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중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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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복궁 중건은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이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경복궁을 다시 세운 사업이다. 1865년 신정왕후의 지시로 시작되어, 백성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원납전 모금으로 초기에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재정 부족으로 인해 원납전 강제 징수, 당백전 발행 등 무리한 정책이 시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백성들의 고통이 가중되었고, 1872년 경복궁 중건이 완료되었지만, 이는 흥선대원군 실각의 한 원인이 되었다.
조선 후기 세도정치로 왕권이 약화되고 국가 기강이 문란해진 상황에서,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경복궁 중건을 계획하였다.[1] 경복궁은 조선의 법궁이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후 재정 부족으로 복구되지 못하고 있었다.[1] 순조와 헌종 때에도 중건 계획이 있었으나 실행되지 못하였다.[1]
1865년 4월 26일(고종 2년 음력 4월 2일) 신정왕후의 지시로[2] 경복궁 중건 계획이 발표되고 영건도감(營建都監)이 설치되어 공사가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백성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원납전 모금 등으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3][4] 흥선대원군은 위로금을 지급하고 무동대(舞童隊)·농악대(農樂隊)나 남사당패를 동원하여 백성들을 격려하였다.
[1]
문서
이유원과 익현이 경복궁 중건의 상당수 대량 흥선대에게 통렬한 통박이 섞인 경고 및 일갈과 함께 신랄히 비판.
2. 배경
3. 경과
1866년 3월 재목장에 큰 불이 나서 건축 작업에 큰 지장을 초래하였다. 이 화재로 800여 칸에 쌓아 둔 목재가 모두 타버려 공사가 중단될 위기에 놓였다.[5] 흥선대원군은 공사 책임자인 이경하와 흥인군을 크게 질책하고 처벌하려 하였으나, 여러 대신들의 간언으로 원상 복구 책임만 지게 되었다.[5] 이후 흥선대원군은 사유림의 나무를 마구 베어오는 등[5] 무리하게 공사를 추진하였다.
경비가 부족해지자 원납전을 받고 벼슬을 팔거나 세금을 올리고, 서울 성문 출입 시에도 세금을 부과하고 당백전을 발행하는 등 무리한 정책을 시행하였다.
1872년(고종 9년) 경복궁 중건이 완료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백성들의 원망이 커지고 경제적 파탄이 초래되어 흥선대원군 몰락의 한 원인이 되었다.
참조
[2]
서적
고종실록
1865-05-27
[3]
웹인용
조선시대 강제 기부금은?…'LG 고시'에 1만여명 몰려
https://news.mt.co.k[...]
머니투데이
2017-10-14
[4]
웹인용
경복궁 중건 천일의 기록 : 네이버 통합검색
https://m.search.nav[...]
2020-03-20
[5]
서적
대한제국아 망해라: 백성들의 눈으로 쓴 살아 있는 망국사
다산초당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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