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K 마리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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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NK 마리보르는 슬로베니아의 축구 클럽으로, 1960년에 창단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시절에는 1부 리그에서 활동했으며, 슬로베니아 독립 후 1부 리그에서 16번 우승하며 최다 우승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슬로베니아 컵에서도 9번 우승했으며, UEFA 챔피언스 리그 조별 리그에 세 차례 진출했다. 류드스키 보트 경기장을 홈 구장으로 사용하며, Viole Maribor라는 서포터 그룹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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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K 마리보르 - [스포츠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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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공식 클럽명 | 노고메트니 클럽 마리보르 브라니크 |
별칭 | 비욜리차스티 (보라색) 비욜리체 (제비꽃) 슈타예르스키 폰오스 (슈타예르스카의 자부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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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단 | 1960년 12월 12일 |
홈구장 | 류드스키 브르트 |
수용 인원 | 11,709명 |
회장 | 드라고 초타르 |
감독 | 보슈티안 체사르 |
리그 | 슬로베니아 프르바리가 |
2023-24 시즌 순위 | 2위 (10팀 중) |
웹사이트 | 공식 웹사이트 |
유니폼 정보 | |
홈 유니폼 | 보라색 |
원정 유니폼 | 흰색 |
2. 역사
NK 마리보르는 유고슬라비아 시대인 1967-68 시즌부터 1971-72 시즌까지 5시즌 동안 프르바 리가(1부 리그)에 소속되었다.[162] 1991-92 시즌 슬로베니아 국내 리그가 시작된 후 첫 해부터 1.SNL(1부 리그)에 소속되었고, 슬로베니아 컵 초대 챔피언이 되었다. 1996-97 시즌에 리그 첫 우승을 차지한 이후 7시즌 연속으로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2007년 즈라트코 자호비치가 스포츠 디렉터(SD)로 취임했고,[163] 2008년 6년 만에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2010-11 시즌 UEFA 유로파 리그 예선 플레이오프에서 팔레르모(이탈리아)에 패했지만, 요십 일리치치와 알민 바치노비치를 팔레르모에 매각하여 큰 수익을 얻었다.[163] 2011-12 시즌 UEFA 유로파 리그에서는 레인저스 FC(스코틀랜드)를 꺾고 본선에 진출했다. 2013-14 시즌에는 슬로베니아 팀 최초로 유로파 리그 결선 토너먼트(32강)에 진출했다.[164]
2018-19 시즌, 다르코 밀라니치 감독 아래 통산 15번째 리그 우승을 달성했으나,[165] 이후 성적 부진으로 2020년 3월 자호비치와 밀라니치는 사임했다.[166] 자호비치가 스포츠 디렉터로 재임하는 동안 마리보르는 총 8번의 리그 우승과 2번의 UEFA 챔피언스 리그 본선 진출을 이루었다.[167]
2. 1. 창단 및 초기 (1960-1967)
NK 마리보르는 몇 달 전에 해산된 NK 브라니크 마리보르의 관계자와 선수들에 의해 1960년 12월 12일에 창단되었다.[2][3] 스레츠코 코렌(Srečko Koren)은 초대 회장, 안드리야 프플란더(Andrija Pflander)는 초대 감독으로 임명되었다.[2] 1961년 2월 5일, 구단은 친선 경기에서 코비나르를 상대로 첫 경기를 치렀으며, 스테판 톨리치(Stefan Tolič)의 두 골에 힘입어 2-1로 승리했다.[4][5] 마리보르는 창단 첫 시즌에 슬로베니아 공화국 축구 리그 (유고슬라비아 3부 리그)에서 우승하여 플레이오프를 통해 1961-62 유고슬라비아 세컨드 리그에 진출했다.[1] 같은 해, 구단은 새로 건설된 류드스키 바르트 경기장으로 이전했다.
마리보르는 2부 리그에서 6시즌을 보낸 후, 1966-67 시즌에 리그에서 우승하여 최고 리그인 유고슬라비아 퍼스트 리그로 승격되었다.[6]
2. 2.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 시절 (1967-1972)
마리보르는 유고슬라비아 최상위 리그에서 바르다르를 상대로 스코페에서 첫 경기를 치렀으며, 마라스는 이 1-1 무승부에서 마리보르의 유일한 골을 기록했다.[7] 1967년 8월, 마리보르는 홈에서 프로레테르 즈레냐닌을 3-0으로 꺾고 첫 승리를 거두었다.[7] 같은 시즌, 슬로베니아의 두 클럽이 참여하는 유고슬라비아 최상위 리그 최초의 경기가 열렸는데, 마리보르는 라이벌 올림피야와 류블랴나에서 13,000명의 관중 앞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했다.[7][8] 이 기간 동안 두 팀 간의 경기는 많은 관중을 끌어모았으며, 때로는 20,000명에 달하기도 했다.[9] 마리보르는 첫 최상위 리그 시즌을 16개 팀 중 12위로 마쳤다.[10]
1969–70 시즌에서 마리보르는 18개 클럽 중 10위로 마감했는데, 이는 유고슬라비아 축구에서 그들의 최고 순위였다.[11] 1971–72 시즌은 최상위 리그에서의 마지막 시즌이었는데, 팀은 34경기에서 단 20점만을 얻어 최하위를 기록했다.[12] 믈라덴 크란츠는 유고슬라비아 최상위 리그 5시즌 동안 마리보르의 최고 득점자였으며, 총 54골을 기록하여 디나모 자그레브로 이적했다.[13] 유고슬라비아 최상위 리그에서 5년간 활동하는 동안, 클럽은 총 166번의 리그 경기를 치렀고 40번의 승리, 57번의 무승부, 69번의 패배를 기록했다.[7]
2. 3. 암흑기와 뇌물 스캔들 (1972-1991)
1972-73 시즌에 마리보르는 2부 리그에서 자그레브[14]에 이어 2위로 시즌을 마감하여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 승격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15] 1차 예선에서 몬테네그로의 부두치노스트를 승부차기[1] 끝에 이기고 결승에서 프로레테르와 맞붙었다. 1973년 7월 8일 홈에서 열린 1차전은 마리보르 역사상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 중 하나로, 20,000명의 관중이 운집하여 클럽 홈 관중 기록을 세웠다.[1] 경기 시작 3시간 전에 이미 15,000명이 자리를 잡았고, 마리보르는 3-1로 승리했다.[16] 그러나 2차전에서 프로레테르가 3-0으로 승리하여 승격에 실패했다.[1] 프로레테르가 1-0으로 앞선 상황에서 요시프 라지치가 23분에 동점골을 넣었지만 심판은 인정하지 않았고, 이후 텔레비전 중계에서 공이 골라인을 넘은 것으로 확인되었다.[1]1973년부터 1991년까지는 클럽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기 중 하나였다. 1973-74 시즌에 2부 리그 상위권에 실패하여 13위로 마감했다.[17] 1974-75 시즌에는 14년 만에 처음으로 3부 리그인 슬로베니아 공화국 리그로 강등되었으나, 1975-76 시즌에 15점 차로 리그 1위를 차지하며 즉시 2부 리그로 복귀했다.[18] 1978-79 시즌에는 보스니아의 첼리크 제니차[19]에 6점 뒤진 2부 리그 2위를 차지하며 1부 리그 복귀를 눈앞에 두었지만, 승격 플레이오프에서 패했다.
1980-81 시즌 종료 후, 마리보르는 유고슬라비아 2부 리그 강등을 피했지만, 뇌물 스캔들이 터져 유고슬라비아 축구 협회 징계 위원회 결정에 따라 강등되었다.[20][21] 클럽은 임원과 상대 팀에게 뇌물을 주는 비밀 자금을 운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자금은 1968년에 폐지되었지만 1976년에 다시 만들어졌다.[20] 이 스캔들과 강등 이후, 마리보르는 1991년 슬로베니아 독립 때까지 유고슬라비아 2부 리그와 3부 리그를 오갔다.
2. 4. 슬로베니아 독립 이후의 영광 (1991-2004)
1991년 슬로베니아 독립 이후, NK 마리보르는 새롭게 창설된 슬로베니아 1부 리그의 창립 멤버가 되었다.[23] 리그 첫 시즌은 1991-92 시즌이었다.[23] 초기 몇 시즌 동안은 마리보르의 라이벌인 류블랴나의 올림피야가 리그를 지배했지만,[24] 마리보르는 슬로베니아 컵 결승전에서 올림피야를 승부차기 끝에 4-3으로 꺾고 첫 우승을 차지했다.[25]다음 시즌, 마리보르는 UEFA 컵 위너스 컵에 참가하며 유럽 국제 대회에 데뷔했다. 1992년 8월 19일, 함룬 스파르탄스와의 홈 경기에서 4-0으로 승리하며 첫 국제 경기를 치렀고,[26] 안테 시문드자가 클럽의 첫 유럽 대회 득점을 기록했다. 마리보르는 1991-92, 1992-93, 1994-95 시즌에 리그 준우승을 차지했고, 1995-96 시즌에는 4위를 기록했다. 1993-94 시즌에는 무라를 결승에서 합계 2-3으로 꺾고 다시 한번 슬로베니아 컵 우승을 차지했다.[27]
1996-97 시즌은 마리보르 역사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마리보르는 리그에서 우승하며 역사상 처음으로 슬로베니아 챔피언이 되었다. 이 시즌 평균 홈 관중은 5,289명으로, 현재까지도 최고 기록으로 남아있다.[28] 1997년 6월 1일, 벨틴치와의 시즌 마지막 경기는 14,000명의 관중 앞에서 치러졌으며,[29] 이는 슬로베니아 1부 리그 공동 기록이다.[30] 같은 시즌, 마리보르는 1996-97 슬로베니아 컵에서도 우승하며 국내 더블을 달성했고, 1998-99 시즌에도 이 업적을 다시 한번 이루었다. 1996-97 시즌 첫 우승 이후, 마리보르는 2003년까지 6번 더 우승하며 총 7회 연속 리그 우승이라는 기록을 세웠다.[31]
1999-2000 시즌, 보얀 프라슈니카르 감독의 지휘 아래 마리보르는 1999-2000 UEFA 챔피언스 리그 예선에서 헹크와 리옹을 꺾고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챔피언스 리그 본선 조별 리그에 진출했다.[32] 마리보르는 디나모 키예프, 바이어 레버쿠젠, 라치오와 같은 조에 편성되었고, 6경기에서 승점 4점을 얻어 조 최하위로 대회를 마감했다.[33]
2. 5. 재정 위기 (2004-2008)
2003-04 슬로베니아 컵은 NK 마리보르가 몇 년 동안 쇠퇴하기 전 마지막으로 우승한 트로피였다. 2004년부터 2007년까지 클럽은 심각한 재정적 어려움에 시달렸고, 한때 해체될 뻔하기도 했다.[34] 당시 300만유로가 넘는 막대한 부채 때문에 클럽은 새로운 선수를 영입할 여력이 없었다.[34] 그 결과, 당시 1군 팀은 주로 유소년 선수들로 구성되었고, 자유 이적으로 클럽에 영입된 몇몇 외국인 선수들이 섞여 있었다. 2006년 가을에 클럽의 리더십이 바뀌었고, 2011년 1월이 되어서야 클럽은 부채를 완전히 갚았다고 발표했다.[35] 이 기간 동안 NK 마리보르는 리그에서 3위 이상을 기록한 적이 없었으며, 2007년과 2008년에 슬로베니아 컵 준우승을 두 번 했다.[27] 그러나 그들은 2006년 UEFA 인터토토 컵의 11명의 우승팀 중 하나였으며, 결승전에서 스페인 팀 비야레알을 합계 3-2로 꺾었다. 비야레알은 불과 몇 달 전에 UEFA 챔피언스리그 준결승에 진출했었다.[36]2. 6. 즐라트코 자호비치 시대 (2008-2020)
2007년 7월, 즐라트코 자호비치가 NK 마리보르의 스포츠 디렉터로 임명되면서 클럽의 황금기가 시작되었다.[37][38] 2008년 5월, 마리보르는 12,000명 이상의 관중 앞에서 재개장한 경기장에서 첫 경기를 치렀다.[39] 같은 달, 다르코 밀라니치가 감독으로 임명되었는데, 그는 이후 클럽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감독이 되었다.[40] 밀라니치의 지휘 아래 마리보르는 2008-09 시즌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6년 만에 첫 우승을 달성했다.[41] 다음 시즌에는 코페르에 이어 2위를 차지하며 리그 우승을 지키는 데 실패했다.[42] 하지만, 돔잘레를 3-2로 꺾고 슬로베니아 컵 우승을 차지했으며, 인터블록을 꺾고 구단 역사상 첫 번째 슬로베니아 슈퍼컵 우승도 달성했다.[43]2010년 말, 클럽은 창립 50주년을 기념했으며,[44] 시즌 중 슬로베니아 리그에서 9번째 우승을 확정했다.[45] 이후 몇 년 동안 마리보르는 4번의 연속 우승을 추가하여 총 13번의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46] 2012년에는 최다 승점(85점)을 기록하기도 했다.[48] 2016년에는 최대 라이벌인 올림피야 류블랴나에게 우승을 내줬다.[47] 또한, 마리보르는 2012년과 2013년 슬로베니아 컵 결승에서 모두 첼레를 꺾고 2번의 연속 더블을 달성했다.[49][50]
2011년, 마리보르는 UEFA 유로파 리그 플레이오프에서 레인저스를 꺾고 조별 리그에 진출하면서 10년 만에 유럽 대회 첫 조별 리그 진출을 달성하며 국제 대회에서 돌파구를 마련했다.[51] 6경기에서 1점을 얻었고, 홈에서 브라가와 1-1로 비겼다.[52] 다음 시즌에는 다시 조별 리그에 진출했고, 파나티나이코스를 꺾고 토트넘 홋스퍼와 비기면서 4점을 획득했다(두 경기 모두 홈 경기).[53]
2013-14 시즌에는 세 번째 연속으로 조별 리그에 출전하여 2013-14 UEFA 유로파 리그에서 처음으로 녹아웃 스테이지에 진출했다.[54] 32강에서 결국 우승팀인 세비야에게 합계 4-3으로 패하며 탈락했다.[55] 2014-15 시즌에는 플레이오프에서 셀틱을 꺾고 구단 역사상 두 번째로 UEFA 챔피언스 리그 조별 리그에 진출하면서 유럽에서의 성공적인 행보를 이어갔다.[56] G조에 첼시, 샬케 04, 스포르팅 CP와 함께 배정되었다. 각 팀을 상대로 1무 1패를 기록하며 6경기에서 3점을 획득했다.[57]
2015-16 시즌에는 6년 만에 처음으로 리그 우승에 실패했지만,[47] 다음 시즌에 14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왕좌를 되찾았다.[58] 슬로베니아 챔피언 자격으로 2017-18 UEFA 챔피언스 리그에 슬로베니아 대표로 참가하여 클럽 역사상 세 번째로 조별 리그에 진출했다.[59] E조에서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세비야, 리버풀과 경쟁했다. 2014년과 마찬가지로 세비야와 홈에서 비기고 스파르타크와 두 번 비기면서 6경기에서 3점을 획득했다.[60] 리버풀과의 7-0 패배는 클럽의 유럽 대회 홈 경기 최다 점수차 패배였으며, 전체 유럽 대회에서 두 번째로 큰 패배였다.[61] 같은 시즌, 마리보르는 2007-08 시즌 이후 처음으로 트로피를 획득하지 못했는데, 승점 동률로 마감한 후 상대 전적에서 밀려 올림피야에게 리그 우승을 내줬다.[62] 올림피야는 또한 8강에서 마리보르를 탈락시켜 2002-03 시즌 이후 처음으로 대회 준결승 진출에 실패했다.[63]
2018-19 시즌에 마리보르는 밀라니치의 지도 아래 15번째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며, 밀라니치는 클럽과 함께 6번째 리그 우승을 달성하며 슬로베니아 1부 리그에서 가장 성공적인 감독이 되었다.[64][65] 하지만, 밀라니치와 자호비치는 부진한 성적을 이유로 2020년 3월에 클럽을 떠났다.[66] 자호비치 시대 동안 마리보르는 8번의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UEFA 챔피언스 리그 조별 리그에 두 번 진출했다.[67]
2. 7. 최근 (2020-)
2018-19 시즌, 다르코 밀라니치 감독 아래에서 클럽은 통산 15번째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165] 하지만 이 시즌 이후 성적 부진에 빠졌고, 2020년 3월 즈라트코 자호비치 스포츠 디렉터와 밀라니치 감독은 사임했다.[166] 자호비치가 클럽의 스포츠 디렉터(SD)직을 맡은 기간 동안 마리보르는 총 8번의 리그 우승과 2번의 UEFA 챔피언스 리그 본선 출전을 달성했다.[167]3. 클럽 정체성
NK 마리보르는 1960년에 창단된 슬로베니아의 축구 클럽으로, 클럽의 정체성은 여러 상징적인 요소들로 나타난다.
NK 마리보르의 주된 색상은 보라색이다.[68] 이 때문에 "보라색 군단" (Vijoličastisl)[69][70] 및 "제비꽃"(Vijolicesl)[71][72]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옛 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는 "Viole"라고 불리기도 한다.[73][74]
1992년부터 구단의 공식 응원가는 밴드 추데주나 폴랴가 작사, 작곡한 "헤야, 헤이 비올레"이다.[88] Viole Maribor 팬 그룹의 80명이 백 보컬로 녹음에 참여했으며,[88] 이 곡은 1992년 9월 16일, 마리보르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UEFA 컵 위너스 컵 경기에서 처음으로 공개되었다.[88][89]
3. 1. 유니폼과 엠블럼
NK 마리보르의 주된 색상은 보라색이다.[68] 이 때문에 "보라색 군단" (Vijoličastisl)[69][70] 및 "제비꽃"(Vijolicesl)[71][72]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또한 옛 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는 "Viole"라고 불리기도 한다.[73][74]NK 마리보르가 창단되었을 때, 클럽 관계자 중 일부는 마리보르 시의 문장에서 영감을 받아 빨간색과 흰색을 선호했다.[75][76] 그러나 유고슬라비아의 많은 축구팀들이 이미 빨간색과 흰색 유니폼을 입고 있었기 때문에, 마리보르 관계자들은 새롭고 신선한 조합을 결정했다.[76] 그들은 피오렌티나의 보라색과 흰색 조합을 따르기로 했다. 클럽의 초대 주장인 오토 블라즈니크는 이탈리아 팀을 ''라 가제타 델로 스포르트''에서 본 후 이 조합을 제안했다.[76] 1961년 유고슬라비아에서 보라색 유니폼을 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에 선수들이 직접 페인트를 칠하기도 했다.[76] 클럽의 보조 색상은 노란색과 흰색이다.[77][78]
1973년 3월, 처음으로 스폰서의 이름이 마리보르 유니폼에 나타났다.[79] 1991년 슬로베니아 독립 이후, 주요 유니폼 스폰서는 피보바르나 라슈코, OTP 뱅카 (노바 KBM (2024년 이전)), 자바로발니차 사바 (자바로발니차 마리보르 (2016년 이전))였다.[80]
클럽의 현재 문장은 마리보르 시의 공식 문장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이는 다시 14세기 인장에 기반을 두고 있다.[85] 문장은 방패 모양으로, 18세기 말에 철거되기 전 피라미다 성이 있던 자리를 보여준다.[86] 보라색 꽃이 배경을 이룬다.[86] 마리보르 시의 문장과는 달리, 클럽의 현재 문장은 성을 향해 아래를 바라보는 흰색 비둘기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모습을 간략하게 나타낸다.[86] 방패 상단에는 클럽 이름과 창립 연도가 새겨져 있다.[86] 전체 문장은 보라색과 노란색의 두 가지 색상만 사용한다.[86] 이전 버전의 문장에는 클럽의 전통적인 색상 중 하나인 흰색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중앙에 흰색 성과 방패 위에 흰색 공의 형태로 나타났다. 2012년 5월부터 문장 상단에는 10번의 국내 리그 우승을 나타내는 노란색 별이 포함되었다.[86][87]
3. 2. 응원가
1992년부터 구단의 공식 응원가는 밴드 추데주나 폴랴가 작사, 작곡한 "헤야, 헤이 비올레"라는 곡이다.[88] Viole Maribor 팬 그룹의 80명의 멤버들도 백 보컬로 녹음에 참여했다.[88] 이 곡의 초연은 1992년 9월 16일, 마리보르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UEFA 컵 위너스 컵 경기에서 이루어졌다.[88][89]4. 경기장
마리보르는 1961년 6월부터 류드스키 보트에서 홈 경기를 치렀다.[90] 그 이전에는 구단 초창기에 아주 짧은 기간 동안 Stadion ob Tržaški cesti에서 경기를 했다.[90]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작은 스탠드가 있는 경기장이었고 전쟁 중에 파괴되었다.[91] 이 경기장은 20세기 초부터 축구에 사용되었으며, 1910년부터 1960년까지 여러 팀의 홈 구장이었다.[92][93]
전쟁 후 경기장은 개조되어 1952년에 개장했지만,[94] 메인 스탠드는 1960년대 초까지 건설되지 않았다.[95] 1961년 6월 25일, 마리보르는 스탠드가 아직 건설 중이던 시절 Mladost Zabok을 상대로 경기장에서 첫 경기를 치렀다.[90][95]
류드스키 보트는 마리보르에서 드라바강의 왼쪽 둑에 위치한 유일한 경기장이다. 이 경기장은 도시의 자연, 문화, 건축 및 스포츠 랜드마크로 여겨지며, 이전에 이 지역에 있던 공원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다.[96] 스탠드의 두드러진 특징은 길이 129.8m, 높이 18.4m의 콘크리트 아치이다.[1] 1994년, 조명 시설이 설치되었고 경기장에서는 첫 야간 경기가 열렸다.[1] 그 이후로 경기장은 여러 차례 개조되었다.[97] 2006년부터 2008년 사이에 4개의 스탠드 중 3개(남쪽, 동쪽 및 북쪽)가 철거되고 완전히 재건되었다.[98] 서쪽 스탠드는 2021년에 완전히 개조되어[99] 경기장의 현재 수용 인원은 11,709석이 되었다.[100]
마리보르의 홈 구장일 뿐만 아니라, 슬로베니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경기도 가끔 개최한다.[101] 경기장의 최다 관중 기록은 1973년 마리보르가 유고슬라비아 세컨드 리그 승격 플레이오프에서 프로레테르 즈레냐닌을 상대로 경기를 치렀을 때 기록된 20,000명이며, 슬로베니아 리그 경기 최다 관중 기록은 1996–97 슬로베니아 프르바리가 시즌 마지막 라운드에서 기록된 14,000명이다.[29]
5. 서포터 및 라이벌
NK 마리보르는 열성적이고 충성스러운 서포터들을 보유한 것으로 유명하다.[102][103] 마리보르와 그 주변 지역 외에도, 슈타이어와 케른텐에도 대규모 팬 기반을 가지고 있으며, 슬로베니아의 다른 지역에도 소규모 서포터 그룹이 존재한다.[104][105] 1989년에 설립된 울트라스 그룹인 Viole Maribor는 무정치적 그룹으로[108][109] 경기장 남쪽 스탠드에 위치해 있다.
마리보르의 가장 큰 라이벌은 류블랴나의 올림피야이며, 이 팀과 영원한 더비(Večni derbisl)를 치른다.[113] 첼레와는 슈타이어 더비(Štajerski derbisl)라고 불리는 라이벌 관계를 맺고 있으며,[120] 슬로베니아 컵 결승에서 세 번 맞붙어 모두 마리보르가 우승했다.[27] 무라와는 프리크무르예–슈타이어 더비 (Štajersko-prekmurski derbisl)를 치른다.[122]
5. 1. 서포터

NK 마리보르는 열성적이고 충성스러운 서포터들을 보유한 것으로 유명하다.[102][103] 마리보르와 그 주변 지역 외에도, 슈타이어와 케른텐에도 대규모 팬 기반을 가지고 있으며, 슬로베니아의 다른 지역에도 소규모 서포터 그룹이 존재한다.[104][105] 창단 이후 마리보르는 시민 클럽으로, 라이벌인 Železničar Maribor는 노동자 계급 클럽으로 여겨졌다.[106]
1989년에 설립된 울트라스 그룹인 Viole Maribor가 있으며,[107] 이들은 무정치적 그룹으로[108][109] 경기장 남쪽 스탠드에 위치해 있다. 국내 대회에서 가장 많은 원정 팬 기록은 2001년 3,000명의 마리보르 서포터가 류블랴나에 모인 것이다.[110] 해외에서 가장 많은 팬이 모인 경기는 2017년 클럽의 UEFA 챔피언스 리그 캠페인 중으로, 2,400명 이상의 서포터가 리버풀로 원정 경기를 갔다.[111]
1991년 슬로베니아 퍼스트 리그가 창설된 이후, 마리보르는 33시즌 중 27시즌 동안 최다 홈 평균 관중 수를 기록했다.[112] 1996-97 시즌에는 평균 5,289명이 마리보르의 홈 경기를 관람하여 슬로베니아 클럽 축구 기록을 세웠다.[28] 마리보르는 슬로베니아 퍼스트 리그 경기에서 2백만 명 이상을 모은 최초의 팀이기도 하다.[112]
5. 2. 라이벌
마리보르의 가장 큰 라이벌은 수도 류블랴나의 올림피야이며, 이 팀과 영원한 더비(Večni derbisl)를 치른다.[113] 이 라이벌 관계는 두 클럽이 유고슬라비아 2부 리그에서 뛰던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114]2005년, 구 올림피야는 재정 문제로 해산되었다.[116] 같은 해, 피닉스 클럽이 NK 베지그라드라는 이름으로 설립되었으며, 이후 NK 올림피야 류블랴나로 이름을 변경했다.[117] 마리보르와 새로 창단된 클럽 간의 첫 번째 더비는 2007년 10월 24일 슬로베니아 컵 8강전에서 열렸다.[118] 올림피야가 2009년 슬로베니아 1부 리그로 승격하면서 이 라이벌 관계는 다시 살아났다.[119]
마리보르는 또한 다른 슈타이어 클럽인 첼레와 슈타이어 더비(Štajerski derbisl)라고 불리는 라이벌 관계를 발전시켰다.[120] 마리보르와 첼레는 슬로베니아 컵 결승에서 세 번 대결했고, 모두 마리보르가 우승했으며,[27] 2002–03 시즌에는 전국 타이틀을 놓고 경쟁했는데, 당시 마리보르는 첼레를 상대로 경기 막판 2골을 넣어 2-1로 승리하며 7연패를 달성했다.[121]
마리보르의 또 다른 라이벌은 무라이며, 이 팀과 프리크무르예–슈타이어 더비 (Štajersko-prekmurski derbisl)를 치른다.[122] 2020–21 시즌, 마리보르와 무라는 시즌 마지막 날 타이틀 결정전을 치렀다. 마리보르에게는 무승부면 충분했지만, 무라가 3-1로 승리하며 구단 역사상 첫 번째 타이틀을 획득했다.[123]
6. 선수
NK 마리보르는 슬로베니아의 축구 클럽으로, 다양한 국적의 선수들이 거쳐갔다. 2022년 10월 12일 기준으로[169][170], 현재 선수 명단 외에 임대 선수 및 과거 유명 선수들을 확인할 수 있다.
임대 선수NK 마리보르는 다른 클럽으로 임대 보낸 선수들도 있다.
포지션 | 이름 | 기타 |
---|---|---|
DF | 벨민 보바리치 | NK 트리글라브 크라니 |
MF | 갈 고레나크 | NK 알루미니이 |
MF | 로크 마헤르 | NK Kety Emmi Bistrica |
6. 1. 현재 선수 명단
등번호 | 포지션 | 이름 |
---|---|---|
1 | GK | 아즈베 유그 |
2 | MF | 힐랄 수다니 |
3 | DF | 아담 라시드 |
4 | MF | 블라즈 브르호베츠 |
5 | DF | 피유스 시르비스 |
6 | DF | 브래들리 엠본도 |
7 | MF | 죄르지 코마로미 |
8 | MF | 마르코 보지치 |
10 | MF | 막스 바리시치 |
12 | DF | 그레고르 시코셰크 |
13 | FW | 에티엔느 이브 베그레 |
14 | DF | 앙드레 소자 |
15 | MF | 얀 레파스 |
16 | MF | 니코 글리치 |
17 | MF | 셰이 오조 |
18 | MF | 니코 오스터크 |
20 | MF | 지가 레파스 |
21 | MF | 카롤 보리스 (웨스터로에서 임대) |
22 | DF | 마틴 밀레츠 (주장) |
24 | DF | 잔 메슈코 |
25 | MF | 니크 벨로비치 |
30 | FW | 벤자민 테테 (메츠에서 임대) |
32 | DF | 루카 크라인츠 |
34 | DF | 아네이 로르베크 |
50 | DF | 란 비드마르 |
59 | GK | 사모 프리지르 |
72 | MF | 요십 일리치치 |
81 | GK | 메노 베르센 |
97 | MF | 티네 추크 |
99 | FW | 오르페 음비나 |
6. 2. 유명 선수
믈라덴 다바노비치SVN (1990-1995)마르코 시메우노비치SVN (1996-1997, 1999-2002)
야스민 한다노비치SVN (2011-2021)
케난 필리치BIH (2018-2021)
아미르 칼리치SVN (1993-1997, 1999-2000, 2002-2003)
마린코 갈리치SVN (1994-1996, 1999-2001)
제리코 밀리노비치SVN (1995-1998)
스파소예 브라이치SVN (1996-1998)
게리 치피ALB (1998-2000)
미랄 사마르지치SVN (2007-2010)
페타르 스토야노비치SVN (2012-2015)
마르코 슈코렐SVN (2013-2019)
잔 카르니치니크SVN (2015-2017)
사샤 가이세르SVN (1992-1994)
페테르 빈코프스키SVN (1998)
알레시 체흐SVN (2003-2004)
알민 바치노비치SVN (2007-2010)
아킴 이브라이미MKD (2011-2016)
다미안 보하르SVN (2013-2018)
안테 시문자SVN (1991-1996, 1997, 1999-2000)
요십 일리치치SVN (2010)
로베르토 베리치SVN (2010-2013)
밀리보예 노바코비치SVN (2016-2017)
7. 경영진
우로스 믈라카르
유레 스트루크
유레 브라츠코
미하 피타미크
발렌티노 멘데크
안드레이 플로스
스티페 예리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