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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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도방은 고려 무신정권 시기 권력자들의 신변 보호와 정권 유지를 위해 조직된 사병 조직이다. 경대승이 최초로 조직했으며, 최충헌 집권 이후 부활하여 최씨 무신정권의 근위대 역할을 했다. 최우 시기에는 내도방과 외도방으로 분리되어 조직이 확장되었고, 최항, 임연 시기를 거쳐 1270년에 폐지되었다. 도방은 무신정권 강화에 기여했으나, 권세를 배경으로 백성을 약탈하는 등 부정적인 평가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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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방 | |
---|---|
도방 (都房) | |
정의 | 고려 시대의 사병 조직 |
역사적 맥락 | 무신정권 시기에 권력 유지를 위해 창설 |
설립 배경 | 이의민이 처음 설치 경대승에 의해 혁파 최충헌에 의해 재건 및 확대 |
조직 및 기능 | |
주요 기능 | 최씨 정권의 경호 사병 역할 수행 |
조직 변화 | 최충헌 시기: 6번으로 분리 최우 시기: 야별초를 두어 도방에 소속 삼별초 조직의 모태가 됨 |
인원 구성 | 문객 노비 승려 등 다양한 계층으로 구성 |
특징 | 무신정권 유지의 핵심 기반 |
영향 | |
군사적 영향 | 고려 후기 군사 체계에 영향 |
정치적 영향 | 권문세족의 사병 조직으로 발전하는 데 영향 |
관련 인물 | |
창설자 | 이의민 |
혁파 | 경대승 |
재건 및 확대 | 최충헌 |
주요 인물 | 최우, 최항, 최의 등 최씨 정권의 수장들 |
같이 보기 |
2. 창설
정중부에서 이의민에 이르기까지 역대 무신정권 집권자들은 별다른 사병 조직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이 일으킨 각종 쿠테타에 동원된 병력은 일반 관군이었다. 물론 각기 문객(文客)·악소(惡少)·사사(死士)·용사·장사 등으로 불리던 사료에 나타나는 사병 조직이 있으나, 이들이 얼마나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조직이었느냐의 관점에서 보면, 사실상 이때에는 사병 조직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들 중에서 다만 예외적인 인물이 경대승이었으니, 그는 모든 무신을 적대 세력으로 집권한 만큼 신변보호가 절대적으로 요청되었다.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도방은 이 경대승이 조직하였다.
1179년(명종 9년) 경대승이 정중부 일파를 살해한 후에 일부 무신이 정중부를 찬양하고 자기에게 적의를 나타내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경대승은 집에 백여 명의 결사대를 모아 함께 침식·행동케 하며 불의의 변을 막게 한 데서 도방이 비롯되었다. 경대승의 도방은 신변 호위뿐 아니라 정보 수집, 반대파 숙청에도 동원되었다. 심지어 권세를 배경으로 살인, 약탈 등 갖가지 폐단을 끼쳤다는 역사의 기록도 있으나 이것은 경대승에게 적의를 품은 세력이 역사를 기록한 데서 기인한다. 1183년(명종 13년) 경대승이 죽은 뒤 그 무리는 섬에 유배되고 도방도 해체되었다.
2. 1. 경대승 도방
정중부에서 이의민에 이르기까지 역대 무신정권 집권자들은 별다른 사병 조직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들이 일으킨 각종 쿠테타에 동원된 병력은 일반 관군이었다. 물론 각기 문객(文客)·악소(惡少)·사사(死士)·용사·장사 등으로 불리던 사료에 나타나는 사병 조직이 있으나, 이들이 얼마나 조직적이고 지속적인 조직이었느냐의 관점에서 보면, 사실상 이때에는 사병 조직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이들 중에서 다만 예외적인 인물이 경대승이었으니, 그는 모든 무신을 적대 세력으로 집권한 만큼 신변보호가 절대적으로 요청되었다. 역사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도방은 이 경대승이 조직하였다.
1179년 (명종 9년) 경대승이 정중부 일파를 살해한 후에 일부 무신이 정중부를 찬양하고 자기에게 적의를 나타내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경대승은 집에 백여 명의 결사대를 모아 함께 침식·행동케 하며 불의의 변을 막게 한 데서 도방이 비롯되었다. 경대승의 도방은 신변 호위뿐 아니라 정보 수집, 반대파 숙청에도 동원되었다. 심지어 권세를 배경으로 살인, 약탈 등 갖가지 폐단을 끼쳤다는 역사의 기록도 있으나 이것은 경대승에게 적의를 품은 세력이 역사를 기록한 데서 기인한다. 1183년(명종 13년) 경대승이 죽은 뒤 그 무리는 섬에 유배되고 도방도 해체되었다.
2. 2. 최씨 정권 이전의 사병 조직
3. 최씨 집권기의 도방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후, 경대승 집권 시기와 같이 최충헌에 대한 음모가 연이어 발생하였다. 이에 1200년(신종 3년) 최충헌은 신변 보호와 정권 안정을 위해 본격적인 사병 조직으로 경대승의 도방을 부활시켰다. 새로운 도방은 이전의 경대승 도방보다 훨씬 큰 규모로 조직되었으며, 문무관, 한량(閑良), 군졸 중 강력한 자들을 모아 6번(六番)으로 나누어 교대로 근무하게 했다. 이로써 도방은 근위대(近衛隊) 성격을 띠며 최씨 권력 유지의 지주(支柱)가 되었다.
최우 집권 시기에는 최우의 가병(家兵)을 내도방(內都房), 최충헌의 도방(六番都房)을 외도방(外都房)이라 하여 조직을 확장 강화했다. 내도방은 직접적인 신변 보호를, 외도방은 친척 및 기타 외부 경비를 담당하게 했다. 이후 최항 집권 시기에는 내·외도방을 합쳐 36번으로 확장 강화하였고, 임연 부자의 전횡 시대에는 다시 6번으로 개편되었다. 도방은 1270년(원종 11년) 폐지되었다.
3. 1. 도방의 부활과 확장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후, 경대승 집권 시기와 같이 최충헌에 대한 음모가 연이어 발생하였다. 이에 1200년(신종 3년) 최충헌은 신변 보호와 정권 안정을 위해 본격적인 사병 조직으로 경대승의 도방을 부활시켰다. 새로운 도방은 이전의 경대승 도방보다 훨씬 큰 규모로 조직되었으며, 문무관, 한량(閑良), 군졸 중 강력한 자들을 모아 6번(六番)으로 나누어 교대로 근무하게 했다. 이로써 도방은 근위대(近衛隊) 성격을 띠며 최씨 권력 유지의 지주(支柱)가 되었다.최우 집권 시기에는 최우의 가병(家兵)을 내도방(內都房), 최충헌의 도방(六番都房)을 외도방(外都房)이라 하여 조직을 확장 강화했다. 내도방은 직접적인 신변 보호를, 외도방은 친척 및 기타 외부 경비를 담당하게 했다. 이후 최항 집권 시기에는 내·외도방을 합쳐 36번으로 확장 강화하였고, 임연 부자의 전횡 시대에는 다시 6번으로 개편되었다. 도방은 1270년(원종 11년) 폐지되었다.
3. 2. 내도방과 외도방
최충헌은 이의민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후, 경대승 집권 시기와 같이 자신에 대한 음모가 잇따르자 신변 보호와 정권 안정을 위해 1200년(신종 3년)에 도방을 부활시켰다. 최충헌은 문무관, 한량(閑良), 군졸 중에서 강력한 자를 모아 6번(六番)으로 나누어 교대로 근무하게 하여 도방을 근위대(近衛隊) 성격을 띠게 하였고, 최씨 권력 유지의 지주(支柱)로 삼았다.최우는 자신의 가병(家兵)을 내도방(內都房), 최충헌의 도방(六番都房)을 외도방(外都房)이라 칭하며 조직을 확장 강화하였다. 내도방은 최우의 직접적인 신변 보호를, 외도방은 친척 및 기타 외부 경비를 담당했다. 이후 최항 집권 시기에는 내·외도방을 합쳐 36번으로 확장 강화하였고, 임연 부자의 전횡 시대에 다시 6번으로 개편되었다가 1270년(원종 11년) 폐지되었다.
3. 3. 도방의 변천과 폐지
4. 역할과 평가
도방은 무인정권의 호위 및 집권체제 강화와 안전을 위해 존속했다. 그러나 한편 도방이 직접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동원된 경우도 있는데, 이것을 두고 도방은 관군이었다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당시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쥐고 있던 무신정권의 양해하에 가능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종래의 해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
도방은 무신정권의 출발에서 형성되어 무신정권의 몰락과 더불어 해체되는 것에서 보이듯이 이 기구는 무신정권의 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한편 이를 다른 측면에서 보면 주가(主家)의 권세를 배경으로 백성을 약탈하는 등, 많은 폐단을 끼쳤다는 부정적 평가가 있다.
4. 1. 무신정권 유지의 핵심 도구
도방은 무인정권의 호위 및 집권체제 강화와 안전을 위해 존속했다. 그러나 한편 도방이 직접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동원된 경우도 있는데, 이것을 두고 도방은 관군이었다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당시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쥐고 있던 무신정권의 양해하에 가능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종래의 해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겠다.도방은 무신정권의 출발에서 형성되어 무신정권의 몰락과 더불어 해체되는 것에서 보이듯이 이 기구는 무신정권의 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한편 이를 다른 측면에서 보면 주가(主家)의 권세를 배경으로 백성을 약탈하는 등, 많은 폐단을 끼쳤다는 부정적 평가가 있다.
4. 2. 외적 방어 동원
4. 3. 부정적 평가
도방은 무신정권의 집권 체제를 강화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주가(主家)의 권세를 배경으로 백성을 약탈하는 등, 많은 폐단을 끼쳤다는 부정적 평가도 있다. 도방이 직접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동원된 경우도 있는데, 이를 두고 도방은 관군이었다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당시 왕권을 능가하는 권력을 쥐고 있던 무신정권의 양해 하에 가능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종래의 해석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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