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대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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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대승은 1154년에 태어나 1183년에 사망한 고려 시대의 무신이다. 1179년 정중부 일파를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여 도방을 설치하고 문무관을 균형 있게 등용하려 했으나, 무신들의 반발과 잦은 숙청으로 정권 기반이 불안정했다. 30세에 급사했으며, 드라마 《무인시대》에서 박용우가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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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대승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경대승 |
한글 표기 | 경대승 |
한자 표기 | 慶大升 |
로마자 표기 | Gyeong Daeseung |
일본어 | けい だいしょう |
가문 | 청주 경씨(淸州 慶氏) |
관직 정보 | |
직책 | 무신정권 집권자 |
임기 시작 | 1179년 10월 25일 |
임기 종료 | 1183년 8월 11일 |
전임 | 정중부 |
후임 | 이의민 |
군사 지휘 | 도방 |
생애 | |
출생 | 1154년 |
사망 | 1183년 8월 11일 (29세) |
가족 관계 | |
부친 | 경진(慶珍) |
형제자매 | 이소응의 사위 |
기타 | |
복무 | 고려군 |
통치 시기 군주 | 명종 |
2. 생애
1170년 17세에 정중부를 비롯한 무신들이 의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을 추대하는 무신정변이 일어났다.
1178년 청주인들 사이의 분쟁으로 100여 명이 죽게 되자 사심관으로 파견되었으나, 사건을 수습하지 못하고 파면되었다.
2. 1. 출생과 가계
1154년(의종 8년), 청주 경씨 경진(1125 ~ 1177)의 아들로 태어났다.[3] 1168년(의종 22년) 15세에 음서제도로 교위(校尉)가 되었다.[3] 아버지 경진은 민간에서 전토를 빼앗는 등 탐욕스러운 사람이었으나, 경대승은 아버지 사후 부정한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 칭찬을 받았다.[1]2. 2. 초기 관직 생활
경대승은 1154년 청주 경씨 경진의 아들로 태어났다. 경대승이 태어날 당시 무신 계급은 매우 위축되어 있었고, 문신 계급이 누리는 사치스러운 생활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어린 경대승은 15세에 군사 훈련을 시작하여 이의방과 정중부의 정권 아래에서 벼슬했다. 아버지 경진의 죽음 이후, 경대승은 가문을 맡아 빈민을 도왔으며, 그의 아버지가 조직했던 사병 도방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1]의종 22년 (1168년) 15세에 음보로 교위에 임관되었다. 당시 고려의 관료들은 횡령이 만연하여 민중의 재산을 약탈했다. 경대승의 아버지 경진도 탐욕스러운 사람이었으며, 종종 민간에서 전토를 빼앗았다. 아버지의 사후, 경대승은 아버지의 부정한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여론은 경대승의 성실함을 칭찬했다. 무신정권 성립 후 명종 4년 (1174년), 국왕의 친위대(금군)에 해당하는 견룡군의 행수(사령관)가 되어 왕궁을 경비했다.
2. 3. 무신정변과 정중부 제거
1179년(명종 9년) 26세에 경대승은 무신들이 정권을 마음대로 휘두르고 있었는데, 명종이 정중부 일파의 무단 정치를 싫어함을 알고 그들을 없애고 정권을 잡을 결심을 하였다.[4]허승, 김희조와 함께 거사를 일으켜, 정중부와 그의 아들 정균, 사위 송유인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4] 이 과정에서 같이 거사를 일으켰던 허승과 김광립이 제거되었다.[4]
집권 후, 가병을 중심으로 조직된 도방을 국정의 중추 기관으로 삼고, 관직 임용에 있어서 문관과 무관을 공평하게 배분하는 등 기존의 무인 집권자와는 차별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무신 정권 이전으로 회귀하려는 경대승의 방침은 다른 무인들의 반발을 불렀다. 정권 기반이 미약했던 경대승은, 반대파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숙청을 반복했고, 그 과정에서 정중부 타도에 가담했던 동료들까지 제거했다.[4]
2. 4. 집권과 도방 정치
1179년(명종 9년) 26세에 정중부 일파의 무단 정치를 싫어하는 명종의 뜻을 알고, 허승, 김희조(金希祖)와 함께 거사를 일으켜 정중부와 그의 아들 정균, 사위 송유인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4]집권 후, 가병을 중심으로 조직된 도방을 국정의 중추 기관으로 삼았다. 또한, 문관과 무관을 공평하게 등용하는 등 기존의 무인 집권자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무신 정권 이전으로 회귀하려는 경대승의 방침은 다른 무인들의 반발을 불렀다. 정권 기반이 미약했던 경대승은 반대파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숙청을 반복했고, 그 과정에서 정중부 타도에 가담했던 동료들까지 제거했다.[4]
2. 5. 개혁 정치의 한계와 반발
1179년(명종 9년) 허승, 김희조(金希祖)와 함께 거사를 일으켜 정중부와 그의 아들 정균, 사위 송유인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하였다.[4] 이후 기존의 최고 권력기구인 중방을 무력화시키고, 새로운 권력 집단인 도방을 신설하였다. 관리 등용에 있어 문신과 무신을 고루 기용하고자 하였지만, 반란에 참가한 무신들로부터 반감을 사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같이 거사를 일으켰던 허승과 김광립이 제거되었다.[4]1181년(명종 11년)에는 한신충, 채인정, 박돈순 등의 무인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잦은 민란으로 사회가 어지러웠다.
2. 6. 의문의 죽음
1183년(명종 13년) 8월 4일 새벽, 술을 마시고 취침하던 중 30세의 나이로 의문사하였다.[1] 임종 직전 정중부가 큰 소리로 꾸짖는 악몽에 시달리다 병을 얻어 사망했다고 한다.[3] 신변 보호를 위해 도방을 창설하여 사병 100명을 거느렸지만,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1]3. 가계
4. 대중 문화
참조
[1]
웹사이트
경대승
https://terms.naver.[...]
2019-05-24
[2]
서적
고려사
1183-07-15
[3]
웹인용
한국사 기초사전 - 경대승(慶大升)
http://yoksa.aks.ac.[...]
왕실도서관 디지털 아카이브
2010-10-08
[4]
웹인용
한국사 기초사전 - 정중부
http://yoksa.aks.ac.[...]
왕실도서관 디지털 아카이브
2010-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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