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러-울람 설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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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텔러-울람 설계는 핵분열 폭탄의 방사선을 이용하여 핵융합 연료를 압축, 기폭시키는 다단계 열핵무기 설계이다. 이 설계는 1941년 엔리코 페르미가 에드워드 텔러에게 처음 제안한 핵융합 반응을 핵분열 장치의 에너지로 시작하는 아이디어를 발전시킨 것이다. 텔러와 스타니슬라프 울람의 핵심적인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개발되었으며, 1951년 그린하우스 작전의 조지 핵실험과 1952년 아이비 마이크 실험을 통해 그 효과가 입증되었다. 텔러-울람 설계는 핵무기 개발 경쟁과 확산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소련, 영국, 중국, 프랑스, 인도 등 여러 국가가 이 설계를 기반으로 핵무기를 개발했다. 텔러-울람 설계와 관련된 정보는 오랫동안 기밀로 유지되어 왔으며, 미국 정부는 정보 유출을 막기 위해 노력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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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텔러-울람 설계 | |
|---|---|
| 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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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형 | |
| 종류 | 열핵무기 |
| 역사적 맥락 | |
| 발명가 | 스타니스와프 울람과 에드워드 텔러 |
| 국가 | 미국 |
| 디자인 날짜 | 1951년 |
| 첫 번째 테스트 | 1952년 11월 1일 |
| 첫 번째 테스트 이름 | 아이비 마이크 |
| 작동 방식 | |
| 단계 | 2단계 |
| 1차 | 핵분열 폭탄 |
| 2차 | 열핵융합 연료 |
| 중요 특징 | |
| 특징 | 높은 폭발력 효율적인 설계 |
| 추가 정보 | |
| 관련 인물 | 존 폰 노이만 프레데릭 라이네스 |
| 관련 개념 | 핵무기 설계 맨해튼 프로젝트 |
| 참고 | 차르 봄바 핵 확산 |
2. 역사
핵융합 에너지를 이용한 강력한 무기, 즉 수소폭탄에 대한 아이디어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맨해튼 프로젝트 초기부터 논의되었다. 1941년 엔리코 페르미가 에드워드 텔러에게 핵분열 폭탄을 이용해 핵융합 반응을 일으키는 개념을 제안한 것이 시초였다. 텔러는 이 "슈퍼" 폭탄 개념에 매료되어 전쟁 중에도 연구를 지속했지만, 당시 주력은 핵분열 폭탄 개발이었고 기술적, 도덕적 문제로 인해 "슈퍼" 개발은 지지부진했다.
상황은 1949년 소련이 첫 핵실험에 성공하면서 급변했다. 냉전의 긴장이 고조되면서 미국 내에서 수소폭탄 개발 여론이 거세졌고, 1950년 해리 S. 트루먼 대통령은 개발 프로그램을 승인했다. 그러나 초기 설계("고전적 슈퍼")는 핵분열 폭탄의 열만으로는 핵융합 연료를 점화시킬 수 없다는 문제에 부딪혔다.
결정적인 돌파구는 1951년 수학자 스타니슬라프 울람의 아이디어를 텔러가 발전시키면서 마련되었다. 이는 핵분열 폭탄(1단계)에서 방출되는 X선 방사선을 이용해 별도의 핵융합 연료(2단계)를 강력하게 압축한 뒤 점화시키는 단계적 내파(staged implosion) 방식으로, 오늘날 텔러-울람 설계로 알려져 있다.[1][2] 이 설계의 핵심 아이디어를 누가 먼저 제안했는지에 대해서는 텔러와 울람 사이에 논란이 있지만[6][7], 이 설계가 수소폭탄 개발의 길을 열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텔러-울람 설계의 가능성은 1951년 그린하우스 작전의 "조지(George)" 실험에서 확인되었고, 1952년 11월 "아이비 마이크" 실험에서 최초의 완전한 열핵폭탄이 성공적으로 폭발했다. 이 실험은 `10.4 메가톤`이라는 엄청난 위력을 보여주었으나, 액체 중수소를 사용하고 거대한 극저온 장비가 필요해 실용적인 무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후 연구는 고체 중수소화 리튬을 연료로 사용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고, 1954년 "캐슬 브라보" 실험에서 성공했다. 이 실험은 `15 메가톤`의 위력으로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핵폭발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대량의 핵 낙진을 발생시켜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다.[9] 캐슬 브라보 이후 미국은 텔러-울람 설계를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이나 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SLBM)에 탑재할 수 있도록 소형화하는 데 주력했고, 이는 1970년대 MIRV 기술로 이어졌다.[43]
2. 1. 맨해튼 프로젝트와 초기 연구

핵분열 장치의 에너지를 이용해 핵융합 반응을 일으키자는 아이디어는 1941년 가을, 이탈리아 출신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가 동료 에드워드 텔러에게 처음 제안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과 영국 등이 최초의 핵무기를 개발하던 맨해튼 프로젝트가 시작될 무렵이었다. 텔러는 1942년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주최한 핵분열 폭탄 개발 회의에 참석하여, 당시 개발 중이던 핵분열 폭탄보다 훨씬 강력한 가상의 "슈퍼" 폭탄 개념을 제시하며 논의를 주도했다. 그는 핵분열 폭탄 개발은 단순한 기술 문제로 여겼고, "슈퍼" 폭탄이야말로 더 흥미로운 이론적 도전 과제라고 생각했다.
전쟁 기간 동안 맨해튼 프로젝트의 주된 목표는 핵분열 무기를 먼저 개발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텔러는 "슈퍼" 폭탄 연구를 계속 추진했으며, 이 때문에 비밀 연구소인 로스앨러모스 국립 연구소에서 핵분열 무기 관련 업무를 소홀히 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당시 텔러가 맡지 않은 업무 중 일부는 나중에 소련 스파이로 밝혀진 클라우스 푸흐스에게 넘어갔다. 텔러는 "슈퍼" 연구를 위한 자원을 확보하고, 불투명도와 관련된 복잡한 계산을 위해 친구인 마리아 괴퍼트-마이어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슈퍼" 폭탄 연구는 여러 어려움에 부딪혔다. 관련 원리를 검증할 실험 방법이 마땅치 않았고 (핵분열은 사이클로트론이나 원자로 등으로 비교적 쉽게 연구할 수 있었다), 계산 과정 역시 매우 복잡했다.

트리니티(핵실험)을 직접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 폭탄 투하 이후 로스앨러모스의 과학자들은 핵무기의 파괴력에 큰 충격을 받았다. 많은 과학자들은 원자 폭탄보다 수천 배 더 강력한 무기 개발에 반대했다. 기술적으로 설계가 불확실하고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점 외에도, 도덕적인 문제도 제기되었다. 이러한 무기는 대규모 민간인 살상에만 사용될 수 있어 대량 학살 무기가 될 것이라는 우려였다. 별 내부의 핵융합 과정인 항성 핵합성을 밝혀낸 한스 베테와 같은 과학자들은 미국이 먼저 모범을 보여 개발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텔러와 버클리 대학의 어니스트 로렌스, 루이스 월터 알바레즈 등 개발 찬성론자들은 이러한 무기 개발은 필연적이며, 특히 소련이 개발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미국이 스스로 방어 수단을 포기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반박했다.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같은 일부는 제한된 핵분열 물질을 소수의 "슈퍼" 폭탄 개발에 사용하는 것보다 다수의 전술 핵무기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전쟁이 끝나면서 로스앨러모스의 연구 인력 상당수가 대학이나 다른 연구소로 돌아가면서 연구는 크게 둔화되었다. 1946년 로스앨러모스에서 "슈퍼" 폭탄 개발의 타당성을 검토하는 회의가 열렸고, 기술적으로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지만 여전히 반대 의견이 많았다.
상황은 1949년 8월, 소련이 자체적으로 원자 폭탄 실험("조 1")에 성공하면서 급변했다. 서방 세계는 큰 충격을 받았고, 이후 몇 달간 미국 정부, 군, 과학계에서는 "슈퍼" 폭탄 개발을 추진할지를 두고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1950년 1월 31일,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수소 폭탄 개발 프로그램 진행을 명령했다.
많은 과학자들이 다시 로스앨러모스로 돌아와 "슈퍼" 프로그램에 참여했지만, 초기 설계는 여전히 실현 불가능해 보였다. "고전적 슈퍼"라 불린 초기 구상은 핵분열 폭탄의 ''열''만으로 핵융합 물질을 점화시키려 했으나, 이는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한동안 많은 과학자들은 이 무기가 실제로 만들어질 수 없기를 바라기도 했다.
2. 2. 텔러-울람 설계의 탄생
핵분열 장치의 에너지를 이용해 핵융합 반응을 일으키려는 아이디어는 1941년 가을, 이탈리아 출신 물리학자 엔리코 페르미가 동료 에드워드 텔러에게 처음 제안하면서 시작되었다. 이는 곧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과 영국 등이 최초의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시작한 맨해튼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텔러는 1942년 로버트 오펜하이머가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주최한 핵분열 폭탄 개발 회의에 참여하여, 당시 개발 중이던 핵분열 무기보다 훨씬 강력한 가상의 "슈퍼" 폭탄 개발 아이디어를 제시하며 논의를 주도했다. 텔러는 핵분열 폭탄 개발은 기술적 문제일 뿐이며, "슈퍼" 폭탄이야말로 더 흥미로운 이론적 도전 과제라고 여겼다.
전쟁 기간 동안 주요 노력은 핵분열 무기 개발에 집중되었지만, 텔러는 "슈퍼" 연구를 끈질기게 이어갔다. 그는 비밀 연구소인 로스앨러모스 국립 연구소에서 핵분열 무기 관련 업무를 소홀히 할 정도였는데, 그가 거부한 업무 중 일부는 나중에 소련의 스파이로 밝혀진 클라우스 푸흐스에게 넘어가기도 했다. 텔러는 "슈퍼" 연구를 위한 자원을 확보하고, 불투명도 관련 계산을 돕기 위해 친구인 마리아 괴퍼트-마이어에게 연락하기도 했다. 그러나 "슈퍼" 설계는 난관에 부딪혔다. 관련된 원리를 실험적으로 검증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고 (핵분열은 사이클로트론이나 원자로 등으로 실험이 가능했다) 계산 역시 매우 복잡했다.
트리니티 핵실험을 목격하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투하 이후, 로스앨러모스의 과학자들은 핵무기의 파괴력에 큰 충격을 받았다. 많은 과학자들은 원자폭탄보다 수천 배 더 강력한 무기 개발에 반대했다. 기술적으로 설계가 불확실하고 실현 가능성이 낮다는 점과 함께, 이러한 무기가 대규모 민간인 학살에만 사용될 수 있다는 도덕적 우려가 제기되었다. 텔러의 동료이자 항성 핵합성을 발견한 한스 베테 등은 미국이 먼저 개발을 포기하여 소련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텔러와 버클리 물리학자 어니스트 로렌스, 루이스 월터 알바레즈 등 개발 찬성론자들은 이러한 무기 개발이 불가피하며, 특히 소련이 개발할 가능성이 높은 상황에서 미국 스스로 방어 수단을 포기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고 반박했다.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같은 일부는 제한된 핵분열 물질을 소수의 거대 "슈퍼" 폭탄에 사용하는 것보다 다수의 전술 핵무기를 개발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전쟁이 끝나면서 로스앨러모스의 연구 인력 상당수가 대학 등으로 복귀하면서 연구는 잠시 주춤했다. 1946년 "슈퍼" 개발 타당성을 검토하는 회의가 열렸고, 개발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내려졌지만 여전히 반대 의견도 존재했다.
상황은 1949년 8월, 소련이 자체 원자폭탄("조 1") 실험에 성공하면서 급변했다. 서방 세계는 큰 충격을 받았고, 미국 내에서는 훨씬 강력한 "슈퍼" 폭탄 개발을 추진해야 하는지에 대한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1950년 1월 31일,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수소폭탄 개발 프로그램 추진을 공식적으로 명령했다.
많은 과학자들이 로스앨러모스로 돌아와 "슈퍼" 프로그램에 참여했지만, 초기 설계("고전적 슈퍼")는 여전히 실현 불가능해 보였다. 이 설계는 핵분열 폭탄의 '열'만으로 핵융합 연료를 점화시키려 했으나, 이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다. 한동안 일부 과학자들은 이 무기가 기술적으로 불가능하기를 바라기도 했다.
수년간의 교착 상태 끝에 1951년, 폴란드 출신 망명 수학자 스타니슬라프 울람이 제시한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텔러가 발전시키면서 마침내 메가톤급 수소폭탄 개발의 실마리가 풀렸다. 현재 "단계적 내폭(staged implosion)"이라고 불리는 이 개념은 1951년 3월 9일 텔러와 울람이 공동으로 발표한 기밀 과학 논문 On Heterocatalytic Detonations I: Hydrodynamic Lenses and Radiation Mirrors|이종 촉매 폭발 I. 수력학적 렌즈와 방사선 거울eng에서 처음 제안되었다.[1][2] 이것이 바로 텔러-울람 설계의 핵심이다.
텔러-울람 설계의 핵심은 핵분열 부분(1단계, primary)과 핵융합 부분(2단계, secondary)을 물리적으로 분리하고, 1단계 핵분열 폭발에서 발생하는 강력한 X선 방사선을 이용하여 2단계 핵융합 연료를 점화시키기 전에 먼저 강력하게 압축(방사선 내파, radiation implosion)하는 것이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울람은 처음 1단계의 충격파를 이용한 압축을 제안했고, 텔러가 이후 방사선을 이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임을 깨달았다고 한다. 단계를 분리하고 2단계를 압축한다는 기본 아이디어는 울람의 기여로 여겨진다.

이 설계의 발견 과정과 각자의 기여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텔러는 1999년 인터뷰에서 자신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울람의 기여는 미미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한스 베테는 텔러가 "완전히 새로운 접근 방식"을 발견했으며 이는 "영감의 문제"였다고 평가하면서도[3][4], 1997년에는 "결정적인 발명은 1951년 텔러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말하기도 했다.[5]
그러나 J. 카슨 마크와 같은 다른 과학자들은 울람의 아이디어 없이는 텔러가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핵무기 설계자 테드 테일러는 단계화와 압축이라는 기본 아이디어는 울람에게, 방사선을 이용한 압축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은 텔러에게 공을 돌렸다.[6] 프리실라 존슨 맥밀란은 텔러가 울람의 역할을 축소하려 했다고 비판했으며[7], 텔러가 언론에서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것을 즐기는 듯한 태도는 동료들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텔러 자신도 1955년 《사이언스》지에 기고한 글에서 여러 사람의 기여를 강조했지만, 훗날 회고록에서는 이것이 "선의의 거짓말"이었으며 실제로는 자신이 모든 공로를 인정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음을 내비쳤다.[8] 한스 베테는 "역사를 위해 말하자면, 울람이 씨앗을 뿌렸고 텔러가 아이를 키웠으니, 울람이 아버지이고 텔러가 어머니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나는 조산사 정도였을 것이다."라는 비유를 남기기도 했다.

텔러-울람 설계의 등장은 수소폭탄 개발의 결정적인 돌파구였다. 이 설계의 우수성은 회의적이었던 과학자들조차 설득시켰고, 수소폭탄 개발은 이제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여졌다. 개발에 반대했던 오펜하이머조차 이 아이디어를 "기술적으로 달콤하다(technically sweet)"고 평가했다. 1951년 그린하우스 작전의 "조지(George)" 실험에서 이 개념이 매우 작은 규모로 처음 실험되었고, 성공 가능성을 높였다. (같은 작전의 "아이템(Item)" 실험은 최초의 부스트 핵분열 무기 실험이었다.)

1952년 11월 1일, 에니웨톡 환초에서 실시된 "아이비 마이크" 실험은 텔러-울람 설계를 적용한 최초의 완전한 열핵폭탄 실험이었다. 이 실험은 10.4 메가톤의 엄청난 위력을 기록했는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가사키에 투하된 폭탄의 450배가 넘는 위력이었다. "소시지(Sausage)"라는 별명으로 불린 이 장치는 거대한 핵분열 폭탄을 1단계 기폭장치로 사용했고, 액체 중수소를 핵융합 연료로 사용했다. 액체 중수소를 유지하기 위해 약 18143.70kg에 달하는 극저온 장비가 필요했으며, 장치 전체 무게는 약 약 72574.80kg에 달했다.

액체 연료 방식은 실용적인 무기로 사용하기에는 너무 크고 복잡했다. 따라서 미국은 고체 형태의 리튬-중수소화물(Lithium deuteride)을 핵융합 연료로 사용하는 연구를 진행했다. 이 건식 연료 방식은 1954년 "캐슬 브라보" 실험에서 성공적으로 시연되었다. "새우(Shrimp)"라는 암호명의 이 장치는 예상보다 훨씬 강력한 15 메가톤의 위력을 기록하며 미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핵실험이 되었다. 그러나 이 폭발 위력의 상당 부분이 우라늄-238 탬퍼(tamper)의 최종 핵분열 단계에서 발생했기 때문에[9] 막대한 양의 핵 낙진이 발생했다. 예상치 못한 바람의 변화로 낙진이 유인도와 일본 어선 다이고 후쿠류 마루가 있던 해역으로 퍼지면서 미국 역사상 최악의 핵 사고 중 하나를 일으켰다.
캐슬 브라보 실험 이후, 미국의 핵무기 개발 노력은 초기 거대 폭탄 개발에서 벗어나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이나 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SLBM)에 탑재할 수 있도록 텔러-울람 설계를 소형화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노력은 1970년대 중반까지 이어져, 하나의 미사일에 여러 개의 핵탄두를 탑재하는 MIRV 기술로 발전하게 된다.
2. 3. 아이비 마이크 실험과 실용화
thumb'' 로미오 핵실험]]1951년, 그린하우스 작전의 조지 핵실험을 통해 텔러-울람 설계의 기본 논리가 작동한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이 성공을 바탕으로 1952년 11월 1일, 에니웨토크 환초에서 텔러-울람 설계를 적용한 본격적인 첫 실험인 아이비 작전의 '마이크' 실험이 진행되었다. 이 실험은 10.4 메가톤의 엄청난 폭발력을 기록했는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가사키에 투하된 팻 맨 원자폭탄 위력의 450배가 넘는 수준이었다. '소시지'라는 별명으로 불린 이 실험 장치는 기폭을 위해 거대한 핵분열 폭탄을 사용했으며, 연료인 액화 중수소 18ton을 극저온 상태로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전체 장치 무게가 70ton에 달했다.
마이크 실험에 사용된 액화 중수소 방식은 실제 무기로 배치하기에는 비현실적인 면이 많았다. 따라서 다음 단계에서는 액체 연료 대신 고체 중수소 리튬을 핵융합 연료로 사용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이 방식은 1954년 3월 1일 캐슬 작전의 '브라보' 실험에서 성공적으로 증명되었다. '에비'라는 별명의 실험 장치를 사용한 이 실험은 15 메가톤의 폭발력을 기록하며 미국이 실시한 핵실험 중 가장 큰 규모로 기록되었다.
브라보 실험 성공 이후, 미국은 텔러-울람 설계 기반의 핵무기를 ICBM이나 SLBM에 탑재할 수 있도록 소형화하는 작업에 즉시 착수했다. 1960년에는 메가톤급 위력을 가지면서도 직경 약 0.5m, 무게 320kg까지 소형화된 W47 핵탄두가 개발되어[52] 폴라리스 미사일에 탑재, 잠수함에 배치되었다. 다만 이후 W47 핵탄두는 신뢰성 문제가 발견되어 설계 변경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핵탄두 소형화 기술은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상당한 수준으로 발전했으며, 하나의 미사일에 10개 이상의 핵탄두를 탑재하는 MIRV 기술로 이어졌다 (자세한 내용은 W88 핵탄두 참조).[43]
3. 텔러-울람 설계의 원리
텔러-울람 설계의 기본 원리는 핵무기의 각기 다른 부분, 즉 단계(Stage)들이 이전 단계 폭발에서 발생한 에너지를 이용하여 다음 단계를 순차적으로 기폭시키는 '''다단계(Multi-stage)''' 핵폭발 개념에 기반한다.[44][45] 가장 기본적인 구성은 핵분열 폭탄으로 이루어진 1단계(프라이머리, Primary)와 핵융합 연료로 구성된 2단계(세컨더리, Secondary)로 나뉜다. 필요에 따라 3단계(터셔리, Tertiary) 이상의 핵융합 단계를 추가할 수도 있다.
핵심 아이디어는 1단계와 2단계를 물리적으로 분리하고, 1단계 핵분열 폭탄이 폭발할 때 발생하는 막대한 양의 X선 에너지를 이용하여 2단계의 핵융합 연료를 외부에서 강력하게 압축(폭축, Implosion)하고 점화시키는 것이다. 이 과정을 '''방사선 내파(Radiation Implosion)'''라고 부른다. 이는 에드워드 텔러와 스타니슬라프 울람이 1951년에 제안한 획기적인 개념으로, 이전의 설계 방식으로는 달성하기 어려웠던 고위력 수소폭탄 개발을 가능하게 했다.[1][2] 이 설계는 1951년 3월 9일 텔러와 울람이 발표한 기밀 과학 논문 ''이종 촉매 폭발 I. 수력학적 렌즈와 방사선 거울''에서 처음 제안되었다.[1][2]
작동 과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 '''1단계 폭발:''' 먼저 1단계 핵분열 폭탄(프라이머리)이 기폭된다.
# '''X선 방출 및 전달:''' 1단계 폭발 시 발생하는 고온은 엄청난 양의 X선을 방출한다. 이 X선은 폭탄 케이싱 내부의 특수한 경로(방사선 채널)를 통해 2단계로 전달된다.
# '''2단계 압축 (방사선 내파):''' 전달된 X선 에너지는 2단계 외부를 감싸는 물질(푸셔/탬퍼) 표면을 증발(어블레이션)시킨다. 이 증발의 강력한 반작용으로 2단계 내부의 핵융합 연료와 중심부의 '스파크 플러그'(소형 핵분열 장치)가 안쪽으로 엄청나게 압축된다.[49]
# '''2단계 점화 및 핵융합:''' 강력하게 압축된 2단계 중심부의 스파크 플러그는 핵분열을 일으키고, 여기서 발생한 열과 중성자는 고도로 압축된 핵융합 연료(중수소화 리튬 등)를 점화시켜 핵융합 반응을 일으킨다.
# '''(선택적) 탬퍼 핵분열:''' 핵융합 반응에서 방출된 고에너지 중성자는 2단계를 감싸는 우라늄-238 탬퍼를 타격하여 추가적인 핵분열을 일으킬 수 있다.[9]
이처럼 텔러-울람 설계는 1단계 핵분열의 에너지를 X선 형태로 변환하여 2단계 핵융합 연료를 효율적으로 압축하고 점화시키는 정교한 다단계 과정을 통해 이전의 단순 핵분열 폭탄보다 훨씬 강력한 폭발력을 얻을 수 있게 한다. 이 설계 원리는 현대 수소폭탄의 기본적인 구조를 이룬다. 이 설계의 성공은 1952년 11월 1일 아이비 마이크 실험에서 입증되었으며, 이는 10.4 메가톤 TNT의 위력을 기록했다. 이후 중수소화 리튬을 사용한 건식 연료 방식이 개발되어 캐슬 브라보 실험(1954년, 15 메가톤 TNT)에서 성공적으로 시연되었고, 이는 실용적인 수소폭탄 개발로 이어졌다.
3. 1. 1차 폭탄 (핵분열 폭탄)
텔러-울람 설계의 첫 단계인 '''프라이머리'''(1단계)는 기본적으로 핵분열 폭탄이다.[44][45] 이는 폭축형 원자폭탄으로, 플루토늄-239 또는 우라늄-235와 같은 핵분열 물질을 폭축 렌즈 형태로 배치된 고성능 폭약으로 감싼 구조를 가진다.[44][45]프라이머리가 기폭되면, 고성능 폭약이 폭발하여 핵분열 물질로 이루어진 핵(코어)을 구형으로 강력하게 압축시킨다. 이 압축으로 인해 핵분열 물질은 임계량을 초과하게 되고, 핵분열 연쇄 반응이 일어나 막대한 에너지를 방출한다.[44][45]
핵분열 반응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프라이머리 코어 내부에 소량의 핵융합 연료(삼중수소 가스 등)를 첨가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를 '''부스팅'''(Boosting, 증폭)이라고 부른다.[44][45] 핵분열 폭발 시 발생하는 고온 고압 환경에서 삼중수소는 압축되어 핵융합 반응을 일으킨다. 이 핵융합 반응 자체는 전체 핵출력에 크게 기여하지 않지만, 다량의 고에너지 중성자를 효율적으로 방출한다. 이 중성자들이 다시 핵분열 물질에 흡수되어 추가적인 핵분열을 유도함으로써, 전체 핵분열 반응률을 크게 향상시킨다. 참고로, 부스팅 기술이 없었던 초기 원자폭탄인 리틀 보이는 사용된 우라늄의 약 1.4%, 팻 맨은 플루토늄의 약 14%만이 핵분열 반응을 일으킨 것으로 추정된다.[44][45]
프라이머리에서 발생한 에너지는 이후 세컨더리(2단계)의 핵융합 연료를 압축하고 점화하는 데 사용된다.
3. 2. 2차 폭탄 (핵융합 연료)
1. 기폭 전 핵탄두.2. 1차 폭약 기폭 및 핵분열 코어 압축.
3. 1차 핵분열 시작, X선 방출 및 2차 탬퍼 가열.
4. 2차 푸셔/탬퍼 표면 증발 및 팽창, 반작용으로 내부 압축, 스파크 플러그 핵분열 시작.
5. 2차 핵융합 시작.]]
2차 폭탄의 핵융합 반응은 다음과 같은 단계적 과정을 통해 일어난다.
1. 1차 폭탄 폭발: 1차 핵분열 폭탄이 폭발하여 막대한 양의 X선 에너지를 방출한다.
2. 에너지 전달 및 2차 압축: 1차 폭탄에서 방출된 X선은 폭탄 케이싱 내부의 '방사선 채널(Radiation Channel)'을 통해 2차 폭탄으로 전달된다. 이 채널은 X선을 효율적으로 전달하고 2차 폭탄을 감싸는 푸셔/탬퍼 표면에 집중시킨다. X선을 흡수한 푸셔/탬퍼 표면은 극도로 뜨거워져 증발하며 바깥쪽으로 폭발적으로 팽창한다(이를 증발(어블레이션)이라고 한다). 이 강력한 팽창의 반작용으로 푸셔/탬퍼는 안쪽으로 엄청난 속도로 밀려들어가 핵융합 연료와 스파크 플러그를 강력하게 압축한다. 방사선 채널 내부에는 폴리스티렌 폼과 같은 물질이 채워져 있을 수 있는데, 이는 X선 에너지를 플라즈마 형태로 변환하여 압력을 전달하거나(플라즈마 압력 이론), 에너지 전달 시간을 조절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50] "포그뱅크(Fogbank)"라는 코드명의 특수 물질(아마도 에어로젤 형태)이 이 과정에 사용될 수 있다는 정보도 있다.[46][48]
3. 스파크 플러그 핵분열: 강력한 압축으로 인해 중심부의 스파크 플러그는 임계량을 넘어 핵분열을 시작한다.
4. 핵융합 점화: 스파크 플러그의 핵분열로 발생한 고온과 중성자는 이미 극도로 압축된 핵융합 연료(중수소화 리튬)를 더욱 가열하고, 리튬과 중성자의 반응을 통해 삼중수소를 생성시킨다. 고온, 고압 상태의 중수소와 삼중수소는 마침내 핵융합 반응을 시작하여 막대한 에너지를 방출한다 (D + T → 4He + n + 17.6 MeV).
5. 탬퍼 핵분열 (선택 사항): 핵융합 반응에서 방출된 고에너지 중성자는 우라늄-238 탬퍼를 타격하여 추가적인 핵분열을 일으킨다. 이 단계는 폭탄의 전체 위력을 크게 증가시키지만, 동시에 많은 양의 방사성 낙진을 발생시킨다.
압축 메커니즘 이론1차 폭탄의 에너지가 어떻게 2차 폭탄을 압축하는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이론이 제시되었다.
- 방사 압력 (Radiation Pressure): 1차 폭탄에서 방출된 강력한 X선 자체가 가지는 압력으로 2차 폭탄을 압축한다는 이론이다. 초기 실용안으로 여겨졌으나, 계산된 압력이 다른 메커니즘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다.
- 플라즈마 압력 (Plasma Pressure): X선이 방사선 채널 내의 폴리스티렌 폼과 같은 물질을 고온의 플라즈마 상태로 만들고, 이 플라즈마의 팽창 압력으로 2차 폭탄을 압축한다는 이론이다. --
- 증발 압력 (Ablation Pressure): X선이 2차 폭탄의 푸셔/탬퍼 표면을 직접 가열하여 증발시키고, 그 증발 가스가 바깥으로 분출되는 반작용(로켓과 같은 원리)으로 내부를 압축한다는 이론이다. 현재 가장 유력한 메커니즘으로 받아들여지며, 계산 결과 다른 이론들보다 훨씬 강력한 압력을 생성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49]
아래는 각 압력 메커니즘에 의해 생성될 수 있는 압력을 아이비 마이크 실험과 W80 핵탄두에 적용하여 비교한 추정치이다.[49]
| 압력 메커니즘 | 아이비 마이크 실험 추정 압력 | W80 핵탄두 추정 압력 |
|---|---|---|
| 방사 압력 | 7.3 테라파스칼 (7,300만 바) | 140 테라파스칼 (14억 바) |
| 플라즈마 압력 | 35 테라파스칼 (3억 5천만 바) | 750 테라파스칼 (75억 바) |
| 증발 압력 | 530 테라파스칼 (53억 바) | 6.4 페타파스칼 (640억 바) |
계산 결과 증발 압력이 다른 방식에 비해 월등히 높은 압력을 발생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 무기에서는 이러한 메커니즘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50]
설계의 발전과 변형초기 수소폭탄은 아이비 마이크처럼 거대하고 무거웠으나, 중수소화 리튬과 같은 건식 연료의 사용과 설계 최적화를 통해 점차 소형화, 경량화되었다. 특히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이나 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SLBM)에 탑재하기 위한 MIRV 기술이 발전하면서 핵탄두의 소형화는 더욱 중요해졌다.
1990년대에 보도된 W88 핵탄두의 경우, 기존의 구형 1차 폭탄 대신 회전 타원체(달걀 모양)의 1차 폭탄과 구형의 2차 폭탄을 특수한 모양의 케이싱 안에 배치하여 크기를 획기적으로 줄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 보도와 관련된 중국의 스파이 사건은 W88 핵탄두의 세부 사항이 유출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했다.[65][66][67] 이러한 비구형 설계는 계산이 매우 복잡하지만, 제한된 공간 안에 더 높은 위력의 핵탄두를 탑재할 수 있게 해준다.[68][69] W88 핵탄두는 최대 지름 55cm, 높이 175cm 크기에 질량은 약 360kg 이하이면서, 핵출력은 최대 475 킬로톤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68]
3. 3. 방사선 내폭
텔러-울람 설계에서 1단계(프라이머리)의 핵분열 에너지를 2단계(세컨더리)의 핵융합 연료로 전달하여 압축하고 점화하는 정확한 메커니즘은 오랫동안 기밀이었으며, 여러 가설이 제기되어 왔다. 초기에는 스타니슬라프 울람이 제안했던 것처럼 1단계 폭발의 충격파를 이용하는 방식이 고려되었으나, 효과적이지 않아 폐기되었다.[44][45] 이후 1단계에서 방출되는 막대한 양의 X선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X선 에너지가 2단계를 압축하는 구체적인 방식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주요 가설이 있다.=== X선 전달 및 압축 메커니즘 가설 ===
==== 방사 압력 (Radiation Pressure) ====
가장 먼저 제기된 실용적인 가설 중 하나는 X선 자체가 지닌 방사 압력을 이용하는 것이다. 1단계에서 방출된 강력한 X선이 2단계의 외부(탬퍼/푸셔)에 직접 압력을 가해 압축한다는 이론이다. 이 방법은 미국인 저널리스트 하워드 모랜드가 1979년 잡지 'The Progressive'에 기고한 글을 통해 대중에게 알려지면서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이후 계산 결과, 방사 압력만으로는 2단계를 충분히 압축하기에는 부족하다는 분석이 나왔다.[49]
==== 발포제 플라즈마 압력 (Foam Plasma Pressure) ====
미국의 연구가 척 핸슨은 핵탄두 용기 내부에 채워진 특수한 발포 플라스틱(주로 폴리스티렌 폼)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가설을 제기했다. 이 가설에 따르면, 1단계에서 방출된 X선은 먼저 폭탄 케이싱 내부의 채널(방사선 채널)을 통해 반사 및 전달되어 2단계 주변을 채우고 있는 폴리스티렌 폼에 흡수된다. X선을 흡수한 폼은 순식간에 고온의 플라즈마 상태로 변하며, 이 플라즈마가 팽창하면서 발생하는 강력한 압력이 2단계의 탬퍼/푸셔를 모든 방향에서 균일하게 압축시킨다는 것이다.[47]
이 방식은 압축의 균일성을 높이는 데 유리할 수 있다. 그러나 후속 분석에서는 순수한 폴리스티렌 폼이 X선을 효율적으로 흡수하기 어렵고, 생성된 플라즈마의 압력도 다른 메커니즘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을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49] 일부에서는 발포제에 토륨이나 우라늄과 같은 중원소 염류를 첨가하여 X선 흡수율을 높였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47] 미국 정부의 기밀 해제된 문서에서도 발포 플라스틱이 실제로 사용되었음을 시사하지만, 그 정확한 역할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50] "포그뱅크(Fogbank)"라는 비공식 코드명으로 불리는 물질이 이 발포제와 관련이 있을 수 있으며, 이는 에어로젤 형태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 물질의 생산은 복잡하고 위험한 공정을 포함한다.[48]
==== 탬퍼/푸셔 증발 압력 (Tamper/Pusher Ablation Pressure) ====
현재 가장 유력하게 받아들여지는 가설은 어블레이션(ablation, 표면 증발) 효과를 이용하는 방식이다. 이 가설에 따르면, 1단계에서 방출된 강력한 X선은 2단계의 가장 바깥층인 탬퍼/푸셔(주로 우라늄 238이나 납과 같은 중금속으로 만들어짐) 표면에 집중적으로 흡수된다. X선 에너지를 흡수한 탬퍼 표면 물질은 극도로 높은 온도로 가열되어 순식간에 증발하고 바깥쪽으로 격렬하게 팽창(폭발)한다. 작용-반작용 법칙에 따라, 이 바깥쪽으로의 폭발적인 팽창은 안쪽으로 향하는 엄청난 반작용 압력을 생성하며, 이 압력이 탬퍼의 나머지 부분과 내부의 핵융합 연료, 스파크 플러그 부분을 강력하고 빠르게 압축시킨다.[49]

1. 기폭 전의 핵탄두. 위쪽 구체가 1단계(프라이머리), 아래쪽 원통이 2단계(세컨더리)이다.
2. 1단계의 고성능 폭약이 기폭되어 핵분열 코어가 압축된다.
3. 1단계의 핵분열 반응이 시작되어 수백만 ℃의 온도에 도달하며, 강력한 X선과 감마선이 방사되어 케이싱 내부와 2단계의 탬퍼/푸셔를 가열한다.
4. 1단계 폭발과 함께 2단계 탬퍼/푸셔 표면이 X선에 의해 급격히 가열되어 증발(어블레이션)하며 바깥쪽으로 팽창한다. 그 반작용으로 탬퍼의 나머지 부분과 내부의 핵융합 연료, 스파크 플러그가 안쪽으로 강력하게 압축된다. 압축된 스파크 플러그는 핵분열을 시작한다.
5. 고도로 압축되고 가열된 2단계의 핵융합 연료가 반응을 시작하며, 거대한 화구가 생성되기 시작한다.
이 증발 압력 메커니즘은 다른 가설들에 비해 훨씬 더 강력한 압축력을 발생시킬 수 있는 것으로 계산된다. 예를 들어, 아이비 마이크 실험과 W80 핵탄두의 경우를 비교 계산하면 다음과 같다.[49]
| 압력 발생 방식 | 아이비 마이크 실험 추정 압력 | W80 핵탄두 추정 압력 |
|---|---|---|
| 방사 압력 | 7,300만 바 (7.3TPa) | 14억 바 (140TPa) |
| 발포제 플라즈마 압력 | 3억 5천만 바 (35TPa) | 75억 바 (750TPa) |
| 탬퍼/푸셔 증발 압력 | 53억 바 (530TPa) | 640억 바 (6.4PPa) |
계산 결과, 증발 압력은 플라즈마 압력보다 10배 이상, 방사 압력보다는 100배 가까이 더 강력한 압력을 생성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X선 에너지가 탬퍼/푸셔에 흡수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이므로, 이 강력한 증발 압력 효과가 2단계 압축의 주된 동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 복합적 메커니즘 가능성 ====
실제 핵무기 설계에서는 위의 메커니즘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발포 플라스틱은 직접적인 플라즈마 압력을 생성하는 역할보다는, X선 에너지가 2단계 전체에 비교적 균일하게 도달하도록 시간을 벌어주거나 에너지 전달을 조절하는 완충재 역할을 할 수 있다.[50] 리처드 로즈는 그의 저서 "원폭에서 수폭으로"에서 아이비 마이크 실험 당시 과학자 및 기술자들과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폴리스티렌 폼이 사용되었지만 주된 압축은 X선 방사선 자체로 충분했으며 폼은 다른 목적(예: 구조적 지지)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텔러-울람 설계의 '방사선 내폭'은 1단계에서 방출된 X선이 2단계의 탬퍼/푸셔 표면을 증발(어블레이션)시키면서 발생하는 강력한 반작용 압력을 통해 2단계를 압축하는 메커니즘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발포 플라스틱과 같은 다른 요소들이 에너지 전달 과정이나 압축의 균일성을 높이는 데 보조적인 역할을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정확한 세부 사항은 여전히 군사 기밀로 분류되어 있다.
4. 핵무기 개발 경쟁과 확산
열핵폭탄(수소폭탄)을 더 작은 핵분열 폭탄으로 기폭하는 아이디어는 엔리코 페르미가 제안했으며, 그의 동료 에드워드 텔러에 의해 1941년 맨해튼 계획의 일환으로 연구되기 시작했다. 텔러는 자신에게 할당된 핵분열 폭탄 개발 임무에는 다소 소홀하면서도, 열핵폭탄 설계 방법을 확립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회의에서 텔러가 보인 난해하고 이의를 제기하는 태도로 인해, 오펜하이머는 그를 핵분열 폭탄 개발에서 분리시켜 다른 물리학자들이 주요 과제에 집중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thumb'' 로미오 핵실험]]
텔러의 동료였던 스타니슬라프 울람은 작동 가능한 핵융합 무기 설계를 위한 중요한 개념적 돌파구를 마련했다. 울람은 두 가지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했는데, 첫째는 핵융합 연료를 초고온으로 가열하기 전에 먼저 압축하여 핵융합에 필요한 조건을 만드는 것이었고, 둘째는 다단계 반응을 위해 핵융합 물질(세컨더리)을 핵분열 기폭장치(프라이머리) 외부에 배치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세컨더리를 압축하는 것이었다. 이후 텔러는 프라이머리에서 발생하는 감마선과 X선 방사선이, 모든 부품을 "홀라움(Hohlraum)" 또는 방사선 케이스로 감쌀 경우, 세컨더리를 압축하고 점화시키는 데 충분한 에너지를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텔러와 그의 지지자들, 그리고 반대론자들은 울람이 제안한 이 기본 작동 원리에 대해 논의를 벌였다.
1951년, 이 설계 원리에 기반한 그린하우스 작전의 '조지(George)' 핵실험이 소규모로 실시되었고, 실험 결과는 설계의 타당성에 대한 기대를 확신으로 바꾸어 놓았다.
1952년 11월 1일, 텔러-울람 설계의 완전한 형태인 아이비 작전의 '마이크(Mike)' 실험이 에니웨토크 환초에서 진행되었다. 이 실험은 10.4 메가톤의 핵출력을 기록했는데,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가사키에 투하된 팻 맨 원자폭탄 위력의 450배가 넘는 수준이었다. '소시지(Sausage)'라는 별명으로 불린 이 실험 장치는 기폭을 위해 거대한 핵분열 폭탄을 사용했으며, 액체 상태의 중수소 18톤을 극저온으로 유지해야 했기 때문에 전체 장치의 무게는 70톤에 달했다.
마이크 실험에 사용된 액체 중수소 연료는 실제 무기로 배치하기에는 비실용적이었다. 다음 단계에서는 고체 형태의 중수소화 리튬 핵융합 연료가 대신 사용되었다. 1954년 3월 1일, 이 방식은 캐슬 작전의 '브라보(Bravo)' 실험에서 성공적으로 시연되었으며, 15 메가톤의 핵출력을 기록했다. '에비(Shrimp)'라는 별명의 이 실험 장치는 미국이 실시한 핵실험 중 가장 강력한 위력을 보였다.
미국은 즉시 텔러-울람 설계 기반 무기의 소형화에 착수하여 ICBM과 SLBM에 탑재 가능한 형태로 개발했다. 1960년에는 메가톤급 위력의 핵탄두가 직경 약 0.5m, 무게 320kg까지 소형화되어 W47 핵탄두[52]로 폴라리스 미사일에 탑재, 잠수함에 배치되었다. 그러나 이후 W47 핵탄두는 테스트 과정에서 신뢰성 문제가 발견되어 설계 변경이 필요했다. 핵탄두 소형화 기술은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고, 텔러-울람 설계는 10개 또는 그 이상의 핵탄두를 하나의 미사일에 탑재하는 MIRV 기술로 발전했다(자세한 내용은 W88 핵탄두 참조).[43]
4. 1. 소련의 수소폭탄 개발
소련에서 자체적인 수소폭탄 개발에 참여한 과학자들은 메가톤급 융합 무기를 개발하는 데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클라우스 푸흐스는 수소폭탄 설계의 아주 초기 단계(텔러-울람 방식이 완성되기 전)에만 로스앨러모스에 있었기 때문에, 그의 첩보 정보는 소련의 개발에 별 도움이 되지 않았고, 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소련 물리학자들은 자체적으로 무기를 개발해야 했다.1949년 안드레이 사하로프와 비탈리 긴즈부르크가 개발한 최초의 소련 융합 설계는 러시아의 겹겹이 쌓인 퍼프 페이스트리에서 따온 Слойка|슬로이카ru라고 불렸다. 이는 텔러-울람 설계와는 다른 방식으로, 핵분열 물질과 중수소화 리튬 융합 연료(트리튬으로 강화)를 교대로 쌓은 구조였다. 이것은 나중에 사하로프의 "첫 번째 아이디어"라고 불렸다. 이 설계는 핵융합을 기술적으로 달성했지만, 다단계 무기의 확장성을 갖지 못했다. 1953년 RDS-6(미국 코드명 Joe-4) 실험에서 400ktonTNT (융합 에너지 비율 15%–20%)의 위력을 기록했으나, 이는 텔러-울람 방식의 수소폭탄이라기보다는 대형 증폭 핵분열 무기에 가까운 하이브리드 핵분열/융합 장치로 간주된다. 슬로이카 장치는 미국의 "아이비 마이크"와 달리 실제 군사적 투입이 가능했지만, 널리 배치되지는 않았다. 소련 물리학자들은 슬로이카 설계로는 기껏해야 1메가톤의 위력을 낼 수 있을 것으로 계산했다.
1952년 미국이 "아이비 마이크" 실험을 통해 멀티메가톤 폭탄 제조 가능성을 증명하자, 소련은 새로운 설계를 모색하게 되었다. 사하로프가 회고록에서 언급한 "두 번째 아이디어"는 긴즈부르크가 1948년 11월 제안한 것으로, 폭탄에 중수소화 리튬을 사용하여 중성자 폭격으로 트리튬을 생산하는 방식이었다. 1953년 말, 물리학자 빅토르 다비덴코는 폭탄의 1차(핵분열)와 2차(핵융합) 부분을 분리하는 단계적 설계의 첫 번째 돌파구를 마련했다. 다음으로 사하로프와 야코프 젤도비치는 1954년 봄, 핵분열 폭탄의 X선을 사용하여 2차 부분을 압축하는 방식("방사선 내폭")을 개발했다. 이것이 사하로프의 "세 번째 아이디어"로 알려진 소련판 텔러-울람 설계이며, 1955년 11월 RDS-37 실험에서 1.6MtonTNT의 위력으로 성공적으로 시험되었다.
소련이 미국의 "아이비 마이크"나 "캐슬 브라보" 실험의 핵 낙진 데이터를 분석하여 설계 정보를 얻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소련의 주요 폭탄 설계자 중 한 명인 율리 하리톤은 당시 소련의 분석 능력이 부족하여 유용한 정보를 얻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반면 사하로프는 회고록에서 미국의 캐슬 브라보 실험 이후 그 위력에 놀라 미국의 설계가 자신들의 것보다 우수하며, 분리된 핵분열 폭발로 융합 연료를 압축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고 밝혔다. 이후 그는 X선을 이용한 대칭적 압축 방법을 연구하게 되었다고 한다.

소련은 1961년 10월, 거대하고 다루기 힘든 '''차르 봄바'''를 폭발시켜 "단계적 설계" 개념의 위력을 과시했다. 이 수소폭탄은 50MtonTNT의 위력을 냈으며, 에너지의 거의 97%를 핵융합에서 얻었다. 이는 과도한 핵 낙진을 피하기 위해 폭발 직전 우라늄 템퍼를 납으로 교체했기 때문이며, 원래 설계대로라면 약 100MtonTNT의 위력을 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차르 봄바는 특수 개조된 폭격기에서 투하되어 기술적으로는 배치 가능했지만, 군사적으로는 실용성이 떨어져 주로 소련의 국력을 과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개발 및 시험되었다. 이는 인류 역사상 개발되고 시험된 가장 강력한 핵무기이다.
4. 2. 다른 국가들의 핵 개발
영국은 텔러-울람 설계 개발 초기 어려움을 겪었으나, 1957년 5월 첫 시도(Grapple I) 실패 후 같은 해 11월 Grapple X 실험에서 1.8 MtonTNT 위력의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영국은 독자적으로 개발을 진행한 것으로 보이지만, 미국으로부터 일부 핵 낙진 데이터를 공유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이 성공 이후 영국은 미국과 1958년 미국-영국 상호 방위 협정을 체결하여 핵무기 설계 정보를 교환하게 되었다.중화인민공화국은 1967년 6월 6차 핵실험에서 3.31 MtonTNT 위력의 텔러-울람 설계 기반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이는 중국의 첫 핵분열 무기 실험 이후 불과 32개월 만에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진 핵 개발 역사상 핵분열에서 핵융합 무기 개발까지 가장 짧은 기간에 해당한다. 중국의 열핵무기 개발 프로그램은 위민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구체적인 정보는 많이 공개되지 않았다.
프랑스는 1968년 8월 카노푸스 실험을 통해 2.6 MtonTNT 위력의 텔러-울람 설계 기반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프랑스의 개발 과정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적다.
인도는 1998년 5월 11일 샤크티 작전의 일환인 샤크티 I 실험에서 수소폭탄 실험을 실시했다고 발표했다.[13] 인도 측은 실험 위력을 45 킬로톤(kt)이라고 밝혔으나, 일부 외부 분석가들은 지진계 기록을 근거로 실제 위력은 30 킬로톤(kt)에 미치지 못했을 수 있으며, 실험이 완전히 성공하지 못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14][54] 그러나 로스앨러모스 국립 연구소의 전 소장 해롤드 M. 애그뉴 박사와 같은 일부 전문가들은 인도의 주장을 신뢰할 수 있다고 평가했으며,[15] 지진 규모 분석을 통해 최대 60 킬로톤(kt)의 위력을 추정하며 인도의 발표와 부합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16][56][57][58] 인도 과학자들은 민간 피해를 우려하여 의도적으로 위력을 낮추어 실험했으며, 이 실험을 통해 최대 200 킬로톤(kt)급 열핵무기를 제작할 능력을 확보했다고 반박했다.[17][18] 설령 실험 위력이 발표보다 낮았더라도, 1차 핵폭탄(기폭 장치)의 성능 데이터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도 열핵무기 개발 능력에 기여했을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19][55]
이스라엘은 텔러-울람 설계에 기반한 수소폭탄을 보유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지만,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다.
5. 북한의 핵 개발
북한이 실시한 초기 두 차례의 핵실험(2006년과 2009년)은 비교적 위력이 낮았으며, 열핵무기(수소폭탄) 개발 징후는 뚜렷하지 않았다. 그러나 2017년 9월 6차 핵실험을 통해 북한은 열핵무기 기술을 확보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5. 1. 북한의 핵 개발 현황
핵폭탄 개발은 일반적으로 핵분열핵폭탄, 수소폭탄(열핵융합탄), 소형 핵탄두 개발의 단계를 거친다.[72] 북한은 2006년 10월 9일 1차 핵실험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2007년 4월 25일 인민군 창건일에 북한은 무수단 미사일을 처음 공개했다. 이 미사일은 소련의 잠수함 발사형 미사일 R-27(SS-N-6)을 역설계하여 자체 생산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사거리는 3000km에서 4000km에 달한다. 함경남도에 실전 배치되었고, 이란에도 수출된 것으로 전해진다.[73] 국방기술품질원 기술정보센터의 한상순 책임연구원에 따르면, 무수단 미사일은 길이 12~18.9m, 직경 1.5~2m이며 2009년 기준으로 50발이 배치되었다고 한다. 북한은 1990년대 말 개발에 착수해 2005년에 완성한 것으로 추정된다.[74] 소련의 R-27은 소형 핵탄두만을 장착하는 핵미사일이었기 때문에, 북한의 무수단 실전 배치는 소형 핵탄두 개발 가능성을 시사한다.
2016년 1월 6일, 북한은 소형화된 열핵탄두(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감지된 지진 규모는 5.1로, 이는 6~9kt 위력으로 추정되었던 2013년 3차 핵실험과 유사한 수준이었다.[23] 이 때문에 국제사회 과학자들은 북한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하며, 실제 핵융합을 이용한 수소폭탄 실험이 아닐 가능성을 시사했다.[24] 2013년 당시 대한민국 국방부는 북한이 수소폭탄 개발을 시도하고 있을 가능성을 언급한 바 있다.[20][21]
2016년 9월 9일, 북한은 5차 핵실험을 감행했으며, 그 위력은 10~30kt 사이로 추정되었다.[25][26][27]
2017년 9월 3일, 북한은 6차 핵실험을 실시했다. 이는 북한 지도자 김정은이 열핵무기 탄두로 추정되는 장치를 시찰하는 사진이 공개된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이루어졌다.[28] 6차 핵실험의 위력은 초기 70~160kt으로 추정되었으나,[29][30][31][32][33] 이후 250~300kt 이상으로 상향 조정되었다.[34][35][36][37] 제인스 정보 그룹(Jane's Information Group)은 공개된 사진 분석을 토대로 해당 폭탄의 무게를 250kg에서 360kg 사이로 추정했다.[38] 북한은 6차 핵실험을 통해 열핵무기 기술을 확보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5. 2. 북한의 핵 능력 평가
핵폭탄 개발은 일반적으로 핵분열탄, 수소폭탄(열핵융합탄), 소형 핵탄두 개발의 3단계를 거친다. 핵무기 개발 성공 국가 대부분은 3년 안에 수소폭탄 개발에도 성공하는 경향을 보였다.[72]북한은 2006년 10월 9일 1차 핵실험에 성공하며 핵 개발을 시작했다. 2007년에는 사거리 3000km에서 4000km에 달하는 무수단 미사일을 공개했는데, 이는 소련의 잠수함 발사 미사일 R-27(SS-N-6)을 역설계하여 자체 생산한 것으로 알려졌다.[73][74] R-27은 소형 핵탄두만 장착하는 미사일이었기 때문에, 북한의 무수단 실전 배치는 소형 핵탄두 개발 가능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북한은 이후 여러 차례 핵실험을 감행했다. 다음은 북한의 주요 핵실험 이력이다.
| 실험 차수 | 날짜 | 특징 및 평가 |
|---|---|---|
| 1차 | 2006년 10월 9일 | 북한 최초의 핵실험으로 핵 개발의 시작을 알렸다. |
| 2차 | 2009년 5월 25일 | 1차와 마찬가지로 비교적 낮은 위력을 보였다. |
| 3차 | 2013년 2월 12일 | 여전히 낮은 위력의 핵실험이었으나, 대한민국 국방부는 이때부터 북한의 수소폭탄 개발 가능성을 제기하기 시작했다.[20][21] |
| 4차 | 2016년 1월 6일 | 북한은 이 실험이 소형화된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한 것이라고 주장했다.[22] 그러나 감지된 지진 규모(5.1)는 6~9 킬로톤 위력으로 추정된 2013년 3차 실험과 유사하여,[23] 국제사회는 북한의 주장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며 단순 핵분열탄 또는 증폭 핵분열탄 실험일 가능성을 높게 보았다.[24] |
| 5차 | 2016년 9월 9일 | 2016년 9월 북한 핵실험. 이전 실험보다 증가한 10~30 킬로톤 사이의 위력으로 추정되었다.[25][26][27] |
| 6차 | 2017년 9월 3일 | 2017년 북한 핵실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열핵무기(수소폭탄) 탄두로 추정되는 물체를 시찰하는 사진이 공개된 직후 감행되었다.[28] 초기 위력 추정치는 70~160 킬로톤이었으나,[29][30][31][32][33] 이후 분석을 통해 250~300 킬로톤 이상으로 상향 조정되었다.[34][35][36][37] 북한은 이 실험을 통해 수소폭탄 보유국이 되었다고 주장했다. 제인스 정보 그룹(Jane's Information Group)은 공개된 사진 분석을 토대로 탄두의 무게를 250kg에서 360kg 사이로 추정했다.[38] |
종합적으로 볼 때, 북한은 핵분열탄 및 핵분열탄의 위력을 증강시킨 증폭 핵분열탄 개발에는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2017년 6차 핵실험은 상당한 위력을 보여주었으나, 이것이 완전한 형태의 수소폭탄 실험 성공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이를 다양한 투발 수단에 탑재할 수 있는 소형화·경량화 단계까지 이르렀는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6. 텔러-울람 설계 관련 공개 정보
텔러-울람 설계의 정확한 개발 과정은 관련된 여러 인물의 상반된 증언과 지속적인 기밀 유지 정책으로 인해 완전히 알려지지 않았다. 초기 수소폭탄 구상인 "수퍼"(Super) 모델은 핵분열 폭탄 주변이나 중심부에 핵융합 연료를 배치하여 핵분열의 열로 점화하려는 방식이었으나, 수년간의 연구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51년, 폴란드 출신 수학자 스타니슬라프 울람이 제시한 아이디어를 에드워드 텔러가 발전시켜 메가톤급 수소폭탄을 위한 최초의 실용적인 설계, 즉 '단계적 내폭(staged implosion)' 개념을 완성했다. 이 개념은 1951년 3월 9일 텔러와 울람이 공동으로 발표한 기밀 논문 "이종 촉매 폭발 I: 수력학적 렌즈와 방사선 거울(On Heterocatalytic Detonations I: Hydrodynamic Lenses and Radiation Mirrorseng)"에서 처음 제안되었다.[1][2] 이후 이 설계는 '텔러-울람 설계'로 알려졌지만, 울람과 텔러 각각의 정확한 기여도에 대해서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텔러는 자신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울람의 기여는 미미했다고 주장했으나, 많은 동료 과학자들은 다른 견해를 보였다.
한스 베테는 텔러가 "열핵 반응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접근 방식"을 발견했으며 이는 "영감의 문제"였다고 평가하면서도,[3][4][5] 다른 한편으로는 울람의 아이디어가 결정적이었다고 보는 시각도 많다. 핵무기 설계자 테드 테일러는 기본적인 단계화와 압축 아이디어는 울람에게, 방사선을 이용한 압축(방사선 내폭)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은 텔러에게 공을 돌렸다.[6] 일부에서는 텔러가 울람의 기여를 의도적으로 축소하려 했다는 비판도 제기되었다.[7] 텔러는 언론에서 "수소폭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것을 즐기는 듯 보였으나, 동료들의 비판에 직면하자 1955년 《사이언스》지에 기고한 글에서는 공동 연구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훗날 회고록에서는 이것이 '선의의 거짓말'이었다고 인정했다).[8] 베테는 이 논쟁에 대해 "울람이 씨앗을 뿌렸고 텔러가 그것을 키웠으니, 울람이 아버지이고 텔러가 어머니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나는 산파 역할 정도였다"고 비유하기도 했다.
텔러-울람 설계의 핵심은 무기의 핵분열 단계(1단계, 프라이머리)와 핵융합 단계(2단계, 세컨더리)를 분리하고, 1단계에서 발생하는 방사선을 이용해 2단계의 핵융합 연료를 점화하기 전에 강력하게 압축하는 것이다. 일부 설명에 따르면, 울람은 처음에 1단계의 충격파를 이용한 압축을 제안했고, 텔러가 충격파 대신 방사선을 이용하는 것이 더 효과적임을 깨달았다고 한다(방사선 내폭). 하지만 1단계와 2단계를 분리하여 단계적으로 폭발시킨다는 기본적인 아이디어 자체는 울람의 독창적인 기여로 평가받는다. 이 설계의 효율성은 많은 과학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이전까지 회의적이었던 이들조차 수소폭탄 개발이 불가피하다고 여기게 만들었다. 로버트 오펜하이머조차 이 아이디어를 "기술적으로 뛰어나다(technically sweet)"고 평가했다. 1951년 그린하우스 작전의 '조지(George)' 실험에서 이 기본 개념이 소규모로 검증되면서 성공 가능성에 대한 확신이 높아졌다.
1952년 11월 1일, 에니웨톡 환초에서 실시된 '아이비 마이크' 실험은 텔러-울람 설계를 적용한 최초의 대규모 폭발 실험이었다. "소시지(Sausage)"라는 별칭으로 불린 이 장치는 10.4 메가톤(TNT 환산)의 위력을 기록했는데, 이는 나가사키에 투하된 폭탄의 450배가 넘는 규모였다. 이 장치는 거대한 핵분열 폭탄을 기폭 장치로 사용했고, 액체 중수소를 핵융합 연료로 사용했기 때문에 이를 극저온 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약 18143.70kg의 냉각 장비가 필요했으며, 장치 전체 무게는 약 약 72574.80kg에 달했다.
액체 중수소 방식은 실용적인 무기로 사용하기에는 너무 크고 복잡했기 때문에, 미국은 곧 고체 형태의 중수소화 리튬(Lithium deuteride)을 연료로 사용하는 방식으로 전환했다. 이 방식은 1954년 '캐슬 브라보' 실험에서 처음 시도되었다. '새우(Shrimp)'라는 암호명으로 불린 이 장치는 예상보다 훨씬 강력한 15 메가톤(TNT 환산)의 위력(미국이 실험한 가장 강력한 핵폭탄)을 냈는데, 이는 연료 자체의 효율뿐만 아니라 폭탄 외부를 감싼 238U 탬퍼(tamper)가 고속 중성자에 의해 핵분열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9] 이 예상치 못한 추가 핵분열은 엄청난 양의 핵 낙진을 발생시켰고, 바람을 타고 인근 섬 주민들과 일본 어선 다이고 후쿠류 마루 선원들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히는 최악의 핵 사고 중 하나를 일으켰다.
초기에는 메가톤급의 강력한 수소폭탄 개발에 집중했지만, 이후 미국의 핵무기 개발은 대륙간 탄도 미사일(ICBM)이나 잠수함 발사 탄도 미사일(SLBM)에 탑재할 수 있도록 무기를 소형화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1970년대 중반에는 다중 개별 표적 재진입 비행체(MIRV) 기술에 적용 가능한 소형화된 텔러-울람 설계가 완성되었다.
텔러-울람 설계의 구체적인 내용은 오랫동안 최고 수준의 핵 기밀로 취급되어 왔으며, 오늘날에도 공식적인 정보 공개는 매우 제한적이다. 미국 에너지부(DOE)는 정보 유출이 의심되는 경우에도 이를 확인해주지 않는 정책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는 유출된 정보의 정확성을 인정하는 결과를 피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현재 공개적으로 알려진 텔러-울람 설계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미국 정부의 단편적인 발표, 핵무기 반대 운동가나 연구자들의 분석, 그리고 과거 개발에 참여했던 과학자들의 회고 등을 통해 재구성된 것이다. 특히 1979년 하워드 모어랜드와 관련된 '미국 대 더 프로그레시브' 사건은 설계의 일부 정보가 대중에게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하위 섹션에서 다룬다.
6. 1. 기밀 유지와 정보 공개

텔러-울람 설계는 오랫동안 핵무기 관련 최고 기밀 사항으로 취급되어 왔으며, 오늘날에도 공식 문서에서는 "기밀 정보"로 분류되어 자세한 내용이 공개되지 않는다. 미국 에너지부(DOE)는 정보 유출이 발생하더라도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정책을 유지하는데, 이는 유출된 정보의 정확성을 정부가 인정하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핵탄두 케이스 이미지 등을 제외하면, 설계에 대해 공개적으로 알려진 정보는 대부분 미국 에너지부의 간결한 발표와 일부 연구자들의 분석에 기반한다.
미국 에너지부는 다음과 같은 제한적인 정보만을 기밀 해제했다.
- 1972년: "열핵(TN) 무기에서 핵분열 '1차'가 '2차'로 지칭되는 열핵 연료의 TN 반응을 유발하는 데 사용된다는 사실"
- 1979년: "열핵 무기에서 핵분열 폭발로 인한 방사선이 격리되어 열핵 연료를 포함하는 물리적으로 분리된 구성 요소를 압축하고 점화하는 데 에너지를 전달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사실." 이 발표에는 "이 성명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기밀로 분류될 것"이라는 단서가 붙었다.
- 1991년: 소위 '스파크 플러그'와 관련하여 "어떤 2차 장치에 핵분열성 및/또는 분열성 물질이 존재한다는 사실, 물질은 확인되지 않았고, 위치는 명시되지 않았으며, 용도는 명시되지 않았고, 무기는 지정되지 않았다."[60]
- 1998년: "채널에 물질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과 '채널 필러'라는 용어는 자세한 설명 없이" 기밀 해제되었는데, 이는 방사선 채널을 채우는 폴리스티렌 폼 등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된다.[60]
이러한 발표가 텔러-울람 설계 모델의 정확성을 얼마나 뒷받침하는지는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미국 정부는 핵무기의 기술적 세부 사항에 대한 공식 발표에서 (스미스 보고서의 사례처럼) 의도적으로 내용을 모호하게 한 전례가 있다. 일부 초기 무기에 사용된 연료 종류 등 다른 정보는 기밀 해제되었지만, 핵심적인 기술 정보는 여전히 공개되지 않고 있다.
현재 텔러-울람 설계에 대한 대중적 이해는 1979년 반핵 운동가 하워드 모어랜드가 잡지 '더 프로그레시브'에 기고하려던 "수소 폭탄의 비밀"이라는 기사를 미국 에너지부가 사전 검열하려 시도했던 사건의 영향이 크다. 모어랜드는 1978년, 핵무기의 "마지막 남은 비밀"을 폭로함으로써 군비 경쟁 문제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환기하고, 핵무기와 기밀 유지의 필요성에 대한 정부의 주장에 시민들이 의문을 제기하도록 만들고자 했다. 그는 공개된 자료(심지어 ''아메리카 백과사전''의 그림 포함)와 전직 로스앨러모스 국립 연구소 과학자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정보를 수집했다.
모어랜드는 핵무기의 "비밀"이 1차(핵분열) 단계와 2차(핵융합) 단계가 분리되어 있으며, 1차 단계에서 방출되는 방사선 압력이 2차 단계를 점화하기 전에 압축하는 데 사용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의 기사 초안이 DOE에 넘어가자, 정부는 해당 정보가 기밀 출처에서 유래했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1954년 미국 원자력법의 "태생적 비밀(born secret)" 조항에 따라 기밀로 간주되어야 하며, 핵 확산을 조장할 위험이 있다고 주장하며 기사 게재 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다. 법원은 가처분을 인용했고, 이는 ''미국 대 더 프로그레시브 외''(1979) 항소심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DOE가 "비밀"이라고 주장한 정보 중 일부가 이미 오래전에 학생 백과사전에 실렸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또 다른 핵무기 연구가인 척 핸슨이 독자적인 분석 결과를 신문에 게재하면서 DOE의 입지가 약화되었다. 결국 DOE는 소송을 취하했고, 모어랜드의 기사는 1979년 11월 '더 프로그레시브'에 게재될 수 있었다. 이후 모어랜드는 자신의 분석을 수정하여, 방사선 압력보다는 폼(폴리스티렌)과 같은 매체가 2차 압축에 사용되며, 2차 단계 내부에 핵분열 물질로 된 '스파크 플러그'가 있을 것이라는 내용을 정정 기사를 통해 발표했다.[40] 그는 이 과정을 상세히 담은 책 "폭발한 비밀(The Secret That Exploded)"(1981)을 출간했다.
미국 정부가 모어랜드의 기사를 검열하려 했던 이례적인 시도는 그 내용이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정확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정도까지 정확한지, 혹은 잘못된 정보가 포함되어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여러 국가가 텔러-울람 설계를 독자적으로 개발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는 사실은, 단순히 공개된 정보만으로는 실제 핵무기를 제조하기 어렵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어랜드가 1979년에 제시한 아이디어는 오늘날 텔러-울람 설계에 대한 추측과 논의의 중요한 기초를 제공했다.
미국에서는 정부나 관련 기업 소속이 아닌 개인이 생성한 핵무기 관련 정보라 할지라도 "태생적 비밀" 원칙에 따라 기밀로 분류될 수 있다(이 원칙의 헌법적 유효성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제가 민간 연구나 추측에 실제로 적용되는 경우는 드물며, 미국 에너지부는 정보 유출 가능성에 대해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핵무기에 대한 공개된 정보는 공식 발표, 과거 개발자들의 비공식적인 증언, 알려진 물리학 법칙에 기반한 추론 등이 뒤섞여 있어 여전히 불확실한 부분이 많다.
6. 2. 프로그레시브 사건
현재 텔러-울람 설계에 대한 대중적인 이해는 대부분 1979년, 반핵 운동가이자 언론인인 하워드 모어랜드(Howard Morland)가 잡지 《더 프로그레시브》(The Progressive)에 기고한 글 "수소폭탄의 비밀(The H-Bomb Secret)"을 통해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미국 에너지부(DOE)는 이 기사의 게재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모어랜드는 1978년, 수소폭탄 설계의 "마지막 남은 비밀"을 밝혀내고 공개하는 것이 군비 경쟁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환기시키고, 시민들이 핵무기와 핵 기밀 유지의 중요성에 대한 정부의 공식 입장에 의문을 제기하도록 만들 것이라고 생각했다.모어랜드는 무기 작동 방식에 대한 정보를 주로 공개된 자료, 특히 《아메리카 백과사전》(Encyclopedia Americana)의 그림 등에서 수집했다. 또한, 그는 로스앨러모스 국립 연구소 출신의 여러 과학자들(에드워드 텔러와 스타니슬라프 울람 포함, 비록 그들에게서 직접적인 정보는 얻지 못했지만)과 비공식적인 인터뷰를 진행했으며, 때로는 "스파크 플러그를 아직도 사용하나요?"와 같은 유도 질문을 던지는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정보를 얻으려 했다.
모어랜드는 연구 끝에 수소폭탄의 "비밀"이란 핵분열을 일으키는 '1단계(primary)'와 핵융합을 일으키는 '2단계(secondary)'가 물리적으로 분리되어 있으며, 1단계 폭발 시 발생하는 방사선 압력이 2단계를 점화시키기 전에 압축하는 데 사용된다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더 프로그레시브》에 실릴 예정이었던 그의 기사 초고가 모어랜드의 활동에 비판적인 교수에게 넘어갔고, 이 초고는 다시 DOE로 전달되었다. DOE는 즉각 기사 발행 금지를 요청하며 법원에 임시 가처분 신청을 냈다. DOE는 모어랜드의 정보가 (1) 기밀 출처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고, (2)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1954년 원자력법의 '태생적 기밀' 조항에 따라 기밀 정보에 해당하며, (3) 공개될 경우 위험하고 핵 확산을 부추길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짧은 법정 심리 끝에, 담당 판사는 모어랜드와 변호인단의 반론에도 불구하고 예방 차원에서 가처분 신청을 인용했다. 이에 모어랜드 측은 《미국 대 더 프로그레시브 외》(United States v. The Progressive, Inc., 1979) 소송으로 항소했다.
하지만 여러 복잡한 상황이 전개되면서 DOE의 입지는 약화되었다. DOE가 "비밀"이라고 주장했던 정보 중 일부가 이미 몇 년 전에 학생용 백과사전에 실렸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결정적으로, 또 다른 아마추어 핵무기 연구가인 척 핸슨(Chuck Hansen)이 모어랜드의 설명과는 다른 자신만의 수소폭탄 설계 추측을 위스콘신주의 한 신문에 발표하자, DOE는 《더 프로그레시브》에 대한 소송을 유지할 명분이 사라졌다고 판단하여 소송을 취하했다. 결국 《더 프로그레시브》는 1979년 11월, 모어랜드의 기사를 게재했다. 그러나 이때 모어랜드는 자신의 초기 가설을 수정했다. 그는 2단계 압축에 방사선 압력 대신 폴리스티렌과 같은 폼(foam) 매개체가 사용되며, 2단계 내부에는 핵분열성 물질로 만들어진 '스파크 플러그'가 있다는 새로운 설명을 내놓았다. 이러한 수정 내용은 항소 과정에서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한 달 뒤 《더 프로그레시브》에 짧은 정정 기사 형태로 발표되었다.[40] 모어랜드는 1981년 자신의 경험과 추론 과정을 상세히 담은 책 《폭발한 비밀(The Secret That Exploded)》을 출간했다.
DOE가 이례적으로 기사 내용을 문제 삼아 검열을 시도했다는 사실 자체는 모어랜드가 밝혀낸 정보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정확했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정부는 공개된 정보의 정확성 여부에 대해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또한, 영국과 같이 설계 원리를 알고 있었던 국가들도 실제 무기 개발에는 어려움을 겪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단순히 설계 정보만으로는 열핵무기를 쉽게 제조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79년 모어랜드가 제시한 아이디어들은 오늘날 텔러-울람 설계에 대한 공개적인 논의와 추측의 중요한 기초가 되고 있다. 이 사건은 핵무기 정보 공개와 국가 안보 유지라는 상충하는 가치 사이의 긴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남아있다.
7. 결론
텔러-울람 설계와 같은 실제 핵분열 및 핵융합 병기에 관한 상세 정보는 대부분의 국가에서 기밀로 취급된다. 특히 미국에서는 정부나 관련 기업 외의 인물이 생성한 정보조차 "태생적 기밀 정보"라는 법률 원칙에 따라 기밀로 분류하려 하지만, 이 원칙의 헌법상 효력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으며 민간 연구나 예측에는 거의 적용되지 않았다.
미국 에너지부는 이러한 정보의 유출 여부에 대해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않는 정책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는 정보의 정확성을 암묵적으로 인정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함이다. 과거 미국 정부가 언론의 병기 관련 보도를 사전에 검열하려 시도한 사례도 있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결과적으로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공개된 정보는 상당 부분 모호하며, 일반적으로 알려진 핵무기 관련 설명은 추측, 기지의 정보에 기반한 리버스 엔지니어링, 또는 유사한 물리학 영역과의 비교 등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텔러-울람 설계에 관해 공개된 지식 역시, 알려진 몇 가지 특정 사례에 맞춰 정리된 단편적인 정보에 불과하며 여전히 많은 부분이 불확실한 상태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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