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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고에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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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와고에성 전투는 1545년에서 1546년 사이에 일어난 전투로, 호조 가문과 간토 지방의 연합 세력 간의 대립을 보여준다. 무로마치 시대 이후 간토 지방의 혼란 속에서 호조 가문은 세력을 확장했고, 이에 맞서 연합군은 가와고에 성을 포위했다. 호조 우지야스는 기습 작전을 통해 승리했고, 이 전투의 결과로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이 멸망하고,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이 몰락하면서 간토 지방의 권력 구도가 재편되었다. 전투의 규모와 양상에 대한 논란이 있으며, 다양한 문헌과 연구를 통해 재해석이 이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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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와고에성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명가와고에 성 전투 (河越城の戦い)
다른 이름가와고에 야전 (河越夜戦)
일부센고쿠 시대
시기1545년 10월 ~ 1546년 5월 19일
위치무사시국 가와고에성 (현재의 사이타마현 가와고에시)
결과호조 씨의 승리, 우에스기 도모사다 전사, 포위 실패
교전 세력
교전 1후 호조 씨
교전 2우에스기 씨
아시카가 쇼군
지휘관 및 지도자
호조 씨호조 우지야스 (구원군 지휘관)
호조 쓰나시게 (수비군 지휘관)
다메 모토타다
지바 도시타네
우에스기-아시카가 연합군우에스기 도모사다
우에스기 노리마사 (간토 간레이)
아시카가 하루우지 (간토 구보)
여러 간토 다이묘
병력 규모
호조 씨수비군: 3,000명, 구원군: 8,000명, 총합: 11,000명
우에스기-아시카가 연합군총합: 80,000명
피해 규모
호조 씨불명확, 추정상 최소
우에스기-아시카가 연합군13,000명 ~ 16,000명 사망 또는 부상
관련 전투
호조 씨 가문의 전투 목록아라이
에도
나시노키다이라
가마쿠라 (1526)
오자와라
무사시-마쓰야마 1537
가와고에 (1537)
고노다이 1538
가와고에 (1545)
스루가-사가미
오다와라 1561
무사시-마쓰야마 1563
고노다이 1564
하치카타 1568
오다와라 1569
미마세토게
간바라
니라야마
후카자와
오모스
가나가와
덴쇼-진고
하치카타 1590
오다와라 1590
시모다
오시
기타 정보
관련 정보"야전"은 "야센"으로 음독되는 경우도 있지만, 음성상 "야전"과의 구분을 위해 훈독으로 "요이쿠사"로 읽히는 경우가 많다.
시각 자료
혼마루 고텐의 가와고에 성

2. 배경

무로마치 시대 후기부터 간토 지방의 패권을 둘러싸고 고가 구보(古河公方)와 간토 간레이(関東管領)가 대립한 교토쿠의 난(享徳の乱), 간토 간레이 직을 세습하던 우에스기 씨 내부에서도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山内上杉家)과 사가미, 무사시를 기반으로 힘을 키운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扇谷上杉家)의 대립으로 일어난 조쿄의 난(長享の乱) 등 많은 전란이 일어나 간토 지방은 혼란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혼란을 틈타 호조 소운(北条早雲)이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의 영지였던 사가미로 진출, 오기가야쓰 측인 오모리 씨, 미우라 씨를 차례로 멸망시키면서 세력을 넓혔다. 소운의 아들 호조 우지쓰나(北条氏綱)는 에이쇼의 난(永正の乱)으로 고가 구보와 간토 간레이 양측이 내분으로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무사시로 진출하여 에도 성(江戸城)과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의 본거지인 가와고에 성을 함락,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1537년 우에스기 도모오키의 사망 이후 우에스기 도모사다는 간다이 사를 요새화하여 후호조 씨를 공격했으나, 호조 우지쓰나에게 가와고에 성을 빼앗겼다.

호조 우지쓰나가 사망하고, 뒤를 이은 호조 우지야스이마가와 요시모토우에스기 노리마사와 내통하여 스루가국의 호조 영지를 침공받는 등의 위기를 맞이했다. 다케다 씨까지 출진해 오면서 상황이 불리해졌고, 양 우에스기 가문의 대군에 의해 가와고에 성이 포위되었다는 상황까지 알려졌다. 다케다 신겐의 알선으로 요시모토에게 양보함으로써 굴욕적이나마 화의를 성사했고(가토의 난), 서약서를 교환한 후에 조건이 이행되어, 우지야스는 협공당하는 위기 속에서 서쪽을 수습하고, 간토 방면으로 전전할 수 있는 상황을 얻었다.

간토 방면에서는 우지야스의 매제였던 고가 구보 아시카가 하루우지는, 간토 간레이(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의 지원을 받아,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와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 양 우에스기 가도 화해하고, 세 가문은 동맹을 체결하여 무사시를 확보하기 위해 호조 씨에 대한 총반격을 결정, 호조 측 일부 무사를 제외한 간토의 무사 모두에게 호령을 걸어, 우에스기 노리마사, 우에스기 도모사다, 아시카가 하루우지가 각각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호조 씨의 거점인 가와고에 성 탈환을 시작했다.[1]

2. 1. 교토쿠의 난과 조쿄의 난

무로마치 시대 후기, 간토 지방의 패권을 둘러싸고 고가 구보와 간토 간레이가 대립한 교토쿠의 난(1455년 ~ 1483년)이 발발하였다.[1] 또한 간토 간레이 직을 세습하던 우에스기 씨 내부에서도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과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의 대립으로 조쿄의 난(1487년 ~ 1505년)이 일어나는 등 간토 지방은 혼란한 상황이었다.[1]

이러한 혼란을 틈타 호조 소운이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의 영지였던 사가미국에 진출하여 세력을 넓혔다.[1] 소운의 아들 호조 우지쓰나는 에이쇼의 난(1504년 ~ 1524년)을 통해 고가 구보와 간토 간레이 양측이 내분으로 혼란스러운 틈을 타 무사시국으로 진출, 에도 성과 가와고에 성을 함락하여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다.[1]

1537년 아버지 우에스기 도모오키가 사망한 이후, 우에스기 도모사다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후호조 씨를 공격했지만, 호조 우지쓰나에게 가와고에 성을 빼앗겼다.[1] 1545년, 우에스기 도모사다는 가와고에 성을 되찾기 위해 아시카가 하루우지, 우에스기 노리마사와 연합하여 호조 우지야스에 대항했다.[1]

2. 2. 호조 소운과 호조 우지쓰나의 등장

무로마치 시대 후기부터 간토 지방의 패권을 둘러싸고 고가 구보(古河公方)와 간토 간레이(関東管領)가 대립한 교토쿠의 난(享徳の乱), 간토 간레이 직을 세습하던 우에스기 씨 내부에서도 본가인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와 사가미, 무사시를 기반으로 힘을 키운 서가(庶家)인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의 대립으로 일어난 조쿄의 난(長享の乱) 등 많은 전란이 일어나 간토 지방은 혼란한 상황이었다.

이 혼란한 시기를 틈타 호조 소운(北条早雲)이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의 영지였던 사가미로 진출하여 오기가야쓰 측인 오모리 씨, 미우라 씨를 차례로 멸망시키면서 세력을 넓혔다. 소운의 아들 호조 우지쓰나는 에이쇼의 난(永正の乱)으로 고가 구보와 간토 간레이 양측이 내분으로 혼란스러워 하는 틈을 타 무사시로 진출하여 에도 성과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의 본거지인 가와고에 성을 함락하여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우지쓰나가 병으로 사망하자, 고가 구보, 간토 간레이(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 세 가문은 동맹을 맺고 호조 가문에 대한 반격을 개시하여, 극소수를 제외한 간토의 무사 대부분을 모아 호조 우지야스를 공격했다.[1]

2. 3. 우에스기 가문의 반격과 동맹 결성

호조 우지쓰나가 병으로 사망하자, 고가 구보, 간토 간레이(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은 동맹을 맺고 호조 가문에 대한 반격을 시작했다.[1] 이들은 극소수를 제외한 간토의 무사 대부분을 모아 호조 우지야스를 공격했다.

무로마치 시대 후기부터 간토 지방의 패권을 두고 고가 구보와 간토 간레이가 대립했고(교토쿠의 난), 간토 간레이 직을 세습하던 우에스기 씨 내부에서도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와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의 대립(조쿄의 난)등 많은 전란이 일어났었다.

이 혼란한 시기를 틈타 호조 소운이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의 영지였던 사가미로 진출하여 세력을 넓혔다. 소운의 아들 호조 우지쓰나는 에이쇼의 난으로 고가 구보와 간토 간레이 양측이 내분으로 혼란스러워 하는 틈을 타 무사시로 진출하여 에도 성과 가와고에 성을 함락하여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을 멸망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1545년, 우에스기 도모사다는 아시카가 하루우지우에스기 노리마사와 연합하여 호조 우지야스에 대항했다.[1]

그러나 우지쓰나가 사망하고, 뒤를 이은 호조 우지야스이마가와 요시모토우에스기 노리마사가 내통하여 스루가국의 호조 영지를 침공받는 등의 위기를 맞이했다. 다케다 씨까지 출진해 오면서 상황이 불리해졌고, 양 우에스기 가문의 대군에 의해 가와고에 성이 포위되었다는 상황까지 알려졌다. 다케다 신겐의 알선으로 요시모토에게 양보함으로써 굴욕적이나마 화의를 성사했고(가토의 난), 서약서를 교환한 후에 조건이 이행되어, 우지야스는 협공당하는 위기 속에서 서쪽을 수습하고, 간토 방면으로 전전할 수 있는 상황을 얻었다.

간토 방면에서는 우지야스의 매제였던 고가 구보 아시카가 하루우지는, 간토 간레이(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의 지원을 받아,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와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 양 우에스기 가도 화해하고, 세 가문은 동맹을 체결하여 무사시를 확보하기 위해 호조 씨에 대한 총반격을 결정, 호조 측 일부 무사를 제외한 간토의 무사 모두에게 호령을 걸어, 우에스기 노리마사, 우에스기 도모사다, 아시카가 하루우지가 각각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호조 씨의 거점인 가와고에 성 탈환을 시작했다.

3. 전투 경과

덴분 14년(1545년) 9월 26일, 간토 간레이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노리마사,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도모사다, 고가 구보 아시카가 하루우지를 비롯한 간토 여러 다이묘 연합군은 약 8만 대군으로 호조 가문의 가와고에성을 포위했다.[8] 가와고에 성은 호조 쓰나시게가 약 3천 명의 병력으로 지키고 있었지만, 증원이 없으면 함락은 시간문제였다. 이에 호조 우지야스는 본국에서 약 8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구원에 나섰다.

전황은 수개월 동안 교착 상태에 빠졌으나, 우지야스는 계략을 써서 상황을 타개하고자 했다. 먼저 구원군에 있던 구시마 가쓰히로[9]를 사자로 보내 단기로 우에스기 연합군의 포위를 뚫고 가와고에 성에 입성시켜, 형 쓰나시게에게 기습 계획을 전했다. 또한, 우지야스는 우에스기 군에게 거짓 항복 의사를 전달하여 적을 방심하게 만들었다. 우에스기 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호조 군을 공격했지만, 우지야스는 싸우지 않고 병사들을 후퇴시켰다. 이를 본 우에스기 군은 호조 군이 전의를 상실했다고 판단했고, 많은 병사들이 경계와 규율을 느슨하게 했다.

덴분 15년(1546년) 4월 20일 밤, 우지야스는 8천 명의 병력을 4개 부대로 나누고, 그중 1개 부대를 다메 모토타다에게 지휘를 맡겨 전투가 끝날 때까지 움직이지 말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우지야스는 남은 3개 부대를 이끌고 적진에 돌입했다. 밤 12시경, 우지야스는 병사들에게 갑옷과 투구를 벗게 하여 몸을 가볍게 한 후 우에스기 연합군에 쳐들어갔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우에스기 군은 대혼란에 빠졌고, 이 혼란 속에서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의 당주 우에스기 도모사다가 전사했다.[2]

우지야스가 적진 깊숙이 들어가자, 후방에서 이를 보고 위험하다고 느낀 다메 모토타다는 소라개[10]를 불어 우지야스 군을 불러들였다. 한편, 성 안에서 전황을 지켜보던 쓰나시게는 이 기회를 틈타 아시카가 하루우지의 진영에서 "이겼다! 이겼다!"라고 외치며 부대를 이끌고 돌격했다. 하루우지 군은 앞뒤에서 적의 공격을 받고 혼란에 빠져 무너졌다.

이 전투에서 우에스기 연합군의 전사자는 13,000명에서 16,000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가와고에 성 전투는 약 10배의 병력 차이를 극복하고 승리한 것으로, 일본 전사(戰史)에서 높게 평가받는다.

3. 1. 가와고에 성 포위

덴분 14년(1545년) 9월 26일, 간토 간레이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노리마사,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도모사다, 고가 구보 아시카가 하루우지의 연합군은 약 7만 명의 대군으로 호조 쓰나시게가 지키는 가와고에 성을 포위했다.[8] 호조 쓰나시게는 약 3천 명의 병력으로 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대로라면 성이 함락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호조 우지야스는 본국에서 약 8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구원에 나섰다. 몇 달 동안 전황은 교착 상태에 빠졌지만, 우지야스의 구원군에 있던 구시마 가쓰히로(福島勝広)[9]가 사자로 나서, 혼자서 우에스기 연합군의 포위를 뚫고 가와고에 성에 들어가 형 쓰나시게에게 기습 계획을 전했다. 우지야스는 우에스기 군에게 거짓 항복 의사를 내비쳤다. 우에스기 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호조 군을 공격했지만, 우지야스는 싸우지 않고 병사들을 물렸다. 이를 본 우에스기 군은 호조 군이 싸울 의지를 잃었다고 판단했고, 많은 병사들이 방심하여 경계와 규율이 허술해졌다.

덴분 15년(1546년) 4월 20일 밤, 우지야스는 8천 명의 병력을 4개 부대로 나누고, 그중 1개 부대를 다메 모토타다(多目元忠)에게 지휘를 맡겨 전투가 끝날 때까지 움직이지 말라고 명령했다. 우지야스는 남은 3개 부대를 이끌고 적진에 돌입했다. 밤 12시경, 우지야스는 병사들에게 갑옷을 벗게 하여 몸을 가볍게 한 후 우에스기 연합군에 쳐들어갔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우에스기 군은 혼란에 빠졌고, 이 혼란 속에서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의 당주 우에스기 도모사다가 전사했다. 우지야스가 깊이 추격하자, 후방에서 이를 보고 위험하다고 느낀 다메 모토타다는 호라카이(法螺貝)[10]를 불어 우지야스 군을 불러들였다. 한편, 성 안에서 전황을 지켜보던 쓰나시게는 아시카가 하루우지의 진영에서 "이겼다! 이겼다!"라고 외치며 부대를 이끌고 돌격했다. 하루우지 군은 앞뒤에서 적의 공격을 받고 혼란에 빠져 무너졌다. 연합군의 전사자는 13,000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3. 2. 호조 우지야스의 구원

덴분 14년(1545년) 9월 26일, 호조 우지야스우에스기 노리마사, 우에스기 도모사다, 아시카가 하루우지 연합군이 가와고에성을 포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구원에 나섰다. 우지야스는 8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가와고에 성으로 향했지만, 연합군은 7만 명에 달해 포위망은 견고했다.[8]

전황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우지야스는 계략을 썼다. 먼저 구원군에 있던 구시마 가쓰히로[9]를 사자로 보내 가와고에 성에 잠입시켜 형 호조 쓰나시게에게 기습 계획을 알렸다.

그 후 우지야스는 우에스기 군에게 거짓 항복 의사를 전달했다. 우에스기 군은 이를 믿지 않고 공격해 왔지만, 우지야스는 싸우지 않고 후퇴했다. 이를 본 우에스기 군은 호조 군의 사기가 떨어졌다고 판단해 방심하게 되었다.

우지야스는 적의 방심을 틈타 기습을 준비했다.

3. 3. 야간 기습

1545년 10월 31일(덴분 14년 음력 9월 26일)에 간토 간레이 우에스기 노리마사와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도모사다, 고가 구보 아시카가 하루우지의 연합군은 약 7만 명의 대군으로 호조 쓰나시게가 지키는 가와고에 성을 포위했다. 호조 우지야스는 8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구원에 나섰으나, 전황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8] 우지야스는 우에스기 군에게 거짓 항복 의사를 보내어 방심하게 만들었다.

1546년 5월 19일(덴분 15년 음력 4월 20일) 밤, 우지야스는 8천 명의 병력을 4부대로 나누어 기습했다. 병사들에게 갑옷을 벗게 하여 재빠르게 움직이도록 하고, 우에스기 연합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이 과정에서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의 당주 우에스기 도모사다가 전사했다.[2] 한편, 가와고에 성 안의 호조 쓰나시게는 "이겼다! 이겼다!"라고 외치며 아시카가 하루우지의 진영을 공격해 승기를 잡았다.

호조 군은 닌자 첩자를 활용해 아시카가 하루우지가 승리에 지나치게 자신하여 경계를 늦추고 있다는 정보를 얻었다. 또한 사무라이들에게 무거운 갑옷을 버리고, 패배한 적군의 머리를 가져가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 기동성과 은밀성을 극대화했다. 이러한 전술은 성공하여 우에스기 도모사다가 전투에서 사망하고, 호조는 포위를 풀었다.

이 전투에서 우에스기 연합군의 전사자는 13,000명에 달했다고 전해진다. 가와고에 성 전투는 약 10배의 병력 차이를 극복하고 승리한 것으로, 일본 전사(戰史)에서 높게 평가받는다.

4. 전투의 영향

가와고에 성 전투는 간토 지방의 세력 판도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이 전투의 승리로 호조 가문은 센고쿠 다이묘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한 반면, 우에스기 가문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1]

이 전투로 오기야쓰 우에스기 가문이 멸망하고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이 몰락하면서, 우에스기 노리마사나가오 가게토라에게 의탁하였다. 이후 가게토라는 간토와 호쿠리쿠 지방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한편, 고가 공방 아시카가 하루우지는 항복하고 은거하였으며, 요시우지가 뒤를 이었다.[1]

간토 지방에서 무로마치 시대의 질서가 무너지고, 고호조 씨를 비롯한 여러 센고쿠 다이묘들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2]

4. 1. 우에스기 가문의 몰락

이 전투의 결과 우에스기 도모사다가 전사하면서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은 멸망하였고,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 역시 몰락하여 우에스기 노리마사는 거성인 히라이 성에서 쫓겨나 에치고의 나가오 가게토라에게 의탁하게 되었다.[1] 가게토라는 노리마사에게서 우에스기 성씨와 간토 간레이직을 물려받고 헨기로 마사(政) 자를 받아 우에스기 마사토라(上杉政虎)로 개명하였다.[1] 이후 가게토라는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에게서 이름 데루(輝) 자를 받아 데루토라로 개명하였고, 출가하여 우에스기 겐신으로 개명한 뒤 간토, 호쿠리쿠 지방으로 세력을 넓혔다.[1]

우에스기 노리마사는 열세를 만회하고자 시나노 국의 무라카미 요시키요 등과 조신 동맹을 맺고 고호조 씨의 공세에 대항하려 했다.[3] 그러나 무라카미 씨 등과 동맹을 맺으면서 시나노 침공을 노리던 다케다 하루노부(신겐)와 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되었고, 오다이하라 전투에서 많은 장병을 잃었다.[3] 이러한 상황에서 노리마사를 외면하고 고호조 측에 귀순하는 부하가 잇따랐고, 노리마사는 거성인 히라이 성에서 쫓겨나 나가오 가게토라(훗날의 우에스기 겐신)에게 의지하여 에치고 국으로 피신하였다.[3]

4. 2. 호조 가문의 지위 확립

이 전투의 결과로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은 멸망하였고,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 역시 몰락하여 우에스기 노리마사는 거성 히라이 성에서 쫓겨나 에치고의 나가오 가게토라에게 의탁하게 되었다.[1] 가게토라는 노리마사로부터 우에스기 성씨와 간토 간레이직을 물려받고 헨기로 마사(政) 자를 받아 우에스기 마사토라(上杉政虎)라고 개명하였다.[1] 후에 가게토라는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로부터 이름 데루(輝) 자를 받아 데루토라라고 개명하였고, 이후 출가하여 우에스기 겐신으로 개명하고 간토, 호쿠리쿠 지방으로 세력을 뻗친다.[1]

한편, 호조 가문은 간토 남서부에 세력권을 확대하고 센고쿠 다이묘로서 지위를 확고히 하면서, 에치고의 우에스기가와 가이의 다케다 가문, 히타치의 사타케 가문과의 항쟁이 시작된다.[1] 고쇼 슨 산국 동맹의 체결로 스루가 국 이마가와 가문이나 가이 국 다케다 가문과의 대립에 종지부를 찍고, 간토 제패를 목표로 에치고의 우에스기 가문(나가오 씨)나 히타치 국의 사타케 가문, 아와 국의 사토미 씨와의 항쟁에 돌입한다.[5]

이 호조의 승리는 간토 지방을 둘러싼 싸움의 결정적인 전환점을 만들었다.[6] 호조의 전술은 "사무라이 역사상 가장 주목할 만한 야전의 사례 중 하나"로 꼽힌다.[6]

우에스기 노리마사는 열세를 만회하고자 시나노 국의 무라카미 요시키요 등과 조신 동맹을 맺고, 고호조 씨의 공세에 대항하려 했다.[4] 그러나 무라카미 씨 등과의 동맹을 맺은 것으로 인해 시나노 침공을 노리는 다케다 하루노부(신겐)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되었고, 오다이하라 전투에서 다시 많은 장병을 잃었다.[4] 이러한 상황 속에서, 노리마사를 외면하고 고호조 측에 귀순하는 부하가 잇따랐고, 노리마사는 거성인 히라이 성에서 쫓겨나 나가오 가게토라(후의 우에스기 겐신)에게 의지하여 에치고 국으로 피신하게 된다.[4]

이 전투로 인해 간토 공방인 아시카가 가문과 그 집사인 간토 관령의 권위와 군사력은 결정적으로 실추되었고, 대신 고호조 씨를 비롯한 전국 다이묘가 약진했다.[2] 이는 간토, 도고쿠에서 무로마치 시대의 틀이 소멸되었음을 의미한다.[2] 이와 함께, 고호조 씨가 간토에서 권력을 확립한 전투가 되었다.[2]

4. 3. 간토 지방의 권력 재편

이 전투로 인해 간토 공방인 아시카가 가문과 그 집사인 간토 간레이의 권위와 군사력은 결정적으로 실추되었고, 대신 고호조 씨를 비롯한 센고쿠 다이묘가 약진했다. 이는 간토, 도고쿠에서 무로마치 시대의 틀이 소멸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와 함께, 고호조 씨가 간토에서 권력을 확립한 전투가 되었다.[1]

우에스기 도모사다의 전사로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은 멸망하였고,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 역시 몰락하여 우에스기 노리마사는 거성 히라이 성에서 쫓겨나 에치고의 나가오 가게토라에게 의탁하게 되었다.[1] 가게토라는 노리마사로부터 우에스기 성씨와 간토 간레이직을 물려받고 헨기로 마사(政) 자를 받아 우에스기 마사토라(上杉政虎)라고 개명하였다. 후에 가게토라는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로부터 이름 데루(輝) 자를 받아 데루토라라고 개명하였고, 이후 출가하여 우에스기 겐신으로 개명하고 간토, 호쿠리쿠 지방으로 세력을 뻗쳤다.[1]

고가 공방아시카가 하루우지도 이 직후에 어소를 포위당해 항복, 은거했다. 이때 장남이었던 아시카가 후지우지가 아닌, 호조 씨 출신의 어머니를 둔 차남인 요시우지에게 가독을 물려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자신은 유폐될 수밖에 없었다.[1]

한편, 호조 가문은 간토 남서부에서 세력권을 확대하여, 센고쿠 다이묘로서의 지위를 굳히게 된다.[1] 고쇼 슨 산국 동맹의 체결로 스루가 국 이마가와 가문이나 가이 국 다케다 가문과의 대립에 종지부를 찍고, 간토 제패를 목표로 에치고의 우에스기 가문(나가오 씨)나 히타치 국의 사타케 가문, 아와 국의 사토미 씨와의 항쟁에 돌입한다.[1]

5. 논란과 재해석

가와고에성 전투는 약 10배의 병력 차이를 뒤집고 승리하여 전쟁사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지만, 사료에 따라 전투 연월일이 달라지는 등 불분명한 점이 많아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3]

5. 1. 전투 연월일 및 사료 문제

이 전투는 관련 연도가 사료에 따라 다르고 불분명한 점이 많아,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 최근에는 덴분 15년(1546년) 4월 20일의 사건으로 집약되어 전해졌다는 설이 유력하다.[3]

5. 2. 아시카가 하루우지의 참전 동기

고후다이 전투 이후, 아시카가 하루우지호조 우지쓰나를 간토칸레이로 임명하고, 우지쓰나도 자신의 딸을 하루우지에게 시집보내는 등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하루우지는 호조 우지야스의 중립 요청을 무시하고 호조 씨와 적대하게 되었다.

나니와다 요시키 등 우에스기 씨 측의 작전이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하루우지가 우지쓰나・우지야스에게 어떤 압박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대 사료는 발견되지 않아, 구체적인 동기는 불분명하다. 우지야스는 전투 직후인 6월 10일에 하루우지의 중신 야나기다 타카스케에게 서찰을 보내 하루우지의 변절을 비난했지만, 그 후에도 하루우지와의 대립을 회피하려 했던 흔적이 있다.[4]

이에 대해, 고후다이 전투로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멸망한 후의 전후 처리가 원인이었다는 설이 있다. 요시아키가 오유미성에 본거지를 둔 것은 주변에 고가 공방의 영지가 많았기 때문이며, 요시아키가 멸망한 후에는 그러한 토지가 고가 공방의 영지로 회복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하루우지와 이 지역을 군사력으로 당지행화하려 했던 우지쓰나・우지야스 사이에서 지배 다툼이 생겨, 하루우지가 호조 씨와 결별하고 우에스기 씨와 결탁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호조 군이 스루가로 출진 중이던 1545년 10월에는 이치카와 방면으로 병력을 진격시켜, 하루우지의 최초 군사 목표는 가와고에성이 아니라, 시모사・가즈사 방면의 영지 탈환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다.[4]

5. 3. 농성전 유무와 전투 규모 논란

우에스기・아시카가 연합군의 동원 병력 수나 야전 여부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점이 있지만, 연합군 측이 호조 군보다 수적으로 우세했고 대규모 전투가 있었다는 것은 사료와 검증으로 확인되고 있다.(『고백재기(高白斎記)』 덴분 15년(1546년)조, 아시카가 하루우지『모로 씨(毛呂氏) 앞으로 보내는 서장』, 호조 우지야스『고가 공방 앞으로 보내는 서장』・『우에하라 데와노카미(上原出羽守)(오타 스케아키 중신) 앞으로 보내는 서장』)[5]

전투 경과에 대해서는, 후대에 우지야스가 "양쪽 입구에서 동시에 승리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농성 측과 후속 부대 측에서 모종의 연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6]

가와고에 야전의 격전지로 전해지는 도묘지(가와고에시 시타마치) 경내에는 가와고에 야전의 비석이 세워져 있고, 장병의 유해를 안치한 후지즈카(富士塚)가 남아있다. 호레키(宝暦) 연간에 팠더니 두개골이 500여 구 나왔다고 한다. 묘지 위에는 이나리 스와 텐만궁이 있는데, 이는 나니와다 노리시게가 가와고에 야전에서 도묘지 입구의 우물에 빠져 죽었기 때문에 영을 모신 것이다. 당시 도묘지는 광대한 사찰 영지가 있었고, 그 문전 마을은 가마쿠라 시대부터 번성했다. 그곳이 전장이 된 연유로, 옛날에는 "도묘지 입구 전투"라고도 불렸다. 메이지 시대의 도로 공사에서도 일대에서 엄청난 인골이 나왔다.

하지만, 이러한 인골을 가와고에 야전의 희생자로 보는 것은 야전의 실존을 전제로 한 이야기이며, "가와고에 야전에서 대규모 전투는 없었다"라고 주장하는 연구자 측에서는 중세 가와고에 변두리에 있던 도묘지 주변에 가마쿠라의 유이가하마나 시즈오카현의 이치노타니 분묘군 유적과 같은 대규모 분묘군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7]

구로다 모토키 등 일부 연구자들은 가와고에성 전투가 대규모 농성전 속에서 게릴라적인 습격은 있었지만, 백병전과 같은 대규모 충돌은 없었다는 설을 제기하고 있다. 그 근거로, 후호조 씨 측에서 이 전투에 관한 감사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우에스기 도모사다(上杉朝定)가 사망했다는 기록은 있지만 누가 쳐 죽였는지 등 그 죽음의 상황을 나타내는 기록은 없고 진지에서의 병사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는 점, 호조 우지야스의 서찰에서도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씨의 진지가 있던 가와고에 교외의 스나쿠보(川越市砂久保)에서 3,000명을 쳐 죽였다는 것과 이 전투를 벌인 것으로 여겨지는 나니와다 단조(難波田弾正)(노리시게)를 쳐 죽인 것은 기록되어 있지만, 성 자체의 공방전에 대해서는 언급되지 않은 점을 들고 있다.

또한, 가와고에 시립 박물관 소장의 "전 겐지 절 과거장"의 덴분 15년(1546년) 4월 15일 여백에 "가와고에 일전에서 전사 2천8백2십여 명"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3,000명 규모의 희생자가 나온 점은 사료적으로 일치하는 반면, 통설보다는 훨씬 적다. 이 설에 따르면, 가와고에성의 호조 군이 우에스기 군에게 포위되어 농성전에 들어간 것은 사실이지만, 우에스기 도모사다의 급사로 포위군이 붕괴된 것이 실정이며, 대규모 야전의 묘사는 『호조 5대기』, 『간팔주 고전록』 등 후세의 군기물에 의한 창작에 불과하다고 한다.[7]

6. 가와고에 전투를 소재로 한 작품


  • 대하드라마 바람의 린카(2007년) - 제23화 "가와고에 야전"[4]
  • 가이도 류이치로 저, 『후호조 류코덴(호조 류코덴)』(신초샤, 신초 문고) ISBN 4103027312(ISBN 410125043X)[4]

: 호조 우지야스호조 쓰나시게의 청춘과 우정을 그리고 있으며, 가와고에성 전투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4]

참조

[1] 서적 The Samurai Sourcebook Cassell & Co.
[2] 간행물 常設展示図録 川越市立博物館
[3] 서적 戦国合戦事典
[4] 논문 氏康と古河公方の政治関係 戒光祥出版
[5] 서적 河越夜戦
[6] 서적 北条氏康と東国の戦国世界 夢工房
[7] 간행물 中世の河越城-その成立と景観- 戒光祥出版
[8] 문서
[9] 문서 쓰나시게의 동생
[10] 문서 일종의 소라고동나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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