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도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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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세도 정치는 조선 후기에 특정 외척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여 정치를 좌우하던 시기를 의미한다. 영조와 정조 시대에는 탕평책으로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으나, 정조 사후 순조가 즉위하면서 어린 나이로 인해 외척 세력이 등장하며 세도 정치가 시작되었다. 신 안동 김씨가 권력을 장악하고 풍양 조씨, 반남 박씨, 여흥 민씨 등이 세도 가문으로 부상하며 권력 다툼이 벌어졌다. 세도 정치는 정치 기강 문란, 삼정의 문란, 민란 발생 등 폐단을 낳았으며, 흥선대원군의 개혁과 여흥 민씨 세력의 몰락을 거치면서 종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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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도정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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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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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름 | 환도 정치 (換到政治) |
시기 | 19세기 초 ~ 1863년 |
이전 시기 | 탕평책 |
다음 시기 | 대원군 집권기 |
주요 가문 | 안동 김씨 (신 안동 김씨) 풍양 조씨 |
관련 인물 | 순조 헌종 철종 김조순 조만영 김좌근 조병현 |
배경 | |
정치적 배경 | 세도 정치는 조선 후기 왕권이 약화된 상황에서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던 정치 형태이다. 탕평책의 실패와 정조 사후 어린 순조의 즉위로 인해 발생했다. |
사회적 배경 | 탐관오리의 횡포와 삼정의 문란으로 민생이 악화되었다. 사회 불만이 고조되어 홍경래의 난 등 민란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
특징 | |
정치적 특징 | 왕권 약화 및 외척 세력의 권력 독점 과거 제도의 문란 및 관직 매매 성행 붕당 정치의 변질 및 당파 간의 갈등 심화 |
사회적 특징 | 탐관오리의 횡포 및 삼정의 문란 심화 농민 경제의 파탄 및 유민 증가 사회 기강 해이 및 도적 떼 출몰 |
경제적 특징 | 국가 재정 악화 양반 지주 세력의 토지 겸병 심화 상업 및 수공업 발달 저해 |
결과 및 영향 | |
정치적 결과 | 국가 통치 능력 약화 사회적 혼란 가중 대원군 집권으로 세도 정치 종식 |
사회적 영향 | 민생 악화 및 사회 불만 고조 동학 농민 운동 등 민중 봉기 발생 사회 변혁의 요구 증대 |
역사적 의의 | 조선 사회의 모순과 폐단을 드러낸 시기 사회 변혁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 계기 개화기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성격 |
2. 세도정치의 역사적 배경
영조·정조 대에는 탕평책을 통해 정치적 안정을 유지했다. 그러나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면서 왕권이 약화되고 외척 세력이 득세하는 세도 정치가 시작되었다.
순조 초, 정조의 유언에 따라 신 안동 김씨 김조순이 국구(國舅)로서 정치를 전담했다. 신 안동 김씨 일족은 요직을 차지하며 권력을 독점했으나, 문과에 급제할 정도로 뛰어난 인재들이었다는 점에서 풍양 조씨와는 달랐다.[1]
익종 비 신정왕후(조만영의 딸)가 들어오면서 신 안동 김씨의 전성기는 잠시 주춤했다. 헌종 대에는 풍양 조씨가 정권을 장악했으나, 철종 즉위 후 왕비 철인왕후(김문근의 딸)가 되면서 다시 신 안동 김씨가 권력을 잡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족조차 김씨 일문의 세력에 억눌렸고, 다른 세력은 신 안동 김씨의 도움 없이는 정치 참여가 어려웠다. 이로 인해 정치 기강이 문란해져 유교적 관료 정치는 붕괴되고, 붕당 정치에서 외척 중심의 정치로 변화하였다.
외척의 정권 독점으로 척족 가문이 고위 관직을 독점하며 정치 기강은 더욱 문란해졌다. 농민들은 수탈당하고, 뇌물로 관직을 얻은 관리들은 농민에게서 그 대가를 착취했다. 전정·군정·환곡(還穀)을 통칭하는 삼정은 세도 정치와 맞물려 문란해졌다. 삼정의 문란은 농민 부담을 가중시키고 국가 재정을 위협했으며, 각지에서 민란을 초래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신 안동 김씨 후손 중 상당수는 조선 멸망 후 독립운동가와 거물 정치인으로 국가 부흥에 기여했다.[1][2]
2. 1. 정조 이전
홍국영이 세도 정치를 하기 전의 세도(世道)는 단순한 정치권력보다는 어떤 지도이념과 공정한 언론을 주체로 하여 세도인심(世道人心)을 바로잡으려는 사상적·도의적인 일면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런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훌륭한 인격과 뛰어난 학식이나 덕망을 가져야만 했고, 따라서 왕도 높은 관직을 주어 우대하였다.예를 들면 중종 때의 조광조는 교학(敎學)의 최고위 직인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거쳐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며, 효종·현종 때의 송시열은 예조참판에서 신임을 받기 시작하여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뒤에 우의정·좌의정 등의 요직에 있으면서 세도의 신임과 위임을 받았다.
2. 2. 정조 시대: 홍국영의 등장
정조는 왕세손 시절 정후겸, 홍인한 등의 위협에서 자신을 보호하여 무사히 왕위에 오를 수 있게 한 홍국영을 도승지 겸 금위대장에 임명했다. 이로써 홍국영은 왕의 신변 보호는 물론 모든 정사를 보고하고 결재하는 권한을 위임받았다.[1]외척이나 총신이 정권을 독점하는 "세도 정치"는 정조 시대의 홍국영이 그 시초이다.[1] 홍국영은 폐세손의 아들인 정조를 왕으로 만든 공으로 도승지에 올랐으나 정치, 군사적 권한이 그에게 집중되었다.[1] 또한 누이를 정조의 측실로 들여 외척의 지위를 얻었다.[1] 누이가 일찍 죽자 완풍군을 누이의 양자로 삼아 외척 지위를 유지하려 했다.[1] 그는 영의정을 능가하는 권세를 누렸지만, 왕비 암살 미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실각했다.[1]
2. 3. 순조 이후: 외척 세력의 득세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신 안동 김씨 세력이 득세하며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순조 초, 정조의 유언에 따라 신 안동 김씨인 김조순이 국구(國舅)로서 정치를 전담하였고, 그의 일족은 요직을 차지하며 권력을 독점했다. 이들은 모두 문과에 급제할 정도로 뛰어난 인재들이었다.[1]정순왕후의 수렴청정 이후, 김조순은 정조의 유탁(遺託)을 받아 정권을 잡고 경주 김씨 세력을 숙청했다. 이듬해 그의 딸 순원왕후가 순조의 왕비가 되면서 신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본격화되었고, 중앙의 요직은 그의 일족이 독점하였다.
그러나 익종의 비(妃)로 조만영의 딸(신정왕후)이 들어오면서 풍양 조씨 세력이 등장하며 신 안동 김씨의 전성기는 잠시 주춤했다. 헌종 때에는 풍양 조씨 일가가 정권을 장악하기도 했다. 하지만 철종이 즉위하고, 왕비가 김문근의 딸(철인왕후)이 되면서 다시 신 안동 김씨가 권력을 잡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족조차도 신 안동 김씨의 세력에 억눌려 살아야 했으며, 다른 세력이 신 안동 김씨의 도움 없이 정치에 참여하기는 어려웠다. 왕족인 이하전이 과거 시험장에서 김씨 자제와 싸워 패하고 죽임을 당한 사건은 당시의 분위기를 보여준다. 이로 인해 정치 기강은 문란해지고,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여 신 안동 김씨 세력을 꺾으면서 외척 세도정치는 잠시 사라지는 듯했으나, 명성황후에게 축출된 후 여흥 민씨 일족이 다시 세도정치를 이어갔다.
3. 주요 세도 가문
조선 후기 세도정치를 주도했던 주요 가문으로는 신 안동 김씨, 풍양 조씨, 반남 박씨, 여흥 민씨 등이 있다. 이들 가문은 왕실과의 혼인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주요 관직을 독점하며 국정을 좌지우지했다.
- 신 안동 김씨: 순조 대부터 철종 대까지 3대에 걸쳐 권력을 장악했다. 김조순을 필두로 그의 일족이 주요 관직을 차지했으며, 김좌근, 김수근, 김병국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 풍양 조씨: 헌종 대에 조만영의 딸 신정왕후를 통해 잠시 권력을 잡았으나, 신 안동 김씨와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났다.
- 반남 박씨: 순조의 어머니 수빈 박씨를 통해 권력을 잡았다. 박준원, 박종경, 박종보 등이 주요 인물이었으나, 철종 대에 핵심 인물들이 사라지면서 몰락했다.
- 여흥 민씨: 고종의 비 명성황후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민유중의 딸 인현왕후가 숙종의 왕비가 되면서부터 세를 키웠으며,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 대에 이르러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이들 세도 가문은 왕실의 외척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정권을 독점하고 고위 관직을 독차지했다. 이로 인해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고, 삼정의 문란이 심화되어 농민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1]
영조와 정조와 같이 뛰어난 군주가 탕평책을 펼칠 때에는 어느 정도 정치 안정을 이룰 수 있었다. 정조 때 홍국영이 잠시 권력을 농단하기도 했으나, 오래가지 않아 정계에서 축출되었다. 풍산 홍씨는 홍주원이 선조의 부마가 된 것을 시작으로,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요직을 거쳤다. 특히 홍현보의 아들 홍봉한은 사도세자의 비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로서 영조 때 영의정에 올랐고, 그의 동생 홍인한은 좌의정에, 5촌인 홍낙성은 정조 때 영의정에 올랐다. 홍주원의 6대손인 홍국영은 정조 때 세도정치로 권세를 잡았다.
3. 1. 신 안동 김씨 (장동 김씨)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면서 외척 세력인 신 안동 김씨가 정권을 장악했다. 순조 초, 정조의 유언에 따라 김조순이 국정 운영을 전담하며 신 안동 김씨 일족이 주요 관직을 차지했다. 이들은 모두 문과에 급제할 정도로 뛰어난 인재들이었다.[1]익종의 비가 조만영의 딸(신정왕후)이 되면서 풍양 조씨가 잠시 정권을 잡았으나, 철종이 즉위하고 김문근의 딸(철인왕후)이 왕비가 되면서 다시 신 안동 김씨가 권력을 되찾았다.[1] 이 시기 종친(宗室)조차 김씨 일문의 세력에 억눌려 살아야 했으며, 다른 세력이 정치에 참여하기는 어려웠다.[1]
김좌근, 김수근, 김병국 등 신 안동 김씨 주요 인물들이 국정을 좌우하며 권력을 남용했다. 정치 기강은 문란해지고, 삼정의 문란이 심화되어 농민들의 삶은 피폐해졌다.[1]
고종 즉위 후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신 안동 김씨의 세도는 쇠퇴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신 안동 김씨 후손들 중에는 조선 멸망 이후 독립운동가와 주요 정치인들이 많이 배출되어 국가 부흥에 기여했다.[1][2]
3. 2. 풍양 조씨
헌종 대에 왕의 외척으로서 잠시 권력을 잡았던 풍양 조씨는 조만영의 딸 신정왕후를 통해 권력을 잡았다.[1][2] 그러나 신 안동 김씨와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몰락했다. 풍양 조씨는 족벌정치로 악명이 높았지만, 신 안동 김씨처럼 문과 급제자를 많이 배출하지는 못했다.1827년(순조 27년) 왕세자가 부왕의 신병 요양을 위해 정치를 대리하게 되자, 조만영의 딸을 비(妃)로 삼았다. 이로써 조씨 일파는 김씨 일파와 세력 다툼을 벌여 한동안 세도를 잡았으나, 그들 간의 불화와 반목으로 세도가 무너졌다. 결국 철종 즉위와 함께 신 안동 김씨에게 세력을 빼앗기고 말았다.
헌종 때에는 할머니 순원왕후 김씨가 실권을 갖고, 친정인 신 안동 김씨와 그의 외가인 풍양 조씨 간에 암투가 벌어졌다.
3. 3. 반남 박씨
순조의 어머니 수빈 박씨는 반남 박씨이다. 수빈 박씨의 아버지인 박준원은 정조 사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하던 시기에 어영대장을 거쳐 판의금부사 자리까지 올랐다. 수빈 박씨의 오라비인 박종경과 박종보도 순조 대에 세도가로 이름을 떨쳤다. 박종경은 풍양 조씨 조득영의 상소로 물러났다. 이 외에도 박기수, 박회수, 박윤수 등이 있다. 반남 박씨는 순조 때와 헌종 초에 세력을 잡았으나 철종 시절 핵심 인물들이 사라지자 몰락했다.3. 4. 여흥 민씨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잡고 신 안동 김씨 세력을 꺾어, 한때 독재적인 세도 정치를 이룩하여 외척이 발흥하는 세도 정치의 폐단이 없어지는 듯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에 명성황후에게 축출되고부터는 다시 한말까지 여흥 민씨 일족의 세도 정치가 그대로 지속되었다.[1] 1895년(고종 32년) 명성황후 민씨가 시해된 뒤에도 국가의 요직을 차지한 여흥 민씨가 1천 명을 넘었을 정도로 뿌리가 깊었다.[2]여흥 민씨는 민유중(閔維重)의 딸 인현왕후(仁顯王后)가 숙종의 왕비가 되면서 민유중은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에 봉군되었고, 민유중의 형인 민정중(閔鼎重)이 좌의정에 올랐으며, 민정중의 아들 민진장(閔鎭長)은 우의정에 올랐다. 인현왕후의 오빠인 민진후(閔鎭厚)는 좌참찬(左參贊)에 올랐고, 민진후의 동생인 민진원(閔鎭遠)은 영조 때 노론의 영수로서 좌의정에 이르렀다. 민진후의 현손인 민치록(閔致祿)의 딸이 고종의 비인 명성황후가 되면서 여흥 민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여은부원군(驪恩府院君) 민태호(閔台鎬)의 딸은 순종의 비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가 되었다.
1873년에 민비는 섭정이었던 흥선대원군을 실각시켰다. 그러나 민비는 일족을 정권의 중직에 등용하고 국고를 낭비하게 했다. 게다가 무녀였던 진령군과의 유착, 임오군란, 남하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친러 정책 등도 발발했다. 1895년에 정권의 중추인 민비가 암살당함으로써 민씨 일파는 쇠퇴했다.
4. 세도정치의 폐단
영조와 정조 같은 뛰어난 군주가 탕평책을 쓰던 시기에는 어느 정도 정치적 안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영조 말년부터 정조 초년까지 홍국영이 도승지로서 정권을 농단하기도 했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러나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순조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정치 기강이 극도로 문란해졌다. 왕실 외척 가문이 고위 관직을 독점하고, 뇌물로 관직을 사고 판 관리들은 백성들에게 그 손실을 보전하려 했다. 특히 국가 재정의 근간이었던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 (통칭 삼정)은 세도정치와 맞물려 극도로 문란해졌다. 전정에서는 삼수미, 대동미, 결작, 도결 등의 폐단이 심각했고, 군정에서는 황구첨정, 백골징포, 족징, 인징 등 온갖 편법이 동원되어 농민을 괴롭혔다. 환곡 또한 고리(高利)로 이익을 착취하는 수단이 되었으며, 반작, 허류 등 여러 방법으로 농민을 수탈했다.[1]
이러한 삼정의 문란은 농민에게 과중한 부담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국가 재정까지 위협했고, 결국 곳곳에서 민란이 발생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1]
아이러니하게도 신 안동 김씨 후손들 중 상당수는 조선 멸망 이후에도 독립운동가와 거물 정치인으로 배출되어 국가를 다시 부흥시키는 데 기여했다.[1][2]
4. 1. 정치 기강 문란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외척 세력이 왕권을 압도하면서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순조 초에는 신 안동 김씨인 김조순이 정치를 전담하다시피 하였는데, 그의 일족은 모두 영달하여 노론인 신 안동 김씨는 많은 관직을 차지했다. 다만, 능력 없이 관직에 오른 풍양 조씨와는 달리 신 안동 김씨는 모두 문과에 급제할 정도로 뛰어난 재원이었다.[1]권력을 독점하던 신 안동 김씨의 전권 시대는 풍양 조씨를 만나 일시 후퇴하였다. 헌종 때에는 조씨 일문이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철종이 즉위하면서 다시 세도가 신 안동 김씨에게로 돌아갔다.
이러한 형세였으므로 종실(宗室)이라 하더라도 김씨 일문의 세력에 억눌려 살아야 했으며, 다른 세력이 신 안동 김씨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정치에 참여할 기회 또한 희박해졌다. 따라서 정치 기강이 극도로 문란해져서 유교적인 관료 정치는 무너지고, 붕당 사이의 세력 투쟁 시대로부터 척족(戚族)이 정권을 농단하는 시대로 변화한 것이다.
왕실의 외척이 정권을 독차지함으로써 척족의 가문이 고위 관직을 독점하여 정치 기강이 더욱 문란해졌다. 그로 말미암아 농민들의 피해는 더욱 커졌으며, 많은 뇌물을 바치고 관직을 얻은 관리들은 그 대가를 농민에게서 짜 내어 자신의 이익만을 얻어 갔다. 당시 재정을 확충하는 제도는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이었으며, 통틀어 삼정(三政)이라 한다. 세도 정치와 맞물려, 삼정은 날로 문란해졌다. 전정, 군정, 환곡에서 각종 편법이 생겨 농민을 수탈하였으며, 이는 국가 재정까지 위협했고, 곳곳에서 민란이 발생하게 되었다.
4. 2. 삼정의 문란
정조 사후 순조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면서 외척 세력이 왕권을 압도하는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고위 관직을 독점하며 정치 기강을 문란하게 만들었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농민들에게 돌아갔다.[1][2]뇌물을 주고 관직을 얻은 관리들은 그 손실을 농민에게서 충당하려 하였다. 당시 국가 재정의 근간은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을 통칭하는 삼정(三政)이었으나, 세도정치와 맞물려 삼정은 극도로 문란해졌다.[1][2]
- 전정(田政): 삼수미, 대동미, 결작, 도결 등의 폐단이 심각했다.
- 군정(軍政): 황구첨정, 백골징포, 족징, 인징 등 온갖 편법으로 농민들을 괴롭혔다.
- 환곡(還穀): 고리대를 통해 이익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변질되었으며, 반작, 허류 등 여러 방법으로 농민을 수탈했다.
이러한 삼정의 문란은 농민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웠을 뿐만 아니라 국가 재정까지 위협했고, 결국 곳곳에서 민란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다.[1][2]
4. 3. 민란 발생
순조가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면서 왕실의 외척 세력이 왕권을 압도하는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이들은 고위 관직을 독점하며 정치 기강을 문란하게 만들었다.[1] 이로 인해 삼정(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에서 각종 폐단이 발생하여 농민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다.[1]전정에서는 삼수미, 대동미, 결작, 도결 등의 폐해가 심각했고, 군정에서는 황구첨정, 백골징포, 족징, 인징 등 온갖 편법이 동원되어 농민들을 착취했다.[1] 환곡 또한 고리대(高利貸)로 이익을 챙기는 수단으로 변질되었으며, 반작, 허류 등 다양한 방법으로 농민을 수탈하였다.[1]
이러한 삼정의 문란은 농민들에게 과도한 부담을 지웠을 뿐만 아니라 국가 재정까지 위협했고, 결국 전국 곳곳에서 민란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다.[1]
5. 세도정치의 종말
고종이 즉위하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면서 안동 김씨 세력을 꺾고 왕권 강화를 위한 개혁 정치를 추진하면서 세도정치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비변사 폐지, 서원 철폐, 호포제 실시 등 과감한 개혁을 통해 세도정치의 폐단을 극복하고자 했다.
철종 사후 흥선대원군은 신정왕후 조씨, 풍양 조씨와 연합하여 고종을 즉위시키고 안동 김씨 세력을 몰아냈다.[1]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독재에 민비를 중심으로 한 여흥 민씨 세력이 도전하면서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1]
1873년 민비는 흥선대원군을 실각시켰으나, 여흥 민씨 일족을 등용하고 국고를 낭비했다.[1] 무녀였던 진령군과의 유착, 임오군란, 친러 정책 등도 문제가 되었다.[1] 1895년 민비 암살 이후 여흥 민씨 세력이 쇠퇴하고, "왕의 신임을 얻은 인물, 집단이 정치를 독점적으로 담당하는" 정치 형태는 막을 내렸다.[1]
5. 1. 흥선대원군의 개혁
고종이 즉위하고 이하응이 집권하면서, 신 안동 김씨 세력을 꺾고 왕권 강화를 위한 개혁 정치를 추진했다. 흥선대원군은 비변사를 폐지하고, 서원을 철폐했으며,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제를 실시하는 등 과감한 개혁을 통해 세도정치의 폐단을 극복하고자 했다.5. 2. 여흥 민씨 세력의 몰락과 세도정치의 종식
이하응은 철종이 붕어하자 신정왕후 조씨와 풍양 조씨와 연합하여 차남인 명복을 고종으로 왕위에 즉위시키는 데 성공했다. 새 국왕은 어렸기 때문에 이하응은 흥선대원군으로 섭정을 맡았는데, 이때 안동 김씨 등 세도 세력은 일소되었다.[1] 그 후 흥선대원군 자신에 의한 독재가 행해졌지만, 흥선대원군의 독재에 불신감을 나타낸 고종의 비 민비가 이끄는 여흥 민씨와의 권력 투쟁으로 전개되었다.[1]1873년에 민비는 섭정이었던 대원군을 실각시켰다. 그러나 일족을 정권의 중직에 등용하고 국고를 낭비하게 했다.[1] 게다가 무녀였던 진령군과의 유착, 임오군란, 남하 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친러 정책 등도 발발했다.[1] 1895년에 정권의 중추인 민비가 암살당함으로써 민씨 일파는 쇠퇴했다. 투쟁을 계속했던 흥선대원군은 이 무렵에는 권력욕을 잃었기 때문에, "왕의 신임을 얻은 인물, 집단이 정치를 독점적으로 담당하는" 정치 형태는 민씨 일파의 쇠퇴로 막을 내렸다.[1]
참조
[1]
뉴스
조선시대 최고 명문가 신 안동 김씨의 빛과 어둠
https://m.mk.co.kr/n[...]
매일경제
2007-01-19
[2]
뉴스
“(신)안동 김씨는 우리 역사의 어둠이자 빛”
https://www.hani.co.[...]
한겨레
2019-10-19
[3]
문서
심의겸
[4]
문서
김효원
[5]
문서
서인에 대한 보복 반대
[6]
문서
서인에 대한 강경 보복 주장
[7]
문서
광해군 폐위 반대
[8]
문서
광해군 폐위와 영창대군 세자옹립 주장
[9]
문서
광해군의 폐모살제 찬성
[10]
문서
광해군의 폐모 반대, 살제는 찬성
[11]
문서
광해군의 폐모살제 반대
[12]
문서
인조반정 주도세력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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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두표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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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문서
예송 이전에 서인과 대충 잘 지낸 세력
[19]
문서
서인과 싸운 예송 주도자들
[20]
문서
송시열
[21]
문서
윤증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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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에게 영합하여 생존함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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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고 주장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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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신정치 반대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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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의 탕평책과 척신정치에 영합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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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박해 주장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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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에 사상적으로 반대하는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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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박해 반대
[29]
문서
사도세자 추숭 반대파
[30]
문서
사도세자 추숭 찬성파
[31]
문서
정순왕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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