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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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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통일신라 시대에 제작된 석조 보살상으로, 현재 경주 감산사에 위치해 있다. 719년에 조성되었으며,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몸을 약간 틀고 있는 삼곡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 불상은 굽타 불상 및 당나라 보살상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으며, 8세기 신라 불교 조각의 국제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불상 광배 뒷면에는 김지성이 감산사를 창건하고 불상을 조성한 내력을 기록한 명문이 새겨져 있어, 당시 신라 귀족 사회의 사상적 배경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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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문화재 정보
유형국보
이름경주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영문 이름Stone Standing Maitreya Bodhisattva of Gamsansa Temple, Gyeongju
지정 번호81
지정일1962년 12월 20일
소재지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5, 국립중앙박물관
시대통일 신라
수량1구
문화재청 ID11,00810000,11

2. 특징

미륵보살은 석가모니불 다음에 부처가 될 보살로, 도솔천에서 석가모니불이 입멸한 후 56억 7천만 년 뒤 이 세상에 나타나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고 3번의 설법으로 모든 중생을 구제할 미래의 부처이다. 중국에서는 미륵신앙이 일찍부터 유행하여 북위시대 석굴사원에 조상이 많이 남아있고, 당대송대에는 《미륵하생경》에 의한 미륵정토변상도도 그려졌다.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삼국시대에 미륵신앙이 널리 퍼져 조각이나 불화에 그 예가 많이 남아 있다.

감산사 미륵보살상은 신체 비례가 다소 불안정하지만, 세부 묘사가 섬세하고, 인도 굽타 불상 및 중국 당대 보살상의 영향을 받은 통일신라 시대의 특징적인 양식을 보여준다.

2. 1. 형태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등신대 크기로, 몸을 오른쪽으로 약간 틀고 있는 삼곡 자세로 서 있다. 다소 부자연스러우며 불신에 비해 두 발이 작게 표현되어 신체 비례가 다소 불안정하다. 몸 전체를 감싸는 주형 거신광배와 불상은 하나의 돌로 조각되었으나, 대좌는 따로 만들어 결합되었다. 머리에는 복잡한 장식의 보관을 쓰고 있으며, 보관 위에는 좌상의 화불이 새겨져 있어 관음보살의 특징을 보인다. 그러나 명문에는 미륵보살로 기록되어 있는데, 미륵보살은 보관에 탑을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도상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얼굴은 풍만하고 턱이 이중으로 되어 있으며, 눈·코·입이 뚜렷하지만 눈을 지그시 뜨고 있어 명상에 잠긴 듯하다. 목과 팔에는 두 줄 목걸이와 비천이 장식되어 있고, 가슴 앞 영락장식은 무릎까지 섬세하게 내려온다. 천의 자락은 가슴을 가로질러 대각선으로 걸쳐 있고, 양 팔을 감으며 내려오다 끝에서 구불거린다. 허리의 군의는 여러 겹 주름이 접혀 굵은 띠매듭으로 묶여 있고, 두 다리 위로는 형식적이고 부자연스러운 층단식 옷주름이 있다. 광배는 세 줄 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구분하고 가장자리에는 화염문이 장식되었다. 앙련과 복련으로 구성된 연화대좌는 표현 방식에 차이가 있고, 아래에는 안상이 조각된 팔각형 받침대가 있다.

넓은 어깨와 양감 있는 신체 표현, 초보적 삼곡 자세, 천의와 군의 형식 등은 인도 굽타(Gupta) 불상의 새로운 요소로, 중국 장안 중심의 8세기 당대 보살상에도 나타나는 특징이다.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국보 제312호)의 양쪽 협시보살상과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보물 제121호) 서면 삼존불의 보살상이 양식적으로 유사하다. 따라서 719년 조성된 통일신라시대 불상으로, 인도 굽타 및 중국 당대 불상과 공통점이 있어 8세기 통일신라 불상의 국제적 성격을 보여준다.

2. 2. 세부 묘사

얼굴은 풍만하여 턱이 이중으로 되어 있고 눈, 코, 입이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으나, 눈을 지그시 뜨고 있어 명상에 잠겨있는 듯하다. 목과 팔에는 두 줄로 된 목걸이와 비천이 각각 장식되어 있고, 가슴 앞에는 영락 장식이 길게 내려와 무릎에 이르기까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천의(天衣) 자락은 가슴을 가로질러 대각선으로 걸쳐 입고 다시 양쪽 팔을 감으면서 내려오다가 끝 부분에서 구불거리며 늘어져 있다. 허리에 걸친 군의는 여러 겹의 주름이 접혀서 굵은 띠매듭으로 묶여 있고, 두 다리 위로는 형식적이고 부자연스러운 층단식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광배는 세 줄의 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구분하고 가장자리에는 화염문이 장식되어 있다. 연화대좌는 앙련과 복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표현 방식에서 다소 차이를 보인다. 대좌 아래에는 안상이 조각된 팔각형 받침대가 놓여 있다.

2. 3. 양식

감산사 석조보살입상은 넓은 어깨와 양감 있는 신체 표현, 초보적인 삼곡 자세, 천의(天衣)와 군의(裙衣)를 걸친 형식 등에서 인도 굽타 불상 및 8세기 당대 보살상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양식은 통일신라 시대의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국보 제312호) 양쪽 협시보살상과 경주 굴불사지 석조사면불상(보물 제121호) 서면 삼존불의 보살상 등과 유사하다. 따라서 감산사 미륵석조보살입상은 719년에 조성된 통일신라 시대 불상으로, 인도 굽타 불상 및 중국 당대 불상과의 공통점을 통해 8세기 통일신라 불상의 국제적 성격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3. 미륵신앙과 도상

미륵보살은 석가모니 다음으로 부처가 될 보살로, 도솔천에서 중생을 구제할 미래불이다.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고 3회의 설법으로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고 알려져 있다. 중국에서는 미륵신앙이 일찍부터 유행하여 북위시대 석굴사원에 불상이 많이 남아 있고, , 시대에는 《미륵하생경》에 의한 미륵정토변상도도 그려졌다. 한국에서는 중국의 영향을 받아 삼국시대에 미륵신앙이 널리 퍼졌으며, 조각이나 불화에 그 예가 많이 남아 있다.

감산사 미륵보살상은 머리에 복잡한 장식이 있는 보관을 쓰고 있으며, 보관 위에 화불(化佛)이 새겨져 있어 관음보살의 특징을 보인다. 그러나 명문에는 미륵보살로 기록되어 있는데, 미륵보살은 보관에 탑을 표현하는 것이 일반적이므로 이 상과는 도상적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4. 기록

이 불상의 광배 뒷면에는 22행 381자의 긴 글이 새겨져 있는데, 절에서 함께 발견된 아미타불상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의 글이 있다.[2] 명문에는 김지성이 성덕왕 18년(719)에 감산사를 세우고 불상을 조성하여 안치했다는 내용과 김지성의 도교적인 성향이 언급되어 있어, 당시 신라 귀족들의 사상적인 측면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도 관련 기록이 간략하게 존재한다.

4. 1. 명문 내용

이 불상의 광배 뒷면에는 22행 381자의 긴 글이 새겨져 있는데, 절에서 함께 발견된 아미타불상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의 글이 있다.

開元七年己未二月十五日 中阿飡金志誠 奉爲亡考仁章一吉飡 亡妣觀肖里 敬造甘山寺一所 石阿彌陀像一軀 石彌勒像一軀開門之道玄微 不生不滅 能仁寂滅 無去無來所以現法 應知三身 隨機應祭 表天祠之十號唯願含生諸子 志誠生於聖世 亦任榮班無智略而 廣示勤土 移於形憲 性海山水 慕莊老之逍遥 志衆塵綜希無着之玄寂 年六十有七致王事 於淸朝 遂歸田於閑野 披閱五千言之道德 寄名位而入玄宮 演七支之法門 壞色空而求滅 心腹康靜名於草廬 轉以道之極無 雖在官而染俗塵外 至心無似敬之誠至者業 建甘山寺家藍…|개원 7년 기미년 2월 15일 중아찬 김지성이 죽은 아버지 인장일길찬과 죽은 어머니 관초리를 위해 감산사 1소와 석아미타상 1구, 석미륵상 1구를 만들었다. 문을 여는 도는 현미하여 생기는 것도 아니고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능히 어질고 고요하며,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법을 나타냄을 응당히 알아 삼신은 기회에 따라 제사지내고 하늘 사당의 열 가지 호를 나타내니, 오직 중생의 모든 아들이 지성으로 성세에 태어나 또한 영반에 임하되 지략이 없이 넓게 근면함을 보이고 형헌으로 옮겨 성품은 바다와 산과 물을 띠고 장자와 노자의 소요를 사모하며, 여러 티끌을 모아 집착이 없는 현묘하고 고요함을 바라다가 나이 67세에 청조에서 왕사를 마치고 한야로 돌아가 오천언의 도덕을 펴고 명위에 의탁하여 현궁에 들어가 칠지의 법문을 넓혀 색공을 무너뜨리고 멸을 구하여 마음과 배를 편안히 하고 초려에서 이름을 떨치며 도의 지극히 없음을 전하여 비록 관직에 있으나 속진에서 벗어나 지극한 마음에 이와 같이 공경하고 정성스러운 자는 감산사와 가람을 세운다…중국어[2]

이 명문에 따르면, 통일신라시대의 최고 행정기구인 중아찬의 집사시랑을 지냈던 김지성이 67세 때 관직에서 물러나 성덕왕 18년(719)에 자신의 땅 감산장전을 바쳐 감산사를 세우고 국왕과 부모, 동생, 부인 등 그 일족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석조아미타상 1구와 미륵상 1구를 조성하여 절에 안치했다고 한다. 또한 명문의 내용 중에는 김지성이 불교를 중히 여겼을 뿐 아니라 원래 자연을 좋아하여 노자장자의 사상을 흠모했다고 하는 도교적인 성향에 대해서도 언급되어 있어 당시 신라 귀족들의 사상적인 측면까지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서는 《삼국유사》 권제3 탑상 제4 남월산조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감산사와 석조미륵상 1구는 그의 아버지 인장일길간과 어머니 관초리부인을 위해 조성했다고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4. 2. 역사적 의의

이 불상의 광배 뒷면에는 22행 381자의 긴 글이 새겨져 있는데, 절에서 함께 발견된 아미타불상에도 이와 유사한 내용의 글이 있다.[2] 명문에 따르면, 통일신라시대의 최고 행정기구인 중아찬의 집사시랑을 지냈던 김지성이 67세 때 관직에서 물러나 성덕왕 18년(719)에 자신의 땅 감산장전을 바쳐 감산사를 세우고 국왕과 부모ㆍ동생ㆍ부인 등 그 일족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석조아미타상 1구와 미륵상 1구를 조성하여 절에 안치했다고 한다.

또한 명문에는 김지성이 불교를 중히 여겼을 뿐 아니라 원래 자연을 좋아하여 노자장자 사상을 흠모했다는 도교적인 성향도 언급되어 있어, 당시 신라 귀족들의 사상적인 측면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이러한 내용은 《삼국유사》 권제3 탑상 제4 남월산조에도 언급되어 있는데, 감산사와 석조미륵상 1구는 그의 아버지 인장일길간과 어머니 관초리부인을 위해 조성했다고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참조

[1] 간행물 국가지정문화재<보물> 지정 문화재청장 2010-06-28
[2] 문서 開元七年己未二月十五日 重阿飡金志誠奉爲亡考仁章一吉飡 亡妣觀肖里 敬造甘山寺一所 石阿彌陀像一軀 石彌勒像一軀盖聞至道玄微 不生不滅 能仁眞寂 無去無來所以顯法 應之三身隨機拯濟 表天師之十號有願咸成弟子 志誠生於聖世 歷任榮班無智略以 匡時僅 罹於刑憲 性諧山水 慕莊老之逍遙 志重眞宗希無著之玄寂 年六十有七致王事 於淸朝 遂歸田於閒野 披閱五千言之道德 弃名位而入玄窮硏十七地之法門 壞色空而俱滅 尋復降旌命於草廬 典邇都地劇務 雖在官而染俗塵外 之心無捨罄志誠之資業 建甘山之伽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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