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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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분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3년(634년)에 창건된 사찰로, '향기로운 임금'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황룡사 옆에 위치하며, 자장율사, 원효 등 고승들이 머물며 신라 불교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주요 문화재로는 국보 제30호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 분황사 화쟁국사비부, 보물로 지정된 분황사 당간지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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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황사 | |
|---|---|
| 지도 정보 | |
| 기본 정보 | |
![]() | |
| 한국어 이름 | 분황사 |
| 한자 표기 | 芬皇寺 |
| 로마자 표기 | Bunhwangsa |
| 종교 | 불교 |
| 위치 | 慶州市 구황동 312(芬皇路94-11) |
| 주소 |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
| 별칭 | 왕분사(王芬寺) |
| 창건자 | 신라 성골 왕실(진평왕~선덕여왕) |
| 종파 | 대한불교조계종 |
| 본존 | 약사여래 |
| 건립 연대 | 선덕왕 3년(仁平 원년, 634년) 이전 |
| 건축 | |
| 높이 | 9.3m(모전석탑) |
| 재료 | 안산암(모전석탑)・화강암 외 |
| 문화재 정보 | |
| 지정 문화재 |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大韓民国指定国宝) (慶尚北道有形文化財) (慶尚北道文化財資料) 경주 분황사 금동약사여래입상(大韓民国指定宝物) 경주 분황사 당간지주(대韓민국 지정 보물) 경주 분황사지(大韓民国指定史跡) |
| 사적 지정 번호 | 548 |
| 사적 지정일 | 2019년 2월 26일 |
| 문화재청 번호 | 13,05480000,37 |
| 관리 주체 | 경상북도 경주시 |
| 추가 정보 | |
| 관련 링크 | Asian Historical Architecture: A Photographic Survey 코토뱅크 芬皇寺 慶州歴史遺跡地区[ユネスコ世界遺産(文化遺産)] 慶州の歴史地域 경주 분황사지(慶州 芬皇寺址) 芬皇寺(분황사) |
2. 역사
분황사는 신라 선덕여왕 3년(634년)에 창건된 사찰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르면, 분황사는 선덕여왕 대에 완공되었거나 창건이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분황(芬皇)'이라는 이름은 '향기로운 임금', 즉 선덕여왕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69]
분황사는 황룡사와 함께 신라 불교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자장율사가 분황사에 머물렀고, 원효는 이곳에서 《금강삼매경론》등의 저술 활동을 했다.[22] 원효는 자신을 '분황원효'라고 칭하기도 했다.
경덕왕 대에는 본피부(本彼部)의 나마(奈末) 강고(強古)가 30만 6,700근의 구리를 들여 거대한 약사여래상을 조성해 분황사에 안치했다는 기록이 있다.[37] 또, 《삼국유사》에는 분황사 좌전(左殿) 북쪽 벽에 그려진 천수대비 앞에서 향가를 부르며 기도했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는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도 있었다고 전해진다.[32][33][36]
분황사는 여러 차례 중건과 훼손을 겪었다. 고려 후기 몽골 제국의 침략과 조선 시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많은 유물이 소실되었다.[11][37] 현재 남아있는 모전석탑은 본래 7층 또는 9층이었으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아래 3층만 남아 있다. 1915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모전석탑이 수리되었는데, 이때 2층과 3층 사이에서 사리함이 발견되었다. 사리함 안에는 창건 당시의 유물 외에 고려 시대 이후의 동전도 발견되어, 고려 시대에 석탑이 개축되었음을 알 수 있다.[40][41]
분황사에는 신라 원성왕 때의 호국룡 이야기가 전해지는 삼룡변어정이라는 우물이 있다. 이 우물은 겉모양은 사각형, 우물 외부는 팔각형, 내부는 원형으로 설계되어 철학적인 사상을 담고 있다.
2. 1. 창건 설화 및 초기 역사
《삼국사기》에 따르면 선덕여왕 3년(634년)에 인평(仁平)으로 연호를 바꾸고 분황사가 완공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69] 분황(芬皇)이라는 이름은 '향기로운 임금' 즉 선덕여왕을 가리키며, '여왕(여제)의 사찰'로 해석될 수 있다.[69] 《삼국유사》에도 비슷한 기록이 있어, 종래의 연구에서는 분황사를 발원한 단월(檀越)은 선덕여왕으로 이해되어 왔다.《삼국사기》는 634년에 분황사가 완공(成)되었다고 한 반면, 《삼국유사》는 같은 해에 처음 지었다(始開)고 하여 기록에 차이를 보인다.[70] 이는 634년이 절의 완공 시기이며, 분황사는 진평왕(眞平王) 말기에서 선덕여왕 즉위 사이의 기간부터 공사에 착수한 상태였을 것으로 해석된다.[71] 즉, 선덕여왕이 분황사의 건립을 발원하고 착공하였다기보다는 진평왕 시대에 이미 창건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71]
2008년 12월 11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발굴 조사 결과, 분황사 석탑 남쪽 30.65미터 지점에서 중문터가 확인되었다. 이 중문은 전체 길이 12.63미터,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였다. 또한 분황사는 석탑과 금당, 중문이 모두 남북 일직선에 위치하는 전형적인 평지 가람 형식임이 밝혀졌다. 중문 터 양쪽으로는 동서 방향으로 이어지는 남회랑 터가 확인되었고, 분황사는 2중 회랑을 가진 복랑(複廊) 구조였다는 것이 밝혀졌다.[72] 분황사는 진흥왕 시절에 지어진 황룡사 바로 옆에 건축되어 황룡사지와 잇닿아 있다.[73] 서쪽에는 첨성대(瞻星臺)와 전내물왕릉(傳奈勿王陵)이 있고, 선덕여왕 자신은 사후 분황사 동쪽에 묻혔다.
이후 분황사는 황룡사와 함께 신라 불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선덕여왕 대에 당에서 귀국해 신라 승려들의 계율을 정한 자장(慈藏)율사가 분황사에 주석하였고,[22] 원효도 이곳에서 《금강삼매경론》(金剛三昧經論) 등을 저술하였으며, 《화엄경소》(華嚴經疏)를 짓던 중 제40회향품에 이르러 집필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원효가 창시한 해동종은 그가 주로 머물렀던 이곳의 이름을 따서 분황종(芬皇宗)으로 불렸으며,[27] 원효 자신도 그의 저서에서 자신을 분황원효(芬皇元曉)라고 소개하였다. 원효가 입적하고 나서 아들 설총(薛聰)이 유해로 상을 만들어 이곳에 봉안했으며, 설총이 나가려 하자 그 나가는 것을 돌아보는 듯 움직였다는 일화가 《삼국유사》에 전해진다.[25] 이 소상은 고려 시대까지 분황사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원효와의 인연으로 고려 숙종은 원효의 행적을 기록한 《화쟁국사비》를 세울 것을 명하기도 했다. 이 화쟁국사비는 이후 실전되고 비석을 받쳤던 비부만 남았는데, 조선 후기의 고증학자이자 금석학자 김정희가 분황사를 방문했을 때 비부에 적은 글이 남아 있다.
발굴 조사 결과 분황사는 모전석탑 하나를 세 채의 금당이 둘러싸고 있는 형태의 1탑 3금당식 가람 배치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경덕왕(景德王) 14년(775년)에 본피부(本彼部)의 나마(奈末) 강고(強古)가 306700근에 달하는 구리를 들여 거대한 약사여래상을 조성해 분황사에 안치했다는 기록이 있다.[37] 또, 《삼국유사》에는 한기리의 희명이라는 여자의 딸로 태어난 지 5년 만에 눈이 멀어버린 여자아이가 분황사 좌전(左殿) 북쪽 벽에 그려진 천수대비 앞으로 나아가 향가를 부르며 기도했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는 전설이 수록되어 있으며,[32][33] 신라의 화가 솔거가 그린 관음보살상도 있었다고 전해진다.[36]
신라에서 고려 중기로 이어지는 동안에 지어진 사찰의 많은 당우와 유물은 고려 후기 몽골 제국의 침략, 조선 시대의 임진왜란을 거치며 대부분 사라졌다.[11][37]
분황사의 금당으로 쓰이는 보광전은 조선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그 위치는 창건 당시 분황사 중금당(가운데) 부지의 오른쪽 모퉁이에 해당한다.
2. 2. 원효와 분황사
원효는 분황사에서 《금강삼매경론》, 《화엄경소》등을 저술하였다. 《화엄경소》는 제40회향품에서 집필을 그만두었다.[69] 원효가 창시한 해동종은 그가 주로 머물렀던 분황사의 이름을 따서 분황종(芬皇宗)이라고 불렸으며, 원효 자신도 저서에서 자신을 분황원효(芬皇元曉)라고 소개하였다.[69] 원효 입적 후, 아들 설총이 유해로 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봉안했으며, 설총이 나가려 하자 상이 돌아보았다는 일화가 《삼국유사》에 전해진다.[69] 이 소상은 고려 시대까지 분황사에 있었다고 한다.[69] 고려 숙종은 원효의 행적을 기록한 《화쟁국사비》를 세우도록 명했다.[69] 이 비석은 실전되었고 비부만 남았는데, 조선 후기 김정희가 분황사를 방문했을 때 비부에 적은 글이 남아 있다.[69]2. 3. 분황사의 영험 설화
신라 경덕왕 때, 희명(希明)이라는 여인이 다섯 살에 갑자기 눈이 먼 아이를 위해 분황사 천수관음에게 기도하자 아이의 눈이 나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68] 이 영험담은 “기도 천수대비가(禱千手大悲歌)”라는 노래로도 전해진다.[32][33][34][35]2. 4. 고려 및 조선 시대
고려 중기까지 지어진 분황사의 많은 당우와 유물은 고려 후기 몽골 제국의 침략과 조선 시대 임진왜란을 거치며 대부분 사라졌다.[11] 현재 분황사의 금당으로 쓰이는 보광전은 조선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창건 당시 분황사 중금당(가운데) 부지의 오른쪽 모퉁이에 해당한다.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잘라서 쌓은 모전석탑은 본래 7층 또는 9층으로 건립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파괴되어 아래 3층만 남아 있다. 우물인 삼룡변어정은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신라 원성왕 때의 호국룡 이야기의 무대가 되는 곳이다. 이 우물은 외곽 바탕은 사각으로, 우물 외부는 팔각으로, 내부는 원으로 설계되어 철학적인 사상을 담고 있다.
1915년 조선총독부는 반쯤 무너져 있던 중앙의 모전석탑을 수리하여 3층 석탑으로 복원하였다.[39] 석탑 수리 및 조사 당시, 2층과 3층 사이에서 사리함이 발견되었다. 석함 안에서는 창건 당시의 유물 외에 고려(918~1392년) 이후의 동전도 확인되어, 고려 시대 이후 석탑을 개축하여 다시 안치한 것으로 추정된다.[40][41] 발견된 석함과 유물은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 및 전시되어 있다.[42][40]
1990년(1991년[37])부터 2014년까지 현재 절터 안팎에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고,[16] 그 결과, 건립 당시 가람 배치는 남아있는 모전석탑을 중심으로 북쪽의 중금당, 동금당, 서금당을[22] “품(品)”자 형태로 배치한 1탑 3금당식이었음이 확인되었다.[16][44] 8세기 중엽(750년경)에는 중금당이 개축되었고,[22] 이후 여러 차례 재건을 거쳐 1탑 1금당식이 되었다.[37] 현재의 “보광전”에 해당하는 금당은 광해군 원년(1609년)에 건립되었다.[16] 보광전은 숙종 6년(1680년)에 개축되었고, 1998년에 해체 및 개축되었다.[44]
2008년 발굴 조사에서는 모전석탑 남쪽 30.65미터 지점에서 중문(中門)의 흔적이 확인되었다. 중문은 전체 길이 12.63미터,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중문, 석탑, 금당이 남북축 직선상에 배열되는 구조였다. 또한 중문 양쪽에서 동서로 뻗어나가는 남쪽 회랑은 2중 구조의 복랑(複廊)이었으며, 동서 전체 길이는 138.4미터였다.[45]
2. 5. 현대의 분황사
2008년 12월 11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주관 발굴 조사 결과, 분황사 석탑 남쪽 30.65미터 지점에서 중문터가 확인되었다. 이 중문은 전체 길이 12.63미터,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였다. 분황사는 석탑, 금당, 중문이 모두 남북 일직선에 위치하는 전형적인 평지 가람 형식이며, 중문 터 양쪽으로는 동서 방향으로 이어지는 남회랑 터가 확인되었다. 이를 통해 분황사가 2중 회랑을 가진 복랑(複廊) 구조였다는 것이 밝혀졌다.[72]1990년부터 2014년까지 절터 안팎에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진 결과,[16][37] 건립 당시 분황사는 모전석탑(模塼石塔)을 중심으로 북쪽에 중금당(中金堂), 동금당(東金堂), 서금당(西金堂)을[22] 배치한 1탑 3금당(塔三金堂)식 가람 배치였음이 확인되었다.[16][44] 8세기 중엽(750년경)에 중금당이 개축되었고,[22] 여러 차례 재건을 거쳐 1탑 1금당식이 되었다.[37] 조선 광해군 원년(1609년)에 현재의 보광전(普光殿)에 해당하는 금당이 건립되었으며,[16] 조선 숙종 6년(1680년)에 개축, 1998년에 해체·개축되었다.[44]
2008년 발굴에서는 모전석탑 남쪽 30.65미터 지점에서 중문(中門) 흔적이 확인되었다. 중문은 전체 길이 12.63미터, 정면 3칸·측면 2칸이며, 중문·석탑·금당이 남북축 직선상에 배열됨이 증명되었다. 중문 양쪽에서 동서로 뻗어나간 남쪽 회랑은 2중 구조의 복랑(複廊)으로, 동서 전체 길이는 138.4미터였다. 이는 최대 규모였던 황룡사(皇龍寺)의 176미터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규모였다.[45]
발굴을 통해 1,500점이 넘는 기와가 출토되었다.[37] 남쪽에 인접한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년) 창건(착공) 후, 신라 진평왕 6년(584년)에 금당을 건립하고, 신라 선덕여왕 14년(645년)에 목조 9층탑을 건립하였으나,[46][47] 분황사 출토 기와는 창건기로 여겨지는 고구려계 칠엽소변연화문헌(七葉素弁蓮華文軒)환와(丸瓦)가 공통되며, 같은 주형(鑄型)의 기와로 보이는 헌와(軒瓦)도 많아 대부분 같은 곳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황룡사 연화문헌환와 216종 중 분황사에서도 135종이 확인될 정도로 출토 기와 종류도 공통점이 많다. 창건기인 7세기 중엽까지 백제계(百濟系) 연화문헌환와 외에 초기 복변연화문헌환와 등 다양한 사용이 확인되었고, 중금당 개축 시기인 8세기 중엽까지도 보상화문(寶相華文)을 중심으로 다양한 통일신라(統一新羅) 시대 헌환와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48]
3. 주요 유물 및 문화재
분황사 경내에는 다양한 유물과 문화재가 남아있다.
| 종목 | 명칭 | 시대 | 지정일 | 비고 |
|---|---|---|---|---|
| 국보 제30호 |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 신라 | 1962년 12월 20일 | |
|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 | 분황사 화쟁국사비부 | 1979년 1월 25일 | ||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 | 분황사 석정 | 1985년 8월 5일 | ||
|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9호 | 분황사 약사여래입상 | 1996년 5월 14일 | ||
| 보물 | 분황사 당간지주 | 통일신라 | 2021년 11월 23일 |
이 외에도 신라 시대부터 남아 있는 깃대꽂이가 주목할 만하다.
3. 1.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국보 제30호)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은 국보 제30호로 1962년 12월 20일에 지정되었다. 신라에서 가장 오래된 탑으로, 원래 9층이었다고 하나 현재는 3층만 남아있다.[2] 당나라의 탑을 본떠 만들었지만, 벽돌 대신 벽돌처럼 다듬은 검은 안산암을 사용했다.[1][2] 각 층은 위로 갈수록 크기가 작아지며, 지붕은 벽돌을 계단식으로 쌓아 만들었다.

탑신의 1층 네 면에는 문이 있고, 각 문 양쪽에는 인왕상(仁王像)이 불법(佛法)을 수호하고 있다.[1][2] 탑 기단 각 모서리에는 사자상이, 탑 주변에는 화강암 연꽃이 장식되어 있다.[2]
1915년 일본인에 의한 발굴 및 부분 복원 과정에서 2층과 3층 사이에서 사리함이 발견되었다. 사리함에는 승려의 화장된 유골과 함께 금, 돌 장식, 동전, 가위, 바늘 등 귀중한 유물들이 들어 있었다. 이는 왕족 여성, 어쩌면 선덕여왕이 이 물건들을 소유했음을 짐작하게 한다.[1]
백제 미륵사 석탑과 비교되기도 하지만, 분황사탑은 목조 건축 양식을 모방한 미륵사 석탑과는 다른 특징을 보인다.[2]
3. 2. 분황사 화쟁국사비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
고려 숙종의 뜻에 따라 1101년에 세워진 화쟁국사의 비석 받침대이다. 현재는 원래의 글씨가 새겨진 비석은 남아 있지 않다. 이 비석은 1597년(선조 30년) 사찰이 파괴될 때 함께 파손되어 비석 받침대만 남게 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사찰을 방문했던 추사 김정희의 역사 연구를 통해 원효가 세운 비석임이 밝혀졌다.[4]경주 분황사 화쟁국사비부는 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 제97호로 1979년 1월 25일에 지정되었다. 숙종 6년(1101년)에 원효의 시호 "화쟁국사"와 함께[55] 봉안한 비석의 대좌(비석 받침)이다.[56] 비신(비석의 몸체)은 없어졌는데, 선조 30년(1597년)에 사찰이 소실될 때 파괴된 것으로 추측된다.[57] 후에 김정희(1786-1856년)의 식별에 의해 화쟁국사의 비석 받침대에 새겨진 글씨임이 밝혀졌다.[58]
3. 3. 분황사 석정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로 지정(1985년 8월 5일)된 분황사 석정한국어은 분황사 경내에 있는 신라시대 우물이다. 외부 높이는 0.7m이며, 외부는 팔각형, 내부는 원형으로, 불교의 팔정도나 원융 사상을 나타낸다고 여겨진다.[59] 이 우물은 "삼룡변어정"(삼룡변어정한국어)[11] 또는 "호국용변어정"(호국용변어정한국어)[59]이라고도 불린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원성왕 11년(795년) 당나라 사절이 신라를 지키는 세 용을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통에 넣어 돌려보냈는데, 이후 동지(東池)와 동천사의 샘인 청지(淸池)에 사는 두 용의 아내가 왕에게 당나라로 끌려간 남편(두 용과 분황사 우물의 용)의 구출을 요청했고, 왕이 조치하여 세 용을 데려왔다고 한다.[60][61]3. 4. 분황사 약사여래입상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9호)
조선 영조 50년(1774년)에 조성된 불상이다.[63] 분황사 약사전인 “보광전”[64]에 안치된 약사여래상은 높이 3.5m의 최대 규모의 금동불 입상이다.[62] 왼손에 든 약병 뚜껑 안쪽의 명문으로 영조 50년(1774년)으로 추정되지만,[63] 1998년 보광전 해체 수축 당시 발견된 자료에 의해, 앞선 광해군 원년(1609년)에 5360근의 동으로 처음 조성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원래 분황사에 봉안되었던 약사불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62]3. 5. 분황사 당간지주 (보물)
경주 분황사 당간지주(慶州 芬皇寺 幢竿支柱|경주 분황사 당간지주중국어)는 대한민국의 보물이다. 2021년 11월 23일에 지정되었다.[65] 1985년 10월 15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2호(경주 구황동 당간지주)로 지정되었다가 보물로 승격되었다. 당간(幢竿)은 불교 행사 때 절의 문 앞에 꽂는 깃발(당)을 세우는 기둥이며, 당간지주는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하는 한 쌍의 돌기둥이다.[66] 높이는 3.55m이다.[8] 좌우 돌기둥 사이에 놓인 간대석(竿臺石)은 거북 모양을 하고 있으며, 지주의 조성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초기의 것으로 추정된다.[65]참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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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분황사 모전석탑 (慶州 芬皇寺 模塼石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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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 화쟁국사 비부(芬皇寺和諍國師碑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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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삼국유사 卷第四
국사편찬위원회
2023-03-31
[24]
서적
(서적 제목 없음)
1988
[25]
서적
(서적 제목 없음)
1988
[26]
서적
(서적 제목 없음)
2013
[27]
웹사이트
元暁
https://kotobank.jp/[...]
2023-03-31
[28]
서적
(서적 제목 없음)
1986
[29]
서적
(서적 제목 없음)
2013
[30]
웹사이트
삼국유사 卷第三
국사편찬위원회
2023-03-31
[31]
서적
(서적 제목 없음)
1988
[32]
서적
(서적 제목 없음)
2019
[33]
서적
歴史探訪 韓国の文化遺産
「歴史探訪 韓国の文化遺産」編集委員会
2016
[34]
서적
(서적 제목 없음)
2016
[35]
웹사이트
도천수관음가(禱千手觀音歌)
https://encykorea.ak[...]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03-31
[36]
서적
東、田中 (1988)
[37]
서적
「歴史探訪 韓国の文化遺産」編集委員会 (2016)
[38]
서적
三国遺事 巻第三
국사편찬위원회
202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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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秦 (1973)
[40]
웹사이트
芬皇寺石塔舎利具
https://gyeongju.mus[...]
국립경주박물관
2023-03-31
[41]
서적
東、田中 (1988)
[42]
서적
秦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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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東、田中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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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분황사(芬皇寺)
https://encykorea.ak[...]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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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경주 분황사지 중문터 확인…최대사찰 황룡사 규모
https://news.imaeil.[...]
2023-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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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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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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塼塔 - 中国の陶芸建築
鹿島出版会
[51]
웹사이트
塼塔
https://kotobank.jp/[...]
202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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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 30호 분황사석탑(芬皇寺石塔)
http://www.kjsilla.r[...]
신라문화유산연구원
2023-03-31
[53]
웹사이트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慶州 芬皇寺 模塼石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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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청
202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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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秦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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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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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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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 화쟁국사 비부(芬皇寺和諍國師碑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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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202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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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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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사이트
분황사석정(芬皇寺石井)
http://www.heritage.[...]
문화재청
202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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曺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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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新羅の龍神・龍王
http://npokokusaibun[...]
国際文化財研究センター
2023-03-31
[62]
웹사이트
경주 분황사 금동약사여래입상(慶州 芬皇寺 金銅藥師如來立像)
https://www.heritage[...]
문화재청
2023-03-31
[63]
웹사이트
분황사약사여래입상(芬皇寺藥師如來立像)
http://www.heritage.[...]
문화재청
2023-03-31
[64]
서적
東、田中 (1988)
[65]
웹사이트
경주 분황사 당간지주(慶州 芬皇寺 幢竿支柱)
http://www.heritage.[...]
문화재청
2023-03-31
[66]
웹사이트
경주구황동당간지주(慶州九黃洞幢竿支柱)
http://www.heritage.[...]
문화재청
2023-03-31
[67]
서적
송고승전
[68]
웹인용
백성들의 소리를 들어주는 관세음보살 10. 도천수대비가(禱千手大悲歌)
http://m.srbsm.co.kr[...]
서라벌신문
2023-04-26
[69]
논문
분황사 석탑 연구
영남대학교 미학미술사학과
[70]
서적
총설 야쿠시지의 창립과 이전
도쿄 이문출판(理門出版)
[71]
논문
분황사 창건의 정치, 경제적 배경
신라문화제학술논문집
1999
[72]
뉴스
경주 분황사지 중문터 확인…최대사찰 황룡사 규모
http://www.imaeil.co[...]
매일신문
2008-12-11
[73]
논문
(제목 미상 - 맥락상 김준영의 논문으로 추정)
[74]
간행물
경주 분황사지 국가지정문화재〈사적〉 지정
http://gwanbo.mois.g[...]
문화재청
2019-0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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