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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왕후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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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신정왕후는 조선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세자빈이자 헌종의 어머니이다. 1819년 효명세자와 혼례를 올렸으며, 1827년 헌종을 낳았으나 1830년 남편 효명세자가 요절하여 청상과부가 되었다. 1834년 순조가 승하하고 헌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효유왕대비의 존호를 받았다. 헌종 사후에는 철종을 옹립하고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하였으며,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 고종을 즉위시키는 데 영향을 미쳤다. 1890년 경복궁 흥복전에서 83세로 사망했으며, 능은 수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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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왕후 (조선)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신정왕후의 초상화
칭호효유헌성선경정인자혜홍덕순화문광원성숙렬명수협천융목수령희강현정휘안흠륜홍경태운창복희상의모예헌돈장계지경훈철범신정왕후
출생일1809년 1월 9일
출생지한성 두모방 두포 쌍호정
사망일1890년 5월 23일
사망지한성 경복궁 흥복전
묘소수릉
가문풍양 조씨
왕족 정보
배우자문조 (효명세자)
자녀헌종
고종 (양자)
아버지풍은부원군 조만영
어머니덕안부부인 은진 송씨
존호)}}
휘호의모예헌돈장계지경훈철범 (懿謨睿憲敦章啓祉景勳哲範)
시호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
전호효모전(孝慕殿)
다른 이름조대비(趙大妃) · 신정성모(神貞聖母)
왕비 및 왕대비 경력
세자빈 재위 기간1819년 10월 11일 ~ 1830년 5월 6일
세자빈 전임자세자빈 홍씨 (혜경궁 홍씨)
세자빈 후임자황태자비 민씨 (순명효황후)
왕대비 재위 기간1834년 11월 19일 ~ 1857년 8월 10일
왕대비 전임자명경왕대비 김씨 (순원왕후)
왕대비 후임자명헌황태후 홍씨 (효정왕후)
대왕대비 재위 기간1857년 8월 10일 ~ 1890년 4월 17일
별칭효유대왕대비(孝裕大王大妃), 효유왕대비(孝裕王大妃)
수렴청정 재위 기간1863년 12월 8일 ~ 1866년 2월 13일
수렴청정 전임자순원왕후 김씨
수렴청정 후임자최후의 수렴청정
대왕대비 전임자명경대왕대비 김씨 (순원왕후)
대왕대비 후임자최후의 대왕대비
추가 정보
로마자 표기Sinjeong Wanghu

2. 생애

조선의 마지막 대왕대비이며 수렴청정을 한 마지막 왕비이다. 세자빈으로 입궁하여 대왕대비에 이르렀지만 남편 효명세자의 요절로 인해 왕비로 등극하지 못했다. 헌종 재위기에는 친정인 풍양 조씨 일족이 국정을 주도하였으며, 철종 대에 대왕대비가 되었다. '''조대비'''(趙大妃)라는 이칭으로도 잘 알려져있다.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고종)을 양자로 입적하여 즉위시키고 수렴청정을 실시하였다. 말년에는 조선의 개항과 개화 과정,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 혼란한 격변기를 모두 지켜보았다.

조선의 왕비 가운데 가장 장수(81세 4개월 11일)하였으며, 가장 오랜 기간(32년 6개월 9일) 대왕대비로 재위하였다.

1819년(순조 19년), 순조와 순원왕후의 아들인 효명세자와 혼인하여 세자빈이 되었다.[6] 1827년(순조 27년) 7월 18일, 원손(헌종)을 낳았다.[8] 그러나 1830년(순조 30년) 5월, 남편인 효명세자가 요절하여 청상과부가 되었다.[9]

1834년(순조 34년)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대비가 되었다. 1836년(헌종 2년), '''효유왕대비'''(孝裕王大妃)의 존호를 받았다.[10] 헌종 시기, 시가인 안동 김씨와 친정인 풍양 조씨 두 가문에 의한 세도정치가 자행되었다. 헌종 즉위 초반 7년 동안은 헌종의 조모인 순원왕후수렴청정을 하였다. 헌종이 15세가 되던 해부터 친정을 시작하였으나, 1846년에 왕대비의 아버지인 조만영이 사망하면서 왕권은 다시 안동 김씨의 손에 넘어갔다.[1]

1857년(철종 8년), 시어머니 순원왕후가 승하하자 대왕대비가 되었다. 1863년(철종 14년)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흥선대원군과 협력하여 그의 둘째 아들 명복(고종)을 익종의 양자로 입적시켜 왕위를 계승하게 하고 수렴청정을 실시하였다.[12]

1866년(고종 3년) 2월, 신정왕후는 수렴청정을 거두고 고종의 친부인 흥선대원군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물러났다.[16]

1890년(고종 27년) 경복궁 흥복전(興福殿)에서 83세로 승하하였다.[17] 조선의 왕비 중 가장 장수한 81세 4개월 11일이었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남편 문조와 합장되어 있는 '''수릉'''(綏陵)이다.

익종과 신정왕후의 능인 수릉

2. 1. 탄생과 가계

1808년(순조 8년) 12월 6일, 한성부 두모방의 두포(서울특별시 성동구 옥수동) 쌍호정 사저에서 풍은부원군 조만영과 덕안부부인 은진 송씨의 장녀로 태어났다.

고구마조선에 들여온 이조판서 조엄은 신정왕후의 증조부이며, 증조모인 홍씨부인은 홍현보의 딸로 혜경궁 홍씨의 고모이기도 하다. 부계로는 선조의 딸인 정명공주의 후손이며, 모계로는 송준길의 7대손이다.[19][20]

남편 효명세자와는 홍현보를 공통 조상으로 하는 9촌이다.

colspan="2" |본관생몰년부모비고
풍은부원군 조만영풍양1776년 - 1846년조진관
남양 홍씨
덕안부부인 은진 송씨은진1776년 - 1834년송시연
안동 김씨
송준길의 6대손


2. 2. 세자빈 시절

1819년(순조 19년), 순조와 순원왕후의 아들인 효명세자와 혼인하여 세자빈이 되었다.[6] 이때 제작된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은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가 병인양요 때 프랑스로 반출되었다. 이후 150여 년만인 2018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프랑스의 개인 소장자로부터 구입하여 국내로 되돌아왔다.[7]

1827년(순조 27년) 7월 18일, 원손(헌종)을 낳았다.[8] 그러나 1830년(순조 30년) 5월, 남편인 효명세자가 요절하여 청상과부가 되었다.[9]

2. 3. 왕대비 시절

1834년(순조 34년)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왕대비가 되었다. 1836년(헌종 2년), '''효유왕대비'''(孝裕王大妃)의 존호를 받았다.[10] 헌종 시기, 시가인 안동 김씨와 친정인 풍양 조씨 두 가문에 의한 세도정치가 자행되었다.

1847년(헌종 13년), 40세를 맞이하여 창덕궁 인정전에서 생일을 축하하는 진하연이 열렸다. 헌종이 직접 치사(致詞)와 전문(箋文), 표리(表裏)를 올렸다.[11]

헌종 즉위 초반 7년 동안은 헌종의 조모인 순원왕후수렴청정을 하였다. 헌종이 15세가 되던 해부터 친정을 시작하였으나, 1846년에 왕대비의 아버지인 조만영이 사망하면서 왕권은 다시 안동 김씨의 손에 넘어갔다.[1]

헌종 재위 기간 동안, 천주교를 배척하는 성향을 가진 풍양 조씨가 조정을 장악했을 때, 헌종은 안동 김씨가 천주교도들에게 너무 관대하다고 비난하며 박해를 시작하여, 세 명의 프랑스 선교사 신부를 포함한 수백 명의 천주교도를 죽였다.[2][3]

2. 4. 대왕대비 시절

1857년(철종 8년), 시어머니 순원왕후가 승하하자 대왕대비가 되었다.

1863년(철종 14년)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흥선대원군과 협력하여 그의 둘째 아들 명복(고종)을 익종의 양자로 입적시켜 왕위를 계승하게 하고 수렴청정을 실시하였다.[12]

2. 4. 1. 고종의 즉위와 수렴청정

1863년(철종 14년) 12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왕위 계승권은 철종의 4촌인 익평군의 아들과 철종의 호적상 6촌인 흥선군의 아들들로 압축되었다. 흥선군은 신정왕후를 자주 찾아 친분을 쌓고 자신의 아들 중 한 명을 익종의 양자로 삼는다는 조건으로 왕위 계승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다.[12]

신정왕후는 흥선군의 둘째 아들 재황(載晃, 고종)을 익종의 양자로 삼아 익성군(益成君)의 군호를 내리고 왕으로 즉위시켰다.[13] 고종이 11세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신정왕후가 대왕대비이자 고종의 법적 어머니로서 수렴청정을 하였고, 고종의 친부인 흥선군은 대원군이 되어 집권하였는데, 조선 역사상 국왕의 생부가 생존하여 통치하는 전례 없는 광경이 연출되었다.

신정왕후는 중앙과 지방에 다음과 같이 유시하여 방계 혈통인 고종의 정통성을 천명하였다.[14]

1864년(고종 1년) 1월 18일, 신정왕후는 서얼 허통을 분부하는 전교를 내렸고, 흥선대원군에 의해 서자들의 관직 제한이 완화되었다.[15]

1866년(고종 3년) 2월, 신정왕후는 수렴청정을 거두고 고종의 친부인 흥선대원군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물러났다.[16]

2. 5. 최후

1890년(고종 27년) 경복궁 흥복전(興福殿)에서 83세로 승하하였다.[17] 조선의 왕비 중 가장 장수한 81세 4개월 11일이었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남편 문조와 합장되어 있는 '''수릉'''(綏陵)이다.

1899년(광무 3년), 남편 익종의 묘호가 문조(文祖)로 개칭되고 익황제(翼皇帝)로 추증되자, 신정왕후 또한 '''신정익황후'''(神貞翼皇后)로 추증되었다.[18]

3. 가족 관계

조선의 왕비
대한제국의 추존 황후
아버지조만영 (1776 ~ 1846)
어머니덕안부부인 은진 송씨 (1776 ~ 1834)
형제자매
남편이영 (1809 ~ 1830)
시어머니순원왕후 (1789 ~ 1857)
시아버지순조 (1790 ~ 1834)
자녀헌종 (1827 ~ 1849)
며느리
양자고종 (1852 ~ 1919)
양며느리명성황후 (1851 ~ 1895)


4. 평가

신정왕후는 조선의 마지막 대왕대비이자 수렴청정을 한 마지막 왕비이다. 남편이 요절하여 왕비로 즉위하지는 못했지만, 철종 대에 대왕대비가 되었다. 조대비(趙大妃)로도 잘 알려져 있다.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흥선군의 둘째 아들 명복(고종)을 양자로 입적하여 즉위시키고 수렴청정을 실시하였다. 말년에는 조선의 개항과 개화 과정,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 혼란한 격변기를 모두 지켜보았다. 조선의 왕비 가운데 가장 장수(81세 4개월 11일)하였으며, 가장 오랜 기간(32년 6개월 9일) 대왕대비로 재위하였다.

4. 1. 긍정적 평가

1864년(고종 2년), 신정왕후는 전교를 내려 서얼 허통을 분부하였고, 흥선대원군에 의해 서자들의 관직 제한이 완화되었다.[15] 이는 신분제 완화에 기여한 개혁적인 정책으로 평가받는다.

신정왕후는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 왕실의 중심을 잡고 왕실의 권위를 지키려 노력하였다는 평가도 받는다. 1866년(고종 3년) 2월, 신정왕후는 수렴청정을 거두고 고종의 친부인 흥선대원군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물러났다.[16]

4. 2. 부정적 평가

안동 김씨풍양 조씨 간의 권력 다툼을 방관하여 세도정치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흥선대원군의 섭정에 지나치게 의존하여 대왕대비로서 독자적인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였다는 지적도 있다. 개화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변화하는 시대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1]

5. 기타

1847년(헌종 13년) 신정왕후의 40세를 축하하는 진하연을 그린 조대비 사순칭경진하도 병풍보물 제732호로 지정되어 있다.[6][7]

趙大妃중국어라는 이칭으로도 잘 알려진 신정왕후는 여러 드라마에서 다뤄졌다.

5. 1. 관련 문화재

1819년(순조 19년), 순조와 순원왕후의 아들인 효명세자와 혼례를 올리고 세자빈이 되면서 제작된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은 외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가 병인양요 때 프랑스로 반출되었다. 이후 150여년만인 2018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프랑스의 개인 소장자로부터 구입하여 국내로 되돌아왔다.[6][7]

1847년(헌종 13년) 신정왕후의 40세를 축하하는 진하연을 그린 조대비 사순칭경진하도 병풍보물 제732호로 지정되어 있다.

5. 2. 대중 매체에서

趙大妃중국어라는 이칭으로도 잘 알려진 신정왕후는 여러 드라마에서 다뤄졌다.

참조

[1] 서적 Korean landscape painting : continuity and innovation through the ages 2006
[2] 서적 New history of Korea Jimoondang 2005
[3] 서적 Religion in Korea : harmony and coexistence 2012
[4] 서적 The Rule of the Taewŏn’gun, 1864-1873: Restoration in Yi Korea East Asian Research Center, Harvard University 1972
[5] 서적 Korea's Place in the Sun: A Modern History W.W. Norton & Company 2005
[6] 실록 순조실록 22권, 순조 19년(1819년 청 가경(嘉慶) 24년) 10월 11일 (경자)
[7] 뉴스 150여년전 사라진 '효명세자빈 책봉 죽책' 佛서 돌아왔다(종합) https://www.yna.co.k[...] 연합뉴스 2018-01-31
[8] 실록 순조실록 29권, 순조 27년(1827년 청 도광(道光) 7년) 7월 18일 (신유)
[9] 실록 순조실록 31권, 순조 30년(1830년 청 도광(道光) 10년) 9월 15일 (경오)
[10] 실록 헌종실록 3권, 헌종 2년(1836년 청 도광(道光) 16년) 10월 11일 (신유)
[11] 실록 헌종실록 14권, 헌종 13년(1847년 청 도광(道光) 27년) 1월 1일 (신사)
[12] 실록 철종실록 15권, 철종 14년(1863년 청 동치(同治) 2년) 12월 8일 (경진)
[13] 실록 고종실록 1권, 고종 즉위년(1863년 청 동치(同治) 2년) 12월 8일 (경진)
[14] 실록 고종실록 1권, 고종 즉위년(1863년 청 동치(同治) 2년) 12월 30일 (임인)
[15] 실록 고종실록 1권, 고종 1년(1864년 청 동치(同治) 3년) 1월 18일 (경신)
[16] 실록 고종실록 3권, 고종 3년(1866년 청 동치(同治) 5년) 2월 13일 (계묘)
[17] 실록 고종실록 27권, 고종 27년(1890년 조선 개국 499년) 4월 17일 (병진)
[18] 실록 고종실록 39권, 고종 36년(1899년 대한 광무 3년) 12월 7일
[19] 인물 혜경궁 홍씨의 고종 사촌 동생
[20] 실록 승정원일기 2199책 (탈초본 112책) 순조 26년(1826년 청 도광(道光) 6년) 1월 5일 (정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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