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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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8·1 선언은 1935년 8월 1일 중국 공산당이 발표한 대일 항쟁을 위한 통일 전선 구축을 촉구하는 선언이다. 만주 사변 이후 일본의 중국 침략이 심화되는 가운데, 중국 공산당은 장제스의 국민당에 내전 중단을 제안하고, 전국 각 정당과 군대가 연합하여 일본에 공동으로 저항할 것을 호소했다. 이 선언은 12·9 운동을 촉발하고 시안 사건을 거쳐 제2차 국공 합작을 이끌어내는 등 중국 내 항일 여론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인 독립운동가들에게 영향을 미쳐,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1930년대 중반, 중국은 복잡한 국내외 정세에 놓여 있었다. 만주 사변 이후 일본의 침략이 가속화되었고, 장제스는 '선안내후양외'(먼저 국내를 안정시키고 후에 외적을 물리친다) 정책으로 국공 내전에 집중하면서 일본과의 타협을 선택했다. 이로 인해 중국 공산당은 대장정을 거쳐 옌안에 이르는 등 큰 어려움을 겪었지만, 코민테른의 반파시즘 통일 전선 정책과 맞물려 국공 내전의 정전을 희망하게 되었다.[1]
1935년 8월 1일, 모스크바에 있던 왕밍 등 중국 공산당 대표단은 코민테른의 지침에 따라 8·1 선언을 발표했다. 8·1 선언은 파리의 '구국보'와 모스크바의 '공산 국제 통신'에 게재되었다.
8·1 선언은 장제스의 "외세 배척 전에 내부 안정" 정책을 비판하고, 전국 동포, 각 정당, 군대가 상호 간의 투쟁을 포기하고 공동으로 일본에 저항할 것을 촉구했다. 또한 항일 구국 10대 강령에서 국방 정부의 성립을 요구하고, 중국 공산당 군대가 국방 정부의 지도하에 공동으로 항일 투쟁에 참여할 것을 선언했다.
2. 배경
2. 1. 국제 정세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일본군은 만리장성을 넘어 열하성에 침공을 시작했다. 한편, 장제스는 1932년 6월 14일에 먼저 중국 내부를 단결시키고, 그 후에 외적을 상대한다는 "양외필선안내"(zh)先安內後攘外|선안내후양외중국어 정책을 국책으로 삼았기 때문에, 중일 양국은 1933년 5월 탕구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그 결과, 일본은 만리장성 이남에서 철수하는 한편, 장제스는 국공 내전에 주력하게 되었다. 이후, 일본은 화북 5성(허베이성, 산둥성, 산시성, 차하얼성, 수이위안성)의 분리를 꾀하고, 매진-허잉친 협정, 도이하라-친더춘 협정을 잇달아 체결하여, 중국 국민당의 세력을 허베이성, 차하얼성에서 몰아냈다.
한편, 일본과 타협한 장제스는 중국 공산당 탄압에 착수했다. 제5차 토벌전에서 중국 공산당은 루이진을 포기하고 대장정을 감행하여, 1935년에는 산시성 북부의 옌안에 도달했다. 그러나 대장정 및 만주에서 도망쳐 온 장쉐량이 이끄는 동북군과 펑위샹이 이끄는 서북군의 공격으로 중국 공산당은 피폐해져 국공 내전의 정전을 희망하고 있었다.
1935년 7월, 코민테른 제7차 대회에서 반파시즘 통일 전선을 설립한다는 정책을 결정했다. 그중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는 "중국에서는 소비에트 운동 확대 및 적군 전투 능력 강화가 전국적 인민 반제 운동의 전개와 결합되어야 한다. 이 운동은 제국주의적 압제자에 대한, 무엇보다도 먼저 일본 제국주의 및 그 중국의 종복에 대한 무장 인민의 인민 혁명 투쟁의 슬로건 아래 수행되어야 한다. 중국 소비에트는 중국 인민의 해방 투쟁에 있어, 전 중국 인민을 통일하는 중심점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1]
2. 2. 중국 국내 정세
만주 사변 이후 일본군은 만리장성을 넘어 열하성에 침공을 시작했다. 한편, 장제스는 1932년 6월 14일 "먼저 중국 내부를 단결시키고, 그 후에 외적을 상대한다"는 '선안내후양외(先安內後攘外)'先安內後攘外|xiān ān nèi hòu rǎng wài중국어 정책을 국책으로 삼았기 때문에, 중일 양국은 1933년 5월 탕구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1] 그 결과, 일본은 만리장성 이남에서 철수하는 한편, 장제스는 국공 내전에 주력하게 되었다. 이후, 일본은 화북 5성(허베이성, 산둥성, 산시성, 차하얼성, 수이위안성)의 분리를 꾀하고, 매진-허잉친 협정, 도이하라-친더춘 협정을 잇달아 체결하여, 중국 국민당의 세력을 허베이 성, 차하얼 성에서 몰아냈다.[1]
한편, 일본과 타협한 장제스는 중국 공산당 탄압에 착수했다. 제5차 토벌전에서 중국 공산당은 루이진을 포기하고 대장정을 감행하여, 1935년에는 산시성 북부의 옌안에 도달했다.[1] 그러나 대장정 및 만주에서 도망쳐 온 장쉐량이 이끄는 동북군과 펑위샹이 이끄는 서북군의 공격으로 중국 공산당은 피폐해져 국공 내전의 정전을 희망하고 있었다.[1]
3. 8·1 선언의 발표와 내용
4. 8·1 선언의 영향
이후 8·1 선언은 상하이나 베이징 등 중국 대도시로 퍼져나가면서, 국내 여론은 내전 중단과 공동의 대일 항전에 기울어졌다.
4. 1. 12·9 운동
8·1 선언 이후 일본은 1935년 11월 25일, 인루겅을 수반으로 하는 괴뢰 정권인 지둥 방공 자치 정부를 퉁저우(현재의 베이징시)에 수립하고, 화베이 분리 공작을 추진해 나갔다.[1] 그 직후 12월 9일에는 베이핑(현재의 베이징 시)의 학생들이 반발하여 일본의 화베이 분리 공작 반대, 내전 중단, 언론의 자유 등을 요구하는 시위를 일으켰고(12·9 운동), 이 학생 운동은 중국 전역으로 파급되었다.[1]
4. 2. 시안 사건과 제2차 국공 합작
1936년 12월 9일 베이핑(현재의 베이징시)의 학생들은 일본의 화베이 분리 공작에 반대하고, 내전 중단과 언론의 자유 등을 요구하는 시위를 일으켰다(12·9 운동). 이 학생 운동은 중국 전역으로 파급되었다.[1]
이러한 흐름을 받아, 1936년 장쉐량과 양후청이 장제스를 감금하고 국공 내전 중지와 항일 연합을 요구하는 시안 사건이 발생했다. 시안 사건을 계기로 제2차 국공 합작이 성립되어 항일 민족 통일 전선이 형성되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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