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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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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덕왕후는 고려 말 조선 초의 인물로, 조선 태조 이성계의 계비이다. 그녀는 고려의 명문가 출신으로 이성계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낳았으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후 왕비가 되었다. 신덕왕후는 이성계의 총애를 받았으며, 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과 갈등을 겪었다. 신덕왕후 사후,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잡았고, 신덕왕후의 능을 훼손하고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이후 현종 때 복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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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왕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신덕왕후가 묻힌 정릉
신덕왕후가 묻힌 정릉
작위조선 태조의 계비
휘호순원현경(順元顯敬)
시호신덕고황후(神德高皇后)
능묘정릉(貞陵)
능묘 위치서울특별시 성북구 아리랑로19길 116
가문곡산 강씨
작호현비(顯妃) · 보령택주(保寧宅主)
생애
출생일1356년 7월 12일
출생지고려 황해도 곡산
사망일1396년 9월 15일
사망지조선 한성부 판내시부사 이득분의 사저
가족 관계
배우자태조
자녀2남 1녀
경순공주 · 무안대군 · 의안대군
아버지상산부원군 강윤성
어머니진산부부인 진주 강씨
왕비 책봉
재위 시작1392년 8월 23일
재위 종료1396년 9월 15일
후임정안왕후 김씨

2. 생애

신덕왕후는 고려 초대 왕 왕건 가문과 연결되어 있으며, 왕건의 선조 강호경의 14대손인 강지연의 6대손이자, 충혜왕 시대에 한림학사를 지낸 강윤성의 딸이었다.[3][4]

고려황해도 곡산에서 태어난 신덕왕후는 이성계와 혼인하여 2남 1녀를 낳았다. 당시 고려는 일부다처제가 허용되었고, 이성계는 이미 "향처"라 불리는 첫째 부인 한씨와 6남 2녀를 두고 있었다. 신덕왕후는 "경처"라 불렸지만, 가문 배경과 남편의 총애는 한씨보다 더 컸다. 1391년 한씨가 사망하면서 신덕왕후는 이성계의 정실부인이 되었다.

1392년 7월,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태조로 즉위하자, 신덕왕후는 왕후가 되어 '''현비'''로 불렸다.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신덕왕후는 세자 책봉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자신의 아들 방석을 세자로 삼았다. 그러나 이는 이방원을 비롯한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의 반발을 샀다.

1396년, 신덕왕후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시신은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에 안장되어 '''정릉'''이라 불렸다. 태조는 크게 슬퍼하며 신덕왕후의 죽음을 애도했고, 정치를 멀리하다 1398년에 퇴위했다.

신덕왕후 사후 1398년제1차 왕자의 난이, 1400년 제2차 왕자의 난을 거쳐 방원이 왕위에 올랐다. 1408년 아버지 태조가 사망하자, 태종은 신덕왕후의 지위를 격하시키고 정릉을 도성 밖으로 이장하는 등 철저히 파괴했다. 신덕왕후의 지위는 300년 후인 1669년 현종 때에 이르러서야 회복되었다.

2. 1. 가계와 출생

신덕왕후는 곡산 강씨로, 상산부원군 강윤성과 진산부부인 강씨의 딸이었다.[8] 신덕왕후의 조상은 호경강충으로, 이들은 고려 태조 왕건의 외가 쪽 선조였다.[8] 강충의 셋째 아들 강보전의 후손으로, 그의 8대조인 고종 때의 문하시중 신성부원군 강지연 대에 다시 가문을 일으켰다.

할아버지 강서는 상산부원군에 봉해지면서 곡산 강씨의 시조가 되었고, 아버지 강윤성은 문하찬성사를 지냈고, 사후 증직 영돈녕부사추증되고 상산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신덕왕후는 고려 충혜왕 때 세도를 떨친 권문세가의 규수로, 1356년 7월 12일 황해북도 곡산군에서 태어났다.

신덕왕후의 삼촌 강윤충은 태조의 큰아버지이자 환조의 형 이자흥의 사위였다.[9] 이러한 인연으로 이성계와 혼인하여 그의 계비가 되었다.[9]

신덕왕후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관계이름비고
아버지강윤성1302년 ~ 1358년 12월
어머니진산부부인 진주 강씨1305년 ~ 1380년
맏오빠강득룡1324년 ~ 1400년
둘째 오빠강순룡1324년 ~ 1398년
언니곡산 강씨1328년 ~ ?
셋째 오빠강유권1335년 ~ 1420년
막내 오빠강계권 상산부원군1356년 ~ 1413년


2. 2. 이성계와의 만남과 혼인

이성계는 뛰어난 무예와 지도력으로 군공을 쌓아 권문세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성장한 후, 정략결혼을 하였다. 신덕왕후 강씨는 이성계보다 20살가량 어렸으며, 당시 이성계는 첫 부인 한씨와의 사이에 장성한 자녀들을 두고 있었다.

이성계와 강씨의 첫 만남은 다음과 같은 설화로 전해진다. 어느 날 이성계가 호랑이 사냥을 하던 중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았는데, 그 우물가에 한 여인이 있었다. 이성계가 물을 청하자, 여인은 바가지에 물을 뜨고 버들잎을 띄워 건넸다. 이성계가 그 이유를 묻자, 여인은 급히 찬물을 마시면 탈이 날까 염려하여 천천히 마시도록 한 것이라고 답했다. 여인의 지혜와 미모에 감탄한 이성계는 그녀에게 반했고, 그 여인이 바로 강씨였다. 이 이야기는 고려 태조 왕건과 장화왕후의 만남 설화와 매우 유사하다. 장화왕후와 신덕왕후는 각각 나라를 세운 왕의 두 번째 부인이자 지방 호족의 딸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어, 이러한 유사성이 설화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강씨는 1371년 이전 또는 그 즈음에 이성계와 혼인하였다. 강씨는 1391년에 사망한 한씨를 대신하여, 나이가 비슷함에도 불구하고 한씨 소생의 자녀들을 친자식처럼 키웠다.

1392년 음력 3월, 이성계가 해주에서 낙마하여 중상을 입었을 때, 정몽주가 이성계를 암살하려 하였다. 이때 강씨는 이방원을 해주로 보내 이성계를 안전하게 모셔오도록 했다.

같은 해 4월, 이방원이 정몽주를 암살한 일로 이성계에게 꾸지람을 듣자, 강씨가 나서서 이성계를 진정시켰다. 이는 강씨의 지략과 결단력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2. 3. 조선 건국과 왕비 책봉

1392년 음력 3월 이성계가 해주에서 말을 타다가 떨어져 크게 다친 것을 계기로 정몽주가 그를 제거하려 했을 때, 생모인 한씨의 무덤에서 여묘살이를 하던 이방원을 급히 해주로 보내 이성계를 개경으로 불러냈다. 또한 이방원이 그해 음력 4월 자객을 보내 정몽주를 죽였을 때도 대신을 함부로 죽였다며 크게 꾸짖던 이성계의 분노를 무마시킨 것도 강씨였다. 이는 강씨의 수완과 결단력을 상징해주는 대목으로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는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대담성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1392년(태조 1년) 8월 25일(음력 8월 7일) 조선이 건국되자 강씨는 조선의 첫 왕비가 되어 현비(顯妃)에 봉해졌다.[3][4][6]

2. 4. 왕세자 책봉과 갈등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는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장성한 왕자들을 제치고 자기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했다. 그리하여 정도전과 정치적으로 연합하여 자신의 아들 의안대군을 왕세자로 책봉했다. 그러나 이는 장남도 아니었고, 후처 소생의 차남이 왕세자가 되는 것이었기에 정안대군을 비롯한 신의왕후의 아들딸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이성계는 신덕왕후의 아들 방석을 왕세자로 지명했고, 신의왕후의 다섯째 아들이자 가장 정치적 야심이 컸던 방원은 이에 크게 분노하였다.[10]

1396년 신덕왕후가 세상을 떠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이 난으로 의안대군을 포함한 신덕왕후의 아들들은 모두 제거되었고, 사위도 살해당하여 딸인 경순공주는 여승이 되었다. 태조의 마음을 사로잡고 정도전 등의 힘을 빌려 자신의 아들 방석을 세자에 봉하면서, 강씨에 대한 신의왕후 소생의 장성한 왕자들과 공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결국 그 분노는 강씨가 죽은 후에도 이어져 훗날 태종서얼 금고령과 적서 차별을 제도적으로 만들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10]

2. 5. 죽음과 왕자의 난

1396년 9월 15일(음력 8월 13일) 신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몹시 슬퍼하며 명복을 빌기 위해 능 옆에 작은 암자를 짓고 매일 아침과 저녁마다 향과 차를 바쳤다. 1년 뒤에는 흥천사를 지어 신덕왕후의 넋을 기렸다.[10] 태조는 흥천사가 완공된 후에는 능과 절을 방문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고, 신덕왕후 소생 왕자들과 함께 저녁 시간을 보냈다. 신덕왕후의 능에 재를 올리는 절의 종소리가 울려야만 비로소 침소에 들었으며, 수라를 들 때에도 신덕왕후의 명복을 비는 불경 소리를 들은 후에야 수저를 들 정도로 정성을 다했다.

하지만 신덕왕후가 승하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제1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면서 의안대군을 포함한 신덕왕후의 아들들은 모두 제거되었고, 사위도 살해당하여 딸인 경순공주는 여승이 되었다.[10] 정도전 등의 힘을 빌려 자신의 아들 방석을 세자에 봉하게 한 신덕왕후에 대한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과 공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결국 그 분노는 신덕왕후가 죽은 후에도 이어져 훗날 태종서얼 금고령과 적서 차별을 제도적으로 만들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10]

3. 사후

왕자의 난 이후 태종에 의해 신덕왕후의 정릉이 훼손되고, 왕후의 지위가 격하되는 등의 사건이 발생했다. 이러한 곡절은 기록으로 전해져 오다가 청계천 복원 과정에서 병풍석이 발견되면서 사실로 밝혀졌다.[12]

1581년(선조 14년), 덕원에 사는 강순일이 태조의 4대 조상 묘를 돌보는 국묘봉사자는 군역을 면제해 준다는 점을 들어, 조선 최초의 왕비 묘인 정릉을 돌보고 있으니 군역을 면제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신덕왕후 복위 문제는 여러 왕대를 거치며 논의된 끝에 1669년(현종 10년) 송시열에 의해 마무리되었다.[12][13] 현종이 송시열의 상소를 받아들이는 형식이었으나, 태종의 잘못을 바로잡는 대신 당시 신하들에게 책임을 물었다.[13] 이로써 신덕왕후는 복위되어 종묘에 모셔지고 정릉은 왕릉으로서의 상설을 갖추게 되었다.[13] 88년간의 논쟁 끝에, 신덕왕후가 왕비로 복권되는 날에도 큰 비가 내려 백성들은 그의 원혼이 흘리는 눈물이라 하였다.

3. 1. 태종 대의 훼손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장악하고 왕이 된 신의왕후 소생의 다섯째 왕자인 태종 이방원은, 정릉 파괴와 이전을 지시했다.[10] 그는 자신의 소생인 어린 막내를 왕세자로 내세운 신덕왕후를 태조 사후 후궁으로 격하시켰다. 태조가 특별히 가까이 정동에 두었던 신덕왕후의 능 정릉1409년(태종 9) 당시 사대문 밖 경기도 양주 지역이던 현 위치(서울 성북구)로 이장했고, 묘의 봉분을 완전히 깎아 무덤의 흔적을 남기지 말도록 명했으며, 정자각은 헐어버렸다. 1410년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정자각 석물을 광통교를 보수하는 데 사용하게 하여 온 백성이 이것을 밟고 지나가도록 했다.[10] 종묘의 제례에서도 신덕왕후에게 올리는 제례도 왕비로서가 아닌 후궁의 예로 올렸다. 그녀의 묘소가 훼철되는 날 많은 비가 쏟아졌으며 하늘에서는 울음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태종은 부왕 이성계가 세상을 떠나자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강등하고 정릉을 도성 밖 양주군 성북면 사한리(현재의 서울 성북구 정릉동)에 천장하라 명했다.[11] "옛 제왕의 능묘가 모두 도성 밖에 있는데 지금 정릉이 성안에 있는 것은 적당하지 못하고 또 사신이 묵는 관사와 가까우니 도성 밖으로 옮기도록 하소서"라는 의정부의 주청을 가납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이는 태종의 의지였다.[11]

태종은 삼사와 언관들에게 비밀리에 신덕왕후의 왕릉이 도성 밖에 있는 것이 옳은가를 묻기도 했다. 파헤쳐진 정릉의 병풍석과 난간석은 홍수로 무너진 광통교 복구[11] 에 쓰였으며 목재는 태평관 건축에 사용되었다.[12] 신덕왕후의 능 앞에 세워진 원찰 역시 붕괴되어 재목으로 쓰인다.

이러한 곡절은 기록으로 전해져오다가 청계천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병풍석이 발견되면서 그 사실이 밝혀졌다.[12]

3. 2. 복위와 재평가

태종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통해 권력을 잡고 왕위에 오른 뒤, 신의왕후 소생의 다섯째 왕자였다. 그는 1409년 정릉 파괴와 이전을 지시했다.[10] 태조 사후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격하시켰고, 태조가 각별히 가까이 두었던 정릉을 당시 사대문 밖 경기도 양주 지역이던 현 위치(서울 성북구)로 옮겼다.[10] 묘의 봉분을 완전히 깎아 흔적을 없애고, 정자각은 헐어버렸다. 1410년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정자각 석물을 광통교 보수에 사용하여 백성들이 밟고 다니게 했다.[10] 종묘 제례에서도 신덕왕후는 왕비가 아닌 후궁의 예로 대우받았다. 묘소가 훼철되던 날, 많은 비와 함께 하늘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태종은 부왕 이성계가 세상을 떠난 후, 신덕왕후를 후궁으로 강등하고 정릉을 도성 밖 양주군 성북면 사한리(현 서울 성북구 정릉동)로 옮기라 명했다.[11] 의정부의 주청을 받아들이는 형식이었지만, 실제로는 태종의 의지였다.[11] 태종은 삼사와 언관들에게 신덕왕후의 왕릉 위치에 대해 비밀리에 묻기도 했다. 파헤쳐진 정릉의 병풍석과 난간석은 홍수로 무너진 광통교 복구에,[11] 목재는 태평관 건축에 사용되었다.[12] 신덕왕후의 원찰 역시 붕괴되어 재목으로 쓰였다.

이러한 사실은 청계천 복원 과정에서 병풍석이 발견되며 밝혀졌다.[12] 정릉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581년(선조 14년), 덕원 강순일의 격쟁 이후였다.

당시 태조 4대 조상의 묘가 함흥에 있어, 조정은 국묘봉사자를 두어 군역을 면제했다. 강순일은 이를 근거로 신덕왕후 묘 관리와 군역 면제를 요청한 것이다. 이후 신덕왕후 복위 문제는 1669년(현종 10년) 송시열에 의해 마무리되었다.[12][13]

송시열의 상소를 현종이 수용하는 형식이었으며, 태종의 잘못을 바로잡는 대신 당시 신하들에게 책임을 물었다.[13] 신덕왕후는 복위되어 종묘에 모셔졌고, 정릉은 왕릉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13] 88년간의 논쟁 끝에, 신덕왕후 복권 날에도 큰 비가 내려 백성들은 원혼의 눈물이라 여겼다.

4. 가족 관계

부모
아버지강윤성(1302년 ~ 1358년)
어머니진산부부인 진주 강씨(1305년 ~ 1380년)
형제
맏오빠강득룡(1324년 ~ 1400년)
둘째 오빠강순룡(1324년 ~ 1398년)
언니곡산 강씨(1328년 ~ ?)
셋째 오빠강유권(1335년 ~ 1420년)
막내 오빠강계권 상산부원군(1356년 ~ 1413년)
배우자
남편이단, 조선 태조(1335년 10월 27일 ~ 1408년 6월 18일)
자녀
경순공주(1375년 ~ 1407년 9월 8일)
사위이제(1365년 ~ 1398년)
외손녀성주 이씨
양손자이윤(1398년 ~ 1456년)
아들이방번 무안대군(1381년 ~ 1398년 10월 14일)
며느리개성 왕씨 삼한국대부인(1378년 ~ 1419년)
양손자이효손 풍안군(1403년 ~ 1463년)
아들이방석 의안대군(1382년 ~ 1398년 10월 14일)
며느리유씨 폐세자빈(1384년 ~ ?), 심씨 현빈(1380년 ~ 1448년)
손자이원손(1398년 5월 25일 ~ 1398년 8월 26일)


5. 대중문화 속의 신덕왕후

방영 연도작품 제목방송사배우
1983년개국KBS하미혜
1983년추동궁 마마MBC김정연
1996년~1998년용의 눈물KBS김영란
2012년~2013년대풍수SBS윤주희
2014년정도전KBS이일화
2015년~2016년육룡이 나르샤SBS김희정
2019년나의 나라JTBC박예진
2021년~2022년태종 이방원KBS1예지원


6. 기타

남이의 옥사로 죽은 강순은 신덕왕후의 친정 종손이었다.

참조

[1] 웹사이트 [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찾다] 조선 태조의 무덤이 동쪽으로 간 까닭은? https://m.segye.com/[...] 2009-03-31
[2] 웹사이트 강씨(康氏) 본관(本貫) 신천(信川)입니다. http://www.findroot.[...] 2022-07-06
[3] 논문 세계日報 2013
[4] 논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5] 웹사이트 성씨검색 강(康)- 뿌리를 찾아서 https://web.archive.[...]
[6] 웹사이트 성씨검색 강(康)-뿌리를 찾아서 https://web.archive.[...]
[7] 서적 고종실록 1899-12-07
[8] 문서 왕건의 외7대조와 외6대조이다.
[9] 문서 고려시대에는 경처와 향처라는 두 명의 정실부인을 둘 수 있었다.
[10] 웹사이트 [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찾다] 조선 태조의 무덤이 동쪽으로 간 까닭은? - 세상을 보는 눈, 글로벌 미디어 - 세계일보 http://www.segye.com[...]
[11] 서적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책으로 보는 세상 2010
[12] 서적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책으로 보는 세상 2010
[13] 서적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책으로 보는 세상 2010
[14] 문서 제1차 왕자의 난으로 피살
[15] 문서 고려 공양왕의 형인 귀의군 왕우의 딸
[16] 서적 태조실록 1393-06-19
[17] 서적 세종실록 1448-11-23
[18] 서적 태조실록 1392-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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