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하이시는 중화인민공화국의 직할시이자, 중국 동부에 위치한 주요 도시이다. 춘추시대부터 역사를 시작하여, 아편전쟁 이후 조계지를 거쳐 중국 경제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황푸강을 경계로 푸시와 푸둥으로 나뉘며, 16개의 구를 관할한다. 경제적으로는 금융, 무역, 제조업이 발달했으며, 세계에서 가장 바쁜 컨테이너 항구를 보유하고 있다. 문화적으로는 오월 문화와 해파이 문화가 융합되었으며, 다양한 박물관, 미술관, 공연 시설을 갖추고 있다. 교통은 지하철, 버스, 택시 등 대중교통이 발달했으며, 푸둥 국제공항과 훙차오 국제공항을 통해 국제적인 연결성을 확보하고 있다. 68개의 자매 도시를 두고 있으며, 2023년 기준 인구는 2,487만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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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는 고대 주나라 시대부터 시작되어, 진나라, 신, 한나라를 거쳐 동오, 진, 송, 남제, 량, 진, 수나라 시대를 지나 당나라 때는 화정현의 일부였다. 소주하 남쪽에 상하이푸라는 마을이 생겨 송나라 시대에는 상하이전이라고 불렸고, 황푸강 하류의 현재 훙커우구 부근에는 하하이묘도 있었다. 원나라 때 시박제거사가 설치되어 항구 도시로 발전하기 시작했고, 1292년에 상하이현이 되었다.
청나라 시대인 1842년 난징조약으로 상하이는 조약항으로 개항했다.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이 상하이 조계지를 형성했고, 일본도 조계지를 열어 훙커우구는 "소도쿄"라고 불렸다. 1865년 홍콩상하이은행 설립을 시작으로 유럽과 미국의 금융기관이 상하이에 진출했다. 1871년 대북전신회사가 홍콩-일본나가사키 간 해저 전신 케이블을 부설하여 상하이는 국제 전신이 가능해졌다. 1873년 이와쿠라 사절단이 상하이를 방문하여 "미오회람실기"에 기록을 남겼다.[413] 상하이 공동조계는 독자적인 경찰력과 군사력을 보유했다.
청일전쟁 후,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공업 기업권이 여러 나라에 주어지면서 공장 건설이 촉진되었다. 1896년 러청은행, 1899년 인도차이나은행이 진출했다.[414]사순가 등 유대 자본이 상하이로 이전하여 제1차 세계 대전 후 전성기를 누렸다.[415]
1920~1930년대 상하이는 중국 최대 도시이자 금융 중심지로, "동양의 파리"라고도 불렸다. 절강재벌 등 민족자본이 등장하고 노동 운동이 성행했다. 1925년 오사사건은 대규모 민족 운동이자 사회주의적 노동 운동의 등장을 보여주었다. 절강재벌은 장제스와 제휴하여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1927년 상하이 특별시, 1930년 상하이 직할시가 성립되었다.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으로 일본군이 침공하여 피해가 발생했다. 1935년 중산 수병 사살 사건 등이 발생했다.[416] 1937년 제2차 상하이 사변으로 일본군은 상하이 중국인을 처형·살해했고, 중국 시민은 억압받았다.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과 함께 상하이 공동조계는 일본군에 점령되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외국 자본은 홍콩으로 철수했지만, 1950~1960년대 공업 도시로 발전했다.
1978년 개혁개방 정책으로 외국 자본이 유입되어 장쩌민, 주룽지 등 중국공산당 지도부를 배출했다(상하이파). 1992년 이후 푸둥 신구 개발로 고도 경제 성장을 지속했고, 2010년 상하이 만박을 개최하여 국제 도시로 부활했다.
2019년 12월 이후 코로나바이러스 유행으로 2022년3월 28일 이후 엄격한 봉쇄가 실시되었다.[417]4월 5일 전 시 무기한 봉쇄로 전환되어[419] 식량 부족 등 시민 생활에 영향을 미쳤다.[420]4월 16일 생산 활동 재개 조건이 발표되었고,[421] 6월 1일 봉쇄가 해제되었다.[422]
구 통합 및 신설, 현의 구 승격, 2009년 난후이구(南匯区) 푸둥신구(浦東新区) 편입 등.
1919년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수립되었다.[464] 상하이는 교통이 편리하고 쑨원의 광동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었으며, 조계가 있어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김구는 1932년4월 29일윤봉길 의사를 통해 홍커우 공원에서 일본 천황 생일연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에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계획, 실행하였다.
2. 1. 고대
춘추시대에는 오나라의 동쪽 지역에 속했으며, 전국시대에는 초나라에 속했다. 일찍이 초나라춘신군의 봉토였으며, 그 흔적은 현재 상하이를 관통하는 황포강의 옛 명칭인 춘신강(春申江)과 상하이에 대한 약칭 중 하나인 신(申)에 남아 있다. 삼국 시대에는 오나라의 항구 도시였으며, 오나라 황제 손권의 형인 손책이 회계 전투에서 이겨 이 곳을 차지하였다. 손권은 이곳의 아름다운 바다 경치를 지나칠 수 없어, 자신의 별장을 만들어 구경하였다고 하는데 이 별장의 위치가 와이탄 주변에 있다. 서기 4, 5세기 진나라 때 송강(松江)(지금의 소주하(蘇州河))과 임해 일대의 주민들은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삼았고, 대나무로 “호(扈)”라고 부르는 낚시 도구를 만들어 사용했고, 또 당시 장강의 지류가 바다로 이어지는 곳을 “독(瀆)”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송강 하류 일대(현재 소주하와 황포강이 만나는 지대)를 “호독(扈瀆)”이라고 불렀다. 이때, “호(扈)”를 “호(滬)”라고 부르게 되었다.[27] 상해는 오송강(吳松江) 하류에 위치해 “상해포(上海浦)”라는 명칭을 얻게 되었다. 당나라 중엽에는 화정현(華亭縣)의 일부였고, 송나라 말에 상해진(上海鎭)이 형성되었으며, 1292년 상하이현(上海縣)이 되었다. 명나라가 흥성하던 1553년에 왜구에 대항하기 위해 성을 쌓았고, 남경지구 쑹장 부 관할이 되었다. 송강부 관할지역은 전국에서 가장 큰 면방의 중심지였다. 청나라에는 명의 제도를 답습하여 장강 이남의 송강부에 귀속시키고, 상해 세관을 설립했다.
2. 2. 근대
청나라 시대 아편전쟁을 종결지은 1842년의 난징조약에 의해 상하이는 조약항으로 개항했다. 이를 계기로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의 상하이 조계지가 형성되었고, 일본도 조계지를 열어 훙커우구는 "소도쿄"라고 불렸다. 1865년 홍콩상하이은행이 설립된 것을 시작으로, 유럽과 미국의 금융기관이 본격적으로 상하이에 진출했다. 1871년에는 홍콩-상하이-일본의 나가사키를 잇는 해저 전신 케이블을 대북전신회사가 부설하여, 상하이 조계지는 베이징보다 훨씬 빨리 전신 네트워크에 통합되어 국제 전신이 가능해졌다. 1873년에는 일본의 이와쿠라 사절단이 귀로에 상하이에 들러 당시 상하이의 모습을 "미오회람실기"에 기록했다.[413] 상하이 공동조계는 각국에 의해 구성된 독자적인 경찰력·군사력을 보유했다.
청일전쟁 이후, 외국 기업을 중심으로 투자가 활발해졌다.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공업 기업권이 여러 나라에 주어지면서 공장 건설이 촉진되었다. 1896년에 러청은행이 문을 열었고, 1897년 말 홍콩상하이은행의 주가는 176%의 프리미엄을 기록했다. 1899년에는 인도차이나은행이 진출했다.[414] 상하이는 영국령 홍콩의 고율세에 비해 과세가 완화되었고 조계지도 마련되어, 사순가 등의 세파르디계 유대인 그룹을 비롯한 홍콩의 유대 자본이 상하이로 이전하여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전성기를 누렸다.[415]
1920년대부터 1930년대에 걸쳐 상하이는 중국 최대의 도시로 발전하여, 홍콩상하이은행을 중심으로 중국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다. "마두" 또는 "동양의 파리"라고도 불리며, 나이트클럽과 쇼 비즈니스가 번성했다. 이러한 상하이의 번영은 절강재벌 등 민족자본의 등장을 가져왔고, 계급 투쟁적인 노동 운동이 성행했다.
1925년 상하이에서 시작된 오사사건은 중국에서 대규모 민족 운동이자 사회주의적 노동 운동의 등장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절강재벌은 이러한 상황을 우려하여 장제스와 제휴, 반공 쿠데타(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한편, 중화민국 아래 1927년에 상하이 특별시가, 1930년 5월 상하이 직할시가 성립되었다.
1932년 상하이 일본 승려 습격 사건 등을 원인으로 제1차 상하이 사변이 발생, 일본군이 침공하여 많은 인적·물적 피해가 발생했다. 1935년에는 중산 수병 사살 사건이나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이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416] 1937년에는 오야마 중위 살해 사건 후 제2차 상하이 사변이 발발했다. 이 전투와 그 후, 일본군은 많은 상하이 중국인을 처형·살해했고, 중국 시민은 억압에 시달렸다.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과 함께 상하이 공동조계는 일본군에 점령되었다.
2. 2. 1. 청나라 시대
아편전쟁이 끝난 1842년에 중국과 영국 사이에 체결된 난징조약에 따라 상하이는 1843년 중국의 5개 대외 무역항 중 하나로써 개항되었고, 영국과 미국, 프랑스는 상하이에 거류지를 형성했다.[463]
1842년 8월, 아편전쟁에 패한 중국은 굴욕적인 난징조약을 체결하였고, 1843년 10월에 후먼조약을 체결하여 영국인의 주거지와 임대 조건에 대해 합의하여 상하이 시내에 거주할 수 있는 법적 장치를 마련하게 되었다. 1843년 11월 14일 첫 번째 영국 영사인 조지 밸푸어가 상하이에 도착하면서 11월 17일에 정식으로 상하이 개항을 선포하였다. 이후 100년 동안 상하이에 조계지가 존재하게 되었다.[463]
1854년 태평천국전쟁 중에 자치행정기구를 설립하면서 공식적으로 청나라 정부의 행정과 사법 관할권 밖의 독립된 조계지가 되었다. 그 후, 상해는 2개의 상하이 조계지와 중국 지방 정부가 분할 관리하게 되었는데, 지금의 상하이 황푸구, 징안구, 훙커우구, 양푸구는 상해 공동 조계였고, 창닝구는 상하이 공동 조계 밖의 구역이었다. 또 루완구와 쉬후이구는 프랑스의 조계지였다.
자베이구와 난스구는 중국이 관리하던 지역이었으나 조계 때문에 연결할 수 없는 두 개의 지역으로 나뉘었다. 개항 후 상하이는 극동에서 가장 번창한 항구이자 경제와 금융의 중심지가 되었고 아시아의 유일한 국제도시로 발전하였다. 상하이는 조계 덕분에 전화가 미치지 않았고, 독립적인 위치에서 충분한 국제관계를 향유할 수 있었으며, 이것이 근대 상하이의 번영을 가져왔다.
2. 2. 2. [[중화민국]] 시대
1912년 중화민국 성립 초기에는 청나라의 잔존 세력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새로운 세력은 아직 미약했다. 군벌들이 난립하여 중앙 정부부터 지방까지 군인들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정부와 사회는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상하이의 조계는 평화를 유지하며 경제와 인구 등 여러 면에서 오히려 빠른 성장을 이루었다. 1912년부터 1936년까지는 상하이 조계지가 번영을 누린 시기로 평가된다. 중화민국 초기에는 조계를 제외한 자베이와 난스 지역이 장쑤성에 속해 있었다. 1927년, 중화민국 정부는 조계지 이외의 지역에 상하이 특별시를 설치하고, 중화민국과 행정원의 직속 관할로 두었다. 이와 함께 장쑤성의 상하이현(上海縣)과 보산현(寶山縣)의 17개 도시를 편입시켰다. 1930년 7월, 상하이 특별시는 상하이시로 이름이 바뀌었다.
20세기 초, 상하이에서는 중국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친 여러 정치적 사건들이 연이어 발생했다. 1921년 7월,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 대회가 상하이에서 열려 중국공산당이 탄생했다. 이후 1922년 7월과 1925년 1월에 중국공산당 제2차, 제4차 전국대표 대회가 각각 개최되었다. 1925년 5월 30일에는 일본계 방적공장 공장주가 파업 노동자를 총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항의하기 위해 상하이 학생과 시민들이 상하이 최대 번화가인 난징루(南京路)에 모여 시위를 벌였고, 영국 경찰이 시위대에 발포하면서 오삼십 운동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전국적인 반(反)영국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1927년 4월 12일, 상하이 자베이에서 4·12 사건이 발생했다. 국민혁명군이 노동자 규찰대의 무장 해제를 강제로 시행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유혈 사태가 발생했고, 이는 중국공산당의 분열로 이어졌다. 이후에도 중국공산당(1921년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비밀리에 성립) 중앙기관은 공동 조계 중립구역인 윈난로에 은신해 있다가, 1933년 강서 해방구가 안정된 후에야 그곳으로 이동했다.
1932년 1월 28일, 일본은 중국동북에서 일으킨 만주사변 이후, 상하이에서 일본 승려가 중국 노동자에게 구타당한 사건을 빌미로 제1차 상하이 사변을 일으켰다. 상하이 자베이 구에서는 한 달 넘게 중국과 일본 양국 군대 간의 격렬한 군사 충돌이 이어졌고, 국민정부는 잠시 뤄양으로 피난을 가기도 했다. 1937년 8월 13일, 일본 제국군은 다시 상하이를 침공하여 상하이를 방어하던 국민혁명군과 전투를 벌였다. 상하이 전투에서 중국군은 큰 피해를 입었지만 결국 일본군에 패배했고, 일본군은 무력으로 상하이 조계 외의 지역을 점령했다. 이 기간 동안 상하이 공동 조계의 북쪽 절반, 즉 현재의 훙커우 구와 양푸 구는 일본군의 방어 지역이자 일본 세력권에 속해 큰 피해를 입었다. 1941년 12월 7일, 태평양 전쟁 발발 후 일본은 영국과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상하이 조계를 공격하여 상하이를 점령했다. 이후 일본은 조계를 자신들을 돕던 왕징웨이 정권에 넘겨주었고, 미국과 영국도 조계지를 포기했다. 1942년부터 조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이로써 100년간 지속된 조계 시대는 막을 내렸다.
1945년, 상하이는 중화민국에 의해 탈환되어 다시 중화민국의 관할 하에 놓였고, 1949년 5월까지 국민정부가 통치했다. 그 후 중화민국 국민정부의 국부군과 중국공산당의 인민해방군 사이에 대규모 내전이 발발했다. 1949년5월 27일, 인민해방군이 국부군을 격파하고 상하이 전체를 장악했다. 이 기간 동안 국민정부와 중국국민당, 외국 기관, 그리고 그와 관련된 많은 인원과 재산이 상하이를 떠났다.
2. 3. 현대
1949년 상하이는 직할시가 되었고, 이후 중국 공업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1930년대에 중국작가연맹의 주요 활동지였던 상하이는 문화대혁명 시기 사인방의 장춘차오와 왕훙원 등의 주요 활동 근거지였으며, 이와 관련된 많은 중요한 사건들이 발생했다.[411][412] 1980년대 중국의 개혁 개방 실시 이후 상하이는 중국 대륙의 경제 중심지로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또한 남방 지역, 특히 경제 특구 건설로 인해 새로운 도전을 받기도 했다.[411][412]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상하이는 다시 경제, 금융, 무역에 있어서 중요한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1993년 푸둥의 개방으로 시의 발전은 가속화되었다. 현재 연간 일인당 평균 GDP가 6% 이상의 성장을 유지하고 있고, 상하이는 국제적인 경제, 금융, 무역, 항운의 중심이 되기 위해 매진하고 있다.[411][412]
푸둥과 푸시를 연결하는 도로 건설도 상하이의 발전 진행을 보여주는 지표이다. 황푸강과 장강 양안의 공동 발전을 위한 기초를 다졌다. 1971년에는 쑹푸대교 건설로 다리가 없던 황푸강의 역사를 다시 썼다. 1991년12월 1일에는 난푸대교를 개통했다. 황푸강에는 이미 6개의 다리가 건설되었다. 양푸대교(1993), 수푸대교(1996년), 루푸대교는 2002년 완공된, 세계에서 가장 긴 아치 교량 중 하나이다.[411][412]
동시에 1970년 9월에는 다푸루 터널이 건설되었고, 1989년10월 24일에 옌안 동로 웨장 터널이 개통되었으며, 2003년 9월 29일에 다롄루 터널이 개통되었다. 터널의 개통으로 시내 금융무역지구에 큰 변화가 생겼다. 1994년 11월, 동방명주탑이 완공되었다. 1999년 3월 18일, 진마오 빌딩이 영업을 시작했다.[411][412]
1999년 8월에는 상하이 국제회의센터가 문을 열었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 거행 전에 중국에서 가장 높은 상하이 세계금융센터가 건설되었다. 상하이는 푸둥 개방 후에 많은 국제회의를 주관해왔고, 국제적인 영향력도 증가했다. 동시에 중국 대륙의 경제와 사회도 빠른 발전을 보이고 있다. 2001년 10월 21일 상하이에서 제9회 APEC 지도자 비공식회의가 열렸고, 2006년 6월 15일에는 상하이 협력 성원국의 원수 이사회 회의가 상하이에서 개최되었다. 2010년에 상하이는 2010 상하이 엑스포를 개최했고, 그 외에 매년 다양한 주제의 크고 작은 전시회가 상하이에서 개최된다. 이런 사업은 이미 상하이의 중요한 산업 중 하나가 되었다.[411][412]
1949년 상하이의 면적은 636km2였다. 1958년, 장쑤성의 상하이(上海), 바오산(宝山), 자딩(嘉定), 쑹장(松江), 난후이(南匯), 칭푸(靑浦), 펑셴(奉賢), 충밍(崇明), 진산(金山), 촨샤(川沙) 10개 현이 상하이에 편입되면서 상하이시 직할구의 범위가 5910km2로 확대되었고, 2003년 말에 이르러 상하이 면적은 6340.5km2가 되었다.[411][412]
상하이시 관할 구역 밖인 장쑤성과 안후이성에 상하이시의 외딴 지역(飛地)이 몇 군데 존재한다. 이들 지역 주민(중국인 범죄자 제외)은 상하이 호적을 소지하고 있으며, 일상 대화는 상하이 방언을 사용한다.[411][412]
상하이 매이산 야금기지 (上海梅山冶金基地) - 장쑤성난징시 부근. 상하이 철강 생산 기지 중 하나이며, 1968년에 설립되었다.[411][412]
상하이시 다툰 탄광 (上海市大屯炭鉱) - 장쑤성 페이현 부근. 면적 245km2, 1970년 설립, 상하이시 내 발전소와 제철소에 석탄을 공급한다. 2001년 8월 상하이 증권거래소에 상장되었다.[411][412]
상하이 다펑 농장 (上海大豊農場) - 장쑤성 옌청 지역. 3개의 농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면적 307km2, 1950년 설립. 상하이시 쌀 생산량의 12%, 돼지고기 생산량의 8%, 수산물 생산량의 3%를 공급한다. 문화대혁명 시대에는 상하이의 지식청년과 노동교양자(경범죄자·정치범)를 수감했다.[411][412]
상하이시 쥔톈후 감옥 (上海市軍天湖監獄) - 안후이성 선청시, 면적 14km2, 1962년 설립. 5년 이하의 형기를 복무하는 자들을 수감하는 곳이다.[411][412]
상하이시 바이마오링 감옥 (上海市白茅嶺監獄) - 안후이성 광더 지역, 면적 40.5km2, 1956년 설립. 상하이에서 형사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수감하는 곳이며, 상하이에서 발견된 불발탄을 이곳에서 처리한다.[411][412]
2. 4. 한국의 독립운동
1919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서 수립되었다.[464] 상하이는 교통이 편리하고 쑨원이 이끄는 광동정부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으며,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의 조계가 있어서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독립지사들은 자신들에게 가장 우호적인 프랑스 인사들의 도움을 받아 프랑스 조계에 살면서 활동을 펼쳤다.[464]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령인 김구는 1932년4월 29일 상하이의 홍커우 공원에서 열리는 일본 천황의 생일연(천장절)과 상하이 점령 전승 기념 행사를 폭탄으로 공격할 계획을 세웠고, 윤봉길이 도시락과 물병으로 꾸며진 폭탄을 투척하여 의거를 수행했다.
3. 지리
상하이는 장강 입구, 중국 해안선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며, 북위 31도 14분, 동경 121도 29분에 자리 잡고 있다. 장강 삼각주 충적평야의 최전선에 위치하며, 동쪽으로는 동중국해, 남쪽으로는 항저우만과 접하고, 북쪽에는 장강이 흐르며, 서쪽에는 장쑤성과 저장성이 있다.
시 전체 면적은 6,340.5km2이며, 남북 최대 120km, 동서 최대 100km이다. 이 중 시 직할구 면적은 2,648.6km2이다. 상하이는 충적평야 지형으로, 서남부에는 일부 화산 언덕이 있다. 평균 해발 고도는 4m 정도로 낮고 평탄하며, 서부에 서산(佘山), 톈마산(天馬山) 등이 있지만 고도는 100m 이하이다. 상하이시에서 가장 높은 곳은 항저우만의 다진산(大金山)(103m)이다.
양자강 하구 남쪽에 위치하며, 하구에 충밍다오(崇明島), 창싱다오, 헝사다오 등의 섬이 있다. 시가지는 양자강의 지류인 황푸강(黄浦江)을 거슬러 올라간 곳에 있으며, 황푸강 하구에는 오송구라는 항구가 있다.
3. 1. 기후
상하이는 쾨펜의 기후 구분상 온난 습윤 기후(Cfa)에 속한다. 사계절이 뚜렷하며 일조량과 강우량이 풍부하다. 기후는 온난 습윤하고, 봄과 가을은 비교적 짧고, 여름은 비교적 길다. 봄, 여름, 가을에 3번의 우기가 있다. 6월-9월에는 습도가 높고 기온도 높아 날씨가 매우 덥고, 최고기온이 35°C를 넘는 날도 많다. 여름과 초가을에는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아열대폭풍(태풍)의 영향을 받는 때가 있다. 겨울은 가끔 추운 날씨가 나타나기도 하나 전반적으로 온화하며, 건조하다.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날은 별로 많지 않다. 눈은 가끔 오지만 쌓일 정도로 내리는 경우는 드물다.[465][466]
연평균 기온은 17.5℃이다. 21세기 평년 기준, 3월 9일에 봄, 5월 16일에 여름, 10월 5일에 가을, 12월 4일에 겨울이 시작된다. 1월 평균 기온은 5.4℃로 가고시마현과 같은 위도임에도 불구하고 서늘하며, 시베리아에서 오는 한랭 기류 때문에 아침저녁으로는 영하로 내려가는 경우도 있다. 반대로 따뜻하고 습한 기류가 들어올 때는 낮 기온이 20°C를 넘는 경우도 있어 일교차가 크다. 강설은 연 1~2일 정도이며, 몇 년에 한 번 정도 눈이 쌓이는 경우가 있지만, 매년 눈이 쌓이는 것은 드물다. 장마는 약 20일간 지속되며, 매년 7월 10일경에 장마가 끝난다. 장마가 끝나면 고온다습한 한여름이 되어, 7월 19일부터 8월 8일까지는 일평균 기온이 30°C를 넘는 날이 계속되고, 폭염(35°C 이상)은 연평균 20일에 달한다. 평균 최저 기온도 26.2°C에 달하는 등 무더위가 심하며, 열대야가 계속되는 등 매우 덥고 습하여 생활하기 어렵다. 2024년을 예로 들면, 7월 13일부터 9월 20일까지 열대야가 계속되는 등 매우 더웠다. 7월 평균 기온 최고 기록은 32°C(2013년, 2017년), 8월 평균 기온 최고 기록은 31.9°C(2024년)이며, 일본 전국보다 덥다. 최고 기온 극값은 40.9°C(2017년 7월 21일), 최저 기온 극값은 -12.1°C(1893년 1월 13일)이다.[408]
상하이시 북부 장강 입구에는 충밍섬(崇明島), 창싱섬(長興島), 헝사섬(橫沙島)의 3개 섬과 사주가 있으며, 상하이시에서 가장 큰 섬이다. 이 외에도 남부에 진산쭈이(金山嘴), 다진산(大金山) 섬이 있다. 충밍다오에서 동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는 서산섬(佘山島)이 있다.
충밍섬은 창 강에서 쓸려온 모래가 쌓여 만들어진 섬이다. 당나라 무덕 원년(서기 618년)에는 장강에 2개의 사주가 있었는데, 그 면적이 10여 km2밖에 되지 않았다. 현재는 동서로 약 80km, 남북으로 10-15km 정도이고, 면적은 1,041km2이다. 중국에서 세 번째로 큰 섬이며 가장 큰 충적도다.
창싱섬과 헝사섬은 충밍다오 이남의 장강 입구에 위치하고, 창 강을 남북으로 나눈다. 창싱섬은 생긴 지 100년 정도 되었고, 스터우사(石頭沙), 루이펑사(瑞豊沙), 판쟈사(潘家沙), 야워사(鴨窩沙), 진다이사(金帶沙)의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40여 년에 걸쳐 천천히 만들어진 섬이다. 헝사다오는 창싱다오 동쪽에 있고, 헝사다오와 위안사다오(元沙島)로 이루어져 있다. 면적은 약 40km2 정도이다.
3. 3. 하류
황푸강과 쑤저우허가 시내를 관통한다. 황푸강은 상하이를 푸둥과 푸시로 나눈다. 뎬푸허(澱浦河)는 뎬산호와 황푸강과 연결되고, 다즈허(大治河)는 황푸강에서 장강 입구까지 연결된다. 춘신군의 명령으로 만들어진 장강의 인공 지류인 황푸강은 도시를 양분한다.[26] 도시의 역사적인 중심지는 태호와 대운하를 연결하는 수주허의 입구 근처 황푸강 서쪽 강둑(푸시)에 위치해 있었다. 중심 금융 지구인 루자주이는 황푸강 동쪽 강둑(푸둥)에 조성되었다. 상하이의 동쪽 해안을 따라 푸동국제공항(浦东国际机场) 건설로 인한 지역 습지 파괴는 인근 갯벌인 지우두안샤를 자연 보호구역으로 보호하고 확장함으로써 부분적으로 상쇄되었다.[75]
양자강 하구 남쪽에 위치하며, 하구에 있는 충밍다오(崇明島), 창싱다오, 헝사다오 등의 섬을 포함한다. 시가지는 양자강의 지류인 황푸강(黄浦江)을 거슬러 올라간 곳에 있다. 황푸강 하구에는 오송구라는 항구가 있으며, 충밍다오 등의 섬과 시 외곽으로의 항해에 이용된다.
상하이 시 중심부는 황푸장(黄浦江)을 경계로 푸둥(浦東)과 푸시(浦西) 두 부분으로 나뉜다. 푸둥은 황푸장 동쪽, 푸시는 황푸장 서쪽을 의미한다. 과거에는 "푸시의 침대 하나가 푸둥의 방 하나보다 낫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푸둥 지역의 개발이 더뎠으나, 1991년 개발 이후 크게 발전하였다.
상하이시 관할 구역 밖인 장쑤성과 안후이성에는 상하이시의 외딴 지역(飛地)이 몇 군데 존재한다. 이 지역 주민들은 상하이 호적을 소지하고 있으며, 상하이 방언을 사용한다.
상하이 매이산 야금기지 (上海梅山冶金基地): 장쑤성난징시 부근에 위치한 상하이 철강 생산 기지 중 하나로 1968년에 설립되었다.
상하이시 다툰 탄광 (上海市大屯炭鉱): 장쑤성 페이현 부근에 위치하며, 면적은 245㎢이다. 1970년에 설립되어 상하이 시내 발전소와 제철소에 석탄을 공급한다.
상하이 다펑 농장 (上海大豊農場): 장쑤성 옌청 지역에 위치한 3개의 농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면적은 307㎢이다. 1950년에 설립되었으며, 문화대혁명 시기에는 지식청년과 노동교양자(경범죄자·정치범)를 수감하기도 했다.
상하이시 쥔톈후 감옥 (上海市軍天湖監獄): 안후이성 선청시에 위치하며, 면적은 14㎢이다. 1962년에 설립되어 5년 이하의 형기를 복무하는 사람들을 수감한다.
상하이시 바이마오링 감옥 (上海市白茅嶺監獄): 안후이성 광더 지역에 위치하며, 면적은 40.5㎢이다. 1956년에 설립되어 상하이에서 형사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수감하며, 상하이에서 발견된 불발탄을 처리하기도 한다.
5. 경제
1949년 이전, 상하이는 중국의 경제무역 중심지로, 많은 외국 은행과 회사가 있었다. 중앙은행, 중국은행, 교통은행, 중국농업은행 등 주요 은행과 외국 금융기관이 모여 '동방화니가'를 형성했다. 1927년부터 1937년까지 '황금시기' 발전을 경험했으나,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을 거치며 1956년 초 모든 회사가 공동 경영으로 통합되었다.
1949년 이후, 상하이 자본가 일부는 홍콩, 대만 등으로 빠져나갔지만, 남은 일부는 경영을 계속했다. 상하이는 중국에서 경제가 가장 발달된 도시 중 하나로, 2004년 1인당 GDP는 6,661달러였으며, 10년 연속 연평균 8%를 초과하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했다. 금융업, 부동산업, 보험업, 운수업 등이 주요 산업이며, 푸둥 신구의 루자쭈이(陸家嘴)는 상하이의 신흥 금융 중심지이다. 중국 인민은행 총본부는 2005년 8월 상하이에 계열회사와 사무소를 설립했다.
상하이 공업은 국민정부 시기와 계획경제 시기에 전국 선두였으나, 개혁개방 초기 변연화 위기에 직면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후 푸둥 신구 개발 등으로 다시 성장하여 전국 총생산의 1/10을 차지한다. 주요 산업은 경공업, 방직산업, 중공업, 야금, 석유화학, 기계, 전자공업, 자동차, 항공, 우주항공 등이다.
상하이는 급성장하는 중국 경제의 "모범 사례"로 여겨지며, 금융과 혁신의 세계적 중심지이자 상업, 무역, 운송의 국가적 중심지이다.[134][135][136][137][138] 세계에서 가장 바쁜 컨테이너 항구인 상하이 항을 보유하고 있다.[139] 2020년 기준 상하이 경제 규모는 1조 달러(구매력평가 기준)로 세계 10대 대도시 경제에 속한다.[142]소매, 금융, IT, 부동산, 기계 제조, 자동차 제조는 도시 GDP의 약 절반을 차지한다.[143] 2023년 기준 상하이의 GDP는 6.638조달러이고, 1인당 GDP는 26187USD이다.[144] 2022년 상하이 거주민의 연평균 처분가능소득은 1인당 11836USD였으며, 도시 지역 직장인의 연평균 임금은 31589USD였다.[183] 이는 상하이를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 중 하나로 만들지만,[145] 2023년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 연구에 따르면 중국 본토에서 생활비가 가장 비싼 도시이기도 하다.[146]
2023년 상하이의 수출입은 1조달러에 달하며, 전국 총액의 18.5%를 차지한다.[147] 상하이는 총자산 1조 8,000억 달러로 세계에서 5번째로 부유한 도시이며,[149] 억만장자 수에서 5위를 차지했다.[150] 명목 GDP는 2035년에 1조 3,000억 달러(중국 1위)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151] 2024년 8월 기준, 세계에서 가장 많은 포춘 글로벌 500 기업이 있다.[152]
중국 경제 개혁 이후 상하이 경제
년도
1978
1990
2000
2010
2019[154]
GDP (조 위안)
0.027
0.078
0.481
1.744
3.816
1인당 GDP (천 위안)
2.85
5.91
30.31
77.28
157.14
평균 처분가능소득 (도시, 천 위안)
2.18
11.72
31.84
69.44 (총계)
평균 처분가능소득 (농촌, 천 위안)
1.67
5.57
13.75
상하이는 1930년대 동아시아에서 가장 크고 번영한 도시였으며, 1990년대에 급속한 재개발이 시작되었다.[47] 지난 20년 동안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발전하는 도시 중 하나였으며, 2007년-2008년 금융 위기 이전인 1992년부터 2008년까지 거의 매년 두 자릿수의 GDP 성장률을 기록했다.[160]
상하이 증권거래소
중국 최대의 경제 도시이다. 2014년 시내 총생산은 2조 3,560억 위안으로 베이징시를 제치고 전국 1위였다.[431] 2014년 상하이 도시권의 총생산은 5647억달러로 세계 8위의 경제 규모를 자랑한다.[432] 아시아에서는 도쿄 도시권, 서울 도시권, 오사카 도시권에 이어 4위이다.
또한, 일본경제연구센터는 2035년에는 뉴욕, 도쿄, 로스앤젤레스에 이어 세계 4위의 경제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433]
2020년 9월 조사에 따르면, 상하이는 세계 3위의 금융센터이며, 도쿄와 홍콩을 제치고 처음으로 아시아 1위에 올랐다.[434] 2015년 상하이시가 발표한 통계에 따르면, 2014년 노동자 평균 임금은 연 65,412위안(약 126만 엔)이었다.[435] 제3차 산업 중에서도 특히 금융업에 종사하는 노동자의 평균 임금이 높아, 2011년 현재 연 167,173위안(약 284만 엔)이다.
6. 문화
상하이 문화는 인근 오월 문화와 "동서양의 만남"인 해파이 문화가 결합되어 형성되었다. 오월 문화의 영향은 상하이 방언과 상하이 요리에 나타난다.[293] 해파이 문화는 20세기 초 상하이가 번영하는 항구가 되면서 유럽, 미국, 일본, 인도 등지에서 온 외국인들이 이주하면서 등장했다.[294] 이 문화는 서구 문화와 지역 오월 문화를 융합하며, 문학, 패션, 건축, 음악 및 요리에 영향을 미친다.[295] '해파이'라는 용어는 원래 상하이의 화파를 가리켰으나, 1920년 베이징 작가들이 상하이 일부 학자들의 자본주의와 서구 문화 숭배를 비판하기 위해 사용했다.[295][296] 21세기 초 상하이는 사이버펑크 문화의 새로운 영향과 영감의 원천으로 인정받고 있다.[297]
상하이 시티은행 건물은 "I love Shanghai"라는 문구를 비추는 조명 쇼를 운영한다.
상하이의 문화적 기획은 2013년 이후 크게 성장하여, 여러 새로운 박물관이 개관하였다.[298] 이는 상하이를 "탁월한 글로벌 도시"로 만들려는 2018년 개발 계획의 일환이다.[299] 상하이에는 지역적 및 국가적 중요성을 지닌 여러 박물관이 있다.[300][301]상하이 박물관은 세계에서 가장 큰 중국 유물 컬렉션 중 하나를 보유하고 있으며, 중국 고대 청동기와 도자기가 포함되어 있다.[302] 중국미술관은 옛 2010년 상하이 엑스포 중국관에 위치하며 아시아 최대 규모의 박물관 중 하나이다.[303] 상하이 자연사 박물관과 상하이 과학기술 박물관은 주목할 만한 자연사 및 과학 박물관이다. 송쩌 박물관,[304] 중국 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 개최지, 옛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305] 상하이 유대인 난민 박물관, 중앙우체국 건물에 위치한 상하이 우체국 박물관[306]과 같이 중요한 고고학 및 역사적 유적지에 소규모의 전문 박물관들이 다수 있다.
1930년대 상하이 비누 광고에서 두 여성이 골프를 치면서 상하이 스타일의 치파오를 입고 있다.
쉬자후이 천주교당(서가후 천주교당, )
상하이 원주민들은 장강 삼각주 지역에 거주하며 쑹장(松江) 주변에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원(元)나라 시대에 상하이현이 설치되었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인근 지역에서 이민이 잇따랐다. 현재 상하이 사람들의 8할 이상이 북쪽의 장쑤성과 남쪽의 저장성 출신 이민자들이다. 특히 장쑤성 양쯔강 남부와 저장성 북부의 강남 출신자가 상하이 사람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최근 일본도 장강 삼각주에 진출하여 쑤저우시(蘇州市), 우시시(無錫市)에 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부품 조달, 제품 유통 판매를 위해 항구 도시 상하이에 사무소나 자회사를 설립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 상하이에 상주하는 일본인은 약 4만 8천 명으로, 상하이에 거주하는 외국인 중 가장 많다. 상하이와 인접한 장쑤성, 저장성을 더하면 출장과 관광을 포함하여 10만 명에 가까운 일본인이 있다고 한다. 해외 최대 규모의 일본인 커뮤니티도 형성되어 있다.
상하이는 중국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지역이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서 상하이 사람들을 시기하여 싫어하는 경우가 많다는 의견이 있다. 상하이 사람들의 고정관념으로는 거만하고 오만하며 제멋대로라는 것이 있다.[426]
전쟁 전부터 많은 일본인이 거주해 온 상하이에는 2015년 현재 9,962개의 일본계 기업이 진출해 있으며, 4만 6,115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다. 해외에서 3개월 이상 장기 체류하는 일본인이 많은 도시로서, 태국의 방콕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427] 단기 체류자를 포함하면 10만 명 이상의 일본인이 상하이에 체류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일본 총영사관과 일본학교 등이 있으며, 일본 요리점을 비롯해 일본인을 위한 상점도 많다.
상하이 사람들의 성씨는 많은 순서대로 장(張), 왕(王), 진(陳), 이(李), 주(朱), 서(徐), 주(周), 심(沈), 오(吳), 육(陸)이다. 심(沈)과 육(陸)은 상하이 특유의 성씨이고, 나머지는 중국인 성씨 20위 안에 드는 성씨들이다. 인근 장쑤성(江蘇省)과 저장성(浙江省)의 성씨 순위도 상하이와 거의 같다.
표준어 (중국어)는 학교나 공식적인 자리에서 사용된다. 상하이 방언은 오어(吳語)를 대표하는 방언이다. 원래는 문자가 없었지만, 발음에 가까운 한자가 사용되었다. 상하이 방언 안에도 방언이 있으며, 푸둥(浦東)·칭푸(青浦) 지역에 존재한다. 충밍다오(崇明島)에서는 또 다른 언어가 사용되지만, 상하이 방언과 비슷하다. 상하이에는 주변 장쑤성(江蘇省)·저장성(浙江省)에서 많은 노동자가 일자리를 찾아 왔기 때문에,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거주하는 상하이역(上海駅) 주변에서는 상하이 방언과 다른 언어인 "쑤베이 방언(蘇北語)"이 사용되고 있다. 표준어(중국어)와 상하이 방언은 전혀 통하지 않지만, 표준어(중국어) 교육이 중국 전역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상하이 사람들은 표준어(중국어)를 사용할 수 있다.
상하이 방언으로 방송되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상하이 방언으로 상연되는 희곡 등이 있다. 중국에서는 상하이 방언 학습서 등도 출판되고 있다.
상하이는 중국 정부가 지정한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역사문화명성” 중 하나이며, 시내에는 “중화인민공화국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가 16곳 존재한다.
상하이에서도 최근 중국의 표준어로 여겨지는 보통화(북경어)가 통용되지만, 일상 대화에서는 여전히 상하이어(상하이 방언)가 사용되고 있으며,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에서도 상하이어 방송이 존재한다. 상하이어는 오어(오 방언)의 대표적인 것이다. 상하이어를 사용하여 공연하는 전통극인 “호극(滬劇)”이 있으며, 최근에는 젊은이들이 상하이어 랩을 부르는 사례도 보인다. 그러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유치원부터의 보통화 교육과 공공장소에서의 보통화 사용 강화로 상하이에서 태어나 자란 젊은이들조차 상하이어를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상하이시에서 일부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지만 효과를 거두지는 못하고 있다.
개혁개방 정책 도입 이후 상하이에서는 많은 대규모 문화 행사가 개최되었고, 상하이대극원, 상하이박물관, 상하이도서관 등 중국 최대 규모의 문화 시설이 많이 건설되었다. 유럽식 건축 양식의 상하이음악당의 전면 개조 후 클래식 콘서트도 많이 개최되기 시작했다. 또한 국제 예술제, 국제 영화제 등도 매년 개최되고 있다. 2010년 5월-10월에는 “더 나은 도시, 더 나은 삶(;Better City Better Life)”을 주제로 국제박람회가 개최되었다.
6. 1. 이름의 기원
“상해”(上海)라는 한자 두 글자는 문자적으로 “위에”, “꼭대기”라는 의미와 “바다”라는 뜻을 가진다. 표준발음으로 상하이는 “샹하이”이지만, 상하이 사람들의 발음으로는 “짱해”이다. 어떻게 해석해야 하느냐에 대해서 논쟁이 있지만, 지역 관공 역사는 일관되게 “바다보다 더 높은”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또 다른 발음, 특히 사투리에서는 “바다 위로 가다”는 의미를 제시하기도 한다. 상하이의 좀 더 시적인 이름은 두 문자를 바꾸기도 한다. 즉, 하이샹(해상)이다.
도시 이름에 쓰인 두 개의 한자는 上|shàng중국어/''zaon'' ("위에")와 海|hǎi중국어/''hé'' ("바다")로, 합쳐서 "바다 위에"라는 뜻이다. 이 이름이 처음 등장한 것은 11세기 송나라 시대로, 당시 이미 이 지역에 강이 합류하는 곳과 이 이름을 가진 마을이 있었다. 다른 주장으로는 도시가 2150년 전의 역사 기록에 언급되어 있으며, 고대 이름인 "호(胡)"는 이전에 어촌이었음을 시사한다는 것이다. 1280년에 "상하이"로 개명되었는데, 이는 "바다 위"를 뜻한다.[12] 이름의 의미에 대한 논쟁이 있었지만, 중국 역사학자들은 당나라 시대에 현재 상하이 지역이 해수면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땅이 문자 그대로 "바다 위에" 있었다고 결론지었다.[13]
상하이는 공식적으로 중국어로 沪|Hù중국어/''wu''로 약칭되는데, 沪渎|Hù Dú중국어/''wu-doq'' ("작살 도랑"), 즉 4세기 또는 5세기 진나라 시대 소주강 어귀가 바다로 들어가는 주요 수로였을 때의 이름에서 유래한다.[16] 이 글자는 오늘날 시에서 발행하는 모든 자동차 번호판에 표시되어 있다.[17]
申|Shēn중국어/''sén'' 또는 申城|Shēnchéng중국어/''sén-zen'' ("신(申) 도시")는 기원전 3세기 초나라의 재상이자 귀족이었던 춘신군의 영지가 현재 상하이를 포함하고 있었던 데서 유래한 초기 명칭이다.[16] 상하이를 연고로 하는 스포츠 팀과 신문들은 종종 이름에 "신(申)"을 사용하는데, 예를 들어 상하이 선화(Shanghai Shenhua)와 ''신보(Shen Bao)''가 있다.
华亭|Huátíng중국어/''gho-din''은 상하이의 또 다른 초기 명칭이다. 751년 중국 당나라 중기, 오군(吳郡) 태수였던 조주진(趙居珍)이 현재의 송장(松江)에 화정현(華亭縣)을 설치했는데, 이는 현재 상하이 지역 내 최초의 현급 행정구역이었다.[18]
魔都|Módū중국어/''mó-tu'' ("마(魔)도(都)", "마성의 도시")는 상하이의 현대적인 별칭으로 젊은 세대 사이에서 널리 알려져 있다.[19] 이 명칭은 일본 소설가 무라마쓰 쇼후의 1924년 소설 ''마토(魔都)''에서 처음 언급되었는데, 이 소설에서는 상하이를 빛과 어둠이 공존하는 이중적인 도시로 묘사하고 있다.[20]
6. 2. 건축 양식
상하이는 다양한 건축 양식의 빌딩과 구조물들이 많은데, 황푸강변의 와이탄에는 20세기 초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진 HSBC 빌딩부터 아르데코 양식의 싸쑨하우스(현 피스호텔(和平饭店))까지 다양한 건축 양식을 볼 수 있다.[88] 재개발 속에서도 강남(江南) 양식의 전통 정원인 예원(豫園)을 보존하고 있다.[89]
상하이에는 현대적인 건물뿐 아니라 전통적인 건물도 남아있다
최근에는 상하이 박물관, 상하이 대극장, 동방예술센터와 같이 독특하고 기이한 마천루들이 건설되었다. 동방명주탑은 중국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 중 하나이며, 그 근처의 상하이 세계금융센터는 중국 본토에서 가장 높은 고층 건물이자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건물이다.
1920년대와 1930년대 건설 붐으로 상하이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아르데코 건물을 보유하게 되었다.[88] 헝가리-슬로바키아 건축가 라슬로 후덱(László Hudec)은 파크호텔, 그랜드 시네마, 파라마운트 등 주목할 만한 아르데코 건축물을 설계했다.[90][91] 클레멘트 팔머와 아서 터너는 피스호텔, 메트로폴 호텔, 브로드웨이 맨션을, 오스트리아 건축가 C. H. 곤다(C.H. Gonda)는 캐피톨 극장을 설계했다.[92]
석고문(石庫門)(石库门|돌 저장문중국어) 주택은 서양식 테라스 하우스나 타운하우스와 유사하지만, 높고 무거운 벽돌 담과 아치형 입구가 특징이다.[97] 롱탕(弄堂)(弄堂중국어)이라는 골목에 연결된 석고문은 서양 건축과 전통적인 강남 중국 건축 요소가 혼합된 문화적 산물이다.[95]
소련 신고전주의 건축이나 스탈린주의 건축을 특징으로 하는 건물도 있는데, 대표적인 예로 상하이 전람센터가 있다.[99]
상하이의 마천루는 루자쭈이를 중심으로 발달했으며, 421m 높이의 진마오타워, 492m 높이의 상하이 세계금융센터, 632m 높이의 상하이 타워가 대표적이다.[101] 상하이 타워는 중국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며,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건물이다.[101] 미래 지향적인 모습의 동방명주탑은 468m 높이로 루자쭈이 북쪽 끝에 위치한다.[104]
세계 각지가 모였던 역사 때문에 상하이는 종교적인 건물과 시설들이 도시 각지에 흩어져 있다. 상하이에서의 도교는 몇몇의 사원을 가지고 있고 상하이도교협회에 의해 운영되는 가장 큰 사원은 상하이 심장부에 있는, 도시의 보호자로서 여겨지는 3명의 역사적 인물을 모시는 신전이다.
유교사원은 공자를 모시는 예원 근처의 문묘(文庙|원먀오중국어)를 비롯하여 관우를 모시는 사원이 많다.
상하이의 불교는 오래전부터 존재했다. 롱화쓰(용화사, 龍華寺|룽화쓰중국어)은 상하이에서 가장 큰 사원이고 삼국시대에 창립되었다. 상하이 도심지에 위치한 징안쓰 또한 삼국시대에 처음 지어졌다. 다른 주요사원은 사원 안에 옥으로 조각된 큰 부다상의 이름을 딴 위포쓰(옥보선사, 玉佛禪寺|위포챤쓰중국어)이다. 상하이에는 수세기동안 꽤 규모 있는 이슬람 인구들이 거주했다. 그들은 소다원 사원, 송쟝(송강, 松江|쑹장중국어)사원 등 많은 이슬람 사원을 섬겨왔다.
상하이는 또한 기독교의 주요성지이다. 다양한 종파가 속한 교회 또한 상하이에서 창건되었고 주요 집회가 이루어지고 있다. 로마 가톨릭교회들 사이에 셩이나주에주지아오쭤탕(聖依納爵主教座堂|셩이나주에주지아오쭤탕중국어) 대성당이 가장 크고 쉬쌴 대성당은 성지순례를 가는 교회이다. 다른 주목할 만한 교회는 동찌아두 대성당이다. 동방 정교회 교회와 다양한 유대교 회당이 있다. 유대교 정통파 형식의 회당 건물은 상하이의 역사를 증명해준다.
7. 인구
연도
인구
비고
1954년 [467]
6,204,400
1964년 [467]
10,816,500
1982년 [467]
11,859,700
1990년 [467]
13,341,900
2000년 [467]
16,407,700
2010년 [467]
23,019,200
2015년 [468]
24,152,700
2016년 [468]
24,197,000
2017년 [468]
24,183,300
2018년 [469]
24,237,800
2019년 [470]
24,281,400
인구 규모는 행정 구역 변경에 따라 영향을 받을 수 있음.
2012년 6월 말 기준 상하이시 상주인구는 2,433만 4천 명으로, 상하이시 호적 인구는 1,451만 1천 명, 외지 인구는 982만 3천 명이었다. 상하이시 인민정치협상회의 통계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상하이시 인구는 평균 약 66만 명씩 증가했다.
2012년 말 기준 남성 평균 수명은 80.18세, 여성 평균 수명은 84.67세였으며, 호적 인구 평균 수명은 82.41세였다. 2012년 60세 이상 고령자 인구 비율은 17%였고, 100세 이상 노인은 1,251명(최고령자 114세)이었다. 현재 상하이시 전체 가구의 61.06%인 305만 가구가 외동자녀 가정이다. 고령화와 저출산은 시 정부의 큰 과제이다. 최근 중국 우수 인재에게 상하이시 호적을 발급하거나(신(新)상하이인), 상하이시 거주민에게 두 자녀 출산을 허용하는 등 인구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2016년 1월 1일부터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전면적인 두 자녀 정책”이 공식 시행되었다.[423] 2016년 개정된 「상하이시 인구와 계획생육 조례」에 따르면, 부부 중 한 명 이상이 상하이시 호적을 소지한 경우 상하이시 정책이 적용된다. 법률에 따라 결혼한 부부에게는 국가에서 정한 결혼 휴가 외 7일이 추가로 부여된다. 아이를 낳은 여성에게는 국가에서 정한 출산휴가 외 30일의 육아휴가가 추가되며, 남성에게는 10일의 배우자 출산 휴가가 부여되고, 휴가 기간 중 임금은 전액 지급된다.
상하이시 호적 소지 시민은 2016년 1월 1일 이후 출산한 경우 상하이시 계획생육 가정 특별 보조 제도가 적용되지 않는다. 2015년 12월 31일 이전에 출산하고 해당 제도 조건을 충족하는 시민은 계속 보조금을 지급받는다.[424] “전면적인 두 자녀 정책”은 특수한 상황을 제외하고 첫 출산이 다태 출산인 경우 그 이후의 출산은 허용하지 않는다.[425]
전쟁 전부터 많은 일본인이 거주해 온 상하이에는 2015년 현재 9,962개의 일본계 기업이 진출해 있으며, 4만 6,115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다. 이는 해외에서 3개월 이상 장기 체류하는 일본인이 많은 도시 중 태국방콕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수치다.[427] 단기 체류자를 포함하면 10만 명 이상의 일본인이 상하이에 체류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본 총영사관, 일본학교 등이 있으며, 일본 요리점을 비롯한 일본인을 위한 상점도 많다.
중국은 인구 문제로 농촌 및 중소 도시 사람들이 자유롭게 대도시로 이주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경제 발전과 함께 많은 농민공들이 중국 각지에서 상하이로 와서 일하고 있다. 그 수는 약 660만 명 이상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확한 수치 파악은 어렵다. 농민공들의 출신지는 대부분 표준어를 사용하는 쓰촨성, 장쑤성(소북 지역), 안후이성, 동북 지방이다. 이들은 상하이 건설에 기여하는 동시에 사회 문제와 치안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공안 기관 통계에 따르면, 상하이시 강도, 살인, 폭행 등 악성 범죄의 75% 이상이 시외 거주 중국인에 의해 발생한다.[428]
상하이에서는 베이징시와 함께 중국 대륙에서 가장 엄격한 호구 정책(户籍政策)이 시행되고 있다. 대도시 호구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여러 특권이 있는데, 예를 들어 부모가 상하이 호구를 가졌다면 자녀 출생 시 구 사회보험국으로부터 1.5억위안에서 수십만 위안에 이르는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호구를 가진 자녀는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에 우선 진학할 수 있다. 반면, 상하이 호구가 없는 사람은 상하이 대학 입시에 참여할 수 없다.[429] 일부 악덕 기업은 상하이 호구가 없는 직원에게 주택 적립금과 연금을 지급하지 않기도 한다. 이러한 호구 문제 관련 분쟁은 끊이지 않고 있다.
중국은 도시와 농촌 간 격차가 심해 일본, 미국 등 외국 관광 비자 발급 시 상하이, 베이징 등 연해 경제 발전 지역 호구 소지자를 우대한다.[430]
8. 스포츠
상하이에서 축구는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이며, 슈퍼리그에서 활약하는 상하이 선화[343]와 상하이 포트[344]가 있다. 과거에는 상하이 선신도 있었지만, 2020년에 재정난으로 해산했다. 상하이 하이강은 푸둥 축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상하이 선화는 상하이 홍커우 축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라리가(스페인 리그)의 에스파뇰에서 2019년부터 2022년까지 활약한 우 레이는 상하이 하이강의 대표적인 선수이기도 하다.
취중 삼림 스포츠 시티 경기장(Qizhong Forest Sports City Arena)에서 열린 상하이 마스터스
상하이의 최상위 농구팀인 중국 농구 협회(CBA) 소속 상하이 샤크스는 야오 밍이 NBA에 진출하기 전 그를 육성했다.[345][346] 상하이의 야구팀인 상하이 골든 이글스는 중국 야구 리그에서 활동한다.[347]
상하이는 농구 선수 야오 밍[346], 110m 허들 선수 유 상[349], 탁구 선수 왕리친[350], 배드민턴 선수 왕이한[351] 등 많은 저명한 중국 프로 선수들의 고향이다.
상하이 크리켓 클럽은 1858년 영국 해군 장교팀과 상하이 11팀 간의 최초로 기록된 크리켓 경기가 치러진 해에 설립되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후 45년간의 휴지기를 거친 후, 1994년 상하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에 의해 재건되었으며, 현재 300명이 넘는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상하이 크리켓팀은 1866년부터 1948년까지 다양한 국제 경기에 참가했다. 중국 내 다른 지역에서는 크리켓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기간 동안 사실상 중국 크리켓 국가대표팀 역할을 했다.[348]
2023년 상하이 선수들은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총 19개의 금메달, 최상위 국가 대회에서 38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352]
상하이는 여러 국제 스포츠 행사의 개최지이다. 2004년부터 포뮬러 원 월드 챔피언십의 한 경기인 중국 그랑프리를 개최해왔다. 이 경주는 매년 상하이 국제 서킷에서 열린다.[353]2019년 4월 14일에는 1000번째 포뮬러 원 경주인 2019년 중국 그랑프리를 개최했다. 2010년에는 상하이가 푸동의 도심 서킷에서 열리는 독일 투어링카 마스터스의 개최 도시가 되었다. 2012년에는 FIA 월드 엔듀런스 챔피언십의 첫 시즌부터 상하이 4시간 레이스를 개최하기 시작했다. 이 도시는 또한 ATP 월드 투어 마스터스 1000의 일부인 상하이 마스터스 테니스 토너먼트와 BMW 마스터스, WGC-HSBC 챔피언스를 포함한 골프 토너먼트를 개최한다.[354]
2017년 9월 21일에는 2017-18 NHL 시즌에 대한 팬들의 관심을 높이기 위해 NHL 아이스하키 친선 경기를 개최했다.[355]
상하이는 최고 수준의 프로 스포츠 행사를 위한 글로벌 허브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있다. 2023년 상하이는 총 118개의 스포츠 행사를 개최하여 19만 명의 참가자와 129만 명의 관중을 유치했으며, 3713억위안(510.83억달러)의 소비를 창출했다.[356]
2024년에는 약 175개의 국내 및 국제 토너먼트를 개최할 예정이다.[357] 예정된 주요 행사로는 올림픽 예선 시리즈, 포뮬러 1 중국 그랑프리, 2024 FIA 포뮬러 E 월드 챔피언십(상하이), 2024 양궁 월드컵, WDSF 그랜드 슬램 결승전, 2024 ISU 4대륙 피겨스케이팅 선수권 대회 등이 있다.[358]
9. 교통
베이징과 상하이 주변 지역을 6개 이상의 고속도로가 연결하며, 상하이에는 도시 중심과 18개 도시의 고속도로에 6개의 통행료 없는 고속도로가 있다. 상하이 도심과 충밍다오를 잇는 고속도로 건설 계획도 있다. 푸시와 푸둥을 잇는 터널과 다리도 있다.
1988년 10월 31일 개통한 호가고속도로(滬嘉高速道路)는 중국 최초의 고속도로이다. A20(외환선(外環線)) 이내의 고속도로, A1(영빈대도(迎賓大道)), 대형 교량, 터널 등은 무료이지만, 시간대에 따라 상하이 이외의 번호판을 단 자동차의 유입이 제한된다. 2008년 11월부터 장강 삼각주 지역 ETC의 전면 도입에 따른 고속도로 통행료 시스템이 전자화되었다. 시내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으며, 교통 위반 차량은 상하이시 경계의 고속도로 요금소에서 누적된 벌금을 부과받는다.
자동차 소유는 한정적으로 발행되는 번호판을 경매를 통해 취득해야 한다. 2018년에는 번호판 낙찰가가 9만 위안을 넘기도 했으며, 시외 번호판에 대한 규제도 강화되고 있다.[437][438]
양산항의 모습
상하이항은 중국 최대 항만이자 컨테이너 처리량 세계 1위이다. 황푸강 하항에서 시작하여 장강 연안 와이가오차오 지역을 거쳐 항저우만의 양산 심수항으로 중심을 옮겼다. 양산 심수항은 상하이 남쪽 32km 해상에 위치하며, 동해대교로 본토와 연결되어 있다.[285] 2018년 연간 TEU 운송량은 였다.[287]
상하이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항공 운송 허브 중 하나이다.[280]상하이 푸둥 국제공항과 상하이 훙차오 국제공항 두 개의 상업 공항이 있으며, 푸둥 국제공항은 주로 국제선을, 훙차오 국제공항은 주로 국내선과 일부 단거리 국제선을 운항한다.
; 해상 항로
중일국제페리를 통해 고베항과 오사카항을 상하이와 잇는 페리 「신감진」과 RO-RO선 「소주호」가 운항 중이다.
과거 일화연락선으로 나가사키로 향하는 항로가 존재했으며, 1994년에 재운항을 시작했으나 1997년부터 운휴 상태이다. 2012년 2월에 HTB 크루즈의 「오션로즈」가 운항을 시작했으나, 이용자 감소 및 일중 관계 악화로 인해 같은 해 10월부터 운휴 상태이다.
9. 1. 대중교통
1990년대 이전에는 자전거가 상하이에서 가장 흔한 교통 수단이었지만, 시 정부가 도시 주요 도로에서 자전거를 금지하면서 혼잡이 완화되었다. 그러나 많은 도로에는 여전히 자전거 이동 도로가 있으며, 교차로는 안전한 도로 주행을 돕는 교통 협력가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 중국의 많은 검토자들은 자전거 주행에 찬성하며, 시 정부는 향후 몇 년 안에 180km의 자전거 주행 도로를 추가할 계획이다.
상하이에서는 택시가 매우 많으며, 시장 경쟁을 통해 택시 요금이 일반 거주자들에게 적정한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다.
소득 증가로 인해 최근 상하이의 개인 자동차 소유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자동차 수는 제한되어 있지만, 사용 가능한 자동차 번호판은 경매를 통해 구매할 수 있다.
상하이시의 주요 교통 수단은 버스, 자전거, 선박이었으나, 2000년대부터는 무궤도전차, 지하철망, 택시, 전동 스쿠터, 고속도로망을 활용한 자동차 등이 주요 교통 수단이 되었다. 철도는 국철 이외에는 상하이 지하철이 주도하고 있다.
9. 2. 철도
상하이는 중국 동부의 철도 중심지이며 상하이 철로국(上海鉄路局)의 소재지이다. 1876년 7월 3일에 개통한 우송철도(呉淞鉄道)는 중국 최초의 철도이며, 한때 폐지되었다가 송호철도(淞滬鉄道)로 재건되었다. 북쪽의 징후선(京滬線)과 남쪽의 호곤선(滬昆線)의 시발역이다. 2007년 1월 28일부터 중국 고속철도 CRH2형 전차의 영업 운행을 시작했다.
: 상하이 지하철 1호선(上海軌道交通1号線)은 1995년에 개통되어 이후 지속적으로 확장되었다. 상하이 만국박람회에 맞춰 대대적인 연장 공사가 이루어졌으며, 최근에는 칭푸(青浦), 난후이(南匯) 등 교외 지역까지 개통이 이어지고 있다. 2023년 10월 현재 총 연장 길이는 830km에 달하며, 2030년경에는 23개 노선, 총 연장 1000km 이상에 달할 예정이다.
; 상하이 트랜스래피드(上海トランスラピッド) ()
: 푸둥 국제공항과 상하이 지하철 2호선(上海軌道交通2号線) 룽양루역(竜陽路駅) 사이에 실용형 리니어 모터카가 개통되어 세계 최초로 초고속 운행을 하고 있다. 세계에서 세 번째로 개통된 자기부상식 철도의 상설 실용 노선이다. 항저우시까지 연장 계획을 검토 중이다.
: 베이징난역(北京南駅)과 상하이훙차오역 사이에 2011년 6월 30일에 개통되었다.[439]
상하이 당국과 상해 고속철도 개발 회사의 협력으로 독일 트란스 라피드는 2002년 푸둥(浦東)의 상하이 룽양 지하철역에서 푸둥 국제공항을 잇는 고속철도가 구상되었고 2003년에 시행되었다. 30km의 여행이 최대 431km/h의 속도로 최대 7분 21초만에 도착한다.
상하이에 있는 두 개의 철도 교차점은 난징을 지나는 징후 철도와 상하이-항저우 철도이다. 상하이에는 상하이역, 상하이 남역, 상하이 서역, 상하이 홍차오역 등 4개의 주요 철도역이 있다.[270] 이 모든 역은 지하철 네트워크와 연결되어 있으며 중국의 철도 네트워크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현재 상하이에는 약 20개의 철도 노선이 운행되고 있으며, 이는 상하이 시민들의 생활을 크게 편리하게 해주고 있다.
1876년에 건설된 우쑹 철도는 상하이의 최초 철도이자 중국에서 처음으로 운영된 철도였다.[271] 1909년에는 상하이-난징 철도와 상하이-항저우 철도가 운행을 시작했다.[272][273] 2019년 10월 기준으로, 이 두 철도는 각각 중국의 주요 철도인 베이징-상하이 철도와 상하이-쿤밍 철도에 통합되었다.[274]
상하이에는 베이징-상하이 고속철도( 상하이-우한-청두 여객 철도와 중복), 상하이-난징 시내 철도, 상하이-쿤밍 고속철도, 상하이-난퉁 철도 등 4개의 고속철도(HSR)가 있다. 상하이-쑤저우-후저우 고속철도 1개 노선은 건설 중이다.[275][276]
상하이에는 또한 상하이 대도시권 시내 철도 4개 노선이 있다. 중국철도가 운영하는 푸둥 철도(현재 여객 운행 중단)와 진산 철도, 그리고 상하이 지하철이 운영하는 상하이 지하철 16호선과 상하이 지하철 17호선이 있다.[277][278] 2022년 1월 기준으로, 충밍선, 지아민선, 상하이 공항 연결선 및 량강 급행선 등 4개의 노선이 건설 중이다.[278][279]
상하이는 아시아에서 가장 큰 항공 운송 허브 중 하나이다.[280] 이 도시에는 상하이 푸둥 국제공항과 상하이 훙차오 국제공항 두 개의 상업 공항이 있다.[281]상하이 푸둥 국제공항은 주로 국제선을, 상하이 훙차오 국제공항은 주로 국내선과 일부 단거리 국제선을 운항한다. 2018년 푸둥 국제공항은 여객 수송량 기준 세계 9위(7,400만 명), 화물 수송량 기준 세계 3위(380만 톤)를 기록했다.[282][283] 같은 해 상하이 훙차오 국제공항은 여객 수송량 기준 세계 19위(4,360만 명)를 기록했다.[282]
상하이는 중국 최대의 항만일 뿐만 아니라, 컨테이너 처리량에서는 싱가포르와 홍콩을 능가하여 세계 1위이다.[284]
황푸강의 하항으로 시작된 상하이는 장강 연안의 와이가오차오 지역으로 중심을 옮겼고, 이후 처리량 증가와 컨테이너 선박의 대형화를 예상하여 외해에 면한 항저우만 위에 세계 허브 항만이 될 부두와 컨테이너 터미널을 건설했다. 이 신항은 2005년 말에 양산 심수항으로 개항했다.[285] 양산 심수항은 상하이 남쪽 32km 해상에 위치하며, 본토와는 동해대교로 연결되어 있다.
2010년 싱가포르 항을 제치고[286] 상하이 항구는 세계에서 가장 바쁜 컨테이너 항만이 되었으며, 2018년 연간 TEU 운송량은 였다.[287] 화물 외에도 상하이 항구는 2019년에 259척의 크루즈선과 189만 명의 승객을 처리했다.[154]
상하이는 중국 해안에서 남쪽으로 인도 남단을 거쳐 몸바사까지, 거기서 지중해로, 지중해에서 아드리아해 상류 지역으로, 그리고 중부 및 동부 유럽과 철도로 연결된 트리에스테의 북부 이탈리아 허브까지 이어지는 21세기 해상 실크로드의 일부이다.[288][289][290][291][292]
10. 관광 명소
'''관광 명소'''
인민광장 지역
역사 건축물군
근대건축물
현대건축물
종교건축물
상하이에는 1920년대부터 많은 서양식 건축물이 남아 있다. 특히 황푸강을 따라 있는 와이탄은 상하이 해관, 홍콩상하이은행 등이 늘어서 유럽풍의 정취를 느끼게 하는 건축물 군으로 알려져 있으며, 상하이의 상징이기도 하다. 시내에도 많은 서양식 건축물이 산재해 있다.
상하이 시내에는 1920년대 일반 시민들의 공동주택인 "석고문"이라는 건축 양식도 남아 있으며, 현재 도시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귀중한 문화유산으로서 많은 건물이 부티크나 레스토랑으로 개조되어 보존되고 있다. 시내 중심부 화이하이 중루 근처의 상하이 신천지가 그 한 예이다.
한편 와이탄의 맞은편인 푸둥 신구에는 1994년 완공된 동방명주탑을 시작으로 새로운 마천루들이 늘어서 있으며, 그 이국적인 경관과 발전상은 눈부시다. 2008년에는 세계 2위 높이의 고층 빌딩인 상하이 세계금융센터(별칭 "상하이 힐즈", 지상 492m, 104층)가 완공되어, 지상 474m 높이에 있는 100층 전망대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가 되었다. 2014년에는 높이 632m의 상하이 타워가 완공되었다.
상하이는 국제적인 연구 개발 중심지이며, 2024년 기준으로 네이처 인덱스가 추적한 과학 연구 성과를 기준으로 전 세계에서 2위(베이징 다음)를 차지했다.[211] 또한 중국 고등교육의 주요 중심지이기도 하다. 2023년 기준으로 상하이에는 68개의 대학과 대학이 있으며, 고등 교육 기관이 가장 많은 도시로서 동중국 지역에서 1위를 차지했다.[212]
상하이에는 많은 고등 교육 기관이 있다.[213][214] 147개의 더블 퍼스트 클래스 대학에 포함된 대학이 15개이며, 중국 도시 중 베이징 다음으로 전국 2위를 차지했다. 세계 대학 순위에 등장하는 중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대학 중 다수가 상하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여기에는 푸단대학교, 상하이 자오퉁 대학교, 퉁지대학교, 화둥사범대학교, 상하이 대학교, 화둥과학기술대학교, 동화대학교, 상하이 금융경제대학교, 상하이테크 대학교, 상하이 국제연구대학교, 상하이 과학기술대학교, 상하이 전력대학교, 상하이 사범대학교, 상하이 해양대학교, 제2군의대, 상하이 중의약대학교, 상하이 해양대학교, 상하이 공정과학대학교, 상하이 기술대학교, 상하이 음악원, 상하이 체육대학교 등이 있다.[214][215][216] 이들 대학 중 일부는 90년대 이후 중국 정부가 세계적인 대학을 육성하기 위해 "985 대학" 또는 "211 대학"으로 선정되었다.[217][218]
상하이는 중국의 엘리트 대학 연합체인 C9 리그의 두 회원 대학(푸단대학교 및 상하이 자오퉁 대학교)의 소재지이며, 이들 두 대학은 포괄적이고 선도적인 교육을 제공한다.[219] 이 두 대학은 아시아 상위 10위권[220][221]에 지속적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으며, QS 세계 대학 순위, 상하이 순위, 타임즈 고등교육 세계 대학 순위, 미국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 베스트 글로벌 대학 순위와 같은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대학 순위에 따르면 세계 상위 100위권 연구 중심 대학에 속한다.[222][223][224][214]
"985 공정"의 다른 두 회원 대학인 퉁지대학교와 화둥사범대학교도 상하이에 위치해 있으며, 국제적으로도 권위 있는 중국 대학으로 여겨진다. 이 도시는 또한 체육 전문 대학 중 중국에서 항상 최고 순위를 기록하는 상하이 체육대학교의 본거지이기도 하다.[228]
이 도시에는 상하이 대학교-시드니 기술대학교 경영대학원(1994년 설립), 미시간 대학교-상하이 자오퉁 대학교 공동연구소(2006년 설립), 그리고 중국-미국 합작 대학인 뉴욕대학교 상하이(2012년 설립)와 같은 많은 中外合作办学|중외합작판학중국어이 있다.[230][231] 2013년 상하이시와 중국과학원은 푸둥의 장장 하이테크 파크에 상하이테크 대학교를 설립했다.[232] 상하이는 또한 간부학교인 푸둥 중국 최고 경영자 아카데미와 중국 유럽 국제경영대학원의 소재지이기도 하다. 시 정부의 교육 기관은 상하이 시 교육위원회이다.
이 도시는 또한 상하이 사회과학원의 본거지이며, 인문학과 사회과학 분야에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싱크탱크이다. 중국 사회과학원 다음으로 베이징을 제외한 가장 큰 싱크탱크이다.[233]
2023년 말 기준으로 이 도시에는 대학원 교육 기관 49개, 고등 교육 기관 68개, 중등 학교 900개, 직업학교 70개, 초등학교 664개, 특수 교육학교 31개가 있다.[154] 상하이에서는 5년의 초등 교육과 4년의 중학교 교육을 포함하는 9년의 의무 교육이 무료이며, 총 등록률은 99.9%를 넘는다.[154] 상하이의 의무 교육 시스템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2009년과 2012년에 상하이의 15세 학생들은 국제학업성취도평가에서 수학, 읽기, 과학 모든 과목에서 1위를 차지했다.[234][235] 3년 연속 고등학교 교육은 유료이며, 고등학교 입학 시험(''중카오'')를 선발 과정으로 사용하며, 총 등록률은 98%이다.[236] 모든 고등학교 중에서 상하이 고등학교, 화동사범대학교 제2부속고등학교, 푸단대학교 부속고등학교, 상하이 자오퉁 대학교 부속고등학교의 네 곳은 상하이의 "4대 명문고"(四校중국어)로 불린다.[237] 상하이의 대학수학능력시험(''가오카오'')는 "3+3" 시스템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든 일반 고등학생은 필수 과목 3개(중국어, 영어, 수학)와 선택 과목 6개(물리, 화학, 생물, 역사, 지리, 정치) 중 3개를 선택하여 공부한다.[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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