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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흥륜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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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주 흥륜사지는 신라 시대에 창건된 절터로, 신라 불교의 중요한 사찰 중 하나였다. 고구려 승려 아도가 처음 지었으며, 미추왕 때 폐허가 되었다가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재건되어 진흥왕 5년에 완성되었다. 흥륜사는 대법회를 열고 왕실과 국가의 평안을 기원하는 신라의 큰 절이 되었으며, 김대성이 전생에 밭을 보시한 절로 알려져 있다. 신라 말 반란군에 의해 소실된 후, 경명왕 5년에 재건되었으나 조선 시대에 화재로 폐사되었다. 1916년과 1934년의 조사를 통해 흥륜사터로 특정되었으나, 1976년 발굴 조사를 통해 영묘사터라는 설도 제기되었으며, 2023년에는 영묘사 기와 조각과 고려 시대 유물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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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흥륜사지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경주 흥륜사지
기본 정보
유형사적
지정 번호15
지정일1963년 1월 21일
주소경상북도 경주시 사정동 281-1번지
시대신라
면적11,683m2
문화재청 ID13,00150000,37

2. 역사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는 불교 전파를 위해 고구려에서 온 승려 아도가 지은 것이라 전해진다. 미추왕 때 절을 짓도록 하였으나 창건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며, 규모가 작고 검소하여 초가집에서 불법을 강연하는 정도였다.[1]

미추왕 사후 절은 곧 폐허가 되었고, 법흥왕 14년(527) 이차돈 순교 후 다시 짓기 시작하여 진흥왕 5년(544)에 완성되었다. 진흥왕은 이 절을 ‘대왕흥륜사‘라 하고 백성들의 출가를 허락하였으며, 왕 자신도 만년에 삭발하고 법운이라는 법명을 받아 절의 주지가 되었다. 이후 흥륜사는 대법회를 열고 왕실과 국가의 평안을 기원하는 신라의 큰 절이 되었다.[1] 삼국유사에는 불국사석굴암을 창건한 김대성이 전생에 밭을 보시한 절이 흥륜사이고, 김현(金現)이 호랑이와 인연을 맺었다는 절도 이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1]

금당 안에는 선덕여왕김양도가 만들었다는 미륵삼존불상이 모셔져 있었고, 동쪽 벽에는 아도·이차돈·혜숙·안함·의상을 그린 신라 10성의 상(像)을 그린 벽화가, 서쪽 벽에는 표훈·원효·혜공·지장·사파의 상을 모셨다고 전해진다. 금당지 앞에는 8각탑지와 서쪽의 경루, 이를 둘러싼 화랑지가 조사되었다. 흥륜사 남문은 길달이 지었다고 하여 길달문이라 불렸다.[1]

1916년 경주에서 대서소를 운영하던 일본인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가 사정동 일대에서 절터 유구, 석불 등을 우연히 발견하고, 주민들로부터 이 일대 지명이 '흥륜들', '흥륜원'이라고 불린다는 것을 근거로 흥륜사터로 특정하였다.[1] 1934년에는 경주의 일본인 의사 다나카 도시노부(田中敏信)가 골동품상에서 '신라의 미소'로 일컫는 사람얼굴 모양의 수막새를 구입했고,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의 조사를 통해 흥륜사터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하였다.[1]

그러나 1976년 발굴조사 당시 '영묘지사'(靈廟之寺) 또는 '대영명사조와(大令妙寺造瓦)'라고 새겨진 기와 조각이 출토되어, 선덕여왕 때 창건된 영묘사터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2023년 7월에는 흥륜사 주변에서 '영묘사'라는 기와 조각과 함께 고려시대 공양구 유물 등을 넣은 철솥이 발굴되었다.[2]

2. 1. 신라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는 불교 전파를 위해 고구려에서 온 승려 아도(阿道)가 지은 것이라 전해진다. 미추왕 때 절을 짓도록 하였으나 창건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며, 규모가 작고 검소하여 초가집에서 불법을 강연하는 정도였다고 한다.[1]

미추왕 사후 절은 곧 폐허가 되었고, 법흥왕 14년(527) 이차돈 순교 후 다시 짓기 시작하여 진흥왕 5년(544)에 완성되었다. 진흥왕은 이 절을 ‘대왕흥륜사‘라 하고 백성들의 출가를 허락하였으며, 왕 자신도 만년에 삭발하고 법운이라는 법명을 받아 절의 주지가 되었다. 이후 흥륜사는 대법회를 열고 왕실과 국가의 평안을 기원하는 신라의 큰 절이 되었다.[1] 삼국유사에는 불국사석굴암을 창건한 김대성이 전생에 밭을 보시한 절이 흥륜사이고, 김현(金現)이 호랑이와 인연을 맺었다는 절도 이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1]

금당 안에는 선덕여왕김양도가 만들었다는 미륵삼존불상이 모셔져 있었고, 동쪽 벽에는 아도·이차돈·혜숙·안함·의상을 그린 신라 10성의 상(像)을 그린 벽화가, 서쪽 벽에는 표훈·원효·혜공·지장·사파의 상을 모셨다고 전해진다. 금당지 앞에는 8각탑지와 서쪽의 경루, 이를 둘러싼 화랑지가 조사되었다. 흥륜사 남문은 길달(吉達)이 지었다고 하여 길달문이라 불렸다.[1]

2. 2. 후대의 조사와 발굴

1916년 경주에서 대서소를 운영하던 일본인 모로가 히데오(諸鹿央雄)가 사정동 일대에서 절터 유구, 석불 등을 우연히 발견하고, 주민들로부터 이 일대 지명이 '흥륜들', '흥륜원'이라고 불린다는 것을 근거로 흥륜사터로 특정하였다.[1] 1934년에는 경주의 일본인 의사 다나카 도시노부(田中敏信)가 골동품상에서 '신라의 미소'로 일컫는 사람얼굴 모양의 수막새를 구입했고, 조선총독부 박물관 경주분관의 조사를 통해 흥륜사터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하였다.[1]

그러나 1976년 발굴조사 당시 '영묘지사'(靈廟之寺) 또는 '대영명사조와(大令妙寺造瓦)'라고 새겨진 기와 조각이 출토되어, 선덕여왕 때 창건된 영묘사터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2023년 7월에는 흥륜사 주변에서 '영묘사'라는 기와 조각과 함께 고려시대 공양구 유물 등을 넣은 철솥이 발굴되었다.[2]

참조

[1] 뉴스 "스님들이 묻어놓고 도망갔다"고?…'신라의 미소' 출토지에 무슨 일? https://www.khan.co.[...] 경향신문 2023-07-16
[2] 뉴스 경주 흥륜사 주변에서 고려시대 공양구 대량 출토…‘영묘사’ 적힌 기와도 나와 https://www.hankooki[...] 한국일보 2023-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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