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DS-6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RDS-6는 1948년 소련이 개발을 시작한 핵무기 프로젝트로, 초기에는 안드레이 사하로프의 슬로이카(RDS-6s)와 미국의 고전적 슈퍼와 유사한 트루바(RDS-6t) 두 가지 설계를 연구했다. 슬로이카는 핵분열성 코어 주변에 리튬-6 중수소화물과 우라늄-238을 교대로 배치한 구조로, 1953년 8월 12일 실험에서 400킬로톤의 위력을 보였다. 트루바는 텔러-울람 설계를 기반으로 했으나 열핵 점화가 불가능하여 연구가 중단되었다. RDS-6는 진정한 수소폭탄은 아니었지만, 소련은 이를 외교적으로 활용했으며, 핵무기 기술 발전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소련의 핵 실험 - 차르 봄바
차르 봄바는 소련에서 개발된 TNT 50Mt 폭발력의 수소 폭탄으로, 냉전 시대 미국에 대한 시위 성격으로 개발 및 실험되었으며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한 핵무기로 기록된다. - 소련의 핵 실험 - RDS-1
RDS-1은 1949년 소련이 실시한 최초의 핵실험으로, 미국이 Joe-1이라고 명명했으며, 팻 맨과 유사한 플루토늄 내폭형 핵폭탄으로 22kt의 핵 출력을 냈고, 냉전 시기 미국의 핵무기 독점에 대한 소련의 대응이었다. - 1953년 소련 - 의사들의 음모
의사들의 음모는 1952년 소련에서 일부 의사들이 소련 지도부 암살 음모 혐의로 체포 및 기소된 정치적 사건으로, 스탈린 시대 반유대주의 정책 및 권력 투쟁의 배경 속에서 발생했으며, 스탈린 사후 조작으로 밝혀져 관련자들이 복권되었지만 소련 사회에 큰 파장을 남겼다. - 1953년 소련 - 보르쿠타 폭동
보르쿠타 폭동은 1953년 소련 레치라크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스탈린 사망 후 사면 미적용, 베리야 체포, 열악한 환경 속에서 수감자들이 일으킨 저항 운동으로, 정치적 요구와 함께 격화되었으나 소련 내무군의 진압으로 실패했지만 굴라그 시스템 저항의 상징으로 남았다.
RDS-6 | |
---|---|
RDS-6s / Joe-4 개요 | |
![]() | |
명칭 | |
실험 정보 | |
국가 | 소련 |
실험 장소 | 세미팔라틴스크 핵 실험장,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
시기 | 1953년 8월 |
실험 횟수 | 1회 |
실험 종류 | 대기권 핵실험 |
장치 종류 | 강화 핵분열 |
최대 폭발력 | 총 폭발력 |
이전 실험 | RDS-3 |
다음 실험 | RDS-4 |
RDS-6s 정보 | |
로마자 표기 | RDS-6s |
러시아어 | РДС-6с |
의미 | (특별 제트 엔진) (겹겹이 쌓인 케이크) |
2. 개발 배경 및 초기 설계
소련은 1948년 6월, 'RDS-6'라는 암호명 아래 진보된 핵폭탄 및 수소폭탄 개발 연구를 시작했다. 이 연구는 KB-11(일반적으로 아르자마스-16으로 알려진 도시)과 레베데프 물리학 연구소(FIAN)에서 진행되었다.
초기 연구는 두 가지 주요 설계 방향으로 나뉘었다. 첫 번째는 '트루바'(Труба|트루바ru, 파이프/실린더)라는 암호명의 RDS-6t였고, 두 번째는 '슬로이카'(Слойка|슬로이카ru, 층상 과자)라는 암호명의 RDS-6s였다.
RDS-6t 설계는 1948년 3월 클라우스 푹스가 소련에 제공한 미국의 초기 수소폭탄 구상안, 이른바 '고전적 슈퍼' 설계 정보에 영향을 받았다. 이는 1차 핵분열 장치와 2차 핵융합 연료(중수소-삼중수소 혼합물)를 사용하는 초기 단계의 2단계 핵융합 방식 구상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트루바(RDS-6t) 설계 하위 섹션 참조)
RDS-6s 설계는 1948년 9월에서 10월 사이, 안드레이 사하로프가 제안한 '첫 번째 아이디어'에서 비롯되었다. 이는 핵분열성 코어 주위에 중수소와 우라늄-238을 교대로 쌓는 방식이었다. 이후 1949년 3월, 비탈리 긴즈부르크는 중수소를 리튬-6 중수소화물로 대체하자는 '두 번째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리튬-6 중수소화물은 중성자를 흡수하여 삼중수소를 생성하고, 이후 핵융합 반응 효율을 크게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확인되어 RDS-6s 설계의 핵심 요소로 채택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슬로이카(RDS-6s) 설계 하위 섹션 참조)
1952년 11월 미국이 아이비 마이크 핵실험에 성공하자, 라브렌티 베리야는 RDS-6s 개발에 모든 노력을 집중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상대적으로 RDS-6s가 단기간 내 구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RDS-6t는 이후 기술적 한계로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이 증명되어 1953년 12월 연구가 중단되었다.
2. 1. 슬로이카(RDS-6s) 설계
1948년 9월에서 10월 사이, FIAN에서 연구하던 안드레이 사하로프는 핵분열성 코어 주위에 중수소와 우라늄-238을 교대로 쌓는 방식의 새로운 핵폭탄 설계를 고안했다. 이는 '사하로프의 첫 번째 아이디어'로 알려졌다. 이 설계는 층을 쌓는 방식 때문에 '슬로이카'(Слойка|슬로이카ru, 층상 과자) 또는 '층 케이크'(Layer Cake)라는 암호명으로 불리게 되었다.1949년 3월, 비탈리 긴즈부르크는 중수소를 리튬-6 중수소화물로 대체하자는 '두 번째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이 제안의 핵심은 리튬-6이 중성자를 흡수하여 삼중수소(T)를 생성하고, 이후 발생하는 중수소(D)와 삼중수소(T)의 핵융합 반응(D+T 반응)에서 방출되는 고에너지 중성자(14 MeV)가 우라늄-238의 핵분열을 유발하여 폭발 효율을 크게 높일 수 있다는 점이었다. 당시 긴즈부르크는 D+T 반응의 단면적이 D+D 반응보다 훨씬 크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으나, 1949년 4월 정보기관을 통해 입수한 D+T 반응 단면적 데이터는 리튬-6 중수소화물 사용의 큰 이점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이로 인해 기존의 중수소 기반 설계는 폐기되고, 사하로프의 '첫 번째 아이디어'와 긴즈부르크의 '두 번째 아이디어'가 결합된 RDS-6s 설계가 채택되었다.
RDS-6s의 구조는 핵분열 물질인 우라늄-235를 중심핵으로 사용하고, 그 주위를 리튬-6 중수소화물과 천연 우라늄(주로 우라늄-238) 층으로 번갈아 감싼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5] 이 설계는 미국에서 이론적으로 연구되었으나 실제 실험되지 않은 '알람 시계'(Alarm Clock) 설계와 유사했지만, 소련이 미국의 해당 개념을 인지하고 있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슬로이카 설계는 핵분열과 핵융합 반응을 동시에 활용하여 효율을 높인 증폭 핵분열 병기에 해당한다. 핵융합 반응 자체보다는, 핵융합에서 발생한 중성자를 이용해 주변의 우라늄-238 핵분열을 증폭시키는 데 중점을 둔다. 이는 텔러-울람 설계와 같은 다단계 반응을 통해 메가톤급 위력을 내는 진정한 수소폭탄과는 구별되는 단단계 방식의 핵무기이다. 따라서 슬로이카 설계는 그 위력을 메가톤급으로 확장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2. 2. 트루바(RDS-6t) 설계
소련은 1948년 6월부터 RDS-6라는 암호명 아래 진보된 핵폭탄 및 수소폭탄 개발 연구를 시작했다. 이 연구는 KB-11(아르자마스-16)과 레베데프 물리학 연구소(FIAN) 등에서 진행되었다.RDS-6 계획의 첫 번째 수소폭탄 설계안은 Труба|트루바ru(파이프/실린더)라는 별칭을 가진 RDS-6t였다. 이 설계는 1948년 3월 클라우스 푹스가 소련 측에 넘긴 미국의 초기 수소폭탄 구상안, 이른바 Classical Super|고전적 슈퍼영어 설계 정보에 영향을 받았다. '고전적 슈퍼'는 베릴륨 산화물 템퍼(tamper)를 사용한 건(gun-type) 방식의 우라늄-235 1차 핵과, 1차 핵 주변에 삼중수소가 첨가된 중수소를 채운 긴 실린더 형태의 2차 핵으로 구성되는 개념이었다.
RDS-6t는 이 '고전적 슈퍼' 설계와 유사했지만, 중요한 차이점으로 가벼운 베릴륨 산화물 쉘 대신 무거운 쉘을 사용했다. 이는 중수소-삼중수소 혼합물이 쉽게 가열 및 압축되어 충격파에 의해 조기에 핵융합 반응을 시작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또한 방사선에 불투명한 무거운 쉘이 가벼운 쉘보다 이러한 원치 않는 예열(preheating)을 더 효과적으로 방지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1953년 12월, RDS-6t 방식으로는 핵융합 점화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내려지면서 관련 연구는 중단되었다. 결국 RDS-6t는 실현 불가능한 설계로 판명되었다.
3. 실험 및 결과
RDS-6s는 1953년 8월 12일 'Joe 4'라는 코드명으로 세미팔라틴스크 핵실험장에서 실험되었다. 측정된 폭발 위력은 400 킬로톤이었다. 이 에너지는 우라늄-235 핵분열 코어에서 10%, 핵융합 반응에서 15~20%, 그리고 우라늄-238 층의 핵분열에서 70~75%가 발생한 것으로 분석되었다.[1] RDS-6s는 진정한 수소 폭탄이라기보다는 핵융합 물질을 이용해 핵분열 반응을 증폭시킨 증폭 핵분열 병기에 가까웠다.[5] 이 설계는 핵분열 연료와 핵융합 연료(리튬-6 중수소화물)를 여러 겹으로 쌓은 형태로, 소련에서는 '슬로이카'(Слойка|슬로이카ru, 층상 케이크)라고 불렸다.[5] 이는 미국에서 이론적으로 연구되었던 '알람 시계'(Alarm Clock|알람 시계영어) 설계와 유사했으나, 미국은 이 설계를 실제로 실험하지는 않았다.
실험 성공 후, 안드레이 사하로프는 RDS-6s 설계를 기반으로 더 강력한 폭탄인 RDS-6sD를 제안했다.[2] 그러나 슬로이카 설계의 구조적 한계로 인해 위력을 메가톤급으로 증가시키려는 시도는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또한, 초기 연구되었던 또 다른 설계인 RDS-6t('트루바'(Труба|트루바ru)) 역시 1953년 12월, 열핵 점화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연구가 중단되었다. 결과적으로 RDS-6s와 RDS-6t 설계는 모두 한계에 부딪혔고, 소련의 핵무기 연구는 다시 2단계 열핵무기 개발에 집중하게 되었다.
RDS-6s의 변형으로 RDS-27이 개발되었다. RDS-27은 불안정한 삼중수소를 사용하지 않아 보관 및 운용이 더 용이하다는 장점이 있었지만, 이로 인해 위력은 250 킬로톤으로 감소했다. RDS-27은 R-7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의 탄두로 사용될 예정이었다.[2] RDS-27은 1955년 11월 6일에 'Joe 18'이라는 코드명으로 실험되었다.[3]
비록 RDS-6s가 메가톤급 위력을 내는 진정한 수소폭탄은 아니었지만, 소련은 이 실험 성공을 외교적으로 활용했다. 소련은 미국 최초의 열핵 장치(아이비 마이크)와 달리 폭격기로 투하할 수 있는 실용적인 수소폭탄을 보유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 과학자들은 핵 낙진 분석을 통해 소련의 폭탄이 '알람 시계'와 유사한 설계이며, 진정한 의미의 수소폭탄이 아님을 간파했다. 미국은 RDS-6s 실험 약 5개월 후인 1954년에 배치 가능한 형태의 수소폭탄을 개발했다.[4]
소련 최초의 진정한 수소폭탄 실험은 1955년 11월 22일에 RDS-37이라는 암호명으로 세미팔라틴스크 핵실험장에서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6]
4. 국제적 영향 및 논란
1953년 8월 12일 소련이 RDS-6s 실험에 성공하자, 이는 미국 등 서방 국가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냉전 시대의 핵무기 경쟁을 더욱 심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1] 소련은 RDS-6s가 수소폭탄이며, 미국의 첫 열핵무기 실험인 아이비 마이크와 달리 항공기로 투하하여 실전에 배치할 수 있는 형태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소련의 외교적 입지를 강화하는 지렛대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과학자들은 핵실험 이후 수집된 낙진을 분석하여 소련의 폭탄이 텔러-울람 설계에 기반한 진정한 의미의 수소폭탄이 아니라, 안드레이 사하로프가 고안한 '슬로이카'(Слойка|슬로이카ru, 층상 케이크) 설계에 기반한 것임을 파악했다.[5] 슬로이카 설계는 핵분열 물질과 핵융합 물질(리튬-6 중수소화물)을 층층이 쌓아 핵분열 반응의 효율을 높이는 증폭 핵분열탄의 일종으로, 미국의 '알람 시계'(Alarm Clock) 설계와 유사한 개념이었다. RDS-6s의 폭발 위력 약 400킬로톤 중 핵융합 반응이 기여한 부분은 15~20% 정도였고, 나머지는 핵분열 반응(초기 핵분열 및 핵융합 중성자에 의한 우라늄-238 외피의 핵분열)에서 발생했다.[1] 이 방식은 메가톤급 이상의 위력으로 확장하기 어렵다는 기술적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소련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RDS-6s 실험 약 5개월 후인 1954년 3월 1일 캐슬 브라보 실험을 통해 배치 가능한 형태의 진정한 수소폭탄 기술을 확보했다.[4] 소련 역시 슬로이카 설계의 한계를 인지하고 텔러-울람 설계에 기반한 진정한 수소폭탄 개발에 다시 집중하여, 1955년 11월 22일 카자흐스탄의 세미팔라틴스크 핵실험장에서 RDS-37 실험에 성공했다.
4. 1. 인체 실험 논란
RDS-6 실험 당시 인근 마을 주민들을 특정 장소에 모아놓고 실험을 진행했다. 이는 인체 실험으로 여겨지며, 이로 인해 주민들은 방사능 피폭으로 인한 건강 피해에 시달리게 되었다. 1993년 8월 7일 방송된 《NHK 스페셜 핵실험 전율의 기록 ~구소련·비밀 도시의 40년~》에서는 당시 실험 장소의 영상과 함께 생존 주민의 인터뷰가 공개되었다. 영상에서는 측정 결과 일반인의 1,500배에 달하는 방사선 수치가 확인되었으며, 인터뷰 당시 생존자는 3명뿐이었다.5. 평가 및 의의
RDS-6는 진정한 수소 폭탄은 아니었지만, 메가톤급 위력을 가진 핵융합 병기라기보다는 증폭 핵분열 병기에 가까웠다.[5] 이 설계는 핵분열 연료와 핵융합 연료를 층층이 쌓은 형태로, 소련에서는 Слойка|슬로이카ru(층상 케이크의 일종)라고 불렸다. RDS-6는 우라늄-235를 중심핵으로 사용하고, 그 주위를 중수소화 리튬-6과 천연우라늄으로 덮은 구조로 추정된다.[5] 미국에서도 유사한 설계가 '알람 시계'(Alarm Clock)라는 이름으로 이론적으로 연구되었으나, 실제로 실험되지는 않았다.
1953년 8월 12일 실험된 RDS-6s는 핵출력 400 킬로톤을 기록했다. 소련의 물리학자 유리 하리톤은 이 위력 중 핵융합 반응이 15~20%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핵융합에서 방출된 중성자에 의해 증폭된 핵분열 반응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슬로이카 설계는 단일 단계 반응에 의존했기 때문에, 텔러-울람 설계를 사용하는 진정한 수소폭탄처럼 다단계 반응을 통해 위력을 크게 증강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RDS-6s의 위력을 메가톤급으로 높이려는 시도(RDS-6sD)는 실현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었고[2], 초기 연구되던 또 다른 설계인 트루바(RDS-6t) 방식 역시 1953년 12월 연구가 중단되면서 두 설계 모두 막다른 길임이 드러났다. 이후 연구는 다시 2단계 열핵무기 개발에 집중되었다.
RDS-6s는 진정한 수소폭탄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은 외교적으로 이를 활용했다. 미국 최초의 열핵 장치와 달리 폭격기에서 투하 가능한 형태라고 주장하며 선전했지만, 미국 전문가들은 낙진 분석을 통해 이것이 '알람 시계'와 유사한 증폭 핵분열 병기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미국은 RDS-6s 실험 5개월 후인 1954년에야 배치 가능한 수소폭탄을 개발했다.[4]
RDS-6s의 기술은 삼중수소를 사용하지 않는 개량형 RDS-27 개발로 이어졌다. RDS-27은 위력이 250 킬로톤으로 감소했지만 작전 운용성은 향상되었으며, 1955년 11월 6일에 실험되었다.[2][3]
소련 최초의 진정한 수소폭탄 실험은 1955년 11월 22일 세미팔라틴스크 핵실험장에서 실시된 RDS-37이었다.
참조
[1]
웹사이트
The Soviet Nuclear Weapons Program
http://nuclearweapon[...]
[2]
웹사이트
To Comrade A.P Zaveniagin
http://digitalarchiv[...]
[3]
웹사이트
Database of nuclear tests, USSR: part 1, 1949-1963
http://www.johnstons[...]
[4]
문서
Five deliverable versions of Mike were built as the TX-16/EC-16 in January 1954 and retired four months later, followed by the EC 17 and EC 24 bombs (five and ten units respectively) in April through October of 1954
[5]
웹사이트
The Soviet Nuclear Weapons Program
http://nuclearweapon[...]
[6]
간행물
Soviet/Russian Nuclear Arsenal
http://www.atomicfor[...]
Atomic Forum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