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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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흥인군 이최응은 남연군의 아들이자 흥선대원군의 형으로, 조선 후기 문신이다. 1815년에 태어나 1882년 임오군란 때 사망했다. 그는 일찍이 동생 흥선대원군에게 무시당했으며, 명성황후는 그를 흥선대원군 견제에 이용하려 했다. 1860년대 경복궁 중건 과정에서 흥선대원군과 갈등을 겪었고, 개항 정책에 찬성하며 미국과의 조약 체결에도 관여했다. 뇌물 수수와 부패 혐의로 비판받았으며, 유림으로부터 개항 정책 추진에 대한 반발을 받았다. 임오군란 당시 민씨 일족을 도왔다는 이유로 난병에게 피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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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인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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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휘 | 이최응(李最應) |
작위 | 조선의 왕족 |
인물 정보 | |
출생일 | 1815년 2월 17일 (음력) |
사망일 | 1882년 6월 10일 (음력) |
사망지 | 조선 한성부 |
가계 | |
아버지 | 남연군 |
어머니 | 군부인 여흥 민씨 |
배우자 | 정경부인 안동 권씨 (초취) 정경부인 연일 정씨 (재취) 정경부인 안동 김씨 (삼취) |
자녀 | 이재긍, 이희하 |
친척 | 동생 이하응, 조카 이형, 양조부 이진, 생조부 이병원, 손자 이지용 |
관직 정보 | |
관직 | 좌의정 영의정 |
시호 | 문충 |
자 | 양백 산향 |
휘호 | 최응 |
초휘 | (알 수 없음) |
유휘 | (알 수 없음) |
2. 생애
흥인군 이최응은 1815년 2월 17일 한성부에서 남연군 이구와 군부인 여흥 민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말수가 적고 좋고 싫음을 내색하지 않는 성품이었다고 한다. 홍순목의 신도비문에 따르면 '사람의 허물을 보면 반드시 덮어주고 또한 사랑하고 미워함을 말하지 않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는 흥녕군과 흥완군의 동생이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친형이었으나, 아랫동생 이하응에게 번번이 무시당했고, 사이가 좋지 않았다. 황현은 그가 무식하면서 욕심이 많아서 그랬다고 평가했다.[1]
1829년(순조 29년) 흥인부정이 되고, 1830년 명선대부로 승진한 뒤 흥인도정으로 진봉되었다. 이후 군으로 진봉된 뒤 돈녕부도정에 임명되었고, 현록대부로 승진했다. 형인 흥녕군보다 작위가 높다는 이유로 사양하다가 형이 현록대부로 승진하자 그해 소의대부로 승진하고 군의 품계를 받았다. 1834년 순조가 죽자 수릉관으로 참여했고, 헌종 즉위 후인 1835년 연주 도감 수릉관에 임명되었다. 남연군의 3년 상을 마친 후 헌종 연간에 동지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고종 즉위 후인 1863년 12월 판종정경부사에 임명되고, 철종의 빈전에 종척집사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1]
황현은 그가 물고기 어(魚)와 노나라 노(魯)자를 제대로 구별하지도 못한다고 평가했지만, 그는 헌종 때 동지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왔고, 고종 때는 과거 시험의 주시관으로 과거를 주관하기도 했다.[1]
1864년(고종 1) 1월 영희전 제조가 되고 3일 뒤 사도시 제조를 겸임하였으며, 2월 종묘서 제조, 3월 상의원 제조에 임명되었다. 1865년 4월 경복궁 중건 때 영건도감제조를 맡았으나,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에 반대하여 반목했다. 그해 9월 의금부판사, 호위대장 등을 역임했다. 1866년 익총의 옥책문 옥보 전문 제술관이 되고,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 때 가례도감 당상이 되었다. 그해 의금부 판사가 되었다.
1866년 3월 경복궁 중건 중 화재로 전각과 재목이 소실되자 흥선대원군은 흥인군과 이경하를 투옥, 처형하려 했으나 중신들의 만류로 무마되었다. 당시 마감용 목재에 기름칠을 하는 창고에서 불이 나 800여 칸에 쌓아 둔 목재가 모두 타버려 공사가 중단될 처지에 놓였다.[2] 흥선대원군은 공사 책임자인 이경하와 흥인군을 불러 크게 질책하며 극형에 처하려 했으나 여러 조정 대신들의 간언으로 원상 복구 책임을 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2] 이경하와 흥인군은 목재가 더 이상 나올 곳이 없다며 죄를 청했고, 이에 흥선대원군은 크게 화를 냈다.[2]
그는 흥선대원군이 당백전을 발행하자 "일문전(一文錢)이 어찌 백문전(百文錢)으로 쓰이겠는가? 다만, 일문의 가치로만 쓰일 뿐이다"라고 비판하였다. 한편 물건값을 치를 때 당백전을 일전으로 계산하여 환전 과정에서 이익을 얻은 상인도 있었다. 1872년 경복궁 중건 공사가 끝나자 돈령부판사로 전직되었다. 그는 동생의 권력을 빙자하여 뇌물을 받기도 했는데, 흥선대원군은 그를 경멸했고 의정부와 육조에 흥인군에게 어떠한 우대나 혜택도 주지 말라고 비밀리에 지시하였다.
1873년(고종 10년) 흥선대원군 실각 직전 민씨 일파에 의해 호위대장에 임명되었다. 이어 판종정경과 행판부사를 지냈다. 그해 11월 30일부터 12월 4일까지 중궁전의 임시 승후관으로 특별 채용되었다. 1874년 교정 유사 당상으로 선원보략 수정에 참여하였다. 이후 판의금부사, 호위대장을 거쳐 1874년 12월 의정부좌의정에 올랐다. 1875년 영종정경, 세자부에 임명되었고, 1878년 세자사가 되었다가 그해 겨울 의정부영의정이 되었다. 그는 문관이 아닌데도 특별히 문무과 주시관이 되어 과거 시험을 주관하기도 했다.
1880년 12월 통리기무아문이 신설되자 영의정에서 총리대신으로 관직이 바뀐 초대 총리대신이 되었다.[3] 그는 개항 정책을 추진했으나 영남 유림의 탄핵을 당했다.[3] 1875년 11월 그의 집에 의문의 방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사람들은 흥선대원군을 의심하였다.
그는 대미 개국 방침을 결정한 1880년 10월의 중신회의에서 영의정으로서 회의를 주재했으며,[3] 쇄국 정책에 비판적이었다.[3] 일본에 갔던 수신사 김홍집 일행이 귀국하면서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가져와 미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해야 한다는 연미론을 주장하자 그는 "미국은 본래 원수의 나라가 아니니 서계를 가져오면 받아야 할 것"이라고 하여 1880년 9월 8일 연미론을 적극 수용하였다. 그의 주장에 고종도 병인양요, 신미양요는 우리나라가 스스로 반성해야 할 것이라고 하여 미국과의 조약 체결을 결심하게 되었다. 1881년 1월 흥인군의 건의로 고종은 지난해 6월 자신이 미국 사신을 거부한 것을 후회하는 문서를 청나라 톈진으로 가는 영선사, 유학생들을 보낼 때, 그들을 통해 청나라로 보냈다.
그의 개항 정책에 위기의식을 느낀 영남 유생들은 정조 이후 국가의 중대사 때마다 올린 영남만인소를 올려 흥인군을 탄핵했다. 1881년 영남만인소에서 그는 유림의 성토를 받았으며, 이후 홍재학은 이최응의 사형을 주장하는 상소를 하기도 하였다. 그는 만인소를 역모로 보고 만인소에 대한 취조관이 되어 홍재학을 교수형에 처했다. 이후에도 그는 개항 정책을 반대하는 유림들을 처벌하였지만, 이후에도 유림들의 탄핵은 계속되었고, 그는 사퇴하고 돈령부영사로 전임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흥인군은 흥선대원군의 형이었지만 민씨 일파를 지원했다는 이유로 난병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했다.[6]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흥인군이 난병을 피해 도망치다 담을 넘다가 고환이 터져 죽었다고 기록했고, 이는 유주현의 소설 대원군 등에 인용되었다. 수백 명의 난군이 달려들어 담장 아래 내동댕이쳐진 흥인군의 시신을 난도질하여 누구의 시신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했다. 난병들은 집안에 쌓아 놓았던 쌀, 돈, 금은보화, 옷감, 고기, 과일, 생선 등을 꺼내어 안마당과 대문 앞에 쌓아 놓았다.[7] 그리고는 이것들을 모두 인근 들판으로 가져가 불태웠다. 한편, 흥인군의 신도비에 따르면 왕이 어의를 보내 약을 쓰고 간호하게 했으나 결국 사망했다고 한다. 처음 내려진 시호는 효헌이었으나, 1884년 충익으로 바뀌었다가 1905년 문충으로 다시 바뀌었다.
2. 1. 초기 활동
1815년 2월 17일 한성부에서 남연군 이구와 군부인 여흥 민씨의 4남 1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성품은 말수가 적고, 좋고 싫음을 내색하지 않는 성품이었다고 한다. 홍순목이 쓴 신도비문에 의하면 그의 성격은 '사람의 허물을 보면 반드시 덮어주고 또한 사랑하고 미워함을 말하지 않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그는 흥녕군과 흥완군의 동생이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친형이었으나, 일찍부터 바로 아랫동생 이하응에게 번번이 무시당했고, 그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어머니 여흥 민씨와 아버지 남연군, 두 형이 일찍 사망했지만 동생 흥선대원군과의 관계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매천 황현은 그가 무식하면서 욕심이 많아서 그랬다고 한다.[1]동생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자신보다 무능력하면서 욕심이 많던 셋째 형 흥인군 이최응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형을 희미한 사람이라면서 무시했고 흥인군은 오랫동안 가슴에 담아두고 있었다. 이는 계속되어 감정 대립으로 발전했다. 뒤에 명성황후는 그가 흥선대원군과 사이가 좋지 않은 점을 이용하여 그를 끌어들인다.[1]
1829년(순조 29년) 1월 1일 흥인부정(興寅副正)이 되고 1830년 5월 6일 명선대부로 승진한 뒤 흥인도정(興寅都正)으로 진봉되고, 다시 군으로 진봉된 뒤 돈녕부도정에 임명되었다. 이어 현록대부로 승진하자 형인 흥녕군보다 작위가 높다는 이유로 스스로 사양하고 받지 않다가, 형 흥녕군이 현록대부로 승진하자 그해 10월 20일 소의대부로 승진하고, 군의 품계를 받았다. 1834년(순조 34년) 11월 순조가 죽자 그의 능침 조성 때 수릉관(守陵官)으로 참여하였다. 헌종 즉위 후 1835년 연주 도감(練主都監) 수릉관에 임명되었으며, 남연군의 3년 상을 마친 후 헌종 연간에 동지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고종 즉위 후, 1863년 12월 판종정경부사에 임명되고, 철종의 빈전에 종척집사(宗戚執事)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1]
매천 황현은 그가 물고기 어(魚)와 노나라 노(魯)자를 제대로 구별하지도 못한다며 그의 자질을 의심했지만, 그는 헌종 때의 동지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했고, 고종 때는 종종 과거 시험의 주시관으로 과거를 주관하기도 하여 논란의 여지가 있다.[1]
2. 2. 정치 활동
1864년(고종 1) 1월 영희전 제조가 되고 3일 뒤 사도시 제조를 겸임하였으며, 2월 종묘서 제조, 3월 상의원 제조에 임명되었다. 1865년(고종 2) 4월 경복궁 중건 때 영건도감제조(營建都監提調)를 맡았으나,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에 반대하여 반목했다. 그해 9월 의금부판사(義禁府判事), 호위대장 등을 역임했다. 1866년 익총의 옥책문 옥보 전문 제술관(玉寶篆文書寫官)이 되고, 고종과 명성황후의 가례 때 가례도감 당상이 되었다. 그해 의금부 판사가 되었다.1866년 3월 경복궁 중건 중 화재로 전각과 재목이 소실되자 흥선대원군은 흥인군과 이경하를 투옥, 처형하려 했으나 중신들의 만류로 무마되었다. 당시 마감용 목재에 기름칠을 하는 창고에서 불이 나 800여 칸에 쌓아 둔 목재가 모두 타버려 공사가 중단될 처지에 놓였다.[2] 흥선대원군은 공사 책임자인 이경하와 흥인군을 불러 크게 질책하며 극형에 처하려 했으나 여러 조정 대신들의 간언으로 원상 복구 책임을 지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2]
이경하와 흥인군은 목재가 더 이상 나올 곳이 없다며 죄를 청했고, 이에 흥선대원군은 크게 화를 냈다.[2]
그는 흥선대원군이 당백전을 발행하자 "일문전(一文錢)이 어찌 백문전(百文錢)으로 쓰이겠는가? 다만, 일문의 가치로만 쓰일 뿐이다"라고 비판하였다. 한편 물건값을 치를 때 당백전을 일전으로 계산하여 환전 과정에서 이익을 얻은 상인도 있었다. 1872년 경복궁 중건 공사가 끝나자 돈령부판사로 전직되었다. 그는 동생(흥선대원군)의 권력을 빙자하여 뇌물을 받기도 했는데, 흥선대원군은 그를 경멸했고 의정부와 육조에 흥인군에게 어떠한 우대나 혜택도 주지 말라고 비밀리에 지시하였다.
1873년(고종 10년) 흥선대원군 실각 직전 민씨 일파에 의해 호위대장(扈衛大將)에 임명되었다. 이어 판종정경과 행판부사를 지냈다. 그해 11월 30일부터 12월 4일까지 중궁전의 임시 승후관(承候官)으로 특별 채용되었다.
1874년 교정 유사 당상(校正有司堂上)으로 선원보략 수정에 참여하였다. 이후 판의금부사, 호위대장을 거쳐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 실각 직후인 1874년 12월 의정부좌의정에 올랐다.
1875년 영종정경, 세자부(世子傅)에 임명되었고, 1878년 세자사가 되었다가 그해 겨울 의정부영의정이 되었다. 그는 문관이 아닌데도 특별히 문무과 주시관이 되어 과거 시험을 주관하기도 했다.
2. 2. 1. 개화 정책 추진과 유림의 반발
1880년 12월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신설되자 영의정에서 총리대신으로 관직이 바뀐 초대 총리대신이 되었다.[3] 그는 개항 정책을 추진했으나 영남 유림(儒林)의 탄핵을 당했다.[3]1875년(고종 12) 11월 그의 집에 의문의 방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사람들은 흥선대원군을 의심하였다.
그는 대미 개국 방침을 결정한 1880년 10월의 중신회의에서 영의정으로서 회의를 주재했으며,[3] 쇄국 정책에 비판적이었다.[3] 일본에 갔던 수신사 김홍집 일행이 귀국하면서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가져와 미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해야 한다는 연미론(聯美論)을 주장하자 그는 "미국은 본래 원수의 나라가 아니니 서계(書契)를 가져오면 받아야 할 것"이라고 하여 1880년 9월 8일 연미론을 적극 수용하였다. 그의 주장에 고종도 병인양요, 신미양요는 우리나라가 스스로 반성해야 할 것이라고 하여 미국과의 조약 체결을 결심하게 되었다. 1881년 1월 흥인군의 건의로 고종은 지난해 6월 자신이 미국 사신을 거부한 것을 후회하는 문서를 청나라 톈진(天津)으로 가는 영선사, 유학생들을 보낼 때, 그들을 통해 청나라로 보냈다.
그의 개항 정책에 위기의식을 느낀 영남 유생들은 정조 이후 국가의 중대사 때마다 올린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를 올려 흥인군을 탄핵했다. 1881년 영남만인소에서 그는 유림의 성토를 받았으며, 이후 홍재학(洪在鶴)은 이최응의 사형을 주장하는 상소를 하기도 하였다. 그는 만인소를 역모로 보고 만인소에 대한 취조관(委官)이 되어 홍재학을 교수형에 처했다. 이후에도 그는 개항 정책을 반대하는 유림들을 처벌하였지만, 이후에도 유림들의 탄핵은 계속되었고, 그는 사퇴하고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로 전임되었다.
2. 3. 흥선대원군과의 갈등
1864년(고종 1) 1월 영희전 제조가 되고 3일 뒤 사도시 제조를 겸임하였으며, 2월 종묘서 제조, 3월 상의원 제조에 임명되었다. 1865년(고종 2) 4월 경복궁 중건 때 영건도감제조(營建都監提調)를 맡았으나, 흥선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에 반대하여 반목했다. 그해 9월 의금부판사(義禁府判事), 호위대장 등을 역임했다.1866년 3월 경복궁 중건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전각과 재목이 소실되자, 흥선대원군은 크게 분노하여 흥인군과 이경하를 투옥하고 처형하려 했으나 중신들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당시 마감용 목재에 기름칠을 하는 창고에서 불이 나 800여 칸에 쌓아 둔 목재가 모두 타버려 공사가 중단될 처지에 놓였다.[2] 흥선대원군은 공사 책임자인 이경하와 흥인군을 불러 크게 질책하며 극형에 처하도록 했으나 여러 조정 대신들의 간언으로 원상 복구의 책임만 지게 되었다.[2] 그러나 이경하와 흥인군은 목재가 더 이상 나올 곳이 없다며 오히려 죄를 청했고, 이에 흥선대원군은 크게 화를 냈다.[2]
흥인군은 흥선대원군이 당백전을 발행하자 "일문전(一文錢)이 어찌 백문전(百文錢)으로 쓰이겠는가? 다만, 일문의 가치로만 쓰일 뿐이다"라고 비판하였다. 한편 물건값을 치를 때 당백전을 일전으로 계산하였기 때문에 나중에 환전하는 과정에서 이익을 얻은 상인이 많았다고 한다.
1880년 10월, 대미 개국 방침을 결정하는 중신회의에서 영의정으로서 회의를 주재한 흥인군은 쇄국 정책에 비판적이었다.[3] 일본에 갔던 수신사 김홍집 일행이 귀국하면서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가져와 미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해야 한다는 연미론(聯美論)을 주장하자, 그는 "미국은 본래 원수의 나라가 아니니 서계(書契)를 가져오면 받아야 할 것"이라고 하여 1880년 9월 8일 연미론을 적극 수용하였다. 그의 주장에 고종도 병인양요, 신미양요는 우리나라가 스스로 반성해야 할 것이라고 하여 미국과의 조약체결을 결심하게 되었다. 1881년 1월 흥인군의 건의로 고종은 지난해 6월 자신이 미국사신을 거부한 것을 후회하는 문서를 톈진(天津)으로 가는 영선사, 유학생들을 보낼 때, 그들을 통해 청나라로 보냈다.
흥인군의 개항정책에 위기의식을 느낀 영남 유생들은 정조 이후 국가의 중대사때마다 올린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를 올려 흥인군을 탄핵했다. 1881년 영남만인소에서 그는 유림의 성토를 받았으며, 이후 홍재학(洪在鶴)은 이최응의 사형을 주장하는 상소를 하기도 하였다. 그는 만인소를 역모로 보고 만인소에 대한 취조관(委官)이 되어 홍재학을 교수형에 처했다. 이후에도 그는 개항정책을 반대하는 유림들을 처벌하였지만 이후에도 유림들의 탄핵은 계속되었고, 그는 사퇴하고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로 전임되었다.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형을 못마땅하게 여겨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10년 동안에도 한 발짝 내딛을 땅조차 빌려준 적이 없어, 흥인군은 이후에도 오랫동안 불쾌한 감정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4] 흥선대원군과 흥인군은 좀처럼 화해가 되지 않았다.
2. 3. 1. 민씨 척족과의 관계
흥인군은 흥선대원군의 친형이었지만, 대원군의 정책에 반대하며 갈등을 빚었다. 특히 1866년 경복궁 중건 과정에서 발생한 화재로 인해 흥선대원군에게 크게 질책을 받았고, 당백전 발행에 대해서도 "일문전(一文錢)이 어찌 백문전(百文錢)으로 쓰이겠는가?"라며 비판했다.[2]흥선대원군 집권 시기, 흥인군은 동생의 권력을 이용하여 뇌물을 받는 등 부정부패를 저질렀다. 흥선대원군은 이를 경멸하여 흥인군에게 어떠한 혜택도 주지 말라고 지시할 정도였다.[4] 1873년 흥선대원군 실각 이후, 흥인군은 민씨 척족 세력에 의해 중용되었다. 1874년 의정부좌의정에 오르는 등 고위 관직을 역임하며, 명성황후를 지지했다.
민승호는 흥인군을 이용하여 흥선대원군의 동정을 살피려 했고, 명성황후에게도 이러한 의도를 설명했다. 민승호는 흥인군이 흥선대원군에게 불만을 품고 있을 것이라 판단하여 그에게 관대하게 대하면 운현궁의 동태를 알려줄 것이라 기대했다.[4][5]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이미 흥인군의 행동을 눈치채고 있었고, 오히려 흥인군을 통해 민씨 일파의 동정을 탐문했다. 결국 흥인군은 민씨 일파의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그의 높은 관직은 재물 욕심을 채우는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5]
2. 4. 임오군란과 최후
1882년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흥인군은 대원군의 형이었지만 민씨 일파를 지원했다는 이유로 대원군이 일으킨 난병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했다.[6]황현은 매천야록에서 흥인군이 난병을 피해 도망치다 담을 넘다가 고환이 터져 죽었다고 기록했고, 이는 유주현의 소설 대원군 등에 인용되었다. 수백 명의 난군이 달려들어 담장 아래 내동댕이쳐진 흥인군의 시신을 난도질하여 누구의 시신인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훼손했다.
난병들은 집안에 쌓아 놓았던 쌀, 돈, 금은보화, 옷감, 고기, 과일, 생선 등을 꺼내어 안마당과 대문 앞에 쌓아 놓았다.[7] 그리고는 이것들을 모두 인근 들판으로 가져가 불태웠다.
한편, 흥인군의 신도비에 따르면 왕이 어의를 보내 약을 쓰고 간호하게 했으나 결국 사망했다고 한다.
처음 내려진 시호는 효헌이었으나, 1884년 충익으로 바뀌었다가 1905년 문충으로 다시 바뀌었다.
3. 논란과 의혹
흥인군은 매사에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지 않고, 주화(主和)나 척화(斥和), 개국(開國) 등 어떤 의견에도 모두 옳다고만 답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유유정승'(唯唯政丞)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3. 1. 부패와 뇌물 수수 의혹
민승호는 흥선대원군과 흥인군의 갈등을 보고 명성황후에게 흥인군 등용을 건의했고, 명성황후는 이를 받아들였다. 명성황후가 자신을 의정부 대신으로 임명하고 특별한 관심을 보이자, 흥인군은 이에 감격하여 충성을 다짐하고 왕비의 은혜에 보답할 것을 결심했다.[5] 그러나 그는 이 기회를 통해 재산을 모으는 데 집중하여, 닥치는 대로 돈과 재물을 긁어모았다.[5] 조선 말의 정치가 윤효정에 따르면, 흥인군의 집에는 뇌물을 바치려는 사람들로 가득 찼으며, 관료 임명 과정이 마치 시장과 같았다고 한다.[5]흥인군은 매일 아침 창고를 점검하며 쌓이는 뇌물을 보며 기뻐했다. 그는 창고에 쌓인 물건들을 보며 넋을 놓고 웃곤 했다.[8]
어느 날, 청지기가 썩어가는 꿩고기와 동태를 처리할 방법을 묻자, 흥인군은 재물을 쌓아두는 데만 관심이 있고 나누는 데에는 인색했다. 그는 하인의 건의에 "나는 모여 쌓이는 것을 좋아한다"라며 썩은 생선 한 토막도 내주지 않았다.[8] 이 때문에 흥인군 집에서 나는 생선과 꿩고기 썩는 냄새로 이웃들이 고통받았다고 한다.[8]
황현, 윤효정 등은 그를 상당히 부패한 인물로 평가했다.
3. 2. '유유정승'이라는 별명
그는 매사에 자신의 주장을 하지 않았고, 주화, 척화, 개국 등에 관해 어떠한 의견 없이 모두 옳다고만 답하여 당시 사람들로부터 '유유정승'(唯唯政丞)이라 불렸다.4.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양조부 | 이진(李禛) | 1755년 음력 1월 11일 | 1771년 음력 3월 29일 | 남연군의 양부 |
생조부 | 이병원 | 진사, 영의정 추증 | ||
아버지 | 남연군(南延君) | 1788년 8월 22일 | 1836년 3월 19일 | |
어머니 | 군부인 여흥민씨(驪興閔氏) | 1788년 6월 26일 | 1831년 | |
형 | 흥녕군 이창응(興寧君 李昌應) | 1809년 | 1828년 | |
형 | 흥완군 이정응(興完君 李晸應) | 1814년 | 1848년 | |
동생 | 흥선헌의대원왕 이하응(興宣獻懿大院王 李昰應) | 1820년 | 1898년 | |
부인 | 군부인 증정경부인 안동권씨(權氏) | 1813년 1월 20일 | 1848년 3월 9일 | 진사 권희인(權義仁)의 딸 |
부인 | 군부인 증정경부인 연일정씨(延日鄭氏) | 1831년 3월 29일 | 1852년 3월 9일 | 현감 정명원(鄭明源)의 딸 |
부인 | 정경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 | 1834년 9월 4일 | 1868년 10월 20일 | 김만근(金晩根)의 딸, 군부인에서 정경부인으로 개봉 |
아들 | 이재긍(李載兢) | 1857년 | 1881년 1월 23일 | |
양자 | 이희하(李熙夏) | 1839년 | 1900년 | 광평대군의 16대손 |
양손자 | 이지용(李址鎔) | 1870년 | 1928년 | 이재긍의 양자로 출계 |
5. 평가
황현, 윤효정 등은 흥인군을 부패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5][8]
5. 1. 부정적 평가
민승호는 흥선대원군과 흥인군의 갈등을 보고 명성황후에게 흥인군을 중용할 것을 건의했고, 명성황후는 이를 받아들였다. 명성황후가 자신을 의정부 대신으로 임명하고 각별한 관심을 보이자 흥인군은 감격하여 충성을 다짐했다.[5] 그러나 그는 이 기회를 통해 재산을 불리는 데 집중했다.[5] 조선 말의 정치가 윤효정에 따르면, 흥인군의 집은 뇌물로 가득 찼고, 관료 임명 과정은 시장과 같았다고 한다.[5]흥인군은 매일 아침 창고를 점검하며 재물이 쌓이는 것을 즐겼다.[8] 그는 재물을 쌓아두기만 하고 나누는 데에는 인색했다. 하인이 썩은 꿩고기와 동태를 처리하자는 건의에 "나는 모여 쌓이는 것을 좋아한다."라며 거절하고, 썩은 생선 한 토막도 내주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웃들이 악취로 고통받았다고 한다.[8]
황현, 윤효정 등은 그를 부패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다.
참조
[1]
서적
高宗実録
null
[2]
서적
대한제국아 망해라: 백성들의 눈으로 쓴 살아 있는 망국사
다산초당
2010
[3]
서적
선비의 나라 한국유학 2천년
한길사
2003
[4]
서적
대한제국아 망해라: 백성들의 눈으로 쓴 살아 있는 망국사
다산초당
2010
[5]
서적
대한제국아 망해라: 백성들의 눈으로 쓴 살아 있는 망국사
다산초당
2010
[6]
서적
한국의 역사 16권. 개혁·개방과 외세의 침투
청아출판사
2014
[7]
서적
대한제국아 망해라: 백성들의 눈으로 쓴 살아 있는 망국사
다산초당
2010
[8]
서적
대한제국아 망해라: 백성들의 눈으로 쓴 살아 있는 망국사
다산초당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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