업을 조직했는데,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1935년 바투 아랑 탄광 파업이었다. 또한 일부 직장에 노동자 위원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위원회와 파업은 군대와 경찰에 의해 신속하게 진압되었다. 많은 중국계 파업 노동자들이 중국으로 추방되었고, 그곳에서 중국 국민당 정부에 의해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처형되는 경우가 많았다.[8]
1937년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 후, 말레이시아의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다. 중국 국민당의 지원 아래 MCP는 더욱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었다. 말레이시아 중국인들 사이의 반일 감정은 중국 방어라는 명분 아래 당원을 모집하고 자금을 모으는 데 좋은 기회를 제공했다.[9]
이 시기에 라이 텍이라는 영국 첩자로 추정되는 인물이 당에 침투하여 1939년 4월 총서기가 되었다. 이러한 심각한 보안 위반에도 불구하고 당은 효과적으로 계속 운영되었다. 1939년 중반에는 약 4만 명의 당원을 주장했는데, 그중 약 절반이 싱가포르에 있었다.
2. 2. 제2차 세계 대전과 항일 투쟁 (1941년 ~ 1945년)
1941년 12월 8일, 일본 제국이 말레이아를 침공하자, 영국 식민 당국은 말레이 공산당(MCP)의 군사 협력 제안을 받아들여 12월 15일 모든 좌익 정치범들을 석방했다.[6] 12월 20일부터 영국군은 싱가포르에 급히 설립된 제101 특수훈련학교(101st STS)에서 당원들을 게릴라전으로 훈련시켰다. 영국 방어가 무너지기 전 약 165명의 말레이 공산당 당원들이 훈련을 받았고, 열악한 장비로 무장한 채 급히 해산하여 점령군을 괴롭히려 했다.[6]1942년 2월 15일 싱가포르가 일본에 함락되기 직전, 말레이 공산당은 조호르주에서 무장 저항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곧 '연대'로 알려진 4개의 무장 집단이 형성되었고, 제101 특수훈련학교 훈련생들이 핵심 인력으로 활동했다. 3월에 이 부대는 말레이 인민 항일군(MPAJA)으로 명명되었고, 일본군에 대한 파괴 공작과 매복 공격을 시작했다. 일본군은 중국 민간인에 대한 보복으로 응수했다. 이러한 보복과 심화되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많은 말레이시아 중국인들이 도시를 떠나 숲 가장자리에 무허가 거주자가 되었고, 이들은 MPAJA의 주요 인력, 식량 및 기타 지원의 원천이 되었다. MPAJA는 이들에게 보호를 제공함으로써 지원을 강화했다.[10]
오밸런스(O'Ballance)는 1942년 중반 당시 각 연대의 병력이 제1연대 약 100명, 제2연대 160명, 제3연대 360명, 제4연대 250명이었다고 추산한다.[10] 이때 제5, 제6, 제7연대가 창설되었다. 여성을 포함한 이 군대는 마오쩌둥 노선에 따라 군사 및 정치적 세력으로 구상되었다.
싱가포르가 함락되었을 때, 총서기 라이 텍은 일본군에 체포되어 그들의 첩자가 되었다. 1942년 9월 1일, 그의 정보에 따라 일본군은 쿠알라룸푸르 북쪽의 바투 동굴에서 100명이 넘는 말레이 공산당과 MPAJA 지도자들의 비밀 회의에 새벽 기습을 가해 대부분을 사살했다. 인적 손실로 인해 MPAJA는 정치 담당관 제도를 포기해야 했고, 군 사령관들이 연대장이 되었다.[11] 이러한 좌절 이후 MPAJA는 교전을 피하고 통합에 집중하여 1943년 봄까지 4,500명의 병력을 확보했다.[12]
1943년 5월부터 제136 특수부대(Force 136)의 영국 특수부대가 말레이아에 잠입하여 게릴라들과 접촉했다. 1944년 초 MPAJA가 연합군 동남아시아 사령부(SEAC)의 일부 지시를 받아들이고 연합군이 MPAJA에 무기와 보급품을 제공하는 데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상당한 양의 물자가 공수를 통해 도착하기 시작한 것은 1945년 봄이 되어서였다.[13]
2. 3. 전후 혼란과 인종 갈등 (1945년 ~ 1948년)
1945년 8월 15일 일본 항복 후 말레이아에서는 권력 공백이 발생했고, 이 공백을 말레이 인민항일군(MPAJA)이 채웠다. 특히 중국인 지역에서 숲에서 나온 그들은 영웅으로 환영받았다.[14] 영국은 말레이 인민항일군(MPAJA)의 권위를 인정하고 군인들에게 급여를 지급했으며,[14] 게릴라들은 일본 무기를 압수하고 자유롭게 병력을 모집하여 무장 병력을 6,000명 이상으로 늘렸다.[14]말레이 인민항일군(MPAJA)은 일본군 협력자를 찾아내 처벌하는 데 주력했다.[55] 이 과정에서 일본군 협력자가 많았던 말레이계에게도 보복을 가하여 인종 갈등이 발생했다.[56] 바투파하트(Batu Pahat)와 무아르(Muar (town))에서는 말레이인들이 반격하여 양측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는 인종 폭동이 일어났다.[56] 페락 주(ペラ州)에서는 수백 명의 중국계가 말레이인 가옥 19채를 불태우고 말레이인 56명을 살해하는 사건(부콜 학살)이 발생했다.[56]
1945년 9월 12일 쿠알라룸푸르에 말레이아 영국군정(BMA)이 설치되었다.[17] 그 해 말 말레이 인민항일군(MPAJA)은 해산에 동의했고, 6,800명의 병사가 공식적으로 해산되었지만 일부 무기는 보관되었다.[18][19] 말레이 공산당(MCP)은 합법적인 수단으로 국가 독립을 위해 노력하는 '전국전선' 정책을 채택했다.[20]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아 말레이아 영국군정(BMA)은 파업과 시위에 직면했고, 말레이 공산당(MCP)은 말레이 민주 동맹(MDU)과 말레이 민족당(MNP)과 같은 의회 정당에도 영향력을 행사했다.[20]
1946년, 라이 텍(Lai Teck)의 배신에 대한 소문이 돌았고, 1947년 3월 심문을 받기 전 라이 텍은 당 자금을 가지고 해외로 도피했다.[21] 26세의 친 펭(Chin Peng)이 새로운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고, 당의 입장은 더욱 단호하게 반영국적이 되었다.[22]
2. 4. 말레이시아 비상사태 (1948년 ~ 1960년)
1948년 6월 16일, 페락 주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세 명의 유럽계 농장주를 살해하자 영국 식민 정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경찰에게는 광범위한 체포 권한이 주어졌고, 사법 절차 없이 사형을 포함한 처벌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1948년 7월 23일, 말라야 공산당(MCP)은 불법화되었고, 당의 무장 세력은 말레이시아 인민 반영국군(MPABA)으로 재편되었다.[23]1949년 2월 1일, MPABA는 말레이시아 국민 해방군(MNLA)으로 이름을 바꾸고, 싱가포르를 포함한 말레이시아 인민 민주 공화국 수립을 목표로 활동을 시작했다.[23] MNLA는 민위엔이라는 민간 조직의 지원을 받아 물자와 정보를 수집했다.[25]
게릴라들이 농민, 특히 소작농들의 도움을 받는 것을 막기 위해, 영국은 1950년 브리그스 계획을 통해 주민들을 '신촌'이라는 구역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전략을 시행했다. 1950년대 중반까지 약 50만 명(말레이시아 인구의 약 10%)이 이주했다.[31]
1955년 7월, 말레이시아 최초의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툰쿠 압둘 라만이 수상이 되었다.[34] 1955년 9월 24일, 친 펑은 라만에게 평화 협상을 제안하는 편지를 썼고, 1955년 12월 28일 회담이 열렸다. 친 펑은 MCP의 법적 인정과 분쟁 이전 상황으로의 복귀를 원했지만, 정부는 MCP의 해산을 요구하여 회담은 결렬되었다.
1957년 8월 31일, 말레이시아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했고, 툰쿠 압둘 라만이 수상이 되었다. 1960년 7월 31일, 정부는 공식적으로 '비상사태'가 끝났다고 선포했다.
2. 5. 독립 이후 (1960년 ~ 1989년)
1960년대 중반, 미국 국무부는 말라야 공산당의 당원 수가 약 2,000명이라고 추산했다.[40] 약 500명 규모의 공산 게릴라 부대는 태국 국경 양쪽에서 무장 투쟁을 계속했다. 한편, 친펭과 다른 간부들은 정글 기지와 제한적인 접촉을 유지했다. 1969년부터 그들은 중국 후난성에 "수아라 레볼루시 말라야"(말레이시아 혁명의 목소리)라는 라디오 방송국을 설립하여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의 지지자들에게 방송했다. 이 방송국은 1981년 덩샤오핑의 요청에 따라 폐쇄되었다.[41]1969년, 베트남 전쟁의 격화와 중국의 문화 대혁명에 영향을 받아 당은 무장 투쟁을 강화했다. 그러나 1970년 태국의 기지는 첩자로 의심되는 자들의 재판과 처형으로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숙청에 반대하여 1970년대 초 말레이시아 공산당/마르크스-레닌주의와 말레이시아 공산당/혁명파라는 두 개의 분열파가 결성되었다. 친펭은 이후 연루를 부인하고 기소된 동료들을 복권시켰다.[42] 1983년, 두 분열파는 말레이시아 공산당으로 재통합되었으나, 1987년 항복했다.
1989년, 말레이시아 공산당(CPM)은 마침내 무기를 내려놓았다. 12월 2일, 태국 남부 하티아이에서 친펭, 라시드 마이딘, 압둘라 CD는 말레이시아와 태국 정부 대표들과 만나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을 통해 말레이시아 공산당은 무장 투쟁을 공식적으로 중단했다.
3. 조직 구조
말레이시아 공산당(MCP)은 12명에서 15명으로 구성된 중앙집행위원회가 이끌었다. 중앙집행위원회 내에는 약 6명으로 구성된 정치국이 있었는데, 이들은 중앙집행위원회가 열리지 않을 때 당을 운영하는 역할을 맡았다. 각 주에는 주 중앙집행위원회가 있었고, 이는 다시 여러 지역으로 나뉘었다. 가장 작은 조직 단위는 당 세포였으며, 주로 하나의 직장이나 마을의 당원들로 구성되었다. 때때로 대규모 당대회가 개최되기도 했다.[47]
3. 1. 주요 인물
말레이시아 공산당(MCP)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주요 인물들을 통해 그 활동과 영향력을 넓혀갔다.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이름 | 역할 및 주요 활동 |
---|---|
친펭(Chin Peng) | 1947년부터 2013년 사망할 때까지 사무총장 역임.[47] |
양궈(Yeung Kwo) | 1947년부터 1956년 사망할 때까지 부사무총장 역임. 라이텍(Lai Teck) 조사에 큰 역할 수행.[47] |
이안통(Lee An Tong) | 양궈(Yeung Kwo)의 뒤를 이어 부사무총장 역임. 1946년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선출.[47] |
장링윈(Chang Ling-Yun) | 1953년부터 1964년까지 베이징 거점 활동. 1964년부터 1989년까지 북말레이시아 지부 서기 역임.[48] |
라이텍(Lai Teck) | 1939년부터 1947년까지 사무총장 역임. 영국과 일본의 삼중 스파이.[55] |
와히 아누아르(Wahi Annuar) | 비상사태 초기 MPLA 10연대 지도자. 1950년 2월 항복.[49] |
R. G. 발란(R. G. Balan) | MPAJA 활동. 런던 제국 공산당 회의 참석. 페락 고무 노동자 조합 조직. 1948년 체포. |
압둘라 CD(Abdullah CD) | 말레이 민족주의당(MNP) 활동. 말레이시아 공산당 의장 역임. 1989년 하트야이 협정 서명.[49] |
샴시아 파케(Shamsiah Fakeh) | 안가탄 와니타 세다르(AWAS) 지도자. 말레이시아 공산당의 저명한 말레이 지도자. |
수리아니 압둘라(Suriani Abdullah) | 페락 주 조직원. 압둘라 CD의 아내. 1945년 라이텍 옹호. |
S. A. 가나파티(S. A. Ganapathy) | 전말레이시아 일반노동조합(PMGLU) 회장, 전말레이시아 노동조합 연맹(PMFTU) 회장 역임. 1949년 체포 및 처형. |
라우 마(Lau Mah) | 페락 MPAJA 5연대 서기. 말레이시아 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위원. 1949년 사망.[50] |
라우 유(Lau Yew) | MPAJA 중앙군사위원회 의장. MPABA 수장. 1948년 사망. |
리숭(Lee Soong) | 1948년 캘커타 청년 회의 대표. |
리우잇판(Liew Yit Fan) | MPAJA 2연대 정치서기. 민성보 편집자. 1948년 체포.[51] |
린아량(Lin Ah Liang) | 1946년 말레이시아 공산당 싱가포르 지부장. |
천티엔(Chen Tien) | 중앙 선전부장. 발링 회담 대표. |
압둘 라시드 빈 마이딘(Abdul Rashid bin Maidin) | 런던 제국 공산당 회의 참석. 1989년 하트야이 협정 서명. |
순광(Soon Kwong) | 셀랑고르 MPAJU 사무총장. 1945년 체포. |
우티엔왕(Wu Tien Wang) | 1945년 싱가포르 자문위원회 대표. |
우추이이프(Eu Chooi Yip) | 말레이시아 공산당(싱가포르) 핵심 지도자. |
퐁충픽(Fong Chong Pik) | 말레이시아 공산당(싱가포르) 핵심 지도자. |
카마룰자만 테(Kamarulzaman Teh) | 안가탄 펨부다 인사프(Angkatan Pemuda Insaf)(API) 전직 지도자.[52] |
모드 야팀 아요브(Mohd Yatim Ayob) | 페락(Perak) 텔라가 네나스(Telaga Nenas) 캄풍 바루(Kg. Bharu) 전직 공산주의 전투원. |
3. 1. 1. 친 펭 (Chin Peng)친펭(Chin Peng)은 1947년부터 2013년 사망할 때까지 말라야 공산당의 사무총장을 역임했다.[47] 1947년, 라이텍(Lai Teck)이 일본군과의 협력 사실이 드러나 도망친 후, 전 페락 주 서기였던 친펭이 사무총장이 되었다.[55]3. 1. 2. 라이 텍 (Lai Teck)라이텍(Lai Teck)(Loi Tak)은 1939년부터 1947년까지 말라야 공산당의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그러나 그는 영국과 일본의 삼중 스파이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55] 1947년, 일본군에 협력했던 사실이 발각되어 도망쳤고, 전 페락 주(ペラ州) 서기였던 친펭(Chin Peng)이 사무총기가 되었다.[47] 라이텍은 일본군 특별경찰대의 스파이로 활동하며 당 간부들의 정보를 일본군에 넘겼고, 이로 인해 일본군 점령 기간 동안 당 중앙집행위원(상급 간부) 대부분이 일본군에 체포되어 살해되었다.3. 1. 3. 압둘라 CD (Abdullah CD)압둘라 CD(Abdullah CD)는 말레이 민족주의당(MNP)에도 참여했으며, 비상사태가 선포되자 정글로 들어갔다. 이후 말라야 공산당 의장을 역임했다. 1989년 하트야이에서 열린 평화 협정에 말라야 공산당 대표로 서명한 3명 중 한 명이었다.[49] 그는 100세가 넘게 살았다.3. 1. 4. 기타 주요 인물
4. 이념 및 정책
말라야 공산당(MCP)은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이념적 기반으로 삼았으며, 반식민주의와 민족 해방을 주요 목표로 설정했다. 이들은 영국 제국주의로부터의 완전한 독립과 말라야 민족의 자결권을 쟁취하고자 했다.[43] 이들은 때때로 정책 성명이나 선언을 발표했다.[43] 4. 1. 주요 선언 및 강령말레이시아 공산당(MCP)은 때때로 정책 성명이나 선언을 대중에게 발표했다.
5. 대외 관계
말라야 공산당은 코민테른을 통해, 후에는 직접적으로 중국 공산당의 영향을 받았다. 1931년 일본군이 만주에 침공하고 말레이아와 싱가포르의 화교들 사이에서 반일 감정이 고조되자, "말레이아 소비에트 공화국" 대신 "말레이아 공화국" 수립 구상을 내세우고, 자본가 계층을 포섭하려는 전술 변경을 실시했다. 이로 인해 당내 분열이 심화되었고, 코민테른 극동국이 개입하여 조정했다. 5. 1. 중국 공산당과의 관계코민테른을 통해, 후에는 직접적으로 중국 공산당의 영향을 받았다. 1930년 제3차 대표자 회의까지 남양 공산당은 말레이아 공산당(MCP)으로 개칭되어 말레이아, 태국, 인도네시아의 활동을 총괄했고, 중국 공산당의 직접 지휘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말레이인, 인도인, 화교를 입당시켰다.1931년 일본군이 만주에 침공하고 말레이아와 싱가포르의 화교들 사이에서 반일 감정이 고조되자, MCP는 "말레이아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 구상 대신 "말레이아 공화국" 수립 구상을 내세우고, 자본가 계층을 포섭하려는 전술 변경을 실시했다. 이로 인해 당내 분열이 심화되었고, 코민테른 극동국이 개입하여 조정했다. 5. 2. 싱가포르와의 관계1950년 리콴유는 "영국을 몰아내고 독립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은 말레이시아 공산당뿐이다."라고 연설했다.[57] 1957년부터 인민행동당과 연합하여 반영·항일 운동에서 싱가포르의 독립과 리콴유의 수상 취임에 기여했다.[57]리콴유는 회고록에서 싱가포르 국기의 초승달은 국내 이슬람교도를 배려하고, 다섯 개의 별은 국내 공산주의자들을 배려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의 오성홍기를 모델로 했다고 언급했다.[57]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수상이 된 후 서방에 가담했기 때문에, 말레이시아 공산당은 반정부 세력이 되어 불법화되었다.[57] 6. 유산 및 평가
말라야 공산당(MCP)은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의 독립과 발전에 기여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러나 무장 투쟁 과정에서의 폭력성과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에 대한 경직성은 비판받는다. 6. 1. 부정적 평가말라야 공산당(MCP)은 무장 투쟁 과정에서 발생한 민간인 피해와 폭력 행위로 비판받는다. 또한 말레이계와의 갈등을 조장하고 인종 폭동을 유발한 점도 비판받는다.[1]말라야 공산당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에 경도되어 종교적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는 이슬람교도가 다수인 말레이시아 사회의 특성을 고려하지 못한 점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당원의 대다수가 중국계였고 중화인민공화국에 경도되어 있어, 말레이시아인들의 반감을 샀다는 점도 지적된다.[1] 참조
[1]
서적
The Basic Aims or Objectives of the Malayan Communist Movement
South Seas Society
199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