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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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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의방은 1170년 정중부, 이고 등과 함께 무신정변을 일으켜 고려 의종을 폐위하고 명종을 옹립한 무신이다. 견룡군 행수로서 쿠데타를 주도하고, 벽상공신에 책록되었으나, 권력 독점 시도와 반란 진압 과정에서 가혹한 숙청을 자행했다. 중방의 지위 격상, 하급 무관의 등용 등 권력 기반을 강화하려 했으나, 잦은 반란과 형 이준의와의 갈등, 조위총의 난 등으로 입지가 흔들렸다. 결국 1174년 정중부의 아들 정균에게 암살당했으며, 그의 일족과 지지자들 또한 제거되었다. 이의방은 무신정변을 통해 새로운 정치 질서를 수립했지만, 지나친 권력욕과 잔혹한 숙청으로 부정적인 평가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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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의방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이의방
한글 표기이의방
한자 표기李義方
로마자 표기I Uibang
직위
직책고려무신정권 집권자
재임 기간1171년 ~ 1174년 12월 18일 (음력)
이전-
이후정중부
생애
출생생년 미상
사망1175년 1월 19일 (양력)
사망 장소고려 개경 선의문 밖
가문
본관전주 이씨
아버지이용부(李勇夫)
어머니미상
배우자조씨(曺氏)
자녀사평왕후
군사 경력
소속고려군
계급대장군
관직
관직고려의 군사 지도자
재임 시작1170년
재임 종료1175년
이전직책 확립
이후정중부
개인 정보
출생일1121년
사망일1175년
배우자조씨
자녀사평왕후 (딸)
아버지이용부
어머니이씨 부인
군주고려 의종
고려 명종

2. 생애

이의방은 전주의 호족 가문 출신으로, 이용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 이준의와 동생 이린, 이거(李琚) 등이 있었다. 그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젊은 시절부터 군인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1170년(의종 24년), 국왕 친위대인 견룡군의 행수(사령관)로 재직 중이던 이의방은 정중부, 이고 등과 함께 무신정변(경인년의 난)을 일으키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이들은 의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을 왕위에 앉혔다. 정변 성공 후 이의방은 대장군·전중감 겸 집주에 임명되고 벽상공신으로 책봉되는 등 정권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1171년, 권력 독점을 시도하던 동료 이고를 제거하고, 무신 세력의 원로 정중부와 손을 잡아 무신 정권의 첫 실권자가 되었다. 그는 무관들의 회의 기구였던 '''중방'''의 권한을 강화하여 국정 운영의 중심으로 삼고, 하급 무관들을 지방관으로 임명하는 등 권력 기반을 다졌다.

그러나 그의 집권기에는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1173년 김보당이 의종 복위를 명분으로 난(김보당의 난)을 일으키자, 이의방은 경주에 유폐되어 있던 의종을 살해하고 관련 문신들을 숙청하며 강경 대응했다. 1174년에는 개경 인근 사찰 승려들이 일으킨 승도의 난을 무자비하게 진압했으며 사찰을 불태웠고, 이 일로 형 이준의와 갈등을 빚기도 했다. 같은 해 딸을 태자비로 삼아 왕실 외척이 되었으나, 이는 정중부와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1174년 9월, 서경 유수 조위총이 대규모 반란(조위총의 난)을 일으키자 진압에 나섰으나 어려움을 겪었다. 초기 진압에 실패하자 직접 군대를 이끌었으나 서경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개경으로 돌아왔다. 서경 재출정을 준비하던 같은 해 12월, 정중부의 아들 정균에게 살해당했다. 그의 사후 일족과 지지자들은 정중부에 의해 숙청되었고, 태자비였던 딸도 폐위되었다.

2. 1. 출생과 가계

이의방은 전라도 전주에서 대장군 이용부(李勇夫)와 정승 이형(李珩)의 딸인 이씨(李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전주에서 대대로 살아온 토착 세력인 전주 이씨 호족이었다.

형으로는 이준의가 있었고, 아래로는 여동생 1명과 남동생 이린, 이거가 있었다. 숙부 이단신(李端信)은 문하시중을 지냈다는 설도 있으나, 씨족원류 기록에 따르면 호장(戶長) 이궁진(李宮進)의 둘째 아들이라고 한다. 고려 시대의 호장은 해당 지역 토착 세력의 최고위직이었으나, 조선 왕조의 입장에서 기록된 고려사에서는 이 내용이 등장하지 않는데, 이는 이의방과의 관계를 의도적으로 축소하거나 숨기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의방의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이용부(李勇夫)대장군
어머니이씨(李氏)정승 이형의 딸
이준의(李俊儀)? ~ 1174년
남동생이린(李璘/李隣)
남동생이거(李琚)사열부원군
부인조씨(曺氏)
사평왕후 이씨? ~ 1174/1175년, 강종의 왕후
사위강종(康宗)1152년 ~ 1213년, 고려 제22대 국왕
외손녀수령궁주(壽寧宮主)1174/1175년 ~ ?, 왕춘에게 하가
외손서왕춘(王淐)하원공


2. 2. 정치 활동

1170년(의종 24년) 8월, 의종의 보현원 행차를 계기로 정중부, 이고 등과 함께 무신정변(경인년의 난)을 주도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정변 직후 의종을 폐위하고 명종을 옹립했으며, 이 공으로 대장군·전중감 겸 집주에 오르고 벽상공신에 책봉되었다.

1171년 경쟁자였던 이고를 제거하고 정중부와 제휴하여 무신 정권의 첫 실권자가 되었다. 그는 무관들의 합의 기구였던 '''중방'''의 권한을 국가 최고 의결 기구 수준으로 격상시키고, 하급 무관들을 지방관으로 대거 등용하는 등 무신 세력의 지지 기반을 넓히려 했다.

그러나 집권 기간 내내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1173년 김보당이 의종 복위를 명분으로 난을 일으키자(김보당의 난), 경주에 유폐되어 있던 의종을 살해하고 관련자들을 숙청하며 강경하게 대응했다. 1174년에는 개경 인근 사찰 승려들이 일으킨 승도의 난을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사찰을 불태웠다. 같은 해 딸을 태자비로 들여 왕실 외척이 되었으나, 이는 기존 권력자 정중부와의 갈등을 심화시켰다.

1174년 9월 서경 유수 조위총이 대규모 반란(조위총의 난)을 일으키자, 초기 진압에 실패한 뒤 직접 군대를 이끌었으나 서경을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이 과정에서 서경 출신 관료들을 대거 숙청하기도 했다. 서경 재출정을 준비하던 같은 해 12월, 정중부의 아들 정균에게 살해당했다. 이후 그의 일족과 지지 세력은 정중부에 의해 숙청되었고, 태자비였던 딸도 폐위되었다.

2. 2. 1. 무신정변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이 무신 정중부의 수염을 태우고, 문신 한뢰가 대장군 이소응의 뺨을 때리는 등 문신들의 횡포와 무신에 대한 차별 대우에 무신들의 불만이 쌓여갔다. 1170년(의종 24년) 8월, 당시 견룡행수(견룡군 사령관)였던 이의방은 개경 교외의 보현원으로 왕이 행차한 기회를 틈타 정중부, 이고, 채원, 이의민 등과 함께 무신정변(경인년의 난)을 일으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2] 무신들은 정변에 성공한 후 의종을 폐위시키고 그의 동생인 명종을 새로운 고려 국왕으로 옹립했다.

정변 성공 후 이의방은 스스로 응양용호군 중랑장에 임명되었고, 그의 형 이준의승선으로 승진했다. 명종을 왕위에 옹립한 공으로 벽상공신에 책봉되어 그 초상이 왕궁 누각에 걸리는 영예를 얻었으며, 이후 대장군을 거쳐 전중감 겸 집주를 역임하며 새로운 무신 정권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1171년(명종 원년), 함께 정변을 일으켰던 이고가 권력 독점을 시도하며 쿠데타를 획책하자, 이의방은 정중부의 명령 또는 협력 하에 이고를 숙청하고 살해했다. 이로써 이의방은 무신 집단의 원로 격인 정중부와의 제휴를 통해 무신 정권의 첫 번째 실권자가 되었다.

권력 기반을 다지기 위해 이의방은 무관들의 합의 기구였던 '''중방'''의 지위를 국가 최고 기관으로 격상시켜 국정 전반을 다루게 했고, 문신의 전유물이었던 지방관직에 하급 무관들을 대거 임명하여 군부 세력의 지지를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정권 초기부터 반란이 끊이지 않았다. 1173년(명종 3년), 문신 김보당이 폐위된 의종의 복위를 명분으로 계림에서 난을 일으키자, 이의방은 경주로 사람을 보내 의종을 직접 살해하고, 반란에 동조한 것으로 의심되는 문신들을 다시 한번 숙청하는 강경책을 사용했다.

1174년(명종 4년) 정월에는 개경 근처 사찰의 승려 수천 명이 봉기하여 도성을 공격하는 승도의 난이 발생했다. 이의방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가 승려들을 학살하고 사찰을 약탈, 방화하는 잔혹한 방식으로 난을 진압했다. 이 사건으로 형 이준의에게 질책을 받자 칼로 위협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같은 해 3월, 이의방의 딸이 태자비로 간택되어 왕실 외척이 되었으나, 그의 권세가 강해지는 것을 경계한 정중부와의 사이는 더욱 멀어졌다. 9월에는 병부상서이자 서경 유수인 조위총이 북계 40여 성을 규합하여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이의방은 관군을 보내 진압하려 했으나 연패하자 격분하여 서경 출신 상서 윤인미 등 100여 명을 참살하고 직접 출정했다. 이의방이 이끄는 관군은 반란군을 격파하고 대동강까지 진격했지만, 서경성 공략에는 실패하고 조위총의 아들만 사로잡아 개경으로 돌아왔다.

같은 해 12월, 서경으로의 재출정을 준비하던 중 개경 선의문 밖에서 정중부의 아들 정균에게 살해되었다. 이후 정중부에 의해 이의방의 일족과 지지자들은 숙청되었고, 태자비였던 그의 딸도 폐위되어 왕궁에서 쫓겨났다.

2. 2. 2. 권력 장악과 숙청

1170년 무신정변 성공 이후 의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을 왕으로 세우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공로로 그는 벽상공신(壁上功臣)에 책봉되었고, 대장군을 거쳐 전중감 겸 집주(殿中監 兼 執奏)의 자리에 올랐다. 그의 형 이준의(李俊儀) 역시 승선으로 승진했다.

권력을 잡은 이의방은 정변에 반대하는 무신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한순(韓順), 한공(韓恭), 신대여(申大輿), 사직재(史直哉), 차중규(車仲規) 등이 제거 대상이었는데, 평소 친분이 있던 차중규는 유배를 보내는 선에서 마무리했지만 나머지는 모두 살해했다.

정변 동지였던 이고(李高)가 불량배 무리 및 일부 승려들과 결탁하여 권력 독점을 시도하자, 이의방은 이를 경계했다. 1171년, 이고가 먼저 이의방을 제거하려 하자, 이의방은 정중부의 지지를 얻어 선수를 쳐 이고를 제거하고 그의 어머니와 지지 세력을 죽였다.[2] 다만 이고의 아버지는 평소 아들의 못남을 꾸짖으며 부자 관계를 끊었기에 죽이지 않고 귀양만 보냈다. 같은 해 4월에는 채원(蔡元)의 정변 기도 역시 사전에 적발하여 제거함으로써 권력 기반을 더욱 공고히 했다.

이의방은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중방(重房)의 권한을 확대하여 국가의 중요 정책 결정 기구로 만들었으며, 여기에 고위 무신들을 참여시켜 무신 세력 내부의 의견을 조율하고자 했다. 또한, 이전까지 문신들만 임명되던 지방관 자리에 하급 무신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여 무신 세력 전반의 지지를 확보하려 했다.

1173년, 문신 김보당(金甫當)이 폐위된 의종을 복위시키려는 목적으로 거제도에서 군사를 일으키자(김보당의 난), 이의방은 이의민 등을 보내 이를 진압하게 하는 한편, 경주에 머물던 의종을 직접 찾아가 살해하여 복위 시도를 완전히 차단했다. 이 사건을 빌미로 김보당의 난에 동조한 것으로 의심되는 문신들에 대한 추가적인 숙청이 이루어졌다.

이고 등 경쟁 세력이 제거되면서 이의방의 권력은 더욱 강해졌지만, 동시에 그의 행동은 거리낌 없어졌다. 1173년 왕의 딸을 궁주(宮主)로 삼는 의식이 열렸을 때, 이의방은 기생들을 데리고 중방에서 다른 장수들과 술을 마시고 떠들며 북을 치는 소리가 대궐 안까지 들릴 정도였으나 전혀 두려워하거나 거리끼는 기색이 없었다고 전해진다.[3]

2. 2. 3. 권력 강화와 갈등

1173년 문신 김보당(金甫當)이 동경에서 의종의 복위를 주장하며 난을 일으키자(김보당의 난), 이의방은 토벌대를 보내 이를 평정하였다. 이후 반란의 불씨를 완전히 제거하기 위해 이의민(李義旼)을 보내 경주에 유폐되어 있던 의종을 시해하도록 지시했다. 이러한 단호한 조치는 그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3]

권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이의방은 여러 저항에 부딪혔다. 1174년 4월, 개경 인근 사찰의 승려들이 이의방의 권력 장악과 전횡에 반발하여 봉기했다. 귀법사(歸法寺) 승려 100여 명이 먼저 그를 습격했으나 격퇴당했고, 이어 중광사(重光寺), 홍호사(弘護寺) 등의 승려 2,000여 명이 다시 공격해왔다. 이의방은 이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여 학살하고, 중광사·홍호사·귀법사·용흥사(龍興寺)·묘지사(妙智寺)·복흥사(福興寺) 등 관련된 여러 사찰을 불태우고 그 재산을 모두 몰수했다. 이는 당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불교 세력에 대한 강력한 탄압이었다.

같은 해, 권력의 정점에 섰음에도 불구하고 형 이준의(李俊儀)와의 갈등이 불거졌다. 형 이준의는 이의방의 오만하고 잔혹한 행태를 꾸짖으며 "너에게 세 가지 큰 죄악이 있다. 첫째는 임금을 쫓아내 죽이고 그 재산을 빼앗은 것이요, 둘째는 태후의 여동생을 위협하여 간통한 것이며, 셋째는 국정을 제멋대로 주무르는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이에 격분한 이의방은 사병을 동원해 형을 죽이려 했으나, 문극겸(文克謙)의 만류로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 이 사건은 권력 내부의 갈등과 이의방의 포악한 성정을 잘 보여준다.

정치적 입지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 이의방은 자신의 딸을 명종의 태자비로 삼았다. 이를 통해 왕실의 외척이 되어 권력 기반을 다졌으나, 이는 기존의 권력자였던 정중부와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174년 9월, 서경 유수 조위총(趙位寵)이 북계 40여 성을 규합하여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조위총의 난). 이의방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윤인첨과 최균 등을 파견했으나 초기 진압에 실패했다. 서북면으로 향했던 윤인첨은 매복에 걸려 대패했고, 동북면의 최균은 전사했다. 이후 두경승을 동북면에 다시 보내 전열을 가다듬는 한편, 서북면에서는 조위총의 군대가 개경 근처까지 진격해왔다. 이에 격분한 이의방은 내통을 의심하여 서경 출신 상서 윤인미(尹仁美)를 비롯한 여러 관료와 장군들을 처형하고 민심을 더욱 잃었다. 결국 이의방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여 반란군을 격파하고 대동강까지 진격했으나, 견고한 서경의 방어와 추위로 인해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조위총의 아들을 포로로 잡는 데 만족하며 개경으로 귀환해야 했다.

2. 2. 4. 조위총의 난

1174년 9월, 병부상서이자 서경 유수였던 조위총(趙位寵)이 북계의 40여 성을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의방 정권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서북면에는 도원수 윤인첨을, 동북면에는 도지휘사 최균을 파견했다. 그러나 초기 진압은 실패로 돌아갔다. 서북면으로 향한 윤인첨의 군대는 매복에 걸려 크게 패배했고, 동북면으로 향했던 최균은 전사하고 말았다.

이후 동북면에는 두경승을 새로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으나, 서북면에서는 조위총의 군대가 개경 근처까지 남하하며 수도를 위협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에 격분한 이의방은 조위총과 내통했다는 의심으로 서경 출신 상서 윤인미(尹仁美), 대장군 김덕신(金德臣), 장군 김석재(金錫才) 등 100여 명의 관리들을 무참히 살해하고 그 시신을 저자에 효수하는 강경책을 사용했다. 이러한 무자비한 숙청은 민심을 잃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결국 이의방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정길에 올랐다. 예성강을 건너 최숙을 선발대로 보내 적을 혼란에 빠뜨린 후 격파하였고, 그 기세를 몰아 대동강 유역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조위총의 군대가 서경 성 안으로 들어가 굳게 방어하고, 혹독한 추위까지 겹치면서 전황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이의방은 서경을 함락시키지 못한 채, 조위총의 아들을 포로로 사로잡는 것에 만족하고 개경으로 귀환해야 했다.

2. 3. 실각과 죽음

1174년 3월, 이의방은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삼아 왕실의 외척이 되었다. 그러나 이는 그의 권세가 강해지는 것을 경계하던 정중부와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이의방은 정중부 세력을 누르고 더 많은 권력을 얻으려 했으나, 이러한 시도는 오히려 그의 정치적 입지를 위태롭게 만들었다.

같은 해 9월, 병부상서이자 서경 유수였던 조위총이 북계 40여 성을 선동하여 반란(조위총의 난)을 일으켰다. 이의방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압에 나섰지만 고전을 면치 못했다. 파견된 관군이 연이어 패배하자 격분한 이의방은 서경 출신 상서 윤인미 등 100여 명을 참살하고 직접 출정하였다. 이의방이 이끄는 관군은 반란군을 일부 격파하고 대동강까지 진격했지만, 서경의 견고한 방어에 막혀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조위총의 아들만 사로잡아 개경으로 귀환했다.

1174년 12월, 서경으로의 재출정을 준비하던 중, 이의방은 개경의 선의문 밖에서 정중부의 아들 정균과 그의 사주를 받은 승려 종참 등에게 암살당했다. 이 사건으로 이의방의 집권은 막을 내렸다.

이의방이 제거된 후, 그의 형 이준의와 지지자 고득원(高得元) 등 가족과 측근 세력 역시 정중부 세력에 의해 처형되었다. 태자비였던 그의 딸도 폐위되어 왕실에서 쫓겨났다. 하지만 훗날 그녀와 혼인했던 태자가 강종(康宗)으로 즉위하면서 복위되었고, 사후 사평왕후(思平王后)로 추존되었다. 이의방 사후 정권을 장악한 정중부 역시 얼마 지나지 않아 살해되었고, 이후 젊은 경대승이 권력을 잡았다.

3. 평가

이의방은 무신정변 이후 혼란한 정국 속에서 권력을 장악하고 정중부와 함께 초기 무신정권의 기반을 다진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기존 문벌 귀족 중심의 정치 질서에 도전하여 무신의 권익을 신장시키고 권력 구조를 재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문신 세력이 장악했던 권력을 무신 중심으로 이동시키면서 고려 사회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나 권력 유지 과정에서 보여준 지나친 권력욕과 반대 세력에 대한 가혹한 숙청, 의종 시해와 같은 잔혹한 통치 방식은 큰 비판을 받는다. 이러한 강압적인 통치는 결국 민심을 잃게 만들었고, 1174년 정균 등 정적에게 암살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의 집권은 무신이라는 새로운 정치 세력의 본격적인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지만, 동시에 극심한 정치적 혼란과 폭력을 야기하기도 했다. 문벌 귀족 체제를 타파하려는 시도는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 있으나,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 민생을 개선하는 데는 뚜렷한 한계를 보였다는 지적이 따른다.

한편, 그의 동생 이린은 훗날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6대조로 알려져 있어, 역사적으로 이성계 가문과 연결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3. 1. 긍정적 평가

무신정변 이후 혼란한 정국 속에서 이고, 한순(韓順) 등 경쟁 세력 및 반대파를 제거하며 권력 기반을 다졌다. 특히 1171년에는 자신을 제거하려던 이고를 처단하고[3], 무신들의 합의 기구인 중방(重房)의 권한을 강화하여 고위 무신들의 지지를 확보했다.

또한, 기존에 문신들만 임명되던 지방관직에 하급 무신들을 등용하여 소외되었던 무신들의 정치 참여 기회를 확대하고 불만을 해소하고자 노력했다. 이는 오랫동안 지속된 문벌 귀족 중심의 폐쇄적인 정치 체제를 타파하고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조치로 평가받는다. 같은 해 4월에는 채원(蔡元)의 정변 기도를 사전에 막아내며 정치적 안정을 도모하고 권력을 더욱 공고히 했다.

1173년 김보당(金甫當)이 폐위된 의종의 복위를 시도하며 난을 일으키자, 의종을 직접 제거하는 단호한 조치를 통해 반란을 신속하게 진압하고 정권의 안정을 지켰다. 이러한 공로로 그는 육군 원수로 승진하기도 했다.

집권 기간 동안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승려들의 봉기에 대해서도 직접 군대를 이끌고 진압에 나섰다. 이는 당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정치에 개입하던 일부 불교 세력을 견제하고 국가 질서를 유지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또한 군대의 규모와 권력을 증대시키고, 군인 출신 인물들을 행정 관료로 등용하여 무신 중심의 새로운 정치 질서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3. 2. 부정적 평가

무신정변 이후 권력을 장악한 이의방은 정변에 반대한 한순(韓順), 한공(韓恭), 신대여(申大輿), 사직재(史直哉) 등 무신들을 가차 없이 참살하며 공포 정치를 시작했다. 심지어 평소 친분이 있던 차중규(車仲規)마저 유배 보내는 냉혹함을 보였다. 1171년에는 이고가 승려들과 결탁하여 세력을 키우려 하자 그를 제거하고, 그의 어머니와 추종자들까지 살해했다. 같은 해 4월, 채원(蔡元)의 정변 기도마저 사전에 적발하여 반대 세력을 숙청하며 권력 기반을 더욱 공고히 다졌다.

권력 강화를 위해 중방(重房)의 권한을 확대하고 하급 무신들을 지방관으로 임명하여 회유책을 쓰기도 했으나, 견제 세력이 사라지자 그의 행동은 더욱 방만해졌다. 1173년에는 기생들과 함께 중방에서 연회를 열었는데, 그 소란스러움이 대궐에까지 들렸음에도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고 전해진다.[3]

그의 잔혹성은 1173년 문신 김보당이 폐위된 의종의 복위를 시도했을 때 극명하게 드러났다. 이의방은 복위 시도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직접 의종을 시해하는 극단적인 방법을 택했다. 이 사건으로 그는 군부 내 최고 직위 중 하나로 여겨지는 자리에 올랐으나, 왕을 시해한 행위는 큰 비판을 받았다.

또한, 불교계와의 관계도 극도로 악화되었다. 고려는 전통적으로 불교의 영향력이 강한 국가였으나, 이의방은 전국 각지에서 일어난 승려 봉기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사찰 재산을 약탈하는 등 탄압을 일삼았다. 이는 불교계의 큰 반발을 샀다.

1174년 서경 유수 조위총이 반란을 일으키려 하자, 이의방은 평양 출신 윤인미 등 관련자들을 처형하며 강경하게 대응했다. 하지만 이러한 폭압적인 방식은 민심을 더욱 악화시켰고, 결국 반란을 효과적으로 진압하지 못했다. 이처럼 백성의 삶을 외면하고 오직 자신의 권력 유지와 강화에만 몰두했던 그의 행보는 결국 민심 이반을 초래하며 스스로 몰락을 자초하는 결과를 낳았다.

4. 가족 관계


  • 조부 : 호장 이궁진(李宮進)
  • 조모 : 김씨(金氏) 또는 이씨(李氏)
  • 아버지 : 무신 이용부(李勇夫)
  • 어머니 : 이씨(李氏) - 정승 이형(李珩)의 딸
  • * 형 : 승선 이준의(李俊儀, ?~1174년)
  • * 본인 : '''이의방'''
  • * 동생 : 이린(李隣)
  • * 동생 : 이거(李琚)
  • * 여동생 : 이름 미상
  • ** 매제 : 동지추밀원사 우학유(于學儒, ? ~1179년)
  • 부인 : 부인 조씨(曺氏)
  • * 장녀 : 사평왕후 이씨(思平王后 李氏, ? ~ 1174/1175?)
  • ** 사위 : 강종(康宗, 1152년 ~ 1213년)

외손녀 : 수령궁주(壽寧宮主, 1174/1175? ~ ? )
* 외손서 : 하원공 왕춘(王춘)

5. 이성계와의 관계

이의방의 동생 이린조선을 건국한 이성계의 6대조 할아버지이다.[4] 이로 인해 이의방과 이성계는 혈연적으로 연결된다.

전주 이씨 족보에서는 무신정변을 일으킨 이의방과 그의 형 이준의의 기록을 찾아볼 수 없는데, 이는 조선 왕조가 들어선 이후 이들에 대한 언급이 금기시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러한 금기는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1970년고려사고려사절요 등이 한글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이의방의 동생 이린이 문극겸의 사위였고 내시집주를 역임했다는 기록이 확인되면서[4] 이성계 가문과의 관계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린은 형 이의방이 정중부 세력에게 제거된 후, 정치적 혼란을 피해 고향인 전주로 내려가 가문을 보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몽골 제국이 고려를 침략했을 때, 이린의 손자인 이안사는 일족을 이끌고 동북면(현재의 함경북도 일대)으로 이주했다. 그는 고려를 떠나 몽골에 투항하여 다루가치 벼슬을 받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원나라의 세력이 약해지자 이안사의 증손자인 이자춘 대에 이르러 다시 고려 조정에 귀순했다. 이자춘의 아들이자 이린의 6대손인 이성계는 고려 말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왕조인 조선을 건국하게 된다. 다만, 이러한 이성계 선조의 내력에 대해서는 일부 대한민국 역사학자들의 주장이며, 아직 명확하게 검증된 사실은 아니다.

이의방이 일으킨 무신정변은 문신 중심의 고려 사회 질서를 변화시키고 무신 세력의 시대를 열었다. 이러한 고려 사회의 동요와 변화는 훗날 그의 동생 이린의 후손인 이성계가 새로운 왕조 조선을 건국하는 배경과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6. 대중문화

참조

[1] 서적 Buddhism in Koryŏ: A Royal Religion https://books.google[...] Jain Publishing Company 2002
[2] 서적 A Concise History of Korea: From the Neolithic Period Through the Nineteenth Century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2006
[3] 웹사이트 이의방:네이트 http://koreandb.nate[...]
[4] 문서 선원보략과 전주이씨 족보에도 내시집주이며, 문극겸의 딸과 결혼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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