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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원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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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건원릉은 조선 태조 이성계의 능으로, 1408년 9월 9일에 조성되었다. 태종이 풍수지리에 밝은 신하들을 시켜 한양 인근의 명당을 찾게 하여 현재의 구리시 검암산 자락에 자리 잡았으며, 약 6,000명의 인원이 동원되어 능을 조성했다. 고려 공민왕의 현정릉 양식을 따르면서도 조선 왕릉만의 특징을 보여주며, 억새로 덮인 봉분이 특징이다. 건원릉을 시작으로 8기의 능이 추가로 조성되어 현재의 동구릉을 이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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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원릉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건원릉 전경 (문화재청)
건원릉 전경 (문화재청)
명칭구리 동구릉
종류사적
지정 번호193
지정일1970년 5월 26일
시대조선 시대
소유국유·사유
주소경기도 구리시 동구릉로 197 (인창동)
면적1,969,675m2
참고건원릉
문화재청 ID13,01930000,31
웹사이트1대 태조(太祖) 건원릉

2. 역사

1408년 5월 24일 조선의 초대 국왕 태조가 향년 74세로 승하하자, 태종은 부왕을 위한 능을 조성하도록 명하였다. 현재의 구리시 동구릉 자리에 터를 잡아 왕릉을 조성하였고[2], 같은 해 9월 9일 태조의 영구를 안장한 뒤 능의 이름을 '건원릉'이라 하였다. 건원릉은 이후 조성된 여러 왕릉과 함께 오늘날 동구릉을 이루는 시작점이 되었다.

2. 1. 조성 과정

1408년 5월 24일, 태조가 향년 74세로 승하하였다. 조선의 첫 왕을 모시는 왕릉 조성은 중요한 국가 사업이었기에, 태종은 지관들과 풍수지리에 능통한 신하들에게 한양 주변 100리 안에서 좋은 명당 자리를 찾도록 명하였다. 검교 참찬의정부사(檢校參贊議政府事) 김인귀가 양주 검암(현재 구리시 검암산 자락)에 좋은 자리가 있다고 추천하였고, 이를 들은 하륜태종에게 천거하였다. 이에 태종은 박자청에게 명하여 이곳에 산릉을 조성하도록 하였다.[2] 산릉 조성에는 약 6000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3] 이때 서운관에서는 능의 내부 구조인 능실을 석실로 만들자고 건의하였고, 이 방식은 이후 예종 때까지 조선왕릉 능실의 기본 형식이 되었다.[4] 같은 해 9월 9일 태조의 영구를 안장한 뒤 '건원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으며, 이후 이곳에 8기의 능이 추가로 조성되면서 오늘날의 동구릉을 이루게 되었다.

2. 2. 동구릉의 시작

1408년 5월 24일 조선의 초대 국왕 태조가 향년 74세로 승하하였다. 태종은 조선 최초의 왕이었던 태조를 모시기 위한 왕릉 조성을 위해 지관들과 풍수지리에 밝은 신하들에게 한양 주변 100리 안에서 좋은 명당 자리를 찾도록 명령했다. 이때 검교 참찬의정부사 김인귀가 양주 검암(현재 구리시 검암산 자락)에 좋은 자리가 있다고 말했고, 이를 들은 하륜이 태종에게 추천하였다. 태종은 박자청에게 이곳에 산릉을 조성하도록 지시했다.[2] 산릉 조성에는 약 6000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3] 또한, 당시 서운관에서 능의 내부 구조(능실)를 돌방(석실)으로 만들자는 건의를 올려, 이후 예종 때까지 조선왕릉의 능실은 석실로 만들어지게 되었다.[4] 같은 해 9월 9일, 태조의 관(영구)을 안장하고 능의 이름을 '건원릉'이라 하였다. 이후 건원릉 옆으로 8기의 능이 추가로 들어서면서 오늘날의 동구릉을 이루게 되었다.

3. 특징

건원릉은 조선 초대 왕 태조의 능으로서 조성 당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전체적인 양식은 고려 공민왕의 현정릉을 따랐으나, 세부적으로는 석물의 배치나 장명등의 형태에 변화를 주었고, 봉분 주위에 곡장을 두르는 등 조선 왕릉 고유의 특징을 보이기 시작했다.[5][6] 왕릉 주변 석물 조형에는 남송 말기의 양식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이며, 특히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의 배치, 장명등, 난간석주는 조선 시대에 새롭게 변화한 양식으로, 이는 《국조오례의》가 편찬되기 전까지 조선 왕릉의 기준으로 자리 잡았다.[5][6]

다른 왕릉과 달리 봉분이 잔디가 아닌 억새로 덮여 있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다. 여기에는 태조가 고향인 함흥 땅에 묻히고 싶어 했던 유언을 아들 태종이 절충하여 함흥의 흙과 억새를 가져와 봉분을 조성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7]

또한 봉분을 둘러싼 병풍석에는 십이지신상과 함께 영저(靈杵), 영탁(靈鐸)과 같은 불교적 상징물이 새겨져 있어, 고려 왕릉 양식의 영향을 보여준다. 이러한 불교적 요소는 이후 《국조오례의》 편찬 과정에서 유교식 예법에 따라 변화하게 된다.[8] 한편, 건원릉의 원찰로 개경사를 두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오늘날에는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5][6]

3. 1. 건축 양식

건원릉


건원릉은 조선 초대 왕 태조의 능으로, 조성에 많은 신경을 썼다. 조선 초기 왕릉의 기본 양식은 고려의 왕릉, 특히 공민왕의 현정릉 양식을 많이 따랐다. 다만, 세부적으로는 석물의 배치와 장명등 등의 조형에 약간의 변화를 주었으며, 봉분 주위에 곡장을 두르는 양식은 조선 시대에 새롭게 추가되었다. 왕릉 주변 석물 조형에는 남송 말기의 형식을 도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의 배치, 장명등, 난간석주는 조선 시대에 들어 새롭게 변화한 양식으로, 이러한 특징은 이후 《국조오례의》를 통해 왕릉 제도가 정비될 때까지 이어진다.[5][6]

봉분을 둘러싼 병풍석의 면석에는 십이지신상과 구름무늬를 새겼고, 면석 옆의 우석에는 불교의 수호 상징인 영저(靈杵)와 영탁(靈鐸)을 새겼다. 이는 공민왕릉의 형식을 계승한 것이지만, 《국조오례의》 편찬 이후 우석의 영저와 영탁 무늬는 구름무늬로 바뀌게 된다. 이러한 불교적 상징은 과거 신덕왕후정릉에도 사용되었으며, 현재 광통교의 신장석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8]

다른 왕릉과 달리 건원릉 봉분에는 잔디 대신 억새가 덮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야사에 따르면, 태조는 원래 신덕왕후가 묻힌 정릉에 함께 묻히길 원했으나, 태종은 생모가 아닌 신덕왕후에 대한 좋지 않은 감정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태조가 고향인 함흥 땅에 묻어달라고 유언하자, 태종은 제례의 어려움과 유언 사이에서 절충안으로 함흥의 흙과 억새를 가져와 봉분을 덮었다고 전해진다.[7]

3. 2. 억새 봉분

다른 왕릉들의 봉분이 푸른 잔디로 덮여 있는 것과 달리, 태조의 건원릉 봉분은 억새로 덮여 있다. 이는 조선의 다른 왕릉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모습이다.

왜 건원릉만 억새로 덮여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야사가 전해진다. 본래 태조는 먼저 세상을 떠난 신덕왕후와 함께 정릉에 묻히기를 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들인 태종은 계모였던 신덕왕후와 그 세력에 의해 왕위 계승에서 밀려났던 경험 때문에 신덕왕후를 매우 미워했다. 심지어 태종은 정릉 주변 백 보(약 120m) 밖까지는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할 정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태조는 자신의 뜻이 이루어지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대신 조상들이 묻혀 있는 고향 함흥 땅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태종 입장에서 조선의 초대 왕인 태조의 능을 수도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함흥에 조성하는 것은 제사를 지내는 문제 등 여러 어려움이 따랐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유언을 완전히 거스를 수도 없었던 태종은 고심 끝에 타협점을 찾았다. 바로 함흥에서 직접 흙과 억새를 가져와 봉분을 만들고 그 위에 덮는 것이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태조의 유언을 따르는 동시에 한양 근교에 능을 모실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7]

3. 3. 불교적 요소

병풍석의 면석에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과 구름무늬를 새기고, 면석 옆의 우석에는 불교의 수호적 도구인 영저(靈杵)와 영탁(靈鐸)을 새겼다. 이는 공민왕릉의 형식을 계승한 것인데, 이후 《국조오례의》의 편찬으로 우석의 영저와 영탁 무늬는 구름무늬로 바뀐다. 불교의 상징은 과거 정릉에도 새겨져 있었던 것을 현재 광통교 신장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8]

4. 원찰

건원릉의 원찰로 개경사를 만들어 조계종에 소속시켰다는 기록이 있지만, 오늘날에는 절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다.[5][6]

5. 갤러리

참조

[1] 웹인용 1대 태조(太祖) 건원릉 http://donggu.cha.go[...] 문화재청 2009-05-18
[2] 역사기록 태조의 산릉을 양주의 검암에 정하다. http://sillok.histor[...] 1408-06-28
[3] 역사기록 여러 도의 군정을 징발하여 산릉의 역사에 부역시키다. http://sillok.histor[...] 1408-07-05
[4] 역사기록 서운관에서 태상왕의 능실을 석실로 만들 것을 청하는 상서문 http://sillok.histor[...] 1408-07-09
[5] 역사기록 태조 산릉의 재궁명을 개경사라 하여 조계종에 소속시키다. http://sillok.histor[...] 1408-07-29
[6] 서적 조선의 왕릉 도서출판 가람기획 2003
[7] 서적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 태종실록 휴머니스트 2005
[8] 웹인용 조선왕릉의 석물 https://royaltomb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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